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치고 고치자 / 이훈
퇴고는 영원히 계속되는 ‘두더지 게임’ 같다. 때려도 때려도 오류가 계속 나온다.
(중략)
그냥 이렇게 믿는 게 좋다. 일필휘지로 명작을 쓰는 일은 이번 생에서 일어나지 않는다. 단번에 완벽한 문장은 나오지 않는다. 완벽한 문장을 한 번에 쓰려다가 한 문장도 못 쓰는 수가 있다.
가장 좋은 방법은 합평이다. 남에게만 보이는 것이 있다. 비문이나 습관, 정보가 없는 사람이 읽으면 헷갈리는 부분들은 남이 나보다 잘 발견한다. 그 사람이 필자보다 잘나서가 아니다. ‘남’이라는 새로운 시선이기 때문이다. 이런 지적은 감사하며 받고 고쳐야 한다. (막상 받아보면 고맙지는 않다.) 글쓰기 의지마저 꺾어버리지는 않으면서 직언해줄 사람이 곁에 있다면 신이 당신도 귀여워한다는 뜻이다. 그런 사람이 없다면 시간이 그 역할을 한다. 쓰고 나서 바로 보면 오류가 안 보인다. 뇌가 자동으로 오류를 고쳐 정보를 입력한다. 한두 시간 다른 일을 하거나 자고 일어나서 보면 ‘두더지’들이 튀어 올라와 있다.
김소민, <퇴고와 배려>, <<슬픔은 어떻게 글이 되는가-용기 있게 나를 마주하는 글쓰기 수업>>, 스테이블, 2023.
살아 있는 존재는 다 죽는다. 유한하다. 따라서 완벽하지 못하다. 겸손과 지혜는 이런 조건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 사람이 받는 선물이다. 그렇다고 한계를 조용히 수긍하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 조금 더 나아지려고 해야 한다. 자꾸 뛰어넘어야 하는 운명을 사랑할 수밖에 없다.
쓰고 나서 고치는 것에도 이런 운명애가 깃들어 있다고 하면 거창한가? 좋은 글을 남기고 싶은 마음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없다. 이런 바람을 현실화하자면 내 문장을 시간이 날 때마다 들여다보고 고쳐 나갈 수밖에 없다. 잘 썼다고 평가받는 글은 한꺼번에 이뤄지지 않는다. 경험도 많이 하고 책도 여러 권 읽고 생각도 끈질기게 이어 나갔을 테다. 무엇보다 고치는 일에도 정성을 기울였을 것이다. ‘일필휘지’는 그냥 결과만을 보고 한 말일 가능성이 높다. 대가나 달인은 하나같이 연습에 연습을 거듭하여 그 경지에 이르른다. 예를 들어 명연주자는 날마다 밥 먹듯이 악기를 들었다는 말로 듣는 사람을 숙연하게 만든다.
800km쯤 된다는 ‘산티아고 순례길’을 다 걷는다고 해서 내 걸음이 완성되거나 끝나지는 않는다. 계속 길은 이어지므로 생명이 있는 한은 더 나가야 한다. 글도 마찬가지다. 고쳐도 고쳐도 또 마음에 들지 않는 곳이 나타난다. 끊임없이 연습하여 더 나은 문장을 쓸 수 있게끔 할 수밖에 없다.
수없이 되풀이해야 하는 퇴고의 불가피성을 얘기한 셈이다. 이제 그 방법을 더 생각해 볼 차례다. 글을 쓰는 이유부터 따져 보자. 나를 알려는 마음이 시키는 일이다. 나를 남 보듯 할 수 있는 수준에 오르면 그런대로 목표에 가까이 간 셈이다. 예를 들어 보자. 마음이 몹시 아프다. 어떻게 벗어날까? 먼저, 주위를 돌아봐야 한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다. 심지어는 나보다 더한 고통을 겪는 사람도 많다는 것을 알게도 된다. 이렇게 시선을 넓히면 내 아픔이 사소한 일로 바뀌기도 한다. 적어도 세상의 고통을 나 혼자 짊어지고 다닌다는 어설픈 감상주의에서 벗어날 수는 있다. 그 다음의 해결책은 시간의 힘을 믿는 것이다. 멀리 갈 거 없이, 하루도 안 지났는데 왜 그리 초조하게 굴면서 엄살을 피웠는지 이해가 안 돼 멋쩍어지는 자신을 발견한 경험이 다들 있을 것이다. 요컨대, 나와 거리를 두고, 있는 그대로 바라봐서 얻은 여유다. 자기 객관화다. 시간은 이렇게 힘이 세다.
이 얘기를 퇴고에 적용해 보자. 먼저, 독자의 눈에 내 글을 맞춰야 한다. 맞춤법이나 띄어쓰기는 남과 굳게 약속한 사안이다. 멋대로 깨뜨려서는 안 된다. 지키려고 노력해야 한다. 내용도, 시간을 들여 내 글을 읽을 독자가 흥미를 느낄 수 있을지 따져야 한다. 주제에 어긋나는 대목이 있으면 아깝지만 과감하게 빼자. 어렵다. 부처가 아니라면 내 주관성을 완전하게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래도 노력마저 안 할 수는 없다. 흘러가는 시간이 내게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힘을 보태기도 하기 때문이다. 쓰고 나서 며칠 지나면 내 글의 문제가 눈에 들어온다. 남의 것인 듯 볼 수 있는 거리가 생긴다. 고칠 적기(適期)다. 당연히, 이때를 놓치면 안 된다.
이렇게 애써 손보면서 우리는 현재보다 더 나은 사람으로 커 간다. 내 좁은 방에서 나와서 드넓은 타자의 바다로 헤엄쳐 나간다. 내 안에 다른 사람을 불러들일 공간을 넓혀 간다고 바꿔 말해도 좋다. 글쓰기의 치유력을 강조하는 말은 이런 사정을 가리키는 것이다. 글쓰기는 수양이다. 그러니 정성을 쏟지 않을 수 없다.
우리 삶에 완성은 없다. 꿈을 이뤘다고 생각하는 순간에 또 새 일이 생긴다. 이상은 가만히 있지 않고 늘 움직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고등학교 다니면서 선생님에게 대학에 가면 자유롭다는 말을 숱하게 들었다. 합격 통보를 받은 때나 겨우 통하는 거짓말이다. 더 큰 지옥문이 우리를 맞았을 뿐이다. 죽어야 모든 게 끝난다. 그 전에는 고치고 고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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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책 재밌다. 글쓰기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읽어 볼 만하다. ‘밀리의 서재’에 있다. 전자책으로 봐서 옮긴 쪽수를 밝히지 못했다.
첫댓글 고맙습니다. 교수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