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러는 음악원 졸업 후에 쓴 <탄식의 노래>를 베토벤 음악상에 출품했으나, 수상에는 실패했다. 작곡가로서 생계를 이어가기에는 어려운 현실을 직시하고 일자리를 수소문한 끝에 온천 휴양지 바트 할의 오페레타 지휘 자리를 얻게 된다. 1880년 스무 살 때의 일이다.
산타체칠리아 국립음악원(Conservatorio di Santa Cecilia)에서 지휘하는 말러
이때부터 말러는 라이바흐, 카셀, 프라하, 라이프치히, 부다페스트, 함부르크 등 점차 비중 있는 극장으로 옮기며 오페라 지휘자로 일했다. 그리고 가는 곳마다 신통치 않은 자원을 가지고 눈부신 성과를 내는 유능한 리더였다. 그는 오페라 지휘자로서 오케스트라 뿐 아니라 오페라의 모든 부분 - 무대장치와 의상, 연기까지도 꼼꼼히 감독하여 오페라의 완성도를 높이는 성과를 냈다. 그렇다고 모든 극장에서 말러를 능력만큼 대우해준 것은 아니었으므로 조건이 좋은 곳이 있으면 계속 자리를 옮겨 다녔고, 유명지휘자로 성장하고 있었다.
피아노 사중주곡
말러는 스스로를 ‘빼어난 준마’에 비유하며 “빼어난 준마가 황소들이 끄는 손수레에 매이면, 진땀을 흘리며 황소들과 보조를 맞추며 손수레를 질질 끌고 가는 수밖에 없다”고 불평했다. 자연 단원들에게는 혹독한 지휘자였고, 오페라 출연 가수들도 그를 잔인한 폭군이라고 했다. 그런 한편 ‘독재자지만 숭배할 수밖에 없는 지휘자’, ‘음악적 직관이 넘치는, 단연 최고의 지휘자였다’라는 찬사도 들었다.
라이프치히의 오페라하우스
지휘자로서 명성과 경력을 쌓아가던 말러는 시간을 쪼개어 - 주로 휴가를 이용해 작품을 썼다. 1883년, 프러시아의 카셀 오페라하우스 지휘자 시절에는 푸른 눈동자의 요한나 리히터라는 가수와 사랑에 빠졌다. 그 사랑의 결말은 좋지 않았지만, 말러는 요한나를 위해 아르님과 브렌타노의 독일민요풍의 시에서 뽑은 가사로 <방랑하는 젊은이의 노래>를 작곡한다. (이 작품은 1884년에 작곡했지만 1896년에야 초연이 이루어졌다)
<방랑하는 젊은이의 노래> 악보
낭만주의자들의 영원한 자화상인 ‘방랑자’에 그 자신을 대입한 네 곡으로 이루어진 연가곡이다. 그 내용은 실연당한 젊은이가 연인의 결혼식 날 방랑의 길을 떠나고(제1곡 내 연인의 결혼식 날에), 자연 속에서 위로를 받으며 행복감을 느끼지만(제2곡 오늘 아침 들에 나가), 다시 실연의 격렬한 고통에 몸부림치고(제3곡 내 가슴은 달아오른 칼로), 연인을 잃은 절망감에 다시 힘없이 쓰러진다.(제4곡 그대의 푸른 두 눈동자)
<방랑하는 젊은이의 노래>
연가곡의 주제는 다분히 슈베르트(물방앗간의 아가씨, 겨울 나그네)를 연상시키지만 음악은 말러다운 색채로 넘쳐난다. 피아노 반주를 오케스트라로 바꾸었으므로 드라마틱한 표현력과 색채감은 한층 풍부해졌다.
<방랑하는 젊은이의 노래> 음반
그리고 1887년에는 교향곡 1번을 완성했다. 이 교향곡에 ‘거인(titan)’이라는 표제를 붙였다. 여기서의 ‘거인’은 독일 낭만주의 작가 장 파울의 유명 소설에서 따온 것으로, 아폴로적인 질서와 형식 숭상을 디오니소스적인 극단과 융합시키는 제 3의 인물 ‘천재’를 의미하며 니체의 ‘초인’과 맥을 같이 한다. 작곡가는 청중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이 교향곡의 표제와 악곡이 어떻게 펼쳐지는 지에 대한 긴 프로그램 노트까지 곁들였다. 1889년 1번 교향곡이 무대에 올렸을 때 여기저기서 튀어나오는 생경한 음향과 길고 복잡한 악곡 구성 등 음향과 규모의 과도함에 청중들은 크게 혼란스러워했다.
교향곡 1번 <거인>의 음반
1번 교향곡이 비평가들과 대중으로부터 좋은 반응을 얻은 것은 아니다. 오히려 실패에 가까웠다. 특히 당시 논란 중이었던 양 진영 - 브람스 파와 바그너 파 - 의 어느 쪽에도 속하려 하지 않는 그의 태도도 반감을 샀다. 그러나 말러 자신은 작곡가로서 세상에 한 발을 내딛은 것 같은 큰 성취감을 갖게 되었는지 곧바로 대 편성의 다음 작품을 구상하기 시작했다.
오라스 베르네 ‘난파 후 폭풍우 치는 해안가(Stormy Coast Scene after a Shipwreck)’
그런데 다음 행선지를 당시 유행하던 교향시로 향할지, 아니면 전통적인 교향곡으로 할지에 대한 고민이 뒤따랐다. 그 때 음악원시절부터 멘토였던 작곡가 브루크너가 말러에게 좋은 본보기가 돼 주었다. 브루크너는 바그너 편에 서는 작곡가이긴 했지만, 바그너의 혁신적인 음악과 베토벤 이후의 전통주의 교향곡 양식은 서로 화해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라도 하듯, 고전 양식에 바탕을 둔 교향곡을 꾸준히 작곡하면서 그것이 음악이 나아가야 할 방향이라고 설득하고 있었다. 말러는 교향시로 작곡했던 곡을 교향곡으로 개작하기로 했다.
브루크너 교향곡 4번 ‘로맨틱’
그 무렵 그에게는 어두운 소식들이 이어졌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고(1889년) 어머니가 몇 달 뒤에 아버지의 뒤를 따랐다. 곧 이어 뇌종양을 앓던 여동생 하나가 죽었다. 말러는 두 남동생과 두 여동생을 부양해야 하는 가장이 되었다. 지휘자로서 위치가 차츰 높아져 수입도 늘어났지만 언제나 돈은 부족했다. 그리고 늘 작곡에 쓸 시간이 부족한 것도 큰 불평거리였다.
말러
사실 인간 말러의 삶은 고독했고 불행했던 편이다. 아버지는 가정에서 매우 엄격한 독재자였고 폭군이었다. 어머니는 상류층 출신이긴 하지만 다리가 부자유했기 때문에 첫사랑에 실패하고 마음에 없는 남자 베른하르트 말러와 결혼을 했다. 말러의 많은 동생들 중엔 맹인도 있었고, 정신병과 뇌종양 심장질환 등 병에 시달리다가 일찍 죽기도 했다. 작곡가를 꿈꾸던 동생 하나는 22살에 권총자살로 세상을 등지기도 했다.
말러와 여동생 유스티네
부모의 불화에서 야기된 불안은 그의 성격 형성에 일찍부터 영향을 미쳤다. 고뇌, 비참, 부조리, 절망, 광기, 가혹과 죽음이라는 불행을 어린 시절부터 반복적으로 경험하면서 성격적으로 강박에 시달리기도 했다. 그는 타고난 천재였지만, 천재들에게 나타나는 이기적이며 괴팍한 성격은 그를 비사교적인 사람으로 만들었다.
아터제 호반에 있는 말러의 오두막
후세의 연구에는 말러를 조울증 환자로 진단한 견해도 있다. (실제로 말러 자신도 나중에 프로이트에게 정신과 상담을 받은 적이 있다) “그의 음악 전체에 퍼져있는, 작곡가의 성정을 그대로 드러내는 극단적 분위기 전환만으로도 충분히 그가 조울증이 있다는 설명이 된다. 그리고 지휘자로 격무에 시달리면서도 초인적인 힘을 발휘해 맹렬한 속도로 작곡해나간 것도 조울증의 ‘조’상태에서 나타나는 전형적인 현상이다. 또 조울증 환자들은 극적으로 과장된 표현을 동원하여 사고하는 경향이 있는데, 2번 교향곡의 프로그램 노트에 나타나는 과대망상증 같은 점도 그것을 뒷받침한다.” (미국 정신의학자 케이 레드필드 재미슨)
알프스 아터제(Attersee)
말러는 1893년 여름휴가 내내 알프스의 고지대에 위치한 아터제 호숫가에 머물며 작곡에 몰두했다. 그곳의 장엄한 자연 풍광이 음악적 상상력에 도움이 되었는지 그는 장대한 규모 - 소프라노와 메조소프라노, 합창이 있는 대 편성의 2번 교향곡을 작곡했다. 이듬해 완성해 ‘부활’이라는 표제를 붙였다.
교향곡 2번 ‘부활’의 음반
‘부활’이라는 표제는 클롭스톡의 <부활 송가>에서 인용한 가사를 사용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 시에서 말러를 사로잡았던 대목은 ‘두려움에 떠는 일을 멈추라. 삶과 맞대면하라!’라는 부분이다. 그러므로 기독교적 의미의 ‘부활’이 아닌, 생명의 상실이 주는 공포를 떨치고 ‘지금 여기’에서 삶의 충만함을 느끼며 정신적으로 ‘거듭남’을 주장하고자 한 것이다.
교향곡 2번 ‘부활’
이 교향곡으로 말러는 작곡가로서의 야망과 자신감을 한층 드높였다. 1895년 2번 교향곡이 베를린에서 초연되었다. 비평가들은 아니었지만 청중들은 큰 찬사를 보냈다. 객석에 앉아있던 열아홉 살의 브루노 발터(지휘자)는 이날 밤 깊은 감명을 받아 평생을 말러와 말러 음악에 바칠 것을 다짐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