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연을 통과한 문장의 시선들
_신양옥 시집 《카르페디엠》 중심
박철영(시인, 문학평론가)
언어의 영역 안에서 주어진 상상력을 특별한 결합으로 발현한 결과가 시라면 결국 언어의 선택적 사용으로 봐야 한다. 신양옥 시인의 두 번째 시집 《카르페디엠》을 표제 명으로 선택한 것을 보며 철학적 사유보단 문학적 변주로 이해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많은 사람도 그런 범주 내에서 응용하거나 활용했을 것이다. 어찌 되었던 그 안에 함의한 의미를 문학적으로 받아들여야 하고 심양옥 시인의 고도한 세계관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다. 그런 것에 관한 천착을 통해 얻은 “이 순간에 충실하라”라는 문장으로 확신에 찬 초월적 신념을 갖고 있음을 읽어낼 수 있다. 꼭 그렇게 해야 한다는 명언明言 같은 단정에서 묵시적 실행력을 행사한다. 그렇다고 딱히 그래야만 하는 이유가 명시된 것도 없다. 그런 계기를 굳이 들어본다면 호라티우스의 시 <오데즈(Odes)>에서 출현한 문장을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키팅 선생이 학생들에게 수사적 발화로 인용하게 된다. ‘카르페디엠’이란 문장의 강렬함을 반복적 메시지로 연출하면서 영화가 흥행하는 데 기여했을 것이고, 그 말속에 담긴 상상력이 확장 변주되면서 문학적으로 환기되었을 것이다. 결국 신양옥 시인의 이번 시집 전반에 담긴 시적 세계관도 언어 일상의 선택에서 집약된 것으로 좀 더 시적인 것의 분별인 것이다. 시집을 목차대로 분류하다 보면 시인의 의도가 담긴 첫 번 째 시에 시선이 집중되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보편적인 생각들이 그렇기에 첫 시의 상징적 의미를 되짚어보려 한다.
함박웃음을 머금은 수국부터
여린 꽃잔디 밥풀떼기까지
크다고 위대하겠으며 작다고 초라하겠는가
깊은 숲 절벽에 피어나는 꽃이라고
위태한 목숨, 외면당할 수는 없는 것
작은 볼우물에 고인 물이나
물기둥으로 쏟아내는 폭우도
작은 꽃 입술 적시는 일은 똑같지 아니한가
진정으로 바라봐주면
서로 통속하듯 너는 꽃이 되고 사랑이 되고
고귀한 인연이 된다는 것을, 나는 알지
짧은 봄을 통과하는 조팝꽃
막연함을 좁히는 향기, 눈부신 청음淸音이다
-<조팝꽃의 청음> 전문
꽃의 생김새를 통한 분별이 시작된다. 이미지에서 풍기는 시각적 상상력도 그렇거니와 눈으로 나열한 ‘수국’, ‘꽃잔디’, ‘밥풀떼기’까지 분별한 크고 작은 것에 대한 존재감을 통해 인간의 눈으로 본 기준이 무의미한 것을 확신한다. 그런 인식은 인간의 제각각 다른 체형이나 기질면에서도 위와 같은 사실이 증명되곤 한다. 키가 작다고 사회 일상에서 낙오자로 사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여기에 부언하는 2번째 연은 가파른 절벽에서 혼신을 다한 생명력이 부여해준 생명성의 위중함 앞에서 아름답거나 아름답지 않고의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똑같은 생명성을 근본으로 하는 데서 다를 바가 없다. 시인은 한번 더 동일성에 대한 가치를 확신하려는 듯 “작은 볼우물에 고인 물이나/ 물기둥으로 쏟아내는 폭우도/ 작은 꽃 입술 적시는 일은 똑같지 아니한가”며 확신을 담보받고자 한다. “정으로 바라봐주면/ 서로 통속하듯 너는 꽃이 되고 사랑이 되고/ 고귀한 인연이 된다는 것을, 나는 알지// 짧은 봄을 통과하는 조팝꽃// 막연함을 좁히는 향기, 눈부신 청음淸音이다”라며 상상적 발상을 문장으로 치환한다. 화자는 내면에서 현현한 사유를 존재와 동일체로 받아들인다. 즉 사물적 대상이 사유의 주체로 관계한다고 본 것이다. 오밀조밀 뭉쳐 핀 조팝꽃에 대한 아름다움에 찬 감동을 ‘사랑’으로 응시한다. 봄기운의 충만을 알리는 ‘조팝꽃’의 만개를 본 순간 환희로 전이된 심연이 언어적 기의로 작용한다. 후각을 자극하는 향기가 소리로 형상화되면서 “눈부신 청음淸音”으로 변주된 것이다. 자연은 고유한 식물성을 통해 존재 의미를 극대화하고 그것을 바라본 화자는 시적 환기를 통해 주의를 집중한다. 그렇기에 모양을 통해 전달된 의미를 소리로 인식할 수 있다. 그것은 감각적 전언 현상으로 볼 때 지극히 정상인 시적 전조로 볼 수 있다.
추파처럼 터지는 몸의 이상 신호
최소한의 예의도 없이 강렬하다
두려운 건 내가 갱년기에
무참히 사로잡히는 일이다
사라지는 낮별들의 민낯이
분수처럼 뿜어져 나오는 선홍빛 발악
확 획을 긋는 일단락이 아프다
비워지는 앓는 근원의 고통
정리되는 기록지가 체위를 바꾼다
다시 시작이다
-<갱년기 꽃> 부분
꽃의 생성과 만개 이후 소멸하는 과정을 보면 동일한 계절에 피었다 시들어버리는 동시성을 띤다. 길지 않은 개화를 놓치지 않으려고 사람들은 몰려다닌다. 안부를 묻듯 감상하고 돌아설 때 떨어져 나뒹구는 꽃잎을 보며 죽음의 그림자를 본듯한 ‘갱년기’를 상상한다. 그렇게 핀 꽃의 비밀은 신록 여린 잎사귀를 내밀며 시작된다. 그 시기만 해도 특별할 것 없이 똑같은 어린잎을 물고 있다. 그렇지만 7월경으로 접어들면서 내재한 특성이 유전적 변이를 촉발한다. 함께 종알대며 신록의 계절 내내 잎사귀를 비벼대던 잎자루는 은밀한 징후를 알아챈다. 똑같은 ‘잎눈’이 군데군데 ‘꽃눈’으로 분화되면서 식물의 번식 본능에 대한 밀명을 받든 것이다. 그렇게 분화된 가지는 해가 바뀐 봄이면 소망한 개화를 실행한다. 살을 찢는 고통도 다 견뎌낸 후에야 꽃봉오리는 제대로 된 속 꽃을 보여준다. 화자는 몸으로 느껴오는 통증에 집중하고 있다. 맥박은 심장을 박동한 진동의 크기다. 일정해야 할 박동의 크기가 심해지면 강박이 되고 강박을 추동하면 악화되어 신경을 자극한 통증으로 확대된다. 결국 운동성을 추동하는 박동이 일정한 횟수를 벗어나면 극심한 통증을 유발한다. 그 통증이 심화하면 호흡 곤란으로 가중되고 신체 구조에서 감당할 수 없는 심정지 상태가 온다. 그것을 알고 있는 화자는 요즘 들어 부쩍 예민해져 있다. 자신을 돌아보니 그 징후가 귀신처럼 알고 찾아온다는 ‘갱년기’ 증후症候란 것을 알았다. 사람은 태어나 유, 소년기를 지나 청년기를 거치고 장년기를 맞는다. 그러나 여성에게만 찾아온다는 갱년기가 노년기 사이에 존재한다. 여성의 생리가 종료되는 시점을 전후로 발현하는 신체 이상 증상이 조금씩 나타나다 횟수가 증가하며 피로도를 높여간다. 화자는 그런 몸의 이상 징후를 “갱년기 꽃‘으로 형상화한다. 화자가 겪고 있는 진통의 시간도 어느 순간 되돌아보면 다시는 경험할 수 없는 아름다운 것임을 깨달은 것이다. 그런 시간의 축적이 분절된 인생 전반으로 수렴되면서 생애를 성장시킨 과정이란 것을 통찰한다.
거꾸로 자라나는 하늘이다
강추위를 물리치고 찾아온
창백한 투혼
부러질지라도 절대 휘어지지 않는
그것이 독특한 매력이다
한 방울 물로 사라질지라도
흐트러지지 않는 곧은 자세가 일품이다
-<주렁주렁 고드름> 부분
고드름은 땅속을 떠나온 기억을 잊지 않은 모양이다. 물이 지표로 용출된 뒤 긴 부유浮遊의 시간을 거치며 다시 땅속으로 돌아가는 여정이다. 인간의 생로병사와 다름 아닌 고드름도 생성과 소멸을 통해 본래 모습으로 돌아간다. 인간도 생의 시간을 죽음 앞에 내놓으며 무기력하게 무너지듯 고드름도 생성과 소멸의 과정을 보여준다.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의 여정은 험난한 고통을 수반하듯 고드름도 형상이 무화되는 과정을 거듭한다. “거꾸로 자라나는 하늘”을 향한 생장의 시간은 언젠가 끝이 날 것이다. 이후 소멸로 치달아야만 하는 ‘고드름’의 생성은 강한 추위에 활발한 특성을 지닌다. 고집하는 생장점은 허공을 딛고 아찔한 지상을 향하고 있다. 그 지상이 아무리 높아도 두려워하지 않는 “창백한 투혼”을 우직하게 발휘한다. 인간의 직립 보행이 자부심을 지지하듯 한순간도 속성을 굽히지 않는 고드름도 그것을 답습한다. 우리가 사는 세상의 구조를 변화시킨 주체가 수평적 사고를 거부한 수직이다. 그 직선이 상하좌우로 끝없이 질주하듯 삶을 변화시킨다.
상하좌우를 호령하는 눈은
낮은 골목길에 버려진 설움 한 움큼을 들추고
육중하게 밀려들어온 철심의 아픔을 보듬는다
반듯하게 서 있는 콘크리트 구조물 사이로
차곡차곡 채워지는 가로와 세로
혼자인 듯 여럿인 듯
공중을 묶고 펴는 강한 힘줄이 탱탱하다
가끔 해고 노동자들이 올라가
부르짖는 절규가 가슴을 메이기도,
클로즈업된 느낌이나 감정이 치솟는다
-<타워크레인_공중의 감정> 부분
그 직립 지향성을 들여다보면 단순한 것처럼 보여도 한번 시도하면 집요하여 끝을 봐야만 직정이 풀리는 듯 수평적 환경을 끝없이 변화 시킨다. “강한 갈망이 세운 높은 수직/ 고독하고 외로운 작업의 시작이다/ 외발 한 손으로 균형을 잡으며 하늘에 머리를 둔/ 지상에 몸을 누일 수 없어/ 단꿈으로 둥지를 만든 허공/ 굵직한 힘을 발동한다”며 직선으로 이룬 수직의 속성을 이미지로 환기한다. 그것은 시작에 불과한 본능으로 기계 메커니즘에 부여한 구조물의 고도 지향은 더 지독한 것이다. 수직은 상하좌우를 구분하지 않고 질주하여 기존의 속도마저 갱신한다. 지표면에 설치된 ‘타워크레인’도 해체해놓고 보면 단순한 쇳덩어리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것으로 이뤄진 직립의 결합체는 대단한 위력을 발휘한다. 기존의 설계 한계를 끝없이 무시하고 새롭고 더 거대한 것에 대한 변화를 실현하려 한다. 그런 고난도의 작업이 끝나면 해체되어 볼품없는 쇳덩어리로 녹슬어 가지만, 거대한 수직체로 결합될 시간을 묻곤 한다. 그것의 반복은 매번 수평적 예상을 뛰어넘는다. 인간이 자연 공간으로 활용하는 지상의 여유 공간을 싹쓸이하듯 구조물을 세워놓기 때문이다. 삭막한 구조물만 가득한 세상을 최상의 공간이라며 강요한다. 그것에 대한 질주 본능을 제어하듯 기계 동작의 효율적 가동을 강제로 정지시킨 경우도 발생한다. 작업을 중단시킨 고공 농성은 ‘타워크레인’의 고장 때문만이 아니다. “가끔 해고 노동자들이 올라가/ 부르짖는 절규가 가슴을 메이기도,/ 클로즈업된 느낌이나 감정이 치솟는다”는 화자는 타워크레인을 점거하여 얻어내려는 결과가 무엇인지를 안다. 그 또한 치열한 경쟁 사회가 빚은 본능임을 알고 있다. 남들보다 뒤처지면 안 된다는 신분 상승적 사고에서 기인한다. 그런 모습은 우리 사회만이 그런 것은 아니다. 결국 열악한 노동환경 개선과 임금 차별에 대한 보상이 주조다. 그것이 관철될 때까지 농성하는 것도 빈부 차이에 대한 비교 의식이다. 그윽한 시선은 끊임없이 다른 대상을 향해 다가간다. 그 시선이 당도한 곳은 언제나 사람들을 동그란 마음으로 보듬어주는 달이다.
온통 천지가 암흑뿐인 넓거나 좁은 곳도 높거나 낮은 곳도, 분간하기 어렵다
달이 어둠의 빗장을 풀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사기와 거짓이 난무하는 세상일 수도, 평화와 고요와 휴식이 있는 공간일 수도
천 길 낭떠러지, 건너가기 힘든 협곡도
초연하게 떠오르는 너를 등에 얹으면 무탈하게 세상을 지날 수 있을까
온전함이 착시가 되어 반달이 되기도, 초승이 되기도 하는데 팥죽 끓이던 동지 끝 긴긴밤에
동동 달이 뜬다
-<동동 달> 전문
하늘에 달이 뜨면 바라본 가슴에도 달이 둥실 돋는다. 그 달과 세상을 함께 한 시간만큼 몸과 같은 완전체가 된다. 달을 보며 화자는 소녀적 아이처럼 달이 사라져 버린 밤을 상상한다. 아직도 순수한 동심을 잊지 않은 듯 “달이 어둠의 빗장을 풀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라고 상상하지만, 실제로 그렇게 된다면 하는 두려움도 은근히 엿보인다. 어둠과 환함의 대비 속에서 벌어질 개연성으로 발생될 일들을 유추해본다. 이런 상상을 하게 된 계기는 세상을 살아오며 지금껏 경험하지 못했던 이면을 본 것이다. 선과 악이 나뉘고 “사기와 거짓이 난무하는 세상일 수도, 평화와 고요와 휴식이 있는 공간일 수도” 있을 것 같은 마법에 갇힌 세상을 환함과 어둠으로 본 것이다. 그것을 알게 한 것도 화자의 가슴속에 뜨고 지던 ‘동동 달’이다. 어둠뿐인 밤하늘을 상상해 보았지만, 사라져선 안 될 ‘달’이다. 아직도 화자가 건너야 할 어둠 속 혼탁한 세상은 험난하고 두려운 곳이다. 간교하다 못해 불온하기까지 한 세상을 온전하게 건널 수 있도록 환하게 비쳐야 할 ‘동동 달’을 빚어 “팥죽 끓이던 동지 끝 긴긴밤”을 맞아야 한다. 동지 긴 밤을 환하게 비춘 달을 보며 간절한 소망을 꼭 이뤄달라고 빌 것이다. 옛날 옛적부터 밤마다 오순도순 정 붙이며 토끼가 방아를 찧는다는 ‘달’은 화자의 가슴에서 뜨고 진다. 그렇게 사는 법이 화자가 추구하는 삶의 소망임을 보여준다. 주어진 행복을 놓지 않으려는 최선의 것, 그것은 하늘 가득 환하게 뜬 달처럼 살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매일 밤을 밝히는 ‘동동 달’은 우리가 바라보는 어디든 기운찬 북소리처럼 가슴을 박차고 떠 올라야 한다. 동동 뜨는 달을 보며 막연하지만, 모든 사람들의 무탈을 기원한 적이 있다.
어떤 이의 기도가 있어 평안함이 흐르고 있는 걸까
별다른 이유도 없이
가슴에서 울컥 눈물이 차오르기라도 하는 날이면
나는 일회용 감정을 억눌렀다
활짝 핀 어둠처럼 사방이 불확실한 세상에서
늘 슬픔보다 용감해야 했기에
얽힌 마음을 무장해제시키고
카르페디엠, 카르페디엠
무엇이든 완벽하지 않으니까
그러려니 하며 사는 것이 삶이니까
감정에만 반응하는 아련한 향수와
무표정한 미소가 수채화처럼 번지는 날이면
정신의 빈 곳까지 채워지는 웃음을 웃어볼 일이다
You only Live Once
한 번뿐인 인생이 상처받지 말라고
어느 사이 달빛이 다가와 포근히 나를 감싼다
-<카르페디엠> 전문
알 수 없는 기운이 종종 내 몸을 보호한 듯한 기운을 경험한 적이 있다. 그럴 때 흔히들 우리는 음덕蔭德(조상 덕) 때문이라고 말하곤 했다. “어떤 이의 기도가 있어 평안함이 흐르고 있는 걸까”라며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자신에게 행운처럼 피해 가는 액땜도 있으니 말이다. 간발의 차이로 얻은 행복이니 크고 작든 간에 비교할 바가 아니다. 인간은 기도하면 응답으로 다가온다는 신을 믿으려 한다. “별다른 이유도 없이/ 가슴에서 울컥 눈물이 차오르기라도 하는 날이면/ 일회용 감정을 억눌렀다”라고 한 화자다. 그런 감정은 신앙에 대한 믿음으로 강화되고 자신도 모를 희열에 찬 눈물을 흘리게 된다. 그런 일이 반복되면서 자신이 믿는 신에 대한 유대감은 심화된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은 인간의 연약한 의지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난관에 부딪힐 때는 몹시 불안정한 상태가 된다. 거기에 더 나아가 삶의 고통이 가중된다면 혼란은 극심해진다. 도저히 혼자 그것을 감당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고 절망 속으로 침몰해 갈 때 절대적인 대상에 대한 의지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활짝 핀 어둠처럼 사방이 불확실한 세상에서/ 나는 늘 슬픔보다 용감해야 했”다며 그것 또한 종교적 신념으로 강화된 것이다. 앞서 알 수 없는 ‘어떤 이’에 의한 기도의 힘이 자신을 보호해준 듯한 기운을 느꼈다고 말한 화자다. 누군가의 간절한 기도가 있었고 그로 인해 고통스러운 터널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는 것에 대한 믿음을 굳게 확신한다. 인간의 의식적 성장은 평범한 일상에서 발생하지 않는다. 화자는 자신이 살아오며 가졌던 일관된 생각을 바꿔야 할 기로에 서 있었고 때마침 격하게 밀려오는 충동을 느낀 것이다. 기쁨이나 슬픔을 유, 불리로 나누지 않겠다는 변화가 가슴을 벅차게 한 것이다. 화자에게 ‘카르페디엠’에 함의된 의미는 생의 모든 순간에 충실하라는 각성으로 전율해온다. 단지 화자가 인식하지 못했을 뿐이지 이미 실천하고 있을 수도 있다. 성찰은 빛처럼 찰나에 심연을 파고들었다. 매 순간 밤하늘에 뜬 ‘달빛’이 그토록 긴 생을 감싸고 있었음을 깨달은 것이다. 가만 되돌아보니 저 ‘달빛’이 나를 위해 기도해 준 ‘어떤 이’였으며 그 믿음을 충만하게 해 준 신앙의 주체였음을 깨달았다. 화자가 외친 ‘카르페디엠’은 삶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자 방향을 지시하는 좌표로 다가온다.
먼저 도착한 그리움이 세파를 헤치고 온
발걸음을 반가이 맞으며 다독인다
저무는 해가 건네는 위로가
달을 맞이하는 저녁이 있다
나른한 게으름을 채근하기도
밑줄 긋고 각주를 달지 않아도
헛짚은 길은 인생의 함정과 같다
자유롭게 사방을 알려주는 내가
고립의 방향 쪽으로 나그네의 여정을 읽는다
-<이정표> 부분
화자가 서 있는 공간을 지시하는 <이정표>는 내면에 존재하는 공간이면서 실재한 지점과 공존한다. 화자는 순간순간 닥쳐오는 사유의 단상에 골몰하고 있다. 그런 일들이 매번은 아니지만, 특별하게 다가온 때가 있다. 무엇엔가 의하여 혼란을 초래한 때 그곳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좌표를 찍고 이정표를 확인하는 것은 중요하다. 그로 인해 설정된 이정표가 목표한 지점이기 때문이다. 화자는 그렇기 위해 현재의 좌표에서 멈춘 시간의 과거를 헤아려본다. 삶의 지향이 같아도 전혀 다른 양상을 보여준다는 “누군가에게는 목적이 되고/ 누군가에게는 방향이 된다”는 경험적 인식은 분명하다. ‘목적’지로 특정된 지점이라면 오직 정해진 위치에 정확히 도달해야 하는 것이고, ‘방향’ 이란 지점은 좁은 지점보다 광역적인 영역을 포함하여 여유를 갖고 나아갈 수 있다. 목적을 향해 나아가다 장애물이 나타나면 꼼짝없이 갇히고 만다. 그럴 때 화자가 제시한 ‘방향’은 매우 유용한 것이다. 목적을 이루기 위해 난관을 극복하는 수단으로 방향을 변경하고 그 목적 지점으로 다시 나아가는 것이다. “저무는 해가 건네는 위로가/ 달을 맞이하는 저녁이 있”게 한 것으로 보았다. 화자가 ‘저녁’이라는 목적지에 무사히 도달할 수 있었던 것은 하늘에 뜬 ‘달’이 있어 가능한 것이다. 그 ‘달’을 통해 방향을 잡고 목적지인 ‘저녁’의 휴식을 만끽할 수 있다. 그 ‘저녁’은 가족이 모인 ‘집’ 일 수도 있지만, 오랫동안 이루고자 한 소망의 완성일 수도 있다. 이제 화자에게 부여된 시간은 긴 저녁으로 주어진 안락함이다. 그런 한가한 시간을 통해 자신을 돌아보는 것은 앞으로 나아갈 이정표를 설정할 수 있는 여유가 된다. 긴 고통의 시간을 극복한 경험을 통해 이제 화자는 “자유롭게 사방을 알려주는 내가/ 고립의 방향 쪽으로 나그네의 여정을 읽는다”며 삶에 대한 자신감을 피력하고 있다. 하지만 긴장을 한시도 놓아서는 안 된다. 우리가 꿈꾸는 세상은 멀리 있지 않다.
한 줌 떠먹어도
줄지 않을 달빛
피안을 기약하는
마법이 펼쳐지는 것 같다
밤으로 낮이 기웃대는 백야
자유스러운 오마 라우하*
속살대는 그리움이
꽃으로 피고 있다
*내 안의 평화
-<오마 라우하 달> 전문
화자는 은은하게 밤하늘을 비춰주는 ‘달’을 가슴에 품고 산다. 시집 속 다른 시에도 몇 번의 ‘달’이 뜨고 진다. 그중 발원한 ‘달’이 하루를 마감하고 “투명해진 호수 속으로 해는 지나고 달은 잠긴다”(<돌을 새라고 생각할 때>)는 수면에 잠긴 ‘달’의 이미지를 쉼(저녁)의 시간으로 환기하고 있다. 달이 잠기는 ‘호수’도 삶의 반경인 저녁의 안온함으로 온유한 서정을 빚어낸다. 그렇게 비춘 ‘달’은 태초부터 절망과 고통의 시간에 갇힌 상처를 사랑으로 치유한 전유체다. 천 사람, 만 사람의 소원을 다 들어주며 수만 년을 같은 모습으로 떠 있다. 화자의 가슴속에 뜬 달도 그중 하나다. 다들 가슴에 간직하고 있는 달은 보름 만에 뜬 만월이 아닌 수시로 변화하는 세상사를 품고 있다. ‘오마 라우하 달’도 그런 주술적 상상력이 추상적으로 변주되면서 형상화된 인간의 소망을 담은 전형이다. 핀란드 사람들의 가슴으로 뜨고 지는 달은 숲으로 둘러싸인 호수를 지나고 순록이 오가는 길을 따라온다. 숲으로 돌아가는 길을 따라가며 그리움 같은 그윽한 달빛으로 날마다 안부를 묻던 정겨운 달이다. 그 달이 1,500년 전 백제의 한 여인이 ‘정읍사’를 읊으며 장사 나간 지아비의 무탈한 귀가를 애절하게 전했던 달이다. 밤에만 뜨는 달이 아니라 어둠을 비추는 달이어서 아득하게 밀려오는 온기 가득한 시간을 다독이며 과거를 지나온 것이다. 오늘 밤 떠 오를 달은 과거를 회상하고 현재에 머물지 않고 미래를 추상하고 있다. 영원을 상징하는 달을 통해 “내 안의 평화”는 이루어진다. 그런 믿음에도 간혹 어긋난 일상을 경험한다.
정해진 장소, 정해진 시간
어김없이 기차는 출발한다
간발의 차로 목전에서 기차를 놓친 아쉬움보다는
하마터면 다른 기차에 몸을 싣고
엉뚱하게 출발할 뻔함에 가슴을 쓸어내린다
방향이 같고, 목적지가 같다고
하물며 나란히 놓여 있다고
초대받은 자의 자리가 아님은 불편을 초래할 뿐이니
각자의 선택한 몫이 다르고
속도가 다르고, 비교의 대상도 아니다
-<익산역에서> 부분
한번 기회를 놓치면 되돌릴 수 없는 것도 있다. 어쩌다 인간은 외통수를 치는 것을 알았는지 무작정 앞으로만 질주하려 한다. 한번 정한 방향으로 열차가 놓이면 열차의 생명이 다할 때까지 그 방향으로 달려야 한다. 어찌하다 화자는 타야 할 기차를 놓치고 만다. 그 기차를 놓치게 된 것은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익산역은 호남선과 전라선이 교차하는 곳으로 KTX 환승역이다. 이용 열차 편수만큼 넉넉하지 못한 선로의 플랫폼에서 동시 출발시키다 보니 혼동했던 듯하다. 한 철로 위에 같은 방향으로 정차한 목포행과 여수행 열차를 보고 착각을 한 것이다. 시간 차이가 거의 없는 출발 시간과 배선 문제지만, 깜빡해 화자가 확인 미숙으로 그 열차를 탔다면 일정을 망가뜨리는 낭패를 볼 수 있다. 말하고자 한 것은 잘못 탈 뻔한 기차가 아니다. 화자가 말하고자 한 것은 살다 보면 발생할 수 있는 일상의 한 사건일 뿐이다. 단념과 체념은 다른 것으로 화자는 체념을 통해 촉발된 사유를 긍정으로 이해한다. “방향이 같고, 목적지가 같다고/ 하물며 나란히 놓여 있다고/ 초대받은 자의 자리가 아님은 불편을 초래할 뿐이니/ 각자의 선택한 몫이 다르고/ 속도가 다르고, 비교의 대상도 아니다”라며 경계한다. 삶의 여유로 돌아가 보자. 잘박 잘박 향기가 밴 시간을 밟고 나선 걸음이 가볍다.
하늘 궁창이 내려왔나
아름다운 저 표정을 보라
님 오시는 길이었던가
터지는 꽃봉오리들이 반긴다
두 팔 벌려 기다리고 있었을
별들의 속삭임이 연꽃 속에 충만하다
어쩌란 말인가
어화둥둥 향기가 피어난다
* 부여읍 소재 백제의 별궁 연못
-<궁남지에서> 부분
시인은 ‘궁남지’를 돌아보며 시간을 초월한 과거로 거슬러 간다. 백제 무왕이 되었다는 서동과 선화공주의 아름다운 이야기가 전설처럼 내려오는 부여 궁남지를 찾아간 시인은 “하늘 궁창이 내려왔나/ 아름다운 저 표정을 보라/ 님 오시는 길이었던가/ 터지는 꽃봉오리들이 반긴다”라며 연꽃이 만개한 ‘궁남지’의 비경에 빠져있다. 무왕의 출생 설화와도 연관이 있어 그러했을까? 백제 무왕이 별궁에 조성한 인공 연못이라니 세월의 연륜도 만만치 않다. 연꽃의 향기가 은은하게 피어올라 천 년이 넘은 세월을 고스란히 전해주는 듯하다. 궁남지 안 연꽃을 바라보며 잠시나마 세상사를 잊은 듯 “분홍 입술연지 바르고/ 손잡아 빙 돌려주는 너의 숨결/ 연밥 한 톨 입에 물고” 황홀경에 빠져들었다. ‘궁남지’의 시 전경은 아름다운 긍정으로 발현한 사랑에 근원을 두고 있다. 결국 풍경을 시적으로 환기하는 과정은 감각에서 비롯됨을 알 수 있다. 시선과 후각을 통해 현재와 과거를 되돌아보며 궁남지의 연꽃 비경에 몰입할 수 있었던 것도 시간을 초월한 파동의 동조화가 맞닥뜨리는 접면을 증폭했기 때문이다.
<은파에서>도 “둘레길 따라 곁을 내주는 호수/ 색색 단풍 옷을 입은 나무들이 느리게 빛난다/ 꼭지를 튼 날개에 바람이 닿으면 은빛으로 팔랑이는 조각구름/ 잠시 머물다가는 사람들이 은파 햇살에 포위된다/ 물결치듯 흔들리는 이파리들의 환몽/ 발효되는 그리움이 선명하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도 현상에 대한 몰입에서 가능하다. 수면의 잔잔한 파문이 ‘은파 햇살’을 받아 유현한 파동을 이뤄낸다. 수평을 비집고 나온 햇살은 ‘은파 호수’의 잔물결이다. 시인은 바람에 일렁이는 호수의 동심원을 살랑살랑 흔들리는 나뭇잎으로 변주한다.
그렇게 감상의 공명에 완전한 동화를 이룬 것도 풍부한 시적 감성으로 볼 수 있다. 풍경이 보여주는 현재를 삶의 전경으로 일체화하는 상상은 유형을 달리하며 나타난다. <구례 벚꽃>의 “무언無言이 주는 신뢰감에/ 걸음을 옮길 때마다 울컥하게 한다// 활짝 웃음을 보내는 우듬지/ 더없이 반가운 어느 봄날 꽃길”에서 삶의 유전流轉으로 다가간다. 떨어지는 꽃잎에 대한 안타까움은 생명의 유한함이다. 그 소실된 공간을 또 다른 우듬지가 메우고 있다. 돌고 도는 인생의 유한함도 바람에 떨어지는 벚꽃과 별반 다를 것 없는 생의 비의로 다가간다.
지금껏 신양옥 시인의 시를 살펴보며 시가 지향하는 세계를 공감해보았다. 일상의 일탈된 영역이 문학의 전경이 아니란 것을 보여준다. 순간적으로 감각한 대상이 감성을 도발하고 언어적 상상력으로 이전되어 확장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시는 사유 속 고뇌를 존재 의식으로 이전하여 현실을 문학 자장 속에서 구현하게 한다. 또한 자연 속 사물을 통해 고달픈 삶을 희석하고 긍정적인 인식으로 환기하는 것도 시가 갖춰야 할 덕목이기에 바람직한 담론으로 볼 수 있다. 자신을 되돌아보는 시간이 삶의 기회로 끝나지 않고 깊은 침묵이나 고요한 사유를 거쳐 언어로 구체화한다. 작거나 크거나 입었던 상처는 불합리와 유무 자체를 해체하여 성찰 즉 긍정으로 나아가게 한다. 시가 보여줄 수 있는 확신과 소망 그리고 희망이 되어줄 수 있다는 기여의 한 전형이다. 어차피 시는 시간의 문학이다. 유한한 시간을 건너온 제반 현상에서 집중할 수밖에 없는 삶에 대한 애착이 시로 발현한 상상력이고 그것을 형상화한 모습이 시라고 볼 때 꼭 있어야 할 존재의 가치는 가슴 안의 ‘사랑’ 일 것이다. 우리가 살아온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까지를 통틀어 본다 해도 상처나 고통은 소멸될 수 없지만, 잊어야 할 비망록이기 때문이다. 그것마저 그리움으로 몰입한 사랑이라며 시적 세계로 이끌어주는 신양옥 시인을 만나보았다.
흐릿한 시력 너머
말갛게 익어가는 시간의 소리가
세상 문밖을 향한다
-<중년의 나이> 부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