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오사카로 출발.
몇 개월의 단역 알바는 생각보다 후유증이 컸다. 내가 알지 못하는 아니 알 수 없는 상처가 많은 모양이었다. 한 달을 방에 들어앉아 좀처럼 세상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그렇게 방에만 있지 말고 카페나 편의점 알바를 해보는 건 어때? 배우는 많은 경험이 필요하잖아. 경험도 쌓고 용돈도 벌고 일거양득이네. 혹시 벌써 배우를 포기한 것은 아니지?"
"포기는 아니야. 정리가 필요할 뿐이야."
"정리가 필요하다는 것은 인정, 하지만 땅을 오래 파다 보면 나중에 나오지 못해. 적당히 파고 얼른 나와."
아들은 어릴 때부터 정리가 필요하다는 말을 자주 했다. 마음의 정리가 끝나면 아들은 움직일 것이다. 다만 정리가 언제 끝나느냐가 문제였다. 며칠을 더 기다리다 아들에게 여행을 제안했다.
"일본 가봤어?"
"제주도도 못 갔거든"
"아빠랑 일본 갈래? 경비는 내가 내고, 넌 가이드해."
"나 일본말 못 해."
"구글이 다 알려줘. 블로거들이 비행기 타고 내리는 법, 관광하는 법, 맛집 다 알려주니까 검색만 하면 돼. 걱정 말고 일정 짜 봐."
아들은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다 '좋아'를 외쳤다. 장소는 교토와 오사카로 정했다. 내가 요즘 소설 금각사에 푹 빠졌다. 불을 지르고 싶을 정도로 아름다운 곳, '금각사처럼 아름다운 것은 이 세상에 없다'라는 소설 속 문장을 꼭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윤동주가 다녔던 도시샤대학도 교토에 있었다. 그곳에 윤동주, 정지용 시비도 있다. 그 옛날 윤동주, 정지용이 앉았을 의자에 나도 앉고 싶었다. 며칠 후, 아들은 일주일 동안 검색한 결과를 브리핑했다.
"일차로 검색한 결과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오사카 1일, 교토 1일, 다시 오사카 1일, 3박 4일 일정입니다. 숙소는 오사카로 잡았습니다. 먼저 자료를 보시고 부족한 부분이 있으면 질문받겠습니다."
"저는 먹는 게 중요한 사람입니다. 자료에 올라온 음식점들은 대부분 퀄리티가 떨어지는 것 같습니다. 수정을 요합니다. 예를 들어 둘째 날 아침, 지하철역 앞 식당은 사진과 메뉴를 보니 김밥천국 느낌이 납니다."
"참고로 일본 물가가 생각보다 훨씬 비쌌니다. 음식의 질을 높이면 아빠의 거지 같은 재정상태를 미루어봐 타격이 심할 것 같습니다. 괜찮겠습니까?"
"일본까지 가서 거지처럼 다니기는 싫습니다. 갔다 와서 간장에 밥을 먹더라도 일본에서는 고급진 음식과 술을 먹고 싶습니다."
"특별히 먹고 싶은 음식이 있습니까?"
"전통 있는 음식점에서 제대로 된 오마카세를 먹고 싶습니다."
"오마카세라..., 다녀와서 간장도 없는 맨 밥만 먹을 수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주시시켜드립니다."
"감수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당부 말씀드리겠습니다. 아들이 아닌 가이드로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일본에서 아빠가 내 말을 안 듣는 경우, 몸을 못 가눌 정도로 술에 취할 경우, 독도 문제, 위안부 문제, 기타 등등 문제로 일본 사람들과 시비가 붙는 경우, 저는 뒤도 안 돌아보고 혼자 출국하겠습니다. 이 부분은 절대 타협의 여지가 없습니다."
"조심하겠습니다."
나에게 일본은 처음이 아니었다. 이미 여러 곳을 다녀온 경험이 있었다. 그런데 아들은 나 역시 일본이 처음이라 생각한 모양이었다. 공항버스 안에서 아들은 손에 출, 입국절차를 메모(한국어로 적은 일본어)한 노트를 연신 들여다보며 외우고 또 외우고 있었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히죽히죽 웃다 나도 모르게 푹 잠을 잤다.
"야, 저기 비행기 있다. 정말 크네. 사진 한 장 찍자."
"창피하게 왜 그래? 공항 처음 와 봐?"
"제주도 갈 때 김포는 가봤는데, 인천은 처음이야. 정말 크네."
"혹 길을 잃어버리면 돌아다니지 말고 그 자리에서 기다려. 내가 찾아 갈게. 알았지?"
"어휴, 듬직해. 가이드님, 잘 부탁드립니다."
나는 해외여행이 처음인 듯 연신 신기해하며, 아들의 옷깃을 잡고 걸었다.
2. 깐깐한 놈.
by윤희웅Nov 24. 2022
아들의 옷깃을 잡고 간사이 국제공항에 무사히 도착했다.
"저기, 가이드 님. 이제 어디로 갑니까?"
"전철 타고 오사카 시내로 들어가야지. 잠깐만 기다려봐. 여기 너무 복잡하네. 내가 본 블로그가 오래된 블로그였나 봐. 사진하고 많이 다르네. 다시 검색해야겠어. 조금만 기다려."
"그럼 나를 따라와."
"어디 가려고?"
"저 앞에 커플 기억나? 비행기에서 우리 옆자리에 앉아있었잖아. 비행기 안에서 둘이 이야기하는 걸 들었는데 전철 타고 오사카 시내로 들어간다고 했어. 뒤따라가면 될 것 같아."
"스토커야? 왜 뒤를 밟아."
"뒤를 밟는 게 아니라 그냥 앞서 간 사람 발자국을 보고 따라가는 거야. 더 멀어지기 전에 빨리 따라가자."
우리는 커플을 따라 표를 끊고 열차에 올랐다. 열차에 오르니 아들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표정이 왜 그래?"
"내가 알아서 한다니까 왜 나를 못 믿어?"
"못 믿는 게 아니라..."
"시간이 조금 더 걸려도 난 내 힘으로 하고 싶었단 말이야."
"하지만 쉽게 가는 방법이 있으면 쉽게 갈 수 도 있잖아."
"그건 아빠 방법이고, 내 방법이 아니냐. 여기 올 때 분명히 말했어. 무조건 내 말을 따른다고, 기억나지?"
"당연히 기억하지, 그런데..."
"그런데는 없어. 내 방법을 따르기 싫으면 지금부터 따로 여행해."
"아, 진짜. 깐깐하네. 알았어. 아무 말 안 하고 뒤만 졸졸 따라다닐게. 됐지?"
환승을 하기 위해 내린 난바역, 수많은 인파 속에서 나는 캐리어 위에 앉아 있었다. 곁에 서있는 아들은 잔뜩 굳은 표정으로 핸드폰 지도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둘 사이에 흐르는 냉랭한 기운은 아직 가시지 않았다. 예약한 호텔에 가려면 난바역에서 환승을 해야 했다. 한국은 역사 안에서 환승을 하는데 일본은 역사 밖으로 나가 환승역을 찾아야 했다. 그런데 문제는 난바역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는 노선이 6개나 있었으며, 방금 우리가 내린 난바역이 어느 노선인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쉽게 말하면 우리는 엄청난 인파 속에서 길을 잃었다. 잠시 후 아들은 말없이 앞장서 걸었다. 나는 캐리어를 끌고 아들의 뒤를 따랐다. 지하상가를 한 이십 분쯤 걸었을까 처음 걷기 시작한 그 자리로 돌아왔다. 당황한 아들의 모습이 보였다. 아들은 다시 핸드폰 지도를 들여다봤다. 잠시 후 아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앞장서 걸었다. 걷기 시작한 지 이십 분 후 우리는 다시 그 자리로 돌아왔다.
"못 찾겠으면 사람들에게 물어봐. 저 사람 역무원 같은 데 가서 물어보자."
"지도가 이상해."
"그러니까 물어보자고."
"아니야. 찾을 수 있을 것 같아."
"내가 힘들어서 그래, 아침부터 지금까지 벌써 이만 보나 걸었어. 그냥 물어보자."
"내가 찾을 수 있다니까."
나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아니 걸을 수가 없었다. 역무원에게 달려가 지도를 내밀었다. 역무원은 방긋 웃으며 따라오라고 손짓을 했다. 역무원 도움으로 쉽게 환승역을 찾았다. 역무원은 표까지 대신 끊어주며 허리 숙여 인사를 하고 돌아갔다. 뒤를 돌아보니 아들이 없었다. 삐졌구나. 아들을 찾으러 어디로 가야 하나? 다시 그 자리로 가야 하나? 속에서 천불이 났다. 다리도 아프고 그냥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캐리어 위에 걸터앉아 마냥 아들을 기다렸다. 삼십 분쯤 지나 아들이 나타났다.
"내가 길 물어본 게 그렇게 큰 잘못이니?"
"길 물어본 게 잘못은 아니야, 잘못은 아빠가 아들을 믿지 못한다는 거지."
"길 찾는다고 한 시간을 걸었잖아. 늙은 아빠는 네 눈에 안 들어오니? 너의 자존심만 중요해? 아빠가 힘들어하는 게 안 보여? 가방 메고, 캐리어 끌고, 이만 보 넘게 걸어서인지 지금 허리가 끊어질 듯 아파. 그래도 내가 잘못한 거야?"
수많은 인파 속에서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커졌다.
"내가 약속을 어겼으니까 너 말대로 이제 따로 다녀. 아예 한국으로 돌아가던지 너 마음대로 해. 난 지쳐서 더 이상 서있지도 못하겠다."
나는 지갑에서 환전해 온 돈을 다 주고 전철을 타고 호텔로 갔다. 샤워를 하고 침대에 누웠다. 내가 잘못한 것일까? 그냥 한 바퀴 더 돌았어야 했나? 여행 계획 짜느라 고생했는데... 오만 잡생각이 지나갔다. 전화를 해볼까? 아니, 내가 아버지인데 아들이 먼저 사과 전화를 해야지. 그래도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는데 내가 먼저 사과를 해야겠지. 젠장. 마음을 정리하고 있는 중에 문이 열리고 아들이 들어왔다. 아들은 말없이 나에게 비닐봉지를 건넸다. 비닐봉지 안에는 파스가 들어 있었다.
"허리 아프다며."
나는 바지를 내리고 침대에 누웠다.
"왜 그러고 서있어? 할 말 있어? 없으면 파스나 붙여봐. 그래, 거기. 아이고, 시원하다. 어서 씻고, 옷 갈아 입어. 저녁 먹으러 나가자. 아 그리고, 파스 고맙다."
3. 사과는 힘들어.
by윤희웅Dec 07. 2022
왜. 남자들은 사과를 못할까? '미안해' 그 한마디가 그렇게 힘든 걸까? 아들과 함께하는 삼박 사일, 오사카 여행은 '미안해' 한마디를 못해서 모든 일정이 무너졌다. 데면데면, 머쓱 머쓱, 서로 눈길도 마주치지 못했다.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서 '맛있다' 소리도 못하고, 좋은 풍경을 보면서 '멋있다'라는 말을 못 했다. 그래도 여전히 아들은 하루 이만보를 걸었다. 아들 눈치가 보여 조금 쉬었다 가자는 말도 못 했다. 도톤보리에서 타코야키를 먹기 위해서는 줄을 서야 했다. 다행이었다. 도톤보리 다리 난간에서 기대어 쉬고 있을 때, 거리 선전전을 하고 있는 사람들 모습이 보였다. 선전전 모습은 우리나라와 별반 차이가 없었다. 서명을 받는 사람과 전단지를 나눠주는 사람들이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나는 무슨 내용으로 서명을 받는지 궁금했다. 전단지를 한 장 받아 들고 번역기로 내용을 읽었다. 원전 철거, 환경보호 그런 내용이었다. 환경단체에서 하는 거리 서명전인 모양이었다. 나는 서명대 앞으로가 서명을 하려는 순간이었다.
"지금 뭐 하는 거야?"
"서명"
"서명을 왜 해, 아빠가 일본 사람이야?"
" 이런 건 국적하고 상관없어. 거리 선전전 할 때 서명 한 줄이 얼마나 힘이 되는 줄 알아? 거기다 외국인이 서명을 하면 더 좋아해."
"일본 올 때 약속했잖아. 문제 만들지 않겠다고. 서명하지 마."
"내가 이 사람들이랑 싸웠냐? 그냥 서명만 한다고."
아들은 한 숨을 내 쉬며 돌아섰다. 나는 서명을 하고 원전 반대 뱃지도 하나 받았다. 타코야키를 먹기 위해 줄을 서는 곳에 아들은 없었다. 아들은 이미 도톤보리 다리를 건너고 있었다.
"야, 타코야키 안 먹어?"
아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길을 걸었다. 도톤보리 다리 위에서 나는 소리쳤다.
"너 몇 살이야, 미운 일곱 살이야? 제발 그만하자."
집으로 돌아가기 전 마지막 밤, 우리는 작은 식당에서 술을 곁들인 저녁을 먹고 있었다.
"하이볼이라는 칵테일인데 일본에 왔으면 꼭 먹어야 하는 술이야. 도수는 약하니까 걱정 말고 맛 좀 봐봐."
아들은 내가 건네는 하이볼을 한 모금 마시더니 눈이 반짝거렸다.
"어때, 맛있지? 한 잔 시켜줄까?"
아들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그리고 한 잔, 두 잔, 벌써 다섯 잔을 마셨다. 내가 아는 아들의 주량은 소주 한 병정도, 아니 소주는 독해서 못 먹고 맥주 천 정도인데 하이볼을 벌써 다섯 잔이나 마셨다. 취한 아들이 나를 바라봤다.
"아빠는 왜 사과를 안 해?"
"내가 뭘 잘못했는데, 사과는 내가 아니라 네가 해야 하는 것 아니야?"
"아빠는 나를 그냥 무시해. 나를 절대로 존중해주지 않아. 아빠가 먼저 사과해. 그럼 나도 사과할게."
"먼저 사과하면 자존심이 상해? 아빠가 어른인데 아들이 먼저 사과해야지."
"부자지간을 떠나서 먼저 잘못한 사람이 사과를 하는 거야. 그리고 나는 벌써 사과했어."
"언제 사과했어? 나는 기억이 없는데."
"파스 사다 줬잖아. 그게 사과지. 뭐야?"
"그럼, 그때 내가 파스 고맙다고 말했지. 나도 그게 사과야."
"제발, 나에게 사과를 해줘. 나 무시당하는 거 싫어. 나 좀 존중해달라고."
아들은 울먹이며 말하고 있었다. 아들은 진심이었다. 정말 미안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아들에게 고개를 숙여 사과를 했다.
"미안했다. 내가 나만 생각했다. 진심으로 사과한다."
아들은 나의 사과를 받고 자리에서 일어나 나에게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우리는 오사카에서 마지막 밤을 서로 하이볼을 마시며, 서로 사과하며, 서로 눈물을 닦아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