삭발 공양
이 홍사
야자수 그늘이 드리워진 골목 이발소 머리 잘랐다 면도까지 깔끔히 마치고 염색 할 적 대나무 고깔 쓴 늙은 띨라시 하나 지팡이 짚고 와 이발소 앞 플라스틱 의자에 앉았다 그 모습 거울로 보았다 멀리서 지평선 물고 지나가던 늙은 여승 잠시 쉬어가는 모양이라 여겼다 여승이 이발소 탁발 외에 무슨 볼일 있으랴
역시 나는 눈치 없는 이방인
염색 마치고 일어서 자리 비자 띨라시 뒤뚱거리며 이발 의자 몸 무겁게 앉았다 그제서야 무릎 쳤다 젊은 이발사 냉큼 슬리퍼 바닥에 흩어진 머리카락 위 가지런히 벗어놓고 띨라시 모가 난 머리 비누 거품 발랐다 도루코 면도날 바꾸어 진지한 표정 띨라시 정수리부터 밀기 시작 맨발의 의식이었다 거울 속 늙은 띨라시 두툼한 입술 사막을 지그시 물고 눈 감았고 사막 모래바람 내 눈 파고들었다 담배 한 대 피울 짬에 끝낸 삭발 거울 보니 먼 산 하나가 녹아 민둥산 되었다 젊은 이발사 띨라시 목덜미 털어주고 벗어둔 슬리퍼 다시 신었다 그 의식 치르는 동안 모두 채운 입 곰팡이 피었다 띨라시 뒤뚱 일어났다 이발 의자 내는 소리 삐꺽 띨라시 분홍색 법의 툴툴 털고 고깔 쓰고 지팡이 땅 다지며 뒤돌아보지 않고 먼 지평선 향해 걸어갔다 고맙다 잘 가라 철저히 생략된 말 모두 표정 없는 표정 이곳 사람들은 탁발하면서 신발 벗고 시주한다는 건 알았지만 이발소조차 그럴 줄이야 머리 감으려고 누우니 천정에 붙은 도마뱀 띨라시 뱉어놓고 간 사막 한 조각 물고 와선 잠겼다 시원찮은 구름 한 점 길을 잘못 들어 야자수 끝에 걸려 있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