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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8일 욱리하 활동보고
일시 : 2012년 9월 8일(토) 오전 9시00분~12시 30분
장소 : 잠실대교 남단 다리밑 집결~서빙고터~서빙고나루터~천일정터~동재기나루터~미타사~독서당터~제천정터
참가학생 : 김대원, 김어령, 김어진, 송희섭, 장정후, 위영범
1) 서빙고나루터
서빙고 나루터는 한양과 삼남지방(충청도, 전라도, 경상도)를 이어주는 역할을 했던 나루터입니다. 또한 강변에서 잠실리로 건너가려면 서빙고 나루터를 이용해야 했기 때문에 조선시대와 6.25 전쟁 때도 많은 사람들이 이용했습니다. 이 나루터 때문에 ‘나루터길’ 이라는 도로명이 생겼습니다. 서빙고 나루터가 있던 자리에는 현재 반포대교가 놓여져 있습니다. 서빙고 나루터는 사람들과 물품들을 한강을 통해 옮기는 교통로의 역할을 했습니다. 그로 인해 나루터 주변에는 항상 사람들과 물품들이 많았습니다. 서빙고 나루터가 있던 곳은 용산구 서빙고동의 도선장입니다. 주변에 얼음을 보관하던 창고가 있었습니다. 이곳에 남한강의 세곡선이 정박하기도 했으며 조선 후기에 한강 나루에서 사고가 많이 일어나자 서빙고 나루로 옮기자는 얘기도 있었습니다.
● 서빙고동
반포대교 북단의 한강변에 위치한 서빙고동은 조선시대에 얼음을 저장하는 창고가 있어 동명이 유래되었습니다. 서빙고(西氷庫)는 조선 태조5년(1396)에 예조에 소속된 얼음 창고로 둔지산 산기슭에 설치하여 겨울에 한강물이 4촌(寸)이상 얼었을 때 채취하여 저장하였습니다. 빙고의 얼음은 매년 음력 3월∼9월까지 궁중의 수라간에 바치거나 고위관리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이곳에는 볏짚으로 지붕을 이은 움집의 빙고 8동(棟)이 있었는데 서빙고가 동빙고보다 훨씬 규모가 커서 4촌 이상의 얼음 저장할 수 있었고, 얼음을 저장할 때나 개빙(開氷)할 때에는 빙신(氷神)인 현명(玄冥)에게 제사를 지냈습니다.
서빙고가 있었던 자리는 현재 서빙고초등학교에서 서빙고파출소가 위치한 일대이며 동·서의 두 빙고는 고종 31년(1894)까지 존속하였다가 폐지되었는데 광복 이후 6·25전쟁 전까지만 해도 옛 빙고를 변형시킨 민가의 '곳집' 형태가 눈에 뜨이었습니다.
서빙고동 강변에서 잠실리로 건너가던 서빙고나루터는 조선시대는 물론, 6.25전쟁 때도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였습니다. 그리고 서빙고동과 동빙고동 사이의 골짜기는 도성 안으로 들어가는 길목이어서 서울골짜기라고 불렀으며, 이 골짜기에는 열녀문(烈女門)이 있었다고 전합니다.
전 서빙고동사무소(서빙고동 199-4) 부근에는 창회정(蒼檜亭)이 있었는데 조선초에 수양대군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자주 놀러 다녔던 곳이며 한명회·권남을 만나 대사를 논의하였습니다.
현재 서빙고동 199번지에 있는 부군당은 이곳에서 300m 떨어진 언덕에 있었으나 80여 년 전에 일제가 군사훈련장으로 사용함에 따라 이전하게 되었습니다. 이 부군당은 조선 태조 내외분을 주신으로 모시고 있으며 서울시 민속자료 제2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부군당 내부에는 태조 내외분과 삼불제석(三弗帝釋)의 무신도가 있으며 5개의 현판이 있습니다.
2) 서빙고터
조선시대에 얼음의 채취·보존·출납을 맡아보던 관아로서, 현재의 용산구 서빙고동의 도선장(渡船場)입니다. 본래 두모포(豆毛浦)에 있었던 동빙고와 더불어 얼음을 보관하던 창고가 있었던 곳입니다. 빙고에 저장된 얼음은 궁중에서 주로 종묘(宗廟) · 사직(社稷)의 제사에 이용되었습니다. 이곳은 국가에서 관리하는 진도(津渡)가 아니었고 교통도 번잡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선(私船)이 두세 척 있어서 선가(船價)를 받고 건네주었습니다. 진선 5척이 있었다고 하나 그 운영상은 자세히 알 수 없습니다. 이곳에 남한강의 세곡선이 기착하기도 하였습니다.
조선 후기에 한강나루에서 사고가 많이 일어나자 서빙고 나루로 이설하고자 한때도 있었습니다. 강 건너 동작진과 마주합니다. 저장 얼음은 13만 4974정(丁)에 이르러 이 얼음은 궁중 내의 각 전(殿)과 관아에 공급하고 또한 백관(百官)에게 벼슬에 따라 차이를 두어 배급하였습니다. 빙고의 운영에는 많은 인력과 비용이 필요하였습니다. 빙고 관리를 위한 인부, 곧 빙부(氷夫)는 동빙고에 10명, 서빙고에 40명을 두었으며, 이들에게는 빙고전(氷庫田) 혹은 빙부전(氷夫田)이라는 이름으로 1결(結)씩의 관유지(官有地)를 지급하고 그 토지에는 조세를 부과하지 않았습니다. 얼음의 채취, 빙고의 수리 등에 드는 갖가지 비용은 빙미조(氷米條)를 운영하여 충당하였습니다.
처음 동서 빙고는 나무를 재료로 한 목빙고 였으며, 갈대 ․ 솔가지 ․ 짚 등을 이용하여 얼음을 보관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런 구조는 매년 얼음을 저장할 때마다 보수를 해야 했고 얼음도 빨리 녹아 아무래도 비효율적이었으며, 보수할 경우 그 비용과 노동력을 경기지방 백성들이 부담해야 했으므로 민폐 또한 적지 않았습니다. 이 때문에 세종 2년(1420)에는 동서 양 빙고가 석빙고로 개조되었으며 이후 이것이 빙고의 일반적인 형태가 되었습니다. 그밖에도 고관들의 집에는 하사받은 얼음을 보관하기 위해 어떤 형태로든 빙고가 있었을 것이고, 18세기 영 ․ 정조 이후 상업이 발달함에 따라 한강변을 비롯한 전국 여러 곳에 생선 보관용 얼음을 공급하던 사빙고(私氷庫)가 존재했습니다. 그러나 민간에서 만든 빙고는 현재까지 전하는 것이 하나도 없고, 다만 국가기관에서 운영하던 관영의 빙고, 그것도 돌을 이용하여 축조한 석빙고(石氷庫)만이 몇몇 남아 있어 이를 통해 그 형태와 구조를 살펴볼 수 있을 따름입니다.
1396년(태조 5)에 동빙고와 함께 설치되었으며, 동빙고와 함께 1896년(건양 1)에 폐지되었고 목조로 축조된 관아는 내구성이 적어 지금은 남아있지 않습니다.
● 이촌동
한강대교 북쪽, 한강변 좌우에 위치한 이촌동은 조선말까지도 모래벌판이었습니다. 그래서 여름에 큰 장마가 지면 강 가운에 섬을 이루고 살던 사람들이 홍수를 피해 강변으로 옮겼던 관계로 동명도 移村洞으로 불려지다 일제 때, 二村洞으로 개칭되었습니다.
이촌동에서 노량진으로 이어지는 한강대교 중간에는 노들섬(구 중지도)이 있습니다. 이 섬은 전에 납천정리라고 했는데, 이는 이 마을 물맛이 좋은 우물이 있어서 이 우물을 관중에 상납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이 마을은 한강대교가 가설되면서 폐동되고 우물도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현재 노들섬은 체육공원으로 가꾸어져 있고, 한강에서 낙하산 훈련 중 동료를 구하고 추락사한 이원등 상사의 동상이 세워져 있습니다.
3) 한강진나루(漢江鎭津)와 한남대교
한강진 나루터는 한남동과 사평나루(지금의 강남구 신사동)을 잇는 나루터입니다. 조선시대 한강나루의 풍경 조선시대 제1의 도선장(渡船場)으로 옛날에는 '한강도(漢江渡)'라고 하였으며, 서울에서 용산․충주로 통하는 큰 길의 요충지였습니다. 신라 때는 이곳에서 큰 제사를 지내기도 했으며, '북독(北瀆)'이라 하였습니다. 고려시대에는 '사평도(沙平渡)' 또는 '사리진(沙里津)'이라고 하여 나룻배를 배치하여 교통의 편의를 도모하고 중요한 나룻터로 지목되었으며, 조선시대에는 초기부터 말기까지 중요한 나루터로서 송파, 노량과 더불어 삼진(三津)의 하나였습니다. 조선시대 때 한강진에는 10척에 나룻배가 있었는데 세종 때 삼전도(나중에 송파진)가 신설되면서 배 1척이 삼전도로 옮겨져 9척이 운행되고 있었습니다. 연산군은 통행의 안전과 편의를 도모하기 위해 이곳에 부교(배를 연달아 이어서 강 양쪽을 연결하는 다리, 일명 배다리)를 설치하였습니다. 조선 후기에 부교는 철거되고 다시 나룻배가 운행되었습니다. 예전에는 서울의 남산 남쪽기슭인 지금의 한남동 앞의 강을 한강이라 하였고, 이곳의 나루를 한강도라 하였습니다. 오늘날 한강의 의미는 일반적으로 시점에서부터 물줄기의 끝까지로 인식되고 있지만 조선시대에는 이곳을 한강이라 하였습니다.
도성에서 남소문을 나서면 바로 한남동의 한강마을이었기 때문에 수도 방위상 매우 중요한 곳으로 일찍부터 별감을 파견하여 사람들의 통행을 기찰하고 통행의 편의를 도모하였습니다. 조선후기에는 군사적으로도 중요한 지점이어서 이곳에 진(鎭)을 설치하여 관리하였습니다.
● 한강진 앞에서 눈물을 흘렸던 공민왕
공민왕은 고려 때 자주 개혁운동을 펼쳤던 왕입니다. 공민왕은 원나라로부터 고려를 지키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공민왕이 왕위에 등극한지 얼마 안 되었을 때(1361년) 홍건적 10만여 명이 압록강을 건너 고려로 침략해왔습니다. 이에 고려군은 홍건적을 막지 못하고 후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수도인 개경까지 위험해지자 공민왕은 왕족과 신하들을 이끌고 한강진을 건너 남쪽으로 피신했습니다. 이 때 공민왕은 사평원(지금의 강남구 신사동)을 바라보며 “언제 다시 이 나루(한강진)를 건널 것인가” 하고 울면서 탄식했습니다.
● 한남동
한남동의 위치는 동쪽으로는 중구와 접하고, 서쪽으로는 이태원동과 보광동을 접하며 서북쪽으로는 남산을 주산으로 하는 매봉산과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남쪽은 한강을 경계로 한 아름다운 강경을 바라볼 수 있고, 현 한남로는 한남동을 양분시키고 있고 이 길은 한남대교와 연결되어 남쪽의 고속도로로 달릴 수 있습니다.
한남동 726 번지 한남초등학교와 해병대 군악대가 주둔하고 있는 곳을 예전에는(능터골)이라고 했는데 이곳은 조선시대 때 능터로 미리 정해놓은 자리라 헤서 그렇게 불려졌다고 합니다. 또 부근에는 남산 밑에 살던 두 장사가 큰 바위돌을 들어다가 놓은(마습다리)라는 다리가 있었는데, 일제 때 조계사에서 가져가 비석을 만드는 바람에 없어졌다고 합니다.
지금의 단국대학교 맞은편 산마루턱에 화경대(華鏡臺, 蒙鷗亭)라는 정자가 있었는데 이곳은 강변의 산으로(화경골 뒷산)이라고도 불렀습니다. 화경(華鏡)이라는 말은 거울처럼 맑은 한강수를 비유한 뜻으로 불렀으니 달 맑은 달빛을 받아 은빛으로 흐르는 한강수는 과연 신비경이었습니다.
지금의 북한남동 골짜기에는 옛날에 몽상사(夢常寺)라는 절이 있었고 이 골짜기를 (몽상사골)이라고 하였습니다. 한남동에서 약수동으로 넘어가는 다산로(茶山路) 고개를 (버티고개)라고 하는데 옛날에 순라군들이 야경을 돌면서 (번도)라 하며 도둑을 쫓았다고 합니다. 옛날에는 이곳 길이 좁고 왕래하는 사람이 없어서 도둑이 들끓었으므로 얼굴 모양이 험악하고 마음씨가 곱지 않은 사람을 보면 (밤중에 버티고 개에 가서 앉을 놈)이라는 농담을 했다고 합니다.
예전에 한남동에서 용산쪽으로 가는 산부리에 있는 마을을 (용산부리)라고도 했는데 현재 북한남동에 해당합니다. 또한 한강 강변으로 나가면 느티나무 뒤 (언더우드)별장터가 있는데 세심대(洗心臺)라고 했습니다.
4) 천일정터
남산 연맥이 동남쪽으로 뻗어나가 한강으로 이어 닿는 강안, 용산구 한남동 459번지에 있었으며 이곳에는 고려시대의 절이 있었습니다.
황희(黃喜)의 손자사위이며 성종 때의 문신인 서석(瑞石) 김국광(金國光, 1415∼1480)이 처음으로 정자를 지었으며 그 후 오성부원군 이항복(李恒福, 1556∼1618)의 소유가 되었습니다.
정자의 이름은 당나라 왕발(王勃)의〈등왕각(藤王閣)〉 서문에 있는 ‘추수공장천일색(秋水共長天一色)’의 구를 취하여 이름 하였다 합니다.
그 후 두세 차례의 변천이 있은 다음 한때 민영휘(閔泳徽, 1852∼1935)의 소유가 되었습니다.
3,000㎡나 되는 넓은 터전에 동쪽으로 아늑한 안채가 있고 정남향으로 조금 높은 터에 청원당(淸遠堂)이란 현판이 걸린 중사랑이 있었으며 중사랑보다 조금 낮은 터에 강을 발아래로 내려다보고 바깥사랑채 격인 천일정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한강변 높은 곳에 축대를 쌓고 ㄱ자형 평면으로 배치하였으며 앞쪽으로 돌출된 누의 아래로는 사각 장초석을 세웠고 팔작지붕을 하였었습니다.
이 터에는 고려시대의 절터이던 것을 말하여 주기나 하는 듯 중사랑 넓은 뜰에 강화도에서 나는 쑥돌 화강암 연못이 있었습니다. 그 길이가 가로 2.1m, 세로 1.8m에 깊이가 0.8m나 되는 큰 돌 연못입니다. 그 모서리 둘레를 모지지 않게 다듬은 솜씨로 보아 고려시대의 유물로 감정할 만큼 희귀한 유물이었습니다. 이것이 어쩌면 고려 시대의 절터였던 증거물이 아니었나 싶기도 합니다.
천일정은 그 이름과 그 뜻에 알맞게 맑은 날이면 한강의 물빛과 저 멀리 하늘 끝까지 파아란 하늘빛이 서로 어울리는 풍경을 훤하게 건너다 볼 수 있었던 별장이었습니다. 압구정, 남한산, 잠실, 잠원들, 청계산, 관악산까지 바라다 보이는 광활한 경관은 사시사철 색다른 가관이어서 비 오는 날의 풍경은 우경대로, 눈 덮인 날의 설경은 설경대로 운치가 돋보이던 별장이었습니다. 천일정 그 북쪽으로 일찍이 침류당이라는 별장도 있었다고 합니다. 경력(經歷) 벼슬을 산 이사준(李師準)의 개인 별장으로『신증동국여지승람』 제3권 누정조에 당대 유명인들의 시문까지 실려 전하는 것을 보면 꽤나 운치가 있던 집이었던 걸로 보입니다. 멀리 강 건너 압구정이 바라보이던 곳으로 1950년 6·25전쟁시 폭격을 맞아 없어졌고 지금은 그 부근에 한남대교가 놓여 있습니다.
5) 두뭇개나루터
두뭇개 나루터는 현재 성동구 옥수동에 있었던 도성에서 동남쪽에 있었던 작은 나루입니다. 두뭇개 나루터는 한강나루의 보조나루였습니다. 두뭇개 나루터는 동쪽에서 흘러오는 한강의 본류와 북쪽에서 흘러오는 중랑천의 물이 합류되는 지점이었습니다. 그래서 두 물이 서로 어우러진다는 의미로 두뭇개라는 이름이 붙었습니다. 원래 이름은 두모포(豆毛浦)입니다. 현재의 성동구 옥수동 옥정초등학교 일대의 낮은 지대로 상류로부터의 각종 물자 특히 고추, 마늘, 감자, 고구마 등의 농산물과 목재, 장작이 집산하는 곳이었습니다. 또한 동네 앞에 한강이 호수같이 자리하고 있다고 하여 동호(東湖)라고도 했습니다. 배가 강변에 접근하기 용이하여 옛날부터 나룻배가 운행되었습니다. 강 건너 강남구 압구정동 방면으로 갈 때 이용되는 교통수단이었습니다. 조선시대 때 이곳은 조운의 편의를 위한 나루터로 이용되었습니다. 경상도, 강원도 지방에서 남한강을 경유하여 오는 세곡선들이 두뭇개 나루터에 집결하곤 했습니다. 또한 두뭇개 나루터에 빙고(氷庫)가 설치되면서 얼음을 나르는 배들이 집결되기도 했습니다. 두뭇개 나루터 인근 지형은 높은 산이 솟아 있고 앞에는 한강물이 호수처럼 흘러 예전부터 경치 좋은 곳으로 알려져 왔습니다. 그래서 왕들이 이 근처에 정자를 짓고 경치를 즐겼습니다. 중종 때는 이곳에 독서당을 지어 젊은 선비들이 연구에 집중하게 했습니다. 원래는 저습지였기 때문에 사람들이 별로 살지 않았던 곳입니다. 이곳에 상업기지가 조성되면서 어물, 목재, 시탄, 얼음 등과 고추, 마늘, 감자 등을 대상으로 도고활동을 벌이게 되자, 정조 13년에 두모포의 인구는 약 4,000명이 되었습니다. 세종 원년(1419) 6월에 대마도를 정벌할 때 세종과 태종이 친히 두모포로 나와 이종무 등 여덟 장군을 보내며 잔치를 베풀었다고 합니다. 현재 이 나루터에는 옛 이름을 딴 동호대교가 설치되어 있습니다.
● 윤원형의 죽음을 암시한 물고기
조선시대 명종이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습니다. 하지만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그의 어머니인 문정왕후가 대신 정치를 했습니다. 그에 따라 문정왕후에게 엄청난 권력이 쥐어졌고 따라서 문정왕후의 가족도 엄청난 권력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대표적인 인물이 문정왕후의 친동생인 윤원형이었습니다. 윤원형은 첩이 있었는데 그녀의 이름은 ‘정난정’ 이었습니다. 난정은 매년 2~3번 씩 두모포에서 물고기에 밥을 주며 복을 빌곤 했습니다. 어느 날, 두모포에서 어부 한 명이 큰 물고기 한 마리를 잡았는데 크기가 배(舟)만 하였습니다. 사람들은 그 물고기를 보고 윤원형이 곧 죽을 징조라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윤원형의 형(衡)은 행(行) 자와 어(魚) 자가 합쳐진 말인데 큰 물고기가 한강에서 와서 죽은 것이 이름과 유사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실제로 며칠 후 문정왕후가 죽었고 때문에 권력을 잃은 윤원형도 곧 죽음을 당하였습니다.
● 쌍호정터
옥수동 295번지에 있었으며 풍은부원군 조만영의 집이었습니다. 순조 8년(1808년) 12월 6일 조대비(추존왕 익종의 비)가 이곳에서 출생하였는데 출생하던 날 밤에 두 마리의 호랑이가 정자 앞에 와 있었기 때문에 그로 인하여 쌍호정이라 하였습니다. 조대비 생가 동쪽에 울창한 노송들이 있었고 그 옆에 있었던 조그마한 정자가 쌍호정입니다.
● 무동도(저자도)
삼성동 동쪽 한강 가운데 있는 섬입니다. 고려시대부터 명승지로 주목을 받아 왔던 저자도는 현재의 압구정동과 옥수동 사이의 한강 중간, 중랑천과 한강 본류가 만나는 지점에 있었습니다. 서울 도성 안을 서에서 동으로 흐르는 청계천이 동대문 밖을 지나 마장동(馬場洞)과 사근동의 동쪽 변두리를 스쳐 남쪽으로 흐르다가 사근동 동남쪽 모퉁이쯤에서 양주 땅에서 흘러 내려오는 중랑천과 합류되어, 다시 서남으로 꺾이면서 한강으로 접어드는 유력으로 생겨난 삼각주가 바로 저자도였습니다. 옛날에 닥나무가 많이 있으므로 저자도로 불리던 이 섬은 멀리서 보면 아이가 춤추는 모습을 닮았다 하여 무동도(舞童島)라고도 하였습니다. 아름다운 경치로 유명해 옛부터 많은 문인이 이곳을 찾아 노래하였고, 조선시대는 기우단이 있어서 날이 크게 가물면 나라의 정`종 이품관이 와서 기우제를 지내는 곳이기도 했습니다. 현재는 무분별한 골재 채취로 아쉽게도 약간의 흔적만을 볼 수 있으나 1930년경만 하더라도 이 섬의 크기는 동서의 길이 2,000m, 남북이 885m로 118만㎡의 면적을 갖고 있었습니다. 고려 때나 조선 시대에는 봉긋한 등성이도 있었고 넓은 밭과 집들도 들어선 특유한 섬 풍경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맑은 한강이 둘러있고 흰 모래, 무성한 갈대, 울창한 수목이 가득하여 경치가 매우 좋았으므로 고려 말기에 공신 한종유(韓宗愈)는 여기에 별장을 지어 그 노후를 보냈고, 조선시대에는 세종이 둘째딸 정의공주에게 이 섬을 하사하여 공주의 아들 안빈세(安貧世)에게 대물림하게 했습니다. 이 저자섬은 정의공주의 시가인 안씨 집안에서 보유하다가 조선 말기에 이르러서는 철종의 부마인 금릉위(錦陵尉) 박영효(朴泳孝)에게 하사됩니다.
역대의 명소요, 승지며 실록의 장(場)이기도 했던 저자도가 1925년 이른바 을축년 대홍수로 풍경은 잃어버린 채 모래와 자갈만 쌓이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것이 1970년대에 들어와 강남지역의 무분별한 개발로 모래와 자갈마저 건설업자들에게 빼앗겨 흔적마저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러나 자연의 힘을 꺾을 수는 없는 일인가. 시간이 지나면서 섬의 모습이 다시 나타나고 있습니다. 중랑천과 한강이 만나는 지점에 삼각주 꼴의 모래섬이 물 위로 조금씩 부상하고 있습니다.
● 미타사
미타사(彌陀寺)는 서울특별시 성동구 옥수동 395번지 종남산에 자리한 대한불교 조계종 제1교구인 조계사의 직할사찰로 달맞이봉 아래 위치해 있습니다. 원래는 종남산(終南山) 동족 기슭에 있는데 옥수동에 있던 메주가마를 자하문 밖으로 옮겨가매 사람은 적고 도둑이 많으므로 절을 이곳에 옮기고 절 이름을 종남산 미타사라고 고쳤습니다. 또 두뭇개(豆毛浦)에 있으므로 두뭇개승방이라고도 하였습니다. 고 이승만 대통령이 자주 다녔다고 합니다.
6) 독서당터(讀書堂址)
옥수동에서 약수동으로 넘어가는 고개를 ‘독서당 고개’라고 하는데 그 까닭은 고개 밑에 독서당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옥수동의 청정가려(淸淨佳麗)한 지리적 조건으로 조선 전기부터 산수풍경을 좋아하는 많은 문인 묵객들이 누정을 짓고 여가를 즐겼습니다. 특히 학문 연구를 조장하기 위하여 국가에서는 젊은 학자들을 이곳에 사가독서(賜暇讀書)하도록 두뭇개 남안에 독서당을 지어 200여 년 간 존속되었습니다.
조선시대의 독서제도는 한 특권층에게만 해당된 것이 아니라 신분에 따라 그 명칭도 다양하였습니다. 즉, 왕에게는 경연, 세자는 서연, 문신에게는 사가독서, 잡직 종사자는 습독관제도를 두고 독서를 통하여 인격과 전문성을 향상시키는 계기를 마련하였습니다.
경연이란 왕이 경연관을 두고 강독하는 것으로 특별한 일이 없으면 날마다 독서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으며, 아침에 강독하는 것을 조강, 낮에 실시하는 것을 주강, 저녁에는 석강, 그 밖에 밤에 문신들을 불러 독서 토론하는 것을 야대라 하였습니다. 서연은 세자가 서연관들과 강독하는 것으로 과목은 왕과 마찬가지로 유가서와 역사서 등을 주로 읽었습니다. 사가독서는 문신들의 자질향상을 위해 왕이 그들에게 일정기간동안 휴가를 주어 글을 읽도록 한 제도로서 대상자는 문관 중에서 그 혜택을 받았습니다. 습독관제도는 잡직에 종사한 자들 중에서 발탁하여 그들의 전문성을 양성하는 제도입니다. 즉, 무관에게 주어진 무경습독관, 의사에게 주어진 의서습독관, 승문원의 이문습독관, 사역원에서는 한학습독관, 관상감은 천문학습독관, 장악원의 예악습독관 등이 대표적입니다.
독서당이 있던 곳은 옥수동 244번지 동쪽인데 독서당이 폐지된 후에는 부군당(府君堂)이 세워져 그 앞에 ‘공부자도통고금연원기념비(孔夫子道統古今淵源記念碑)’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있었으나 현재는 대신 주택이 들어섰습니다. 즉 응봉산 아래 정남향 언덕 위인 월송암(月松庵) 서쪽이 독서당 위치입니다.
원래 독서당은 세종 8년(1426) 집현전 학자들에게 창의문 밖에 있는 장의사(藏義寺)를 하사하여 그들에게 휴가를 줘 사가독서 하도록 한 것이 그 효시였습니다. 그러나 독서당 제도를 본격적으로 실시한 것은 성종 23년(1492)에 독서 면학하기에 가장 적당하다고 인정되는, 인가가 한적한 용산 청암동에 있는 절을 수리하여 마련하면서 부터였습니다.
「절간이 남문 밖 귀후서(歸厚署) 뒷 언덕에 있었는데 옛날부터 16나한의 영험이 있다고 하여 불공(香火)이 끊이지 아니 하였다. 승(僧) 상운(尙雲)이 그 집에 살면서 아내를 얻어 아들을 낳으니 사헌부에서 탄핵하여 중을 처벌하고 속인(俗人)이 되게 하였다. 그리고 불상을 흥천사(興天寺)로 옮기며 그 절을 홍문관에 주어서 학자들이 번갈아 가며 글을 읽게 하고 그 집을 독서당이라고 하였다.」
위의 글로 보아 용산의 절을 독서당으로 개편하여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용산 독서당은 12년이 지난 연산군 10년(1504)에 갑자사화로 성균관 · 원각사와 함께 폐쇄되었으나 중종반정을 계기로 학문을 일으키려는 움직임이 활발하여 홍문관의 재개와 사가독서의 제도가 중종 5년(1510)에 다시 시작되었는데 이 때 독서당을 용산의 옛 건물을 개수하여 사용하자는 의견도 있었으나 폭군 연산군의 잔재라 하여 폐기되고 현재 종로구 숭인동에 남루(南樓)와 침방(寢房)을 지었고, 광해군 원년(1608)에 대제학 유근(柳根)의 요청으로 독서당이 다시 설치되었습니다.
독서당은 옥당(집현전, 홍문관) 못지않게 평가되었던 것으로 중종 때는 고시(考試)하는 법이 대단히 엄격하여 만약 계속하여 입격(入格)하지 못하면 퇴학시켰습니다. 독서당원에 대한 예우는 지극하였는데 이들을 돌보기 위해 급여 사무자가 9명, 용인(傭人) 8명이 배치되었으며 여유 있는 생활을 하도록 물자 공급을 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상사(賞賜)로서 그들의 사기를 높였는데 성종 · 중종 · 명종 등 여러 왕들은 궁중의 음식을 내려 주고 성종은 수정배(水精杯)까지 하사하였습니다.
독서당은 숙종 35년(1709) 이후에 폐지되어 존속되지 못하였으나 영조 때에도 호당이란 이름을 우수한 문신에게 붙여 주었으므로 사가독서의 제도는 계속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또한 정조 때의 규장각을 개편한 것도 호당제도를 계승하려는 측면으로 해석해야 할 것입니다.
독서당원의 수효는 한 번에 평균 6명 정도를 선발하는 것이 보통이었고 세종 때부터 영조 때까지 350년간에 320명이 선발되었습니다. 당원으로 선발되는 과정이 대단히 엄하였고 국가의 권장과 큰 관심으로 학문에 정진하여 당원 중에서 많은 인재가 배출되어 호당의 권위는 상당하였습니다.
7) 제천정터
맑은 하늘 동녘에서 달이 떠오르며 비추는 한강의 강색은 유달리 아름다워서 일직부터 한성 십영 가운데 ‘제천완월(濟川翫月)’로 손꼽혔습니다. 그만큼 제천정에서 바라다보는 달구경은 뛰어났습니다. 제천정은 한강 북쪽 언덕 지금의 한남동 537번지에 있었습니다. 한강정은 고려시대의 명사들 시문에도 시제로 오르내렸습니다.『조선왕조실록』세종 원년 5월조에 상왕과 세종 임금이 대마도 정벌군의 삼군 도총수 유정현 이하 그 일행을 한강정에서 환송연을 베풀렀다는 기록이 보입니다. 그 해에 명나라 사신 왕현, 황엄을 맞이하여 한강정에서 잔치를 베푼 기록도 보입니다. 이렇듯 고려시대와 조선조 초기에는 이곳의 정자를 한강정이라고 하였습니다. 세조 2년(1456)과 3년 6월에 각각 명나라 사신 윤봉과 진감을 맞아 한강 제천정에서 잔치를 베풀었다고 한 기록으로 미루어서 아마도 이때부터 한강정을 제천정으로 고쳐 부르게 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조선조에 와서 명나라 사신이 오면 으레 한강정 곧 제천정에서 잔치를 베풀어 이곳의 경치를 구경시키고 술 마시며 놀게 하였습니다. 명나라 사신들은 한강루 곧 제천정 놀이 때마다 으레 우리나라 접반관(接伴官)들과 어울려서 술 마시고 시를 읊었습니다. 일찍부터 명나라 사신이 오면 제천정으로 나가서 술 마시고 놀다가 호화로운 배 곧 화방(畵舫)을 강물에 띄우고 저 서쪽 서강 잠두봉 아래 망원정까지 뱃놀이하는 것이 당시의 정규코스였습니다.
『궁궐지』에 의하면 명종 임금도 13년에 제천정에 올라 이곳 한강에서 펼쳐진 수전 훈련을 관람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며, "인조 2년 갑자(1624)에 이괄이 서울을 침범하자 임금께서 대왕대비와 종묘 및 사직단의 신주를 받들고 공주로 피난길을 떠나던 날 밤, 한강을 건널 때 제천정 건물에 불을 질러 그 불빛을 의지하고서야 강을 건널 수 있었다." 라고 하였습니다. 제천정이 이때 불탄 후로 다시는 복원되지 않은 듯싶습니다. 인조 14년(1636)의 병자호란 이후로 청나라 사신들이 우리나라를 왕래하였지만 그들이 제천정을 찾아 놀았다거나 시문을 남긴 기록이 전혀 없습니다. 돌이켜 생각하면 한강정, 제천정은 명나라 사신들을 맞아 술 마시고 시를 읊던 국제무대로 이름을 떨쳤지만 그보다도 한강정은 태종, 세종 두 임금께서 친히 이곳 정자까지 납시어 대마도 동정군을 환송하며 전함을 떠나보내던 감격의 장소였습니다. 제천정은 선조 2년(1569)에 69세로 벼슬을 내놓고 시골 도산서원으로 낙향하는 퇴계 이황 선생을 온 장안 선비들이 이 정자까지 따라 나와서 참되고 맑은 마음으로 만류하다가 석별의 정을 나누던 감회어린 정자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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