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환기의 갈림길, 고려의 충신이냐 조선의 공신이냐
도현철(연세대강사)
고려 후기 사대부 앞에놓인 두길
조선왕조의 건국을 둘러싸고 고려 후기 사대부는 정치적 행보가 달랐다. 우리나라 유학의 종장이라는 이색, 선죽교에서 맞아 죽은 정몽주, 이승인 등 많은 사대부들은 고려에 절의를 지켰다. 성씨 문중에서 흔히 자랑스러운 조상으로 받드는 두문동 72현도 같은 길을 간 사람들이다. 후대 사람들은 이들을 절의를 다하여 인간이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윤리도덕에 충실했던 인물로 평가하였다. 반면 고려말 최고의 경세가라는 정도전과 조준, 그리고 윤ㅅ종 등은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는 신념으로 무너져가는 고려왕조를 근본적으로 부정하고 새 왕조 조선을 세웠다. 이들은 부정과 비리를 저지르는 권세가를 비판하고 정적을 가차 없이 숙청하면서 백성을 위한 정치를 하려고 했다.
비슷한 시기에 주자학이라는 신사상을 이념으로 받아들인 사대부들이 고려 말이라는 시점에서 현실 정치에 참여하면서 한 쪽은 고려를 지키려는 수성파 사대부로, 한 쪽은 새로운 왕조를 세워 개혁을 하려는 창업파 사대부로 나눠지고, 궁극에 가서는 고려의 충신과 조선의 공신으로 갈라지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사대부의 정치와 경제에 관한 논리
사대부에게는 정치. 경제 운영에 대한 견해 차이가 있었다. 우선 누가 정치 운영의 주체가 되느냐, 인재를 어떻게 선발하느냐하는 점에서 차이가 있었다. 이색. 정몽주 등은 기존의 인재 등용법인 음서제와 좌주문성제에 찬성하였다. 음서제란 조상이 끼친 음덕으로 그 후손은 과거에 합격하거나 특별한 공이 없어도 관리가 될 수 있는 제도이고, 좌주문생제란 과거에서 시험관인 좌주와 문생이 뒤에도 부모. 자식 관계처럼 돌봐주고 받드는 관습이다. 이색은 15살 때 아버지의 음덕으로 별장이 되었고 이색 계열의 한수, 우홍수 등도 음직을 받아 출세의 발판으로 삼았다. 음서제를 실시하면 고급 관리의 자손은 어려서부터 관리가 될 수 있었고, 그렇지 못한 다른 관리들보다 고위직에 빨리 오를 수 있었다.
또한 이들은 좌주문생제에도 찬성하였다. 이색 계열의 사대부는 좌주를 중심으로 문생을 세력화하여 자신들의 정치적 입지를 확대하는 데 이용하였다. 이색은 좌주와 문생을 부모와 자식의 관계와 같은 것으로 보고 그들 사이의 사적인 은혜와 의리가 국가의 원기를 배양한다고 하였다.
반면에 정도전과 같은 창업파 사대부는 음서제와 좌주문생제에 대하여 부정적이었다. 이들은 권세가 가문과 혈연적인 관계를 맺지도 않았고 다른 사적인 인연도 없었다. 관직에 나아갈 때에도 좌주문생제의 혜택을 받지 못하였다. 윤소종은 이승인. 권근 등과 더불어 이색의 문생이었으나, 이승인. 권근이 우왕. 창왕대에 요직에 있었던 것과 갇ㄹ리 윤소종은 향리에 내려가 있거나 한직에 머물렀다. 조선의 개국공신이 도니 남재는 공민왕 20년 과거에 합격하였지만 종 9품 벼슬에 9년간이나 머물러 있어서 장인에게도 예를 갖추지 못하는 형편이었다.
그래서 정도전은 좌주문생 관계를 “공적인 선발로서 사사로운 은혜를 삼는 것”이라고 비판하였다. 이들은 경제제도 특히 토지제도를 어떻게 다룰까 하는 점에서 방법상 차이가 있었다. 고려시대는 요즘처럼 화폐가 널리 사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국가가 관리들에게 봉급을 주는 방법도 요즘과 달랐다. 국가는 토지 주인에게서 생산물의 일정량을 토지세로 거두었는데, 관리들에게 그들의 지위, 직책에 따라 규정된 토지의 세금을 거둘 권리를 나누어 주었다. 이렇게 나누어 준 토지를 사전이라 한다. 관리 개개인이 토지 주인에게서 직접 토지세를 거두어 갖는 것이었다. 그런데 무인정변 이후 토지제도 운영이 법대로 되지 않았다. 권세 있는 자들은 사전을 자손에게 불법적으로 세습시키고 힘없은 농민의 토지를 강제로 빼앗을 뿐 아니라, 농민들에게서 규정 이상의 토지세를 3~4번, 심지어 8~9번까지 내기도 했다. 그 결과 농민 생활이 곤궁해지고 국가 재정도 점점 어려워졌다.
이에 대하여 이색과 권근 등은 농민이 곤궁하게 되는 이유가 하나의 토지에서 1년에 여러 번 세금을 거두는 데 있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농민의 곤궁을 해결하기 위해서 사전 주인을 규정대로 잘 가려서 1년에 한 번씩만 세금을 거두면 된다고 하였다. 반면 조준 등은 관리들에게 사전을 나누어 주는 제도 자체를 혁파하고자 하였다. 이들은 기존의 사전을 전부 없애고 경기에만 지급한다는 원칙에서 다시 분배해야 된다고 하였다. 이는 관리 개개인이 농민에게서 직접 세금을 거두는 사전을 축소하는 가운데 국가의 조세수취권을 강화하는 것이다. 이를 통하여 수조권에 의한 중간 수탈을 없애고 농민 생활을 안정시키려는 것이다.
이러한 차이는 이들의 경제적 이해 기반과 무관하지 않다. 사대부들은 지배층이고 대개 지주였지만 그들 간에는 차이도 컸다. 이색과 같은 수성파 사대부는 상대적으로 경제생활이 윤택했다. 이색은 한산, 면주, 여흥, 광주, 덕수, 장단, 개경과 유포, 적제촌 등 10곳에 토지를 소유하였다. 또한 그는 아버지에게서 상속받은 토지와 자신이 직책에 따라 받은 사전이 있었고, 홍건적이 침입했을 때 안동까지 공민왕을 시종한 공으로 1등 공신이 되어 토지 100결, 노비 10명을 받았다. 처음에는 중소 지주 출신이었지만, 이제는 대토지 소유자이자 중앙 정계의 권력자가 되었던 것이다.
반면에 정도전과 같은 창업파 사대부는 같은 지배층으로서 과거나 군공으로 중앙 정계에 진출하였지만, 그에 상응하는 정치적. 경제적 혜택을 받지 못하였다. 국가의 재정이 바닥나서 봉급마저 지급되지 않았고 직책에 따라 받은 사전조차 권력자에게 빼앗기기도 했다. 정도전은 우왕 초에 나주 지방의 거평부곡에서 3년간 유배 생활을 하고 선향인 영주와 생가인 삼봉을 왕래하면서 4년을 보냈으며, 그 뒤에 유배가 완화되어 서울 근교에 오게 되었다. 이때 그는 띠 풀로 집을 짓고 스스로 밭갈이도 하였다. 그의 부인은 집안 사정의 어려움을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당신은 평일에 부지런히 독서하느라 아침에 밥이 끓든 저녁에 죽이 끓든 간섭하지 않아, 집안 형편은 경쇠를 걸어 놓은 것처럼 한 섬의 식량도 없고 아이들은 방에 가득해서 춥고 배고프다고 울었습니다. 제가 끼니를 맡아 그때그때 어떻게 꾸려나가면서도 당신이 독실하게 공부하시니 뒷날 입신양명하여 처자가 우러러 의지하고 가문에는 영광을 가져오리라고 기대했습니다. 그렇지만 끝내는 나라 법에 저촉되어 이름은 욕스럽게 되고 몸은 남쪽 변방에 귀양을 가며, 형제들은 나가 쓰러져서 가문은 흩어져 세상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 것이 이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정도전은 사대부였지만 집안 형편은 매우 어려웠던 것이다.
두 파 사대부의 사상적 차이
이 시기 사대부가 정치 현장에서 두 파로 나누어지게 된 것은 사상 차이에서 기인한다. 이들은 유학자로서 주자학을 이념으로 받아들이고, 주자학에서 제시하는 질서를 지향하였다. 원래 유교의 예를 구성하는 원리로는 혈연관계를 중시하는 친친(親親)과 인위적인 인간관계를 중시하는 존존(尊尊)이라는 두 측면이 있다. 앞의 것은 혈연을 매개로 한 가족 관계를 중심으로 사회 간계를 설명하고 혈연에 의한 인정이나 사사로운 정감을 중시한다. 뒤의 것은 혈연보다 인위적이고 2차적인 인간관계를 중심으로 사회관계를 설명하고 공공성을 강조한다. 이 두 측면은 결합되어 있지만 강조점의 차이는 있다.
수성파 사대부능 혈연을 매개로 하는 가족 중심의 인간관계를 중시하였다. 중국의 한나라 때 요서 지방을 방비하던 조포라는 관리가 있었다. 이민족이 침입하여 어머니와 처자식이 인질로 잡히자 이민족을 공격하여 격퇴시켰으나, 그의 어머니와 처자식의 장례를 치르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에 대하여 이색의 아버지인 이고은 조포가 ‘어머니를 죽이면서도 공적을 세우는 것이 충이라는 것만 알았지 자신을 보전하며 어버이를 섬기는 것이 효라는 것을 몰랐다’라고 비판하였다. 자신을 보존하며 어버이를 섬기는 것이 진정한 효라는 것이다.
그에 의하면 조포는 관직을 버리고 인질로 잡힌 어머니를 구해 은둔하여 섬기는 것이 합당하다는 것이다. 즉 국가의 공적인 관계, 혹은 군신 관계보다는 혈연을 매개로 한 부모와 가족 관계가 우선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에서는 대의보다 사적인 인정을 강조한다. 이색의 제자인 이승인은 어머니의 상을 당하여 상중에 있었으나 시험관이 되었다. 그 이유는 늙고 병든 아버지가 생전에 아들의 영화를 보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원래 상중에는 벼슬에 나갈 수 없었고, 국왕이 명령하는 경우에만 벼슬할 수 있었지만, 이승인은 이를 어기고 아버지의 뜻을 따랐던 것이다. 이는 부모의 뜻을 따르는 효자의 마음, 곧 혈연에 입각한 인정을 중시하는 것이다. 이러한 태도는 가족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국가 사회에까지 확대되었다.
이와 달리 정도전과 같은 사대부는 주자학을 통하여 국가의 공적 관계, 사회적 명분을 중시하였다. 이들은 (춘추) 의 ‘대의는 부모, 자식 관계에 앞선다’는 명분을 ‘선’으로 내세우면서 사적인 인정에 치우치는 것을 ‘악’이라 하여 공적 의리를 중시하였다. 따라서 당연히 혈연 가문을 중시하는 음서나 인적으로 결합하는 좌주문생제(座主門生制)를 비판하고 능력 위주로 인재를 등용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들의 차이점은 임금과 신하의 관계를 어떻게 이해하느냐는 군신관과, 현실 정치의 문제점을 어떻게 해결하는냐 하는 점에서도 나타난다. 이색 계열의 수성파 사대부는 절대적인 군주관을 견지했다. 사회적 관계는 의리로 맺어졌기 때문에 의리가 맞지 않으면 언제든지 떠날 수 있다. 그러나 혈연으로 맺어진 관계로 비유된 인간관계, 불변의 관계로 파악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혈연관계로 비유된 임금과 신하의 관계는 절대 불변의 인간관계가 되므로 영원하고 변경할 수 없는 관계가 된다. 이들은 이미 주어진 군신 관계를 어떠한 여건에서도 받아들이고 지키려 하였다. 선왕인 공민왕의 말에 복종해야 했고 군주에 대한 충성은 절대적이었다. 이들이 많은 문제점을 보면서도 결국 고려왕조를 부인하지 못하고 충신으로 남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이와 달리 정도전과 같은 창업파 사대부는 주자학의 대의명분에 충실하였다. 이들은 ‘대의’라는 명분을 내세우며 혈연적이고 사적인 가치관을 비판하였다.
과거 춘추시대의 역사적 사례를 통하여 신하의 왕위 찬탈에 관한 시시비비를 가리고 엄정하게 평가하였다. 군주는 존재하는 그 자체로서 충성의 대상이 되는 것이 아니라 대의명분에 합치될 때에만 정통이며 충성해야 한다는 것이다. 유교경전에 나오는 천명사상이나 맹자의 역성혁명론을 역설하고, 왕이 존립할 수 있는 근거가 무엇인가를 논의의 초점으로 삼았다. 동양 고대의 대표적 성군이라는 탕 임금이나 주나라의 무왕을 이상군주로 제시하였다.
혈연으로만 보증되는 군주상에 만족하지 않고 천명과 인심에 순응하는 군주상을 원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들은 명분에 맞는 정통의 군주를 원하게 되고 이에 어긋난다면 이를 정정하고 바꿔야만 했다. 그래서 유교의 명분론과 춘추대의에 비춰볼 때 우왕이 왕이 아니라고 주장하였고, 따라서 명분에 맞지 않은 우왕과 그의 아들로 왕위에 오른 창왕을 물러나게 했다.
나아가 명분에 맞는 군주의 즉위와 새로운 군신 관계를 도모하였다. 이러한 명분론은 혈연을 기조로하는 고려의 예론과 배치되므로 고려에 대한 비판은 근원적일 수밖에 없었다. 결국 고려를 부정하는 논리가 나왔던 것이다. 정도전과 같은 사대부가 고려의 신하였으면서도 고려의 충신이 아니라 새 왕조 조선의 개국공신이 된 이유도 사상적 차이에 있었던 것이다.
충신과 공신의 차이
조선왕조는 개국 11일 만에 고려 말에 당을 만들어 반란을 꾀했다고 하여 이색, 우현보 등 56명에게 죄를 주었다. 그리고 두 달 후 정도전, 조준 등 44명을 개국공신으로 임명하였다.
충신과 공신이란 하나의 500년 왕조가 망하고 다른 하나의 500년 왕조가 들어서던 정치적 격변기에 사대부들이 택할 수 있었던 두 가지 길이었다. 그들에 대한 후세의 평가가 어떠했든, 오늘날 우리가 그들을 어떻게 평가하든, 그들은 자기네의 이념에 충실하게 정치적 행보를 하였다. 때론 목숨까지 버리면서. 강남의 귤이 양자강을 건너면 탱자가 되듯, 같은 사상이라도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 서로 다른 빛깔로 나타난다. 그리고 역사의 큰 흐름 속에서 그런 빛깔의 차이는 때로 커다란 변혁의 물줄기를 이루기도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