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약전>
"아1 요, 순, 우, 탕임금이 대대로 주고받았던 것이 무엇인가? 이 사람은 길 끊어진 나루터에서 바른 길을 찾아내고, 쇠미한 도통의 큰 명9命)을 이었으며, 어긋난 것을 배척하고 숨겨진 것을 드러내어, 우뚝하게 도학의 종지가 되는 저술이 서고에 가즉한 사람이니, 이 책은 단지 전체 중의 극히 한 부분일 뿐이가. 그의 학문을 '고금을 초월한 것'이라고 해도 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아! 과거가 백세라면 미래는 천세이니, 내가 어찌 감히 내 동생이라고 하여 말하기를 꺼리겠는가?"
<홍길주>
"근세에 다산 정약용이 고금에 박학하여 짝할 이가 없었다."
<황현>
'정다산의 이름은 약용인데, 남인이다. 정조 때에 급제했는데, 벼슬은 승지에서 그쳤다. 일찍이 초계문신으로 내각에 들어가 크게 칭찬을 받았는데, 이 때문에 시기하고 질투하는 자들이 많아졌다. 형 약종의 옥사에 연좌되어 강진으로 귀양 갔다가 19년 만에야 비로소 풀려났다. 유배지에 살면서 할 일이 없어 고금의 학문을 연구하였으며, 백성을 살리기 위한 나라의 정책에 마음을 두고 토론한 것을 저술하였다. 근원과 끝을 다 찾아내어 현실에 쓸모가 있는 학문이 되기에 힘썼으니, 모두 후세에 본이 될 만하였다. 목민심서, 흠흠신서, 방례초본, 전제고 같은 여러 책들이 그러하였다. 우리나라에서 이런 학문은 거의 앞에도 없었고 뒤에도 없었다고 할 만하다. 반계와 성호의 학문에 비하여 더 큰 이득을 베푼 분이다."
<정인보>
"선생(다산) 1인에 대한 연구는 곧 조선사의 연구요, 조선근세사상의 연구요, 조선의 심혼(心魂)의 명에(明銳) 내지 전조선 성쇠존망에 대한 연구다."
<최익한>
"다산의 실사구시적 학문이 비록 변증법적 유물론과는 아무 관련이 없고 또 있을 수도 없으나 그는 인간의 이성을 선협적인 것으로 보지 ㅇ낳고 인간의 실천 과정에서 성취되는 것으로 보았으므로 공자가 말한 '상지(上智), 하우(下愚)의 구분에 대해서도 종래 설명과 같이 선천적 성품의 구분으로서가 아니라 후천적 습성의 구분으로 보았다. 그리하여 사람들에게 누구라도 노력하고 실행하면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음을 가르쳤다. 이와 같은 이성론적 철학은 당시로서는 진보적 개혁적 사상이었다. 다산은 봉건사회의 양반 귀족적 특권을 옹호하며 그의 신비성을 조장하는 미신과 잡신(雜信)과 숙명적 관념을 반대했다. 예를 들면 구시대 천문학 하도낙서, 음양오행설, 참위설, 천간지지, 풍수, 택아, 사주팔자, 관상술 내지 동양의학이 촌(寸), 관(觀), 척(尺)을 운운하는 맥결(脈訣) 등, 과학의 실증에 위반되고 인민대중의 생활에 유해 무익한 모든 것을 배척하고 실용주의를 주장했다."
<이을호>
"다산실학은 육경사서의 기초학 위에, 일표이서가 그 응용학으로서 하나의 조화된 수기치인(修己治人)의 체계가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실증, 실용, 성실, 실심 등의 모든 실학적 요소들이 그 구성요소로서의 구실을 다하고 있다."
<프란시스코 수니가(Franclsco Zunlga)>
"한국의 사상가들 가운데 아마도 다산이야말로 민주주의 이념을 가장 명쾌하고도 실질적으로 펴 보였던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숱한 저작들을 통해 다산은 민중의 복리증진을 위한 각종 개혁사상을 주창하였을 뿐만 아니라 민본, 민생, 민문(民文)사상을 폭넓게 전파하기에 힘썼다."
<필립 아이반호(Philip J, Ivanhoe)>
"그는 그의 시대의 상식(common knowledge)에 도전을 했고, 많은 경우에 그것을 성공적으로 논박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유교적 전통보다 정확한 이해의 길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