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 극장 쇼의 슈퍼스타 [정원]
그는 방송이 아닌 라이브 무대와 음반만으로 정상의 인기를 누린 특이한 가수였다.
지금도 올드 팬들의 애청곡인 대표곡 [허무한 마음], [미워하지 않으리], [내 청춘]등을 비롯해
그가 남긴 600여곡 중 방송 차트에 올랐던 곡은 한 곡도 없다.
이름보다는 노래로 더 알려진 그는 원조 언더 그라운드 가수로 불릴만 하다.
방송 개국 러쉬가 이뤄졌던 60년대는 여전히 극장쇼무대의 비중이 방송에 버금가는 비중을 지녔었다.
패티김, 이미자, 박재란, 최숙자, 최희준, 김상희는 말이 필요 없는 60년대 최고 스타였지만,
극장쇼 무대의 스타는 그들 외에도 정원, 쟈니리, 이금희가 공존했다.
주류 방송 가수가 아닌 정원이 60년대 각종 신문, 잡지와 전국의 방송국에서 50여개의 가요상을 휩쓴
최고 가수로 군림했던 것은 그 같은 시스템때문..
세월과 함께 이름은 잊혀졌지만 정원의 음반들은 마니아들에겐 여전히 수집 아이템으로 꼽히는 것도 그 덕택이다.
여수 시민극장과 동방극장의 지붕을 뚫고 들어가 남인수, 현인의 공연과 악극단 공연을 보기 시작했다.
[처음 극장 쇼를 보니 너무 좋았다. 당시엔 남인수, 최숙자의 트로트보다 현인, 윤일로, 안다성, 손시향,
도미의 노래가 리듬이 있어 좋았다. 나이가 든 지금은 트로트도 좋아졌지만.]
그는 레코드가게에서 살면서 폴 앵카, 냇 킹 콜, 미소라 히바리, 프랑크 나가이등 외국 가수들의 노래를
음반과 제니스 라디오를 통해 접하며 가수의 꿈을 막연하게 품었다.
이후 여수 KBS 라디오 밴드가 카바레에서 연주를 할 때 뒷일을 봐주다 가수가 되었다.
트로트가 주류였던 당시 율동을 곁들여 팝송을 노래한 정원은 여수에서는 제법 노래 잘 하는 가수로 알려졌다.
60년 4ㆍ19로 혼란스럽던 때, 여러 사건에 연루되어 경찰서에 잡혀 들어갔다.
아버지의 도움으로 나온 뒤 여천군 화양리로 피신해 멸치잡이를 했다.
어느 날, 순천에 동춘서커스가 들어왔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가 쇼 단원이 되었다.
전국을 돌다 경기도 오산 서정리 비행장 인근에서 한달간 공연 후 무작정 상경했다.
처음 한양공고 친구들 집을 전전했지만 서울역에서 리어커를 끌며 2원짜리 꿀꿀이 죽을 먹으며 부랑자들이
머무르는 남대문 아편골에서 기거하는 힘겨운 세월을 보냈다.
그러던 중 남대문 시장 자유극장에서 김상국이 [블루 벨리]를 부르는 쇼를 보고 여수의 선배인 트럼펫 주자 최정문을 찾아 갔다.
그의 주선으로 밴드마스터 한창길을 만나 구봉서쇼의 오프닝 무대에 올라갔다.
잔뜩 긴장하고 노래를 시작하는데 한 관객의 야유로 싸움을 하였다.
시작부터 망신을 당했지만, 음악친구인 미 8군 기타리스트의 집에 묵으며 화양의 오디션을 어렵게 통과해 결국 미 8군 가수가 되었다.
그때부터 강숙자가 단장인 새나라쇼, 백봉호가 단장인 서울쇼, 백갑진이 단장이 부산쇼등에 객원가수로
스지큐등 경쾌한 외국곡을 불러 인기를 끌었다.
◈ 당시 시민회관은 최고의 무대.
그는 하루 4회 공연에 700원(당시 택시 요금이 30원)을 받는 무명 가수였다.
66년 어느날 낙원극장 공연 때 이미자의 첫 남편인 콘트라 베이스 연주자 정진흡의 주선으로 쓰리보이가
사회를 보던 시민회관의 이미자 쇼 무대에 서게 되었다.
권혜경 등 인기 가수들이 총망라됐던 어느 날 공연. 유독 관객들의 반응이 없었다.
순서가 오자 겁도 나고 최장권 악단이 악보를 요구하며 반주를 거부해 포기하려 했다.
시민회관 단장의 도움으로 겨우 무대에 오르는 무명 가수의 서러움까지 겪자 오기가 발동했다.
강한 인상을 주기위해 얼굴에 검은 색 칠을 하고 도리구치 모자를 쓴 채 와이셔츠를 밖으로 빼 묶는 특이한 모습으로 무대에 나갔다.
우선 [하운드 독]을 원래의 빠른 템포가 아닌 슬로우 템포로 변형했더니 앵콜이 터져 나왔다.
당황한 밴드의 반대가 있었지만 단장의 요구로 내친 김에 핸드 마이크를 들고 객석을 드나들다
아예 무대에 드러눕는 파격적인 열창으로 무려 4번의 앵콜을 받았다. 시민회관 데뷔 무대는 대성공이었다.
단숨에 게런티 3천원의 가수로 떠올랐다.
◈ 빅히트 몰고 다니던 가요계의 영원한 [마이너리티]
그날 시민회관 객석에는 출연 교섭을 위해 상경한 지방극장의 쇼단장들이 즐비했다.
정원의 정열적인 무대를 본 지방극장 쇼단장들이 홀딱 반했던 것.
그때부터 시민회관 무대의 단골 가수가 되면서 그는 극장 쇼의 슈퍼 스타로 떠오르는 계기를 마련했다.
당시 극장 쇼 무대에서 12번씩 앵콜을 받은 가수는 정원과 미 8군 여가수 최진이가 있었다.
재건 열기가 높았던 당시, 관객들은 느린 곡 보다는 빠른 노래를 좋아 했다.
또 관객들은 극장쇼의 스타로 떠오른 쟈니리와 정원 가운데 [누가 노래를 더 잘 하냐]며 경쟁을 부추겼다.
첫 대결은 서부역 앞 봉래극장. 팝 가수들만 출연하는 쇼에 라이벌 의식이 발동한 정원과 쟈니 리는
한 무대에 서지는 않았지만 대중의 큰 관심을 모았다.
당시 청바지에 청재킷을 즐겨 입었던 정원, 트위스트 김, 쟈니 리는 속칭 [양아치 클럽]으로 불리며 최고의 인기를 구가했다.
소문을 들은 박성배 킹레코드 사장이 음반 취입을 제안해 왔다.
두 달이 지나도록 무소식이던 그가 연락도 없이 동대문극장 무대로 찾아 와 녹음을 요청했다.
계약된 공연을 펑크낼 수 가 없어 다음날 마장동 스튜디오로 갔다.
작곡가 오민우, 작사가 전우, 미 8군 밴드의 샤우더스가 기다리고 있었다.
취입 곡이 무엇인지도 몰랐던 정원에게 킹박은 [평소에 부르던 곡을 부르면 된다]고 했다.
만두국으로 점심을 먹을 때 전우씨가 [하운드 독을 어떻게 부르냐]고 물었다. 노래를 불러주자
전우씨가 즉석에서 가사를 쓰고 제목을 [사냥개]로 정했다.
작곡가 오민우의 [허무한 마음]도 피아노 반주를 듣고 멜로디를 외워 곧 바로 동시 녹음에 들어갔다.
황당했던 데뷔 음반의 녹음은 단 이틀만에 종료되었다.
녹음 후 지방 공연을 돌던 중 재킷 사진 때문에 찾아 온 킹박과 대전에서 급히 상경해 국도극장앞 사진관에서
촬영을 했다. 일주일 후 부산공연 때 사방에서 울려 나오는 자신의 노래를 들었다.
1966년 10월 데뷔 음반 [정원과 샤우더스]가 발매 되었던 것.
또한 [허무한 마음]이 빅히트가 터지자 킹박은 흘러간 노래 모음집 등 연이어 정원의 기획성 음반을 찍어냈다.
당시 킹박은 보따리 장수 수준의 제작자.
음반은 인기리에 팔려 나갔지만 메이저 음반사가 아닌 킹에서 홍보를 하지 않았던 탓에
방송엔 출연할 기회도 잡지 못하고 심지다방 등 다운타운가를 돌며 홍보를 해야 했다.
또한 [미워하지 않으리] [내 청춘]등이 히트 퍼레이드를 벌였지만 돈 한 푼을 주지 않아, 그랜드레코드로 전속을 옮겨 버렸다.
다급해진 킹박이 다시 음반을 찍자며 60만원의 거금을 뒤늦게 건냈지만 물 건너간 상황이었다.
첫댓글 내가 좋아하는 정원님의 스토리 잘 읽었습니다. 나는 음악 한곡의 추억 이 코너가 제일 좋더라 ㅋㅋㅋ
ㅎㅎㅎ
@solo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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