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의 역사(Ⅲ-1) : 왜 청나라에서 산업혁명이 발생하지 않았을까?
세계 역사를 바꾼 50대 사건의 배경을 살펴봄으로써,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이해의 폭을 넓혀볼 수 있다. 역사의 중심엔 항상 ‘돈’이 있다. 역사에서 교훈을 얻으려면 그 이면에 있는 ‘돈‘을 바르게 알아야 한다. |
산업혁명이 발생하기 이전, 한 나라의 국력은 인구수에 의해 좌우되었다. 프랑스가 만년 2등자리에 있으면서도 끊임없이 1인자(스페인, 네덜란드, 영국 등)에게 도전할 수 있었던 건 거대한 인구 덕분이었다. 이는 동아시아에서도 마찬가지다. 중국은 많은 인구 덕분에 각종 혁신을 주도할 수 있었다. 시장이 큰 곳에서 혁신이 일어나기 마련이며, 큰 시장을 가진 나라가 경쟁력이 있는 건 당연한 일이다. 세계 4대 발명(화약, 종이, 인쇄술, 나침반)이 모두 중국에서 이뤄진 것이 이를 방증한다.
그런데 왜 산업혁명은 중국이 아닌 서유럽 끝에 자리한 영국에서 시작되었을까? 이 대목에서 잠깐 산업혁명(Industrial Revolution)에 대해 살펴보자. 산업혁명은 간단히 말해 지속적으로 1인당 소득 증가가 나타나는 이른바 ‘근대적’ 성장이 지속되는 현상을 지칭한다. 인구와 소득 통계가 잘 정리되어 있는 영국 잉글랜드 지방의 통계를 기준으로 살펴보면, 1인당 소득과 인구는 1600년까지 반비례 관계였다. 다시 말해, 인구가 늘면 1인당 소득이 줄고, 반대로 인구가 줄면 1인당 소득이 늘어나는 세상이었다. 인구가 감소해야만 1인당 소득이 늘어나는 현상을 ‘맬서스 함정(Malthus Trap)’ 이라고 한다.
맬서스 함정이란 간단하게 말해 기술적 진보가 매우 더딘 세상을 의미한다. 물론 고대 그리스와 로마에 비해 르네상스 시대 사회는 분명히 진보했다. 그러나 당시를 살던 사람들이 세상이 나아지고 있다고 느끼기는 대단히 힘들었다. 1260년부터 1650년까지 잉글랜드의 1인당 소득은 연 0.6% 늘어나는 데 그쳤는데, 이 정도의 성장은 당시 경제 주체들이 인식할 수 없는 수준이다. 결국 1800년을 전후해 잉글랜드에서 산업혁명이 일어나기 전까지 1인당 소득은 인구에 의해 좌우되었다. 1310년 잉글랜드 지역의 인구가 577만 명으로 늘어났을 때가 잉글랜드는 역사상 가장 소득이 적었다(1860년 소득을 100이라 할 때, 1310년의 소득은 43이다). 반면 1450년 흑사병이 돌아 잉글랜드 지역 인구가 228만으로 줄어들자 소득은 87을 기록하며 1310년의 2배 이상 수준까지 상승했다. 즉 전쟁이나 질병이 퍼져 인구가 줄면 소득이 늘고, 반대로 인구가 늘어나는 평화기에는 소득이 감소하는 세상이었던 셈이다.
위 그래프는 1260년부터 1650년까지의 소득과 인구를 보여주는 자료이다. 여기서 가로축은 1860년을 기준(=100)으로 삼은 소득이며, 세로축은 잉글랜드 인구를 나타낸다. 이른바 중세 온난기가 이어지던 1300년 전후까지 잉글랜드 인구는 6맥만 명으로 늘어났지만, 1인당 소득은 1860년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다. 반면 흑사병이 번지면서 영국 인구가 한때 2백만 명으로 줄어들자, 소득은 1860년의 90% 수준까지 상승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위 그래프는 1600년부터 1860년까지의 잉글랜드 인구와 소득 수준을 보여주는 자료인데, 인구가 4백만 명에서 1천 8백만 명으로 4배 이상 늘어났음에도 1인당 소득이 줄지 않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런 현상이 나타난 건 농업혁명으로 수확량이 늘고, 북미 식민지 개척에 성공하면서 교역이 증가하여 인구압(일정 지역 안에 인구가 지나치게 많아 생활공간이 좁아지고 생활수준이 낮아지게 되어 느끼는 압박감)이 완화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산업혁명이 1700년대 후반부터 서서히 시작된 것도 요인이다.
1600년을 전후해 잉글랜드에 변화의 징후가 나타났다. 찰스 1세를 몰아내고 공화정을 수립했다가 다시 왕정으로 복귀하는 혼란스러운 과정에서도 잉글랜드 사람들의 1인당 소득이 꾸준히 늘어난 것이다. 그리고 1800년이 지나면서부터는 ‘인구와 소득의 동반 상승’ 현상이 장기화되기에 이른다. 왜 잉글랜드에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어떤 이는 잉글랜드 사람들이 운이 좋았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영국이 석탄 위에 자리 잡았다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산업혁명을 일으키기에 유리한’ 조건을 가진 데다, 대서양이 태평양에 비해 상대적으로 작아 아메리카 신대륙으로의 항해와 교역이 유리했다는 것이다. 반면 어떤 이들은 ‘제도’에 주목한다. 명예혁명 이후 금리가 낮아진 것처럼, 왕이 자의적으로 세금을 부과하거나 다른 이의 재산을 빼앗는 일이 금지된 세상일수록 혁신을 추구할 유인이 존재한다는 주장이다. 필자 입장에서 마지막 가설은 참 매력적이다. 재산권이 보호되는 좋은 제도를 가진 나라를 만드는 것이야말로 산업화를 추진할 가장 중요한 덕목이라는 주장은 ‘도덕적’ 으로도 참 기분 좋은 설명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후자의 주장을 그대로 수용하기에는 뭔가 찝찝하다. 왜냐하면 네덜란드는 영국보다 훨씬 일찍 주식회사와 중앙은행을 만들었던 전력이 있기 때문이다. 네덜란드뿐만 아니라 일본 중부 지방인 간토도 꽤 높은 수준의 재산권이 형성되어 있었다. 에도막부(徳川幕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1603년 에도에 수립한 무가 정권)가 수립될 당시, 각 지방을 다스리던 영주들은 전쟁에 대비해 막대한 가신(家臣, 높은 벼슬아치의 집에 딸려 있으면서 그 벼슬아치를 받드는 사람)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런데 에도막부가 세워진 후 오랫동안 평화가 지속되자 대부분의 영주들은 재정 압박을 받게 되었다. 영주뿐만 아니라 에도막부의 직할 가신을 의미하는 하타모토(旗本) 조차 사실상 파산 상태에 빠져, 상인의 가계 관리 하에 겨우겨우 살아가는 신세가 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참고로 에도막부는 무려 8만 명의 직속 무사를 거느리고 있었는데, 이는 도요토미(豊臣) 가문을 무너뜨리고 200년 넘게 권력을 유지한 가장 중요한 근거가 되었다. 이 중요한 ‘무력‘이 부실화되는 것을 막기 위해 막부는 다양한 지원을 해주었지만 하타모토들의 재정 파탄을 완전히 구제할 방법은 없었다.
이 상황에서 하타모토들의 유일한 대안은 상인에게 돈을 빌리는 것이었는데, 이때 일본 상인들은 다양한 금융서비스를 발전시키기에 이른다. 예를 들어 영주나 하타모토에게 이들이 보유한 영지에 대한 연공(年貢, 해마다 바치던 공물) 징수권을 담보로 대출을 해주었으며, 대출이 부실화될 경우에는 영주를 대신해 연공을 징수하는 한편 잔여 액을 지급해주는 등의 시스템도 마련했다. 물론 ‘명예혁명’ 이후의 영국만큼 완벽하게 재산권을 행사했다고 말할 수는 없으나, 하타모토라는 특권 신분조차 자신이 진 빚을 갚지 못해 가장 중요한 ‘권리’를 빼앗기는 상황이 발생했다는 것은 재산권 면에서도 상당한 진보가 있었음을 시사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럼 왜 일본은 산업혁명을 일으키지 못했을까? 다음 장에서는 이 문제를 자세히 살펴보겠다.
홍춘욱. 50대 사건으로 보는 돈의 역사 (The History of Money). 로크미디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