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 사막에서의 혈전(血戰) 천막 밖은 매우 조용했다. 대한들은 하나같이 몸을 두터운 담요로 감싸고 바닥에 누워 있었는데 이미 잠들은 것 같았다. 쾌락왕의 그 화려한 천막은 비록 등불이 밖으로 비췄지만 아무 소리도 나지 않고 다만 정적만이 흘렀다. 심랑 등은 바로 천막 밖의 그늘에 앉았다. 이때 부르짖고 고함치는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갑자기 말발굽소리가 들려오더니 한 무리의 말탄 사람이 손에는 긴 칼을 쥐고 악으로 돌격해왔다. 번쩍이는 칼빛과 울부짖는 말들의 소리는 대단한 위력을 발했다. 이미 잠들어 있는 줄 알았던 대한들이 갑자기 벌떡 일어섰다. 그들은 두꺼운 담요 속에 미리 준비해 둔 활과 화살을 꺼내었다. 활을 당기는 소리와 함께 화살들이 빠르게 폭우처럼 쏟아졌다. 사방에 있던 작은 사구(砂丘) 뒤에서도 수많은 대한들이 번개처럼 뛰어 나왔다. 공격을 해오던 그 한 무리의 말탄 사람들은 갑자기 겹겹이 포위망에 걸려들었다. 그들은 미친듯이 외치며 칼을 휘둘러 화살을 막았으나 이미 화살에 맞아 비명을 지르며 말에서 떨어졌다. 또한 말을 몰고 곧장 달려와 진지를 밟으려 했지만 쾌락왕의 진지(陣地)악에는 이미 두 소대의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 두 소대의 대한들은 오른손에는 빛나는 귀두도(?頭刀)를 쥐고 있었으며 왼쪽 팔꿈치에는 등나무로 된 방패가 걸쳐 있었다. 그들은 방패로 몸을 보호하며 귀두도로 마구 말의 다리를 쳐갔다. 순식간에 건장한 말들의 비명소리가 들리면서 울부짖는 듯한 비명소리, 칼과 검이 부딪치는 소리들이 이 광풍 회오리 바람 속에서 이 넓고 황량한 사막에 울려퍼졌다. 황사 위에는 선혈이 낭자했다. 사방에는 횃불들이 광풍에 날려 불꽃이 길게 늘어졌다. 반짝이는 불빛에 비친 말 위의 전사들은 하나같이 긴 장화에 바람막이, 하얀 복면을 하고 있었으며 손에 쥔 긴 칼도 약간은 구부러져 있었다. 그들은 비참하게 많은 인명피해가 났다. 그러나 남은 사람들은 뒤로 물러 설 줄도 모르고 계속해서 칼을 휘두르며 악으로 돌진해 갔다. 쾌락왕의 부하 중에서 갑자기 한 대한이 등나무 방패를 쥐고 맞이했다. 말 위의 기사는 말안장에서 긴 창을 뽑아들고는 괴성을 지르면서 찔러왔다. 말탄 기사의 창은 곧장 등나무 방패를 뚫고 대한을 땅바닥에 박았다. 그리고는 곧장 쾌락왕의 천막으로 돌진했다. '삭'하는 소리와 함께 검광(劍光)이 번쩍하면서 급풍일호가 공중에서 스쳐가자 말 위의 기사는 순식간에 반쪽 머리만 남았다. 선혈은 마치 불화살처럼 뿜어져 나왔으나 말 위의 기사는 여전히 쓰러지지 않고 계속 달려갔다. 곧 쾌락왕의 천막으로 뛰어들 찰나였다. 이때 다시 또 '삭'하는 소리가 나면서 급풍일호가 말쪽을 향해 쓸어갔다. 검광이 번쩍이자 말의 다리가 잘려 나가면서 말의 울부짖는 소리와 함께 옆으로 굴러 떨어졌다. 웅묘아의 표정이 변했다. "이들이 바로 티벱의 전사(戰士)들이군. 과연 용맹하고 사나운 자들이야." 왕련화가 탄식을 했다. "하지만 쾌락왕의 수하들도 결코 약하지 않았소. 지금이야말로 저들 개인마다 오랜 훈련을 받았다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겠군요. 과연 얕볼 수 없는 사람들이오." 심랑은 침중하게 말했다. "특히 저 급풍일 호는 무공만 동일배에서 특출날 뿐 아니라 재치도 상당히 높소. 시간이 흐르면 곧 뛰어난 사람이 될 것이오." 왕련화가 웃었다. "심랑의 칭찬을 받은 저 사람은 몸값도 곧 열 배로 뛰겠군." 말하는 사이에 백여 명의 티벱 전사들은 반밖에 남지 않았다. 갑자기 멀리서 호각소리가 하늘 끝까지 울렸다. 티벱 전사들은 휘파람 소리와 함께 전부 말머리를 돌렸다. 급풍일호가 팔을 들어 외쳤다. "저들이 돌아가게 길을 비켜줘라!" 모래먼지가 하늘 가득해지면서 고함소리는 점점 멀어져갔다. 붉게 물들은 황사 위에는 시체가 가득했다. 수십 자루의 굽어진 칼들은 모래 위에 꽃여 있었고 칼의 술은 바람에 휘날리고 있었다. 웅묘아가 탄식을 했다. "혈전이야! 정말로 대단한 혈전이야." "사막에서 이런 싸움은 아무 것도 아니오." 하고 한 사람이 크게 웃으며 말했다. 웃음소리와 함께 쾌락왕이 성큼성큼 걸어 나왔다. 의기양양한 눈빛으로 수염을 만지며 웃었다. "사막의 경치는 중원과는 비교가 될 수 없지. 심랑, 안 그런가?" 심랑이 탄식을 했다. "선혈로 물들인 모래도 중원의 것과도 확실히 다르군요." 쾌락왕이 소리높여 노래했다. "모래는 선혈로 물들고 영웅의 노래는 지치지 않네. 도검을 날려 적의 머리를 주전자로 쓰네. 백전의 용사들은 적이 오면 적의 머리를 남기네." 그는 노래를 끝내면서 광소를 날렸다. "본왕의 휘하는 모두가 백전의 용사들이지. 용권풍아! 용권풍아! 용기만 있다면 언제든지 내게 덤벼라!" 심랑이 물었다. "용권풍이오?" "이들이 바로 사막에서 가장 크게 위용을 떨치는 도적 무리들이지. 이들의 두목이 바로 용권풍이야. 그리고 그 자만이 감히 본왕의 호랑이 수염을 건드릴 용기가 있는 자이지." 웅묘아가 참지 못하고 물었다. "그 사람은 어떻게 생겼소?" "본왕은 본 적이 없다." "그럼 이번이 저들의 첫번째 공격이란 말이오?" 쾌락왕이 크게 웃었다. "이들은 본왕이 저들의 구역을 침범했다고 생각하면서 일 년 전부터 끊임없이 이곳에서 소란을 피웠지. 그러나 용권풍은 아마도 본왕의 위명을 들었는지 감히 본왕과 겨룰 용기가 없었던 모양이야." 사실 용권풍도 사막에서는 전설적인 인물이었다. 듣기로는 이 자는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며 전혀 종적을 잡을 수 없으며 아무도 그의 진면목을 본 사람이 없다고 했다. 쾌락왕의 침중한 소리가 계속 이어졌다. "용권풍은 비록 자주 소란을 피우러 왔었지만 오늘처럼 대대적으로 오기는 이번이 처음이야. 지금 저들은 비록 물러갔지만 절대로 포기하지 않고 오늘 밤 다시 또 올 것이다." 심랑이 말했다. "조금 전 왔던 자들은 많았지만 결코 주력부대가 아닌 것 같군요. 저들의 수뇌들도 역시 그들 뒤에서 병력을 배치하고 있을 것이오. 그래서 호각이 울리자 저들이 금새 물러갔을 겁니다." 쾌락왕이 손뼉을 치며 크게 웃었다. "심랑은 과연 심랑답군. 그렇네. 그들의 첫번째 진격은 단지 본왕의 실력을 탐색하는 것이어서 필승의 생각도 없었지. 그래서 호각소리가 들리자마자 승부에 상관없이 모두 물러갔지." 웅묘아가 탄식을 했다. "이렇게 많은 생명을 갖고 탐색을 하다니 대가(代價)가 너무 크군요?" 쾌락왕이 말했다. "전쟁터에서는 승리만 중요하지 수단은 상관없어. 그리고 겨우 이 몇십 명의 인명은 아무 것도 아니지." "군배치와 계책을 세우는 사람들의 마음이 너무 냉혹한 것 같군." 웅묘아의 한탄에 왕련화가 말을 받았다. "한 장성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서는 만 명의 뼈가 마른다는 말이 있듯이 마음이 냉혹하지 않다면 그 사람은 결코 장수의 자질이 없는 것이오. 보아하니 이 용권풍이란 사람은 비단 용맹하고 전쟁에 능할 뿐만 아니라 지모도 상당히 뛰어난 듯하군요." 쾌락왕이 거만하게 광소를 날렸다. "본왕은 바로 그가 대체 어떤 수단을 쓰는지 두고 볼 것이다." 그는 웃음을 갑자기 멈추더니 매섭게 외쳤다. "사상자들을 점검하라!" 급풍일호가 성큼성큼 걸어오더니 몸을 굽히며 말했다. "대왕께 아뢰오. 사상자의 수가 나왔습니다." "상황은 어떠냐?" "형제 중 일곱 명이 죽고 열세 명이 다쳐서 모두 스무 명의 사상자가 났습니다. 하지만 상대방은 모두 백 칠십 명이 죽어서 우리보다 아흔 일곱 명이 더 많이 죽었습니다." 쾌락왕은 잠시 생각하다가 불현듯 물었다. "백 아가씨는 어디에 있느냐?" "제자는 보지 못했습니다." "포진은 다 됐느냐?" "제자는 대왕의 분부대로 열여섯 소대로 나누었습니다. 그 중 네 소대는 활궁수, 네 소대는 도부수(刀斧手), 네 소대는 등나무 방패소대, 네 소대는 장창수(長槍手)로 배치했고 또 각기 급풍대의 일곱 명이 인솔하고 있습니다. "보초를 세웠느냐?" "삼제가 보초 스무 명을 데리고 이미 갔습니다." 쾌락왕이 손을 휘저으면서 말했다. "좋다. 물러가라." 불빛이 반짝이면서 모래는 광풍 속에서 춤을 추듯 휘몰아갔다. 사방에는 인영들이 어른거리며 도검은 불빛에 반짝였고 모래 위에 가득한 시체들의 피는 벌써 말라 있었다. 온 천지에는 살기가 가득했다. 쾌락왕은 뒷짐을 진 채 천막 악에서 중얼거렸다. "전쟁터...... 이것이 바로 전쟁터로구나. 이것이 바로 자고이래로 모든 영웅들이 심취해 있던 곳이구나. 본왕도 역시 예외는 아니다." 주칠칠이 참지 못하고 참견했다. "이런 곳에 뭐가 그리 심취할 곳이 있나?" 쾌락왕이 크게 웃었다. "전쟁터에서의 자극과 재미는 너 같은 어린 여자아이가 알 리 없지. 손에 병권이 쥐어져 있고 천백 명의 목숨이 모두 네가 한 순간 내릴 결정에 달려 있다고 생각해 봐라. 그 기분은 결코 어떤 언어로도 형언할 수 없을 정도일 것이고, 그 기쁨 역시 어느 사물에도 비길데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갑자기 멀리서 한 인영이 나는 듯이 달려왔다. 대한들이 다같이 매섭게 외쳤다. "누구냐? 어서 멈춰라!" 또 한 사람이 외쳤다. "멈추지 않는다면 활을 쏘겠다." 그 인영은 갑자기 깔깔대며 웃었다. "이 멍청아, 나도 못 알아보느냐?" 은방울 같은 웃음소리와 함께 백비비의 날씬한 몸매가 쾌락왕의 악에 떨어졌다. 그녀는 몸에 꼭맞는 옷으로 갈아입고 있었는데 얼굴 역시 면사로 가리고 있었다. 쾌락왕이 활짝 웃으며 물었다. "어디에 갔었느냐? 본왕이 한참 걱정하지 않았느냐?" 백비비가 면사포를 젖히며 말했다. "대왕께서 알아맞춰 보세요." 쾌락왕은 눈빛을 반짝였다. "혹시 용권풍의 군정을 염탐하러 갔던 것이 아니냐?" 백비비가 손뼉을 치며 웃었다. "대왕께서는 과연 절세적인 지혜를 갖고 계셔서 아무 것도 숨길 수 없군요." 쾌락왕이 부드러운 소리로 말했다. "용권풍은 보통 도적이 아니다. 혼자의 몸으로 만에 하나라도 일이 생긴다면 어쩔려고 갔느냐? 너는 본왕을 위해 그렇게 모험할 필요는 없다." 이 일대의 효웅도 백비비 악에서는 순한 양처럼 매우 부드러웠다. 백비비여! 너는 정말로 모든 남성들로 하여금 취하게 하는 마력이 있구나. 이때 백비비가 교태를 부리며 웃었다. "제 몸은 이제 대왕의 것인데 대왕을 위해서 죽는다 해도 아까울 것은 없어요. 더구나 그 자들의 능력으로 어찌 저를 죽일 수 있겠어요?" 쾌락왕이 손뼉을 치며 크게 웃었다. "본왕은 하마터면 '유령궁주'가 동에서 번쩍, 서에서 번쩍하며 신출귀몰하고 누구도 감히 예측할 수 없다는 것을 잊을 뻔했구나. 겨우 용권풍쯤이 어찌 너의 눈에 차겠느냐?" "하지만 무서운 것은 용권풍이 아니에요." 쾌락왕이 웃으며 말을 받았다. "무서운 것은 바로 너야. 그렇지?" 백비비가 요염하게 웃었다. "대왕께서는 어찌 또 농담을 하시나요?" "혈전하는 마당에 잠시의 농담도 필요하지." "하지만 제가 말하려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에요." 쾌락왕의 표정이 약간 변했다. "누구지?" "그들의 군사참모(軍事參謀)에요." 쾌락왕이 눈살을 찌푸렸다. "군사참모라고? 용권풍에게도 군사참모가 있단 말이냐? 이것을 어째서 내가 전혀 듣지 못했지? 너는 어떻게 알아냈느냐?" "그야 물론 용권풍의 부하에게서 들었죠." "그들은 어떻게 말하더냐?" "저는 몰래 그들의 말을 엿들었어요. 그들은 비록 용권풍을 대단한 영웅으로 보지만 그 군사참모에게는 더욱 신명처럼 떠받들고 있더군요." "그 사람은 어떻게 생겼느냐?" "용권풍과 그 군사참모가 있는 천막은 경비가 너무 삼엄해서 아무도 들어갈 수 없어요. 그래서 저도 그를 볼 수가 없었어요." "너는 그의 이름을 알아냈느냐?" "저는 그들의 보초를 잡았죠. 헌데 그 자도 꽤나 고집이 세어서 아무리 얼르고 뺨쳐도 전혀 먹혀들지가 않더군요." "너는 물론 그의 입을 열게 하는 방법이 있었겠지?" 쾌락왕의 물음에 백비비가 생긋이 웃고 말했다. "그래서 저는 면사포를 살짝 젖혀서 그에게 웃어 보이니. 그는 금새 뭐든지 말하더군요." 쾌락왕은 수염을 만지작거리면서 크게 웃었다. "당연히 말했을 것이야. 이 세상의 남자 중에서 누가 너의 웃음을 당해내겠느냐?" "여기에 최소한 두세 명은 있어요." 주칠칠이 참지 못하고 큰소리로 외쳤다. 쾌락왕은 그녀를 아는 체도 않고 다시 물었다. "그가 뭐라고 말했느냐?" "그의 말에 따르면 그 군사참모는 매우 신비한 인물로서 용권풍에 가담한 것은 별로 오래되지 않았다고 하는군요. 용권풍은 그를 대단히 신임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그에게 매우 탄복해마지 않는다고 해요. 다만 그 사람은 시종일관 검은 색의 망토를 입고 또 검은 색의 두건으로 복면을 해서 아무도 그의 얼굴을 본 사람이 없다는 군요." "그의 이름은 뭐라고 하지?" 백비비가 한 자씩 내뱉었다. "그에게는 이름이 없어요. 다만 자칭 복수사자(復讐使者)라고 한데요." 쾌락왕의 표정이 변했다. "복수사자라고? 혹 본왕과 무슨 원한이 있는 자가 아닌가? 용권풍이 이렇게 대거 공격을 해 온 것도 혹시 그 자의 책동에 의한 것이 아닐까?" "아마도 그럴 가능성이 커요." "그가 자칭 복수사자라고 했겠다. 성명도 밝히지 않고 또 진면목으로 사람을 대하지 않으면서 짐짓 신비스럽게 행세하는 것으로 보아 혹시 본왕이 아는 사람이 아닐까?" "대왕께서는 그가 누구인지 혹 마음 속으로 집히는 사람은 없나요?" "그가 단기간 내에 용권풍 같은 사나운 자에게 그토록 신임을 얻었어. 또 그 자의 행동으로 봐서도 매우 확고하고 악랄하니 본왕은 도저히 그가 누구인지 알 수가 없군." 주칠칠이 또 참지 못하고 냉소를 쳤다. "원수가 워낙 많으니 자연히 생각이 나지 않을 수밖에." 쾌락왕의 마음은 너무도 무거워 그녀의 말은 아예 귀에도 들어오지 않았다. 그는 다시 물었다. "그것 외에 또 뭣을 알아냈지?" "그들의 부하와 말들은 이곳에서 참패해서 돌아간 자들 외에는 이백 명도 채 되지 않았고 실력도 별로 강하지 않은 듯했어요." "응? 남아있는 자들이 이백 명도 되지 않다니, 본왕이 너무 저들을 높이 평가했군." "그래서 그들은 지금 경거망동 못하고 있는 듯했어요. 그러나 그들은 그곳에서 기회를 엿보면서 하나같이 사기가 충천하여 두번째의 공격을 감행할 듯했어요." 쾌락왕의 눈빛이 번쩍이더니 매섭게 웃었다. "기회를 엿본다고? 흥,흥, 본왕이 그들에게 기회를 줄 리가 없지." "대왕께서는 어떻게 하시려는지요?" 쾌락왕이 침중하게 말했다. "선제공격으로 방어를 대신하고 그들의 무방비를 틈타서 공격한다." 백비비가 손뼉을 치며 요염하게 웃었다. "무방비 상태를 노려서 확실한 승리를 얻는다는 거군요. 과연 대왕의 재능은 누구도 따를 수 없어요." 쾌락왕이 고개를 돌려 심랑을 보았다. "심랑! 자네가 보기에 본왕의 계책이 어떤가?" 심랑이 감탄을 했다. "과연 대왕께서는 장군의 재능을 갖추셨습니다." 쾌락왕이 크게 웃었다. "장군의 재능이라 장군의 재능이라면 자고이래로 장군들 중에서 그 누가 본왕과 견줄 수 있겠느냐? 한신(韓信)에게 본왕과 같은 악랄함이 있었다면 결코 여인의 손에 죽지 않았을 것이요, 항우도 본왕과 같은 참을성이 있었다면 결코 자살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기타 나머지 사람들이 어찌 본왕과 견줄 수 있겠느냐?" 심랑이 길게 탄식을 했다. "악랄함과 참을성은 확실히 당신과 견줄 사람이 없을 겁니다." 쾌락왕은 끊임없이 앙천대소를 했다. "심랑의 한 마디 칭찬은 남들의 만 마디 아부보다도 낫단 말이야." 그는 손짓을 하며 크게 외쳤다. "어서 술을 갖고 오너라." 백비비가 미소 지었다. "천첩이 친히 대왕께 술을 따르겠어요." 쾌락왕은 의기양양하게 광소를 날리면서 말했다. "본왕이 이 잔을 비운 후, 저들을 속수무책으로 깨끗이 죽여버리겠다." 백비비는 금잔에 맛있는 술을 가득 채우고 섬섬옥수로 올려 바쳤다. 쾌락왕은 단숨에 잔을 비운 후 매섭게 호령했다. "급풍일 호는 어디 있느냐?" 급풍일 호는 부름에 들어와 몸을 굽혔다. "대왕께서는 분부 하십시오." "사람들을 배치시켜 공격을 준비하라!" "네!" 급풍일호가 '네'하고 아직 물러가지 않았을 때 갑자기 말발굽소리가 들려오면서 말 한 필이 달려왔다. 대한들은 매섭게 외쳤다. "누구냐? 어서 말에서 내려라!" 말 위에 탄 사람은 손에 백기를 들고 크게 외쳤다. "나는 우리 방주의 명을 받들어 항복하러 왔소." 급풍일호가 웃으며 말했다. "우리는 아직 싸우지도 않았는데 저들은 이미 항복하러 왔군요." 쾌락왕은 긴 눈썹을 치켜올리더니 호령했다. "그를 이리로 들게 해라." 건장한 말은 급히 달려왔다. 말 위에 탄 사람은 즉시 몸을 돌려 말에서 내리고는 땅바닥에 엎드려 절하며 고개를 숙였다. "대왕께서는 자비를...... 대왕께서는 자비를......." 쾌락왕은 수염을 매만지면서 물었다. "너희들은 항복을 하겠다는 거냐?" 그 사람은 연신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대왕의 재능은 마치 하늘에 뜬 달과 같고 저희 방주는 자신이 반딧불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달과는 절대로 견줄 수 없다는 것을 알고는 소인을 시켜 항복의 의사를 표명하며, 이후로는 대왕의 휘하로 들어가기를 원합니다." 쾌락왕은 흡족한 웃음을 흘렸다. "용권풍은 과연 총명한 사람이군. 그는 지금 항복하지 않으면 너희 형제들이 결코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았구나." 그 사람은 땅바닥에 엎드려서 빌었다. "대왕의 성은을 기다릴 뿐입니다." 쾌락왕이 큰소리로 외쳤다. "좋다. 너는 돌아가서 곧 줄을 서서 대기하고 있으라고 전하라! 내 곧 가서 너희들의 투항을 받아들이겠다." 그 사람은 고개를 숙였다. "대왕의 하해와 같은 은혜, 영원히 잊지 못할 겁니다." 그는 엎드린 채로 약 십여 걸음을 물러선 뒤 단번에 말 위에 올라타는 동시에 달려갔다. 쾌락왕은 눈으로 말이 멀리 가는 것을 지켜보다가 미소를 지었다. "용권풍! 너는 정말로 총명한 사람인가?" 백비비는 웃음을 머금고 조용히 그를 쳐다보았다. "대왕께서는 설마......." 쾌락왕이 크게 웃으며 말했다. "물론이다." 이렇게 말한 쾌락왕은 갑자기 웃음을 멈추고 매섭게 호령했다. "진격할 준비를 해라!" 급풍일 호는 어리둥절하면서 물었다. "그들은 이미 항복을 했는데 왜 공격을 해야 합니까?" "그들은 이미 본왕이 투항을 접수하러 올 것으로 알기 때문에 더욱 준비가 안 됐을 것이다. 바로 이 틈을 타서 진격을 한다면 그들을 완전히 소멸할 수 있을 것이다." 급풍일 호는 기뻐하며 말했다. "대왕께서는 과연 고명하십니다." "병법에는 속임수가 빠질 수 없고 적들을 절대 살려두지 않는다는 것이 본왕의 행동 강령이다." "맞습니다. 저런 인간들은 절대 살려둬서는 안 됩니다. 당연히 뿌리째 뽑아야 합니다." 쾌락왕은 성큼 큰 걸음으로 나가서 매섭게 호령했다. "십육 소대 중에서 두 소대는 남아서 이곳을 지키고 나머지는 모두 본왕을 따라 간다. 본왕이 그들을 다 섬멸하고 난 뒤 곧 본왕과 대적한 결과가 어떤 것인지를 만 천하에 보여 주리라!" 쾌락왕과 백비비는 부하들을 인솔해 갔고 바람소리는 더욱 처량하게 울렸다. 웅묘아는 탄식을 했다. "대단한 쾌락왕이군. 정말로 악랄한 마음에 악독한 수단이야." 심랑이 약간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이번에 그는 당하고 말 거야." 웅묘아가 이상하다는 듯이 물었다. "당하다니?" "그는 이번에 가면 분명히 헛탕을 치고 올 거야." 웅묘아는 더욱 이상하다는 듯이 되물었다. "왜?" "용권풍의 이번 항복은 거짓이야. 방금 전 항복하러 온 사람은 비록 무서워하는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언어구사에 있어서는 매우 민첩했고 또 행동에도 결코 당황하는 느낌이 전혀 없었어. 그것이 어디 항복하러 오는 사람의 모습 같은가." "하지만 그들은...... 그들은......." "그들은 한편으로는 항복하는 척하고 또 한편으로는 쾌락왕이 그쪽으로 갔을 때 그 틈을 타서 이곳을 공격하러 오려는 것이네." 그는 잠깐 웃더니 말을 이었다. "이것이 바로 병법에는 속임수가 빠질 수 없다는 것이지. 그리고 이는 이로서 갚는다는 것이야." 웅묘아도 알았다는 듯 웃었다. "이제보니 그들은 호랑이를 산에서 떠나게 하려는 조호이산(調。離山)의 계책과 성동격서(聲東擊西)라는 계책을 쓴 것이군." "그렇다네." "하지만 그들은 또 어떻게 쾌락왕이......." 심랑이 그의 말허리를 자르며 말했다. "아마도 그들의 군사참모는 지모(智謀)가 쾌락왕보다 못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쾌락왕의 성격에 대해서도 손바닥 보듯이 빤히 보고 있는 듯하네. 그는 이미 쾌락왕의 행동을 계산에 넣고 이런 계책을 쓴 것 같아." 주칠칠도 웃었다. "이 두 사람은 정말로 막상막하네요." 심랑이 말했다. "하지만 쾌락왕은 지피지기(知彼知己)하지를 못한 상태라서 그는 결국에는 지고 말거야." "그렇군. 그는 쾌락왕에 대해서는 손바닥 보듯이 잘 알고 있지만 쾌락왕은 그가 누구인지조차 모르고 있으니 이번 싸움은 안 봐도 쾌락왕이 진 거야." 웅묘아의 말에 주칠칠이 생긋이 웃으며 덧붙였다. "쾌락왕에게 만약 심랑과 같은 군사참모가 있었다면 지지는 않았을 거예요. 그가 비록 자화자찬(自話自讚)했지만 심랑의 손가락도 못 따라 간다구요." 왕련화가 갑자기 냉랭하게 말했다. "다만 그 군사참모가 심랑처럼 총명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고 심랑의 예측이 틀리기를 바랄 뿐이오." 심랑이 미소를 지었다. "그 군사참모가 자칭 '복수사자'라고 했으니 쾌락왕과의 싸움에는 필승의 자신이 있는 듯하오. 그렇지 않다면 그는 필사사자(必死使者)라고 해야 했을 것이오." 왕련화가 길게 탄식을 흘렸다. "그가 만약 그렇게 총명하다면 우리는 끝장이오." 주칠칠이 어리둥절해하면서 눈살을 찌푸렸다. "우리가 왜 끝장이 나요?" 왕련화는 말도 않고 그저 악만 바라봤다. 악에 멀지 않은 곳에는 몇 명의 대한들이 왔다갔다하면서 그들을 감시하고 있었다. 다만 이들이 무슨 말을 나누고 있는지 모를 뿐이다. 주칠칠은 잠시 생각하더니 곧 안색이 급변했다. "그래요. 우리는 끝장이에요." 심랑이 물었다. "응? 그래?" 주칠칠의 음성이 떨리고 있었다. "용권풍의 기마대가 공격해온다면 이곳의 수비는 절대로 그들의 적수가 되지못할 거예요. 또 그 복수사자는 복수를 하기 위해 왔으니 살기등등하게 왔을 것이고 분명 이곳의 사람들을 전부 죽일 거예요." 웅묘아도 목쉰 소리로 말했다. "그렇군. 그때쯤에는 우리도 그들에게 죽음을 당할 거야. 비록 우리가 해명을 해도 그들은 우리들의 말을 믿지 않을 거야." 왕련화가 한 자씩 내뱉었다. "바로 그렇소. 용권풍이 이곳에 도착하면 쾌락왕의 진영은 초토화될 것이오." 주칠칠은 매우 당황해하면서 물었다. "심랑, 우리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심랑이 담담하게 말했다. "너무 초조해 하지 마시오. 우리는 어쩌면 아직도 살 수 있는 기회가 있을 것이오." 여기까지 말하고는 갑자기 큰소리로 외쳤다. "거기 있는 형씨들, 잠시 이곳에 와 주시겠소? 순찰하던 대한들은 서로 웅성웅성하면서 상의를 나누는 듯하더니 드디어 두 사람이 걸어왔다. 한 사람은 키가 훤칠하게 컸고 또 한 사람은 깡마르고 창백했다. 훤칠한 키의 대한이 고함치며 물었다. "뭣 때문에 오라는 거냐?" 심랑이 말했다. "이곳은 바람이 너무 세요. 수고스럽지만 우리들을 뒤로 옮겨서 바람을 피할 수 있게 해주시겠소? 그리고 담요도 몇 장 갖고와서 우리에게 덮어 주겠소?" 그 대한은 '칙'하고 웃었다. "모두들 너를 강철인간으로 생각하는데 알고보니 너의 몸도 대단히 연약하군." 비록 입으로는 그렇게 말했지만 말투로 봐서는 승락하는 듯했다. 이때 그 깡마른 사람이 냉랭하게 말했다. "대왕께서 재삼 당부하시기를 이 사람들은 하나같이 모두가 여우 같이 약으니 섣불리 행동하지 말라고 하셨소. 우리 될 수 있으면 일을 줄입시다." "내가 보기에도 이들이 너무 딱하군. 하물며 이들은 이제 손가락조차 움직일 힘도 없는데 우리에게 어쩌겠어? 우리 좋은 일 하는 셈치자." 그 깡마른 사람이 다시 물었다. "당신이 책임 지겠소?" 심랑이 미소 지으며 참견했다. "형씨께서 책임을 지지 못하겠다면......."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 대한은 큰소리로 외쳤다. "물론 내가 책임진다. 일이 잘못되도 내가 책임진다." 그는 노기가 충천하여 걸어가더니 세 명의 대한을 불렀다. 그리고 즉시 심랑 등을 천막 뒤의 바람을 피할 수 있는 곳에 옮겨놨다. 악의 등불도 이곳을 비추지는 못했다. 대한들이 모두 멀리 가자 주칠칠은 참지 못하고 또 물었다. "이곳은 더욱 안전하지 못할 텐데요." 심랑이 탄식을 했다. "물론 안전하지는 않지. 하지만 악에 있는 것보다는 훨씬 났지." 주칠칠이 다시 물었다. "우리가 진영 속에 있는 것도 아닌데 이 천막의 악과 뒤의 차이가 있다면 또 얼마나 있겠어요?" "이 곳은 등불빛이 비치기는 어려운 곳이오. 용권풍이 공격하러 올 때는 이 곳을 주의하지는 않을 것이오. 가장 중요한 점은 바로 이 천막의 앞쪽이 매우 세게 줄로 당겨져 있다는 것이지. 뒤쪽을 받쳤기 때문에 뒤쪽이 무거울 것이고. 용권풍이 공격을 해오면서 이 천막을 쓰러뜨리려면 반드시 이 천막 악에 있는 줄을 끊을 것이오. 그럼 천막은 뒤로 쓰러지면서 우리들을 덮어씌울 것이오." 주칠칠이 생긋 웃으며 무슨 말을 하려 할 때 왕련화가 한숨을 내쉬었다. "심랑의 장점은 바로 머리카락처럼 세심하다는 것이오. 모든 사물에 대해서 하나도 놓치지 않고 관찰하거든? 난 심랑 말고는 이렇게 세심한 사람은 본 적이 없소." 주칠칠이 웃으면서 말했다. "그렇구말구요. 아무도 주의 못한 일들도 심랑은 전부 유념하고 있어요. 비록 그러한 것들이 별것이 아닌 듯하지만 중요한 순간에는 매우 유용하게 되죠. 예를 들어서 이 천막의 악은 가볍고 뒤가 무겁다는 것을 우리들 중 그 누가 주의했겠어요? 하지만 심랑만은......." 이때 갑자기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말 떼들은 천천히 걸어오다가 가까이 올수록 더욱 속력을 내는 듯했다. 웅묘아의 표정이 변했다. "드디어 그들이 왔구나." 주칠칠이 웃었다. "심랑은 과연 틀리지 않았군요." 그녀는 비록 웃고 있었지만 웃는 표정에는 당황하는 빛이 떠올랐다. 그녀는 기뻐해야 할지 놀라야 할지를 모르는 듯했다. 진지를 지키고 있던 대한들은 당황해하면서 혼란에 빠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