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여행기 24
류인혜
* 트레비분수와 젤라또
원래의 계획대로라면 판테온 신전을 둘러본 후, 캄피돌리오 광장과 근처의 베네치아 광장을 구경하고 ‘진실의 입’에 손을 넣어봐야 한다. 매번 꼬이는 일정에 또 시간이 없어서 그곳들은 지나친다고 한다. 낙심하려는 일행을 위로하는 가이드의 말에 의하면 ‘진실의 입’은 <로마의 휴일>이란 영화로 인하여 유명해진 곳이라 모두 많은 기대를 하다가 가장 실망하는 곳이란다. 해신 ‘트리톤’의 얼굴을 석판에 조각하였는데. 중세 하수관 뚜껑으로 추정한다고 했다.
로마 시내 관광은 중심이라 할 수 있는 베네치아 광장으로부터 시작된다. 광장 정면에 서 있는 흰 대리석으로 된 웅장한 건물은 비토리아노라 불리는 비토리오 에마누엘에 2세 기념 건물이다. ‘웨딩케이크’ 또는 ‘타이프 라이터’란 별명이 붙어 있으며, 시내 어디에서나 볼 수 있어 길 찾기의 표적물로 좋다.
비토리아노를 등에 지고 광장에 서면 정면으로 곧게 뻗은 거리가 로마의 중심이 되는 코르소(Via del Corso) 거리이다. 이 거리를 따라 걷다 보면 오른쪽에 있는 트레비분수에 들를 수 있고, 거리의 중앙쯤에서 동쪽으로 향한 콘도티 거리로 접어들면 오드리 헵번이 주연한 영화 <로마의 휴일>의 무대로 유명한 스페인 광장에 이를 수 있다.
콘도티 거리는 300m가 되지 않는 길 양쪽에 구찌, 발렌티노, 페라가모, 불가리 등 세계적으로 이름있는 매장이 들어찬 로마의 최고급 쇼핑가이다.
일행은 버스에서 내려 거리의 어딘지 모를 곳을 천천히 걸어 로마에서 가장 큰 분수라는 트레비분수(Fontana di Trevi)로 갔다. 전쟁에서 돌아오는 목이 마른 로마 병정들 앞에 한 처녀가 나타나서 이곳으로 인도하여 물을 마시게 해서 ‘처녀의 샘’이라고도 한다. 아그리파 장군은 이곳을 수원지로 지정하여 로마에 물을 공급했다. 수로가 로마에 다다르는 지점이 세 갈래 길이 마주치는 곳이라 ‘3’을 뜻하는 ‘트레’와 ‘길’을 뜻하는 ‘비움’이 합성이 되어 ‘트레비움’으로 불리다가 ‘트레비’로 바뀌었다.
교황 클레멘테 12세가 트레비 지역을 새롭게 단장하기 위하여 분수 설계 공모전을 열었는데 그때 당선된 작품이다. BC 19년에 세워진 로마 시내 수로의 완공을 기념하기 위해 시작한, 바로크 예술의 걸작이라 불리는 분수는 젊은 건축가 ‘니콜라스 살비’가 1732년부터 62년까지 건축했다. 조개껍데기 모양의 마차 조각상에는 태양의 신 ‘오케아노스’가 있고, 마차를 끌고 있는 것은 바다의 신 ‘트리톤’이다. 뒤쪽 좌우 조각은 ‘풍요’와 ‘건강’을, 앞쪽은 수많은 ‘바다’를 상징한다.
그곳에서 동전을 뒤로 던지면 로마에 다시 온다는 속설이 있다. 분수에 온 관광객들은 누구나 다 동전을 던지고 있다. 하나씩 던져진 각 나라의 동전을 모아서 해당 나라의 불우한 아이들을 위해서 쓴다. 그런 설명을 들으니 여행 오는 한국 사람들이 우리나라 동전을 많이 던지기를 바라는 마음이 된다. 우리도 서둘러 분수 가까이 가서 동전을 던졌다. 뒤로 돌아서서 던져야 한다는 것을 깜빡 잊고 정면으로 서서 던져 넣었다. 나중에 다시 와서 제대로 해야겠다. 이제는 무조건 ‘나중에’라는 희망을 품는다.
여행의 재미는 쇼핑이다. 분수 바로 앞에 있는 베네통 매장으로 몰려가서 각자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줄 선물을 샀다. 좋은 상품을 현지에 와서 저렴한 가격으로 사는 마음이 바빠서 모두 정신이 없다. 정해준 시간 내에 하고 싶은 것들을 해내야 한다.
이숙 선생과 주 선생님 그리고 아내와 딸의 선물을 사려고 하는 일행을 도와주었다. 말이 유창해서가 아니라 한 단어씩 발음하고 씩~ 웃는 내 말을 잘 알아듣는 그곳 점원의 재치 덕분에 거래가 쉽게 이루어진다. 나중에 이숙 선생은 며느리가 처음으로 여행 선물을 좋아했다며 고맙다고 해서 마음이 뿌듯했다.
그런데 각자의 원하는 바가 자세하고 특별해서 한바탕 전쟁 아닌 전쟁을 치른 듯 열이 올라 얼굴이 상기되었다. 다음 코스는 필연코 맛보아야 할 젤라또를 먹는다며 떼를 지어 이동했다. 분수를 보는 방향의 왼편에 있는 아이스크림 가게로 갔다. 우르르 들어가서 유리관 안에 있는 각가지 아이스크림을 보고 제각기 마음에 드는 것을 주문했더니 계산을 먼저 하란다. 주 선생님께서 10유로 지폐를 내시어 가장 작은 것으로 다섯 개를 샀다.
가게 총각이 주 선생님께 예쁘다며 장식을 많이 해준다. 이정자 씨가 가게 입구에 서 있어서 하나를 갖다 주었다. 주 선생님이 아이스크림을 샀다고 했더니 나중에 보니 자기 짐도 무거운데 작은 가방을 들어준다. 개성이 강하여 어처구니없는 실수로 일행을 황당하게 만들었지만, 마음이 따뜻한 사람이다.
숙소로 가는 길에도 비가 많이 내렸다. 한국식당에서 저녁을 먹는데 메뉴가 김치찌개라고 한다. 돼지고기를 안 먹는 사람들을 위해서 식탁을 따로 차린다고 했다. 지금까지 없던 일인데 마지막에 배려한다. 지난번의 비원과는 음식 맛이 다르다.
김병권 선생님의 사모가 맥주를 많이 주문했으나 마시지 않는 사람이 많아서 반쯤을 다시 돌려주었다. 작가들이 술을 마시지 않는 것이 이상하단다. 길을 걷다가 분위기 좋은 곳에서 커피 한 잔씩 사시지 그랬냐, 라고 안 해도 될 소리를 했다.
로마 근교에 있는 호텔(Duca D'Este Hotel)에서 묵는 사흘째 밤이다. 이제 마지막이라고 자리에 누워서도 마음이 뒤숭숭한데 늦은 시간에 로비의 바로 내려오라는 전갈이 왔다. 다른 날 같았으면 귀찮아했을 것이지만 얼씨구나, 분단장도 없는 얼굴로 내려갔다. 여러분이 모여 있었다. 담소를 나누다가 늦게 방으로 돌아왔다.
* 로마에서 보내는 편지-로마의 종소리
로마는 진정한 로마입니다. 극히 일부분만 만났지만, 로마에서의 일정은 완벽했습니다. 자기 안에 바티칸이라는 또 하나의 나라를 껴안고 있는 신성한 영혼을 가진 도시입니다. 도시 전체가 유적지라는 느낌이 들어서 밟고 다니는 땅마저 귀하여 느껴졌습니다. 땅의 어느 곳을 파기만 해도 유물이 나오는 곳입니다.
우리나라의 경주와 같이 함부로 새 건물을 지을 수도, 개축하기도 어려운 곳을 돌아보았습니다. 정말이지 먼 고대로 되돌아간 듯 가슴을 뛰게 하였지요. 르네상스의 시발점이 된 이탈리아는 문화의 보물을 간직한 곳입니다. 더구나 ‘포로 로마노’의 무너진 건물들에서 받은 벅찬 감동으로 로마는 잊을 수 없는 곳이 되었습니다.
바티칸 박물관과 성 베드로 성당에 관하여 무슨 말로 이야기할 수 있을지요. 특히 시스티나 예배당의 천장화 <천지창조>에 대해서는 그저 와서 직접 보라는 말밖에 더할 말이 없습니다.
맛있는 음식을 먹게 되면 가족이 생각나듯이 로마의 모든 것을 아이들에게 보여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지금에 와서 쓸데없는 생각이지만 가능성이 많았던 젊은 시절에 아이들을 데리고 로마를 방문했었다면 그들이 앞길을 결정할 때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라 자각합니다. 부디 부모의 한계로 자녀의 희망을 막는 일이 없기를 소원합니다.
사실 사는 것에 떠밀리는 분주함으로 삶의 질에 대한 고민은 제대로 하지 못했습니다. 아니 하노라고 했습니다. 현실에 매여서 아무것도 못 하고 늙어갈까 봐 가끔 허세가 되는 짓을 하며 살기도 했지요. 가까이 있는 사람들이 그것을 정신의 사치라고 비웃었지만, 후회는 없습니다.
더 일찍 다른 나라의 문화에 대해서 안목을 깨우쳤더라면 어찌 되었든 무리를 해서라도 왔겠지요. 저는 이미 늦었지만 앞으로 아이들이 자기의 자식들을 데리고 로마로 올 수 있도록 기대합니다. 교과서로만 배울 것이 아니라 직접 눈으로 보고 이 유적들의 장엄함과 예술품의 높은 격조를 보고 가슴 두근거리며 역사를 제대로 이해하고 경험하길 바라고 있습니다.
어린 시절 위인전으로 만났던 예술가의 많은 작품을 직접 보면서 잊어버리고 있었던 그들의 고뇌를 다시 생각하였습니다. 자신이 원하고 있는 예술에 대한 완벽한 기대하고 고집스레 밀고 나가던 작업의 어려움을 조금 알 것 같습니다. 타협하지 않아야 할 것을 잘 알고 있었던 선지자들의 작품을 보면서 오랜 세월을 지나서도 그들의 혼을 직접 대하는 듯 전율하게 됩니다.
다음 것이 얼른 보려고 건성으로 지나쳐 버린 모든 예술품을 다시 찬찬히 살펴보고 싶어서 로마에 오래 머물고 싶어집니다. 때때로 울리는 종소리를 들으며, 이곳에서 살다간 사람들을 생각할 것입니다.
로마에서 만난 종소리들은 여행의 덤으로 얻은 기쁨이었습니다. 이제 여행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갈 때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그대를 생각할 수 있는 긴 시간도 오랜만의 정겨움입니다. 내내 평안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