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오는 사람들
박거복 지주
처
수국 딸, 여학생
노모 구 창경궁 나인
영팔 처남, 전재민(戰災民)
영팔의 처
맹첨지 노복
초국 벌목부
진이 그의 딸
곽목사 여학교 교장
윤이곤 군수
막봉이 거복의 소작인
하동정
청년단원
목수
옥수수 투기는 사나이
곤충채집망을 든 아해
제1막
남선(南鮮)의 어느 초읍.
삼대째 내려오는 지주 박거복의 저택.
벽은 두껍고 대들보와 기둥엔 통나무를 썼으며 검은 윤이 흘러 집 전체에 고가다운 연륜이 느껴진다. 무대로 사용되는 부분은 사랑채로, 좌반이 방이요, 우반이 미닫이 달린 대청마루이다. 마루 정면엔 책상과 문갑과 서류들. 이들 창연한 고색에 조화되지 않게 그 뒤로 폐물같이 우뚝 서 잇는 철비금고. 마루 뒷문을 내려서면 우물이 있는 안마당이고 축대 우이로 안채가 보인다. 대청 우변에 붙어 안으로 통하는 조고만 중문, 우변에 큰 벽돌제 이중창고, 창고에 철비중문과 창고 사이로 뒤곁이 있어 행랑으로 통한다. 좌변에 큰 행자(杏子)나무 한 그루, 수피엔 청태가 욱어졌으며, 나무를 경계하고 벌목부 초국의 집 판장(板檣)이 뻗었다. 판장 일부에 출입문, 나무 뒤로 행길로 통하는 일각후문.
삼십 년래 우량이라는 대폭우가 마을의 수백 가옥을 침탄하고 사라진 칠월 장마철의 어느 날 오후. 내리 쬐이는 뙤약볕 아래 습기와 곰팡이가 차츰 걷혀 간다. 창고 뒤에서 청년단들이 복구 공사를 하나 보다. 기운찬 노래소래와 사이사이를 뚫고 처녀들의 굴으는 듯한 자지러지는 소성이 텅비인 무대에 명랑히 들려온다.
전재민 영팔 행길로 들어온다.
영팔 누님. (대답이 없으므로 안을 향하야) 누님.
거복의 처, 흙을 털며 창고 뒤에서 나온다.
처 영팔이 아니냐? 통 안 뵈길래 일본으로 도로 들어갔나 했지. (마루로 올라가며) 어서 올라오느라.
영팔 (따라 올라가며) 그래 장마에 별일은 없었수?
처 큰 피핸 없었다. 뒷개천이 넘어서 축대가 허물어졌단다.
영팔 그럼 정미소 기계깐에두 침수했겠구려?
처 기둥 밑이 썩었든 참이라 이번 물에 그게 부러져서 까닥하면 집웅째 주저앉일 뻔했다.
영팔 누님넨 요행이 지대가 높았기 망정이지 얕었드래면 몽땅 가란질 뻔했수.
처 읍에서 무사한 건 아마 관청, 학교 같은 벽돌집들 빼놓군 우리집뿐일걸.
영팔 그럴걸요. 원체가 누님네 집은 주추를 튼튼이 다졌구 거기다 기둥을 통나무째 썼으니까. 오다가 수문리 앞을 지나는데 참말이지 눈뜨구 못 보겠습디다.
처 거긴 몽땅 쟁겼드래지?
영팔 집웅 우이루 구조선이 댕겼답디다. 사개나 들어맞게 지은 집이면 몰를까 수수깡 어이목으로 석냥갑처럼 얽어논 오막이라 그 신 물에 견뎌나겠소? 팔십칠 가호 중 주저앉힌 게 칠십여 호랍디다.
처 사람이나 상하지 안했는지?
영팔 네 사람이 죽구 열세 사람이 다쳤답디다.
처 쩟쩟, 저를 어쩌나?
영팔 잘들 죽은 셈이지요. 늙은 부모와 어린 자식새끼들 배고파 우는 것 눈뜨구 보는 것보단 죽어서 안 보는 게 되레 복이에요. 제방에 모두들 웅쿠리구 앉어서 침구, 의복 나부래기를 말리구 있는 걸 보니까 남의 일 같지 않습디다.
처 청년단들이 사전에 둑을 막었기 망정이지 그란했으면 왼 읍이 몽땅 쟁길 뻔했어.
영팔 이번에 그 사람들 공이 크지요. 그 억수같이 퍼붓는 비를 뚫구 구조사업들을 나갔으니까요. 수문의 방축이 끊어졌을 땐 소방대 경관대들도 좀처럼 달겨들지 못하는 걸 그 사람들이 결사댈 조직해 가지구 흙 처넌 가마를 미구 그 신 물결을 헤치구 들어가 메꾸지 않았수?
처 녀자들두 용감하드라. 집집이서 그 무건 세간들을 날러 내구, 감자하구 주먹밥을 들르구……. 우리들 처녀 시절엔 어데가 비 오는 날 외출을 해? 벼락 내리게.
영팔 시대가 그만큼 개명된 건 사실이에요.
처 우리집에두 아침부터 와가지구 저렇게 축대 끊어진 걸 고쳐주고 있단다.
영팔 누님네두요?
처 응, 여러 패루 나눠가지구 집집마다 댕기나 부드라. (판장 너머를 가르키며) 진이네 집에두 한 패가 와서 개천을 수리하구 있구.
이때 청년단원 한 사람, 뒤곁에서 나온다.
청년단원 아주머니, 톱 있거든 잠간 빌려주십쇼.
처 그럭허슈. (마루 밑 연장 그릇에서 꺼내주며) 톱은 뭘 하시게?
청년단원 다리 끊어진 거 니르켜 시는데, 말뚝을 잘를려구요.
처 수고들 하슈.
청년단원 원 별말씀을……. 우리 읍은 우리 청년들 손으로, 이게 우리들의 표어랍니다. (톱을 들고 다시 나간다)
영팔 저렇게 청년들이 와서 일해 주니까 매부두 여간 좋아하지 않으시겠군?
처 좋아하시는 게 뭐니? 일해 주는 거 다 부질없다구 내다보지두 않구 계시단다.
영팔 부질없다니요?
처 (소래를 나춰) 그 청년단들이 공산당패라는구나 글쎄.
영팔 공산당이요?
처 응, 그래서 근로봉살 해줘두 고맙지가 않으시다는 거야.
영팔 수해에 파손된 걸 고쳐주는데 공산당이면 어떻구 애국당이면 어떻단 말이에요. 그것두 돈이나 받구 해주는 일이라면 몰을까 순전히 무료봉사루 해주는 건데.
처 첨엔 그렇지만 일 다 끝마추고 나선 무슨 리율 부쳐서든지 돈을 청구할 거라구 그러신단다. 공산당 사람들이란 원체가 음몰 잘 하구, 넘겨잡구 뒤집어 씌우기가 일수구, 또 음흉해서 겉하구 속이 늘 달르다면서?
영팔 글쎄요. 그건 난 몰으겠오만 일한 값 달라구 하진 않을걸요.
처 나두 그 사람들이 품삯 달라구 할 것 같진 않드라만, 느이 매분 작구…….
영팔 그럼 매부 안에 계시우?
처 응.
영팔 난 또 어데 나가셨다구……. 그럼 오늘은 기분이 좋잖으시겠군요?
처 왜, 기분이야 하눌루 날르실 것 같지.
영팔 아, 청년단패 보기 싫어 문 닫구 들앉으셨다문서요?
처 청년단들이야 보기 싫지만, 오늘 오각하께서 오시거든.
영팔 오각하께서요?
처 응, 남선 큰 고을마다 댕기시면서 강연을 하시는데 오늘은 우리 읍에서 하시게 됐대.
영팔 그래서 정거장 앞에 학생들이 죽들 늘어섰었군.
이때 역으로 환영가는 각 학교, 동회, 회사단체들이 행진하며 불으는 애국가의 노래소래.
영팔 모두들 정거장으로 가나 보군. 누님, 그럼 지금 매부 기분 좋으시겠지?
처 그리게 하눌루 날를 것 같다구 안 그러니. 오늘은 니러나시든 맡으루 애국가를 불르시구……. 느 매부 창가하시는 건 시집온 후 오늘 첨 들었다.
영팔 (한 걸음 그의 앞으로 다가앉으며) 누님, 오늘은 일 년에 단 한 번밖에 없는 좋은 기회요. 이런 기횔랑 두번 다시 오지 않을 거요.
처 (무슨 영문인지 몰라) 닷다가 기회라니?
영팔 저 행자나무, 나한테 꼭 파시두룩 누님이 좀 얘기해 주슈.
처 저 고목낭굴?
영팔 네, 매부 기분 조실 때 후딱후딱 결말을 져버려야겠수. 요전부터 몇 번이나 부탁했지만 막무가내 듣질 않으십디다. 오늘 누님이 잘 좀 얘기해 주슈.
처 (당혹한 듯이) 내가?
영팔 네, 이 자재난 불경기 시대에 저런 귀한 낭구를 그대루 세워 둔다는 건 너무두 아까워요.
처 허지만 저 행자낭군 돌아가신 할아버님께서……
영팔 (말을 막으며) 누님두, 지금은 그때하구 시세가 달러요, 시세가. 할아버님은 전쟁이 니러날 줄이야 꿈에나 생각하셨겠수? 일본놈들이 개나리봇짐을 싸가지구 현해탄을 다시 건너가구 조선이 해방이 될 줄이야 생각이나 하셨겠냐 말이우.
처 그야 못하셨겠지만…….
영팔 그러니 매부가 이십 년 전에 하신 할아버님 유언을 꼭 리행하셔야만 할 리유는 없어요. 세상일이란 그때그때 형편에 따라서 처리해 나가야지 않겠소? 나두 엥간만 해두 이런 소리 안하겠소. 허지만 자식새끼들 데리구 목구멍에 풀칠이라두 허구 살려니까 체면불고하고 하는 거요. 그렇다구 난 뭐 저 낭굴 거저 달라는 건 아니에요. 삼천 원 현금으루 디리리다.
처 (약간 놀라며) 삼천 원?
영팔 네, 지하게 계신 할아버님께서두 삼천 원이면 잘 부른 값이라구 하실 거예요.
처 허지만 아무리 값이 좋다기루 벼 팔려구야 하시겠니?
영팔 그러니까 오늘같이 기분 조신 기회에 누님이 좀 얘기해 주시란 말이요.
처 내가 얘기했다구 그 고집 센 양반이 들을라구……. (안을 향하야) 여보, 여보.
거복의 소래 뭐야? 지금 바뻐. 손 띨 수 없어.
처 손님 왔어요.
거복의 소래 없다구 그래.
처 없다구 하긴……. 영팔이가 왔어요.
거복의 소래 뭐, 영팔이가?
처 네.
거복, 색실과 바눌을 들고 안마당을 거쳐 마루로 올라온다. 사십대. 목에는 혹이 하나 호박처럼 늘어져 있다.
영팔 매부, 안녕하셨어요?
거복 너 참 오래간만이다. 그래 언제 왔니?
영팔 지금 막 오는 길이에요. 그런데 웬 실하구 바눌은?
처 매부가 수를 노신단다.
영팔 수를요?
거복 하하하하. (하고 돌연 통쾌하게 웃는다. 웃을 땐 혹이 흔들리므로 한 손으로 바쳐들어야 한다)
영팔 매부가 수를 노신다니, 가마 타구 시집을 가실 작정이세요?
거복 하하하하.
처 오각하 환영회장에 깔 방석에 노신다구 한 달 전부터 저 야단이시란다.
거복 하하하하. 거 바누질이라는 것두 남 보긴 쉬워두 막상 들구보니 용이치 않드라. 수국이가 가르쳐 주는 대루 떠나가는데 통 맞질 않는단 말이야. 그래 옆에서 바눌귀에 실이나 꿰주구 있다.
이때 멀리 역전에서 군중들의 애국가 합창소래와 악대소래.
영팔 그런데 매분 정거장에 안 나가세요?
거복 응, 난 좀 볼일이 있어서……. 그 대신 할머니께서 나가셨으니까……. 그리구 수가 끝나는 대루 수국이가 갈 테니까. 넌 안 나가 볼래?
영팔 나가보구두 싶지만……. 당장 생활이 급하니까 통 마음에 여유가…….
거복 그래 요샌 어떻게 지내니?
영팔 그저 수용소서 복째구 있지요. 교사가 좁아서 모두들 운동장에다 거적 깔구 있었는데 이번 장마에 물바다가 돼서 뒷산으루 쫓겨들 올라갔지요.
거복 그럼 아즉껏 버리자리두 못 들어갔겠구나?
영팔 네, 배운게 도둑질이라구, 해먹을 건 가구장수밖에 없는데……. (하고 머리를 긁는다)
거복 왜놈들이 팔구간 게 원체 흔해서 좀체루 비싼 돈 디려서 마치려구들 안할걸?
처 돈 있는 집이서야 누가 일본 것들 쓰든 걸 쓸려구 하겠소?
거복 그럼 맹글어서 팔아 보지?
처 재료가 없어 맹글 수 있답디까?
영팔 흑단, 자단, 찌그, 라왕 등은 외국에서 들와야만 하는데 아직 무역허가가 안 나와서 재목상들이 수입을 못하구 있어요.
거복 (돈 얘기가 나오기 전에 미리 딸려고) 그럼, 난 좀 바뻐서 들어가니 누님하구 놀다 가거라. (하고 니러선다)
처 (눈치를 채고 붙들며) 돈 얘기 하러 온 게 아니라우.
거복 (무한하야) 누가 돈 얘기 할까봐 그래? 바뿌니까 그러지. (하고 마지못해 다시 앉는다)
처 사실은 저 행자나무에 관해서 당신한테 의론할 게 있어 왔다구 하우.
거북 의론? (하고 경계를 느추지 않는다)
영팔 매부, 얘기란 딴 게 아니라 나하구 대판에 가치 들어갔든 돌쇠 말입니다. 그 사람 맏딸이 이번에 서울 대갓집으로 시집을 가게 됐대요.
거복 돌쇠라니?
처 왜 서양집 뽀이루 있다가 조선 나와서 통역 바람에 출세했다는 강 건너 오서방 둘째아들이지 누구요?
거복 (그제야 생각난 듯이) 으음, 그 곰보?
영팔 네, 그 친구가 해방 후 미국사람한테 잘 봬서 일본 육군창고 물품을 불하받어 가지구 한 오백만 원 모았다는군요. 그래서 자기 딸 혼사엔 돈을 한번 흠뻑 쓸 모양이에요.
거복 그런데?
영팔 그 사람 딸이 성미가 까다러서, 보통 가게서 파는 양복장 의걸인 안 가주가겠다구 한다는군요.
거복 원, 건방진 년. 낫 놓구 기역자두 몰으는 년이 해방되었다니까 마구 날뛰는 꼴이란, 쩟쩟.
영팔 넓은 통나무를 잘라서 대패질 않구 베겨 낸 후 한시와 난초를 파서 문짝을 단 양복장만 사달라구 졸른대요. 그래 즈 아버지가 나한테 어떻게 짜볼 수 없냐구 하는군요. 돈은 요구대루 내겠다구 하면서…….
처 그런 좋은 주문을 받구두 재료가 없어 못한다는구려 글쎄.
거복 그러니 간단히 말하면 저 행자나물 벼줄 수 없냐 말이지?
영팔 …….
처 그 대신 우리한테 낭구값으루 삼천 원 내놓겠다구 하우.
거복 뭐, 삼천 원?
영팔 (그 이상 얘기하기 난처하야 주저하고 있드니 결심한 듯 줄줄 얘기해 버린다) 네, 삼천 원이면 저 행자나무로선 과히 싼값은 아닐 줄 알어요. 만사엔 물때가 있는 법이에요. 이런 좋은 기회에 팔아버리시는 게?
거복 (날카롭게) 영팔이 너 나한테 의론이란 건 고작 그거냐?
영팔 (기세에 질려) ……네, 네.
거복 령사관 공보 고쓰가일 위해서, 날더러 할아버님부터 삼대째 내려오는 저 행자나물 비란 말이냐?
영팔 …….
거복 으응? 그 모리배 딸년 혼인 장롱을 맹글기 위해서 날더러 대중정미소의 목숨보다도 귀한 저 나무를 비란 말이냐?
처 그러게 영팔이가 어디 억지루 비자는 거요? 의론하는 게지…….
거복 돌아가신 할아버님께서 나한테 뭐라구 유언하셨는간 너두 느이 누님한테 들어서 잘 알겠지?
영팔 …….
거복 그걸 날더러 삼천 원에 팔라구? 그야 나두 돈은 탐나. 돈을 저 철궤에다 모으는 것, 그리고 그 돈을 꺼내서 땅을 사는 것, 사실 그밖에 나한테 락이라는 건 없다. 허지만 그렇다구 돈을 위해 선조의 유지를 꺽을 순 없어.
영팔 허지만 매부, 저 한 그루 나무로 전재민 일가족이 갱생할 수 있다면 돌아가신 할아버님께서두 지하에서 만족하시지 않겠어요?
거복 듣그럽다. 그게 고인에 대한 손주로서의 례법이냐?
처 여보.
거복 (씹는 듯이) 가 다구, 오늘은.
처 아니 여보, 몇 달만에 온 사람을……. (동생에게) 언짢게 생각 말어라.
영팔 (니러서며) 누님, 그만 가보겠수.
처 너두 어린애처럼, 가라구 했다구 금새 니러서니? 느이 매분 원체가 그런 분 아니냐?
영팔 또 가봐야 할 곳두 있으니까……. (마루에서 내려와) 매부, 난들 어찌 할아버님의 유언말씀을 몰으겠소? 허지만 소문에 들으니까 매부가 저 나물 이번에 비신답디다. 이왕 비실 바에야 날 주시라구 한 거예요. 고향 떠난 지 십 년, 한땡 걸치구 자전거 끌구 댕기며 작막한 세간 나부래기들 전쟁통에 다 뺏기구, 그래두 해방되구 독립됐다구 고향리라구 찾어오니까, 몸 부칠 집두 없구, 배급 쌀두 없구, 일자리두 없군요. 어린 새끼놈은 강냉일 잘못 먹구 맹장념에 걸려 널부러졌지만 약 한 봉 사멕일 돈이 없어요. 예편넨 못 먹어 부황병이 걸렸구……. 몇 번이구 망서리다가 매불 찾어와 사정얘길 한 거예요. (눈물이 쏟아져 나옴으로) 누님, 그만 가보겠수. 안녕히 계슈. (영팔, 저전거를 끌구 소연히 나간다. 멀리 역에선 군중의 애국가와 악대소래 점차로 고조돼 간다)
처 (후문까지 동생을 바래다주고 돌아오며) 당신두, 아무리 행자나무가 중하기루 그렇게 야박스럽게 말하는 사람이 어데 있수? 할아버님 유언도 유언이지만 사람부터 살구 봐야 할 게 아니오?
거복 (호통을 친다) 당신은 가만있어. 설사 내가 이 나물 빌려구 하드래두, 매부 그건 돌아가신 할아버님의 의사에 어그러지는 일이요 하구 말리는 게 손주로서의 의리가 아니야? (하고 신발을 끌고 행자나무 밑으로 간다. 감개 깊은 듯이 꼭대기를 쳐다보구 섰드니 돌연 규환한다) 이거 봐! 저, 저기 거미줄이 쳐 있어.
처 사람 목구멍에두 칠 지경인데, 낭구에 안 치겠수?
거복 그 장대 이리 집어. (처가 움직이지 않으니까 자기가 가서 집어들고 와 허공을 치며) 거미란 놈은 사람이 내던지구 돌보지 않는구나 생각하면 곧 똥구녕에서 실을 뽑기 시작하는 법이야. 저기다 저렇게 많이 쳐논 게 당신이 이 나무를 건사하지 않는 증거야. 할머님께서 생존하셨을 땐 일 년 열두 달 거미줄이라군 찾어볼래야 볼수가 없었어. (하고 연성 거미줄을 걷는다)
이때 거복의 딸 수국(십팔 세, 여학교 졸업) 안에서 나와 마루로 상체를 디민 채 말을 건는다.
수국 아버지, 아까 그 색실하구 바눌 어떡했어요?
거복 (장대를 멈추고) 실! 응, 참 깜박 잊었드랬구나. (처에게) 그 방석 옆에 있어. 집어줘. (하고 다시 후두른다)
처 (화가 나서 동치 않는다)
수국 어머니, 얼른 집어, 시간 없어. 세시에 도착하실 텐데, 빨리 해다가 회장에 까러 놔야지.
처 (집어서 팽개치듯 던져준다)
역전의 애국가와 악대소래 점점 더 고조돼 간다.
거복 (장대를 치우고 나무 부럭지 노출된 곳을 괭이로 흙을 긁어서 덮으며) 당신 오장군 오시는 데 안 나가볼 테야?
처 동생 식구가 굶어죽게 됐다는데 한가하게 정거장에 나가구 있겠소? (하고 안으로 들어가 버린다)
이때 옆집 뚫어진 판장 사이로 흙이 날러와 거복의 혹을 때린 후 전신에 흩어진다.
거복 (혹을 붙든 채 악을 쓴다) 어떤 놈이야, 남의 집에다 흙을 던지는 놈이?
여자목소래 아저씨 미안합니다.
거복 살인을 하구두 미안하다문 그만이야?
여자목소래 잘못했어요. 판장 밑으루 던진다는 게 앞으루 넘어지는 바람에…….
거복 (흙을 털고 판장 구멍을 디려다보며) 너, 진이 아니냐? 뭘 파구 있니, 거기서?
진이의 소래 밭 좀 맹글려구.
거복 밭?
진이의 소래 네.
거복 (펄쩍 뛰며 머리를 구멍으로 틀어 넣고) 거기다 밭을 맹글면 어떡허니? 행자나무 뿌럭지가 온통 상하지 않냐?
진이의 소래 뿌럭지만 건디리지 않으면 되지 않아요?
거복 건디리지 않는다니, 거길 파는데 어떻게 안 건디리구 팔 수 있단 말이냐? 안 된다 거긴, 절대로 안 된다.
진이의 소래 어째서요? (하고 말이 뚝 끊어진다)
이윽고 후문으로 초국의 딸 진이(십팔 세, 수국의 동급생) 삽을 들고 달려 온다.
진이 아저씨 너무해요.
거복 누가 할 말인데? 도대체 거기다 밭을 맹글어서 어쩌자는 거냐?
진이 배추하고 무하구 심을래요.
거복 무배출? 김장신 팔월 지나구 뿌려두 늦지 않다. 뒀다라.
진이 지금 파구 거름을 줘놔야 썩지요. 빈터에 밭 맹그는데 아저씨가 무슨 상관이세요?
거복 빈터라니? 거긴 빈터가 아니야.
진이 어째서 빈터가 아니에요?
거복 어째서라니? 아 행자나무가 이렇게 우뚝 서 있는데 거기가 어떻게 빈터란 말이냐?
진이 낭구 슨 덴 빈터가 아니지만 뿌럭지 주위는 텅 볐으니까 번터지 뭐예요?
거복 지금 와서 빈터니 아니니 언쟁했댔자 소용없는 일이구……. 무배출 심그는 것두 좋지만 그것 때문에 이런 유서 깊은 고목이 죽는다는 건 동리나 나라를 위해서 좋은 이러이 아니야. 그러니 뿌럭진 터럭지 하나라두 건디리지 말어라.
진이 그건 억지의 말이에요. 한두 가닥 아니구, 우리집 부엌을 뚫구 대문 밖까지 뻗지 않았어요? 우리 마당치군 어딜 파드래두 괭이 끝에 모근이 걸리게 돼요.
거복 (경천하며) 그럼 안 된다. 한 가닥 모근에두 목숨이 들어 있어.
진이 한 가닥 두 가닥에 꺼떡이나 할 낭구에요? 아저씬 정말 팟쇼야.
거복 뭐, 뭐?
진이 독재란 말이에요. 남의 의사는 전연 무시하구 자기 주장만 관철시킬려는 게 독재가 아니구 뭐예요? 쌀값은 자꾸 올라가구, 물간 비싸구, 아버지 버시는 걸론 밀가루 강냉이두 먹기 어려우니 손바닥만한 빈터라두 닐궈서 김치거리라두 뽑아 먹두룩 해야지 않겠어요?
거복 그건 너희집 사정이지. 흔한 게 논밭인데 해필 거기다 싱거야만 맛이냐?
진이 아저씨 같은 지주댁엔 흔한 게 논밭일지 몰르지만 우리같이 삼팔 이북에서 넘어와서 그날 벌어 그날 먹는 빈민한텐 한 뼘 땅두 귀해요.
거복 진이가 뒤곁을 갈아서 김치 깍두길 맹글어 디리는 것보담 하로바삐 학교 나가서 렬심히 공부하는 게 아버지한텐 효도구 또 고생을 덜해 디리는 길이야.
진이 우리 학원이 민주화되기까지는 절대루 나갈 수 없어요. 신도들한테 하나님보다 천황이 높다구 연설하구 우리들 아버지와 오빠를 징용으로 몰아 넣은 악질 친일파 목사가 어떻게 신승한 학원의 교장이 될 수 있으며 그 밑에 무슨 진정한 학문의 길이 열리겠어요?
거복 곽목사는 신앙가야. 그리고 인격자야.
진이 그래서 독실하구 실력 있는 교수들을 모주리 몰아내구 자기한테 알랑알랑하는 텅빈 대가리들만 데리구 있군요. 그래서 이번 스트라잌의 주모잘 뒷구녁으로 경찰에 밀고하고 학생들을 협박해서 강제등교시켰군요. 조선이 현재 이렇게 혼란돼 있고 통일이 지연되는 건 이들 친일파, 팟쇼분자들 때문이에요. 민주주의란 구호 뿐이고 일체가 독재자의 손 아래 운영돼 나가구 있기 띠문이에요.
거복 건방지다 야. 우리 수국이 본받을까 무섭다. 조선이 독립이 안 되는 건 너 같은 공산당패들 때문이라구 오각하께서두 말씀하셨다. 교장하구 선생을 가랭이 밑에다 갈구 앉일려는 너 같은 적색분자들 때문에 미국사람들이 독립을 시켜 줄래두 시켜 줄래두 시켜 줄 수가 없다는 거야. 독재구 민주주의구 간에 그 낭구 밑은 손톱 하나 대지 말어라. 거기까진 재판소 등기에두 우리 소유루 적혀 있으니까…….
진이 (뭐라구 답변하려다가) 그만두세요. 그 잘난 땅 안 파먹을 테니. (하고 후문을 꽝 닫고 나간다)
처, 들어오다 진이와 마주친다.
처 (진이가 나가구 나자) 당신 진이더러 뭐라구 그랬소?
거복 아 글쎄, 나무 밑등을 파지 말래니까 날더러 팟쇼분자라는 거야. 그리구 조선이 독립이 안 되는 건 곽교장하구 나 같은 독재자들 때문이라는 거야. 건방진 기집애 같으니.
처 아, 비싼 푸성구 사먹을 수 없어, 한 포기라두 심거 먹으려는데 못하게 했으니 그런 소리 않겠소?
거복 사실 그렇다문 나두 두말 안해. 어릴 때부터 가치 자라난 초국이네 아닌가? 밭 한 장 기름진 걸루 내줘두 아깝지 않아. 허지만 그 기집앤 거기다가 무배출 심그려는 건 아니야. 말하자면 이 행자나무가 보기 싫다는 거야. 오십 리 밖에서 우리 동리 문표가 되는 이 행자나무가 미워 죽겠다는 거야. 하눌을 덮구 있는 저 가장구 때문에 갑갑하구 숨이 맥혀 죽겠다는 거야. (점점 격해진다) 도끼루 쿡쿡 찍어 버리구 싶구, 톱으루 쓱삭쓱삭 켜 버리구 싶구, 미나리 뽑듯 뿌리채 뽑아서 멀찌감치 팽개쳐 버리구 싶다는 거야. 참아 그럴 수가 없으니까 밭을 맹그네 하구, 이렇게 뿌럭지들을 짓와서 제풀에 말라 비틀어 죽두룩 하자는 거야. 흥, 허지만 그렇게 눅눅히 죽진 않을걸. 밭고랑에 아무러케나 자란 댑싸리가 아니야. 오백 년이나 풍우에 겪어 왔어. 그렇게 호락호락 죽을 상싶어? (하고 부들부들 떤다)
처 당신두, 그애가 무슨 원수가 졌기에 우리 나물 못 먹어 한단 말이요?
거복 (처의 말은 귀담지 않고) 흥, 사람은 우수꽝스럽게 봐두 유만부동이지. 우리집 행자나무가 즈이들한테 돈을 달라나, 밭을 달라나? 뭣 때문에 이 나무를 동래 녀석들 눈에 가시란 말이야? 이게 모두가 청년단 하선생 농간이야.
처 그런 터문이 없는 소린?
거복 (역사하는 곳을 들여보며) 그 사람이 동래 젊은 녀석들한테 우리 나무 악선전을 하구 뒤에서 부채질을 해서 진이 같은 풋내 나는 기집애까지가 덩달아 그러는 거야. 아까 영팔이가 삼천 원에 벼팔라구 한 것두 분명쿠 그 사람이 뒤에서 충동일 시켰을 거야.
처 (애가 나며) 그이가 우리하구 무슨 사감이 있어 저 나무 악선전을 하겠소?
거복 저 나무가 봉건잔재라는 거야. 그리구 일제잔재라는 거야. (격앙하며) 그리구 날더러 봉건주의자구 친일파, 민족반역자라는 거야.
처 그럴 리가 있소? 그이가 그렇다면 저렇게 단원들을 데리고 와서 우리집 일을 해주고 있겟소? 남의 은혜를 곡갑게 받었다간 죄 받는다구……. (사람 기척이 남으로 뚝 그친다)
청년단위원장 하동정, 곡간 뒤에서 나온다. 뒤따라 단원 한 사람.
단원 톱. (하고 처에게 돌려준다)
동정 대강 먼점 형대루 복구된 듯싶습니다. 삽하구 괭인 씻어서 곡간에 디려놨습니다.
거복 (계면쩍은 듯) 수고들 하셨소.
처 (대야다 물을 떠다 주며) 손들 씻으시지요.
동정 뭘요, 또 담 장소루 가야 할걸. (단원에게) 요담은?
청년단원 (수첩을 넘기드니) 소부리 이십구 번지 정우삼씨 집으로부터 그 뒤루 쭉 연달아섭니다.
처 여러분들 애써 주셨는데 점심두 못 대접해서.
동정 원 별말씀을.
거복 (마지못해) 섭섭해서 쓰겠소? 올라가서 담배라두 한 대 피구 가시지.
처 손 씻구 올라가시오.
동정 그럼 잠간 앉었다 갈까요. (손을 씻으며) 단원들 데리고 먼점가 있게.
청년단원 네. (하고 주인 부처에게 인사한 후 곡간 사이로 나간다)
처 (방석과 담배를 권하며) 이번 장마에 큰 욕 보셨지요?
동정 이것두 건국에의 조고만 봉사니까요.
처 그럼 앉어 노십쇼. (주렴을 친 후 안으로 들어간다)
동정 이번 비가 우량으로 삼십 년래 호우라는군요. 수문리하고 정거장 레루 너무 구월산 공동묘지 토막들만 해두 침수 가호가 이백 호가 넘은걸요.
거복 그저 집만은 튼튼하게 사개 맞게 짓구 볼 게야. 산 밑에다 석냥갑 엎어논 듯 뚝다거려 놨으니 이런 비에 좀 잘 문어지겠나?
동정 그야 누구나 댁처럼 이런 크고 튼튼한 기와집에서 살고 싶지 그런 토막에서 살고 싶겠어요? 다 세상 뜻대루 안 되니까 그렇지요.
거복 허지만 이번 장마루 읍은 깨끗이 됐어. 차 타구 지날 적마다 그놈의 우중충한 토막들만 보면 불결하구 흉해서 구역질이 나드니 이번 기회에 아주 깨끗이 잘 청소됐어. 호열자만 하드래두 그렇지, 구월리하구 수문통서 발생했거든.
동정 동정은 못하실망정 그렇게 말씀하실 거야…….
거복 …….
무거운 침묵이 상당히 긴 동안 계속.
동정 (이윽고 입을 연다) 사실은 수국이아버님께 도장 하나 찍어 주십사구 할 게 있습니다.
거복 (경계하며) 새삼스럽게 도장이라니요?
동정 근로봉살 해드리구 그 자리에서 찍어 주시라는 건 교환조건 같습니다만……. 그래 오늘은 이대루 돌아가구, 내일 다시 찾어 뵐려구 했지만 기왕 얘기가 나온 김에…….
거복 (기선하야) 수해구제금 말이요?
동정 네, 네……. 허지만 그렇게 앞질러 말하시면 저이가 되레…… (하고 계면쩍은 듯이 기부대장을 꺼낸다)
거복 구제금 얘기라면, 말씀 말어 주시오. (하고 딱 잘라 거절해 버린다)
동정 새삼스럽게 제가 말씀 여쭙지 않어두 더 잘 아시겠지만 이번 우리 읍을 위시해서 남조선 일대에 걸친 수해는…….
거복 하선생, 그 사람들이 집을 잃구, 침구와 의복을 잃구 로두에서 방황하구 있는 건 나두 잘 압니다.
동정 그들의 생사문제는 현재 시각을 다투게 됐습니다. 물론 군정청을 비롯하야 도와 군에서도 여기에 대해서 대책을 강구 중에 있을 것이지만, 수해구제가 당면정치의 전부가 아닌 이상 여기다 시간과 재정을 경주할 수는 도저히 불가능할 겁니다. 그래 저희들 청년단으로선 독자적으로 의연금 모집운동을 니르키기루 했습니다. 여러분들의 동정과 따뜻한 구원의 손이 없이는 그들의 앞에 오즉 기아와 죽엄만이 기대리고 있다는 것을 리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거복 하선생, 나는 이번 수해에 관해선 다소 견해가 달르오.
동정 달르시다니요?
거복 이번 수해는 그 사람들에게 좋은 시련이었다구 생각하오. 그렇게 산에 나무를 리발하듯 벼다 땠으니 수해가 안 날래야 안 날 수가 있겠오? 이번에 뼈아픈 경험을 해야만 또다시 나무를 비지 않을 거요. 그러니 반성할 기회를 주기 위해서라두 당분간 구조는 안하는 게 졸 듯싶소.
동정 나무를 많이 빈 것이 재해의 크나큰 원인의 하나이긴 하지만, 나무를 우리가 안 빌래야 안 빌 수 있었습니까? 일 년에 우리 군에 할당된 송탄유 공출량이 몇 석이었습니까? 갓득 없는 산에서 대동아전쟁 기간 중 사 년을 두구 그 군용재와 송탄유재를 비어냈으니, 탓을 하신다면 공출을 강압한 일제와 그의 앞잽이 군수, 서기들을 하셔야지, 무고한 리재민들한테 하실 건 아니라구 생각합니다.
거복 거지는 나라두 못 구한다구 했오.
동정 그야 전적으루 구할 수는 없겠지요. 허지만 당장의 연명을 하는 동안 앞이 또 티일 게 아닙니까? 그리구 이번 수해 동포들이란 거지와는 전연 성능이 다를 것입니다. 이 고경만 넘겨주면 그 다음부터는 자력으로 생계를 니어 나갈 거예요.
거복 하선생, 나는 돈이 아깝거나 또는 내놓기 싫어서 이러는 건 아니요. 털어놓구 얘기하면 돈이 없소. 돈이 없는 게 아니라 현금이 없소.
동정 현금이 아니라두 괜찮습니다. 동정을 표시하시면 그만이니까, 헌 옷이나 이불 샤쓰 같은 거라두…….
거복 내 생활이 근검절약주의라, 뭐 한 가지 여벌이라군 우리집에 없소.
동정 정 그러시다면, 저 행자나무라두…….
거복 (펄쩍 뛰며 기성에 가까운 소래를 발한다) 해, 행자나무를요?
동정 (태연히) 네, 저 나무는 작년 이맘때 수국아버지께서 자진해서 해군에 공출하기루 하셨든 게 아닙니까? 그것 때문에 서울 해군 무관부에서 소위가 내려왔구, 역장, 군수, 경찰서장을 위시해서 군관민이 전부 나와 이 나무의 장행(壯行)을 축하했든 것입니다. 막 빌려구 하든 참에 력사적인 일황의 정전방송이 있어 군함 재료의 공출을 면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니까 그때 공출하신 셈 치구 기부해 주십쇼. 새로운 시대에 온갖 장해물인 일제의 잔재를 뿌리 뽑아 버리는 것두 될 겸, 일석이조일 것입니다.
거복 하선생, 저 나무는 할아버님께서 돌아가실 때 나라를 위해서 유익히 쓰두룩 하라고 아버님께 유언하신 나무요.
동정 그 유언을 아버님께서 수국아버지한테 계승시키고 돌아가신 건 아마 이 동래에서 몰으는 사람이 없을 겝니다. 허지만 수국아버지께선 작년 공출을 자진 신청하실 때두 군수와 서장한테 나라를 위해 써달라구 하시지 안했습니까?
거복 그, 그땐 어떤 게 나란지 사실 분간을 못했었소. 허지만 이렇게 해방이 돼서 내선일체란 샛빨간 거짓말이구, 우리는 결코 일본놈의 황국신민이 아니라는 것을 확실히 알았소. 그러니 이번에야말루 우리 대한 나라를 위해서 쓸 작정이요.
동정 영팔씨가 저 나무로 가구를 맹글어 갱생할 수 있고, 천여 명 수해동포가 그 돈으로 구원될 수 있다면 그야말루 할아버님 유언 말씀을 충실히 리행하는 길이 아니겠습니까?
거복 하선생은 동포 동포 하시지만, 동포엔 전재민과 수재민만 있답디까? 공장주인도 있구, 상인두 있고, 곽교장 같은 목사두 있구, 순사 형사두 있구, 또 나 같은 지주도 있소. 나는 이 사람들, 즉 다시 말하면 조선 삼천만 동포들을 다 가치 위해서 쓰구 싶단 말이요. (점점 흥분하여진다) 목전에서 잠간 고생하는 전재민 수재민들만이 아니라, 삼천리 우리 금수강산에 사는 삼천만 대한민족 전부를 위해서 쓰구 싶단 말이요. (하고 마루를 친다)
동정 (얼떨떨하야) 삼천만 전부를요?
거복 그렇소. (자기 웅변에 스스로 감격하야) 삼천만 전부를 위하는 길이란 뭐겠소? 독립이요. 자주독립이요. 이 독립을 완성시킬 수 있는 분은 오즉 우리들의 오각하 한 분뿐이요. 그래 나는 오늘 오각하의 래임을 기회로 할아버님의 유언을 따라 이 행자나무를 각하게 바치기루 했소. (하고 진땀을 씻는다)
동정 저걸 갖다 뭘 하시게?
거복 (더 한층 득양해지며) 이번 각하께서 서울 시외에다 별장을 지신다 하오. 난 저 나무를 삼분해서 밑둥은 화로를 맹글구, 가운데는 바둑판을 맹글구, 웃뚜머리하구 가장군 장기를 맹글어서 각하의 사랑에다 헌납할 작정이요.
동정 각하께선 그런 기분 조금두 반가워하시지 않을 겝니다.
거복 (긍지를 꺾이어) 어째서 반가워하시지 않는단 말이요?
동정 각하께선 그런 가구 등속보단 오히려 기금을 필요하고 계실 겁니다.
거복 더런 소리 마오. 각하껜 오즉 나라를 생각하시는 일편단심뿐, 그런 추잡한 물질적 욕망은 터럭끝만치두 없으시요.
동정 허지만 요전 신문 보면 외국을 더나실 때 이미 조선의 광산권을 일개 외국 상인에게 매각할 것을 약속하셨다구 하지 않습니까?
거복 그건 신문사놈들이 각할 중상할려구 맹그러낸 소리요.
동정 풍설에 들으면 각하께선 근자에두 측근자의 눈을 찌푸리게 할 만큼 매일같이 고급상인들에게 둘러싸여 있으시다구 합니다.
거복 당신두 그럼 각하께서 경제회살 중심으루 불하품들을 알선하구 있으시다는 항간의 낭설을 고지 듣구 있으시요?
동정 낭설이 아니라 사실인 것 같습니다.
거복 무근한 소리요. 각하께선 현재 정치비용에두 곤란을 겪구 계시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 애국당 지부에서두 기금을 모집하기루 한 거요. 각하께선 결백하시기 눈같이 희고 수정같이 맑으신 분이요. 백이숙제같이 청렴하신 분이요.
동정 허지만 각하께선 이 땅의 모든 순결한 젊은이와 애국자들을 버리시고 일부 친일파, 민족 반역자, 모리배 등에게 위효되셨기 때문에 그 청렴하신 눈은 흘여지시구 말었습니다.
거복 거짓말이요. 거짓말이요. 각하께선 조곰두 흘여지시지 않었소. 오히려 더 맑어지셨을 거요.
동정 수국아버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저두 할말 없습니다. 다만 제가 한마디 여쭙구 싶은 건, 각하께 이 나무를 디리는 것이 그래두 조선민족을 구하고 리재민을 구하는 길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거복 나는 자주독립과 오각하를 따루 생각할 순 없소.
동정 그건, 오늘 각하의 강연을 한번 들어보신 연후에 얘기하시지요. (니러서며) 정 각하께 바치셔야만 하겠다면 헐 수 없지요. 그럼 안녕히 계십쇼. (하고 마루를 내려와 밖으로 나간다)
처, 중문으로 나온다. 안에서 듣고 있었나 보다.
처 나문 못 내주드래두, 돈이라두 얼마 내디릴걸.
거복 그가찐 자식들 안 내주문 어때?
처 우리 수정이(長子)하구 전문학교꺼정 가치 댕긴 사람을…….
거복 가치 댕겼으문 뭘 해? 공산당패에 얼려 댕기는 자식인데……. 그까진 자식들한테 동전 한 푼 내줄 필요 없어.
처 아, 그 사람들한테 주는 거요, 어디?
거복 아, 저놈들이 이 나무를 내주문, 그 돈으루 수재 구제할 상싶어? 어림 반푼어치도 없지. 괭이 입에 쇠고기야 쇠고기, 먹은 자죽두 없어.
처 그 착하구 곧은 사람이?
거복 착하구 곧으문 뭘 해? 그놈들한텐 사상밖에 없어. 피두 눈물두 없구, 인정두 없어. 애비두 에미두 없구 사상뿐이야. 오각하두 자주독립두 없구 사상뿐이야. 사상을 위해선 나라두 삼천만 동포두 팔아먹겠다는 거야. 그놈들 대가리엔 공산주의밖엔 아무것두 없어.
처 그 사람들이라구 나랄 안 사랑하겠소?
거복 그놈들이 나라를 사랑해? 그놈들 나란 우리 한국이 아니라 아라사야. 그놈의 나란 공산주의 나라거든. 아라사놈의 개가 되두 좋구, 종이 되두 좋니 그저 공산주의만 하겠다는 거야. (점점 흥분해 온다) 애비두 하래비두 모두 동무동무 하는 공산주의만 하겠다는 거야. 손꾸락에두 길구 짧은 게 있구, 개똥채미에두 큰 놈이 있구 적은 놈이 있는데 모두 똑가치 노나먹자는 그 부란당패 같은 공사주의만 하겠다는 거야.
처 그럼, 당신 말대루 빨리빨리 벼서 각하께 바치문 되지 않소? 빈다빈다 말루만 그러구 비질 않구 있으니까 영팔이두, 진이두, 하선생두 그러는 게 아니요? 돈두 보니까 취해 달란다구, 벼버리구 나면 그 사람들두 달라구들 안 그럴 게 아니요?
거복 누군 빌 줄 몰라서 못 벼? 사람이 없으니까 그렇지.
처 아, 흔한 게 사람인데?
거복 저렇게 큰 나무를 아무나 빌 수 있을 줄 알어? 잘못 쓰러뜨려 봐, 진이네 집 집웅은 그 자리에서 주저않을 테니. 저 남산 같은 나물, 어린애 기저구 체듯 단숨에 벼낼 수 있는 사람은 조선팔도에 진이아범 초국이 딱 한 사람이야.
처 허지만 그인 서울 가서 언제 올지 아우?
거복 안 오군 못 배기게 돼 있어.
처 어떻게?
거복 요전 초국이가 집문서 잽히구 나한테 돈 취해 간 거 알지? 그저께 서울 가는 자기 동생한테 기한 넘어 집문설 넘기겠다구 했어. 그러니 지금쯤 눈이 뒤집혀가지구 달려오구 있을 거야. (하고 통쾌한 듯 웃는다)
이때 거복의 소작인 막봉이 들어온다. 우산과 점심꾸래미를 들었다.
막봉이 안녕들 허세요?
처 막봉이 아닌가? 어서 들오게.
거복 어쩐 일이냐?
막봉이 오각하께서 오신다구 해서 강연말씀 들으로 왔지요.
거복 그 먼 데서?
막봉이 삼십몇 년 만에 들오신 양반을 뵙는데 구십 리 길이 멀겠어요
처 그럼 엊저녁에 떠났겠네그려? 들어가세. 시장하겠네.
막봉이 떠날 때 예편네가 점심하구 두 그릇 줘서 오다가 산에서 먹었어요.
거복 (마루로 올라가며) 그래, 이번 비에 큰 장핸 없었냐?
막봉이 (마루 끝에 앉으며) 작년에 뚝을 잘 막아서 아주 감쪽같어요.
처 댁에서들두 다 안녕하시구?
막봉이 네.
거복 그럼 금년 추순, 어떻게 잘 된 셈이냐?
막봉이 그럼은요. 금빌 못 준 대신 죽어라구 퇴빌 줬드니 아주 키가 대밭같이 무성한걸요.
거복 애썼다. 그런데 어떻게 이번엔 그냥 왔니?
막봉이 (해득지 못하고) 그냥이라니요?
거복 (우슴의 소리처럼) 빈손으루 왔냐 말이야. 느 아범이 올 땐 의례 씨암닭이나 계란꾸러미 아니문 수수엿을 과가지구 왔었는데, 네가 논을 맡게 되구부턴 너무두 섭섭하니 말이다.
막봉이 원 쥔 어른께서두……. 아, 지금이 어느 세상인데 닭을 잡구 엿을 과온단 말이에요?
거복 (너무도 당돌한 소리에 당황했으나 다시 위엄을 가추고) 어느 세상이라니?
막봉이 삼칠제 도조두 바칠까 말까 하는 판인데, 소작료 고깜 빼듯 빼다 바치구, 그 우에 또 닭하구 엿을 과다 바쳐요?
거복 이런 망할 녀석 하는 소리 봤나! 삼칠제 도조두 바칠까 말까 하다니? 녜전엔 반반씩 하든 거, 해방되구 나서 토지개혁이니 하는 바람에 삼칠제루 된 것두 생각하문 억울한데, 그래 이놈아, 농사져서 닐굽씩 처먹구, 땅님자한테 셋 주는 것두 줄까 말까야?
막봉이 누가 언제 안 디린댔나요?
거복 그렇다문 이놈아, 그런 말따위가 어딨어? 금년 도존 나두 배급쌀 타먹기 구찮구 하니까, 현물루 가조두룩 해라, 현물로.
막봉이 쥔 어른두, 녜전 꿈만 꾸구 계시는가 부군요?
거복 뭣이 어째, 이놈, 꿈을 꾸다니?
막봉이 아, 군정청에서 금년은 금납으루 하라구 해서 군에서두 통지가 그렇게 내려 왔는데 어째서 현물루 바치란 말이세요?
거복 이놈아, 네가 내 땅 갈아 먹구 있지, 신한공사 땅 갈구 있니? 군정청에서 설혹 그런 지시를 내렸드래두 금년 도존 쌀루 가조두록 해랴.
막봉이 아, 쌀 한 되에 얼만데 현물루 가조란 말이세요?
거복 이놈아, 필십오 원이지 얼마야?
막봉이 그건 공정가격이지요. 서울이나 읍에다 반출해다 자유판매하문 사백여 원씩이에요. 한 되에 삼백이십 원식 차가 나는데, 아 백죄 쌀루 가조란 말이세요? 우리아버진 몰라서 그랬지만 전 그럭헐 수 없어요.
거복 흥, 너 이놈 언제부터 콧대가 그렇게 셔졌니?
막봉이 콧대가 셔진 게 없지만 우리아버지처럼 속지만 않을래요.
거복 이놈아, 속다니? 남의 손꾸락을 깨물어두 유만부동이지, 땅 부쳐먹게 해줘, 돈 없다문 돈 취해 줘, 기한 넘으문 리자만 받아 미뤄 줘, 이게 네놈한텐 속여먹는 거냐, 응? 네놈이 그렇게 은혜를 원수루 갚으려는데야 내 구태여 인심쓸게 뭐냐? 금년 타작엔 이때까지 취한 빚, 다 갚두룩 해라.
막봉이 념려 마세요. 고린전 한 푼 안 냉기구 깨끗이 다 갚아 디릴테니.
거복 그리구 래년부턴 딴 사람 시켜서 갈게 할 테니 소작권 내놓구 딴 데 가서 부쳐먹든지 말든지 해라.
막봉이 념려 마세요. 도루 내디릴 테니.
거복 (너무두 시언스런 대답에 의아하야) 그때 가서 울구불구 해두 소용없어.
막봉이 울 일두 없는가 부군요.
거복, 아무리 생각해두 괴이한 일이다. 작인들 입에서 이런 태연하고 자신만만한 대답이 나오다니. 이때 부근의 레루를 질주하는 남행열차가 시내까드를 지나는 진동소래, 이윽고 역에 돌입하는 요란한 기적소래.
거복 차 들오나 봐. (안을 향하야) 어머니, 어머니, 기차 들왔어요. (대답이 없으므로) 뭘 입때 꾸무럭거리셔. (하고 안으로 달려간다)
처 (남편이 사라지자) 아, 무슨 말을 그렇게 생각 없이 하나? 소작권 내주구 앞으루 그 많은 식굴 데리구 어떻게 살려구?
막봉이 (니러서며) 이젠 소작 안할래요.
처 소작 안한다니?
막봉이 네, 래년부턴 우리두 제 땅 가지구 농사짓게 된대요.
처 (막봉이 소매를 끌고 나무 밑으로 가드니 넌즛이) 그럼 그게 사실이로구먼?
막봉이 그것 때문에 우정 오각하께서 서울서 오시는 게 아니에요? 쥔 어른은 아직두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 줄 몰르시구 녜전 생각만 하구 계세요. 오늘 대회석상에서 재판소 판결 내리듯, 각하께서 딱 판결을 내리실 거예요.
처 그런데 그 땅은 전재민이나 그런 사람한텐 안 준다든가?
막봉이 전재민이건 실업자건, 농살 직접 짓는 사람한텐 다 준다나 봐요.
각하께서 역전광장에 내리셨나 보다. 교회당에서 종이 운다. 대지가 진동할 듯한 군중의 만세소래. 노모, 지팡이를 짚고 안에서 나온다. 고령이되 대추나무같이 정정하다. 뒤따라 거복.
노모 (막봉이에게) 너두 갈려구 왔다지?
막봉이 안녕하셨어요?
노모 오냐, 잘됐다. 가치 가자.
거복 기부하시는 거 잊어 버리지 마세요.
노모 내가 어느새 노망한 줄 아냐? (막봉이에게) 내가 첨 나인으루 대궐에 들어가든 때가 열세 살 때든가? 오늘 운동장에 나가는게 어째 꼭 그때 같은 생각이 든다.
막봉이 저두 밤새 오는데 가슴이 설레서 통 걸음이 안 걸리드군요.
처 (남편에게) 나두 좀 가봤으면?
거복 누가 말려?
노모 (추상같이) 여자가 들앉어 살림이나 할 것이지 사내들 틈엔 뭘 찾어먹으로 나간단 말이냐?
처 (습관적으로 쑥 들어간다. 막봉이에게) 그럼 모시구 댕겨오게.
막봉이 네.
맹첨지 대감께서 지금 역 앞에 내리셨어요. 자동차루 이 앞을 지나실 거예요.
거복 (가슴이 울렁한다. 눈시울은 자꾸만 뜨끔한다) 그럼 바루 우리 문앞을?
맹첨지 네, 정말이지 어마어마한데요. 오늘 같은 행렬은 녜전 한국 시대 때 신관 사도 도임하실 때 있었군 없었어요. 참말이지 어머어마한데요.
이때 안내 오도바이를 선두로 호 외를 질주해 가는 행렬. 자동차의 소래. 리테식으로 전창되는 가로 양편의 병렬군중의 만세소래. 거복, 기둥에 꽂혔든 태극기를 들고 문전으로 달려가 행렬을 향하야 목이 찢어져라고 만세, 만세, 만세를 불은다. 처도 따라 나가 가치 만세를 불은다.
-막-
제2막
삼십 분 후, 같은 장소.
거복, 마루에 앉어서 글씨를 쓰고 있다. 장기말에 마춰 오린 종이뽄(紙型)에다 초를 잡고 쓰고 있는 것이다. 자기 글씨에 스스로 취하야 한 자 쓰고는 데놓고 바라보고 연성 흠, 흠 하며 감탄한다. 주위에는 백지와 뽄 오린 종이 뿌스래기가 산재해 있다. 멀리 대회장 쪽에선 판에 박은 듯한 애국가의 합창소래와 악대소래가 낭송하듯이 들려온다.
사이
여학교 교장 곽목사, 닷도상같이 달려온다. 낡은 모닝그에 고풍한 중산모를 썼다. 펄럭펄럭하는 앞섶에 연회준비위원장이란 표를 달았다.
곽목사 뭘 하고 있으시오?
거복 (쓰든 것을 멈추고) 목사님, 어서 오시오.
곽목사 빨리 가십시다. 모두들 기대리구 있으시오. 각하께선 오늘루 다음 장소루 가셔야 하기 때문에 대회는 두 시간 안으루 끝마추구 곧 환영연회에 모시기루 했소.
거복 거, 목사님두. 난 직접 회장엔 얼골 내지 않기루 요전부터 얘기하지 않았소?
곽목사 허지만 거복씨가 빳구서야?
거복 집에서들 모두 갔으니까……. 어머님께서두 가셨구, 조금 아까 예편네하구 맹첨지두 보냈소.
곽목사 가족들하구 애국당 재정부장인 거복씨하군 달르지 않소?
거복 군수령감과 곽교장께서 나가셨으니까 난 빠져두 별지장 없을 거요.
곽목사 그 사람들이나 내나 공직뿐이지 무슨……. 실력은 돈인데 읍에서 돈 가진 분은…….
거복 (눈이 둥그래지며) 아니 그럼 이번 대회 비용을 날더러 혼자 책임지란 말이요? 도로 장식비하구 료리대 합하면 칠만 원이 넘을 텐데……. 돈을 쓰구두 생색이나 난다문 몰를까, 각하께서야 이 박거복이가 칠만 원을 썼는지, 칠십 원을 썼는지 어떻게 아시겠소?
곽목사 이번 비용은 정회를 통해서 할당 수집키루 이미 결정한 게 아니요?
거복 그리게 말이요. 이런 돈이란 읍민 전부가 한 사람에 얼마씩 부담할 것이지 재정부장이나 주최자인 우리 애국독립회가 지출할 성질의 것이 아니요.
곽목사 내 얘긴 그런 게 아니라 요전 위원회에서 기부 얘기가 나왔을 때 재정부장께서 저 행자나무를 바치시겠다구 자진해서 말씀하시드니, 이제 와서 뒤를 빼시니까 말이요. 딴 지부에선 모두들 몇십만 원씩 돈을 내구, 주단, 광목, 기타 물품을 기부들 하는데 우리 고을만 말쑥하다면 우리 지부의 면목이 뭐가 되겠소?
거복 (돌연 항아리가 깨질 듯이 웃는다) 하하하하. 내가 꽁문이를 뺀단 말이지오? 하하하하하. 내가 꽁문이를 뺀단 말이지요? 하하하하하.
곽목사 그럼 왜 안 나오시겠다구?
거복 헌납은 꼭 내가 나가서 직접 해야만 되오? 대신은 못한답디까?
곽목사 대신이라니요?
거복 우리어머님께서 대신 하시구 오시라구 했소.
곽목사 어머님께요?
거복 그렀소. 아주 도장꺼정 디렸소. 차례가 되면 니러나셔서 내 일흠으루 선물 삼 정, 즉 화로, 장기 일 식, 바둑 일 식을 신청하실 게요.
곽목사 (장기뽄을 집어보며) 그럼 바로 이게?
거복 그렀소. 나물 비는 대루, 도장포에 부탁해서 팔 작정이요. (감회도 깊은 양) 작년 시월 라디오에서 각하의 목소리를 첨 듣든 그 시각부터 난 각하를 뵈올 날을 손꼽아 고대하구 있었소. 누구보담두 먼점 뛰어가구 싶지만, 내 용모가 너무두 흉해서…….
곽목사 혹 말씀이요?
거복 첨 뵈는 각하께 언짢은 인상을 디리는 것보담 먼 발치루 각하를 례배하구 기부나 바치는 것으루 그저 만족할려구 하오.
곽목사 거복씨, 오각하께선 우리 조선의 가장 큰 죄인인 친일파, 민족반역자까지라두 다 함께 손을 잡구 나가자구 하신 분이요. 이처럼 관대하시구, 인자하신 각하께서 거복씨 목에 붙은 조고만 혹 한 개를 문제시하시겠소?
거복 그러실까요?
곽목사 그럼은요.
거복 (흔연 결심을 도리키고) 그럼, 잠깐만 기대리슈. 가치 나갑시다.
거복, 장기뽄만 골라서 한쪽에다 차곡차곡 싸놓고 뿌스래기는 쓰래바끼에다 몰아 넣는다. 벼루집을 치우고 방으로 들어가드니 명주 목도리를 들고 나와 혹을 가리싼다. 두루매기에 모자를 쓴 후 체경 앞으로 간다.
곽목사 원, 흉하긴커녕 이뿌기만 하시오.
거복 (이모저모로 비쳐 보드니 다시 끌르며) 그만두겠소, 역시. 이 더운 복중에 목도리를 하다니 각하께 이 무슨 실례겠소?
곽목사 원 참, 고지식한 양반두.
거복 (시계를 보며) 빨리 혼자 가보시오. 벌써 시작했겠소.
곽목사 우리 환영위원이니까, 추산각(秋山閣)으로 즉접 가면 되어. 그런데 거복씨야 못 온다지만 수국인 또 어찌 된 일이요?
거복 수가 좀 덜 된 모양이요. (안을 향하야) 수국아, 수국아.
수국, 책보에 수포를 사면서 구두를 끌며 나온다. 교장을 보고 경례한다.
곽목사 그래 수는?
수국 잘 안 됐어요. (하고 책보에서 다시 끌러 마루에다 편다)
곽목사 (감탄하며) 이건 참 과연 미술품인데. (수 놓인 가사를 낭독한다) 하나님이 보호하사 우리 나라 만세,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대한사람 대한으로 기리 보전하세.
거복 (감격하야 화창한다)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대한사람 대한으로 기리 보전하세. (다시 재촉한다) 자, 이러구 있을 게 아니라 빨리 데리구 가셔서 준비를 하시오.
곽목사 (수국에게) 그럼 우리끼리 가는 수밖에 없겠다.
목사와 수국, 후문으로 나가려 할 때 돌연 판장 너머서 '아 우습다, 호호호, 아 우습다, 호호호호'하고 야유하는 녀자들의 소성.
곽목사 (발을 멈추며) 웬 녀자들이요?
거복 퇴학마진 진이하고 그 패들이지 누구겠소. 망한 것들, 우리 수국이가 수 놔가지구 추산각에 나가는 게 쌍심지들이 나서 까시들 하는 걸 게요.
곽목사 (눈살을 찌푸리며) 저 패들을 퇴학시켰기 망정이지 그란했으면 오늘 대회엔 녀학생이라군 얼골도 못 비쳤을 거요.
수국 (주저하며) 아버지, 나 안 가겠어요.
거복 구더기 무서서 장 못 담근다구, 저 기집애들 무서서 못 간단 말이냐?
수국 요전 수채구멍으루 몰래 등교할 때처럼 돌팔매질을 하면 어떡해?
거복 삼십륙 년 간 검은 머리가 백발이 되시도록 독립을 위해 반생을 바치신 각할 환영하러 가는 거야. 그깐진 년들한테 욕 좀 먹으문 어떻구 돌팔매질 좀 받으문 어때?
수국 그래두…….
곽목사 똥이 무서서 피하겠냐? 더러서 피하지. 그까짓 거 그럴 거 없이 뒤루 돌아서 가자꾸나.
곽목사 자기도 캥기지만 체면상 위엄을 가추고 황겁해 하는 수국을 끌고 곡간 사이길로 나간다. 이어서 소성, 박수, 석유등을 두들기는 소래, 쫓아가듯이 넘어온다. 곽목사, 잊어 버린 거나 있는 듯이 창황히 되돌아온다.
곽목사 오늘 대회를 방해할려고 공산당패에서 테로들 올지 몰르오. 그러니 거복씨두 주의하시오. (하고 굴으는 듯이 다시 나간다)
이때 대회장 쪽에서 천지가 진동할 듯한 만세소래와 박수소래. 오각하가 등장하셨나 보다. 거복, 나무를 타고 올라간다. 미끄러진다. 다시 올라간다. 미끄러진다, 뒤곁으로 가드니 사닥다리를 미고 나와 나무에 걸고 쏜살같이 올라간다. 멀리 대회장을 응시하며 손에 땀을 쥔 채 침을 꿀꺽꿀꺽 삼킨다. 군중의 박수소래와 '옳소' 소래가 들려오면 자기도 신바람이 나는 듯이 호응하야 박수를 치고 '옳소'를 절규한다. 한동안. 초국, 창황히 달려온다. 산풍을 겪어온 전형적인 초부다. 거복의 찬동소래를 이마받이하야 발을 멈추고 꼭대기를 쳐다본다.
초국 (농으로) 무슨 륙갑인가?
거복 (회장에 정신이 팔려 전연 들리지 않는 모양이다. 회장의 '옳소' 소래에 호응하야 다시 '옳소'를 연발한다)
초국 (불안해지며) 저 사람이 별안간 정신리상이 생겼나? (돌연 겁이 덜컥 남으로 안으로 달려간다) 아주머니, 아주머니. (대답이 없으므로) 수국아, 수국아. 모두들 어딜 갔나? (다시 나무 밑으로 오며) 여보게 기복이, 기복이.
거복 (박수를 치며) 옳소!
초국 허, 이거 큰일 났는걸. (어찌할 바를 몰라 망서리드니 무슨 묘책이 떠올랐는지 옆에 있든 장대를 집어들고 뒤간 쪽으로 나간다. 이윽고 똥을 끝에다 무쳐가지고 나와 거복의 코 앞에다 치켜든다)
거복 아채! (하고 재채기를 두서너 번 연거퍼 하드니 악을 쓴다) 어떤 놈이야, 빨리 이 똥자루 비키기 못해. 아 구려. (하고 재채기)
초국 (간경(幹莖) 뒤에 가 숨은 채 목소래만) 정신이 바로 들기 전까지 못 비킨다.
거복 이놈아, 정신이 바로 들기 전이라니, 내가 미쳤단 말이야?
초국 (장대 밑을 부뜬 채 마당으로 나오며) 그럼 날 알아보겠나?
거복 알아보겠나라니? 진이아범 초국이 아닌가? 빨리 이 장대 비키게.
초국, 그제서야 안도하고 장대를 비킨다. 거복, 나무를 타고 내려온다.
초국 (그래두 약간 미심쩍어) 자네, 정말 아무 일 없어?
거복 누가 할 소린데? 미친 놈이 아니구야, 아닌 밤중에 홍두깨루 남의 코 밑에다 똥자루를 디리밀 수 있겠나?
초국 (진땀을 씻으며) 난 자네가 꼭 미친 줄 알았네. (부엌으로 가서 물을 한 바가지 디리키고 나오며) 난 자네가 꼭 미친 줄 알았네. 그래 이걸 어떡허나 하든 참에 퍼뜩 어릴 때 생각이 나데. 미친 놈은 똥자루만 보면 정신이 든다구 하지 않았나, 왜?
거복 (성이 아직 안 풀리여) 원 싱건 사람, 그렇다구 그 꼭대기서 떠러지면 어떡허라구 거기다 그걸 디리댄단 말이야? (하고 마루로 올라간다)
이때 진이, '아버지'하고 달려온다.
초국 너 웬일이냐? 정거장에두 안 나오구?
진이 차 시간을 알어야 나가지. 그러지 않구, 언제 오늘 온다구 했나 뭐.
초국 참, 그렇지. 며칠 더 있다가 올려구 했는데 집을 넘긴다구 해서 도중에 달려왔다. 그래 집에 별일 없었니?
진이 응.
초국 학굔?
진이 퇴학이야.
초국 그럼 끝끝내 지구 말았구나?
진이 응. 허지만 싸울 만큼 싸우구 졌으니까 후회되진 않어. 학교에 나가게 된 애들이 앞으루 점점 더 감옥생활 같은 교육을 받게될 게 걱정이지.
초국 퇴학은 마졌지만, 그놈의 거 시원하게 한번 잘했다. 그 교장녀석 꺼덕대구 돌아댕기는 꼴이란, 우리두 눈꼴이 셔서 못 보겠드라.
진이 요샌 학굔 아주 제쳐놓구 정치하기에 눈이 뒤집혔어. 애국당 조직부장이라나.
초국 (들어보라는 듯이) 망댕이가 뛰니까 송사리가 뛴다든가, 세상은 점점 못돼먹어만 가구 있어.
거복 (물주리를 재터리에다 탁탁 때린다)
초국 일본놈 부랄 긁든 그 손으루 미국 사람 긁구, 많이 긁구 많이 알랑거리는 놈이 장치게 마련이니, 이놈의 세상이 어떻게 돼먹을려구 이래? 학생들한테 그만큼 배척을 당했으문 저두 개돼지가 아닌 이상 생각이 있겠지. 그까진 놈의 학교 아니면 하눌 아래 공부할 데 없겠니? 아무 걱정할 게 없다.
진이 아버지, 나 그 대신 오늘은 려행비 찾아온 걸루 술 한 병 사다 디릴께. 얘기하구 빨리 오셔. (하고 판장 문으로 들어간다)
초국 (마루로 올라오며 담판조로) 그래 집은 넘겼나?
거복 아직 안 넘겼네.
초국 그래, 며칠을 못 참구 인편에다 재촉을 해야 옳단 말인가? (주머니에서 지폐뭉탱이를 끄내 내던져 주며) 에이 치사스럽네.
거복 (의아하야) 이게 얼만가?
초국 원금하구 별릴세. 손 하나 대지 않구 고대루 가지구 왔네.
거복 그럼 장사한다는 건?
초국 그만뒀네.
거복 그만두구 어떡헐려구?
초국 산으로 도루 들어가야겠네.
거복 산으로?
초국 응, 송충인 역시 솔닢을 먹어야지 갈닢을 먹으면 죽게 마련인가 보이. 딸년 공부 때문에 삼팔선을 넘어 왔었는데, 퇴학마졌다니 여기 있으문 뭘 하겠나? 자기 얘기 들어봐가지구 평양으루 보내구 난 도루 산으루 들어갈까 하이.
거복 그렇게 되면 섭섭하겠는걸. (하고 금궤에서 차용증서를 끄내준다)
초국 (받아서 찢으며) 섭섭할 게야 있나. 혜산진을 떠난 지 반 년밖에 안 되는데 처가집에 색씨 두고 온 것처럼 가구 싶어 못 견디겠네.
거복 자넨 산하구 뭐 되나 보이.
초국 어떤 인 바다가 좋다구 하구, 어떤 인 또 대처가 좋다구 하지만 산에다야 댈 수 있나? 산 중에서두 백암 혜산진 백무선을 타구 두만강으루 들어가는 연변 일댄 참 산 중의 산이지, 산 중의 산이야.
거복 호랭이가 있다지?
초국 호랭이뿐인가? 늑대, 곰, 여우, 너구리, 뱀, 노루, 사슴, 토끼, 매, 수리, 짐성이란 짐성은 다 뫼지. 사람이라군 김일성의 항일 군대가 몇 달에 한번씩 지나갈 뿐이구, 그 외엔 바람하구 눈하구 안개만 드나드는 그야말로 령검한 숲이야.
거복 아직두 눈이 허옇게 쌨다지?
초국 그럼, 지금두 겹바지 조고리가 선선하니까. 구월 들어서면 벌써 첫눈이 풀풀 날어, 그리구 그 도끼소래가 수백 길 되는 깊은 골짜구니에 올려서 산울림으루 되돌아오구. 그 하눌을 찌를 듯한 큰 나무가 천둥을 치듯 쿵 하구 쓸어지는 그 장쾌한 맛이란, 도회지선 도저히 맛볼 수 없지, 맛볼 수 없어.
거복 삼팔선만 끊어진다면 나두 한번 꼭 가보구 싶네.
초국 자넨 저 행자나무가 오백 년 됐다구 자랑하지만 거긴 오백년 넘지 않은 건 하나두 없어. 대개가 칠팔백 년이구 나이 많은 건 천 년 이천 년 짜리두 수두룩하네.
거복 기왕 나무 얘기가 났으니 말이네만, 자네 우리 나무 좀 벼주지 못하겠나?
초국 저 행자나무를?
거복 응.
초국 그럼 화루하구 바둑판, 장길 맹글어서 오각하 별장에다 헌납한다는 게 사실인가?
거복 누가 그러든가?
초국 정거장에 내리니까 벌써 소문이 자자하데.
거복 참 빨르긴 하군. 각하께선 삼십륙 년 동안이나 해외에 계셔서 조선 물건에 애착심이 누구보다 강하실걸세. 그 지긋지긋한 공산당 극렬분자들 때문에 골칠 썩히구 계시는 각하게서 저녁 잡숫구 나서 쓱 바둑을 한번 두시구 모든 실음을 잊으실 수 있다면 조선 독립을 위해 얼마나 큰 공이 되겠나?
초국 ………
거복 그리구 화루를 풍치 있게 맹글려면 저 사방으루 뻗은 뿌럭질 하나두 상치 않구 잘 벼야 할 텐데 우리 읍에서 다치지 않구 빌 사람은 자네 빼놓군 없을걸세.
초국 ………
거복 친한 친구 새에 이런 얘기하면 뭣하게 생각하겠지만, 일삯은 넉넉히 내겠네. 자네두 요새 몹시 궁할 테니까.
초국 돈이야 문제 아니지만…….
거복 그럼 좀 수고해 주게. 사실은 그것 때문에 자넬 얼만큼 기대렸는지 몰르네.
초국 난 행자나문 벼 본 적이 없어서………
거복 나무야 다 매한가지 아니겠나?
초국 연장을 떠날 때 모두 매끼구 와서……
거복 명장이 대패를 가리겠나? 자네같이 능란한 벌목이에게야 이까짓 행자나무 같은 건 식은 밥 먹길걸세.
초국 그야 그렇지……. 허지만 난…… 두만강……두만강 연변 이외 나문…… 손 안 대기루 작정했네. 거기 나문 모두가 태고적부터…… 태고적부터 산정기 먹구 자란 나무라…… 보통 인가에 있는 나무하군 바탕이 달르이.
거복 (폭발하려는 노기를 억압하며) 허지만 인가의 나무두 나무 나름이지. 우리집 행자나문 거미줄 하나 안 걸리구 삼대째 내려오는 령검한 나무 아닌가?
초국 …… 거미줄은 안 걸렸지만…… 거미줄은 안 걸렸지만……
거복 그럼 두만강 나무하구 마찬가지 아닌가?
초국 (새지(塞地)에서 활로를 구한 듯 일사천리로) 저 행자나무 안엔 사람의 때가 묻어 있네. 더러운 사람의 때가 말일세.
거복 (참았든 분격이 터진다) 뭣이, 사람의 때가 묻었어? (내뱉듯이) 흥, 자네 언제부터 그렇게 높은 자리에 올라갔나? 산신령 같은 나무를 벼두 벌목인 벌목이구, 공동묘지의 상수리나물 벼두 벌목인 벌목이야.
초국 (분개하며) 벌목이 벌목이, 어붓자식 일흠이냐? 아무리 내가 천해두 벼슬자리나 하나 얻어 할까 하구 눈깔이 뒤집혀 쪼차댕기는 네놈보다 칩칩하구 더럽진 않다.
거복 (맹호같이 날뛰며) 뭐, 벼슬자리 하나 얻어 할라구? 얻어 하면 어때? 네놈한테 무슨 상관이야? 흥, 배가 아퍼? 조선나라에 벼슬하는 게 어때서 칩칩하구 더럽단 말이야? 내가 칩칩하면 네 놈은 뭐냐? 제 고장에서 못 벌어먹구 함경두 산골루 품파리 나간 놈이.
초국 뭣이 어째 이놈, 제 고장에서 못 살구 타방으루 품파리 갔다구? 너 이놈 말 잘했다. 나를 이 동리서 함경두 산골루 내쫓던 놈이 누구야, 응? 누구야? 네놈할아범하구 네놈하구 아니냐? 네놈할아범이 우리할아버님 땅을 뺏구, 느이아범이 우리아버님 땅을 뺏구, 네놈이 우리집하구 땅을 저당으로 집어쳤기 때문에 내가 별수 없이 개나리봇짐을 싸가지구 백무선 벌목이루 들어간 게 아니냐?
거복 널더러 이놈아 누가 뺏기라드냐? 저 못나서 뺏기구 이제와서 무슨 넉두리냐?
초국 허지만 너두 이놈아 인젠 먹은 거 겨놀 날이 왔다. 함경두선 너 같은 지주놈들의 땅하구, 일본놈들이 뺏어갔든 땅은 모조리 몰수해서 작인들한테 전부 노나줬다. 작인들은 대두 한 말에 두 되가웃식 현물세를 바치구 나선 남어진 떡 해먹구, 술 해먹구, 자유 판매하구 제 맘 제 콩이야. 천지가 뒤바꼈어 이놈아. 개벽을 했어. 느이놈들이 잘 먹구 날뛰든 세상이 뒤바꼈단 말이야.
거복 이놈아, 삼팔 이북에나 세상이 뒤바꼈지, 이남에서 뒤바뀐단 말이냐?
초국 여기두 오래잖아 뒤바뀌게 됐어. 네놈한테 뺏긴 문전옥토 다 도루 찾아서 예편네하구 자식 데리고 떵떵거리구 잘살어 볼 날이 머지 않었다.
거복 원 쓸개 빠진 소리 다 듣겠네. 오각하께서 살아계시는 한 느이놈들한테 땅을 공짜루 내주는 그 륙실할 놈의 천지개벽은 절대루 않을 게다. 돈 받구 판 물건두 안 물러주는 세상이야. 담보루 뺏은 땅을 왜 내논단 말이냐?
초국 그래서 네놈이 오각하 오각하 하구 신주님 모시듯 떠바치는구나?
거복 그렇다 이놈아, 어때?
초국 그런데 왜 이놈아, 너나 떠바치지 나꺼정 떠바치라구 지랑이야? 밀가구 강냉이만 먹어서 도끼 들 기운두 없다.
거복 싫으문 그만둬, 이놈아, 구구스럽게 청하지 않을 테니. 조선팔도에 나무 비는 놈이 너 하나뿐이드냐? 너 하나뿐이야? (모자를 눌러쓰고 마루를 내려오며) 벌목이 불러가지구 네놈 그 도고한 코를 납작하게 해줄 테다. 네놈 그 거만한 눈앞에서 으즈즉 쿵 하구 보기 좋게 벼뵈 줄 테다. (하고 분개하야 나간다)
초국도 화가 나서 뒤니어 내려오는데 맹첨지, 막봉이, 처, 땀을 씻으며 들어온다. 일행은 출발시의 원기는 하나도 없다.
처 아니 언제 오셨어요?
초국 조금 아까 왔지요.
처 우리집 양반은?
초국 나무 빌 사람 얻으러 간다구 지금 막 나갔쉬다.
처 댁에다 부탁하시지 않습디까?
초국 내가 못하겠다구 했소.
처 아 좀, 오신 김에 벼주시지?
초국 딴 일이야 뭔 못해주겠소만 그거야 내 손으루 어떻게 하겠어요? 동래서 청년단이 구제금 대신 기부해 달라구 그렇게 애걸해두 안 줬다문서, 겨울도 되기전에 화롤 맹글어 바친다는데.
맹첨지 그렇지요.
초국 그런데 어델 이렇게들 갔다 오세요?
처 대회에 고경 좀 갔드랬지요.
맹첨지 대회라구 원, 시시하구 재미도 없습디다. 그래서 우린 도중에서 나와 버렸어요.
초국 그래 땅 얘긴 뭐라구 하시든가?
맹첨지 노나는 주되 돈을 받구서 노나 준다구 하십디다.
막봉이 (뱉는 듯이) 도조 바치구, 세금 내구, 이것저것 제하구 나문 타작마당에 쌀 한 톨 구경하기가 고작인데 무슨 놈의 돈으루 땅을 사란 말이야?
맹첨지 그러니까 일 년에 얼마씩 꺼가라는 거지.
막봉이 (디리대며) 아, 이놈의 첨지야, 이때까지 빚에두 목이 안 돌아갈 지경인데 거기다 또 빚을 지란 말이야? 빚 때문에 누이동생년꺼정 팔아먹었어. 딸 팔아서 사란 말이야, 아들 팔아 사란 말이야?
맹첨지 이거 왜 나한테 디리대구 야단이야?
막봉이 죽기 전에 제 땅 가지구 한번 닐궈볼까 했드니, 다 틀리구 말았어. 제길할 다리품만 밑졌네.
초국 머지 않어 여기두 바람이 한번 혹 불기 전에야 우리들 없는 사람들이란 일생 가두 도르래미타불이지.
막봉이 녜전하구 똑같다문야, 기쓰구 독립할 게 뭐예요? (처에게) 내려가 보겠어요.
처 늦었는데 묵구 가지?
막봉이 뒤숭숭해 묵구 있을 수 있겠어요? 집에서들 눈이 빠지게 기대릴 텐데.
처 그럼 살펴가게. 아까 소작권 뗀단 얘긴 쥔 어른한테 내가 다시 얘기해 줌세.
막봉이 그만두세요. 오늘 판결은 그렇게 내렸지만, 우리 동리 농민조합에서두 가만인 안 있을 거예요. 두구 보세요. 결국 땅은 북선처럼 우리 앞으로 오구 말 거예요. (막봉이 밖으로 나간다. 초국도 판장 문을 열고 자기집으로 들어간다)
맹첨지 나두 북선으루나 갈까 봐요.
처 모두 가구 나면 여기 농산 누가 짓구?
이때 진이, 바께쓰를 들고 판장 문에서 나온다.
진이 (처에게) 운동장에 나가셨드라지요?
처 으, 응.
진이 땅 얘기 말구, 또 무슨 얘기 하세요?
처 (기억을 더듬으며) 이번 홍수가 난 건 산에 나물 많이 벼서 그러니, 나물 많이 심거서 붉은 산이 없두룩 하라구 그러시드라.
진이 그런 말은 누군 못해! 당장 잘 데가 없구 굶어죽게 된 사람들을 어떻게 살릴까기 문제지, 천년대계가 문젤까?
처 그리구 뭉치문 살구, 흩어지문 죽는다구 하시드라. 그러니 친일파건 뭐건 우선 뭉쳐서 나라부터 찾아보구 보자시드라.
진이 뭉치는 거야 좋지만 쌀에다 양잿물을 어떻게 뭉치겠어요? 친일파, 민족반역잔 양잿물이에요. 먹으면 죽는 양잿물이에요. 팥하고 콩하구 수수, 조, 쌀이 합치면 맛있는 오곡밥이 되지만 그 우에다 양잿물을 섞어 보세요. 그 밥 먹구 살 수 있나.
맹첨지 양짓물 얘기가 났으니 말이지, 만주서 온 어느 젊은 과부가 어저께 수용소서 양잿물을 먹구 자살했답디다. 어린것들은 줄래줄래 매달려서 밥 달라구 하구, 밥은 없구 생각다 못해 그랬나 봐요.
처 쩟쩟, 가엾어라.
진이 그리구 또 무슨 얘기 하세요?
처 또 뭐라구 하시드라……. 참 저, 각하께서 죽으라문 죽구 살라문 살구, 모든 것을 각하께 매끼라구 하시드라. 그리구 명령을 기대리구 있다가 명령이 떠러지는 대루 행동하두룩 하라구 하시드라.
진이 (대회장을 흘겨보며) 주책없는 양반 같으니, 자기가 뭔데 죽으라면 죽구 살라면 살란 말이야? 왜놈들이 천황만 믿구 따라갔다가 나라를 망친 걸 두 눈으루 똑똑이 봤는데, 못 봤으면 몰을까 본 이상 어떻게 그 따위 어리석은 짓을 되푸리하란 말이야?
맹첨지 (비꼬듯이) 땅이나 주구 따라오라구 하시믄 따라갈까, 땅두 안 주는데 누가 따라간담.
진이 삼십팔도선 문제에 대해선 무슨 얘기 없으셨어요?
처 (기억이 안 남으로) 그건 참 뭐라고 하시드라……
맹첨지 거기다 피를 흘려야 한다구 하셨지 뭐라구 하셔요?
처 응 참, 피를 흘리라구 하시드라. 우리 한국이 독립이 안 되는 건 삼십팔도선 때문이라시드라. 그러니 돈 있는 사람은 돈을 내구, 기운 있는 사람은 기운을 내서 모든 힘을 한데 뭉쳐가지구 때가 오는 대루 피를 흘리자구 하시드라. 그래서 그 선을 끊어 버리자구 하시드라.
진이 망녕이 들리셨나 봐. (하고 대회장 쪽을 쏘아본다) 피는 자기나 흘리지 왜 남더러만 작구 흘리라는 거야? 미국하구 아라사하구 영국이 의론해서 독립을 시켜 준다구 공공연히 약속했는데 뭣이 답답해서 피를 흘린단 말이에요? 우리 읍 같은 건 대포 한 방이면 날러갈 텐데, 맨주먹으로 어떻게 비행기와 전차 앞에 대들란 말이에요?
처 (주위를 둘러보며) 얘, 조용조용히 얘기해라. 누가 들을라, 그러지 않어두 공산당 사람들은 동리에서 학교에서 관청에서 모주리 쫓아내자구 외치시드라.
진이 세금을 안 냈나, 왜 쫓아내요?
처 삼십팔도선이 끊어지지 않는 건 공산당 때문이라구 그러시드라. 그러니까 삼십팔도선을 없앨려면 동리에서 공장에서 공산당패를 모주리 쫓아내야만 된다구 땀을 뻘뻘 흘리시문서 외치시드라. 그러니까 듣구 있던 사람들이 모두들 주먹을 치켜들고 '옳소'하구, 대회가 끝나는 길루 토끼사냥하듯 몰아내자구 하드라. 그러니 너두 아버지 모시구 동리서 살랴거든 주의해라.
진이 덮어놓구 뭉치자면서 좌익들은 왜 못 몰아내서 기를 쓰셔? 좌익 다 내쫓구 자기들만 안반 차지할 텐가? 재주껏 쫓아내 보라구 하세요. 우린 기를 쓰구 안 쫓겨나갈 테니.
처 쉬이, 인제 그만해 두구 물이나 빨리 길어가지구 가라. 그리구 온 김에 등물이나 좀 해다구. 왼 몸에 땀띠가 나서. (하고 앞서 안으로 들어간다)
진이, 뒤따라 들어간다. 맹첨지는 꼴을 한 다발 안고 외양간이 있는 곡간 사이길로 들어간다. 이윽고 거복, 목수 한 사람을 데리고 들어온다.
거복 이 나무요.
목수 (쳐다보고 둘러보며) 혼잔 도저히 안 되겠는걸요.
거복 아, 자네 같은 목수가 저까짓 걸 혼자서 못 빈단 말인가?
목수 목수하구 나무 비는 벌목이하군 달르죠.
거복 잘만 벼봐, 내 돈을 넉넉히 줄 테니.
목수 돈두 돈이지만 혼잔 안 되겠는걸요. 몇 사람 더 불러야 되겠어요.
거복 손이 많으면 자네 앞에 도라갈 게 적지 않겠나? 혼자서 해 보게.
목수 혼잔 절대루 못하겠어요.
거복 그럼 몇 사람이나 더 불러야 하겠나?
목수 가장구 칠 사람, 뿌럭지 파낼 사람, 톱질 마조할 사람, 나 말구 세 사람은 있어야 하겠어요.
거복 그럼 오늘 안으루 떠러질 수 있겠나?
목수 오늘 안으루요? 원 참 망녕의 말씀두……. 적어두 사흘은 잡으셔야 해요. 그럴 거 없이 앞집 초국씨한테 부탁해 보시지요. 그이가 한다면 혼자서 한나절이문 떠러질 텐데요.
거복 누군 부탁할 줄 몰라서 못 부탁하는 줄 아나? 사정이 있으니까 그러지. 그래 모두 얼마면 되겠어?
목수 한 사람 앞에 하루 백원은 주셔야겠수다. 일사는 사, 삼사 십이, 한 일천이백 원 가량 먹겠는걸요.
거복 (눈알이 튀여나올 듯 놀라며) 일천이백 원?
목수 네.
거복 그, 그만두구 어서 가게. 일천 이백 원이라니, 엿 한 자루 값인 줄 아나?
목수 아, 방 한 간 놓는 데두 천 원씩인데, 사흘씩 꼴빳구 그거 안 받구 하겠어요?
거복 그러니 그만두란 말이야.
목수, 불평불만하야 뭐라구 중얼거리며 나간다.
거복 (목수가 사라지자) 흥, 도적놈의 자식들. 해방됐다니까 뭐 먹을판 난 줄 아는 모양이야. 배보다 배꼽이 크지. 그래, 나무 한 그루 쓰러뜨리는 데 일천이백 원이 뭐야? 생 부란당놈들 같으니. (하고 식식거린다)
처, 등물을 끝내고 적삼을 닙으며 안에서 나온다.
거복 (다시 한번 경악하며) 끝났어?
처 아직 안 났수.
거복 아직 안 났는데 나오문 어떡해?
처 ………
거복 그러니 도중에서 나왔겠군?
처 네.
거복 각하께서 말씀하시는 도중에 사람들을 헤치구 나오문 어떡해? 사내두 아니구 예편네가? 모두들 쳐다봤을 게 아닌가?
처 쳐다보긴 나 혼자 나왔어야 쳐다보지요.
거복 그럼 또 누가 나왔단 말이야?
처 막봉이두 나오구, 맹첨지두 나오구, 봉필아버지, 광복이령감, 홍손이색씨, 봉술이오빠, 모두들 우 하고 나옵디다. 그래 나두 그 틈에 껴서 따라 나오구 말았소.
거복 그 사람들이야 무식하니까 각하의 말씀을 알아들을 수 없어서 나온 게지, 당신이야 그만한 말씀은 알아들을 텐데 왜 도중에 퉤나온단 말이야?
이때 바께스에 물을 퍼들고 진이가 안에서 나와 앞을 지나간다.
거복 (호통을 치며) 네가 옆에서 쏙삭거렸지?
진이, 깜짝 놀라는 바람에 바게쓰를 땅에다 떠러뜨린다. 물이 사산한다.
진이 쏙삭거리는 거 보셨어요?
거복 보나 안 보나지 뭐야? 그까진 얘기 더운데 듣구 있을 거 없이 집에 가 우물물에 멱이나 감자구 쏙삭거렸지 뭐야?
처 그앤 회장엔 나타나지두 않었습디다.
진이 맛맛한 싹인가 봐. 뭐든지 나한테만 뒤집어 씰려구만 하셔. (하고 빈 바께쓰를 집어들고 판장 문을 쾅 닫고 자기집으로 들어가 버린다.
이때 대회장 쪽에서 우뢰 같은 박수소래와 '옳소'하는 군중의 환성.
거복 글쎄 저 고마운 말씀을 마다하구 돌아온담? 군수령감, 대한 양조장 주인, 그 외 애국당 역원들이 얼마나 기분나뻐 했을 거야? 그러니 내 체면이 뭐가 되겠어?
처 당신두 쓸데없이 헐 걱정 안헐 걱정 다 하구 있소. 아, 듣다가 저 싫으면 나오는 것이지, 체면이 무슨 체면이겠소?
거복 듣다가 저 싫으면 나오다니? 누구 말씀이기에 듣다가 저 싫으면 나온단 말이야?
처 오각하님 말씀 아니라 부처님 말씀이래두 저 싫으면 안 듣는다는데, 중간에 나왔기루 무슨 그래 대단한 큰일이라구 눈알을 부라리구 이 야단이오?
거복 대단칠 않다니? 그게 대단칠 않으면 어떤 게 대단하단 말이야, 응? 가족들의 사상문젠 우리 애국당 간부를 뽑는 데 있어 여간 큰 문제가 아니야. 다시 말하면 오늘 대회에서 님원을 개선하는데, 내가 또다시 재정부장이 되는냐 못 되느냐 하는 문제하구 중요한 관계가 있단 말이야. 오각하께선 우리 애국당 지부 역원들 가족에겐, 빨갱이는 물론이거니와 분홍이나 회색두 있어선 안 된다구 말씀하셨어.
처 난 빨갱이두 분홍두 회색두 아니요. 얘기가 재미없으니까 나왔다뿐이지.
거복 얘기가 재미가 없다니? 아, 삼천만 민족이 독립해야겠다는 거룩한 말씀이 재미가 없단 말이야?
처 독립을 하면 뭘 하겠소? 땅두 안 노나 준다는데…… (하다가 자기도 몰으게 나온 말에 전율하야 손으로 입을 막고 뚝 그친다)
거복 (경천동지할 듯한 안해의 의사 외의 말에 쥐어짜는 듯한 기성으로 규환한다) 뭣이 땅두 안 노나 준다구?
처 (공포에 질려 무언) ………
거복 땅을 안 노놔 줘?
처 ………
거복 응? 뺏기는 놈은 누구냐 말이야? 우리집 땅이 어떤 땅인지나 알구 그따위 소릴 해? 할아버님께서 한국 시대 수세관으루 계실 때부터 작만하신 땅이야. 딴 사람들은 거지반 동척한테 빽기거나 팔아먹었지만, 우리 아버님은 오줌도 맛보고 진국여야만 사셨어. 남이 전기 킬 때 등잔 키시구, 남이 고기 먹을 때 새우젓 자시구 지켜 오신 땅이야. 그걸 내가 또다시 물려받아서 이십이 년째 전당포를 해오면서 늘린 땅이야. 그 땅 늘리는데 동래놈들한테 악담을 좀 들은 줄 알어? 저주소린 좀 들은 줄 알어? 그 땅을 세무서 검사원한테 밀주 항아리 뺏기듯 송두리째 뺏길 놈은 누구냐 말이야?
처 ………
거복 꿀 먹은 벙어리 모양으로 그렇게 다물구만 있지 말구, 말을 좀 해. (하고 마루를 꽝 내리친다)
처 아이 깜짝이야. (하고 눈만 꿈벅거린다)
거복 당신이 우리 집안을 망해놀려구 왔어, 흥해놀려구 왔어? 내가 문전옥답 다 뺏기구, 초국이아범처럼 쪽박 차구 두만강 변두리루 들어가야 시원하겠어?
처 내가 왜 당신 집안을 망쳐놀려구 왔겠소? 내가 왜 당신이 쪽박 차는 꼴을 보구 싶어 하겠소? 당신이 쪽박 차믄 나두 차구 따라가야 할 게 아니요? (하고 도래할 자신들의 운명에 스스로 비감한다)
거복 그런데 왜 노나 주지 않는다구 재미없다구 그랬어?
처 영팔이 생각이 나서 그랬소.
거복 영팔이?
처 네. 그애가 요전부터 작구 일본으루 다시 들어가겠다구 합디다. 오늘 모처럼 구한 버리자리두 노치구 했으니 필경 떠날려구 할 께요. 아까 막봉이 얘기가 독립만 되문 나라에서 모두 땅을 노나 준다구 하셨다구 합디다. 그렇게 되문 영팔이두 땅을 얻어줘서 농살 짓게 하구, 닭두 길르구 돼지두 치게 해서 이 고장에서 살게 할려고 했었소. 그래서 어머님 몰래 대회장엘 나갔었든 거요. 그랬는데, 그랬는데…… (하고 운다)
거복 당신은 동생놈만 알았지, 시어미나 딸년이나 남편은 몰른단 말이야?
처 허지만 어디 집이서야 밥 굶소?
거복 ………
처 (멀건히 허공을 응시하며 한 마디 한 마디 푸념을 한다) 닐급 살에 부모 닐쿠 남들 학교 댕길 때 그앤 근처에두 못 가봤어요……. 열두 살에 일본집에 들어가 그 춘 겨울에두 맨발에 게다짝을 끌구 댕겼구……. 일본 들어가서두 그렇지, 제 손으로 어떻게 색씰 골라 장갈 드니, 누가 색씨 경대 하날 사주나, 수저 한 벌을 맹글어 주나……. 난리통에 세간 나부래기 다 뺏기구, 조선말두 잘 못하는 예편넬 데리구 하눌 아래 딱 하나인 누나라구 이 알뜰한 년을 찾아오니 밥이나 집은 고사하구 저 잘난 행자나무두 못 내주겠다니……. 생각하문 생각할수록 불쌍하구 측은해서 밥을 먹어두 목구멍에 넘어가질 않구, 눈을 부쳐두 통 잠이 안오우. (하고 운다)
거복 (약간 측은한 마음이 들어) 오늘 같은 경사스런 날 왜 찔끔거리구 야단이야? 제 고장에서 살게 될려면 땅만 가져야 맛이겠어?
처 (솔깃하며) 그럼?
거복 아, 벼슬은 못하구, 장산 못해?
처 벼슬이요?
거복 그래. 땅은 못 주지만 정부만 서는 날이문, 자리는 한 군데 넣어 줄 수 있을 거야.
처 그럼 벼슬을?
거복 응, 각하께서 대통령만 되시문 우리 애국당 간부들은 대개들 중요한 자리에 앉게 될 게야. 나두 도지산 좀 어렵지만 부윤이나 군수쯤은……
처 (침을 꿀꺽 샘킨다)
거복 그렇게 되문, 영팔이두 내무부장이나 또는 공장 같은데 지배인쯤은 시킬 수 있게 될 거야.
처 (다시 한번 침을 샘키며) 부장이나 지배인을요?
거복 응, 그러니 기왕 참는 김에 좀더 참으라구 그래.
처 그럼 내 흥녀케 가서 그렇게 일르구 오리다. (하고 광희하야 달려갈려고 한다)
거복 아, 맹첨지더러 일르라구 하문 되지 않어? 행자나무 지금 벼야 할 테니 정한수나 떠다 바치두룩 해. (하고 창고로 들어간다)
처 (뒤란을 향하야) 맹첨지, 맹첨지.
맹첨지, 꼴을 손에다 든 채 나온다.
처 빨리 송이산 수용소에 가서 영팔이 좀 오라구 그래.
맹첨지, 옷에 풀을 털고 나간다. 혼자 남은 처는 어찌도 좋은지 엉덩이 춤이 저절로 나올 지경이다. 날개가 몸에 도친 듯 안으로 들어간다. 나무 우에서 쓰르레미가 한 바탕 패우(沛雨)처럼 울어댄다. 한동안. 이윽고 처, 소반에다 냉수 한 대접과 북어 한 마리와 쌀밥 한 주발을 바쳐들고 나온다. 나무 밑에다 내려놓고 정성껏 고사를 지낸다. 뒤니어 거복, 큰 톱을 들고 곡간에서 나온다. 처의 절이 끝나기 기대려 니어 절한다.
거복 (톱 한 끝을 처에게 주며) 부뜰어.
처 (부뜰며) 서뿔리 볏다가 나무나 괜히 상하지 않겠소?
거복 그렇다구 일천이백 원씩 디려서 빌 수 있겠어?
처 여보, 가장구부터 쳐놓구 밑둥을 빕시다.
거복 화루를 맹길려면 뿌럭지부터 벼야 돼.
처 허지만 좁은 마당에 쓰러뜨릴려면 역시 가장구부터 벼놓구 해야지?
거복 뿌리부터 벼야 돼.
처 아무리 생각해두 가장구부터 대강 쳐놓구 비는 게 좋겠소.
거복 뿌리부텀 벼야 돼. (하고 악을 쓴다)
처 에구 고집두…….
거복과 처, 노출된 뿌럭지 하나를 골은 후 거적을 갈고 마주 앉어서 쓱삭 쓱삭 톱집을 한다. 쓰르레미가 또 한바탕 울어댄다.
처 이렇게 당신하구 있으니까 흥부놀부 얘기 속에 나오는 박을 슬구 있는 것 같구려.
거복 (유쾌한 듯) 오래잖아 이 박 속에서 금은보화가 우루루 쏟아져 나올 거야.
처 허지만 놀부처럼 똥이 쏟아져 나오문 어떡허우?
거복 방정마즌 소리 다 하구 있네.
처 ………
거복 당신한테만 말이지, 이번에 각하께서 강연 나오신 건 남조선 단독정부 때문에 오신 거야.
처 단독정부라니요?
거복 삼팔선 이북은 이북대루 내버려 두구 우리 남조선만이라두 정부를 세워야겠다구 하시는 거야. 공산당놈들은 그렇게 되면 남선에선 자라 목아지처럼 쑥 들어가구 말 게야. 인민위원회니 농민조합이니 맹글어가지구, 지긋지긋이두 우릴 못 살게 굴드니 인젠 앓든 니 빠지듯 시원하게 됐어. 우리가 미국 사람한테서 정권을 맡게 되면 대신, 국장으로부터 지방의 경찰서장, 역장, 하다못해 동회총대까지두 우리 편에서 할 작정이야.
처 (황홀해서 듣고 있다)
거복 그렇게 되면 공산당패에서 '땅을 농민에게' 소릴 감히 해? 당장 잡아다 물고를 낼 테야. (점점 흥분해 온다) 땅은 절대루 작인들한테 뺏길 념려 없어. 집두 뺏길 념려 없구. 은행 예금두 뺏길 념려 없어. 뺏기긴커녕 일본놈들 두구 간 땅, 신한공사에 얘기해서 떠맡아 가지구 지금보담 곱은 늘릴 수 있어. 소작료 많네 하구 군소리 하는 놈들은 이루 사정없이 무 줄거리 짤르듯 탁탁 쳐버리구 쌀은 종전대루 또박또박 받아서 저 곡간 속에다 가득히 싸놓구 다리 뻗구 살 수 있어. 그렇게 되면 서울 가 있는 수정이가 대학을 졸업하구 내려오는 대루, 이 집하구 땅을 물려주구 난 맘 턱 놓구 나라를 위해서 일할 수 있어. 공산당 부란당패들한테 손톱 하나 까닥하지 못하게 하구 고스란히 큰애한테 물려줄 수 있어. 수정이꺼정 가면 사대째야, 할아버님부터 사대째야. (감격하야 눈시울이 시큰해진다)
처 그럼 그 정분 언제나 서게 될까?
거복 각하께서 남선 강연을 끝마치시구 서울에 돌아가시는 대루 곧 내각 조직에 착수하실 거야. 그러니 불과 며칠 안 남았어.
이때 근처에서 뻥 하고 무엇이 폭발하는 소래
거복 (질겁을 하야 니러서서) 빨리 숨어. 공산당패야.
처, 급히 마루 밑으루 기어 들어간다. 거복, 곡간 옆에 놓인 장독으로 뛰어 들어간다. 독이 쨍 하구 갈라진다. 왔다갔다 어절 줄을 몰르다 처에게 바지 밑을 잡혀 마루 밑으로 끌려 들어간다. 침묵. 옥수수 투기는 사나이, 후문 앞에 나타난다.
옥수수 투기는 사나이 (고개를 디밀며) 옥수수나 밀이나 쌀이나 투길거 없습니까?
거복과 처, 안도하야 기어 나온다.
거복 (사나이를 보니 화가 일시에 폭발한다) 투길 거 없어. 집을 보구 말을 해, 집을 보구. 어느 모루 보든지 우리집이서 옥수수 투겨 먹을 것 같어?
옥수수 투기는 사나이 거 참, 우순 양반 다 보겠네. 안 투기문 그만이지 왜 악을 쓰구 야단이야.
거복 악을 쓰문 누굴 어쩔 테야. (하고 옆에 세웠든 장대를 집어들고 쫓아나갈려고 한다. 옥수수 투기는 사나이, 겁을 집어먹고 뺑손이를 친다. 거복, 장대를 팽개치고 돌아와 마루에 걸터앉는다. 울화가 뻗쳐 어쩔줄 몰라 식식거리며 부채질을 한다)
처 (훅 한숨을 내쉬며) 십 년 살 건 감한 것 같소.
-막-
제 3 막
같은 장소, 두 시간 후.
마당에는 버인 가장구와 뿌럭지가 가득히 쌓였고, 톱밥과 파헤친 흙이 즐비하게 어즐어져 있다. 거복은 담배를 한 대 피우고 있고 맹첨지는 가장구를 패서 닙사귀를 흝으로 처는 그것을 곡간으로 날르고 있다. 거복의 노모, 몹시 언짢은 얼골로 들어온다.
처 (나무단을 놓고 달려가며) 어머님 지금 돌아오세요?
거복 (앉은 채) 끝났어요?
노모 (불유쾌한 듯) 그래. (허리를 펴며) 아이구 아이구.
처 (부액해다 마루에 앉히고 허리를 두들겨 준다)
거복 그래 각하께선 어딜루 가셨어요?
노모 어딜루 가긴 어딜루 가셔, 연회장으로 가셨지.
거복 그런데 왜 어머닌 안 가셨어요?
노모 가기 싫어서 난 그만뒀다.
거복 (의아하야) 가기 싫으시다니요?
노모 부인이 난 조선여잔 줄 알았드니, 서양사람이드라.
거복 서양사람이요?
노모 그래, 쪽두 안찌구 비녀두 안 꽂았드라. 그런 줄 알았드면 난 첨부터 가지두 안했다.
거복 아, 외국에 오래 나가 계셨으니 자연 그 나라 사람하구 결혼할 수 밖에 없지 않어요? 혼인엔 국경이 없단 말도 못 들으셨어요?
노모 그야 아무하고 결혼하시드래두 상관없지만 오각하를 모실 부인은 장차 이 나라의 왕비가 되실 분이 아니냐? 내가 열세 살에 대궐에 들어가 스물두 해 동안 중전마마를 뫼셨지만 양국 부인은 한 분두 없으셨다. 녜전부터 우리나라엔 양국서 시집오신 왕빈 한 분두 안 계셨어.
거복 그분은 정말루 우리 독립을 위해서 애쓰구 계시는 훌륭한 부인이세요.
노모 애쓰구 계시단 얘긴 오늘 오각하께서두 하시드라. 그렇지만 우리나라 례법으루 양국 부인을 왕비루 받들 순 없어. 군수령감두 미친녀석이지, 백죄 그이 만세를 불르라는 거야. 난 못 불르겠다구 했다. 그것만은 못 불른다. 절대루 못 불러.
거복 그럼 기부 신청두 안하구 나오셨겠군요?
노모 그이한테 왜 이 귀중한 보물을 바친단 말이냐? 서양사람들이야 화닥 피구 살지 화룻불 쬐구 산다드냐? 요샌 석탄 피는 것두 구찮아서 방에다 수증길 피구 산다드라.
거복 각하께서 이번에 지시는 별장은 조선식 온돌방이에요.
노모 서양사람은 방바닥에선 뼈가 백여 못 잔다드라. 화루란 안방아랫목에 디려놔야만 값어치가 있는 법이야. 화루두 화루려니와 그 양반들이 바둑이나 장길 둘 주나 아시겠냐?
거복 어머니 때문에 내 일생은 망치구 말았어요. 일본놈 시대엔 그놈들 인종차별하는 통에 아무것도 못했지만 해방돼서 군수자리라도 하나 얻어 해볼까 했드니 어머니 때문에 다 틀어지구 말었어요. (하고 울 듯 외친다)
노모 안 되문 조상탓이라드니 왜 날 가지구 탓이냐 탓이?
거복 가는 게 있어야 오는 게 있지요. 기부두 하나 안 바치구 무슨 념치루 벼슬자릴 얻어 하란 말이에요? 빨리 곽교장한테 얘기하시구 신청해 달라구 그러세요.
노모 (물을 갈르듯이) 난 못 가겠다. 다리 뒀다 뭘 하자는 거냐? 늙은 에미 부려먹을려구 하지 말구 네가 가서 하든지 말든지 하렴. (하고 성이 나서 안으로 들어간다)
거복 (망서리다가 결심을 하고) 아까 그 명주목도리 어떡했어?
처 안방 횃대에 걸렷수.
거복 이럴 줄 알았드면 애당초 내가 갈걸 고연이. (하고 안으로 들어간다)
나무에서는 쓰르레미가 또 한바탕 패우처럼 울어댄다. 곤충채집망을 든 동리 아해 (국민학교 오륙학년 정도) 행길에 나타난다.
아해 아주머니, 수국이누나 저기서 울구 있어요.
처 (달려가며) 수국이가?
아해 네, 누구하구 쌈했나 봐요. 메뚜기 잡으로 뒷산에 가니까 향교 담모퉁이에서 울고 있어요.
처 잘못 봤는 게지? 수국이누난 지금 오각하님 환영회장에 있을걸?
아해 으응, 거짓말 아니에요. 내가 앞으루 가서 왜 우냐구 하니까 막 밭고랑 쪽으루 다라났어요. 못 믿으시겠거든 아주머니가 향교 앞에 가보세요. (하고 다시 나간다)
처, 문 밖에 서서 걱정되어 밖을 내다본다. 수국, 풀이 하나도 없이 소연히 들어온다. 마당을 지나 마루로 가드니 털석 주저앉는다.
처 (딸 가까이 오며 감지할려는 듯이) 벌서 파했냐?
수국 (말없이 고개만 옆으로 흔든다)
처 그럼?
수국 속이 상해서 시작하는데 그냥 나와 버렸어.
처 무슨 일이 있었냐?
수국 각하께서 수 논 방석에다 왼통 구두발루 흙칠을 해노셨어.
처 구두발루?
수국 응, 아마 주당인 줄 아셨든 모양이야. 진흙 묻는 구두발루 밟구 걸어가시겠지.
처 서양에선 방에두 신발 신구 들어간다니까……. 오랫동안 습관이 되셔서 그러셨나 보구나, 쩟쩟. 안내하는 사람들이 못난 녀석들이지.
수국 아무리 습관이시길루 조선마루하고 서양홀을 구별 못하실까? (하고 엎어져 운다)
처 울지 말아. 다른 사람이 밟았다문 모르까 각하께 바친 보료를 각하께서 몰으시구 밟으신 걸 뭘 그러니? 어서 이러나라, 느 아버지 나오시기 전에.
거복, 목도리로 혹을 둘러싸고 안에서 나온다. 엎어져 우는 딸을 발견하고 주춤한다. 틀림없는 자기 딸인 것을 알자 돌연 안색이 싹 변한다.
거복 (억지로 평성을 꾸미며) 수국이 너 웬일이냐?
수국 (엎댄 채 무언) ……
거복 설마 너두 느어머니하구 느할머니처럼 도중에서 나온 건 아니겠지?
처 배가 아퍼서 그냥 나왔다구 하우.
거복 (노기가 폭발한다. 별안간 딸에게 달려들어 목덜미를 잡아 끌드니 땅바닥에다 쓸어뜨린다) 배가 좀 아프기루 고샐 못 참구 도중에서…… (하고 장대를 집어 내리친다)
처 여보, 수국인…… 수국인…… (하고 남편에게 매달린다)
거복 (뿌리치며) 저리 비켜! 이 팔 놔!
처 (다시 장대 끝에 결사코 매달리며) 여보, 여보.
거복 (운신이 부자유해지자 장대를 팽개치고 주먹으로 두들겨팬다) 죽어라 이년, 죽어 이년! 너 같은 년은, 너 같은 년은……
처 여보, 그애만 나무랠 게 아니오, 그애만.
거복 이년을 나무래지 않구 누굴 나무래? 느어멈은 자기 동생놈 땅 안 준다구 나왔구, 느할머닌 양국 부인이 뵈기 싫다구 나왔거니와, 네년은 왜 나왔냐, 응? 네년은 무슨 불평이 있어서 나왔어? (하고 계속해 두들긴다)
노모, 소란통에 안에서 나오다 이 광경을 목격하고 증오에 찬 소래로 쏘아부친다.
노모 잘 때린다 잘 때려. 죽여라, 아주 죽여라. 네 녀석이 나한테 못한 화푸리를 딸한테다 하는구나, 응? 이 늙은 에민 참아 못 패겠으니까 맛맛한 딸년을 두들기는구나.
거복 어머닌 가만히 계세요.
노모 이 녀석아, 그렇게 능청스럽게 수국일 때리지 말구 직접 날 때려라 날 때려. (하고 몸을 디리댄다)
거복 (딸을 잡았던 손을 논다) 모두가 이 멍추 때문이야. (하고 처의 뺌따구니를 후려 갈긴다)
처 (눈에 불이 번쩍 나고 눈물이 콱 쏟아진다. 그러나 무정항)
수국 (태갑이 튀듯 벌덕 니러나드니 증오와 경멸과 분노에 찬 눈으로 부를 쏘아보며 계란으로 판자를 때리듯) 어데다 손찌검을 하는 거예요? (하고 반항한다)
거복 (처절한 딸의 안광에 머리 끝이 쭈빗한다)
수국 (독을 뿜는 듯) 진짜 멍추는 아버지예요.
거복 뭣이?
수국 마루하구 양실을 구별 못하시구, 보료하구 주당을 구별 못하시는, 조선 사정에 서툴은 양반을, 일본놈들 새 명당 메듯 왔쇼이 왓쇼이 하고 치켜들구 벼슬이나 한자리 얻어 볼까 하구 눈이 벌개서 쫓아댕기는 아버지 같은 양반이 진짜 멍추예요. 진짜 어리석은 멍추예요.
거복 앨 써 공부시켜 노니까 애비 험담하는구나? 각하께서 왜 이년아, 조선 사정에 어두셔?
수국 어둡지 않으면야 진흙 묻은 구두발루 남이 한 달 동안 정성디려 논 자수보료를 질근질근 밟구 들어오실까?
거복 그럼 구둘 벗으시라구 왜 못했냐?
수국 다른 사람들이 모두들 보구 가만있는데 내가 중뿔나게 그런 소릴 어떻게 해요? 그래서 난 구두에 묻은 진흙을 털어 디릴려구 수건을 꺼내서 문질르니까 각하께선 성큼성큼 그냥 지나가 버리셨어. 이런 분이 어떻게 조선의 지도자구, 앞으로의 대통령이란 말이야? (하고 분에 못 이겨 다시 엎어져 운다)
거복 (변명하기 어려워) 자동찰 타구 가셨을 텐데 어떡허다 구두에 진흙이 묻으셨을구?
수국 연회장 현관 앞이 이번 장마에 질퍽하게 물이 쾌괴드랬어. 깜박 잊어 버리구 뭘 까라 놓지 않은 모양이야. 그런 양반을 위해 실 한 가닥 한 가닥 정성을 디려 수를 놨든 걸 생각하니까 분하구 억울해서 못 견디겠어. 스트라잌에 퇴학마진 동무들을 배반하구 교장을 따라 들고 나갔던 걸 생각하면 부끄럽구 억울해 못 견디겠어. (하고 어깨를 들먹거리며 느껴운다)
거복 너두 타국에 가서 삼십여 년씩 살다가 고향에 돌아와 봐라, 생소한가 안한가? 서툴르시다구 비난하구 배척하는 것만이 상수가 아니야, 가르쳐 디리구, 인도해 디리는 게 우리들의 의무야. (하고 주머니에서 금박테한 얀경을 꺼내 쓰고 어울리지 않는 스티끄를 짚고 나간다)
수국 (휙 고개를 쳐들며) 어델 가시는 거예요?
거복 기부 신청하구 와야겠다.
수국 (벌떡 니러나 쫓아가드니 부의 팔을 뒤에서 잡아제친다) 가두 소용없어요.
거복 소용없긴, 왜?
수국 기부했댔자 나오는 거 하나두 없어요.
거복 (자신만만히) 없긴 왜 없어?
수국 괜히 땅 진데 질퍽거리구 나가지 마세요. 오늘 역원 개선에 아버진 벌서 미끄러지셨어요.
거복 (눈이 출혈이 되며) 뭐, 뭐?
수국 전형위원 뽑아가지구 역원들 개선하는데 아버진 재정부장에서 미끄러지셨어요.
거복 (단연 부인한다) 그럴 리가 있나? 그럴 리가 있나?
수국 못 믿으시겠거든 대회장에 가보세요. 백로지에다 커다랗게 써서 부쳐 놨을 테니. (하고 안으로 들어간다)
거복, 비 오는 밤 묘지길에서 도깨비를 만난 듯, 말뚝처럼 그대로 뻣뻣해진다. 이윽고 허리가 뚝 부러진 듯 마루 끝에 가 털석 주저앉는다. 정말로 하늘이 문어지고 땅이 깨지는 듯 눈 앞이 캄캄해진 모양이다. 노모, 보기 딱해 수국을 따라 들어간다. 군수 윤리곤, 행길로 들어온다. 모닝그 바지에 왼통 흙탕물이 튀었다. 미낀미낀한 다혈질에다 다년의 축농증으로 늘 킁킁거리는 버릇이 있다. 보통 아닌 거복의 모양에 주춤한다.
처 (맞으며) 어떻게 이렇게 나오셨습니까?
윤군수 킁, 킁, 돌아가다가 궁금해서 들렀지요. (침울한 공기를 전환하려고) 거 걸레 있거든 좀 빌려 주십쇼.
처 (집어주며) 웬 흙을 이렇게 많이?
윤군수 각하를 전송하는데 자동차 바퀴에서 흙이 퉤서, 킁, 킁, 입으루두 다 들어간걸요. (퇴 하고 침을 뱉는다)
거복 (돌연 미몽에서 깨인 듯 군수 앞으로 간다. 그의 팔을 부뜰고 호소하듯이) 군수령감, 재정부장을 개선했다는 게 사실이요?
윤군수 (대답하기 난처한 듯 고개만 끄덕인다)
거복 그럼 내 대신 누가 됐소?
윤군수 킁, 킁, 강 건너 오돌쇠씨께서 추천되셨소.
거복 오돌쇠라니요? 령사관 고쓰가이루 있다가 통역 바람에 돈 잡았다는 그 돌쇠는 아니겠지요?
윤군수 바로 그 돌쇠씨요. 킁, 킁, 이번에 오관수라구 개명하셨다구 하오.
거복 (적의와 모멸에 찬 구조(口調)로) 그 가문두 지벌두 없는, 북해도루 대판으루 떠돌아 댕기든 놈을?
윤군수 킁, 킁, 허지만 경제적으론 절대 권리가 있소. 킁, 킁, 현금만 오백만 원이구 접수한 일본집하구 공장하구 모두 합하면 칠팔백만 원이 넘을 거라구 하오.
거복 그만한 돈은 나두 있소. 정미소하고 전당포하구 농장하구 합하면 내 재산두 팔백만 원은 조이 될 거요.
윤군수 허지만 그 재사는 거복씨 개인 것이지, 킁, 킁, 우리 애국당 재정하구야 아무 관계 없는 것 아니요?
거복 관계 없기야 오곰보나 내나 매한가지지요.
윤군수 돌쇠씨께선 킁, 킁, 이번 오각하께 독립자금으루 오십만 원을 쾌히 기부하셨소. 그리구 우리 애국당과 독립회에 각각 이십오만원씩, 도합 오십만 원을 내노셨소. 킁, 킁.
거복 ………
윤군수 사실 말이지, 정치란 돈 없인 못하는 거요. 장개석이가 제 아무리 기구 날르는 장수라두 절강재벌 없이야 꼼짝 못하지요. 킁, 킁, 그리게 미국 겉은 나라에서두 돈 없인 대통령 선거에 립후보를 못한답디다.
거복 ………
윤군수 세상에선 오각하를 장사꾼이니 모리배니 하구 비난하지만 그게 다 정치가 뭔지 몰으구 하는 소리요. 킁, 킁, 정치란 돈이요. 우리두 처음 애국당 전국대회차 서울에 갔다가 대뜸 '정치를 하는덴 돈이 필요하오. 돈을 가지구 오시오. 그 대신 령수징을 떼드리리다' 소릴 들었을 때 킁, 킁, 당수께 여간 환멸을 느꼈든 게 아니요. 허지만 차차 우리두 정칠해 보니까 킁, 킁, 돈의 필요를 절실히 느껴집디다. 나라를 좀먹구 독립을 방해하는 공산당 극렬분자들을 두들겨 부시는 데두 돈이 들지 않소? 킁, 킁, 테로단이야 돈 안 받고 움직이겠소? 그러니 거복씨두 정치를 본격적으루 한번 해보실려거든 목돈을 좀 쓰시요, 목돈을. 킁, 킁.
거복 ………
윤군수 (처에게) 킁, 킁, 아까 왜 도중에 나가셨어요?
처 빨래 삶어논 거 때문에……
윤군수 어머님께선 왜 또? 킁, 킁.
처 허리가 아푸셔서 나오셨다는군요.
윤군수 앞으루 좀더 적극적으루 나와들 주십쇼. 킁, 킁, 그리구 참 오늘 기부하시기루 된 저 행자나문 어머니께서 잊어버리구 가셨나 부다구, 우리 예편네가 대신 적어 너 디렸다구 합니다.
거복 (낭패하여) 부인께서 대신 적어 너셨대요?
윤군수 그렇게 놀랄 거 없소. 우리 예편네가 적어 넣다니까, 우리 일흠으루 한 줄 아시오? 킁, 킁, 당신 일흠으루 했답디다. 박거복씨 일흠으루 했답디다.
거복 (더한층 낭패한 표정) ………
윤군수 킁, 킁, 그럼 난 그만 가보겠소. 킁, 킁, 낙선했다구 너무 실망하거나 그러지 마시오. 킁, 킁, 또 좋은 기회가 있겠지요.
거복 ………
처 안녕히 가십쇼.
윤군수, 연성 킁킁거리며 장대한 걸음으로 나간다.
처 (군수를 바래고 돌아오며) 여보, 애국당 간부짜리두 떠러졌대니 앞으루 독립이 되드래두 벼슬짜리 하나 못 얻어 하게 될 게 아니요?
거복 (호통을 친다) 듣기 싫여.
처 아이 깜짝이야. 벼슬두 못할 바에야 무슨 정성이 뻐쳤다구 오백 년이나 된 나물 벼 바친단 말이요?
거복 허느니 내가 그 말이야. 빨리 곽목사한테 좀 뛔갔다 와.
처 거긴 왜요?
거복 가서 각하께 아까 기부 신청한 거 취소하겠다구 하구 와.
처 네. (하고 행주치마를 벗어 던지고 급히 나간다)
거복, 만성치질을 앓는 사나이처럼 무거운 다리로 자기방으로 들어간다. 전면 후면 미닫이와 덧문을 꽉꽉 닫는다. 이윽고 끙끙 앓는 신음소래가 안에서 들려온다. 곽목사와 처, 이야기하며 들어온다. 도중에서 만났나보다.
곽목사 그대루 기부하시라구 하시지요. 한번 적어 넣든 걸 이제 와서 어떻게 취소하겠어요?
처 그래두 취소해 주십쇼. 아무리 생각해두 그만두는 게 좋겠다구 하니까……. 어머님께서두 반대하시구…….
곽목사 어떻게 이렇게 별안간에들 맘이 변하셨을까?
처 ………
곽목사 (둘러보드니) 나가셨나요?
처 몸이 편찮어 드러누셨나 보군요.
방 안에서 거복의 끙끙 앓는 신음소래
곽목사 (마루로 올라간다. 문 앞에서) 어디가 편찮으시요?
신음소래 으흠, 으흐흠, 으흠.
곽목사 그런데 기부 취소하시겠다구 했다지요?
신음소래 으흠, 으흠.
곽목사 어린애 작난두 아니구, 대회석상에서 적어 넣든 걸 지금 와서 어떻게 도루 물른단 말이요?
거북의 소래 기부는…… 자유 의사야…… 으흠, 으흠.
곽목사 아무리 자유 의사라두 거복씨 체면이 있지 않소?
거복의 소래 오늘부터…… 애국당…… 그만두면 그만 아니요……. 으흠, 으흠.
곽목사 그야 거복씨만 그만두시면 그만이겠지요. 허지만 우리 애국당 지부의 체면은 뭐겠소? 각하께서 달라두 요구하시지도 않은 물건을, 이쪽에서 자진해서 바친다구 기부 목록꺼지 작성해서 바쳐 놓구 이제 와서 도루 물르겠다구 하면 우리 지부의 체면은 뭐며, 우리 읍 오만 읍민의 체면은 뭐겠소?
거복 체면이 무슨 기급한 체면이야. (하고 활짝 문을 제낀다. 그는 대님을 끌러 머리를 동였고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었다) 당신들 꿍꿍이속 다 알았소, 다 알았어. 나만 싹 빼돌리구 당신들 끼리끼리만 해먹을려는 꿍꿍이셈속 다 알았소, 다 알았어.
곽목사 글쎄 뭘 다 알았다구 작구 이러시요?
거복 건너다보니 절터란 말이요. 싹수가 노랗단 말이요. 난 뭐 눈치코치두 없답디까? 자리두 하나 못 얻어 할 걸 뻔히 알문서, 죽쒀서 개 존 일 할려구 이 행자나물 공짜루 바치란 말이요? (하고 마루로 뛰어 나온다)
곽목사 (피하야 뒤로 물러 앉으며) 허 참, 그렇게 말씀허시문 거복씨 인격을 의심치 않을 수 없겠는데…….
거복 서루들 한몫 보자는 판에 인격이 무슨 개 말라빠진 인격이야? (하고 목사의 벗어 논 중산모를 주먹으로 내리친다) 현금 기부 안한다구 한마디 의론두 없이 사람을 미끄러뜨리구, 돈 많이 기부했다구 령사관 고쓰가이질 하든 놈을 모셔다 않히는 게 당신들 인격이요?
곽목사 (모자를 집어 푹 꺼진 산을 바로 니르키며) 허 참, 거 거복씨가 나한테 이렇게 무례한 폭행을 하실 줄은 몰랐는걸. 유감이야, 유감이야. (하고 머리에다 얹는다. 피하는 듯 마루를 내려서며) 정 그러시다문 기분 취소하겠소. 허지만 대관절 저 나물 누굴 줄려구 이러시는 거나 좀 압시다.
거복 (뱉는 듯이) 아물 주문 어때?
곽목사 한번 냈든 걸 취소두 해디리는데 그까짓 거야 못 가르쳐 주실 거 있소?
거복 (반발적으로) 내 처남한테 팔려구 하오.
곽목사 (조롱하듯) 팔어요?
거복 그렇소. 돈 받구 팔 테요. 삼천 원 받구 팔 테요. 어쩔 테요? (하고 디리댄다)
곽목사 그럼 삼천 원에다 이 동리의 유서 깊은 고목을 팔아치신단 말이요? 삼천 원에다 우리 고을의 자라온 력사 그대로인 이 고목을 팔아치신단 말이요? 이조 오백 년의 산 력사를 단돈 삼천 원에?
거복 (태연히) 그렇소. 왜 배가 아푸오?
곽목사 허, 거 참, 내가 왜 배가 아푸단 말이요? 소화만 잘 되구 있소. 대관절 거복씨 같은 부자가 돈 삼천 원을 받아서 뭐에다 쓸려구 이러시오?
거복 나두 기부 좀 할려구 그러오. 그 돌쇠놈처럼 현금 기부를 할려구 그러오. 하하하하. (하고 혼자 통쾌하야 혹을 부뜰고 웃는다)
곽목사 (여우에 홀린 듯 망연히 그를 바라보더니) 아니 기불 하시다니, 누구한테 하신단 말이요?
거복 (대답이 쿡 막힌다) …… 좌우간 할 테요. 어엿하게 기불할 테요.
처 (날쌔게 기회를 놓치지 않고) 저 동리 청년단에다 하신대요.
거복 (소생한 듯) 그렇소. 동리 청년단한테 할 작정이요. 수해구제금으루 말이요. 그렇소. 동리 청년단위원장 하선생한테 줘서 수해동포 의연금으루 써달라구 할 작정이요. (하고 진땀을 씻는다)
곽목사 (불쾌한 듯) 그럼 이 나물 결국 수재구제금으루 비시게 되는 폭이군요?
거복 그렇소. 왜 입맛이 좀 쓰시오? 하하하하. (하고 천둥치듯 웃는다)
이때 하동정, 후문으로 들어온다. 곽목사, 모멸에 찬 눈으로 그를 흘겨본다.
거복 (맨발바닥으로 뛰어내려가 그의 손을 부뜰며) 하선생, 마침 잘 오셨소. 어서 올라오시오. 그러지 않아도 지금 댁으로 우리 수국일 보낼려든 참이었소.
동정 (의상(意想)외의 친절에 어안이 벙벙하면서 끌려 올라간다)
거복 (방석을 권하며 처에게) 들어가서 그 우물에 챈 수박 좀 쓸어와.
곽목사 흥. (약이 올라 혼자 주먹을 쥔 채 씨근거린다)
동정 목사님두 올라오시지요.
곽목사 댁이 누굴 약을 올리는 거요?
동정 그렇게 말씀하실 거야 있습니까? (거복에게) 그래 대회엔 나가 보셨습니까?
거복 난 이놈의 혹 때문에 못 나가구 어머니하구 수국어머니하구 수국이가 나갔다 왔지요.
동정 그래 감상이 어떠다고들 해요?
거복 재미가 없어 모두들 도중에서 나온 모양이요. 그리구 맹첨지두 갔다와선 하루종일 투덜거리구 있구…….
동정 이번 대회는 전적으루 실패라구밖에 볼 수 없지요. 댁의 식구들만 보드라두 그렇지요. 어머님, 수국어머니, 수국이 벌서 세사람이 각하에게서 떠러져 나온 게 아닙니까? 게다가 맹첨지까지 합하면 도합 네 사람이 오각하한테서 떠러진 셈입니다.
거복 네 사람뿐이겠오. 나두 떠러졌소.
동정 (의아한 듯) 수국아버지께서두?
거복 그렇소. 아주 똑 떠러지구 말았소. 삼복에 채미꼭지 떠러지듯 정이 똑 떠러졌소.
동정 그것 보십쇼. 그리게 제가 아까 뭐라구 했습니까? 조선독립과 오각한 절대루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구 하실 때 그 문젠 오늘 대회와 오각하의 강연을 들으신 후에 얘기하시라구 안 그랬습니까? 오늘 강연회에서 도중에 돌아간 사람들은 비단 댁의 식구들만이 아닙니다. 허리에다 벤또를 차고 수십 리 밖에서 산을 넘고 들을 건너 모여들었든 수백 명의 농군들이 거이 다 실망을 하고 돌아들 갔읍니다. 우리 고을의 농군들이 오각하에게 실망하고 돌아갔다는 것은 조선의 로동자 농민을 비롯한 근로대중 전부가 오각하에게서 떠러져 나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오각하께서 민중의 품안으로 들어오시지 못하고 늘 민중과 유리해 있으시기 때문입니다. 늘 그들의 편이 되고, 그들의 이익과 행복을 위하야 싸워주시지 않고, 그들의 행복과 이익에 배치되는 자본가, 지주, 악덕 모리배들, 일부 특권계급만을 위해서 싸우고 있으시기 때문입니다. 대중이란 단순한 것입니다. 오늘 각하께서 북조선처럼 땅을 골고루 노나 준다구 했어 보십쇼. 그 사람들은 땅에 코가 닿도록 절을 하고 그야말로 신주님으로 받들었을 것입니다. 조선의 진정한 지도자들은 이들 대중의 손이 되고 발이 되는 분이어야만 합니다. 결코 수국아버지 그 목에 달리신 혹 같은 존재여서는 안 될 것입니다.
거복 하하하하. (통쾌하게 웃으며 혹에 붙은 쉬염 한 개를 쓱 뽑는다)
곽목사 (얼골이 푸르락푸르락 하야) 아니 그럼 어떻게 하시는 말씀이요?
동정 진정으로 나라를 사랑하는 조선의 지도자는 결코 혹 같은 존재가 돼서는 안 된단 말이지요. 늘 민중의 기뿜과 슬품을 알고, 그들의 리상을 알고 몸소 실천하는 손발이 돼야지, 긁어도 가렵지 않고 때려도 아푸지도 않는, 인체와 유리된, 혈관도 신경도 없는 고기의 덩어리가 돼서는 안 된단 말입니다. 그건 사치품도 못될 뿐더러 오히려 거치장스럽지만 않겠어요?
거복 사실 옳은 말이요. 이놈의 혹 때문에 내가 어떻게 골치를 썩히고 있는지 몰르오. 빨리 떼어 버려야만 하겠소.
곽목사 흥, 인제 알구 보니 그렇군?
거복 뭐가 그렇단 말이요?
곽목사 당신이 좌경했단 말이요. 적색분자가 됐단 말이요. (측은하다는 듯이) 쩟쩟. 딱한 노릇이요. 나이 오십에 무슨 공산주의요? 지각 좀 채리시오, 지각 좀.
거복 당신들 그 역원들 꼴 보기 싫여서두 공산당해야겠소.
곽목사 우리 간부들 꼴 보기 싫여가 아니라 위조지폐가 쓰구 싶어서 그러시겠지. 일천이백만 원이나 해먹은 그 위조지폐가 쓰구 싶어서 그러시겠지? 허지만 당신이 집하구 땅하구 보전하구, 하루라도 더 사실려거든 아예 공산당엔 들어가지 마시우. 신세 망치오, 신세 망쳐. (하고 머리를 흔들흔들하며 나간다)
동정 조선이 바루 될려면 목사가 정칠 말어야만 할 텐데, 그자들이 관청요직을 차지하구 있으니 참 한심한 노릇이요.
거복 (별안간 꿀 먹은 벙어리가 된다) ………
동정 그럼 어떻게, 나물 비두룩 할까요?
거북 (태도가 돌변하며) 나물 비다니요?
동정 아까 기부해 주신다구 그러지 않으셨어요?
거복 (펄쩍 뛰며) 기불 하다니요? 잘못 들으신 게지. 난 그런 말 한적 없소.
동정 없으시다니, 당장 그러시구 나서 금새 부인하십니까? 제가 들오니까 사람을 보낼려든 참이라구까지 하시구서.
거복 사람을 보내드라두 나물 벼가라구 할려든 건 아니었소.
동정 그럼 곽목사한테 수해구제금으루 기부하시겠다구 한 건 농담이었단 말씀이세요?
거복 농담이야 아니었지요?
동정 그럼 리행을 하셔야지요. 이런 일이란 빨르면 빠를수록 그만큼 더 생명을 건질 수 있는 것입니다.
거복 하선생, 내가 이 나물 기부하겠다구 한 건, 곽목사하구 우리당 위원들을 약을 좀 올려줄려구 했든 거요. 정말루 당신들한테 기부할려구 했든 건 아니요.
동정 (언성을 높이며) 무엇이 어째요? 약을 올려줄려구 했든 거라구요?
거복 그, 그렇소.
동정 (날카롭게) 그런데 왜 거기다 나를 끌구 들어갔어요, 네? 왜 내 팔목을 부뜰구 마루루 끌구 올라갔냔 말이에요? 내가 수국아버지 약 올리는 재료감이란 말이에요?
거복 (약간 기가 꺾인다. 그러나 허세를 피며) 그럼 지나가는 말루 한 마디 한 걸 강제루 리행하라구 하는 거요?
동정 강제가 아니라, 수국아버지께서 정정당당히 리해하셔야 할겁니다. 누군 뭐 헐 이러이 없어서 이러구 댕기는 줄 아세요?
거복 허지만 난 직접 당신한테 대구 얘기했든 건 아니니까 리행 할 수 없소. (하고 방으로 들어갈려고 한다)
동정 (방문 앞에 가 딱 막아서며) 나한테 직접 하셨건 제삼자한테 하셨건 재준다구 하신 건 사실 아닙니까? 점잖으신 양반이 일구이언이 뭡니까?
거복 허지만 난 곽목사한테 했지 당신한테 일구이언한 건 아니니까, 꼭 리행해야만 될 의문 없소. (하고 마루 뒷문으로 피해 나간다)
처, 마루 뒷문 앞에 나타나 그의 앞에 막아선다. 쟁반에 수박을 들었다.
처 당신두 어린애두 아니구 그게 뭐요? 행자나물 영팔이한테 팔아서 그 돈으루 구제금 바치겠단 소린, 수박 쓸면서 나두 들었소. 준댔다 안 준댔다, 체통 사납게 그게 뭐요? 다른 일두 아니구 일가친척 구하구, 한고을 사람 구하는 일에.
거복 난 지나가는 말루 했대두 그러네.
처 당신이 아까 당신 입으루 나한테 뭐라구 했소? 땅은 못 주드래두 벼슬은 한자리 얻어 준다구 안 그랬소?
거복 누가 이렇게 될 줄 알았어?
처 그러니 땅두 못 주구 벼슬두 못 줄 바에야 이 나무라두 주두룩 헙시다.
거복 나라를 위해 쓰라구 유언하신 나물 어떻게 영팔이한테 주라구 이 야단이야, 야단이? 저리 비켜, 빨리.
처가 움직이지 않으므로 돌아서서 내려온다. 피해서 중문으로 들어가려고 하느네 노모, 안에서 나와 문지방 앞에 막어선다.
노모 너두 나일 쉬운을 먹었으문 체통을 좀 차려라. 대가리 커단 자식을 길르는 사람이 그게 무슨 꼴이냐? 손우에 사람들두 아니구 동갑또리 친구들두 아니구 아들뻘 되는 손아래 젊은이들한테 그게 무슨 점잖지 못한 짓이야?
거복 어머닌 왜 또 나스시는 거예요?
노모 나두 수해구제 기부한단 소릴 안에서 들었으니 허는 말이다. 우리 행자나무두 화루나 장기판이나 바둑판이 돼가지구, 서툴른 서양부인 방으루 들어가는 것보단, 화려한 의거리 양복장이 돼가지구 새파란 색씨 방으로 들어가서 귀염 받구 사랑 받는 걸 좋아할 게다.
거복 나라를 위해 쓰라구 유언하신 낭굴, 말 한마디 잘못 했다구 백죄 시집가는 색씰 위해 쓰란 말이세요?
노모 나라를 위하는 거란 너같이 꼭 벼슬짜리 얻어 할려구 쓰는 거만이라드냐? 수해구제두 나라를 위하는 일이구, 거지 구하는 것도 다 나라를 위하는 이러이야. 그러게 인자한 님군은 왕위에 올르시문 거지잔치부터 베푸시는 법이란다.
거복 몰르문 어머닌 가만이나 계세요. 얼른 저리 비키세요.
노모 난 비킬 수 없다. 갈랴거든 내 눈앞에서 떳떳이 사내답게 내주구 가거라. (노모가 움직이지 않으므로 거복, 피하야 중문과 창고 사이길로 나갈려고 한다. 수국, 사이길에서 나오며 부의 앞에 막어선다)
수국 화로하구 바둑판을 맹글어서 오각하한테 기불 했드면 어떡헐 뻔했어요? 아까 그, 내 수포처럼 무참한 꼬락선이가 안 됐으리라구 누가 보증하겠어요?
거복 이년아, 넌 또 왜 기가 나서 디리대는 거냐, 응? 이를테면 네가 하선생을 두던하는 거냐?
수국 두던이 아니라 아버지 때문에 난 얼골 들고 밖엘 못 나가게 돼서 그러는 거예요. 진이하구 모두들 동맹휴학을 했을 때두 아버진 나를 강제루 끌구 운동장 수채구멍으루 등교를 시키시지 안했어요? 난 하는 수 없이 아버지의 그 야비한 공갈과 협박에 못 닉여 동무들과 언약을 배반하구 뒷구먹으로 학교엘 나갔었든 거예요. 그 후 퇴학마진 진이하구 그의 동무들은 전부 청년단에 들어가서 일하구 있어요. 한 번은 속았지만 두 번씩 그들을 배반할 순 없어요. 수해구제 의연금으루 내주신다구 했으니 내주세요.
거복 이년아, 너두 그만큼 공불 했으문 애비 존경할 줄 좀 알아봐라. 존경할 줄 좀 알아봐. 청년단들한테 부끄런 거야 그때 잠간 지나문 그뿐이지만 나무를 내줘 봐라. 할아버님 유언은 두 번 다시 리행할 수 없게 될 테니.
수국 걸핏하면 유언 소린 하나 잘 내노셔. 다 썩어빠진 나무 하날 가지구, 나라를 위하면 얼마나 위한단 말이에요? 곤경에 빠진 동포를 구하는 것두 훌륭히 나라를 위하는 길이에요.
거복 빨리 비켜.
수국 내놓구 가세요.
거복, 딸이 움직이지 않으므로 눈을 히분덕거리며 앞을 피해 창고 문으로 나갈려고 한다. 맹첨지, 창고 문에서 나오며 그의 앞에 허리를 굽히고 막어선다.
거복 (노발대발하며) 맹첨진 또 뭐야?
맹첨지 저야 쥔 어른께 무슨 엿쭐 말씀이 있겠습니까…. 그저 저두…… 수해구제두 나라를 위하는 일이란 거에…… 똑같은 생각이란 말이지요……. 백성이 있어야, 나라두 있다구…… 우리 같은 사람 다 죽구 무슨 나라구 독립이구 있겠어요?
거복 누가 맹첨지한테 그런 거 가르쳐 달래? 빨리 저리 비켜.
맹첨지 ………
거복 이놈의 첨지가 쪽박을 차구 싶은가?
맹첨지 ……… (부동)
거복 (돌아서서 동정을 증오와 분노로 흘겨본다) 흥, 인제 알구보니 당신이 장마에 끊어진 곡간 축대 고쳐 줍네 하구 드나들드니, 우리집 식구들한테다 주살 놔줬구려. 호열자 예방주사 놓듯, 공산당 주살 놔줬구려? 그래 가지구 오늘 일제히 동맹파업을 식혔지? 나무 비자는 동맹파업을 식혔지? (하고 규환한다)
동정 (어이가 없는 듯이 그를 바라보고만 있다) ………
거복 (돌연 판장 쪽으로 달려가 판장 문을 흔든다) 초국이, 초국이, 이거 좀 와보게, 이거 좀 와봐.
초국, 판장 문을 열고 들어온다. 뒤따라 진이
거복 (응원을 청하듯) 초국이, 저자가 우리집 식구들을 충동일 식혀 가지구 이 나물 벼갈려구 하고 있네.
초국 이 사람아, 자네가 자진해서 내주겠다구 아까 안 그랬나?
거복 뭣이?
초국 곽목사한테 하는 소릴 나두 판장 너머루 똑똑히 들었네.
거복 아니 그럼, 자네두 이 나물 내주란 말인가?
초국 첨부터 손이나 안 댔으문 몰를까, 가장구하구 뿌럭질 반 이상 벼놔서 그대루 둔대두 살진 못할걸세. 기왕 죽을 걸 끼구 있으문 뭘 하겠나? 시언스럽게 내주지.
거복 이놈아, 그게 친구한테 할 소리냐? 앞뒷집이서 부랄 부뜰구 가치 자라난 친구한테 할 소리냐? 경찰서에 달려가서 순사는 불러다 주지 못할망정, 돌아가신 느이할아버질 봐서라두 네놈마저 맞장구를 쳐야 옳단 말이냐?
진이 아저씨, 호열자 주사 마지시는 셈 치시구 눈 딱 감구 내주세요.
거복 뭐, 호열자 주사?
진이 네, 지금 아저씨가 하선생께서 주살 놔노셨다구 안 그러셨어요? 아저씬, 저 나무가 거미줄 하나 없이 깨끗하다구 하시지만, 아까 밭을 맹그느라구 뿌럭지 근처를 파보니까 엄지손까락만한 굼벵이가 우굴우굴해요. 그러니 저 꼭대기에 올라가 보문 진덕이두 여간 많이 득실거리지 않을 거예요. 나무 속에두 벨 벌레가 다 먹었을 거구, 겨울엔 가장구 때문에 양지가 안 들구 나무 밑은 늘 습하구 우중충하지 않어요? 그러니 위생상으루 봐서두 좋지가 않어요. 거기다 밤낮 고살 지낸, 비 오는 날 밤엔 도깨비가 나올 것 같구, 무서워 죽겠어요.
초국 아까 못하겠다구 거절했네만, 자네가 수해구제에다 기부해 준다면 내가 무료루 봉사해 줌세.
거복 네놈이 불난 집에 부채질이냐?
거복, 노기확충하야 후문으로 나가려 하는데 초국, 앞을 막는다.
초국 (그의 팔을 부뜰며) 그렇게 고집 피지 말구 내주구 나가게.
거복, 그의 손을 휙 뿌리친다. 일동을 무의식중에 한바퀴 흝어보니 마치 자기를 포위하고 있는 듯하다. 순간 생리적 불안과 공포가 뇌리를 덮는다. 돌연 뒷거름질을 쳐 행자나무 앞으로 간다. 나무에다 등을 착 대고 방어자세를 취하며 비명에 가까운 규환을 한다.
거복 이놈들아, 나를 가운데다 몰아놓구 느이들이 재판을 할 작정이냐? 동래서 애비 때린 놈 잡아다놓구 볼기 때리듯 나를 때릴 작정이냐? (하고 비지땀을 흘린다. 극도의 흥분으로 안색은 종이짱같이 하애졌으며 안면은 뜨끔뜨끔 경련한다)
동정 (그의 앞으로 가며) 수국아버지, 즈이가 수국아버질 둘러싸게 된 건 무슨 사전 약속이 있었든 것도 아니요, 또 수국아버지 말씀과 같이 미리 주사를 놨든 것두 아닙니다. 어떻게 우연히 이렇게 되구 말았습니다. 우리가 무슨 권한으루 수국아버지를 재판하구, 무슨 권한으루 매질을 하겠습니까? 오늘 이 자리의 이 우연한 포위는 댁의 가족들과 이웃과 우리 청년단이, 그 리유는 다 각각 달르지만 이 행자나물 비는 데 대해서 의견이 일치하다는 것을 표시하는 것입니다. 이 기회에 깨끗이 기부해 주십쇼. 수해 동포와 계씨를 구하는 길일 뿐 아니라, 수국아버지 자신을 구하는 길일 것입니다.
거복 (미친 듯이 절규한다) 나를 구하는 길이라니?
동정 수국아버지의 머리 속에 저 고목처럼, 가장구를 펼치고 있고 뿌리를 박고 있는 봉건잔재와 일제잔재를 깨끗이 청소하는 길이란 말입니다.
거복 당신은 말끝마다 일제잔재니 봉건잔재니 하지만 난 그런 건 가져본 적두 없거니와 털끝만치두 갖구 있지 않소.
동정 잔재란 누구든지 자기 자신은 의식지 못하는 것입니다. 댁의 조부님게서 생존하셨을 땐 나라란 곧 임금을 의미했든 것이고, 나라를 위해 쓰는 일이란 곧 임금을 위해 쓰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할아버님의 이 유제는 수국아버지 머리 속에 그대로 내려와 오각하의 얼골에 지난날의 대한과 임금의 면모를 느께기 하였든 것입니다. 그러나 할아버님대로부터 아버님대를 거쳐 수국아버지대에 니르는 삼십여 년 동안 조선은 비록 나라를 빼앗기고 나라없이 살아왔을망정 나라에 대한 리상은 늘 백성과 함께 자라왔었고, 모든 애국자들은 이 리상을 위하야 용감히 싸워왔었습니다. 이 리상이란 앞으로 우리들이 세울 새로운 나라에의 리상이었으며, 새로운 나라란 임금을 위한 나라가 아니라 우리들 백성 자신을 위한 나라여야만 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요새말로 하면 인민을 위해 쓴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수해 동포나 전재민이란 우리 인민 중에 가장 고초를 받고 있는 불싸한 동포들입니다. 그들을 위해 쓰는 것이 어째서 나라를 위해서 쓰는 길이 아니겠습니까?
거복 (가슴이 약간 찌르르 해오나 보다. 묵연히 듣고만 있다)
동정 일제잔재란 별 게 없습니다. 왜정시대에 군용재루 헌납하여 해군대신에 감사장을 받어가지고 행세를 해보시려든 그 비루하고 오욕된 생각을 해방 후의 오늘까지 고대루 가지고 오셔서 또다시 벼슬이나 리권이라두 하나 잡아보실려는 그 부패한 때를 말하는 것입니다.
거복 (찔린 듯이 전신을 경련한다) ………
동정 조선의 독립이란 삼천만 민족의 한 사람 한 사람의 혈관 속에 잠재해 있는 이 같은 봉건잔재와 일제잔재를 뿌리째 뽑아 버리지 않구는 절대루 니루어질 수 없습니다. 이 잔재를 깨끗이 청소함으로써만 우리가 희망하는 진정한 민주주의의 국가를 세울 수 있읍니다.
거복 ………
동정 그런 의미에서 이 나무를 기부해 주신다는 건, 아까 말씀한 바와 같이 나라를 위하는 길일 뿐 아니라 수국아버지 자신께서 목욕하시는 길이요, 나아가 진정한 이 땅의 민주주의의 국가 건설을 추진식히는 길인 줄 압니다.
거복 ………
이때 후문으로 일본식으로 행장을 한 영팔과 그의 처 들어온다. 처의 등에는 영양부족으로 널부러진 젖멕이가 업혔으며 처의 창백한 얼골은 흩어진 두발과 함께 괴담에 나오는 귀신을 연상케 한다. 일본서 나코 일본서 자라나 조선말을 못한다.
영팔 (이상한 공기에 잠간 주저하더니 누나 앞으로 간다) 누님 가겠수.
처 아니 간다니, 어디루?
영팔 일본으루 다시 들어가겠수.
처 그럼 그 구석엘 또? (하고 목이 메여 말을 닛지 못하고 그 자리에 업더져 운다)
영팔의 처도 돌아서서 어린애를 얼르며 운다.
영팔 (거복에게) 매부, 그동안 여러 가지루 페만 끼쳤수. 여기 더 있었댔자 별 수가 날 거 같지 않군요. 창피하지만 일본으로 다시 겨들어가는 수 밖에 딴 도리가 없겠어요.
거복 ………
영팔 조선 나와 보니 이것이 내 고국인가 하는 생각이 작구만 나요. 여기 나올 때야 학교 운동장에서 거적 깔구 지내다 다시 겨돌아갈 줄 생각이나 했겠어요? 여기보단 그래두 일본사람들이 다정하구 따뜻해요. 같은 수용소에 있는 만주서 온 어뜬 령감은 날보구 일본 들어간다구 친일파라구 하드군요. 허지만 사실에 있어 조선 나와 반 년이 넘지만 따뜻한 밥 한 덩일 얻어먹었으면 개잡놈이에요.
거복 …….
영팔 (노모에게) 사둔 마나님, 그럼 안녕히 계십쇼.
노모 이렇게 섭섭하게 떠나서…… 이럴 줄 알었드면 아침이라두 한 끼 멕여서 떠내보낼걸. (하고 눈물이 글성한다)
영팔 (자기처에게) 오바산니 오와까래시나 [아주머님께 작별인사 여쭤.]
영팔처 (공손히 인사한다)
노모 (측은하야) 에미가 저러니 젖이 나올 리가 있나.
영팔 (자기처에게) 오니이사마니모 시나구자 [형님에게도 해야지]
영팔처 (절한다)
거복 (가슴이 뭉클해 외면을 한다)
영팔 그럼 수국이두 잘있구…….
수국 (돌아서서 운다)
영팔 (맹첨지에게) 령감님, 또 뵙지요.
맹첨지 (한숨을 훅 쉬며) 자알 가시오.
영팔, 자기 처를 재촉하야 나간다. 노모, 수국, 할아범, 처, 울면서 뒤따른다. 쓰르레미가 소낙비처럼 울어댄다. 무거운 침묵, 처, 울면서 되돌아온다.
처 당신은 벽이요, 돌이요, 기둥이요? 어떻게 저것들을 여기서 살게 할 길이 없겠소?
거복 ……. (동요를 짓눌를려고 고민한다)
처 (그의 몸을 부뜰고 흔들며) 어떻게 다시 들어가지 않구 살게 할 길이 없겠소?
거복 …….
처 (다시 시차게 흔들며) 없겠소?
거복 (캥겼든 활줄이 탁 풀린 듯한 소래로) 줘.
처 그럼?
거복 음…… 그리구 돈은 하선생 디리라구 해.
늘어섰든 일동, 진통 끝에 분만을 본 듯 안도의 한숨을 훅 쉬고 약속이나 한 듯이 서로들 얼골을 바라본다. 처, 좋아서 어쩔 줄을 몰으는 듯이 급히 밖으로 나간다.
초국 그 말 한마디가 그렇게두 힘든가? 죽은 진이어멈 초산할 때보담두 더하네.
거복 ……공산당에선 내 땅두 이렇게 뺏아갈 거야……. 오늘 같은 똑같은 방법으루, 할아버님때부터 내려오는 이천 석지길 뺏어갈 거야……. 나를 막다른 골목에다 몰아너 놓구……. 꼼짝달삭두 못하게 칭칭 얽어 놓구……. 내, 이, 이천 석지길 송두리째 뺏어갈 거야…….
하고 오한이 끼친 듯 전신을 부르르 떨드니, 부상한 짐승같이 무거운 걸은새로 마루로 올라간다. 또다시 폭우가 한번 쏟아질려나 보다. 바람이 어데서인지 휙 불어와 마루 한편에 쓸어 놓았든 장기뽄을 휘날린다. 거복, 얼굴과 몸에 휘날려오는 장기뽄을 털랴고 하지도 않으며 방으로 들어가 문을 꼭꼭 잠근다. 처를 선두로 나갔든 일행 다시 돌아온다.
동정 (달려가 영팔에게) 빨리 이 보따리 끌러 내리십쇼.
수국 (영팔의 처에게) 네에상 아까장 하야구 오로시대 [언니 빨리 어린애 내려주.]
노모 (처에게) 아까 그 수박, 하선생껀 모두 디려라.
영팔 (보따리를 내려놓으며) 수박보담두 나물 먼점 벼야겠습니다.
초국 (저고리를 벗으며) 내가 벼디리지요.
영팔·동정 (이구동성) 초국씨께서요?
초국 네, 구제금 대신 근로봉살하지요. (하고 수건으로 머리를 질끈 동여매드니 도끼를 든다)
긴장이 풀린 일동의 웅성거리는 화기애애한 가운데 기운찬 초국의 세련된 첫 도끼가 쩡 하고 나무 밑둥에 떠러진다. 일동 환성을 친다. 무성한 가장구에서 쓰르레미가 린, 린, 리인 하고 이에 호응한다. 이어 방에서는 도끼에 자신의 늑골을 찍히는 듯한 거복의 비통한 신음소래가 들려온다. 막의 템포와 함께 이 도끼와 쓰르레미와 신음소래는 일치된 하모니를 가지고 계속된다. 무생물과 곤충과 인간의 이 세 가지 소래는 새로운 시대에의 건설과 오불관언의 중립과 역사에 낙오된 반동자의 타락한 말로의 호읍(號泣) 그대로를 암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