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가산 광흥사 鶴駕山廣興寺
경북 안동 서후면 대한불교조계종 제16교구 고운사 말사
광흥사(廣興寺)는 신라(新羅) 신문왕(神文王)때 의상대사(義湘大師)께서 창건(創建)하신 고찰(古刹)로서
정확한 건립연대나 그동안의 사적(史蹟)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현존(現存)하는
사적(事蹟)으로는 광흥사중건사적1권(廣興寺重建事蹟1卷 (戊子年1828년))이 남아 있다.
이 사적(事蹟)의 중수기(重修記)에 의하면 의상대사(義湘大師)의 창건과 고려불교의 중흥기를 거쳐,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는 왕실(王室)의 원당(願堂)이었으며, 광흥사에는 조선왕실(朝鮮王室)의
어첩(御帖)과 유물(遺物) 및 여러 경전(經典)을 봉안(奉安)하였다는 기록과 함께 안동지방에서
가장 규모가 큰 사찰(大刹)이었다는 내용들이 남아 있다.
세조대왕(世祖大王)은 윤사로(尹師路)등 19인에게 법화(法華), 반야(般若)등 여러 경전(經典)을
간행(刊行)하게 해서 봉안(奉安)하였으며, 세종대왕(世宗大王)의 친서(親書) 수사금자법화경1권
(手寫金子法華經1卷)과 영조대왕(英祖大王)의 친서(親書) 대병풍(大屛風)16帖과 어필족자(御筆簇子) 1개 등
왕실(王室)의 어필(御筆) 어시(御詩) 등 다양한 유묵(遺墨)이 봉안되었으며, 명(明)나라 인효황후
(仁孝皇后)의 권선서(勸善書) 150권(卷)중 10권(卷)을 조정(朝廷)으로부터 내려 받아 봉안하였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광흥사(廣興寺)는 1827년(丁亥年) 화재로 인하여 시왕전(十王殿)과 일주문(一株門)을 제외한 법당(法堂)
승당(僧堂) 경당(經堂)을 비롯하여 여러 전각(殿閣)과 함께 500여간(餘間)에 이르는 많은 건물들이
화재로 소실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불상(佛像)과 경전(經典), 어첩(御帖)과 원당(願堂)의 병풍(屛風)등
많은 유품(遺品)들이 보전되었다.
1828년(戊子年)에 기록된 《광흥사중건사적(廣興寺重建事蹟)》에는 『안동광흥사중수잡록
(安東廣興寺重修雜錄)』과 여러 장의『중수기(重修記)』그리고『광흥사대웅전상량문
(廣興寺大雄殿上樑文)』uc0『설선당상량문(說禪堂上樑文)』uc0『심검당상량문(尋劒堂上樑文)』 등이
모아져 있는 것을 볼 때 복원불사(復元佛事)가 이루어졌음을 알 수가 있다.
1946년 또다시 대웅전(大雄殿)이 화재로 소실(燒失)되었으며, 1954년 극락전(極樂殿)과 1962년
학서루(鶴棲樓)와 큰방이 낡아서 무너졌으며, 지금은 전통건물(傳統建物)로서
응진전(應眞殿 문화재 제165호)만 남아 있는 상태다.
응진전(應眞殿)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다포계 건물로서 내부는 통칸이며, 바닥에는 우물마루를 깔았다.
내부에는 통일신라때 조성한 석가모니불상과 좌우에 미륵보살상과 제하가라보살상이 모셔져 있으며,
한국에서 가장 웅장한 16나한상이 모셔져 있다.
현재 광흥사 일주문 옆에는 가슴높이 둘레가 7.5m이고,
수령이 400년이 넘는 노목거수 은행나무가 자리하고 있다.
현존하는 역사적 유물(歷史的 遺物)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유형문화재 제313호 안동광흥사장금자사경1첩 (安東廣興寺藏金字寫經1帖)
국립경주박물관에
보물 제 314호 취지금니 묘법연화경
보물 제 315호 백지묵서 묘법연화경
국립중앙도서관에
水陸無遮平等齎儀撮要[中宗 33(1538)]後刷
預修十王生七齋儀纂要 / 大愚(朝鮮) 集述 [宣祖 9년(1576)] (木板本)
金剛般若波羅蜜經變相 [宣祖3년(1570)] (木板本)
蒙山和尙六道普說 / 蒙山(元) 著 [中宗 34(1539)] (木板本)
佛說長壽滅罪護諸童子陀羅尼經 / 佛陀波利譯 [明宗17(1562)] (木板本)
妙法蓮華經. 卷1,5-7 / 鳩摩羅什(秦) 奉詔 譯 [中宗22(1527)] (木板本)
현재 『훈민정음해례본』등 많은 유물들이 도굴범들에 의해 약탈된 채, 그 행방을 알 수 없어
안타까운 실정이다. 광흥사는 안동출신인 학조대사와 인연이 깊은 사찰이었으며,
학조대사는 훈민정음 창제에 관여한 신미대사의 제자였다. 학조대사의 본관은 안동(安東)이며,
부친은 김계권(金係權)이다. 호는 등곡(燈谷)·황악산인(黃岳山人)이며, 신미(信眉)·학열(學悅) 등과 함께
선종의 승려로서 세조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여러 고승들과 함께 많은 불경을 국어로 번역, 간행하였다.
새로 건축된 광흥사 대웅전과 삼존불
훈민정음 해례본이 발견된 광흥사의 명부전
명부전에 있는 10여개의 시왕상 안에서 고려 말기에서 조선시대 임진왜란 이전까지
200여년 사이에 간행된 고문헌 250여건을 발견되었습니다. 광흥사와 조계종 총무원은
복장유물(불상을 만들 때 불상 안에 넣는 불경 등 문화재)의 도난 방지를 위해
시왕상들을 개복했다가 안에 있던, 15개 상자 분량의 고문서들을 발견했습니다.
1213년 간행된 것으로 기록돼 있는 ‘종경촬요’와 1387년 고려 우왕 때 간행된
‘대혜보각선사서’ 등 불교 교리와 관련한 것들이 많았으며 ‘대혜보각선사서’에는
목은 이색의 발문도 있었습니다. / 2013.11.23.
‘월인석보’나 ‘선종영가집언해’는 훈민정음이 창제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의 글자와 말을
그대로 담고 있어 한글의 변천사를 확인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고 국학진흥원은 밝혔습니다.
광흥사 주지 범종 스님은 “한글로 된 고서도 많이 나온 점 등으로 미뤄
광흥사가 한글 창제 및 반포 과정에서 상당한 역할을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습니다.
광흥사 명부전 지장보살님과 시왕상들
광흥사 응진전
광흥사 응진전의 소조 삼존불
복장유물이 일찍이 도난당해 그 기록은 알수 없으나 참 독창적이고 아름다운 소조부처님입니다.
광흥사 응진전의 나한님
2014.2.23.15.무렵
첫댓글 광흥사는 조계종단과 협의, 문화재청에 2013년에 발견한 고문서들에 대한 분석과 감정을 의뢰하는 한편 불교중앙박물관에 이들 고문서를 보관할 방침이다.
광흥사는 신라 문무왕 때 의상 대사가 창건한 사찰로 16세기에는 금강경·부모은중경 등 많은 불경을 간행하기도 했다고 국학진흥원 측은 설명했다.
지난 2008년 경북 상주에서 발견된 뒤
소유권 및 절도 소송에 휘말려 행방이 묘연한 ‘훈민정음 해례본 상주본’이 애초 이곳의 복장유물이었다는 주장이 재판과정에서 나오기도 했다.
한국국학진흥원 임노직 목판연구소장은 “고려 말에 목판으로 간행된 불교경전류가 10종 이상 다량으로 발견되기는 극히 드문 일”이라며
“조선시대 고서도 많이 발견돼 목판 인쇄 연구는 물론 한글의 변천사를 확인하는 데도 중요한 자료로 문화재 가치가 높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