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웅의 도시(10권) 7

[나막신]

7. 쿠데타Ⅱ

강미현은 크림색 투피스의 정장 차림이었다. 짧게 커트한 머리칼 사이로 보기 좋은 귀가 드러났고 귀 끝에 매단 콩알만한 진주귀고리가 조그맣게 흔들리고 있었다. 고구려호텔 26층의 라운지에서는 근대시의 야경이 모두 보인다. 그들이 든 곳은 서쪽 밀실이었으므로 서쪽 시가지는 물론 짙은 어둠에 덮인 지평선 끝 쪽 근대공항의 불빛도 보였다.

오늘의 만남은 강미현의 초대로 이뤄졌는데 같이 식사나 하자는 것이었다. 그래서 같이 식사를 하고 반주로 나온 포도주를 조금씩 마시는 중이었다. 방 안은 조용했고 밖의 소음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들이 마주앉은 한 시간쯤 전부터 무겁고 조금 어둡게 내려앉은 방 안의 정적은 가끔 주고받는 이야기로 깨졌지만 금방 원상태로 되돌아갔다. 술잔을 밀어놓은 김상철이 담배를 집더니 입에 물었다. 불을 붙인 담배연기를 창 쪽으로 길게 내뿜은 그가 입을 열었다.

「아내는 항상 부담을 느끼는 것 같았어, 나한테 미안해하고. 게다가 당신이 노골적으로 날 제거하려는 것을 알게 되자 여위어 가더구만.」

그는 자연스럽게 말을 내렸는데 식탁으로 시선을 내린 강미현은 정물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잘 알겠지만 영리하고 재치있는 여자였지, 사랑스럽고. 좋은 남자를 만났다면 얼마든지 행복한 인생을 꾸려갈 수 있을 여자였는데.」

「사회에 대한 반항심과 열등의식을 교묘하게 개척심과 용기로 위장한 비뚤어진 한 남자를 만난 것이 불행의 시작이었어. 아내의 불행은 모두 내가 원인을 제공한 거야.」

「‥‥‥‥」

「안인석이, 그놈이 아내를 속이고 결혼했다는 것을 알았을 때, 난 그때 단념했었지. 난 쫓기는 몸이었고, 그래서 욕심을 버렸어. 그런데 운명이란 뜻대로 되지 않는 모양이야. 그녀가 근대리아에 찾아왔을 때 비록 그냥 돌려보냈지만 난 아직도 그녀가 가슴속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어.」

그러자 머리를 든 강미현이 그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곧 시선을 내렸다.

「이미 그때에는 당신이 내 옆에 있었고 난 야망이 있었지. 당신과 함께 근대리아를 이끌고 가겠다는.」

「‥‥‥‥」

「그 동안 그녀는 이혼을 했고, 떠났어, 그러나 가슴속의 나는 남아 있었던 모양이야. 내가 찾는다는 킬러의 말에 속아 홍콩까지 제 발로 왔었으니까.」

「‥‥‥‥」

「그녀가 그놈에게 강간을 당하고 만신창이가 되어서야 구해낼 수 있었어 그날, 그녀가 그러더군. 하룻밤만 같이 있자고.」

김상철이 다 타버린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껐다. 손길이 거칠었다.

「난 결코 미화시키지도, 그렇다고 비하시키지도 않아. 난 그녀를 사랑했어.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지만, 그것이 부족하다고 생각할 만큼.」

김상철이 말을 뚝 그쳤고 방 안에 한동안 정적이 덮였다. 이윽고 강미현이 입을 열었다.

「당신을 처음 만난 날이 생각나요.」

「당신은 안인석을 위해서 어떤 남자를 두들겼지요. 친구 애인을 가로채갔다는 이유로.」

그녀는 눈꼬리를 조금 눕히고는 희미하게 웃었다

「그때부터 당신을 좋아했던 것 같아요.」

「내가 무시된 이유는 내가 총독의 손녀이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당신의 열등의식이나 반항의식이 작용했기 때문이라고.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조금 편했어요.」

「‥‥‥‥」

「내 배신감이나 열등감은 생각이나 해봤어요?」

김상철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언젠가는 시간을 내어 이야기를 할 생각이었어.」

「하긴 난 그걸 기다리지도 않았어요.」

밤이 깊어갈수록 근대시의 야경은 더욱 휘황하게 밤하늘을 물들이고 있었다. 방 안은 조용했다. 창밖으로 시선을 준 채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용서해 주세요. 저도 제 생각만 했어요.」

「‥‥‥‥」

「박미정 씨한테도 용서를 빌겠어요. 비록 늦었긴 하지만.」

마티니를 석 잔째 마신 벤 커티스는 다시 손목시계를 내려다보았다. 밤 10시 반이 되어가고 있었다. 3층의 바에는 관광객이 테이블 서너 개를 차지하고 있을 뿐이어서 한산했다. 관광객들은 시내의 클럽이나 카지노 등 자극이 있는 곳을 선호하는 것이다. 바 안을 둘러보던 그는 허리에 찬 호출기가 진동을 하자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까부터 카운터의 러시아계 직원이 추파를 던지고 있었지만 시선을 주지도 않고는 계산을 치렀다. 바를 나온 그는 곧장 복도 끝 쪽의 엘리베이터로 다가갔다. 최고급 모피 슈바에 방한모를 비스듬히 눌러쓰고 잘 닦여진 가죽장화를 신은 그의 한 손에는 검정색 가죽가방이 들려 있었다. 누가 봐도 러시아계의 잘나가는 사업가이다. 엘리베이터 앞에 선 그는 위쪽의 신호판을 올려다보았다. 노란색 전등이 18층에 켜져 있다가 아래쪽으로 내려오는 중이었다. 벽에 붙은 내림 단추를 누른 그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복도 양쪽은 여행사와 비즈니스센터 등의 사무실이었지만 모두 퇴근해서 조용했고 조금 전에 나온 끝 쪽의 바만이 영업을 하고 있을 뿐이다. 신호등이 10층에서 멈춰 섰을 때 그는 가방을 엘리베이터의 중심 부분에 내려놓고는 몸을 돌렸다. 빠른 걸음으로 걸어 바의 앞쪽 모퉁이에 붙어 섰다. 몸을 돌린 그는 30미터 앞쪽의 엘리베이터를 바라보았다. 가방 안에는 크레이모어 대인지뢰가 엘리베이터 입구를 향해 놓여져 있는 것이다 슈바 주머니에 두 손을 찌르고 선 그는 발화 스위치를 쥔 손에 땀이 배어나온 것을 알 수 있었다. 엘리베이터에 김상철이 탔다는 신호가 왔지만 그 외 몇 명이 타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18층과 10층에서 멈춰선 것을 보더라도 내려오는 도중에 탑승자가 더 늘어났을 것이다. 입맛을 다신 커티스는 눈에 힘을 주어 엘리베이터를 쏘아보았다. 거리 때문에 신호판의 불빛은 보이지 않았지만 이미 내림 버튼을 눌렀으니 엘리베이터는 멈출 것이고 자동적으로 문이 열린다. 그 순간에 발화 스위치만 누르면 안에 타고 있는 사람들은 몰살될 것이었다.

엘리베이터 안에는 김상철과 강미현이 뒤쪽에 나란히 서 있었고 내려오는 도중에 탄 관광객이 두 사람이었다. 그리고 앞쪽에 김봉만과 그의 부하 정금식이 서 있었는데 김봉만의 위치는 스위치가 붙여진 부분의 바로 앞이다. 엘리베이터의 신호판이 3층으로 내려가더니 뚝 멈췄으므로 김봉만은 와락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리고는 손을 내밀어 닫힘의 버튼을 누른 다음 위쪽의 논스톱 운행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잠시 멈춰 섰던 엘리베이터는 곧장 하강하기 시작하더니 로비에서 멈춰 섰다. 문이 열리자 60대의 서양인 둘이는 먼저 로비로 나갔다. 엘리베이터 앞쪽에 지켜 서 있는 서너 명의 부하들이 보였다. 김상철이 머리를 돌려 강미현을 바라보았다.

「그럼.」

강미현이 눈으로 인사를 했다. 엘리베이터를 나온 그들은 제각기 갈라섰다. 부하들의 호위를 받은 김상철은 곧장 왼쪽의 현관문으로 다가갔고 사복 차림의 경호원에 둘러싸인 강미현은 오른쪽이다.

밤이 깊었으므로 근대시 외곽의 주택가는 가끔씩 한두 대의 차량들만 오갈 뿐 인적이 드물었다. 눈이 섞인 바람이 세차게 불고 있었다. 이런 날씨는 체감온도가 영하 40도가 훨씬 넘게 되어서 갑작스러운 추위로 인한 동사자(凍死者)가 늘어나게 된다. 자가용 번호판을 부착한 검정색 밴은 대로에서 이백 미터쯤 안쪽으로 들어선 곳에 멈춰 섰다. 앞쪽에는 두꺼운 쇠창살로 만든 정문이 닫혀져 있었는데 차가 멈추자 양쪽으로 천천히 열렸다. 이 지역은 근대리아에 주재하는 외교관의 저택들이 많았다. 따라서 행정부로부터 할당받은 넓은 대지에 제각기 취향에 맞는 저택을 세워 놓은 것이다. 넓은 안뜰을 달려간 밴이 현관 앞에서 멈추자 차에서 두 명의 사내가 내렸다. 북한 대표부의 서일과 오만규였다.

그들은 현관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사내의 안내를 받아 응접실로 들어섰다. 응접실에서 근대리아 주재 미국 대표부의 대표 레니 브라운이 그들을 맞았다. 그의 옆에는 장신의 사내가 서 있었는데 서일 등은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어서 오시오, 여러분.」

브라운이 서일과 오만규의 손을 잡더니 옆에 선 사내를 소개했다.

「이 사람은 국무성에서 오신 제임스 키간 씨요.」

인사를 마친 그들은 마주보고 앉았다. 이것은 미국 측의 요청으로 이루어진 비밀회담이다. 벽에 걸린 시계가 밤 11시 4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브라운이 입을 열었다.

「키간 씨는 내일 아침에 한국 대표부의 이태준 씨와 망명 희망자 전원을 데리고 미국으로 떠납니다.」

오만규가 힐끗 키간을 바라보았다. 망명이 허용되리라고는 생각했지만 미국 정부의 반응이 빠르다. 그가 말을 이었다.

「한국의 혁명 정부는 곧 새 대표를 임명해 보내겠지만 미국 정부와의 관계는 전 같지가 않게 될 거요.」

「미국 정부도 한국의 혁명위원회를 승인했지 않습니까?」

서일이 내처 물었다.

「주한 미군이 움직이지 않은 것도 혁명군을 간접지원한 것 아닙니까?」

「그것은 별개의 일입니다.」

그렇게 말한 것은 키간이다. 그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유혈충돌을 피하려고 그랬던 것이오. 그리고 전통적인 한미 관계는 변함이 없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오. 혁명군이 서울에 진입하자마자 사령관은 미국 대사와 미군 사령관을 만났습니다. 그는 그 자리에서 약속을 했지요.」

「‥‥‥‥」

「하지만 근대리아의 상황은 다릅니다.」

그가 서일과 오만규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근대리아의 한국계 조직은 지금 붕괴 일보직전이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십니까? 한국계 조직이 무너지면 다음 순서는 당신들이오. 근대리아의 전체 한국 세력을 지배하는 건 김상철이 됩니다.」

「한반도에서 남북한이 서로 균형을 갖추고 있듯이 근대리아에서도 남북한의 세력이 공존하는 것이 바람직한 일입니다.」

「미국의 한반도 정책을 이 자리에서 다시 강의할 필요는 없소.」

오만규가 자르듯 말했다. 그의 영어 실력은 유창했다.

이제 김상철은 총독과 다시 연합한 막강한 세력이 되어 있었다. 한국 정부가 대통령의 강력한 지원으로 근대리아에서 새로운 한국의 미래를 펼치려고 했던 것이 K공작이다. 그러나 그것이 하룻밤의 혁명으로 참담하게 부숴졌다. 오만규가 서일을 돌아보았다. 근대리아의 한국 조직은 제 아무리 깊고 굳게 심어놓았다고 하더라도 이미 뿌리가 들려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김상철에게 붕괴되고 흡수된 후에는 쇠를 먹어 더 커진 전설의 불가사리처럼 된 김상철이 달려들 곳은 뻔한 것이다.

「그렇다면 미국 입장이 뭡니까?」

같은 생각인 모양으로 서일이 묻자 키간이 얼굴에 웃음을 띄웠다. 순진한 시골 아저씨처럼 보이는 인상이다.

「당분간 협력하시는 게 서로 도움이 될 겁니다. 어느 정도 기반이 굳을 때까지만 말이오.」

결코 미국이 아니었다면 이렇게 양극의 세력을 연결시키지 못한다. 실로 초강국의 위력이었고 남북한은 그것에 대항할 만한 입장이 아니었다.

이한이 이번에는 같이 가겠다고 한사코 주장하였으므로 김상철은 겨우 그를 떼어놓았다. 서울 방문의 목적은 이제 할머니가 집에서 키우고 있는 완이를 데려오는 것뿐이어서 닷새 예정이었던 것이다. 일행은 김봉만과 조선족 출신인 그의 부하 정금식에다 이번에 유모로 고용한 블라디보스토크 태생인 박씨라는 30대 여인으로 모두 네 명이었다.

어떤 면으로 보면 금의환향이다. 혁명이 일어난 지 열홀, 한국은 빠른 속도로 원상회복이 되어가고 있었다. 대통령과 여당 대선후보, 거기에다 비서실장까지 망명을 해버린 참이라 여당은 거의 붕괴상태에 놓였지만 잡초의 뿌리 같은 자생력(自生力)으로 대선후보를 만들어 내었다. 바로 선대위원장이었던 김증화이다. 혁명위원회에서는 입법, 사법, 행정의 어느 부분에도 혁명위원회의 이름으로 개혁을 요구하거나 하다못해 인사(人事)조치를 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공석이 되었거나 자진해서 사퇴한 몇몇 각료의 빈자리는 위원회의 추천으로 임명을 했다. 기세에 비하면 참으로 미지근한 혁명이다. 5·16군사정변 후에 범법자의 목에 죄명을 매달고 시내를 끌고 다니거나 재벌기업과 언론인들을 안가(安家)에 끌고 갔다는 것을 알고 있는 국민들에게 이번 혁명은 싱겁기 짝이 없었을 것이다.

김상철이 김포공항에 도착했을 때 그를 마중 나온 사내는 심재택이었다. 김상철을 향해 얼굴을 활짝 펴고 웃었지만 상처가 겨우 나은 모양으로 아직도 안색은 창백했다.

「아니, 여기에는 왜 나오셨습니까?」

「당연히 나와야지요.」

그는 김상철의 손을 쥐었다.

「혁명은 성공이오. 국민들은 우리를 열렬하게 지지하고 있습니다.」

심재택은 다시 안기부로 복귀하여 제1차장이 되어 있었다. 역시 다시 복귀한 권준규 부장과 같이 한 팀을 이룬 것이다. 그들은 곧 차에 올라 올림픽대로를 달렸다. 대선이 한 달 앞으로 다가온 시기였다.

「대통령은 누가 될까요?」

김상철이 묻자 그가 얼굴에 웃음을 띄웠다.

「그야 야당후보인 이대현 씨지. 개국 이후 처음으로 야당 대통령이 탄생되는 겁니다.」

그가 김상철을 바라보았다.

「아시오? 근대리아로의 투자이민이 줄어들고 있다는 걸 말입니다.」

「알고 있습니다.」

「정상적으로 생각하면 쿠데타 직후이니 이주민이 폭증해야 할 텐데 오히려 준단 말이오. 이주민 제한을 하는 것도 아닌데.」

심재택은 상처에도 불구하고 활기 있어 보였다.

「국민들이 이제는 압니다. 우리가 사심이 없고 공명심도 없다는 것을. 우리 부장과 나도 새 대통령이 선출되면 사직할 작정이오.」

「근대리아에 오시지요.」

심재택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가셔졌다.

「이젠 그쪽에 전운이 감돌던데. 북한과 거기에다 한국으로부터의 K공작 여파로 말이오.」

「알아내신 것 있습니까?」

그러자 심재택이 머리를 저었다.

「대통령이 신형목, 이태준과 함께 했다는 거요. 자신은 그런 공작이 있다는 것만 알았다는데, 완강합니다, 이근복이는.」

현관으로 들어서는 김상철을 보자 이연희 여사는 우선 울음부터 터뜨렸다. 온갖 감정이 뒤섞여진 울음이다. 자신의 가슴에 매달려 서럽게 우는 장모를 안은 김상철의 눈시울도 붉어졌다. 박남호 씨가 이여사를 떼어놓고는 김상철을 응접실로 데려갔다.

「그래, 이젠 한국의 일도 잘 풀렸다니 다행이야.」

인사를 마치자 박남호 씨가 말했다. 박미정의 장례식은 성대했지만 김상철이 한국에서 갇혀 오지도 못했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는 것이다.

얼굴을 닦은 이여사가 들어왔으므로 김상철은 일어나 정식으로 인사를 했다.

「완이가 자넬 꼭 닮았어.」

목에 메인 이여사가 잠시 말을 멈췄다가 말했다.

「이젠 무럭무럭 자라. 탈도 없고, 순해.」

세상에 나온 지는 넉 달이지만 정상아라면 이제 겨우 두 달이 지났을 뿐이다.

머리를 든 김상철이 입을 열었다가 목이 메여서는 침만 삼켰다.

「방에서 자고 있는데, 볼 텐가?」

「아닙니다. 나중에 보지요.」

출발하기 전에 미리 전화연락은 했지만 완이를 데려간다고는 하지 않았다. 않았다는 것보다 못했다고 해야 정확한 표현이다. 그때는 박남호 씨가 전화를 받았는데 서울에 온다는 말을 듣자 뛸 듯이 기뻐하는 바람에 기회를 놓친 것이다. 이제 진정이 되었는지 이여사가 그를 바라보았다.

「저녁 안 먹었지? 저녁 차릴까?」

김상철은 마음을 정했다.

「예, 주십시오.」

그들만 부담스럽게 생각하지 않는다면 하룻밤 묵을 작정을 한 것이다. 그리고 밤새도록 이야기를 해도 좋았다. 박미정의 동생 박진수가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있다면 호되게 꾸짖어 줄 것이다.

서두르며 이여사가 응접실을 나서자 박남호 씨가 그를 바라보았다.

「자네 이야기는 신문에 여러 번 났어. 자넨 젊은애들의 영웅이 되어 있어. 진수란 놈도 자넬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더구만.」

「운이 좋았을 뿐이지요. 그런데 진수는 뭘 합니까?」

「대학 졸업한 지 일 년이 되었는데 직장생활은 못하겠다면서 사업한다고 돌아다녀.」

「저한테 보내시지요. 제가 맡겠습니다.」

그러자 박남호 씨가 눈을 크게 떴다.

「정말인가? 자네가 사람 좀 되게 해줄 텐가?」

「당연한 일 아닙니까?」

화색을 띤 박남호 씨의 얼굴에서 시선을 돌린 김상철은 가늘게 숨을 뱉었다. 박미정에 대한 그리움이 쏟아지듯 밀려왔던 것이다.

다음 날 오전, 김상철이 김봉만과 함께 논현동의 이층 벽돌집으로 들어섰다. 잘 가꿔진 정원도 있는 이 주택은 기무사가 사용하고 있는 안가(安家)이다. 사내의 안내를 받은 그들이 현관으로 들어서자 30대의 건장한 사내가 절도 있게 인사를 했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현관 옆쪽에는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다. 앞장선 사내는 계단을 내려가더니 좁은 복도 옆의 한쪽 방을 열었다. 다섯 평쯤 되는 방에는 벽 쪽에 침대가 붙여져 있고 침대 끝의 플라스틱 의자에 사내 한 명이 앉아 있다가 머리를 들었다.

안인석이다.

그는 놀란 듯 커다랗게 눈을 치켜뜨고는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섰다. 햇빛을 보지 못한 때문에 얼굴은 창백했지만 옷차림이 깨끗했고 머리도 단정하게 빗어 넘긴 모습이었다. 김상철이 방에 들어서자 사내와 김봉만은 밖에서 문을 닫았으므로 방에는 그들 둘뿐이다.

그는 안인석의 앞쪽에 놓인 의자로 다가가 앉았다. 방음장치가 되어 있는지 바깥 소음이 전혀 들리지 않는 방이었다. 김상철의 시선을 받은 안인석이 머리를 숙였다. 다시 굴종(屈從)의 자세를 보이는 것이다. 그리고 뒤돌아 서서는 부담없이 배신을 한다.

「내 손으로 널 죽이려고 지금까지 이곳에 잡아둔 거야.」

낮은 목소리로 그가 말을 이었다.

「그렇게 해도 한은 풀리지 않겠지만 제사를 지내는 의미는 될 것이다.」

안인석이 머리를 들었다.

「살려줘, 한국을 떠날 테니까.」

그의 눈에는 눈물이 가득 담겨져 있었다.

「변명하지는 않겠다. 내가 알고도 방조했다는 것도 인정한다. 하지만‥‥」

「너는 네 손으로는 아무 일도 못해. 평생 다른 놈의 그늘에서 일을 벌이고 도망쳐 다닐 것이다.」

자리에서 일어선 김상철이 그를 내려다보았다.

「널 본다고 온 것도 부질없는 것이었다. 쓰레기 치우듯이 진즉 없애고 잊었어야 했는데.」

「네 눈앞에서 떠나겠어, 다시는 나타나지 않을 거야.」

한동안 그를 바라보던 김상철이 머리를 끄덕였다.

「그림 잘 가거라.」

「날 내보내 줄 거냐?」

「나가게 해주지.」

몸을 솟구쳐 일어선 안인석이 그의 소맷자락을 잡았다. 두 뺨으로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고맙다. 나는 결코‥‥」

소매를 뿌리친 김상철이 문으로 다가가 문을 열었다. 문 앞에 서 있던 김봉만이 그를 바라보았다.

「상철아, 정말 고맙다.」

방 가운데에 서서 울먹이며 말하던 안인석은 문 앞에 섰던 사내가 김상철과 엇갈리며 들어서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그의 손에 소음기가 끼워진 긴 권총을 보는 순간 입을 딱 벌렸다. 그 다음 순간 총구에서 흰 섬광이 튀었고 이마 한복판에 구멍이 뚫린 안인석은 반듯이 뒤로 넘어졌다.

「담배 한 대만 주겠나?」

편한 자세로 소파에 기대앉은 이근복이 앞쪽의 사내를 바라보았다. 담뱃갑을 받아쥔 그는 쓴웃음을 지었다.

「혁명위원회가 제법 언론매체를 잘 이용하는군. 언론인들하고 손발이 맞아.」

소파 앞자리에 않은 사내가 펼쳐들었던 신문을 접어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그도 기무사의 수사관으로 이근복을 집 앞에서 납치해 온 사람 중의 하나였다.

「여보, 국민들이 진실을 보고 듣게 되니까 혁명위원회에 호응하는 거요. 당신들하고는 질(質)이 다릅니다.」

「글쎄, 그럴까?」

이근복이 담배연기를 앞쪽으로 길게 내뿜었다.

「성즉군왕이요, 패즉역적이라고 했어. 권력을 잡으면 추종자가 따르기 마련이지. 패하면 역적으로 매도하고.」

그는 이미 검찰에 넘겨져서 남북간의 비밀합의와 대선음모에 대한 조사를 마친 상태였다. 그러던 중 갑자기 혁명위원회 소속의 군인들에게 끌려 오늘 오후에 이곳으로 옮겨졌던 것이다. 그가 앞쪽의 사내를 바라보았다.

「도대체 날 이곳으로 끌고 온 이유는 뭐야?」

사내는 30대 중반쯤으로 보였는데 다부진 인상이었다. 그가 소파에 둥을 기대더니 부드럽게 말했다.

「조금만 기다리시오. 마음을 가라앉히고.」

「내가 불안하게 보이나?」

「당신 같은 사람을 수없이 겪었어. 당신은 지금 겁이 나서 오줌을 쌀 지경이야.」

입맛을 다신 이근복은 말을 잇지 않았다. 집 안은 조용했다. 이곳은 방배동의 고급 주택가였는데 찻길과도 꽤 떨어져 있어서 차량의 소음도 들려오지 않았다.

현관문이 덜컹이며 열렸으므로 그들은 동시에 머리를 돌렸다. 네 명의 사내가 한꺼번에 들어서고 있어서 집 안은 갑자기 어수선해졌다. 앞쪽의 사내가 벌떡 일어서더니 그들을 맞았으나 이근복은 움직이지 않았다. 앞장선 사내는 심재택이었던 것이다.

「그럴 줄 알았어. 언젠가는 네가 나타날 줄 알았다.」

이근복이 입으로는 웃음을 띄웠으나 눈매는 날카롭게 세워져 있었다.

「듣자하니 1차장이 되었다더군.」

「네가 3차장에서 단숨에 부장 진급을 한 것보다 떳떳한 승진이다.」

때려붙이듯이 심재택이 말하자 이근복의 기세가 주춤 꺾였다.

심재택은 그의 앞자리에 앉았다. 그의 옆자리에 따라 앉는 것은 김상철이다.

「네 놈이 짐작하고 있었겠지만 근대리아의 K공작을 알아내야겠어.」

심재택이 김상철을 눈으로 가리켰다.

「정신이 없어서 누군지 기억나지 않는 모양인데 이 분이 근대리아의 김상철 씨다.」

이근복이 눈을 껌벅이며 김상철을 바라보았다.

「사진보다 낫군, 실물이.」

「허세부리지 마라. 난 너를 이 분한테 인계해 주려고 왔을 뿐이니까.」

「허, 그럼 김상철이 사법기관원이라도 된단 말이냐?」

김상철이 얼굴에 웃음을 띄웠으나 입을 열지는 않았다. 혀를 서너 번 두드린 심재택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네가 무너지는 꼴을 보기 민망해서 난 이만 간다.」

쏟아지듯 들어왔을 때처럼 심재택이 응접실에 있던 수사관까지를 데리고 밖으로 나가자 집 안에 남아있는 사람은 이근복과 김상철, 그리고 소파 뒤에 서 있는 사내 등 세 명이다. 김상철이 이근복을 바라보았다.

「K공작의 목적은 이미 압니다. 그 조직원과 활동내역을 말해 주시지요.」

부드럽게 말하자 이근복이 쓴웃음을 지었다

「글쎄, 자꾸 그걸 물어보는데 나는 금시초문이오. 그런 공작이 있다는 것이.」

「대통령 이하 청와대 간부진이 기획했지만 실무집행은 부장님이 하셨다던데.」

「둘러댄 소리겠지.」

김상철이 머리를 끄덕였다.

「난 꼭 알고 가야 합니다.」

「유감이오, 김 선생.」

「부장님 아들을 지금 제 부하가 잡아놓고 있는데 때려죽이지요. 애비 잘못 만난 죄밖에 없으니 고통 없이 단숨에 죽이도록 하겠습니다.」

「‥‥‥‥」

「꾸물댈 시간이 없어요. K공작은 모르고 계시지요?」

「이것 보시오, 당신은 지금.」

이근복이 상체를 기울이며 마악 말을 이을 순간이다. 앉아 있던 자세 그대로 발을 들어 올린 김상철의 발끝이 그의 턱을 찼다. 소파에 머리를 부딪치며 쓰러진 이근복의 귀에 김상철의 목소리가 들렸다.

「네 자식 다음에는 너다, 이 자식아. 이제는 네가 세상에 태어난 것을 원망하게 될 것이다.」

총독의 기상시간은 언제나 아침 6시 정각이다. 수십 년 동안의 습관으로 6시에 일어나 간단한 맨손체조를 하고 냉수마찰을 한 다음 7시에는 조반을 먹는다. 된장국과 몇 개의 밑반찬으로 오늘도 밥 한 공기를 깨끗이 비운 총독은 응접실로 들어가 신문을 펼쳤다. 정각 8시에 헬기를 타고 행정청으로 출발하므로 그에게 이 3,40분 동안은 맑은 머리로 신문을 읽고 주요사항을 메모하는 귀중한 시간이었다. 한국에서 팩스로 보내온 10여 개의 조간신문을 훑어보던 총독은 문이 열리는 기척에 머리를 들었다. 관저 경비실장이 들어서고 있었다.

「무슨 일이야?」

「각하, 죄송합니다만 각하께선 오늘부터 이곳에 계셔야겠습니다.」

총독이 들고 있던 신문을 내려놓았다.

「그건 무슨 말이야?」

「각하께선 체포되셨습니다.」

입을 반쯤 벌린 얼굴로 총독이 그를 바라보았다.

「누구한테 말이냐?」

경비실장이 입술 끝으로 웃었다.

「제가 체포했습니다.」

「‥‥‥‥」

「총독 관저의 경비병은 모두 제가 장악하고 있습니다. 쓸데 없는 짓은 안 하시는 것이 이로울 겁니다.」

「너 이놈!」

자리에서 일어선 총독이 손끝으로 그를 가리켰다.

「이놈이 정신이 나갔구나, 여기가 어딘 줄 알고.」

「정신이 멀쩡해서 이것을 한 거요. 조용히 앉으시오!」

눈을 치켜 뜬 그가 이제는 사납게 소리쳤다. 경비실장은 서울 출신으로 전직 청와대 경호실의 간부였다. 멍한 표정으로 서 있는 총독을 향해 그가 다시 소리쳤다.

「근대리아의 정권도 우리가 접수한단 말이오. 이제 상황을 알겠소?」

그 시간에 행정청장 이남호는 근대시 외곽에 있는 청장 관사의 현관에서 마악 차에 오르고 있었다. 아침 7시 40분이었다. 청장 관사는 1만 평이 넘는 대지 위에 세워진 3층 대리석 저택으로 별관에는 1개 소대의 경호원이 주야로 경비를 한다. 그가 차에 오르자 앞뒤에 경호차를 붙인 청장의 검정색 롤스로이스는 천천히 현관을 떠났다. 세 대의 차량은 정문을 나서자 곧 속력을 내었다. 청장 저택으로 뻗은 일차선 전용도로를 순식간에 주파한 차량 행렬이 낮은 구릉을 돌았다. 그러자 앞쪽에 가로로 뻗친 국도에 순찰차 네 대가 나란히 세워져 있는 것이 보였다. 여느 때와 같은 장면이다. 이곳에서 기다리던 경비대의 순찰차가 앞뒤에서 다시 호위하는 것이다. 선도차는 국도에 가까워지자 속력을 줄였다. 순찰차 한 대가 전용도로를 가로막고 있었는데 앞장설 모양이었다. 그러나 얼른 움직이지 않았으므로 선도차의 운전사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제까짓 소형차가 거리를 맞춘답시고 기다리고 있는 모양이지만 이쪽은 마력이 두 배나 되는 대형차이다. 거리가 얼마든지 떨어져 있더라도 금방 따라잡을 수 있는 것이다. 십 미터쯤의 거리로 다가갔는데도 순찰차가 움직이지 않았으므로 운전사는 짧게 경적을 울렸다. 그 순간이다. 엄청난 폭음이 들렸으므로 차 안에 타고 있던 경호원들은 번쩍 머리를 들었다. 그리고 무의식중이었지만 일제히 뒤 쪽을 바라보았다. 불덩이가 된 차 한대가 마악 길가로 쑤셔박히는 중이었다. 차체 파편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그들의 차량 위로 떨어져 내렸다. 끝에 오던 경호차가 폭발한 것이다. 그 다음 순간 그들은 폭음과 함께 자신들의 몸이 번쩍 들리는 것을 느꼈다. 이쪽도 폭발한 것이다. 순식간에 앞뒤의 경호차가 연쇄폭발하자 청장 전용차의 운전사는 브레이크를 힘껏 밟았다. 차는 불길을 내뿜는 앞 차의 차체를 들이받으면서 겨우 멈췄다.

「뚫고 나가!」

운전석 옆자리에 탄 경호책임자는 이미 권총을 빼들고 있었다.

그러나 앞뒤로 폭파된 경호차량에 막혀 있는 상황이다. 그 순간 뒷좌석에 앉은 이남호는 옆쪽으로 경비대원들이 다가오는 것을 보았다. 모두 앞쪽으로 총을 겨눈 자세였다. 그가 억눌린 신음소리를 뱉었을 때 경비대원들이 쥔 소총이 발사되었다. 앞좌석의 운전사와 경호책임자가 지근거리에서 발사된 총탄을 맞고 겹쳐 쓰러지자 곧 뒤쪽의 문이 열렸다

「자, 청장님. 가실까요?」

경비대 장교 복장의 사내가 이남호를 내려다보았다. 처음 보는 얼굴이었으나 이남호는 선뜻 말이 떨어지지 않았다.

「다친 사람은 없어?」

장동택이 묻자 오철진이 머리를 끄덕였다.

「다친 놈은 꼭 데려가지 않습니까? 죽은 놈만 남겨두고 말입니다.」

「이번에는 김상철의 부하들이라니 북한 측의 보복이군.」

입맛을 다신 장동택이 시계를 내려다보았다. 오전 7시 55분이었다. 새벽부터 사건이 발생하는 바람에 아침도 걸렀지만 자신을 데리러 온 오철진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놈들이 김상철이 한국에 가 있는 기회를 기다린 것 아닐까?」

「글쎄요.」

오철진이 머리를 한쪽으로 기울였다.

승용차는 근대시의 외곽 지역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가끔씩 큰 사건이 터지는 우범지역이다. 차가 변두리의 허름한 창고 앞에서 멈춰 서자 그들은 차에서 내렸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불법 이주민의 주거지역이었는데 이번에 아파트를 지으려고 모두 철거시킨 황량한 지역이다. 장동택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인적이 없었고 신고가 되었으면 순찰차나 경찰이 있어야 할 텐데 그들도 없다.

「어디야?」

장동택이 오철진을 바라보았다.

「현장이 어디야?」

「장형, 미안해.」

갑작스런 오철진의 말투에 그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이봐, 어떻게 된 거야?」

그렇게 묻던 장동택은 인기척에 머리를 돌렸다. 어느새 건물에서 나온 7,8명의 사내들이 순식간에 그들을 둘러쌌다. 모두 동양인이고 두상을 보면 한국인이다.

「솔직히 장형은 해치고 싶지 않아. 이 사람들하고 얼마 동안만 같이 있어 주면 내가 책임지고 빼내주겠어.」

오철진이 그에게로 한 걸음 다가가 섰다.

「이제 짐작이 가지? 내가 K공작의 핵심이야. 행동책이지.」

「뭐라…….」

눈을 부릅뜬 장동택이 말을 잇기도 전에 사내 두 명이 그의 양쪽 팔을 쥐었다. 대단한 완력이다.

「이 놈들은 누구냐? 네가 서울에서 데려온 놈들이냐?」

「그쪽도 몇 명 있고.」

얼굴에 웃음을 띄운 오철진이 사내들을 둘러보았다.

「평양 사람들도 몇 명 있지.」

「널 잡으면 살려두지 않을 거다. 지금 날 없애는 게 나을 거야.」

「그런 기대는 말어.」

시계를 내려다본 오철진이 몸을 돌렸다.

「지금쯤이면 상황이 끝났을 테니까. 근대라아의 총독은 물론이고 청장과 경비본부장, 거기에다 대부분의 핵심 간부는 모두 체포되었거나 제거되었어.」

「이 개새끼, 도대체 무슨 이유로.」

「너하고 비슷한 이유지, 나도.」

차의 문고리를 잡은 오철진이 머리만을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권력욕이다. 난 정직한 사람이라구.」

아침 9시, 근대타운의 총보스 변순태는 시계수선공 출신답게 정각에 타운의 서부경비서로 들어섰다. 세 대의 검정색 벤츠로 위용을 갖춘 대열이었으므로 변순태의 행차를 알아본 경비서의 초병이 부동자세를 취했다. 현관 앞에서 차를 내린 변순태는 세 명의 부하를 뒤에 거느리고 곧장 이층의 서장실로 향했다. 이준기 서장과는 여러 차례 만난 적이 있었는데 서로 호의적이었다.

그가 아침에 만나자는 연락을 해온 것은 불법 이주민 고용에 대한 문제 때문이었다. 중국계와 러시아계 불법 이주민이 나날이 증가추세에 있는 것이다. 대기실에 부하들을 남겨둔 변순태는 경비대원의 안내를 받고 서장실에 들어섰다. 테이블에 앉아 있던 서장이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섰는데 안색이 좋지 않았다. 경비대 간부 복장의 두 사내가 소파에서 따라 일어서고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소파의 사내 하나가 변순태에게 인사를 했다. 30대 중반쯤으로 서장 계급장을 붙이고 있었다.

「바쁘시지요?」

이준기 대신으로 그가 주인 노릇을 한다.

「예, 조금.」

변순태가 힐끗 테이블에 서 있는 이준기를 바라보았다.

「앉으십시오.」

사내가 권하는 대로 변순태는 자리에 앉았다. 분위기가 꺼림칙했으므로 그는 어깨를 폈다.

「무슨 일입니까?」

머리를 든 그는 사내 뒤쪽의 이준기에게 물었다. 이준기는 아예 소파로 다가오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러자 사내가 다시 나섰다.

「변사장님, 우리 하고 같이 가주셔야겠습니다만.」

이제 사내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져 있다

「본부에서 조사할 것이 있습니다.」

변순태가 쓴웃음을 지었다.

「허, 이런.」

「반항하면 사살할 거요.」

어느새 다른 사내의 손에 소음기를 낀 권총이 들려져 있었다. 총구가 똑바로 변순태의 가슴을 겨누고 있다.

「야 이 새끼야. 너, 전쟁 일어나는 걸 보고 싶어?」

눈을 부릅뜬 변순태가 사내를 노려보았다

「너, 누구 명령으로 이 따위 짓을 하는 거야?」

그 순간 문이 열리더니 서너 명의 사복 차림이 쏟아져 들어왔다.

「묶어라, 이곳에서 피 볼 수는 없으니까.」

사내가 말하자 사복 차림들이 변순태를 덮쳤다. 변순태가 튕기듯 일어나 한두 명을 쳤으나 이미 역부족이다.

「서장! 너 어쩌려고 이래!」

온몸을 잡힌 변순태가 악을 쓰자 이준기가 어금니를 물었다. 그리고는 시선을 돌렸으므로 변순태의 힘이 빠졌다.

「다른 놈들 어떻게 했어?」

지휘자 격인 서장 계급장을 붙이고 있는 사내의 말소리가 들렸다.

「예, 대기실에 있는 놈들은 모두 잡았습니다. 현관 앞의 주차장에 있는 놈들도 아마 지금쯤 다 잡았을 겁니다.」

두 팔이 묶이고 테이프가 입에 붙여지는 중에 변순태가 겨우 들은 말이었다.

화장실에서 소변을 보던 하덕수는 안으로 들어서는 두 사내를 보았다. 하바로프스크의 날리던 소매치기 출신으로 형무소를 제 집 드나들 듯 하던 하덕수이다. 돈 넣고 있는 놈은 거지꼴을 하고 있어도 알고 얼굴만 보아도 그놈이 무슨 꿍꿍이를 갖고 있는지도 알 수 있는 것이다. 두 사내는 제각기 하덕수의 좌우로 갈라져 왔는데 화장실로 들어선 순간 선뜻 스치는 눈길로 알 수 있었다. 잡으려는 것이다. 하덕수는 바지 지퍼를 올리면서 혁대 쪽으로 올라간 손끝으로 혁대 사이에 찔러 넣은 단도 손잡이를 쥐었다. 그리고 그 순간 소변구 앞에 서서 아랫도리에 손만 대고 있던 사내들이 일제히 손을 뻗쳐 하덕수의 양쪽 팔을 쥐었다. 아니 손을 대었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사내들이 자신의 슈바 소매를 잡은 순간 몸을 비튼 하덕수는 단도를 비스듬히 날려 오른쪽 사내의 목을 그었다. 그리고는 와락 그에게 부딪치면서 뒤쪽으로 단도를 휘둘렀다.

「악!」

눈을 베인 사내가 커다랗게 고함을 쳤고 목을 베인 사내는 한 걸음 물러선 채 두 손으로 목을 움켜쥐었다. 피가 분수처럼 솟아나오고 있다. 재빨리 슈바를 벗어던진 하덕수는 화장실의 문을 열었다. 그러자 앞쪽의 주차장이 보였다. 십여 명의 사내들에게 둘러싸인 그의 동료들은 마악 무릎을 꿇리고 있는 중이었다. 땅바닥에 넘어져 있는 동료도 보였다. 하덕수는 다시 문을 닫고는 화장실 안을 둘러보았다. 소변기 위쪽으로 환풍창 한 개가 굳게 닫혀져 있었다. 한걸음에 달려간 하덕수가 단도 손잡이로 유리창을 찍어 깨고는 손을 긁히며 밖으로 떨어져 나온 것은 채 10초도 걸리지 않았다. 밖은 바로 경비소의 담장이었다. 그는 다시 몸을 날려 담장을 뛰어넘었다. 모두 소매치기 시절에 단련된 솜씨였고 소년원을 탈출할 때보다 쉬웠다.

경비본부장이 부른다고 해서 냉큼 달려갈 이한이 아니다. 그렇다고 이대각을 얕잡아 보는 것도 아니었고 다만 그의 성격이 매사에 울끈불끈, 티격태격이어서 나를 제 부하로 생각하는 모양이라는 둥 하필이면 형님이 없을 때 부른다는 둥 한바탕 부하들 앞에서 위세를 보인 다음 안달을 하는 부하들에 못이기는 척 차에 올랐던 것이다. 이대각이 부르는 이유는 북한 대량 이주민에 대비하여 상의할 것이 있다는 것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30만 이주민이 쏟아져 들어오면 북한세가 급신장할 것은 뻔한 일이어서 이쪽도 숙고하고 있는 터였다. 이한과 부하들의 자동차 행렬이 경비본부의 정문에 들어선 시간은 9시 10분이다. 약속보다 10분이 늦은 것이다. 주차장에 벤츠 다섯 대가 일렬로 들어서자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모아졌다. 이한의 옆자리에 탄 사내는 김동남으로 한국의 대구 출신이다. 차가 마악 멈춰 섰을 때 무선전화기가 울렸으므로 그는 스위치를 켰다.

「여보시오.」

「습격이오, 형님!)

고함치는 듯한 목소리에 그는 움칠 놀라고는 무의식중에 손을

뻗어 마악 내리려는 이한의 소맷자락을 잡았다.

「너, 누고?」

「변사장의 경호원 하덕수올시다! 나 혼자만 경비서에 끌려갔다가 도망쳐 나온 길이오!」

「뭐라꼬?」

「변사장도 모두 잡혔소! 함정에 빠진 겁니다!」

김동남이 더욱 단단히 이한의 소매를 움켜쥐었다.

「어느 경비서야?」

「타운의 서부경비서요! 상의할 것이 있다고 사장님이 갔다가 모두 잡혔소!」

수화기를 든 채 김동남이 이한을 바라보았다.

「사장님, 변사장이 함정에 빠졌답니다.」

이한이 수화기를 넘겨받았다. 이미 경호원이 탄 네 대의 차량은 나란히 주차되어 있었고 차 밖으로 부하들이 내려와 있다. 주차장과 현관과의 거리는 50미터 정도였고 현관 앞에는 십여 명의 사복 차림들이 이쪽을 힐끗거리는 중이었다. 이윽고 이한이 전화기를 내려놓았다. 본래 흰 창이 많은 눈에 더욱 흰 창이 크게 드러나 있었다.

「아침에 전화는 누가 받았지?」

「예, 제가.」

「본부장이 직접 전화했더냐?」

「아닙니다, 수사 3과장이. 제가 그 사람 목소리는 잘 압니다.」

이한이 천천히 머리를 끄덕였다.

경비본부의 현관 앞에 서 있던 유찬섭은 갑자기 경호원들이 일제히 차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

「이런!」

저도 모르게 소리친 그는 쥐고 있던 무전기를 입에 대었다.

「정문, 막아라!」

정문에 십여 명의 병력을 대기시켜 놓았던 것이다. 벤츠는 주차장을 빠져 나가고 있었다. 모두 검정색인 다섯 대의 벤츠가 속력을 내어 달려오자 정문의 경비병은 우선 손을 흔들어 막았다가 일제히 좌우로 비켜났다.

「타타타탕!」

경비병 측이 먼저 발포를 하자 두 번째 벤츠의 유리창이 열리더니 총구가 튀어나왔다. 다시 요란한 총성이 울렸고 벤츠 다섯 대는 무서운 속력으로 정문을 돌파하여 사라졌다.

「놓쳤다!」

그가 소리쳤을 때 무전기가 울렸다. 스위치를 켜자 오철진의 목소리가 커다랗게 울렸다.

「쫓아라! 놈이 가는 곳마다 경비대를 풀어놓을 테니 걱정할 것 없다.」

그는 위층의 창에서 바라보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행정청과 경비본부는 이미 장악되었습니다.」

근대리아 미국 대표부의 레니 브라운이 말하자 유리 하마노프는 잠자코 머리를 끄덕였다. 오전 10시 반이었으니 근대리아의 정변은 네 시간도 안 되어서 끝난 것이다. 브라운이 웃음 띤 얼굴로 커피잔을 들었다.

「하마노프 씨, 우습지 않소? 한국에서 쿠데타로 밀려난 세력이 근대리아에서 쿠데타를 성공시켰다는 것이 말이오.」

「난 우습지 않소, 브라운 씨.」

하마노프가 말 그대로 정색을 했다.

「배후에 당신네가 있다는 걸 알고 있는데 어떻게 웃음이 나온단 말이오? 한국의 쿠데타가 성공한 것은 미국이 방관하고 있었기 때문이고 이곳은 적극적으로 나서서 성공을 시켰지.」

그러자 브라운이 쓴웃음을 지었다. 하마노프는 근대리아 주재 러시아 대표였다. 브라운은 지금 러시아 대표부에 와 있는 것이다.

「이봐요, 하마노프 씨. 이 일은 백악관과 크렘린이 결정한 문제요. 미국의 독자적인 행동이 아닙니다.」

「미국이 제의를 했지 않습니까? 크렘린은 동의했을 것이고.」

하마노프는 여전히 언짢은 기색이었다. 미국 대표인 레니 브라운이 미국 정부와 긴밀한 협의 하에 작전을 주도한 반면 그는 크렘린으로부터 단순히 미국과 협조하라는 지시만 받았을 뿐이다.

정색을 한 브라운이 탁자 위로 상체를 숙였다.

「하마노프 씨, 앞으로 러시아는 근대리아 세금 수입의 10퍼센트를 갖게 될 겁니다.」

「엄청난 금액이지요. 근대리아의 행정부는 곧 러시아 정부와의 합의서에 서명하게 될 것이오.」

「총독과 청장은 어떻게 됩니까?」

마지못한 기색이었으나 어쩔 수 없다는 듯 하마노프가 물었다.

「총독은 명칭만 붙여 줄 뿐 모든 일을 행정청에서 수행할 거요. 행정청장에는 홍석규, 경비본부장에 오철진이 임명됩니다.」

「‥‥‥‥」

「물론 우리 미국과 러시아, 중국과 일본의 4강(四强) 대표부가 행정청의 자문관 역할을 하게 될 것이오. 이미 중국과 일본 정부와도 합의가 되었습니다.」

「그렇군.」

「근대리아의 발전이 러시아의 지역경제에 지대한 성장효과를 주었지만 이 상황으로 나간다면 러시아도 조정하기가 힘들어집니다. 크렘린도 그 점에 동의했어요.」

미국은 말할 것도 없고 중국과 일본도 그렇다. 동북아에 강대한 한민족의 국가가 형성되어 간다는 것은 그들 모두에게 위협이다. 커피가 식었으므로 브라운은 담배를 꺼내어 입에 물었다.

「한국 정부의 K작전은 미국 정부의 지원을 받고 있었습니다. 행정청과 경비본부, 민간단체에 이르기까지 침투시켜 놓았지요. 우리는 크렘린과의 합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겁니다.」

「이번에 북한 측의 조직원이 많이 가담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들과도 합의를 한 겁니까?」

하마노프가 묻자 브라운이 맛있다는 듯 길게 담배연기를 내뿜었다.

「우리 사강(四强)이 배후조종을 하게 되겠지만 근대리아의 한인세력이 한국 쪽으로 치우치면 안 됩니다. 이곳도 남북의 균형이 잡혀야 한반도처럼 안정이 돼요. 그래서 북한 측과도 합의를 했지요. 거사를 도우면 이주민 100만을 받게 하겠다고. 평양 정부는 두말 않고 합의했습니다.」

머리를 끄덕인 하마노프가 쓴웃음을 지었다.

「하긴 그렇지. 그렇지만 이번에 들어선 한국의 혁명 정부는 자주성이 강한 모양이던데.」

「북한에 대한 입장이 강해질지는 몰라도 우리한테는 아니오. 그리고 전(前) 정권은 위험했습니다. 국력이 열 배 이상 강하면서도 북한에 덜미를 잡히고 있었어요. 북한에 흡수될 가능성도 있었습니다.」

그는 재떨이에 담배를 비벼 껐다.

「한국 대통령은 퇴임 후에 근대리아를 지배할 생각이었지요. 꿈이 컸습니다.」

「그럼 그 사람이 미국에서 돌아옵니까?」

그러자 눈을 껌벅이며 하마노프를 바라보던 브라운이 천천히 머리를 저었다.

「잘 아시면서. 아마 워싱턴 근처에서 낚시나 즐기게 될 겁니다.」

미국 대표부로 돌아가던 브라운은 수화기를 들었다. 곧 키간의 응답소리가 들렸다.

「키간, 이태준은 출발시켰소?」

「그렇소. 그 사람 안 가려고 버티더군. 근대리아의 공작이 성공했으니 남겠다는 거요.」

키간이 목구멍을 울리며 웃었다.

「제 계획대로라면 근대리아의 행정청장이 제 몫이겠지. 순진한 사람이오, 그 사람.」

근대리아는 총독의 일인 집정체제나 마찬가지여서 총독의 지시는 곧 법이었다. 행정청과 경비대를 청장과 본부장이 맡았지만 그들은 총독의 말 한 마디에 경질이 된다. 또한 입법기관으로 국민회의가 있었으나 법을 제정할 기능이 없고 행정청의 자문기관 역할만 했다. 따라서 총독의 권위는 전제군주 이상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총독과 행정청장, 경비본부장의 3인이 핵심 간부들과 함께 체포되자 정권이 전복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역설적으로 삼권분립이 잘 되어 있는 국가일수록 무력에 의한 정권탈취가 어려운 법이다. 더구나 정부 전복세력의 배후에 미국과 러시아, 중국과 일본의 4강 세력이 지원하고 있다는 것이 확인되자 정부와 민간을 막론하고 반발세력은 딱 하나밖에 남지 않았다

김상철의 조직이다.

그러나 경비대를 완전히 장악한 오철진은 병력을 동원하여 시내 곳곳에서 비상경계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경비대와 행정청에 침투해 있는 한국 세력은 그들의 상상 이상이었다. 근대리아의 행정조직을 급격히 늘리는 사이에 실무부서의 거의 반수 이상을 장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정변 이틀째 되는 날 근대리아 행정부는 행정청장에 홍석규, 경비본부장에 오철진을 임명했다. 모두 총독의 결재가 난 인사였다.

근대시에서 북쪽으로 200킬로쯤 떨어진 들츠크 마을의 조그만 클럽 안이다. 저녁 무렵이었다. 근처의 광산에서 일하는 중국계 노동자들로 가득 찬 홀 안은 떠들썩했다. 홀의 구석자리에 앉은 이한이 김동남을 바라보았다. 그는 방금 근대시에서 도착한 참이다.

「그레고리까지 당했단 말이냐?」

이한의 얼굴은 흉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예. 페로프하고 같이 있다가 경비대의 습격을 받았습니다.」

홀 안의 소음이 컸으므로 김동남이 상반신을 탁자 위로 숙였다.

「부하들이 다섯 명 죽고 경비대도 칠팔 명 죽었습니다. 그레고리 사장님과 페로프는 같이 경비대에 끌려갔는데 ‥‥」

그는 힐끗 이한의 눈치를 보았다.

「페로프는 곧 풀려나왔습니다.」

「그놈이 배신했단 말인가?」

「페로프도 저항을 하다 팔에 총을 맞았습니다. 하지만 내용은 알 수가 없습니다.」

전멸이다. 어제 아침 7시에 경비대는 일제히 행동을 개시하여 최고 간부급 11명 중 8명을 체포했던 것이다. 그중 세 명이 저항을 하다 사살되었고 변순태를 위시한 다섯 명이 구속되어 있다. 남은 셋 중 그레고리가 오후에 잡혔으니 이젠 행방을 감춘 양성훈과 자신 등 둘만 남았다. 거기에다 200여 개 사업장의 지배인이 대부분 채포된 데다가 전체 조직과 기업을 관리했던 근대시의 본부빌딩이 경비대에 접수되어 간부들 대부분이 구속되었다. 죄명이 우습게도 내란음모라는 것이다.

두 눈을 부릅뜬 이한이 김동남을 바라보았다.

「러시아 놈들이 우릴 배신했다.」

잇새로 그가 말을 뱉었다. 러시아계 고려인 출신의 이한이다.

그는 근대리아를 전복시킨 한국 세력과 그 배후의 미국보다 그것을 묵인한 러시아가 더 미운 것이다. 그는 컵에 따른 보드카를 물마시듯 벌컥이며 마시고는 내려놓았다

오후에 근대리아의 TV는 정규방송을 중단하고 총독의 특별인사 발표를 중계했다. 발표자는 이번에 행정청의 내무 국장으로 임명된 강미현의 보좌관 출신 박태현이다.

그는 청장과 경비본부장을 비롯한 근대리아 정부의 거의 대부분의 요직을 새 인물로 발표했던 것이다. 왜소한 체격의 그는 자신만만해 보였다. 미국과 러시아, 중국과 일본 정부가 근대리아의 새로운 정부를 강력하게 지지하고 있다는 것을 힘주어 말할 때는 아예 턱까지 치켜 든 모습이었다.

「미국과 러시아가 협상을 했을 것이다.」

총독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이틀이 안 되는 기간 동안에 십 년도 더 늙어보였다. 두 볼의 살이 더욱 늘어져 내린데다 눈시울에 덮인 두 눈은 거의 보이지도 않는다. 검버섯이 난 얼굴은 흙색이었다.

「꼭두각시 정권을 만들어 4강(四强)이 조종을 하려는 것이지. 서로의 의도가 모두 들어맞는다.」

소파에 등을 기댄 총독이 강미현을 바라보았다.

「방법이 없다, 러시아까지 미국에 동조했다면. 아마 그 자들은 못이기는 척 미국을 따랐을 것이다. 엄청난 대가를 받는 조건으로 말이지.」

총독 관저의 응접실 안이다. 전화는 모두 경비원이 회수해 갔지만 TV는 볼 수 있어서 상황을 알 수 있었던 것이다.

총독이 소파에 머리를 기대고는 천장을 바라보았다.

「아아, 결코 그놈들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단 말인가?」

한숨처럼 말을 뱉자 강미현이 머리를 들었다.

「할아버지, 하지만 그 자들은 할아버지를 어떻게 하지는 못해요. 계약서는 세상 모두가 알고 있으니까요.」

「이 나이에 살고 죽는 건 문제가 아니야, 이놈아.」

「기회를 기다리시는 것이.」

그러자 쓴웃음을 지은 총독이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자주국을 세우고 싶었다. 곧 남북한의 대량 이민을 받고 나서 경비대를 차츰 늘려가면서 핵을 보유할 계획이었지, 그것은 자주국의 자위수단이다. 그렇게 되면 어느 누구도 동북아의 근대리아를 얕보지 못할 것이다. 근대리아는 남북한의 조정국이 된다. 사강의 영향을 받지 않는 한민족의 국가가 되어서.」

말을 멈춘 총독이 침을 삼켰다. 방 안에 한동안 정적이 흘렀다.

이윽고 총독이 다시 입을 열었다.

「김상철이는 아직도 한국에 있느냐?」

「네, 할아버지.」

「그놈은 용케 피해 나갔구나. 역시 운 좋은 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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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철은 사욕이 많지 않은 인물로 봤어요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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