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려실기술 별집 제4권 / 사전전고(祀典典故) / 서원(書院)
장흥(長興) 예양서원(汭陽書院) 만력 임자년에 세웠다. : 이색(李穡)ㆍ남효온(南孝溫)ㆍ김광원(金光遠) 호는 월봉(月峯), 진사이다. ㆍ신잠(申潛)ㆍ유호인(劉好仁) 호는 육방(六放), 진사에 급제하여 참봉을 지냈고 율곡의 문인이다.
유호인(劉好仁)
[진사] 중종(中宗) 29년(1534) 갑오(甲午) 식년시(式年試) [진사] 2등(二等) 6위(11/100)
자(字) 극기(克己)
본인본관 낙안(樂安)
거주지 장흥(長興)
선발인원 100명 [一等5‧二等25‧三等70]
전력 유학(幼學)
[부(父)] 성명 : 유선보(劉善寶)
관직 : 학생(學生)
[출전]『가정13년갑오윤2월초2일생원진사방(嘉靖十三年甲午閏二月初二日生員進士榜)』(하버드옌칭도서관(Harvard-Yenching Library)[K 2291.7 1746(1534)])
柳希春2 1513 1577 善山 仁仲 眉巖, 漣溪 文節
李珥 1536 1584 李見龍 德水 叔獻 栗谷, 石潭, 愚齋 文成
유호인(劉好仁) : 1502~15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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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암집 제6권 / 일기○무진년(1568) 하 / 5월
【10일】전라 감사의 서장(書狀)을 보니,
“도내의 유일사(遺逸士)를 천거하라는 유지서장(有旨書狀)을 각 관아에 공문서로 전달하여 알아보도록 하였습니다. 나주 목사 한복(韓輹)의 첩정(牒呈) 안에 ‘
생원(生員) 나사침(羅士忱)은 모친의 병이 수개월 동안 낫지 않고 고칠 방법이 없음을 안타깝게 여겨 스스로 손가락을 끊어 약에 타 드려 모친의 병이 즉시 나았으므로 중종(中宗) 조에 이 사실을 듣고 정표(旌表)하였습니다. 그는 성품이 진실하고 순후하며 학행(學行)을 구비하여 그 부모와 형제간에 그르다 하는 사람이 없었으며, 일을 처리하고 남을 대할 때에도 신의(信義)를 병행하였습니다. 부모의 상을 당했을 때에도 한결같이 예에 따랐으며 전후의 상에 시묘살이를 하며 한 번도 집에 들르지 않았고, 추모함에 성의가 독실했으며, 제사를 지낼 때에도 반드시 삼갔습니다. 궁핍한 사람을 도와주며 지성으로 불쌍히 여기었고 일찍이 과거를 단념하여 명예와 출세를 구하지 않아 온 고을 사람들이 모두 그의 행실에 탄복했습니다. 1525~1596
생원 김응기(金應期)는 성격과 행실이 순수하고 완비하여 어버이를 섬김에 효성을 지극히 하였습니다. 어버이가 여러 해 동안 병들자 잠시도 곁을 떠나지 않고 맛있는 음식과 약을 받들어 드려 정성을 다하는 일이 많았습니다. 국상(國喪)을 당했을 때에도 심상(心喪)을 행하여 온 고을 사람들이 우러러보지 않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1524?~?
김천일(金千鎰)은 기질이 순수하고 배운 것을 힘써 행하였으며, 부모를 일찍 여의고 외조모에게서 길러지니 슬하를 떠나지 않고 친모를 섬기듯 하였으며 심상으로 3년을 지내며 죽으로 연명했으므로 이 소문을 듣는 사람들은 존경하고 심복하지 않은 이가 없었다고 합니다.’ 하였습니다. 장흥 부사 조희문(趙希文)의 첩정에서, ‘ 1537~1593
진사 유호인(劉好仁)은 성품이 본래 순실(純實)하며 생각이 깊고 침착하여 말이 적고 식견이 올바르고 의론이 명백하여 몸가짐과 남을 대함에 모두 법도가 있습니다. 중년 이후에는 과거에 뜻이 없었고, 집에는 사방 벽이 비어있어 생활이 막막하였으나 기쁘게 지내며 걱정하지 않았습니다. 또 고을에 살면서 남들보다 특별히 다르지도 않았고, 남에게 구차스럽게 투합(投合)하지도 않아 공사(公事)가 아니면 성부(城府)에 가지 않았습니다. 후학을 계도(啓導)하는데 조금의 게으름도 없어서 양성한 인재가 또한 많았으며, 용모와 말이 남에게 추앙을 받아 외모만 보아도 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1502~1584
유학(幼學) 김윤(金胤)은 성품이 본래 청렴하고 소탈하여 자신을 굽히지 않았으며, 오직 시 읊기만을 좋아했습니다. 품격(品格)이 호방(豪放)하고 과문(科文)의 법규를 닦지 않아 여러 번 낙방하였지만, 시속(時俗)을 따라 요행을 바라지 않았습니다. 두어 칸의 초가집에서 비바람도 가리지 못하고 낡고 헤어진 옷을 입고 살았으며, 남들은 그런 고통을 견디지 못한다지만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일찍이 모친상을 당하여 죽을 먹으며 상려(喪廬)에 거처하면서 몸소 제사를 지내고 3년 동안 집에 가지 않았으며, 부친상을 당해서는 나이 60세가 넘었으나 슬퍼함이 더욱 간절했습니다.’ 하였습니다. 1506~?
위 조목 나사침 학행의 아름다움과 김천일 학문의 독실함을 보고 듣는 사람들이 탄복했던 일을 이조(吏曹)에 아뢰오니 이를 하명(下命)하기 바랍니다.”
하였다. 전교(傳敎)하기를,
“나사침 등의 행실이 지극히 가상하니 포장(襃奬)의 일을 해당 관청의 대신들과 논의토록 하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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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일】나중묵(羅仲默) 형이 알려오기를,
“아침에 이조 판서 이공(李公 이탁(李鐸))을 만났는데 나사침과 장흥에 사는 유호인에게는 상당한 직책을 제수하기로 하였으며, 김천일에게는 식물(食物)을 하사하여 학업을 마치도록 면려하고, 김응기(金應期)에게도 식물을 하사하며, 김윤에게는 정문(旌門)을 명하고 호역(戶役)을 면제해 준다.”
하였다. 이것은 대개 전조(銓曹)에서 대신들과 의논하여 정한 것이다.
○ 김천일 사중(金千鎰士重)은 학덕이 심후(深厚)하며 담담히 자신을 지키고 남이 알아주기를 바라지 않았는데, 나주 목사 한공(韓公)이 보고할 때 그 사실을 다 말하지 못함은 한스러운 일이다.
[주-D009] 나사침(羅士忱) : 1525~1596. 조선 명종과 선조 때의 문신이다. 본관은 나주(羅州), 자는 중부(仲孚), 호는 금남(錦南)이다. 진원 현감(晉原縣監)을 지낸 나질(羅晊)의 아들로 이성 현감(尼城縣監)을 지냈다.[주-D010] 심상(心喪) : 상복(喪服)을 입지 않으면서 화려한 의복과 주육(酒肉)을 금하는 것이다.
[주-D011] 김천일(金千鎰) : 1537~1593. 조선중기의 문신이요, 의병장으로 본관은 언양(彦陽), 자는 사중(士重), 호는 건재(健齋)이다. 나주(羅州) 출신으로 아버지는 진사 김언침(金彦琛)이며, 어머니는 양성 이씨(陽城李氏)로 부위(副尉) 이간(李諫)의 딸이다. 이항(李恒)의 문인이며, 삼장사(三壯士)의 한 사람으로 김인후(金麟厚), 유희춘(柳希春) 등과 교유하였다. 1592년(선조25) 임진왜란 때 나주에 있다가 고경명(高敬命), 박광옥(朴光玉), 최경회(崔慶會)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으나 진주성 전투에서 성이 함락되자 아들 상건(象乾)과 남강(南江)에 투신 자결하였다.
[주-D012] 김윤(金胤) : 조선 시대 선조 때의 문인으로 호는 남계(南溪)이다. 백광훈(白光勳), 최경창(崔慶昌) 등과 동문수학한 사실이 《옥봉집(玉峯集)》에 실려 있다. 문장과 학문에 뛰어나 팔문장(八文章)의 한 사람으로 인정받았다.
김윤(金胤) 1506~?
[진사] 선조(宣祖) 3년(1570) 경오(庚午) 식년시(式年試) [진사] 1등(一等) 5위(5/100)
자(字) 찬중(纘仲)
생년 병인(丙寅) 1506년 (연산군 12)
합격연령 65세
본인본관 광산(光山)
거주지 장흥(長興)
선발인원 100명 [一等5‧二等25‧三等70]
전력 참봉(參奉)
부모구존 영감하(永感下)
[부(父)] 성명 : 김영석(金英碩)
관직 : 온성훈도(穩城訓導)
[안항(鴈行)] 형(兄) : 김주(金胄)
제(弟) : 김긍(金肯)
[출전]『융경4년경오2월18일사마방목(隆慶四年庚午二月十八日司馬榜目)』(국립중앙도서관[古朝26-29-2])
미암집 제13권 / 일기(日記) 축약함 ○병자년(1576) 만력(萬曆) 4년 우리 선조대왕 9년 / 6월
【28일】장흥(長興)의 정자(正字) 정경달(丁景達, 1542년(중종 37)~1602년(선조 35))이 찾아왔다. 내가 맞이하여 이야기하고 함께 점심을 먹었으며 먹을 주었다. 들으니 장흥의 진사(進士) 유호인(劉好仁)이 《논어》와 《중용》을 연구하고 경전을 마음 깊이 궁리한다고 하니, 편지를 보내 그의 말을 들어보기를 요청해야겠다.
[주-D007] 유호인(劉好仁) : 1502~1584. 본관은 강릉, 자는 극기(克己), 호는 천방(天放) 또는 산당(山堂)이다. 현재 장흥군 장흥읍 예양리 소재 예양서원에 배향되어 있다.
ⓒ 전남대학교 호남학연구원ㆍ조선대학교 고전연구원 | 안동교 박명희 김재희 김세종 (공역) | 2013
壽.丁景達 1542~1602 본관은 영광(靈光). 자는 이회(而晦), 호는 반곡(盤谷). 아버지는 정몽응(丁夢鷹). 선산부사, 수군통제사(이순신) 종사관(1594~1598). 반곡유품 난중일기 등 5종 8점(전라남도유형문화재제164호)
영광군(靈光郡) 【군명】 무시이(武尸伊郡)ㆍ무령(武靈郡)ㆍ오성(筽城)ㆍ정주(靜州)
硏經齋全集卷之六十一 / 蘭室史料四 / 督府忠義傳
丁景達䇺城人。登文科。壬辰爲善山府使。募軍聚糧。與監司金誠一,兵使曺大坤設奇策。屢敗倭於金烏山下。甲午爲統制使李舜臣所辟爲從事官。設各州縣都廳以備倭。是歲錄軍功。景達部下所斬一百六十五級。射殺九十四。射傷二百六十。焚倭幕三百餘間。以是陞通政大夫。舜臣爲元均所傾將就逮。景達言于上曰舜臣爲國之誠。禦敵之才。古無其匹。觀機審勢。亦兵家之勝籌也。豈可以彷徨不戰爲罪乎。上若殺之。其奈社稷何哉。
정경달(丁景達)
[문과] 선조(宣祖) 3년(1570) 경오(庚午)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 20위(30/34)
자(字) 이회(而晦)
생년 임인(壬寅)【補】(주1)
1542년 (중종 37)
합격연령 29세
본인본관 영성(靈城)
거주지 장흥(長興)【補】(주2)
선발인원 34명 [甲3‧乙7‧丙24]
전력 유학(幼學)
품계 통정대부(通政大夫)
관직 목사(牧使)
부모구존 엄시하(嚴侍下)【補】(주3)
[부(父)] 성명 : 정몽응(丁夢鷹)
품계 : 장사랑(將仕郞)
관직 : 참봉(參奉)【補】(주4)
[조부(祖父)] 성명 : 정○○(丁○○)
[증조부(曾祖父)] 성명 : 정○○(丁○○)
형(兄) : 정경수(丁景秀)【補】
제(弟) : 정경언(丁景彦)【補】
제(弟) : 정경영(丁景英)【補】(주5)
[주 1] 생년 : 『융경4년경오식4월16일문[무]과복시방목(隆慶四年庚午式四月十六日文[武]科覆試榜目)』(『연계방(蓮桂榜)』, 국립중앙도서관[古6024-145]) 내의 급제 기록을 참고하여 생년을 추가.
[주 2] 거주지 : 『융경4년경오식4월16일문[무]과복시방목(隆慶四年庚午式四月十六日文[武]科覆試榜目)』(『연계방(蓮桂榜)』, 국립중앙도서관[古6024-145]) 내의 급제 기록을 참고하여 거주지를 추가.
[주 3] 구존 : 『융경4년경오식4월16일문[무]과복시방목(隆慶四年庚午式四月十六日文[武]科覆試榜目)』(『연계방(蓮桂榜)』, 국립중앙도서관[古6024-145]) 내의 급제 기록을 참고하여 부모 구존을 추가.
[주 4] 부 관직 : 『융경4년경오식4월16일문[무]과복시방목(隆慶四年庚午式四月十六日文[武]科覆試榜目)』(『연계방(蓮桂榜)』, 국립중앙도서관[古6024-145]) 내의 급제 기록을 참고하여 부 관직을 추가.
[주 5] 안항 : 『융경4년경오식4월16일문[무]과복시방목(隆慶四年庚午式四月十六日文[武]科覆試榜目)』(『연계방(蓮桂榜)』, 국립중앙도서관[古6024-145]) 내의 급제 기록을 참고하여 안항을 추가.
[출전]『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규장각한국학연구원[奎 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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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집 제21권 / 발(跋) / 《천방유선생일고》 후서〔書天放劉先生逸稿後〕
천방(天放) 유 선생(劉先生 유호인(劉好仁))이 어릴 때부터 보여 준 선침(扇枕)과 회귤(懷橘) 같은 효성은 천성에서 비롯된 것으로 이웃들은 효동(孝童)이라고 불렀다. 성동(成童 15세)이 되자 호탕하게 의협심을 품고 활쏘기와 검술을 좋아하였다. 그러나 날마다 목표를 정하고 옛글을 읽을 적에 한 번 보면 바로 외워 종신토록 잊지 않았으며, 말을 뱉으면 문장을 이루어 번번이 사람들을 경탄시켰다. 약관(弱冠)의 나이에 이르러서는 오로지 글을 읽는 데에만 뜻을 두고 의리를 깊이 탐구하여, 문구만 따서 글을 짓는 일은 생각하지 않았다. 용모는 우람하고 훤칠하였으며 몸가짐은 엄밀하여 비록 어른뻘의 사람이라도 모두 외우(畏友)로 인정하였다. 이미 생원시에 합격한 뒤에는 더 이상 과거 시험 공부에 종사하지 않았으며, 실학(實學)에 마음을 깊이 두고 은둔하여 세상일은 아예 잊고자 하는 뜻이 있었다.
남명(南冥) 조 선생(曺先生 조식(曺植))의 풍모와 지혜를 듣고서 걸어가서 뵈니, 남명이 한 번 보고는 오랜 벗처럼 여겼다. 남명이 일찍이 이황강(李黃江) - 희안(希顔) - 에게 말하기를 “유호인(劉好仁)은 내 유익한 벗이다.”라고 하였다. 이 무렵부터 성대곡(成大谷) - 운(運) -, 김삼족(金三足) - 대유(大有) -, 이황강 같은 여러 어진 분과 막역한 사이가 되었지만 공은 오히려 스스로를 부족한 듯 여겼다.
李珥 1536 1584 李見龍 德水 叔獻 栗谷, 石潭, 愚齋 文成
율곡(栗谷) 이 선생(李先生 이이(李珥))께서 우리나라 유학의 대가가 되자, 마침내 책을 짊어지고 찾아가 더불어 지내며 가르침을 받았다. 그런데 늘 끼니를 걱정하고 어버이 음식을 몸소 마련해야 하다 보니 계속해서 스승과 어울릴 수 없어 항상 한스럽게 생각했다.
만년에는 선산 아래에 집을 짓고 낡은 뗏목을 가져다 뜰 가장자리에 두고서 신선옹(神仙翁)이라고 불렀다. 간혹 뗏목을 마주하고 술잔을 주고받으며 시를 읊기도 하고, 때로는 놀려대며 한껏 흥겨워했으니, 그가 무슨 생각에서 그러했는지 알 만하다. 평소에 지은 시문(詩文)은 비록 한가로이 느긋하게 읊은 시이더라도 모두 세도(世道)를 풍자하고 훈계하며 심학(心學)을 절실히 깨우치는 내용이었다. 사람들을 가르치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고 더욱 정성을 기울였으며, 변변찮은 음식조차 끼니를 잇지 못해도 한결같이 태연하였다. 근신(近臣)들의 추천으로 침랑(寢郞)에 거듭 제수되었으나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 거처하던 연하동(煙霞洞)의 자연 경치는 그윽하고 헌당(軒堂)은 아늑하고 조용했다. 주위에 책을 두고 세상 근심을 잊은 채 삶을 즐겼다.
이 고을을 지나는 감사나 목사(牧使)들은 반드시 유 처사(劉處士)를 먼저 방문하였는데 감히 의장 행렬을 거느린 채 마을 어귀에 들어서지 않았다. 옥봉(玉峰) 백광훈(白光勳)이 일찍이 선생을 방문하였다가 만나지 못하자 시를 짓기를,
단풍잎 흩날리고 푸른 골짜기 어둑한데 / 紅葉飛飛碧洞陰
닫지 않은 사립문에 석양빛 깊이 드리웠네 / 柴門不掩夕陽深
어디서 별천지 찾느라 이리 늦으시는지 / 尋眞何處歸來晩
벽 가득 청아한 시를 길손 혼자 읊어 보네 / 滿壁淸詩客自吟
하니, 산중 생활의 맑은 정취를 얼추 떠올릴 수 있다. 당시 사람들이 산당(山堂) 유 처사(劉處士)로 불렀기 때문에, 국담공(菊潭公) 임희중(任希重)의 시에도 “해 저물어 건산 유 처사 집에서 묵네.〔暮宿巾山處士劉〕”라는 대목이 있다고 한다.
[주-D001] 선침(扇枕)과 …… 효성 : 선침은 후한(後漢)의 황향(黃香)이 무더운 여름철에 어버이를 위해 침상에서 부채를 부쳐 시원하게 해 드린 고사를 말한다. 회귤은 삼국 시대 육적(陸績)이 귤을 품에 간직하여 어머니에게 드리려고 한 고사이다. 《東觀漢記 黃香》《三國志 陸績傳》[주-D002] 은둔하여 …… 뜻 : 원문 ‘과축(薖軸)’은 《시경》 〈위풍(衛風) 고반(考槃)〉에 나오는 말로, 은둔하며 한가로이 지내는 것을 말한다. 또 ‘과망(果忘)’은 《논어(論語)》 〈헌문(憲問)〉에 나오는 말로 세상일을 과감히 잊는 마음을 가리킨다.[주-D003] 백광훈(白光勳) : 1537~1582. 자는 창경(彰卿)이고, 호가 옥봉이다. 박순(朴淳)의 문인으로 13세에 상경하여 양응정(梁應鼎)ㆍ노수신(盧守愼) 등에게서 수학하였다. 저서로는 《옥봉집》이 있다.[주-D004] 단풍잎 …… 보네 : 백광훈의 〈연하동에 사는 유 상사를 만나러 갔으나 만나지 못해〔煙霞洞訪劉上舍不遇〕〉라는 작품이다. 《玉峯詩集》
ⓒ 전주대학교 한국고전학연구소ㆍ한국고전문화연구원 | 이주형 채현경 (공역) | 2013
存齋集卷之二十一 / 跋 / 書天放劉先生逸稿後
天放劉先生在髫齡。扇枕懷橘之誠。出於天性。鄕隣稱以孝童。纔成童。豪逸有俠氣。喜弓劒。然課讀古文。一覽輒誦。終身不忘。吐辭成章。動輒驚人。旣弱冠。專意讀書。沉索義理。不思尋摘。容姿魁偉。修飾嚴密。雖丈人行。皆許以畏友。旣升上庠。不復從事塲屋。潛心實學。有薖軸果忘之志。聞南溟曺先生風範。徒步往見之。南溟一見如舊。南溟嘗語李黃江 希顔 曰劉好仁吾益友。自此與成大谷 運,金三足 大有,李黃江諸贒。爲莫逆之交。然公猶自視歉然。栗谷李先生爲東方儒宗。遂負笈往從。得與薰炙。然常患屢空。躬供親廚。不能源源相從。尋常慨恨。晩年築室楸下。取老槎置庭際。號曰神仙翁。或爲之酬酢吟咏。或爲之嘲謔笑傲。其寓意可知也。平日詩文雖閑吟漫詠。皆諷箴世道。警切心學。尤眷眷於誨人不倦。蔬水不繼恬如也。以邇臣薦再除寢郞不就。所居煙霞洞林泉窈窕。軒堂幽夐。左右圖書。樂以忘憂。方伯及牧守之過本邑者。必先訪劉處士。而不敢以鹵簿入洞門也。白玉峯光勳嘗訪先生不遇。題詩曰紅葉飛飛碧洞陰。柴門不掩夕陽深。尋眞何處歸來晩。滿壁淸詩客自吟。山居淸趣槩可想也。當時人以山堂劉處士呼之。故菊潭任公希重亦有詩曰暮宿巾山處士劉云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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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응기(金應期) 1524?~?
[생원] 명종(明宗) 1년(1546) 병오(丙午) 증광시(增廣試) [생원] 3등(三等) 59위(89/100)
자(字) 언정(彦挺)
본인본관 광산(光山)
거주지 나주(羅州)
선발인원 100명 [一等5‧二等25‧三等70]
전력 유학(幼學)
[부(父)] 성명 : 김련(金鍊)[生]
품계 : 종사랑(從仕郞)
[출전]『가정25년병오4월15일생원진사방목증광(嘉靖二十五年丙午四月十五日生員進士榜目增廣)』(평산신씨(平山申氏) 문희공파(文僖公派) 충헌공계(忠憲公系) 승지공(承旨公[諱汝述]) 종중(宗中))
조선왕조실록 > 선조실록 > 선조 7년 갑술 > 7월 21일 > 최종정보
선조 7년 갑술(1574) 7월 21일(계사)
07-07-21[03] 전라 감사 박민헌이 전주 부윤 고경허, 남원 부사 정엄 등 포상 인물을 보고하다
전라 감사 박민헌(朴民獻)이 서장을 올렸다.
그리고 또 재주를 지니고 예능(藝能)을 가졌으면서도 암혈(巖穴)에 숨어 있는 선비를 추천하겠습니다.
나주에 사는 진사 김응기(金應期)는 순후(淳厚)하고 침의(沈毅)한 사람으로 효우(孝友)한 성품은 천성으로 타고난 것이어서 어버이를 섬기되 지극히 조심성 있게 했습니다. 일찍이 여묘를 살았는데 죽만 먹으면서 3년 동안 눈물을 흘리며 상기(喪期)를 마쳤습니다. 평소의 행신이 온 가문에 나타나서 그런 소문이 원근에 퍼지게 되자, 향천(鄕薦)으로 참봉을 제수했었지만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나이가 50이 넘어 장차 초목과 함께 썩어 버리게 되었으니, 어찌 성명(聖明)한 시대에 유주(遺珠)의 한탄이 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무안(務安)에 사는 유학(幼學) 정개청(鄭介淸)은 사람됨이 치밀하고 분명하여 독실한 뜻으로 학문을 하고 있습니다. 가세가 지극히 청빈(淸貧)하지만 일찍이 한 걸음도 망령되이 행하지 않고 조금도 누구에게 간청(干請)한 적이 없었습니다. 집에서는 어버이를 지극히 효성스럽게 받들고, 문생(門生)들과 날마다 도의를 강론하여 사람들에게 미치는 영향이 매우 많고, 항시 예경(禮經) 공부에 공력을 들이고 역학(易學)에 있어서도 발명(發明)한 바가 많이 있습니다. 김응기와 정개청은 심상한 인물이 아니고 특히 백집사(百執事)에 합당한 사람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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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강(秋江) 남효온(南孝溫)1454년(단종 2)~1492년(성종 23) 백공(伯恭) 의령(宜寧) 문청(文淸)
秋江先生文集卷之八 / 附錄 / 汭陽書院奉安文 長興 [宋時烈]
猗歟先生。氣質豪邁。志尙高孤。早從師門。得友眞儒。亦有遊方。心跡相孚。濯纓江湖。荷蓋蘭佩。毋嶽之哭。泣岐同致。挹古慕遠。凌高厲空。脫屣塵紛。洒然淸風。惟其本實。不違帝衷。懲酒誓慈。修禊敦宗。心性之論。或升堂室。蓋曰高明。時有透徹。穴囱之諭。益勉增廓。伊昔光陵。應天禪受。奸臣乘釁。讎我聖母。撤其廟主。取其陵土。文考之靈。獨享嘗蒸。神人哀恫。氣鬱心憑。逮夫神孫。尙爾因仍。惟時先生。年未弱冠。乃明倫義。乃瀝心肝。言雖莫用。士氣如山。洎乎己卯。厥儀乃行。宗靈鼓舞。衆心和平。究考權輿。實肇先生。六臣有傳。綱常愈植。褒誅之筆。明如星日。事業有耀。風聲益振。泉壤之禍。含笑何愍。惟是茲鄕。邈在海陬。何幸當年。賁然來遊。隱映釣臺。遺跡分明。樹竹含馨。巖谷凝淸。惟我後生。曷任追思。揭虔三賢。湖上之祠。今因創修。右享於斯。前賢後賢。合席同堂。風烈攸洎。千載如生。蘋藻有踐。昭告微誠。永願顧欽。佑啓文明。
추강집 제8권 / 부록(附錄) / 예양서원(汭陽書院) 봉안문 장흥(長興)에 있다.
송시열(宋時烈)
아아 선생이시여 / 猗歟先生
기질이 호매하고 / 氣質豪邁
지상이 고고하셨네 / 志尙高孤
일찍이 스승을 따라서 / 早從師門
참된 선비를 벗하였고 / 得友眞儒
또한 방외인과 교유하여 / 亦有遊方
마음과 행적이 부합했네 / 心迹相孚
강호에서 갓끈을 씻으며 / 濯纓江湖
연잎을 쓰고 난초를 찼고 / 荷蓋蘭佩
무악산에서 통곡한 일은 / 毋嶽之哭
기로에서 울었던 마음이네 / 泣岐同致
옛날과 선대를 그리워하여 / 挹古慕遠
허공을 타고 높이 솟아오르니 / 凌高厲空
분잡한 속세에서 몸이 벗어나 / 脫屣塵紛
시원하기가 맑은 바람 같았네 / 洒然淸風
오직 그 근본이 진실한지라 / 惟其本實
하늘의 본성을 어기지 않았으니 / 不違帝衷
술을 경계하여 자당께 맹세하고 / 懲酒誓慈
계를 닦아 종족을 돈독히 했네 / 修禊敦宗
심과 성에 관한 의논은 / 心性之論
혹 정미한 경계에 들어서 / 或升堂室
대개 고명하다 할 것이고 / 蓋曰高明
때때로 투철함도 있었네 / 時有透徹
혈창의 가르침을 듣고서 / 穴窓之諭
더욱 힘써 규모를 넓혔네 / 益勉增廓
그 옛날 광릉께서 / 伊昔光陵
천명에 응하여 선위 받을 때 / 應天禪受
간교한 신하들 그 틈을 타서 / 奸臣乘釁
우리 성모를 원수로 여겼으니 / 讎我聖母
종묘의 신주를 철거하고 / 撤其廟主
그 능의 흙을 파헤쳤네 / 取其陵土
문종의 영령께서 / 文考之靈
혼자서 봄가을 제사를 받으니 / 獨享嘗蒸
신령과 사람이 애통하게 여겨 / 神人哀恫
기운이 막히고 마음이 괴로웠으나 / 氣鬱心憑
뒷날의 왕손에 이르러서도 / 逮夫神孫
그대로 옛 습속을 따랐네 / 尙爾因仍
이때에 선생께서는 / 惟時先生
나이가 약관이 못 되었으나 / 年未弱冠
이에 인륜과 의리를 밝혀서 / 乃明倫義
이에 간절한 뜻을 토로하니 / 乃瀝心肝
말은 비록 쓰이지 못했으나 / 言雖莫用
선비의 기상은 산과 같았네 / 士氣如山
기묘년에 이르러서 / 洎乎己卯
그 의례가 이에 시행되니 / 厥儀乃行
종묘의 영령이 기뻐 춤추고 / 宗靈鼓舞
뭇사람의 마음이 화평해졌네 / 衆心和平
그 일의 시초를 상고해 보면 / 究考權輿
실로 선생에게서 비롯되었네 / 實肇先生
사육신의 전기를 지어 / 六臣有傳
강상이 더욱 부식되니 / 綱常愈植
기리고 내치는 붓이 / 褒誅之筆
별과 해처럼 밝았네 / 明如星日
사업은 빛남이 있어 / 事業有耀
풍성이 더욱 떨쳐지니 / 風聲益振
무덤 속에 미친 재앙이야 / 泉壤之禍
미소 지을 뿐 무엇을 근심할까 / 含笑何愍
오직 이 고을은 / 惟是玆鄕
멀리 바다 모퉁이에 있으나 / 邈在海陬
얼마나 다행인가 그 당시에 / 何幸當年
빛나게 오셔서 유람하셨네 / 賁然來遊
은은히 비치는 조대에는 / 隱映釣臺
남겨진 자취가 분명하니 / 遺跡分明
수죽은 향기를 머금었고 / 樹竹含馨
암곡은 맑음을 모았도다 / 巖谷凝淸
생각건대 우리 후생들이 / 惟我後生
어찌 추모의 정을 견디랴 / 曷任追思
삼현을 경건히 모시기를 / 揭虔三賢
호상의 사당에 하였도다 / 湖上之祠
지금 창수함으로 인하여 / 今因創修
이곳에 높여 제향하노라 / 右享於斯
전대 현인과 후대 현인이 / 前賢後賢
자리와 사당을 함께하니 / 合席同堂
유풍과 공렬이 미치는 곳에 / 風烈攸洎
천년토록 살아 계신 듯하네 / 千載如生
제물을 가지런하게 갖추어 / 蘋藻有踐
밝게 작은 정성을 아뢰니 / 昭告微誠
영원히 돌아보고 흠향하여 / 永願顧欽
문명을 도와서 계도하소서 / 佑啓文明
상향축문(常享祝文)
[본문 내용 없음]
[주-D001] 예양서원(汭陽書院) : 전라남도 장흥군(長興郡) 장흥읍 예양리에 있다. 1620년(광해군12)에 이색(李穡)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1668년(현종9)에는 신잠(申潛)과 김광원(金光遠)을, 1681년(숙종7)에는 남효온을,
1683년에는 유호인(兪好仁)을 추가 배향하였다.
[주-D002] 무악산에서……마음이네 : 〈시장(諡狀)〉에 의하면, 남효온이 “간혹 무악산에 올라가서 통곡하고 돌아왔다.〔或登毋岳 慟哭而返〕” 하였다. 기로(岐路)에서 울었다는 것은 전국 시대 양주(楊朱)가 갈림길에 임하여 울었던 고사를 가리킨다. 양주가 팔방으로 통하는 큰길을 보고 울었으니, 이는 남쪽으로도 갈 수 있고 북쪽으로도 갈 수 있기 때문이었다. 《淮南子 說林訓》[주-D003] 혈창(穴窓)의 가르침을 듣고서 : 혈창은 구멍난 창호지로, 소견이 작음을 말한다. 남효온이 김시습(金時習)에게 “나의 소견이 어떠한가?”라고 물으니, 김시습이 “혈창으로 하늘을 엿보는 것과 같다.” 하였다.[주-D004] 광릉(光陵) : 세조를 가리킨다. 광릉은 세조와 정희왕후(貞熹王后)의 능이다.[주-D005] 그 능의 흙을 파헤쳤네 : 소릉(昭陵)을 파헤친 것을 말한다. 소릉은 문종(文宗)의 왕비인 현덕왕후(顯德王后)의 옛 능호이다. 세조가 찬위하고 단종을 시해한 뒤에 세조의 꿈에 현덕왕후가 나타나 버럭 화내며 말하기를 ‘‘네가 죄 없는 내 아들을 죽였으니, 나도 또한 네 아들을 죽이겠다.” 하였다. 세조가 놀라 일어나니, 동궁이 갑자기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로 인하여 소릉을 파헤치는 변이 있었다. 《燃藜室記述 卷4 文宗朝故事本末 昭陵廢復》[주-D006] 무덤 속에 미친 재앙 : 갑자사화에 부관참시당한 것을 말한다.[주-D007] 상향축문(常享祝文) : 축문 내용은 상고할 수 없어 기록하지 못한 듯하다.
ⓒ 한국고전번역원 | 박대현 (역) |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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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83년에는 유호인(兪好仁)을 추가 배향하였다.->유호인(劉好仁)
*장흥(長興) 예양서원(汭陽書院) 만력 임자년에 세웠다. : 이색(李穡)ㆍ남효온(南孝溫)ㆍ김광원(金光遠) 호는 월봉(月峯), 진사이다. ㆍ신잠(申潛)ㆍ유호인(劉好仁) 호는 천방(天放), 진사에 급제하여 참봉을 지냈고 율곡의 문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