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15:30-33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기도에 나와 힘을 같이하여 나를 위하여 하나님께 빌어 31 나로 유대에서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들로부터 건짐을 받게 하고 또 예루살렘에 대하여 내가 섬기는 일을 성도들이 받을 만하게 하고 32 나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 기쁨으로 너희에게 나아가 너희와 함께 편히 쉬게 하라 33 평강의 하나님께서 너희 모든 사람과 함께 계실지어다 아멘.
기도의 의미
로마교회에 서바나 선교의 후원을 요청했던 바울은 이어서 자신을 위해 기도해 달라고 기도를 부탁합니다. 그가 부탁하는 기도의 제목은 세 가지입니다. 첫째는, 마게도냐와 아가야 지방의 교회들이 모아준 구제헌금을 전달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갈 때, 그곳에 있는 극렬 유대교 신자들로부터의 위험이 예상되니 기도해 달라고 합니다.
둘째는, 예루살렘 교회가 이방인 교회가 보내는 구제헌금을 잘 받아서 두 교회 사이에 복음과 사랑의 교제가 잘 일어나게 해 달라는 부탁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이 일을 다 마치고 자신이 로마교회로 갈 때, 기쁨으로 가서 함께 쉴 수 있게 해 달라는 기도의 부탁입니다. 이 세 가지를 요약하면, 바울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 유대인들의 살해 위험 속에서도 목적대로 예루살렘 교회에 구제헌금을 잘 전달하고, 로마에서도 그곳 성도들과의 교제를 통하여 함께 힘을 얻기를 원한다는 내용입니다. 바울은 이 세 가지 내용의 기도를 부탁한 후 하나님의 평강을 비는 축복으로 15장을 마무리합니다.
오늘은 이런 기도의 내용을 하나씩 다 살피기보다는 왜 사도가 예루살렘행을 위해 이렇게 기도를 부탁하는지, 기도의 의미에 대해서 생각해보려 합니다. 기도는 기독교에만 있지 않습니다. 모든 종교, 하다못해 무속종교나 무신론자에게도 있는 종교성의 발로가 기도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기도와 다른 종교의 기도가 어떻게 다르며, 성경이 말하고 있는 기도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잘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 이해에 따라 신앙생활의 색깔과 성향, 그리고 수준이 좌우될 수 있기에, 바른 이해에 근거한 기도는 너무나 중요합니다. 보통 기도 부탁은 자기보다 믿음이 좋거나 영적 권위가 있는 사람에게 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바울은 뛰어난 지도자인 동시에 특별한 영적 권위가 있는 사도입니다. 그런데도 자기보다 영적 수준이 높다고 할 수 없는 로마교회를 향하여 "나와 함께 기도해 달라", "나를 위해 기도해 달라"고 기도를 부탁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기도 부탁은 비단 여기 로마서만 아니라 그의 다른 서신서에도 한 결 같이 발견되는 모습입니다.
왜 이렇게 사도는 늘 자신을 위해 기도해 달라고 기도를 부탁하고 있을까요? 바울은 이번 예루살렘행이 너무나 위험한 여정이 될 것을 알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20:22-24을 보십시오. “보라 이제 나는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알지 못하노라.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사도행전 21:7-13입니다. “...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 권하니 바울이 대답하되, 여러분이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하니..” 지금 바울의 예루살렘행은 목숨을 걸고 가는 길입니다. 그래서 기도를 부탁합니다. 그러나 그의 기도 부탁은 죽음을 두려워해서가 아닌 다른 이유입니다.
그가 부탁하는 기도의 의미를 확인하기 위해 우선 기도에 대한 아주 중요한 원리를 담고 있는 마가복음 9:14-29부터 보겠습니다. “... 집에 들어가시매 제자들이 조용히 묻자오되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그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 예수님이 베드르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변화 산에 올라갔을 때, 산 밑에 남아 있던 제자들에게 어떤 아버지가 귀신 들린 자신의 아이를 데리고 와서 고쳐달라고 요청합니다. 제자들이 못 고치고 쩔쩔매고 있을 때, 마침 산에서 내려오신 예수님이 그 장면을 보시고 믿음 없는 무리를 꾸짖으시고 벙어리 귀신 들린 아이를 고치십니다. 그러자 나중에 제자들이 조용히 묻습니다. "우리는 왜 못 고쳤습니까?" 그때 예수님의 답변이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와 같은 유가 나갈 수 없다.”입니다.
주님의 이 답변이 어떤 뜻일까요? 이 말을 기도하지 않아서 못 쫓아내었다고 너무 쉽게 생각하면 곤란합니다. 기도 외에는 이런 류가 나갈 수 없다는 주님의 대답은 “왜 기도 안 했느냐? 기도 안 했으니 못 쫓아내지 않았느냐 앞으로는 열심히 기도해라”의 의미가 아닙니다. 훨씬 더 깊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에스겔 36:32-37절입니다.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이렇게 행함은 너희를 위함이 아닌 줄을 너희가 알리라 ... 나 여호와가 말하였으니 이루리라.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래도 이스라엘 족속이 이와 같이 자기들에게 이루어주기를 내게 구하여야 할지라.” 복 받을 자격이 없는 이스라엘 백성들입니다. 복은커녕 벌 받아 마땅하지만, 그래도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은혜와 복을 주어 회복시키겠다고 약속하십니다. 하나님은 내가 이렇게 약속하였으니 반드시 그렇게 된다고 확인까지 하십니다. 그렇게 하고 나서 그래도 너희가 구해야 나의 약속이 이루어진다고 기도를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지금 여기서 기도가 등장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불가능한 일도 기도하면 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여기 기도는 복 주시고 회복시킨다는 약속을 이루는 분이 하나님 자신임을 확인하는 방법으로 등장합니다. 이스라엘은 복 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복을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그 복을 주시는 분이 약속하신 하나님 당신임을 확인하는 수단으로 기도가 동원됩니다. “봐라, 기도하기 전에 안 되었지만, 기도하니까 되지 않냐. 우리 같이 기도하자”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돌아가서 기도 외에는 이런 류, 귀신이 나갈 수 없다는 주님의 말씀은 어떤 뜻입니까? 이 일은 내 힘과 내 조건과 내 능력으로 도저히 안 되고, 오직 하나님의 간섭과 은혜로만 된다는 의미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안 되는 일을 되게 하는 방편이 아니라, 하나님 자체를 바라보고 그분만을 의지하는 행위입니다. 기도의 이런 본질과 의미를 알고 기도하면 할수록 자기가 누구인지를 알고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더 깊게 깨닫고 겸손하게 됩니다. 내가 세상에 존재하고 살아가는 자체가 나의 똑똑함과 재주와 힘과 조건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긍휼히 보심과 도우심과 간섭으로만 살아갈 수 있음을 기도를 통하여 확인하고,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에 대한 깊은 항복과 순종으로 달려가게 됩니다. 이것을 모르면 기도할수록 기도의 양과 응답을 자랑하는 교만하고 오만방자한 사람이 될 수 있으니, 기도의 본질과 의미를 잘 이해해야 됩니다.
왜 제자들이 아이에게 귀신을 쫓아내지 못했습니까? 주님의 대답을 표면적으로만 보면 기도하지 않아서입니다. 그러나 기도는 귀신을 쫓아내는 초월적인 능력을 받는 수단이 아닙니다. 기도는 “내 힘으로 못 합니다. 내 경험과 내 지식과 나의 어떤 것으로 못합니다. 내게는 그런 능력과 지혜와 힘이 없습니다. 이 일은 오직 하나님만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니 간섭해주십시오. 역사해주십시오!”라는 우리 자신에 대한 깊은 자각과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신뢰와 의탁입니다. 변화 산 밑에서 제자들이 귀신들린 아이를 놓고 쩔쩔맸던 이유는 그런 자신에 대한 인식과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의탁과 신뢰 없이, 즉 기도 없이 자기가 해보겠다고 덤벼들었기 때문입니다.
이 사건이 일어나기 얼마 전에 제자들은 둘씩 파송되어 각 고을로 나가 예수님께 받았던 병자를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는 특별한 능력을 행한 적이 있습니다. 돌아와서 그들이 뭐라고 했습니까? “주여 주의 이름으로 귀신도 도망가더이다.”라고 감탄하지 않았습니까? 그 놀라운 경험을 통해 제자들은 예수님의 능력이 이제 자기들에게도 전달되었다고 오해했습니다. 능력이 있으면 기도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기도 없이 귀신들린 아이를 고치겠다고 나섰습니다. 제자들은 자기가 누구인지를 몰랐고, 하나님만 의지하고 바라는 간절한 의탁의 믿음이 없었습니다. 이런 제자들과 무리를 향하여 주님은 꾸짖었습니다. “믿음이 없는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에게 참으리요”(막 9:19).
사랑하는 여러분, 기도는 “이 일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나님 없으면 하나님이 내게 주신 건강, 능력, 돈, 외모, 학벌 이거 아무것도 아님을 압니다. 하나님만이 세상을 결정할 수 있고, 내 인생을 결정할 수 있고, 이 일을 결정할 수 있으니 제발 간섭해주십시오!”라고 무릎 꿇고 하나님을 바라는 시간입니다. 그래서 일부 다른 사본에서는 마가복음 9장의 그 구절에 “기도와 금식 외에는”이라고, '금식'이 추가되어 있습니다. 금식이 무엇입니까? 음식을 먹지 않는 행위입니다. 사람은 음식을 먹어야 힘이 공급되는데, 그 힘을 끊음으로 자신의 힘으로 존재의 영위가 불가능함을 고백하고 하나님의 전적인 도우심을 구하는 행위가 바로 금식입니다. 기도하고 똑같은 의미입니다. 더 극단적인 의사의 표시이죠.
그러면 기도와 금식 외에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다는 주님의 말씀은 무엇입니까? "나의 은혜가 없으면 너희가 무엇을 할 수 있니? 나의 은혜가 없으면 너희도 이 귀신들린 아이처럼 불에도 넘어지고 고통 속에 신음할 수밖에 없는 존재이지 않니? 나의 도움 없이 너희의 경험과 재주와 힘으로 할 수 있니?" 이런 의미입니다. 믿음이 없다고 책망하신 것은 바로 인생에 대한 이런 고백과 하나님을 의존하는 믿음이 제자들과 무리에게 없었다는 뜻입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성경의 명령도 같은 의미입니다. 우리가 매 순간 하나님만 의지해야 하는 존재임을 안다면, 숨 쉬는 모든 순간을 그렇게 주를 의존하는 믿음의 기도로 주께 의탁하며 살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특별한 종인 사도 바울이 로마교회에 기도를 요청한 것은 예루살렘 행이 너무나 위험하니 그 위험으로부터 자신이 보호받기 위함이 아닙니다. 그는 이미 목숨을 걸고, 아니 목숨을 버릴 각오를 하고 예루살렘으로 갑니다. 그런데도 기도를 부탁하는 이유는 이 모든 일이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매사에 기도하는 사람은 자신의 기도에 현실적인 응답이 없어도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인 줄 알고 하나님께 순복합니다. 실제로 이런 기도를 하고 이런 기도를 부탁했던 사도의 예루살렘행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순적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예루살렘에 가서 야고보와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와 만났지만, 유대교의 극렬분자들에 의해 고난당하고 결박되었습니다. 로마도 죄수의 신분으로 도착하여 2년의 가택연금을 받았습니다. 스페인 선교도 성경의 기록으로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런 현실 속에서도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선하신 뜻으로 알고 감옥 안에서 옥중서신을 썼고, 여전한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전하는 복음의 종으로 존재했습니다. 기도로 자신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의탁했기에 자신을 둘러싼 모든 정황에 있는 선하신 하나님의 인도를 믿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성도는 기도하는 자들입니다. 교회는 함께 모여서 기도하는 공동체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는 기도는 우리의 소원과 바람을 이루기 위한 신적 능력을 빌어오는 행위가 아닙니다. 우리의 무력함과 연약함을 고백하고 하나님의 주권적인 능력과 뜻에 우리를 위탁하여 드리며, 하나님이 우리를 통해서 하시고자 하는 일이 온전히 드러나고 나타나기를 소원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바라보는 시간입니다. 기도 부탁을 아끼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도우심 없이 자기 힘만으로 얼마든지 살 수 있다는 기도 부재의 교만한 성도들이 아니라, 쉬지 않고 기도하면서 하나님을 바라는 겸손한 믿음의 성도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박홍섭목사 / 한우리교회
첫댓글 하나님께 위탁하는
간청의 '기도'
하나님께 의지하는
바른 '기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