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지회 문화답사
코로나19로 문화답사 일정을 가늠할 수 없는지라 조심스럽게 나들이를 진행합니다.
이번 문화답사 나들이는"능. 원. 묘 이야기" 나들이입니다.
녹천동과 월계동, 장위동 그리고 중랑천과 우이천 이야기와 조선시대 내시들과 상궁들의 이야기가 담긴 초안산 근린공원과 북서울꿈의숲을 걸으며 다크투어를 하고자합니다.
코로나19가 사그라지질 않고 있습니다.
감염자가 완전히 사라질 때 까지는 시간이 많이 소요될 것 갔습니다.
서로 조심하여 코로나 바이러스에 감염되지 않는 것이 최대한의 방법인거 같습니다.
조심조심 항상 건강유의 하시길 바랍니다.
● 만나는 일시 : 2020년 7월25일(토) 09시30분
● 만나는 장소 : 전철 1호선 월계역 1번. 2번 출구 안에서 만남.
● 진행코스 : 월계역~녹천정~승극철부부묘~각심재(정간공이명묘역)~비석골(석물전시장)~왕을 향한 문인석~조선시대분묘군~상궁개성박씨묘~북서울꿈의숲~창녕위궁재사~춘천골막국수에서 점심(함께 식사를 하실 분들만)
● 코로나19로 인해 공식적으로 점심 및 뒤풀이는 없습니다.
● 소요시간 : 3시간 정도
● 준비물 : 간식 및 음료(비가와도 진행합니다.)
● 참석자는 댓글을 달아 주시길 바랍니다.
● 문의 : 답사팀장 최병규 010-5208-6275
※ 추신 : 문지회 총서 1권이 나왔습니다. 학술팀장이신 지종석 선생님께 서 저술하시고 김미숙선생님이 편집해주신 "답사길의 만나는 불교미술의 아름다움" 책을 성황리에 배부를 하고 있습니다. 한정판으로 제작되어 선착순으로 배부하는 터라 늦으면 구입할 수 없게 됨을 상기 하시고 김상희총무님께 구입 연락을 해주시길 바랍니다.
● 문의 : 김상희 총무 010-7351-6098
● 구입 신청자 중에 직접 수령하시고자 하시는 분들은 25일(토) 초안산 나들이 당일 답사를 마치고 북서울꿈의숲 정문 앞 점심식사 장소에서 수령할 수 있습니다.
● 당일 현장 수령자는 댓글을 달아 주시길 바랍니다.
● 초안산(楚安山 115.4m)
초안산은 백두대간 식개산분기점에서 한북정맥이 분기하여 북에서 남쪽으로 내려오다가 한강봉 분기점에 이르러 한줄기는 오두산으로 이어지고(원 한북정맥 산줄기), 또 한줄기는 도봉산, 우이령을 거쳐 상장봉~월롱산~장명산으로 한북정맥 산줄기가 이어진다. 한북정맥이 우이령(북한산과 도봉산의 경계) 가기 직전의 우이암분기점에서 남쪽으로 우이남능선을 거쳐 산불감시초소에 이르러 시루봉을 분가시키고 방학동, 쌍문동의 도심지역을 거쳐 도봉로를 지나 창동으로 들어선 후 생태육교(초안산교)을 건너면서 초안산으로 접어든다. 초안산 정상을 거쳐 월계로를 넘어 영축산을 일으킨 후 석계역 부근에서 우이천과 중랑천이 만나는 지점에서 산줄기는 끝이 난다. 이 산줄기(단맥)의 동쪽으로 중랑천이 서쪽으로 우이천이 흐른다.
● 초안산 조선시대 분묘군(楚安山 朝鮮時代 墳墓群)
초안산은 서울 노원구 월계동 초안산 자락의 사적 제440호 조선시대 분묘군(墳墓群)을 이루고 있다. 이 분묘군은 1,154기의 묘가 있는데 정밀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이 가운데 1,000여 기가 환관이나 궁녀의 무덤이라고 한다. 그래서 "내시네 산"이라고 한다. 특히 그 무덤들 가운데는 무연고 무덤이 많았는데 마을 사람들이 이 무연고 무덤에 오랫동안 위령제를 지내왔다.
초안산 내시 묘들은 대부분 궁궐이 있는 서쪽을 향하고 있는데 이는 죽어서도 궁궐을 바라보며 왕의 안녕을 기원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일제강점기까지도 매년 가을에 마을 사람들이 이곳에서 내시들을 위해 제사를 지냈다 한다.
특히 이곳은 다양한 계층의 분묘와 수 백여 기의 석물(石物)들이 시기별로 분포되어 있어 조선시대 이말산과 진관사 입구 내시묘역 등과 초안산 분묘군은 조선시대 묘 변천과정을 이해하는 사료가치가 있는 곳이다.
● 월계동과 녹천동의 유래
월계라는 동명은 밤에 높은 곳에서 월계동 지역을 내려다보니 맑은 시냇물에 달이 비치고 중량천과 우이천으로 둘려 쌓여 흐르는 모양이 마치 반달모양처럼 생겼다하여 달월(月)에 시내계(溪)자를 붙여 월계동이라는 이름으로 칭하였다.
월계동은 조선 초까지 경기도 양주목 노원면과 해등촌면 지역에 해당되었으나 갑오개혁 때 전국의 행정구역이 조정되면서 경기도 양주군 노원면 월계리,녹천리(鹿鹿理),역촌,능리(陵理)와 해등촌면 창동리가 이에 속하였다. 1914년 4월1일 양주군 노원면과 해등촌면을 합쳐 노해면으로 하고 연촌,능리,월계리,녹천, 창동 일부를 합쳐 월계리로 하여 관할하였으며 1963년 1월 1일 서울특별시로 편입하면서 성북구에 속하였고 별도로 마련된 노해출장소의 관할구역이 되었다. 1973년 7월 1일 도봉구가 신설되자 이의 관할이 되었고 1988년 1월 1일 노원구가 신설되자 노원구 월계동이 되었다. 물고기 모양의 지형으로 된 월계동은 동쪽으로 중랑천이 흐르고 동의 북쪽에서 서쪽으로 북한산의 지맥이 이어지는데 몇 개의 마을이 모여 월계동을 형성하였다. 갑여개혁 때까지는 대개 이 자연부락들이 하나의 마을형태를 이루었는데 1914년 이후 행정단위의 최소단위인 동리(洞理)로 규정되었다. 월계동을 이루는 자연부락은 녹천(鹿川),연촌(硯村),각심절, 능골(陵里),창골(倉洞)인데 이 가운데 창골의 일부는 창동으로, 나머지는 월계동으로 편입되었다.
● 사슴에게 시집간 염씨 처녀
월계동의 중심이 되는 녹촌은 녹천(鹿川)이라고도 한다. 북한산 지맥으로 이어진 크고 작은 산맥이 월계동 근방에 오면 높이 100m 내외의 야산으로 변하는데 그 사이로 계곡이 형성되어 있다. 이 계곡들은 서쪽으로 우이천이나 동쪽의 중랑천으로 유입되는데 대개의 하천 지류들은 여러 가닥이 모여 하나의 본류를 형성하게 된다. 이곳의 하천은 두 가닥으로 시작해서 767번지 근방에서 하나로 합쳐진다. 이 모습이 마치 사슴머리에 난 뿔 같다 하여 녹촌이라 불렀다. 조선 중기 때 중랑천이 범람해서 우이천 까지 물이 흘러들어 큰 홍수로 인해 지금의 월계로 근방 마을은 모두 폐허가 되었다. 마을 사람들은 황급히 뒷산으로 이주하여 인명에는 피해가 없었지만 가재도구와 넓은 논밭이 온통 황토 흙으로 뒤덮여 살길이 막막해졌음을 통탄하면서 이에 대한 대책마련을 위해 능록의 뒷산에 모여 회의를 소집 하였다. 회의석상에서 마을의 촌주 한사람이 지난밤 꿈에 신선을 만나 내일 있을 회의를 어떻게 할 것인가라고 물었을 때 신선은 내일 정오에 중랑천가에 푸른 사슴 한 마리가 내려와 목욕을 할 것이니 제물을 준비해 두었다가 사슴에게 바치고 마을에서 가장 예쁘고 정숙한 처녀 한사람을 사슴에게 시집보내면 좋은 일이 있을 것이라는 답을 해주고는 사라졌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여기저기에서 반대하는 의논도 있었으나 이왕 폐허가 된 마을을 살리는 방법이니 한번 실행해보자는 의견으로 기울어 마침내 염씨(簾氏) 집의 15세 난 딸을 사슴에게 시집보내기로 결정하였다. 며칠 후 신선이 시킨대로 산 정상에 제물을 준비하여 사슴이 내려오기를 기다리자 과연 사슴 한 마리가 산에서 내려와 중랑천에서 목욕을 하였다. 마을 회의에서 결정한대로 염씨 처녀를 곱게 단장시켜 제물 옆에 다소곳하게 앉혀 두었는데 목욕을 끝낸 사슴이 등을 돌리며 처녀더러 타라는 시늉을 하였다. 처녀는 사슴이 시킨대로 등에 올라탔는데 처녀를 태우고 동네를 한바퀴 돌아본 사슴이 766번지쯤에서 잠시 멈추었다가 지금의 하천이 생긴 방향으로 사라졌다. 마을사람들은 사슴이 떠난 방향을 바라보자 멀리서 물줄기 두 개가 나무가지 모양으로 흐르기 시작하더니 중간쯤에서 합쳐서 한줄기로 되면서 황토 흙으로 뒤덮였던 마을 앞 전답이 기름진 검은색으로 바뀌었다. 사람들이 이 신기한 일에 놀라워하자 그중 한사람이 "이건 사슴과 결혼한 염씨 처녀의 눈물이니 냇물 이름을 녹천이라 하자"고 제의하였다. 모든 주민이 만장일치로 그 뜻을 따르기로 하면서 마을이름도 녹촌이라고 하였는데 이때부터 녹촌 혹은 녹천이라고 마을이름을 녹천시내와 혼용하였다. 녹천(鹿川)은 염씨 처녀가 이곳에서 사슴과 결혼했다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 이날 이후부터 마을이 번성하기 시작했지만 이상하게도 녹천의 남쪽에 있는 능골과 그 아래 마을들은 여성들의 기(氣)가 세어져 음란한 부녀자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곳 사람들은 사람을 사슴에게 시집보낸 해괴한 일을 한 녹천 사람들이 자기 마을에 재앙을 내린 것이라 하여 녹천과 왕래조차하지 않고 등을 지고 살게 되었다.
● 음기가 강한 동네
정간(貞簡) 이명(李蓂)의 무덤을 만들 때 지나가던 승려가 이곳은 "자손은 번창하지만 음란하니 앞으로 많은 사람들이 밟아서 지기(志氣)를 다스려야 하는 곳으로 될 땅" 헌화형(獻花形) 이라 하였다.
헌화형은 양다리를 벌려서 중간 구덩이를 연 것과 같은 풍수리지설에 의한 지세인데 여인이 다리를 벌린 형태이므로 음란하다 하여 주택지나 음택(陰宅)으로 별 환영을 받지 못하는 곳이다.
마을사람들은 동네 재앙을 막을 수 있는 비법에 대해 물었는데 승려는 녹촌과 혼인을 금하고 등을 지는 형태로 집을 짓고 마을의 동쪽에 절을 세우면 동네 화근이 사라진다 하였다 절의 이름을 마음을 다스린다는 뜻에서 각심사(覺心寺)라고 붙이라 했는데 녹천 사람을 원수로 여기지 말고 자신의 마을에 액운이 깃들어 그러니 남을 원망하지 말라는 뜻으로 지어준 것이었다.
마을사람들은 이 말을 듣고 그대로 행했는데 이때부터 능골과 그 아랫마을 사람들의 집은 녹천을 등지고 지었으며 각심사에서 아침저녁으로 공양을 하였다. 승려의 말대로 수백년이 지나서 헌화형의 중심이 되는 곳에는 신창중고등학교, 염광여중고, 월계고등학교, 인덕공업전문대학이 들어서 땅의 억센 기운이 뻗지 못하도록 하고 있다. 녹촌에는 조선 세종의 6대손이 되는 사람의 별당이 있었는데 그를 녹촌대감이라 하였다. 주변은 모두 그의 사지(賜地)였으므로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서 소작인 노릇도 하였다.
월계동 513~534번지 일대는 연촌(硯村) 혹은 벼루말이라 한다. 높이 120m의 엄정산 아래에 위치한 이 마을은 132번지 일대에 연못이 있어서 전체적인 모양이 벼루 같아 보인다 하여 붙여진 명칭이다. 안골이라고도 부르는 이 일대는 동쪽의 하계동을 붓골(佛骨), 동남쪽의 묵동을 먹골이라 하여 문방사우 가운데 셋이 모여 있기 때문에 언젠가는 이 일대에서 문재(文才)가 나올 것이라는 예견을 했는데 1937년에 경성제국대학 이공학부가 하계동에 세워지자 이 예언이 맞았다고 믿었다.
● 능골.능리.능안
월계동 760~780번지 일대를 능골 혹은 능리(陵理),능안이라는 이름으로 부른다. 산 55번지에 이명의 신도비가 있고 750번지에 그의 무덤이 있기 때문에 붙여진 명칭인데 이조참판,우의정,좌의정을 거쳐 영중추부사를 지냈던 조선시대의 청백리인 이명의 무덤이 워낙 커서 능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군이나 대군, 임금의 경우만 신도비를 세웠기 때문에 신도비를 세울 정도면 대단한 인물이라는 뜻에서 능이라 불렀는데 그의 무덤 주변에 자리잡은 마을이라 하여 능골이라 했다.
능골은 녹천과 함께 월계동을 이루는 중심부락인데 각심부락과는 서로 이웃해 있다. 두 마을 모두 산제(山祭)를 지내고 있다.
이명(1496~1572)은 명종 때 나서 중종 때 죽었는데 윤원형이 일으킨 을사사화로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의 신원에 앞장섰던 사람이다. 청렴 결백하여 청백리로 선정되었는데 그의 신도비는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55호로 지정되어 있다. 화강암의 좌대석 위에 대리석으로 세워진 그의 신도비는 뚜껑돌 없이 윗부분이 둥근 반월형으로 되어 있다.
1937년 경춘선이 개설되면서 85번지에 성북역이 만들어졌는데 처음 이름은 연촌역이었다. 1963년 3월 5일 성북역으로 개칭된 이 역은 경원선과 경춘선 교외선 및 수도권 전동차가 정차하는데 당초에는 장위역이라는 명칭을 붙였다가 월계역으로 바뀌었다. 일본어로는 월계를 월경(月經)과 같은 겟게이」라고 읽으므로 발음관계상 옛 지명의 하나인 연촌으로 바뀌었다.
1938년 경원선이 개통되면서 성북역은 사실상 동북부 방향의 서울로 진입하는 관문이 되어 이를 중심으로 많은 시장이 서게 되었고 이 때문에 성북역 주변은 강원도 지방에서 수송되어 온 시멘트와 무연탄의 보관창고가 들어서게 되었다. 우이천을 건너 이웃한 장위동 주민들의 전답이었던 월계동이 번창하기 시작한 것도 경원선과 경춘선이 놓여 지면서였는데 버려지다시피 한 중랑천 서쪽 호안을 서울시에서 택지 정리하여 아파트단지를 건립하면서 일대의 면모를 달리하게 되었다.
● 중랑천
중랑천은 경기도 양주군 주내면 신북리 북쪽 계곡에서부터 시작되어 남쪽으로 흐르면서 의정부시의 광쟁이개울과 백석천(白石川)을 합치고 서원천(書院川)을 합한 물줄기는 다시 도봉구에 와서 한내[漢川]와 당현천(堂峴川) 등 18개의 지류를 갖고 있는 중랑천은 성수동과 금호동의 경계에서 한강으로 흘러들어 가는데 그 길이가 자그마치 45.3km나 되는 하천으로서 서울의 그 어느 하천보다도 길다. 현재 중랑천(中浪川)이라 부르고 있는 명칭 외에 시대와 지역적 특성에 따라 송계천, 중량포(中梁浦, 中良浦), 충량포(忠良浦) 등의 다양한 이름으로 불렸다. 먼저 송계천(松溪川)이라는 명칭은 냇물 동쪽에 송계원(松溪院)이 있는데서 연유되었음을 왕조의 기록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태종실록의「조선 태종 9년 5월에 태조의 제사를 올리기 위해 건원릉에 나가려 홍인문 밖에 이르렀을 때 앞선 신하가 살피고 돌아와 "송계원 서쪽천의 물이 넘쳐 건널 수 없습니다."라고 아뢰자 오던 길을 되돌아갔다」는 것과,「세종 2년 4월에 상왕(태종)이 철원 등지로 행차하려는 도중 송계원평에서 말을 멈추었다」라는 세종실록의 기록이다. 이로써 송계라는 중랑천의 옛 이름은 그 역사적 유래가 조선조 초기로 거슬러 올라감을 알 수 있다. 한편 중량천이나 충량포라는 이름들은 하천의 형세가 넓은 물가를 이루고 있는 특성에 따라 붙여진 이름들로 보여진다. 이들 모두는 일정한 표기를 갖고 있진 않으나 왕조실록과 동국여지비고, 대동지지 등의 기록에서 표기만 다를뿐 음이 비슷한 명칭으로 나타나고 그 위치도 동일한 지점이어서 송계나 속계, 중량포나 충량포는 다같이 중랑천을 일컬었던 명칭임을 알 수 있다.
조선 태조 이성계가 자신의 묘자리를 건원릉이라 칭하고 후손들도 장차 그곳을 장지로 삼으라 일렀다. 이에 5대 문종의 현릉에서 18대 현종의 경릉에 이르기까지 9개의 능을 이룬 게 오늘날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이 되었다. 이 동구릉을 참배한다는 명분으로 효종은 중랑천 부근의 넓은 모래사장에 자주 행차하였다는 기록이 전해온다. 그것은 병자호란 후 효종이 봉림대군이었을 시절에, 형 소현세자와 함께 심양에 8년간이나 볼모로 잡혀 있었던 그 굴욕을 씻고자, 북벌계획을 세우고 군을 정비하면서 북벌군의 군사훈련을 지켜보기 위함이었다. 이처럼 역사적 사연이 서려있는 울분을 풀기위한 곳으로도 이용되었던 중랑천에 얽힌 뒷얘기는 이외에도 많다. 동구릉이나 사릉, 광릉 등이 있어 역대 왕들의 능행이 잦았는데 이를 위해 특별히 석교를 놓았다는 기록이 전해온다. 그러나 흥선대원군이 경복궁 재건 시 송계교의 석재를 헐어 사용하는 바람에 고종 이후엔 능행길이 바뀌게 되었다는 얘기도 있다.
한편 예나 지금이나 서울에서 강원도 방면으로 나가는데 있어 교통연결에 큰 구실을 하고 있는 중랑교는 1934년에 가설된 것이지만 다리가 놓여 진 것은 조선 초기 훨씬 이전의 일이다. 이러한 중랑천을 둘러싼 풍취가 세종실록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온다.
夏龍同徵麥穗場(하룡동징맥수장) 여름 밭두둑에 바람 잔잔하니 밀 이삭이 널려있고
秋郊雨足稻花香(추교우족도화향) 가을 들판에 비가 흡족하니 벼꽃이 향기롭네.
一遊正合三豊望(일유정합삼풍망) 오늘의 한번 노는 일 농군들도 기뻐하는 것이
準擬豊登十月場(준의풍등십월장) 시월의 타작마당은 풍년이 틀림없겠네.
이는 당시 세종과 상왕이 송계 언덕에서 매사냥하는 것을 구경하고 중량포에서 점심을 들며 마련한 술자리에서 병조참의 윤회(尹淮)가 지은 것으로 상왕이 흡족케 했다는 7언절구시이다. 이런 기록이나 넓은 들판을 가로지르는 내라는 뜻으로 이름 붙여진 중량천(中梁川)의 표기로 보아 옛날 우리 중랑천변은 대단히 넓은 들판으로 한가롭고 풍광 좋은 농경지대였음을 익히 짐작할 수 있다.
건원릉에 모신 태조의 능 참배를 위해 태종이 수시로 행차하였는데 후대의 왕들도 자주 능행을 하면서 지금의 월릉교 밑에 묻혀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송계교의 중요성은 더욱 높아지게 되고 이에 따라 자주 보수를 하게 되었다. 송계교를 목교에서 석교로 개축할 때 인근 마을의 장정은 모두 부역으로 동원되었다.
▶ 부역자 중중이(仲伊) 이야기
부역자 중중이(仲伊)라는 사람은 눈이 먼데다가 열여섯살 되는 딸 하나를 데리고 사는 홀아비였다. 국가의 명이라 부역을 거역할 수도 없는 처지고 양주 관아에서 이미 수차례나 인원 점검을 해왔기 때문에 도망칠 수도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이를 알게 된 그의 딸은 자신이 아버지 대신 부역을 하겠노라며 양주 관아를 찾았으나, 처녀의 몸으로 돌 나르는 일을 할 수 없다하여 관아로부터 거절당했다. 그러나 이에 굴하지 않고 중이의 딸은 관아 앞에서 여러 날을 지새며 아버지 대신 부역시켜 줄 것을 간청하자, 관아로부터 드디어 부역 허가가 떨어졌는데 반드시 남장을 해야 하는 조건이었다. 그녀는 관아에서 시키는 대로 남장을 하고 참여했지만 문제는 생리현상이었다. 동료들과 일하다가도 배변 시는 앉아서 하기 때문에 별 문제가 없었지만 배뇨 시에는 남자들과 달리 앉아서 해야 하므로 금방 여자임이 탄로 날 지경이었다. 전전긍긍하던 그녀는 대나무를 잘라서 옷 속에 넣어 관을 통해 서서 배뇨를 할 수 있게 하고 가능한 한 수분섭취를 줄여서 배뇨 횟수를 줄이도록 노력하였다. 이런 눈물겨운 사연을 전해들은 양주 관아에서는 마침내 중이의 부역을 해제시킴으로써 중이를 대신해서 부역하던 그녀의 딸도 눈먼 아버지 곁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남자인 줄만 알고 지내던 동료들이 그를 중낭자(仲郎子)라고 불렀으나 그가 사실은 남장 여인이라는 것을 알고 난 다음부터 그녀를 중랑(仲狼)이라고 불렀고, 중랑(中浪)의 어원이 됐다는 이야기가 전해 오고 있다.
또한 조선초 변중량이 이곳에서 살았다하여 그의 이름을 따서 중량이라 불렀다는 설이 있다.
● 우이천
우이천은 중랑천의 제1지류로서 상류의 덕성여대 앞에서 대동천, 쌍한교 지점에서 가오천, 우이제3교에서 화계천 등의 지류와 각각 만나 지하철 6호선의 석계역을 지나 월릉교와 석관동 두산아파트 사이를 관통하여 중랑천으로 흘러 들어가는 하천으로서 중랑천 지류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크다.
도봉구 우이동 200번지 북한교에서부터 중랑천 합류지점까지 흐르는 이 하천의 현황은 유로연장은 8,330m, 하천의 폭은 평균 60m, 유로면적 49만 9,800㎡, 유역면적 27.43㎢의 물줄기다.
1983년 12월 하천정비기본계획이 수립된 이후 지속적인 정비가 계속되었으며, 1992년 12월 8.33㎞에 해당하는 범위의 하천대장이 작성되어 있다.
우이천의 지명인 우이(牛耳)는 이 하천의 상류에 있는 도봉산 한 봉우리가 소의 귀와 같은 형태로 자리잡고 있고, 북한산과 도봉산이 이어지는 소귀고개(牛耳嶺) 아래에서 흘러내리는 물길이라는 의미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부근의 동명인 우이동도 같은 이유에서 붙혀진 이름이다. 따라서 우이천을 다른 이름으로 ‘소귀내’라고도 불렀다.
하천 위에 가설되어 있는 큰 다리로는 쌍문동에 있는 쌍문교·쌍한교·수유교, 번동과 창동 사이에 있는 우이1교·번창교·우이제2교·우이제3교·신창교, 월계로에 있는 월계2교, 광운초등학교와 광운중학교를 연결하는 월계교, 장위동에서 광운대학으로 건너가는 장월교, 지하철 석계역 부근의 하천 복개지 아래 부분에 있는 기우천교 등이 놓여 있어 지역간의 이동을 원활하게 도와주고 있다.
이 하천의 상류지역 훼미리랜드 입구에 하천을 복개하고 주차장을 만들어 놓아 우이동길과 방학로를 따라 이곳까지 차량 진입이 용이하며 이곳부터는 걸어서 산에 올라야 한다. 하천을 따라 위로 곧게 올라가면 우이동 유원지를 거쳐 우이령에 다다르고 다시 우측으로 가면 도봉산 만장봉에 오를 수 있다.
그리고 주차장에서 좌측으로 그린파크 관광호텔을 지나 올라가면 도선사를 거쳐 북한산으로 올라갈 수 있어 등산로로서 서울시민들의 사랑을 한몸에 받고 있다.
또한 하천의 상류에 문화유적도 풍부하여 도선사·봉황각·손병희선생 묘 등이 자리잡고 있다.
● 내시 승극철 부부묘
초안산 분묘군에 있는 조선 후기 내시 승극철 부부의 묘.
조선시대 내시하면 대표적으로 떠오르는 인물이 자그마치 세종, 문종, 단종, 세조, 예종, 성종, 연산군까지 7대 왕들은 모셨던 조선시대의 최고의 내시로 불리는 김처선 인물이다. 이 밖에 조치겸, 도금표, 승극철, 양반가의 자손으로 태어났지만 가난 때문에 스스로 내시가 된 정한수 등 많지만 이름도 없이 음지에서 살다간 내시들, 죽어서도 왕이 계시는 궁궐을 향해 묻혀 있는 내시들의 묘다
승극철(承克哲)은 내관을 지낸 연양군파(延陽君派)의 시조 김계한(金繼韓)의 손자로 내시부 상세(尙洗)[내시부 종6품직]를 지냈다. 내관들은 양자로 대를 잇기 때문에 손자의 성이 다르기도 하다. 승극철의 출생 및 사망 연대는 알 수 없다.
묘는 쌍분으로 좌향은 서향이다. 묘표, 혼유석, 상석 등을 갖추었다. 묘표는 원수형(圓首形)의 2면 비이고, 비좌는 별다른 문양이 없다. 크기는 비신 51.5×16.5×117.5㎝, 비좌 88×33.5×57.5㎝이다.
묘표의 비신 앞뒷면에 명문이 남아 있다. 앞쪽에는 ‘통훈대부 행내시부 상세승공극철양위지묘(通訓大夫行內侍部尙洗承公克哲兩位之墓)’라 새겨져 있다. 뒷면에는 ‘숭정기원후갑술삼월일립(崇禎紀元後甲戌三月日立)’이라 새겨져 있어 1643년(인조 12)에 묘표를 세웠다고 알려져 왔으나, 최근 국사편찬위원회 서울특별시 사료조사위원인 박상진에 의해, 『승정원일기』 등을 확인한 결과 초안산 자락인 매봉산 정상 녹천정 아래 위치한 내시부 상세 승극철의 묘비는 비의 기록[1634]보다 60년 뒤인 1694년 또는 그 이후 세워졌을 것이라는 의견이 제기되었다. 박상진의 의견에 따르면, 승극철 관련 기록은 『승정원일기』에서만 세 건이 확인된다.
모두 숙종 대인 1676년과 1682년, 1686년에 각각 승극철이 ‘존호 옥보 차비’·‘주방’·‘주사 내관’ 등의 자격으로 종묘의 하향 대제 등 왕실 행사에 참여하였다가 아마(어린말) 한 필씩을 하사받았다는 기록이다.
이를 통해 승극철은 인조 때가 아닌 숙종 때 활동한 인물이며, 사망한 해도 1687년 이후부터 비가 세워졌을 1694년보다 1년 앞선 1693년까지의 기간 사이로 추정된다고 한다. 이러한 오류는 1694년 비를 세울 당시 석공이 ‘재(再)’ 자를 빠뜨렸거나 당시 내관 대부분이 제대로 된 족보나 사대부처럼 일대기를 기록한 행장(行狀)이 없는 탓에 후대에 비를 세우면서 이 같은 오류가 생긴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초안산 일대에는 수많은 내시 무덤이 있었고, 일제 강점기까지도 동네 주민들이 내시들의 제사를 지내 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현재는 대부분 묘비가 없고 봉분의 흙이 깎여 나가 상태로 주인을 확인할 수 없다. 승극철 부부 묘는 초안산 근린공원 안에 밀집되어 있는 조선 시대 내시 묘 중에서 그 형태와 주인을 알 수 있는 묘라는 점에서 생활사 연구의 중요한 자료라 할 수 있다.
초안산은 예안이씨, 광산김씨 등 양반 및 내시 묘분들이 많이 조성되어 있으며 6.25전쟁 이후 이곳에 아카시아 나무 씨앗을 2가마니 정도를 뿌렸다고 한다. 리기다소나무, 참나무(6종류가 있다고 함), 싸리나무, 잣나무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 정간공 이명
정간공 이명(1496~1572)은 조선 초 중종 23년(1528)에 과거에 급제하여 명종 때 우의정, 좌의정, 영중추부사 등을 지냈다. 성품이 단정하며 직무에 충실하였을 뿐만 아니라, 자기의 올바른 주장은 절대로 굽히지 않았다. 일생을 청백리(淸白吏)로 지내다가 선조 5년(1572)에 77세로 세상을 떠났다. 세상을 떠난 후에 국왕은 ‘정간(貞簡)’이라는 시호(諡號)를 내렸다.
명종 때 문정왕후 윤씨 일가가 세도정치를 펼 때에도 왕에게 충언을 하여 백성들을 구휼하는데 최선을 다해서 그의 강직함을 기리는 신도비를 세울 정도였다고 한다. 월계동은 능골이라는 옛 이름이 있는데 이명의 묘가 너무 커서 불러진 지명이라고 한다.
월계동 이명 묘역 부근의 마을을 '능골'이라고 부르는데 전일에 정간공 이명의 무덤이 매우 커서 능(陵)처럼 보였고, 신도비를 세울 정도면 큰 인물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이명의 자는 요서(堯瑞), 호는 동고(東皐), 본관은 예안(禮安)이다. 연산군 2년(1496) 4월 19일 연산현감(連山縣監) 이보간(李輔幹)의 아들로 태어나 중종 20년(1525) 사마시에 합격했고, 1528년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권지(權知), 예문관 검열(檢閱) 등을 거쳐 성균관 전적(典籍)으로 옮겼으며, 다시 병조·예조좌랑이 되었다. 1536년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왔고, 이듬해 사헌부 지평(持平), 호조 정랑(正郞), 시강원 필선(弼善), 1538년 홍문관 교리(校理) 등을 지냈으며, 1539년 북도(北道)에 흉년이 들자 이를 구제하기 위해 나갔다. 그 뒤 홍주목사와 담양군수로 나아가 치적을 쌓았고, 그 뒤 전한(典翰)에 임명되고 얼마 뒤 직제학(直提學)으로 승진하여 동부승지ㆍ우부승지를 지냈으며, 1547년 대사간, 1548년 부제학에 임명되었다.
1550년 춘추관·성균관 동지사(同知事)를 겸임하였고, 그해 겨울 황해도 안렴사(按廉使)로 나갔으며, 1552년 대사헌에 임명되나 언사(言事) 문제로 파직되었다. 1553년 이조참판을 거쳐 이조·호조·공조판서, 1557년 의정부 좌참찬으로 세자빈객(世子賓客)을 겸임했다. 1559년 우찬성이 되었고 1561년 좌찬성으로 옮겨 명종 19년(1564) 대광보국숭록대부에 올라 우의정이 되었다. 이듬해 70세 때 왕으로부터 궤장( 杖)을 하사받았고 그 해 가을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었다. 1566년 좌의정이 되었고 그 뒤 퇴직을 요청했으나 윤허되지 않았다. 이듬해 명종이 승하하고 선조가 즉위하자 간곡히 사직을 주청하여 영중추부사로 물러났다가 선조 5년(1572) 8월 6일에 77세로 사망했다. 그 해 10월 양주(楊州) 서쪽 해촌(海村)의 예안이씨 선영에 묻혔다. 시호는 정간(貞簡)이다.
부제학 시절인 명종 3년(1548) 이기(李芑)가 정권을 휘두르면서 선비들을 핍박하자 대사헌 구수담(具壽聃)과 함께 의(義)를 주장하며 이를 배척하였고, 이조참판 시절인 명종 8년에는 위험을 무릅쓰고 을사사화(乙巳士禍) 때 억울하게 죄를 뒤집어쓴 사람을 구제하라고 주청하기도 했다.
● 신도비
신도비는 선조 7년(1574) 5월 묘역에 건립되었다. 화강암제 대좌(臺座) 위에 대리석제 비신(碑身)을 얹은 형태인데, 대좌 윗면에 연꽃무늬를 새기고 옆면에 안상(眼象)을 새겼다. 비문은 외아들 이응로(李應老)의 부탁으로 이조판서 김귀영(金貴榮, 1519∼1593)이 지었고 비문과 머리전서[頭篆] 글씨는 병조좌랑 심충겸(沈忠謙, 1545∼1594)이 썼다. 신도비 북쪽의 산중턱에 위치한 묘소에는 문관석 2기, 석등 1기, 묘갈 1기, 망주석 2기의 석물이 있다. 이밖에 이명의 묘소 남쪽의 건너편 산줄기에는 그의 증조부·조부·부친의 묘가 위아래로 가지런히 위치하고 있다.
출처 위키백과
● 각심재
1930년대에 지은 것으로 보이는 개량한옥으로, 일제시대의 대표적인 건축가 박길용(1898∼1943)이 설계했다고 전한다. 원래는 경운동에 있던 것을 1994년 지금의 장소로 옮겨지었다. 원래 건축주가 두 아들에게 한 채씩 주기 위하여 지은 집이라고 하며, 민익두 가옥이 앞채이고 이 집이 뒤채에 해당한다.
네모반듯한 집터의 동쪽에 대문이 있고, 안마당으로 들어가면 H자형의 건물이 있다. 중심축에 부엌·대청·건넌방·사랑방이 있으며, 부엌 앞쪽으로 안방이 있고 뒤쪽으로 뒷방이 있다. 반칸 너비의 툇마루를 두어 동선을 연결하였다. 사랑방의 앞쪽에는 누마루를, 뒤쪽에는 현관마루를 마련하였다. 마당 남쪽 담장 밑에는 작은 화단을 가꾸어 놓았다.
현관과 화장실·목욕탕을 건물 내부에 설치하고 이들을 연결하는 긴 복도를 둔 점, 유리창을 단 점 등은 이 시기 개량한옥의 모습을 잘 나타내고 있으며 주택의 변천사를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각심재 뒷산으로 조금 오르니 정간공 부부 묘소가 있었다. 묘역 입구에는 문인석이 두 개 좌우에 있고, 묘비와 상석이 마련되어 있었다.
● 비석골(석인상 전시공원)
이 공원은 노원구청에서 2008년부터 10개월여의 공사 끝에, 문인상(文人像) 13기, 동자상(童子像) 6기, 망주석(望柱石) 8기, 비석(碑石) 2기, 상석(床石) 2기 등 총 31기의 석인상(石人像)을 한 곳에 모아 전시하고 있다.
이 석인상은 문화유산 보호와 교육적 가치가 높은 데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월계동 염광학원, 공릉동 경춘선 철로변, 수락산, 불암산, 상계동 도선사 입구 등에 흩어져 있던 것들을 이곳에 한데 모아 놓은 것이다.
● 치성제
영의정 이유 대감은 세종대감의 다섯째 아들 광평대군 ‘이여’의 후예다. 24세에 문과에 급제했던 문인이다. 우의정, 좌의정 그리고 영의정까지 지냈다. 북한산성 수축공사의 대역사를 마무리했다. 이 대감이 벼슬을 끝내고 말년을 경치 좋고, 한적하고 조용한 곳에서 살고 싶어 찾아다니시다가 찾아낸 곳이 녹천마을이었다.
정년은급으로 하사받은 땅은 주민들에게 나누어 주고 소작을 하게 했다. 주민들은 해마다 녹천대감 치성제를 지내고 있다. 녹천대감을 기리는 치성제는 마을 공공의 제사로 발전하였고 치성제 터로 월계 2동 4-2 마을 뒷산, 초안산 자락이 되었다. 1년에 세 번 제사를 지낸다. 음력 2월 초하루, 6월 초하루, 그리고 10월 초하루다. 치성제의 신주(神主)로는 녹천대감을 모시고 그의 생신날 음력 2월 16일에 면국수, 산적 등 제사 음식으로 간소하게 지내고 있다.
● 상궁박씨
가의대부(嘉義大夫) 김국표(金國杓)가 지은 비문에 의하면, 박 상궁은 1706년(숙종 32)에 태어나 1726년(영조 2)에 궁녀로 선발돼 대궐에 들어갔으며, 1740년(영조 16) 봄에 궁녀 최고위직인 정5품 상궁(尙宮)에 제수됐다. 이후 영조를 비롯한 왕실 가족을 모시다가 1763년(영조 39) 1월30일(이하 음력) 58세로 죽어 같은 해 2월6일 선영(先塋)인 양주(楊州) 남면(南面) 해동촌(海東村) 각심사(角心寺) 손좌(巽坐ㆍ남동방)의 언덕에 장사지낸 것으로 적혀있다. 비문은 박상궁이 "성품이 단정하고 지혜로웠으며, 충심으로 윗전을 받들었고, 사랑으로써 아랫사람을 대했다"면서 "누대에 걸친 선영에 비석을 세우니, 종족(宗族)과 향당(鄕黨)에서 칭찬을 받았다"고 했다. 그의 묘역 왼쪽에는 박상궁의 증조부인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박근후(朴根厚)의 묘비가 함께 서 있다.
노원구 월계로 맞은편 산자락에 위치한 ‘상궁 박씨(尙宮朴氏’)묘비가 선조 32년(1599년)에 세워져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조선시대 상궁(尙宮) 묘비(墓碑)인 것을 확인했다. 또 ‘상궁 개성박씨(開城朴氏)’ 묘비가 비문이 남아있는 국내 궁녀 묘비 3기 중 하나다.
상궁박씨(尙宮朴氏) 묘비는 높이 111cm, 폭 42cm, 두께 16cm인 비신 앞면에 해서체로 ‘상궁박씨지묘(尙宮朴氏之墓)’가, 뒷면에는 ‘만력이십칠년기해오월일립(萬曆二十七年己亥 五月 日立)’이라 각각 새겨져 있었다. 서울여대 이원명 교수는 “이 비(碑)의 조성연대는 만력 27년 선조 32년(1599년)으로, 현존하는 8기의 궁녀 묘비 중 가장 오랜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 현재 초안산 아파트 뒤에 위치한 ‘상궁 개성박씨(開城朴氏)’묘비에 대한 조사결과 박상궁 묘비가 현재 은평구 진관동 이말산의 상궁옥구임씨 묘표, 경기도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상궁안동김씨 묘표와 함께 ‘비문’이 남아있는 단 3기의 궁녀 묘비로써 조선후기 궁녀사 연구에 보조 자료로서 뿐 아니라 문화재로써의 가치가 매우 높다는 것을 발견했다.
비신 앞면에 ‘조선국상궁개성박씨묘(朝鮮國尙宮開城朴氏墓)’라는 글씨를 새겼으며, 뒷면과 오른쪽 측면에는 그의 생애를 138자로 묘사했다.
비문은 박상궁이 “성품이 단정하고 지혜로웠으며, 충심으로 윗전을 받들었고, 사랑으로써 아랫사람을 대했다“면서 “누대에 걸친 선영에 비석을 세우니, 종족과 향당에서 칭찬을 받았다”고 했다.
비의 형태는 조선 후기 양식의 특징을 보여주는 원수형(圓首形) 2면비(二面碑)로 부러진 비신의 총고는 124.3cm, 높이 98cm, 폭 48cm, 두께12cm이고 머릿돌은 높이 26.3cm, 폭 47.5cm이다.
박상궁은 영조 2년에 궁녀로 선발되어 영조 16년에 봄에 상궁에 제수되어 영조 39년에 향년 58세로 죽었다. 상궁(尙宮)은 조선시대 내명부의 하나인 궁녀의 정5품 벼슬이었다.
노원구 관계자는 “두 묘비가 조선후기 궁녀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서 뿐 아니라 문화재로서 가치가 매우 높다고 판단되어 서울시에 문화재로 지정해 줄 것을 건의했다”며 “내시와 궁녀라는 독보적 문화자산을 보존하고 지속적으로 연구, 발전시켜 나가겠다.”고 말했다. (노원신문 보도자료)
● 오패(벽오)산
번동과 미아동과의 경계를 이루는 벽오산은 빡빡산, 오패산, 매봉짜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린다. 빡빡산이란 명칭은 벌리에서 미아동으로 넘어가는 곳을 1960년대 말 교원택지를 조성하면서 나무를 모두 베었기 때문에 붙여졌다. 아랫벌리 남쪽 일대 산은 수목이 울창하였는데 조선 철종 때부터 벽오산이라고 하였다.
▶ 오동근린공원
오동근린공원은 오패산(123m)과 벽오산(135m)이라는 두 봉우리로 이루어졌는데 오패산은 일명 벽오산으로도 불리며 예부터 오얏나무가 많이 자생하여 집집마다 울타리로 삼을 정도였다고 전해지며, 벽오산은 이 곳에 오현(梧峴)이란 고개이름에서 유래된 것으로, 조선시대 철종임금의 비 철인왕후가 친정 손자인 김석진에게 '벽오산(碧梧山)'이란 글씨를 하사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오동공원이 위치한 강북구 번동은 18세기 중엽 정선이 그린 "도성대지도"와 김정호가 그린 "대동여지도"에 벌리(罰里)로 표시되어 왔으며 갑오개혁때 동서숭신방(성외) 동소문외계번리로 되어 있습니다. 이때 벌리(罰里)가 번리(樊里)로 바뀐 것 같다고 추정하고 있다.
● 번동의 유래
번동이라는 동명의 유래를 살펴보면 고려시대에 씌여진 "윤관비기"라는 책에 "李氏가 한양에 도읍하리라"는 비기설이 있었는데, 고려 말기의 왕과 중신들이 이 설에 의거 경계를 하던 중, 한양 삼각산 아래 이곳에 오얏나무가 무성하다는 말을 듣고 李氏 가 흥할 징조라 여겨 오얏나무를 베기 위해 벌리사를 보냈는데 이로부터 이곳을 벌리(伐里)라 칭하다가 번리(樊里)가 되었다고 한다.(문화재지표조사보고서, 한강문화재연구원, 2008)
오동근린공원의 면적은 총 1,338,260㎡이며, 강북구 번동과 미아동, 성북구 월곡동 일대에 걸쳐 있다.
● 창녕위궁재사(昌寧尉宮齋舍)
등록문화재 제40호
창녕위궁재사는 조선조 23대 순조(純祖)의 둘째 따님 복온공주(福溫公主 1818~1832)와 부마인 창녕위(昌寧尉) 효정공(孝貞公) 김병주(金炳疇 1819~1853)의 묘소재실(墓所齎室-齎舍)로서 정면 2칸, 측면 2칸의 단층 목조와즙 건물로 목조 기와집이며, 이를 창녕위궁 이라 부르고 있다.
● 복온 공주
1818년11월24일(순조18년 음력10월26일) 조선의 제23대 왕 순조와 순원왕후의 차녀로 태어났으며. 효명세자(문조)와 명온공주의 동생이며, 덕온공주의 언니이다.
1824년11월10일(순조24년 음력 9월20일) 7살 때 정식으로 공주에 책봉되어 복온공주(福溫公主)라고 하였고 13살 때인 1830년 4월20일(순조30년 음력 3월28일) 삼간택을 거쳐 부사과를 지낸 안동 김씨 김연근의 아들 김병주와의 혼인이 결정되었으며, 김병주는 창녕위에 봉해졌다.
5월20일(음력 4월28일) 정식으로 혼인하였는데 공주는 혼인 2년만인 1832년 6월10일(순조32년 음력 5월12일) 15세의 나이로 요절하고 말았다.
순조는 현종의 딸 명안공주의 예에 따라 장례를 거행하게 하였으며, 조정의 관원들에게 장례에 미진한 부분이 없도록 할 것을 명하였고. 또 성복을 하는 날에는 순조가 직접 공주의 집에 행차하여 슬픔을 달랬으며 복온공주가 일찍 사망한 관계로 소생은 없다
복온공주가 가례 이후 2년도 채 안되어 세상을 떠나 자식이 없자 종형인 김병교(金炳喬)의 아들인 김도균(金道均)을 후사로 삼았다. 하지만 역시 자식이 없어서 제사는 손자로 승중(承重)한 김석진(金奭鎭, 1843~1910)에 의해서 행해졌고. 김석진은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 도총관(都摠官)을 지냈는데, 1907년(고종 44)에 대한제국 군대가 해산된 뒤, 이곳으로 들어와 거주하다가 그 뒤 1910년에 일제가 주는 남작 작위를 거절하고는 이곳에서 순국자결 하였다.
▶ 삼해주 제조법
복온공주가 안동 김씨 집안으로 시집을 갈 때 고려 시대부터 내려오던 궁중 술의 한 종류인 삼해주의 제조법을 가지고 간 후, 대대로 안동 김씨 집안에서 삼해주의 제조법을 계승하게 되었고. 삼해주는 1993년 2월13일 서울특별시 무형문화재 제8호로 지정되었다.
▶오천(梧泉) 김석진(金奭鎭)
오천 김석진은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당시 척화대신 김상헌의 후손이며 순조 임금 딸(복온공주)과 창녕위 김병주의 손자이다.
과거에 급제하여 종4품 진도군수, 정3품 전라도절도사, 정2품 대제학에 이어 정1품 영의정으로 승진하여 의효전 향관을 겸임했다 명성황후가 시해되자 벼슬을 버리고 양평의 남한강 강변에 사안당(思安堂)을 지어 은거했다
공조판서인 민영우가 월미도를 일본에 팔아버렸다 김석진은 ‘오늘에 한 섬을 팔고 내일에 한 섬을 판다면 한 섬도 남지 않아 장차 한 나라를 다 없앨 것입니다’고 매국노 민영우를 규탄했다
김석진은 사직겸진소회재소(辭職兼陳所懷再疏)에 심경을 밝히고는 박제순 이완용 이근택 이지용 권중현 등 을사오적을 처형하여 쓰러진 국헌을 바로잡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을사토역소’를 올렸다
<을미국변에 자결하지 못하고 또다시 한 목숨을 구차히 보전해, 주리면 먹고 목마르면 물 마시어 조금도 예사 사람과 다름이 없사오니 타고난 양심이 어찌 이에 이르렀습니까? ~ 신처럼 임금의 성은을 편중하게 입은 자로서 비록 먼저 하찮은 목숨을 버리지 못하였을망정 어찌 차마 사모를 쓰고 다시 벼슬길을 찾겠습니까?>
‘매국노들과 한 하늘로 머리를 들고 다닐 수도 없는데 하물며 어깨를 나란히 하고 한 줄에 설 수 없다’며 순종 황제의 황후인 순명황후의 제사를 지내는 의효전향관(懿孝殿享官)에서 물러났다 김석진은 을사오적 이지용과 함께 33세에 요절한 순종 황제의 정비인 순명황후의 의효전향관으로 임명됐다
1910년 8월 일제는 한일병합 조약을 체결하고 김석진에게 '남작' 작위를 수여하며 회유했다 김석진은 서울시 강북구 번동 창녕위궁재사에서 나라를 빼앗긴 치욕을 참지 못하고 9월 8일 68세의 나이로 아편을 먹고 자결했다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됐다
고려왕조의 마지막 충신인 ‘정몽주’, 병자호란 당시 삼학사로 절개를 지킨 ‘오달제’, 을사늑약에 항거하며 자결한 ‘민영환’, 대한제국의 마지막 충신 ‘김석진’ 등은 경기도 용인 출신으로 한국민속촌 충현서원에 4인의 위패가 모셔졌다
※ 상기 내용은 수집된 자료를 수정 편집한 내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