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형성 되어진 것은 변한다.
모든 형성 되어진 것은 괴로움이다.
모든 형성 되어진 것들에는 고정 불변하는 실체가 없다. 즉 자아가 없다라는 의미입니다. 모든 존재들이 지니고 있는 세 가지 보편적인 특성인 무상, 고, 무아를 삼특상(tilakhana)이라고 합니다.
무상(無常)은 빨리어로 아니짜(anicca)라고 합니다. 모든 존재는 조건에 의해서 발생했기 때문에 조건에 따라 변한다는 것입니다. 흔히 무상이라고 하면 건강했던 친구가 갑자기 죽었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인생 참 허무하다’라고 탄식하는 것처럼 허무주의나 부정적인 의미로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 적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무상의 의미는 허무주의나 부정적인 의미가 아니라 모든 존재는 고정 불변하지 않고 변한다는 의미입니다. 나쁘게만 변하는 것도 아니고 좋게만 변하는 것도 아닙니다. 조건에 따라 좋게 변할 수도 있고 나쁘게도 변할 수 있는 것입니다.
모든 존재는 고정되어있지 않고 변하기 때문에 아기가 자라서 성인이 될 수 있고, 병에 걸린 사람도 치료하여 완치가 될 수 있으며, 돈이 없어 살림이 쪼들리던 사람이 돈을 벌어 부자가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또 조건에 따라 변하기 때문에 부자가 폭망하여 노숙자가 될 수도 있고, 사랑하면서 죽고 못 살던 연인도 원수가 되어 헤어지기도 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변하지 않고 바뀌지 않는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천년이 가도 변하지 않을 것만 같은 큰 산을 비롯하여 태양과 달을 포함한 세상의 모든 존재들은 매 순간 일어났다가 사라지고 사라졌다가 일어남을 반복하면서 변해가고 있습니다. 우리의 몸과 마음도 이와같이 변해가고 있는 것입니다. 특히 정신적인 영역인 마음은 육체보다 더 분주하게 하루에도 수십 번, 수백 번씩 이리 뛰고 저리 뛰면서 바뀌고 변합니다.
누가 나에게 ‘성격이 좋다, 잘 생겼다’라고 하면서 칭찬을 하면 기분이 좋아져서 어깨가 으쓱거리다가도 난데없이 비난을 받거나 악담을 듣게되면 방금 좋았던 기분은 사라지고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르게 됩니다. 이렇게 순간 순간 조건에 따라 급변하는 것이 우리 중생들의 마음입니다. 무상의 법칙은 우리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조건에 따라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이기 때문에 인간이 제어하거나 통제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닌 것입니다. 무상의 법칙에 저항하거나 집착하게 되면 괴로움만 더욱 강화될 뿐임으로 형성된 모든 것들은 변한다는 무상의 진리를 올바르게 알아차리고 통찰하는 지혜의 눈을 키워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지혜의 눈이 밝아지게 되면 무상한 것들에 집착은커녕 오히려 염오하게 되고 멀리하게 되어 괴로움이라는 굴레를 벗어던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는 상윳따 니까야 “무상경(23:13)”을 인용합니다.
“세존이시여, ‘무상(無常), 무상’이라고들 합니다. 도대체 어떤 것이 무상입니까?
“라다여, 물질은 무상하다, 느낌은 무상하다, 인식은 무상하다, 형성은 무상하다, 의식은 무상하다.
“라다여, 이렇게 보는 잘 배운 성스러운 제자는 물질에 대해서도 염오하고,
느낌에 대해서도 염오하고,
표상에 대해서도 염오하고,
형성에 대해서도 염오하고,
인식에 대해서도 염오한다.
염오하면서 탐욕이 사라지고, 탐욕이 사라지므로 해탈한다. 해탈하면 해탈했다는 지혜가 있다.
‘태어남은 다했다 청정범행은 성취되었다. 할 일을 다해 마쳤다.
다시는 어떤 존재로도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라고 꿰뚫어 안다.”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고(苦)는 빨리어로 둑카(dukkha)라고 합니다. 고정 불변하지 못하고 조건에 따라 변하기 때문에 안정되지 못하고 불완전하며 불만족의 상태를 고(苦), 즉 괴로움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고는 육체적인 괴로움을 비롯하여 근심, 걱정, 슬픔, 우울, 스트레스, 불만족 등 정신적인 괴로움을 포함합니다.
모든 형성된 것들은 조건에 의해서 일어나고 사라지고 변합니다. 변하는 것을 고정 불변하는 것으로 착각하여 집착하게 되면 괴로움이 일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변하기 때문에 괴로움이라고 설명하면 변하기 때문에 즐겁고 행복한 일도 있으므로 괴로움이라고 단언하는 것은 받아 들이기가 어렵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물론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만 그 즐거움과 행복이 영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어떤 조건에 의해서 행복과 즐거움을 느끼게 되더라도 그것은 영원할 수가 없고 행복과 즐거움을 느끼게 하는 조건이 다하면 행복감도 사라집니다. 이때 밀려오는 상실감 그 자체도 괴로움의 영역에 포함됩니다.
지금 내가 좋은 직장에 입사하고,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서 연애를하고, 그렇게 바라던 값비싼 자동차를 가졌을 때 그 기쁨과 행복감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충만했을 것입니다. 그런 행복이 영원히 이어진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모든 존재는 조건에 따라 일어나고 사라지고 변하기 때문에 지금 행복감에 충만해 있다고 하더라도 그 행복감은 영원히 지속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가지고 싶었던 값비싼 자동차도 자주 이용하고 시간이 지나면서 익숙해지면 식상하게 되고, 너 없이는 단 하루도 못 살겠다며 죽고 못 살던 연인도 시간의 흐름에 따라 사랑의 열기도 달라지고 이별을 고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한결같지 못하고 어떻게 변할지 모르기 때문에 불안정하며 만족스럽지 못한 이것을 괴로움, 즉 고(苦)라고 하는 것입니다. 상윳따 니까야 “괴로움 경(38 : 14)”에서는
“도반 사리뿟다여, 괴로움 괴로움 이라고들 합니다. 도대체 어떤 것이 괴로움입니까?”
“도반이여 세 가지의 괴로움의 성질이 있습니다.
그것은 고통스런 괴로움의 성질(苦苦), 형성된 괴로움의 성질(行苦),
변화에 기인한 괴로움의 성질(壞苦)입니다.
도반이여, 이러한 세 가지 괴로움의 성질이 있습니다.”라고 하면서 괴로움에는 세 가지 성질(三苦性)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고고는 생, 로, 병, 사와 같은 인간의 근원적인 고통을 포함한 육체적, 정신적으로 느끼는 모든 괴로움입니다.
행고는 모든 형성된 것들은 조건에 의해서 일어났다가 사라지기 때문에 괴로움이라고 합니다.
괴고는 변화에 기인하여 무너지는 괴로움입니다. 영원할 것만 같았던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질 때 느끼는 괴로움, 젊고 탱탱하던 피부에 나이가 들어가면서 주름이 늘어나고 볼살이 처진 늙어가는 모습을 마주할 때의 괴로움, 수 많은 군중들로부터 갈채를 받던 인기스타가 인기가 사라졌을 때 느끼게 되는 상실감과 외로움 같은 것들이 모두 괴고에 포함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힘들고 괴로울 때 세상에서 내가 제일 불행하고 괴로운 사람인 것같이 느낄 때가 있습니다. 나보다 더 힘들고 괴로운 사람도 얼마든지 많지만 만사를 내 위주로 생각하고 보는 습관 때문에 타인의 괴로움은 보지 못하고 세상에서 내가 제일 괴로운 사람인 것 처럼 착각을 하게되고 그것 때문에 더 괴롭기도 합니다. 아무리 돈이 많고 잘나 보이는 사람도 늙고 병들고 죽음이라는 괴로움은 피할 수 없고, 높은 권력을 가진 고관대작이라도 남모르는 괴로움이 있으며 그 권력을 지키고 유지하기 위해서 애쓰며 노력하는 자체도 하나의 괴로움입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매 순간 변해가는 나라는 것을 지키기 위해서 힘들이고 바둥거리면서 살아가는 현실은 누구나 예외 없이 겪고 있는 괴로움인 것입니다.
이렇게 괴로움을 강조하고 있으니까 불교를 자칫 염세주의나 허무주의같이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괴로움만 강조하고 괴로움을 극복하는 방법을 제시하지 못한다면 염세주의라고 해도 변명의 여지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세상을 있는 그대로 괴로움에 쌓여있음을 정확히 꿰뚫어 보시고 괴로움을 극복하는 방법까지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 방법이 바로 팔정도라고 하는 수행 방법입니다. 불교에서 팔정도를 강조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단언컨대 팔정도를 올바르게 이해하고 잘 닦으면 모든 괴로움을 소멸하고 궁극의 행복을 성취할 수 있습니다.
무아(無我)는 빨리어로 아낫따(anattā)라고 하며 변하기 때문에 안정되지 못하고 불완전하여 괴로운 것은 자아라고 할 수 없다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색⋅수⋅상⋅행⋅식의 다섯 가지 무더기로 가립된 나라고 하는 것에는 고정 불변하는 영혼같은 실체가 없다라는 것입니다.
현실에서 걷고 뛰고 하면서 눈앞에 보이는 내가 없다라는 의미가 아니라 고정되어 영원히 변하지 않는 실체로써의 나, 즉 자아가 없다라는 의미입니다. 상윳따 니까야 “무아의 특징 경(S22:59)”에서는
“비구들이여, 물질은 자아가 아니다. 만일 물질이 자아라면 이 물질은 고통이 따르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물질에 대해서 ‘나의 물질은 이와 같이 되기를. 나의 물질은 이와 같이 되지 않기를.’이라고 하면 그대로 될 수 있을 것이다.
비구들이여, 그러나 물질은 자아가 아니기 때문에 물질은 고통이 따른다.
그리고 물질에 대해서 ‘나의 물질은 이와 같이 되기를. 나의 물질은 이와 같이 되지 않기를.’이라고 하더라도 그대로 되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느낌은... 인식은... 심리현상들은... 알음알이는 자아가 아니다. 만일 알음알이가 자아라면 이 알음알이는 고통이 따르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알음알이에 대해서 ‘나의 알음알이는 이와 같이 되기를. 나의 알음알이는 이와 같이 되지 않기를.’이라고 하면 그대로 될 수 있을 것이다.
비구들이여, 그러나 알음알이는 자아가 아니기 때문에 알음알이는 고통이 따른다.
그리고 알음알이에 대해서 ‘나의 알음알이는 이와 같이 되기를. 나의 알음알이는 이와 같이 되지 않기를.’이라고 하더라도 그대로 되지 않는다.”라고 설명하면서 다섯 가지의 무더기(五蘊)로 이루어진 나 라고 하는 것에는 고정 불변하는 자아라고 할만한 것이 없기 때문에 육체적, 정신적인 괴로움이 발생해도 내 마음대로 제어할 수 없다라는 것입니다.
자아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가 전제되어야 비로소 자아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을 내 마음대로 주관하고 다스릴 수 있는 주재성(主宰性)과 언제나 고정되어 변하지 않는 항상성(恒常性)입니다.
내가 몸이 아플 때 아프지 말라고 명령하면 당장 아픔이 멎어야 하고, 내게 병이 들지 말라고 하면 병들지 않아야 주재성이 내재되어 있다는 근거가 될 것입니다. 하지만 내 의지와 상관없이 병이 생기고 고통을 느끼게 된다는 것은 주재성을 갖춘 자아가 아니고, 자아라고 할만한 것이 내재 되어 있지 않다는 방증입니다.
또 고정 불변하는 나 라고하는 것, 즉 자아가 있다라고 한다면 그 존재는 고정되어 어떠한 변화도 없이 언제나 한결같은 항상성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일말의 변화라도 감지되는 존재는 항상성이 결여되어 있으므로 자아가 아닌 조건 발생의 존재라고 단언할 수 있습니다. 특히 우리 인간은 하루에도 수십, 수백 번씩 변하는 마음과 시시각각 생멸을 거듭하는 육체로 구성되어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항상성은 찾아 볼 수 없으므로 자아라는 단어와는 거리가 멀다 할 것입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나’라고 하는 말은 다섯 가지의 무더기인 오온(五蘊)의 일시적인 화합에 붙인 명칭일 뿐이지 내가 죽어서도 영원히 죽지않는 영혼같은 것이 남아서 윤회의 주체가 되는 영원불변하는 자아라는 것은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에 ‘나’와 ‘나의 것’이라는 허상에 집착하지 말라는 가르침이 바로 무아의 가르침입니다. 상윳따 니까야 “소나경(22:49)”에서는
“소나여!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물질은 영원한가 무상한가?”
“부처님이시여, 무상합니다.”
“그러면 무상한 것은 괴로운 것인가 즐거운 것인가?”
“부처님이시여, 괴로운 것입니다.”
“무상하고 괴롭고 변화하는 법을 ‘이것은 내 것이고 이것이야말로 나이며 이것은 나의 자아다’라고 하는 것은 옳은 것인가?”
“부처님이시여, 그렇지 않습니다.”라고 대답하고 있습니다. 수⋅상⋅행⋅식에 대해서도 위와 같이 질문하고 대답하고 있습니다. 모든 존재는 변하기 때문에 무상이고, 고정되어 있지 못하고 변하기 때문에 안정되지 못하고 만족스럽지 못한 상태가 괴로움입니다. 이렇게 조건에 따라 변하고 괴로운 것에는 나라고 할만한 실체가 있을 수 없기 때문에 무아라고 하는 것입니다.
모든 존재들이 보편적으로 지니고 있는 무상, 고, 무아라는 특성을 올바르고 정확하게 통찰한 사람은 욕망과 집착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중생들은 알 수 없는 수 억겁의 생을 진리를 모르고 어리석음에 함몰되어 살아왔기 때문에 무상, 고, 무아를 통찰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렇기때문에 부처님의 가르침을 올바로 배우고 익혀서 실천하는 수행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삼특상을 대승불교에서는 삼법인(三法印)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중요한 계약서나 문서에 도장을 찍는 것처럼 그 정도로 중요한 가르침이라는 의미입니다. 이 삼법인이라는 용어는 초기 경전에는 나타나지 않는 용어입니다. 부파불교 설일체유부의 율장에서 처음 나타나는 용어로 무상, 고, 무아의 가르침의 중요성을 더욱 강조하는 의미가 담긴 용어라고 생각됩니다.
제행무상(諸行無常), 제법무아(諸法無我), 열반적정(涅槃寂靜)을 삼법인이라고도 하고, 열반적정을 빼고 일체개고(一切皆苦)를 넣어서 삼법인이라고도 합니다. 때로는 네 가지 모두를 사법인(四法印)이라고도 합니다.
앞에서 설명한 삼특상과 삼법인은 동일한 가르침이면서도 분명한 차이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 차이점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삼특상은 무상, 고, 무아라는 모든 존재의 세 가지 보편적인 특성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반드시 무상⤍고⤍무아라는 순서대로 나타납니다.
그런데 삼법인을 구성하고 있는 열반적정은 존재들의 보편적 특성, 즉 유위법들이 가지고 있는 특성들의 설명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에 삼특성의 내용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삼법인의 제행무상, 제법무아, 열반적정은 유위법과 무위법의 구별없이 불교에서 가장 도드라진 핵심적인 특징들을 정리한 것으로 이해됩니다. 또 삼법인은 때에 따라서 열반적정을 일체개고로 대체하기도 하고, 열반적정과 일체개고를 모두 포함하여 사법인이 되기도 한다는 것으로 보아서 네 가지의 특징들이 나타나는 순서가 반드시 정해져 있지 않은 반면에 삼특상에서는 반드시 무상⤍고⤍무아의 순서대로 나타나는데 그 이유는 부처님께서 삼특상을 설명하실 때 항상 무상⤍고⤍무아의 순서대로 말씀하셨고 경에서도 반드시 이 순서대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무아는 다른 어떤 종교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우리 부처님만의 전매특허로 불교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사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독창적이고 중요한 가르침인 무아를 강조하기 위한 방법으로 무상과 고를 먼저 설명하시고 마지막에 무아를 드러내는 방법을 취하신 것입니다.
맛지마 니까야 “라훌라에 대한 가르침의 작은 경(M147)”을 살펴 보겠습니다.
이 때 세존께서는 안다 숲으로 깊이 들어가 한 나무 밑에 마련된 자리에 앉으셨다. 존자 라훌라도 세존께 인사드리고 한 쪽에 앉았다. 한 쪽으로 물러나 앉은 라훌라에게 세존께서는 이와 같이 물었다.
“라훌라여, 어떻게 생각하는가, 시각은 영원한가, 혹은 무상한가?”
“세존이시여, 무상합니다.”
“그런데 무상한 것은 괴로운 것인가, 즐거운 것인가?
“세존이시여, 괴로운 것입니다.”
“또한 무상하고 괴롭고 변화하는 것을 ‘이것은 나의 것이고, 이것은 나이고, 이것은 나의 자아이다.’라고 여기는 것은 옳은 것인가?”
“세존이시여, 그렇지 않습니다.”라고 서술하고 있습니다. 다른 경들에서도 반드시 무상⤍고⤍무아의 순서대로 삼특상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삼특상과 삼법인의 차이점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이러한 차이는 대수롭지 않은 작은 차이 같아 보이지만 내용면에서는 전혀 다른 내용이기 때문에 불교를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알고 있어야하는 중요한 내용이라고 생각됩니다.
세상 모든 존재들이 보편적으로 가지고 있는 무상, 고, 무아라는 특성들을 밝고 예리한 지혜의 눈으로 꿰뚫어 봄으로써 갈애와 집착이라는 괴로움의 싹들을 제거하여 궁극적인 행복의 자리로 인도하는 가르침이 삼특상의 가르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