벚꽃에 관한 시모음 27)
봄밤 /신춘희
벚꽃, 바람에, 나비 떼처럼, 질 때
덧없이 아름다워서
나는,
운다
마음, 허무하고나
어느새 아이
이순
벚꽃의 향연 /최원종
꿈을 간직하고 오동통하게
부풀어 올랐던 분홍빛 벚꽃이
환한 웃음 터트려 행복을 선물한다
환한 웃음 한가득 담아 선물 하는 벗님
자지러질듯한 웃음소리에
바람도 손뼉을 치며 웃음의
가로수 길을 날아간다
바람의 어깨에 실린
분홍빛 꽃잎은 꽃비가 되어
대지를 꽃밭으로 만들어 놓는다
꽃밭에 뿌려진 꽃잎의 고운 마음
가슴으로 스며드는 봄 향기
가득 담으러 함박웃음 지으며
몰려드는 상춘객의 발걸음은
가볍게 춤추는 듯 날아온다
벚꽃 /박선주
벚꽃 나무는 하얗게 눈을 쓰고 있다
쌓인 눈은 간혹 바람에 날리고 있다
겨울 내내 꽃은 나무속에 숨어 있다가
밀어내는 힘에 못 이겨 시나브로 터져 나와
잎으로 혹은 꽃으로 피어나 길 밝히고 있다
저 엄연한 상처 혹은 주검
눈 녹고 나면 수태한 계절의 발자국 따라
이 사월도 갈 것이다
벚꽃 /김주완
수많은 여인들이 한꺼번에 몰려나와 환하게 웃고 있습니다.
눈부시게 아름다운 날입니다.
희다 못해 푸른빛이 도는 저 살결 너무 고와 차마 손대지 못하겠습니다.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겠습니다.
사람마다 한때는 저런 사람 있었겠지요
벚꽃 회의 /박주하
납골당 마당에서 긴급하게 가족회의가 열렸다 부친의 유골은 2층에 봉안되었는데 자식의 뼛
가루를 3층에 올리는 것은 불효라고 주장하는 유족들, 울타리 넘어 봄날의 꽃밭으로 날아간 영
혼의 행적은 묘연한데 고인의 뼛가루가 남아서 여전히 식솔들을 통섭한다. 납골당의 원칙을 내
미는 관리인들과 생을 졸한 순서를 따지며 핏대를 세우는 유족들의 대치가 팽팽하다 오래된 벚
나무들이 인간의 별난 절차를 경청하며 잎 먼저 틔운 삶과 꽃 먼저 피운 저들의 생애를 배심한다
생사의 위계질서가 설왕설래 하는 마당에 산벚의 꽃잎들이 하얗게 흐드러지고 겹친다 죽음이란
어쩌면 지는 저 꽃잎처럼 가볍고 아름답고 무정한 일, 멀리 간 사람은 입을 잃었으니 지나가는
바람의 목이나 한번 죄어볼 뿐, 꺾이지 않는 가족이란 말이 가죽처럼 질기다 고인의 여정이 소풍
처럼 즐거웠으려나, 끝나도 끝난 게 아니어서 마지못해 불멸을 생각한다
벚꽃 지는 날 /김영태
철없이 왔다가
덧없이 가버렸다
더 이상 화려할 수 없게
더 이상 서운할 수 없게
한바탕 화사한 꿈속에
어지러운 눈물의 아름다움
아,
나의 첫사랑이 너와 같았으리!
벚나무에 묶이다 /김경호
저 왕버들 우듬지 휘돌아 하늘 멀리
기러기 한 무리 물결처럼 퍼지며
해 저무는 쪽으로 날아가고
스산하고 어둑한 2월의 저녁 물가에선
고니 세 마리 동쪽 둥지 찾아
시린 발 오므려 바쁘게 날아가는데
여기는 기차가 서지 않는 벚꽃역 앞
늙은 벚나무 아래에서
피지 않는 벚꽃 봉오리 기다리며
우리 노래를 부를까요
어느 날 아침 문득
늙은 왕벚꽃 피어나 그리운 봄이 가고
목화송이 같은 벚꽃
송이째 져내려 발목을 덮으면
40년 전 은행나무 역을 지나온 벚꽃 열차가 들어와
벚나무에 묶인 우릴 싣고
먼 다음 역으로 떠날 때까지
버찌 /전선용
벚꽃이 낙하하고 얼마 뒤 버찌가 떨어졌다
말하자면 벚꽃은 전조증상
팔랑개비 같은 꽃잎은 쓸려갔지만
버찌는 콘크리트 바닥에 할 말을 거뭇거뭇 남겼다
그들만의 언어로 보도블록에 눌러앉은 종족의 유서들
스타카토같이 찍힌 무성한 말 줄임
대를 잇는 증표다
잘 살아라,
아버지가 남긴 호흡도
내게 거뭇거뭇 남았다.
벚꽃 복지 /권영부
그 강가의 벚나무 등짝에서 훑어낸
피땀들이 강물을 이뤄 돌돌돌, 흐르고 있었다
그 강가에 터 잡은 가녀린 벚나무 한 그루가
하나, 둘, 셋, 넷, 그리고 다섯, 여섯
차례차례, 강물 위에 벚꽃들을 내려놓았다
그 강물에 환하게 드리워진 벚나무가 어미 품이니
여섯 벚꽃들은 모두가 허둥대지 않고
대처로 무던하게 흘러나갔고,
송사리처럼 살랑대며 홀가분하게 살았다
그 사이 홀로 버틴 늙은 벚나무,
어깻죽지가 내려앉자
노인복지병원으로 터전을 옮겼다
그곳 하얀 침대에서 창밖으로 다가오는
새봄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늙은 벚나무,
자식들이 내 준 복지를 뒤집어쓰고
벚꽃처럼 스르르, 사그라져야 한다
그 늙은 벚나무가 살던 집에는 전기요금고지서만
하얗게 쌓이고 있었다
벚꽃 /이태수
겨우내 웅크리던 벚나무들이
가지마다 꽃잎을 가득 달고 서 있다
간밤에 침묵이 떨궈낸
하얀 보푸라기들을 뒤집어쓴 듯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이른 봄 하늘을 바라보며 서 있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게 뛰어내리는
햇살들이 그 위에 포개져
더욱 하얗게 빛을 쏘아대는 벚꽃들
새들은 마치 이 신성한 광경을
나직한 소리로 예찬이라도 하듯이
벚나무 사이를 날며 노래 부르고 있다
하지만 이내 온 길로 하나같이
다시 되돌아가버리고 말
저 침묵의 눈부신 보푸라기들
벚꽃 다 날아 가버리고 /박숙이
다 날아 가버렸다, 추위를 견디며 자수성가한 화사한 꽃잎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비바람 심하게 몰아쳐 강제 추심을 해버렸다
빈 털털이가 된 몸, 홀가분하다고, 괜찮다고,
가진 것 다 날아갈 적에 두려움마저 훨훨 날려 보냈다고
때를 다시 한 번 슬슬 구슬려 보겠다고
그러나 그럴 때에 내게, 바람막이 하나쯤 있었으면 어땠을까 하고
빈 가지인 가슴에 대고 눈물로 두서없이 회유해본다
산벚꽃나무 /나태주
뒤로 물러서려다가
기우뚱
벼랑 위에 까치발
재겨 딛고
어렵사리 산벚꽃나무
몸을 열었다
알몸에 연분홍빛
홑치마 저고리 차림
바람에 앞가슴을
풀어헤쳤다.
산벚꽃 /정진규
북한산 산벚꽃들은 단칼에 작살내더라
내 어둠들을 일거(一擧)에 거두어내더라
그렇구나 일거라는 말이 있었구나
꽃들로 화안히 지워내더라
꽃봉분을 만들더구나
화들짝 알몸 떼거리로써
벚꽃 진다 /황구하
저 검은 몸속 어디
하늘로 가는 길 은밀히 뚫어 놓았나
여의주 문 물고기 한 마리
지금 막 헤엄쳐 나간 게 분명하다
시리디시린 하얀 비늘들
저리 환히 쏟아지는 걸 보면
벚꽃 /송태준
저토록 자지러지는 절정 한 번 터치려
겨우내 잔가지는 댑바람을 잡아 울고
뿌리는 또 죽을힘까지 밀어 올렸나 보다.
쟁여둔 속마음을 더는 버틸 수 없어
한순간 터뜨리는 활화산의 눈부신 자폭
이승을 떠돌던 원願이 꽃송이로 죄 터졌나.
기껏 이레장 한 판 흐드러지게 펼쳐 놓고
추한 뒤태 보이기 싫어 서둘러 간 걸음 뒤
달떠서 안달하는 봄, 신열 후끈 도진다.
벚꽃 기침 /이영란
사랑이라고 벚꽃이 핀다
기침이 터진다
허공의 집 한 채
잊은 듯이 살다가
컹컹 벚꽃이 피었네
허공의 집일수록
알뜰해야 한다네
컹컹 벚꽃이 피었네
컹컹 하늘을 기웃기웃
컹컹 허공의 집이 열렸네
벚꽃사랑 /장수남
사랑이여!
이젠 너무 슬퍼하지 말래요.
봄비 내리는 저녁
이별의 편지를 쓰겠대요.
지워진 립스틱은
아침 이슬 한 잎 예쁘게 고쳐 물들이고
어느 늦은 봄날은 햇살 손짓할 때
하늘나라 찾아 가야한대요.
아름다운 벚꽃사랑 활짝 피우고
그대 그리움들은 꽃바람 되어
연초록빛 세상 하얗게 뿌리면 금빛마차
마중 나와 별나라 먼 길 떠난대요.
벚꽃 /안선희
교정을 뒤덮은
눈부신 자태
발길 멈추고
한참을 쳐다보았네
우리가 함께 걸었던
윤중로에도
벚꽃이 만개하였다
당신은 이제 없고
외로이 서 있는
파아란 하늘가
불꽃 터뜨린
꽃망울 화려해서
눈물이 핑 돈다
벚꽃 /靑心 장광규
봄이면 벚나무에
향기 나는 꽃이 핀다
옥수수 튀밥 같은
꽃이 수없이 달린다
마냥 보고 싶은
순한 아이의 얼굴이다
해맑은 웃음을 터뜨리며
따라서 웃어보란다
나무는 두 팔 벌려
꽃등과 꽃등을 연결하고
손댈 수 없는 신비스러움으로
꺼지지 않는 불빛으로
낮이나 밤이나 변함없이
흥겨운 꽃 잔치를 펼친다
햇빛은 너그럽게 따사롭고
벌들도 찾아와 장단 맞춘다
가을 벚꽃 /이두철
십일월 초입
내소사 앞 마당가 벚나무 한 그루
빨간 단풍을 지우고 있다
어디를 헤매다 길을 잃었을까
어디쯤 가다가 어미 손을 놓았을까
봄은 여름에 밀려가고
새봄은 혹독한 겨울을 건너야 다시 오는데
철 잃은 벚꽃들
뭐 그리 급해서 단풍 틈에 홀로 피었을까
뭇 시선들이 모여들어도
왠지 쓸쓸해 보이는 것은 가을 탓일까
어느 대학 교수는
촛불 정부의 눈에 들어
개혁의 칼날을 움켜쥐었지만
봇물처럼 쏟아지는 비리들이
나라를 좌우 두 갈래로 갈라놓고
만신창이가 된 가족의 품으로 쓸쓸히 돌아갔다
순리를 거스르는 가을에 핀 벚꽃처럼
벚꽃처럼 /김임백
벚꽃나무들
옹알이하는 갓난아기처럼
며칠 동안 입 달싹거리더니
갑자기 말문 터져 시끌벅적하다
섣불리 터뜨릴 수 없어
가슴앓이 했으리
이제는 말할 수 있노라
지나가는 사람들 옷자락 붙잡으며
야단스레 늘어진다
벚꽃처럼 말문 터져
시 한 줄 읊었으면 좋으련만
곳간처럼 텅 빈 머릿속 거미줄 쳐져
답답한 가슴 찢어발겨도
숨겨진 속마음 드러낼 수 없다
시여, 내게로 오라
세상 훤히 밝힐 나의 벚꽃나무
벚꽃지다 /김종해
이제 비로소 보이는구나는
봄날 하루 허공 속의 문자
하르르 하르르 떨어지는 벚꽃을 보면
이생의 슬픈 일마저 내 가슴에서 떠나는구나
귀가 먹먹하도록
눈송이처럼 떨어져 내리는 벚꽃을 보면
세상만사 줄을 놓고
나도 꽃잎 따라 낙하고 싶구나
바람을 타고
허공중에 흩날리는
꽃잎 한 장 한 장마다
무슨 절규 무슨 묵언 같기도 한
서로서로 뭐라고 소리치는 마지막 안부
봄날 허공중에 떠 있는
내 귀에도 들리는구나
어린 벚꽃나무가 꽃피는 밤 /양애경
괜히 신경이 서는 날
어린 벚꽃나무 한 그루를 생각한다
가느단 손가락 마디마다
물에 갓 씻은 銀같은,
보름날 달빛 같은 꽃봉오리를 달고
몸은 흑단빛,
뭉크의 <사춘기>에 그려진
이제 막 몽긋 부풀어오르기 시작한 젖가슴과
하나로 꼭 붙인 가늘고 긴 다리를 가지고
불안한 눈빛을 한 소녀
그 소녀
어린 벚나무 밑둥에 묻혔다
유린당하고 목 졸려 살해되어
하늘은 진즉 어둡고
어두운 자주색 능선 위로
봄이 올 듯
밤공기가 뿌옇게 서성이는데
기름진 산흙 속에서
소녀의 하얀 허벅지가 분해된다
긴 갈색 머리카락은 아직
어느 벌레도 먹지 못했다
괜히 자다 깨어 잠 오지 않는 밤
눈을 감으면
어린 벚꽃 봉오리에서
팝콘처럼 하얗게 하얗게
꽃잎이 밀려나오는 게 보인다
일시에 쏟아져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