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 황금들녁 200 개통 산행(모악지맥 84키로+호남정맥48키로+영산기맥13키로+변산지맥58키로)
*산 행 지 : 전북 김제시, 완주군, 전주시 완산구, 정읍시, 임실군, 순창군, 전남 장성군, 전북 고창군, 부안군
*일 시 : 9월 27일~10월 1일(수요일~일요일)
*산행위치: 전북 김제시 광활면 창제리,진봉면 심포리,고사리, 흥사동, 금구면 대화리, 전북 완주군 이서면 이성리, 전주시 완산구 용복동, 김제시 금구면 오봉리, 월전리, 금산면 청도리, 전북 완주군 구이면 원기리, 김제시 금산면 화율리, 완주군 구이면 안덕리, 백여리, 정읍시 산외면 화죽리, 종산리, 목욕리, 임실군 운암면 마암리, 운정리, 정읍시 산내면 두월리, 능교리, 정읍시 칠보면 반곡리, 순창군 쌍치면 학선리, 방산리, 정읍시 내장동, 신정동, 순창군 복흥면 서마리, 봉덕리, 정읍시 입암면 하부리, 등천리, 연월리, 전남 장성군 북이면 원덕리, 고창군 신림면 가평리, 덕화리, 신평리, 송용리, 부안군 줄포면 줄포길, 줄포리, 주산면 사산리, 상서면 부안로, 감교리, 가오리, 고잔리, 행안면 대초리, 부안로, 동진면 동전리, 김제시 죽산면 서포리에 걸쳐있는 산
*인기명산 순위:모악산(65위), 내장산(36위)
*난 이 도: 중급(암릉5%,흙길55%, 아스팔트40% 등로기준)
*산행 거리:203키로
*산행 시간: 98시간 5분(약130여장의 사진촬영 시간과 식사 시간, 장대비 대피시간 포함)
*출발지 고도: 1m
*만 보 기 : 333,291보
*산행코스 :들머리ㅡ거전마을ㅡ봉화산(84.9m)ㅡ진봉산(73.2m)ㅡ애국지사 곽경렬선생 추모비ㅡ망해사ㅡ국사봉(61.3m)ㅡ이성산(61.9m)ㅡ두악산(52.6m)ㅡ승반산(57.6m)ㅡ79.4mㅡ103.8m봉ㅡ148.6m봉(알바주의)ㅡ전주 쑥고개(약53km지점)ㅡ매봉(251.4m)ㅡ매봉산(200.8m)ㅡ상목산(459.7m)ㅡ독배재(63km) ㅡ매봉(612m)ㅡ모악산(793.5m)ㅡ장근재ㅡ배재ㅡ화율봉(617m 73km지점)ㅡ밤티재ㅡ국사봉(543m)ㅡ닭봉(453.1m)왕복ㅡ엄재(193m)ㅡ373.8mㅡ401.4mㅡ삼계봉(370m)모악지맥분기점ㅡ묵방산(538m)ㅡ284.4mㅡ337.6mㅡ성옥산(388m)ㅡ278.4mㅡ성주봉(371m)ㅡ410m봉ㅡ왕자산(443.8m)ㅡ460m봉ㅡ425.3mㅡ구절재(225m)ㅡ372.3m봉ㅡ미리재ㅡ366.7mㅡ소장봉(423.9m)ㅡ사적골재(315m)ㅡ석탄사ㅡ518.3mㅡ사자산(500m)ㅡ노적봉(553m)ㅡ476m봉ㅡ굴재ㅡ고당산(642.4m)ㅡ520.1봉ㅡ473.4mㅡ개운치ㅡ망대봉(550m)ㅡ470.2mㅡ두들재ㅡ여시목(395m)ㅡ435m봉ㅡ복룡재(370m)ㅡ추령봉(송곳바위봉(540m)ㅡ추령(344m)ㅡ유군치(429m)ㅡ장군봉(696.2m)ㅡ연자봉(673.8m)ㅡ신선봉(763m)ㅡ까치봉갈림길(709m)ㅡ소죽염재(507m)ㅡ영산기맥분기점(513m순창새재)ㅡ새재봉(530m)ㅡ장성새재ㅡ입암산(626m)ㅡ갓바위(641m)ㅡ시루봉(649m야간에는 위험)ㅡ노령ㅡ장성갈재(1번국도 274m)ㅡ변산지맥분기점ㅡ쓰리봉(734m)왕복ㅡ488.1mㅡ소갈재ㅡ289.1mㅡ두승지맥분기점(330m)ㅡ옥녀봉(349.6m )ㅡ송촌마을복지회관ㅡ개암사ㅡ동학농민혁명군 대장 우제 김기병의 묘ㅡ항일의병선봉장 김낙선의사 기념비ㅡ부안 읍내ㅡ동진대교
4년만에 산행기를 쓰려고 하니 어디서부터 어떻게 써내려 가야할지 잘 모르겠네요.
산행기가 길어질 것 같으니 시간 내서 읽으셔야 할 것
같네요.
직업이 인력공사를 하고 있어서 직업 특성상 매일 아침*저녁으로 두번씩 출*퇴근을 해야 하는데 장거리 산행의 매력에 푹 빠져서 몇년을 주말마다 사무실 문을 닫았더니 사무실이 어려워져서 어쩔수 없이 장거리 산행을 접고 매일 모악산을 20~40키로씩 산행하다
그마저도 접고
최근 2~3년간은 매주 산행 초보자분들이나 비만인 분들을 모시고 재능기부산행을 했네요.
그러던중에 올해 5월 말에 사자자리로부터
군산의 새솔잎 형님과 순상환 형님과 저와 넷이서
저녁식사 하자고 전화가 왔고 식사자리에서 황금들녁 200키로 개통산행에 함산할 것을 제의 받았네요.
4년간 장거리 산행을 안해서 등력이 많이 떨어진 상태였지만 우리고장에도 초장거리 코스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오랫동안 해오던터라 흔쾌히
수락을 했네요.
호남국공이 있기는 하지만 누구나 쉽게 도전할 수는
없고 고*경*오*모(60키로), 대야호 환종주(58키로),호남알프스(48키로),무등산대종주(56키로)가 있긴 하지만 초장거리 코스는 아니네요.
짧은 시간에 등력을 다시 끌어올리기 위해서
전에 연습하던대로 매일 1분 1초를 아껴가며
모악산을 몇바퀴씩 도는
연습산행을 하였네요.
아 그리고 새솔잎 형님과 사자자리는 직업과 개인 사정으로 함산을 못했네요.
올여름에는 유난히 장마가 길고 비가 많이 내렸지요.
비가 아주 많이 내리는 날에는 우산을 쓰고 장화를 신고 모악산을 오르락내리락을 반복했네요.
장마가 끝나자마자 시작된 폭염에도 매일 산행하며
7월에 811키로, 8월에 979키로를 산행하니
몸이 다시 예전으로 돌아갔네요.
산행 코스가 모악지맥과 호남정맥, 영산기맥, 변산지맥으로 모두 우리 고장의 산들로
부담이 없었네요.
호남정맥과 영산기맥은 산행한지가 오래되어서
사전답사 산행과 더불어서 칡넝쿨과 가시덩쿨로
쩔은 구간은 전지가위로 고속도로를 만들며
등로정비도 함께 병행했네요.
이제부터 저의 본격적인 산행기가 시작되네요.
기상청 발표에 따르면 산행내내 날씨가 쾌청하다고 해서
80시간 대에 완주를 목표로 들머리에 도착을 하였네요.
김제시 심포항에 위치한 거전마을에 잘 도착해서 산행을
시작하려고 하는데 트랭글이 네트워크 오류로
접속이 안되더군요.
설상가상으로 비까지 내리더군요.
우중산행 준비를 하고 1시간을 기다리니 트랭글이
복구되어서 산행을 시작했네요.
모악지맥은 초반에 동네 뒷산 4개를 타야하는데
봉화산은 나름 정비가 잘 되어있었네요.
하지만 두번째 산인 진봉산은 포항까지 연결되는
새만금 고속도로가 관통을 해서 산의 절반가량이
없어지고 절개지가 되어서 관리가 안되어서
칡넝쿨과 가시덩쿨이 서로 엉켜있었네요.
또한 모기가 비가 오는데도 마치 여름철에 수백마리의
날타리 떼가 모여서 날아다니듯이 우리를 감싸고
피를 빨기 시작했네요.
신나게 반강제적으로 헌혈을 당하고 약 9.5키로의
야산 산행을 마치고 도로로 내려오니 신발과 양말이
모두 젖어있었네요.
등로 바로 옆에 있는 마을회관 정자에 앉아서 신발을 말리고 양말도 짜고 상환이 형이 가져온 생리대를
신발 깔창에 깔고 도로를 걷기 시작하였네요.
약 27키로 지점인 백석사거리에는 식당들과 편의점들이 즐비하게 있네요.
그곳에서 늦은 점심을 해결하고 다시 걷기 시작하였네요.
모악지맥은 산과 도로를 반복해서 걷네요.
산행 연습도 연습이지만 반드시 도로를 걷는 연습도
해야 하네요.
백석사거리부터 이서 삼거리까지는 편의점이 7개나 있어서 배낭을 무겁게 가져갈 필요가 없네요.
산행 시작과 함께 신발과 양말이 젖은 상태로
53키로를 걸어서 전주 쑥고개에 도착해서 보니 발바닥에 약간의 데미지가 있어서 젖은 신발도
갈아 신고 옷도 모두 갈아입으며 뽀송뽀송한 상태로
다시 산행을 이어가네요.
여기부터 운암에 있는 옥정호 가든까지가 약40키로이고 내장산 추령까지는 80키로쯤 되네요.
80키로를 모두 짊어지고 가는건 시간이 늘어져서
40키로 지점인 옥정호 가든을 이용하기 위해서 서둘러
출발을 하였는데 출발하자마자 다시 비가 내리기
시작했네요.
상목산쯤 가서는 장대비가 쏟아져서 정상 아래의 데크 아래서 비를 피해 잠시 대피를 하였네요.
40분쯤 기다리니 빗줄기가 가늘어져서 독배재로
내려오는데 다시 빗줄기가 굵어지고 독배재부터는
장대비를 맞으며 모악산에 오르기 시작했네요.
빗줄기가 더 강해지고 저는 더 진행해서 모악산 정상 데크 아래에서 비를 피하자고 의견 제시를 하고 상환이 형은
그냥 등로에서 500m를 내려가서 안전하게 산불감시초소에서 대피를 하다가 비가 그치면 가자고 하네요.
이런건 지역 어드밴티지가 작용한거죠~~~
타지역분들은 아마도 몰라서 중탈했을 가능성이~~~
밤 12시부터 내리던 비는 아침 6시까지 이어졌고
결과적으로 상환이 형의 판단이 옳았네요.
여기서 발에 데미지를 더 입으면 중탈 가능성이
아주 높았네요.
장대비 두번에 대피를 두번이나 하다보니 시간이
늘어졌고 또 옥정호 가든의 식사시간을 지키기도
힘들어졌네요.
또 오전내내 고어텍스 바지를 입고 이슬떨이를 해가며
산행을 했네요.
결국 약 90키로 지점에 있는 옥정호 가든이 문을 닫았고
약 130키로 지점인 추령에서 사자자리의 지원을 받기로 했었는데 사자자리에게 전화를 해서 지원을 받았네요.
사자자리는 우리를 만나자마자 기상청 그 불량한 놈들 때문에 형들이 고생한다며 구수한 욕을 하는데
대리만족이 되더군요.
사자자리의 든든한 지원 덕분에 추령까지 무사히
도착을 하고 추령에서도 손맛이 아주 좋은 사자자리의 장모님이 끓여주신 따뜻한 김치찌개와 간식으로 가져갈 김치전과 과일까지~~~~
거기에다가 치약과 칫솔까지 준비를 아주 꼼꼼하게
잘해 주어서 산행이 끝나고 몸무게를 재보니 2키로가
늘어나 있더군요.
아뭏튼 추령을 출발하며 갈재에서 지원을 한번 더 받기로 하고 갈재부터는 변산지맥을 사자자리가 리딩도 하면서
날머리까지 함산해 주기로 했네요.
셋째날 밤에 추령을 출발해서 네째날 새벽 3~4시쯤 갈재에서 보자고 하고 추령을 출발했네요.
까치봉 삼거리에서 순창새재와 장성갈재 가는 길은
항상 논란이 많네요.
호남정맥 길이 갑자기 오른쪽으로 뚝 떨어지면서 사람 키보다 더 큰 조릿대 밭으로 진입하는데
직진하는 마루금 길이 있어서 우리는 직진을 해봤네요.
등로는 사람들이 많이 다녀서 아주 좋은데 계곡물을 몇번 가로질러야 해서 산자분수령에 어긋나서 우틀한 것
같네요.
트랭글상에 장성갈재라고 나와 있는 곳부터 밤12시부터 또다시 비가 내리기 시작하고 마음은 바빠지고 입암산과 갓바위를 지나서 시루봉으로 향하는데 시루봉은
여전히 비탐구간으로 막아져 있더군요.
시루봉은 2017년 영산기맥 할때도 지나갔고
또 올해 6월 11일에도 답사산행을 다녀왔기에
쉽게 생각했는데 많은 비와 함께 짙은 안개와
강풍이 불어서 몇시간을 헤매다 저는 저체온증까지
와서 머릿 속에 "아 이러다 죽는구나 산을 좋아하는
사람은 산에서 죽고 낚시를 좋아하는 사람은 고기 잡다 죽는다고 하더니 순간 119에 전화를 해야하나?"
가족들 얼굴들도 스쳐지나가고 갈재에서 애타게 기다리고 있을 사자자리도 떠올리고 있을때 아침 6시쯤
날이 서서히 밝아오면서 비도 잦아들고 강풍도
거짓말처럼 멋더군요.
처음으로 산행하면서 목숨의 위협을 느꼈네요.
등로가 보이면서
새벽 3~4시면 도착할수 있는 거리를 죽을 고비를 넘기고 아침 11시가 넘어서 도착했네요.
비가 안오고 날이 좋다고 했는데 3일동안 비가 내리면서
계획에 차질이 많이 생겼네요.
갈재에 도착하니 사자자리가 두 딸들까지 동원해서
음식들을 준비해 와서 너무 고맙기도 하고
또 한편으론 딸들에게 미안하기도 했네요.
그러면서 지원하면 영알 태극종주할때
지원해 주시던 울산의 쟁이 대장님도 생각이 나고
산행이나 지원에서 우리나라 최고인 뿡이 누님도
생각이 났네요.
갈재에서 만찬을 뒤로 하고 갈재부터는 사자자리가
직접 리딩을 하며 까다로운 변산지맥을 여유롭고
부드럽게 넘을 수 있었네요~~~
고창군 신림면 송용리 국도로 내려가서 이번 산행은
마무리가 되고 마을회관 옆에서 또 다시 지원 나온
사자자리의 딸들의 따뜻한 지원을 받고 이제부터는
도로를 걸으며 말그대로 황금들녁을 구경하고
또 역사와 문화를 보며 느끼며 걷기만 하면 되네요.
그런데 시골 인심도 많이 변했더군요.
마을회관 옆에서 음식을 끓이고 식사를 하는데
동네 주민이 나와서 남의 동네에 와서 무슨 경우냐고
하면서 잔소리를 해대더군요.
식사를 마치자마자 서둘러 나왔네요.
이제부턴 꾸준히 걷기만 하면 되는데 얼마 못가서
이번에는 자신을 흥덕의 원불교 교무라고 하면서
우리를 불러서 멈춰세우더니 야간에 안전장치도 없이
도로를 걸으면 어떡하냐며 훈계를 하더군요.
조금 지나서 사자자리가 한마디 하네요.
우리는 어떠한 역경이 있어도 반드시 날머리에
도착할꺼라고~~~
그렇게 밤새 걸으며 달빛에 비친 황금들녁도 보고
또 랜턴에 비친 황금들녁도 보고, 가로등 불빛에 빛나는
황금들녁도 감상하며 이른 아침에 부안 읍내에서
아침을 해결하려고 했네요.
하지만 부안군 읍내를 1시간 동안을 헤매여도
문을 연 식당을 찾을수가 없었네요.
결국에는 가까운 편의점에서 사발면으로 간단하게
요기를 하고 날머리인 동진대교에 도착을 했네요.
새벽까지만 해도 동진대교에 도착하면 끝없이
펼쳐질 황금들녁을 볼 수 있으니 사진을 적당히
찍으라고 했는데 이를 어쩌나 동진대교에 도착을 해서
보니 황금들녁이 콩들녁으로 바뀌어 있었네요.
쌀농사보다 콩농사가 농약도 적게 하고 일손도
훨씬 적게 들어가서 농가 입장에서는 한마디로
돈이 되는 작물로 갈아탔더군요.
씁쓸함을 뒤로한채 날머리에서 우리를 픽업하기 위해서
기다리던 사자자리 딸에게 사진을 부탁하고
황금들녁 200 개통 산행을 마무리 했네요.
날씨만 좋으면 80시간대에 충분히 마무리 할수
있는 코스네요.
아 그리고 산행이 끝나자마자 갑자기 사자자리가
우리를 안아주는데 비록 처음부터 끝까지 함산하진
않았지만 그마음을 다 아는것 같은 진심이 느껴져서
저도 순간 울컥했네요.
이번 산행에서도 느낀바가 많네요.
장거리 산행은 체력만 있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경험이 중요하다는 것을~~~
그리고 언제나 부르면 달려와주고
또 부르면 달려갈 산우가 있다는 것이 가장 큰
자산이며 행복이라는 것을~~~
경상도에 실크로드가 있다면 전라도에는
황금들녁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 주시길 바라며~~~
장거리산행의 목표가 극기가 아닌 힐링산행이 될 수
있도록~~~
산행이 끝나고 바로 일상에 복귀할수 있는 몸상태를
만들고 싶었는데 어제 몸이 아주 가벼워서
모악산 8자 종주와 더불어서 36키로 산행을
가볍게 했네요.
목표는 이룬것 같네요.
끝으로 한번 더 걸을 기회가 있다면 산으로만 걷고 싶고
동진대교에서 심포항까지 약40키로를 더 걸으면서
황금들녁 환종주를 해보고 싶네요~~~
지금까지 부족하지만 제 장문의 산행기 끝까지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들머리 거전마을에서 한컷~~~
진봉산은 새만금고속도로 공사로 산의 절반가량이
깎여나갔네요~~~
두악산도 새만금 고속도로가 관통해서 전망대만 남아있고 대부분이 잘려나갔네요.
전주 쑥고개부터 다시금 우중산행이 시작되고~~~
상목산에서는 장대비로 상목산 정상 데크 아래에서
잠시 대피를 하고~~~
상목산에서 빗줄기가 조금 약해져서 다시 진행을 했는데 독배재부터 다시 빗줄기가 굵어져서 모악산 산불감시초소로 대피해서 비가 그치기를 기다렸네요.
아침6시에 비가 약해져서 모악산 정상에서~~~
첫날 싸가져간 밥으로 둘째날까지 식사를 하고~~~
계속되는 우중산행과 또 이슬떨이로 신발은 계속 젖어있고~~~
왕자산~~~호남정맥은 등로가 안좋고 까칠했는데 지금은 등로가 많이 양호했네요.
상환이형은 중간중간 졸리면 수시로 10분씩 쪽잠을 자고 저는 옆에서 지켜 보고~~~
갓바위 지나서 시루봉에서 세찬 비와 짙은 안개와 강풍을 만나서 산행중 처음으로 저체온증을 경험했네요. 혹시라도 이 길을 가시는분들은 주간에는 상관없지만 야간에는 신경써서 넘으셔야 하네요.
참고로 시루봉은 비탐구간이네요.
사방이 뻥 뚫린 쓰리봉에서 지나온 구간들과 추월산 구간 등 모두 걸었을 마루금들을 보며 회상에 잠긴 사자자리~~~
옥녀봉 못가서 두승지맥분기점에서 한컷~~~
변산지맥은 옥녀봉까지만 오면 등로가 온순해지네요~~~
잠시 쉬는 사이 사자자리 무릅으로 올라가고 있는 대형진드기 발견~~~
이번 산행에서 알게 된건데 산에서 만큼은 거칠것 없고 무서울 것 없던 사자자리도 한번은 리딩하면서 폴짝폴짝 뛰면서 큰소리를 치길래 왜그런가 했더니 큰뱀이 자기 쪽으로 달려드니 깜짝 놀라더군요.
제가 가서 스틱으로 멀리 걷어냈네요~~~
송촌마을회관에서 마지막 지원을 받고 여기부터는 본격적으로 황금들녁을 보기 위해서 도로를 걷네요. 여기까지 와서 지원을 해준 사자자리 두따님들에게 다시 한번 고맙다고 말하고 싶네요~~~
1.동학농민전쟁
.“녹두장군 깃발
아래선 누구나 평등하다
“역사란 도대체 뭐예요?”
프랑스 역사학자 마르크 블로흐는 딸의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역사를 위한 변명’을 썼다.
E H 카는 “역사란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말했다.
‘역사란 진정 무엇인가.’
매주 목요일 본지에 연재되는 ‘이이화의 우리 역사 바로보기’는 그에 대한 해답을 찾아나선다.
이씨는 40년간 동양고전과
우리 역사를 연구해온 학자로
최근 ‘한국사 이야기’를 완간했다.
근대국가 지향한 동학농민전쟁 ①
일제는
동학농민군을 모질게 탄압했다. 그런데도 식민지 시기,
전봉준의 애달픈 죽음을 노래한
동요 ‘파랑새’는 부녀자와 어린애의 입으로 불려 골골에 메아리쳤다.
근래에는 조수미가 개작 편곡한 ‘파랑새’를 불러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다. 전봉준과 동학농민군의 죽음은 민족의 한으로 우리네 가슴속에 오래 응어리졌던 것이다.
동학농민전쟁에는 농민군 1백만명이 참여했고 30만명이 죽었다고 한다. 살아남은 농민군들은 산속이나 섬으로 도망해 몸을 숨겼고 죽음을 면한 처자식은 재산을 빼앗기고 뿔뿔이 흩어졌다. 당사자나 가족은 살아가면서 결코 농민군에 가담한 사실을 가슴에 묻어두고 말하지 않았다. 역적이라는 굴레를 벗어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신록의 계절인 5월은 동학농민전쟁의 단초를 연 달이다. 1894년 연초에 고부(현 전북 정읍)를 중심으로 한 농민봉기는 부안의 백산대회를 거쳐 5월10일(음력 4월6일) 전라감영에서 파견된 관군과 향병(鄕兵)을 일거에 쳐부쉈다. 이어 5월25일 장성 황룡강에서 중앙에서 파견된 관군과 접전하여 일대 승리를 장식하고, 승승장구한 끝에 전주로 내달아 5월31일 호남의 수부(首府)인 전주성을 점령했다.
농민군이 한 도의 수부를 점령한 것은 조선조 건국 이래 최초의 일이었다. 더욱이 전주는 국가재정의 4분의 1을 담당하는 호남의 심장부였기에 그 파장은 더욱 컸다. 이렇게 하여 온 나라를 미증유의 소용돌이로 몰아가고 근대사의 새 장을 연 농민전쟁의 횃불이 올려졌다. 농민군들은 전주에서 관군 대장인 초토사 홍계훈과 몇 가지 중요한 약속을 하고 집강소(執綱所) 활동을 전개했다.
농민군은 첫 봉기 때부터 정부의 비정을 지적하는 글을 보냈으나 전주를 점령한 뒤에는 이를 구체적으로 적시했다. 농민군의 요구는 국가제도로 이루어진 비정, 곧 국가수탈을 중지할 것이며, 모든 벼슬아치의 부정행위를 척결하고 쌀의 외국 유출을 막으라는 것이었다. 그러면 왜 관군과 농민군은 서로의 요구조건을 내걸고 전주에서 물러갔던가?
-집강소 설치지역 ‘해방구’-
간단히 분석하면 관군은 서울에 일본군과 청군이 진주하는 절박한 처지에 놓여 있었고, 농민군은 북접(北接·농민전쟁 당시 충청도 지역의 동학 조직. 전라도 지역은 남접이라 했다)의 호응이 없어서 고립된 처지에 놓여 있었다. 관군과 농민군은 각기 이해득실에 따라 타협을 하고 다음의 정세에 대비하려 했던 것이다.
아무튼 농민군들은 전라도 일대에 집강소를 설치하고 자신들이 내건 강령을 실천했다. 집강소는 국가에서 임명한 수령들을 몰아내거나 하수인으로 부리면서 지방행정의 직접 통치를 이룩했다.
만석보 유지비
- 동학농민전쟁의 원인이 되었던 만석보가 있던 자리에 세운 비석
집강소를 통해 수행한 주요 조항을 보면 신분관련 조항으로는 ▲유림과 양반무리의 소굴을 없애버리는 일 ▲종의 문서를 없애버리는 일 ▲백정의 머리에 패랭이를 벗기고 갓을 쓰게 하는 일 등이었다. 국가수탈 문제로는 ▲모든 부당한 조세를 중지하는 일▲무명 잡세를 없애버리는 일 ▲탐관오리를 제거하는 일이었다. 토지문제로는 토지를 고루 나누어 짓게 하는 일 등이며, 여성문제로는 과부의 재가를 허락하는 일 등이었다. 또 외국세력과 결탁하는 자들은 잡아죽이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오지영의 동학사 필사본)
이를 폐정개혁이라 부른다. 조선왕조는 신분제도와 토지제도를 골간으로 지배체제를 유지했다. 다시 말해 양반과 상인을 가르고 노비와 천민을 최하층으로 하여 양반(사림) 중심의 관료사회를 이룩했던 것이다. 온갖 특권을 누린 양반들과 달리 양인들은 국가조세와 군대경비를 부담하면서도 벼슬자리에 오를 수 없었다. 천민들은 갓을 쓰지 못하고 패랭이를 쓰거나 맨상투 차림을 하고 돌아다니며 양반의 부당한 부림을 받아야 했다.
또 토지 소유를 무한정하게 허락하여 양반과 지주들은 수천석, 수만석의 잉여생산을 거두어들이면서도 소작인에게는 8~9할의 소작료를 물렸다. 따라서 소작농들은 생존할 수 없는 처지에 몰려 춘궁기가 되면 굶어죽는 사태가 연이어졌다. 그런데도 국가에서 농지소유를 제한하려는 정책이나 소작료를 낮추려는 제도를 만들지 않았다.
소농민들과 하층민들은 이런 불평등의 굴레에서 벗어나려고 오랜 투쟁을 벌여왔으나 번번이 좌절하고 말았다. 지배세력은 지배체제의 유지를 위해 완강하게 이를 개혁하지 않으려 했다. 농민군들은 집강소 활동을 통해 이를 실현하려 했다. 그리하여 노비들은 종문서를 불태워버리고 해방되었으며, 백정들은 패랭이를 벗어 던지고 양민과 같은 차림을 하고 돌아다녔다. 또 자작농과 소작농은 과도한 소작료나 고리채를 물지 않거나 부당한 국가수탈에 저항했다. 집강소가 설치된 지역은 바로 해방구였다.
또 집강소는 합의에 의해 조직을 결성하고 당면의 정책을 결정했다. 여기에는 모든 계층이 참여했다. 집강소 관계자와 일반 민중에게는 서로의 호칭을 접장(接長)으로 통일하여 부르게 했다. 곧 부인접장(여성), 동몽접장(어린이) 등 신분과 남녀와 나이를 떠나 동등한 호칭을 사용케 하여 사민(四民)평등의 의지를 드러냈다. 상하와 존비와 남녀의 차별관념을 타파하려는 평등의 호칭이었다. 접장 호칭의 등장은 러시아 혁명 뒤 ‘동무’라는 호칭을 쓴 시기보다 적어도 20여년 앞섰다.
이해 7월 일본군은 경복궁을 강제로 점령하고 이른바 개화파를 등장시켜 갑오정권을 탄생시켰다. 갑오정권은 개혁조치로 ▲문벌과 반상을 타파하고 인재를 고루 뽑아 쓴다는 것 ▲부녀의 재가(再嫁)는 귀천을 가리지 않고 자유의사에 맡긴다는 것 ▲모든 노비제도를 없애는 것 등 농민군의 요구를 수용했으나 조세와 토지제도의 개선 등 국가수탈과 지주수탈의 조항은 하나도 반영하지 않았다. 이는 신분제도는 개혁하되 민중의 생존과 직결되는 경제제도의 개혁은 외면한 것이다. 그러니까 개화정권이 추진한 갑오개혁은 눈 가리고 ‘아웅’하는 조치였다.
-남녀노소 떠난 호칭 ‘접장’-
농민군들은 호남을 중심으로 6개월쯤 집강소를 통해 반봉건투쟁을 줄기차게 벌였으며 충청도, 경상도로 번져나갔다. 신분평등과 토지개혁은 바로 근대국가가 지향하는 기본 요소이다. 바로 신분제적 계급을 해소하고 경제적 불평등을 철폐하며 대의제를 이룩해 주권재민의 국민국가를 여는 이념을 제시한 것이다. 본질을 호도한 개화정권의 지향과는 사뭇 달랐다.
그리하여 집강소의 합의적 의사결정과 평등실현의 활동을 두고 아시아 민주주의 맹아(萌芽)라 평가하기도 하고 밑으로부터 변혁을 지향하여 근대국가의 이념을 실천적으로 제공한
반봉건 투쟁이라 규정하기도 한다.
〈이이화/역사학자〉
- 2남2녀둔 전봉준,
농민전쟁뒤 절손 -
전봉준은 두 아내를 둔 것으로 전해진다. 첫째 부인 송씨는 농민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사망했고, 둘째 부인 이씨는 농민전쟁 당시에 생존했다고 한다. 전봉준은 공초(供招)에서 가족이 6명이라고 밝혔다. 곧 본인 부부를 포함해 자녀를 4명 두었다는 말이다.
전봉준이 농민전쟁이 일어나기 전 고부 조소리에서 살 때 아이들의 손을 잡고 황토재에 있는 아내의 무덤에 성묘했다고 마을사람들은 전해주고 있다.
전봉준은 공초에서 주소지를 태인 동곡리(현재 정읍시에 속함)라고 밝혔다. 아마도 고부봉기가 있은 뒤 가족을 이곳으로 옮긴 것으로 추정된다. 자녀 4명이 태어난 순서는 확인할 수 없으나 2남2녀였던 것으로 보인다.(최현식 조사)
전봉준이 체포된 뒤 전봉준의 고향으로, 전씨들이 집단마을을 이루고 살고 있는 고창 당촌은 깡그리 불에 탔고 전씨들도 몰살한 것으로 알려졌다. 전봉준의 첫딸 옥례는 15세의 나이로 화를 피해 이름을 바꾸고 진안 마이산 금당사로 들어가 공양주로 있었다. 그녀는 23세 때 이씨 집안으로 출가했는데, 1970년 자신이 살았던 고부의 전봉준 고택을 일러주어 복원케 했다.
둘째 딸은 뒤에 태인 지금실로 출가해 살고 있었다. 장남 용규는 동곡리에서 죽은 것으로 알려졌으며, 차남 용현(또는 동일)은 누나가 사는 지금실에서 몸을 숨겨 남의 집 머슴살이를 했다고 한다. 지금실에는 동네사람들이 전봉준의 가묘를 만들고 받들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용현은 머슴살이를 하면서 동네에서 노름을 일삼다가 노름빚을 져서 남의 소를 팔아먹고 도망쳤다고 한다. 그의 두 딸은 살아남아서 자식을 두었다. 외손녀인 강금례는 동곡리에 살면서 자식을 두었다.
전봉준은 외손을 둔 것으로 보이나 친손들은 있는지 없는지 전혀 알 수가 없다. 전봉준만이 절손이 된 것은 아니다. 많은 농민군 지도자들의 가족이 몰살이 되거나 도망쳐 신분을 숨기고 살았다. 그리하여 오늘날 확인할 길이 없게 되었다. 지난 2월 국회에서 농민군 명예회복을 위한 특별법이 통과되어 110년 만에 농민군 지도자들의 명예회복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들에게 주는 훈장이나 표창장은 누가 받아 보관할 것인가?
동학농민전쟁 上
일제는 경복궁을 점령하고 고종을 유폐시켰으며 개화정권을 수립하여 하수인으로 만들었다. 이어 정부의 요청으로 파견된 청군을 공격하여 청일전쟁을 도발하였다. 개화정권은 조선 땅에서 침략전쟁을 벌인 일본군의 물자를 공급해주는 따위의 편의를 제공하였고 조선의 군사지휘권도 일본군에게 넘겨주었다. 이렇게 조선은 일본의 반식민지 상태로 전락하였다.
집강소 활동을 벌이면서 정세를 예의주시하던 농민군은 1894년 9월 일본제국주의자들에 항거하는 봉기를 서둘렀다.
전봉준은 남접의 농민군을 이끌고 공주를 향해 진격했으며 최시형은 전국에 동원령을 내렸다. 그리하여 전봉준과 손병희는 논산에서 대회를 가지고 결의를 다졌으며 전국의 농민군은 평안도와 함경도를 제외하고 곳곳에서 봉기했다.
-곡식 익는 9월 전국적 봉기-
이것은 반외세 반침략의 항거였다. 전봉준은 왜 9월에야 전면적 항일전선을 구축했을까? 전봉준은 군량미를 확보하려 곡식이 익기를 기다렸다고 말했다. 또 그동안 집강소 활동에 미온적으로 대처하던 교단세력인 북접의 호응을 이끌어내고 남접의 농민군 역량을 결집한 것도 하나의 재봉기 동기가 될 것이다. 농민군은 전주감영에 이어 공주감영마저 석권해 일본군과 장기전의 태세를 갖추려는 계획이었다.
아무튼 주력 농민군은 일본군과 일본군의 작전지휘를 받는 관군과 공주에서 수십 차례의 공방전을 벌인 끝에 처참하게 패배하고 말았다. 지방의 농민군은 서울로 진격하거나 공주전투에 합류하려 했으나 일본군의 진로차단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황해도 농민군은 해주감영을, 동해안으로 진출한 농민군은 강릉관아를 점령했다. 서해의 농민군은 홍성을 공격했으며 남해의 농민군은 진주병영·강진병영·해남우수영을 잇달아 함락했다.
일본군은 서울에서 북쪽의 농민군을 공격해 남하의 통로를 차단했고, 공주전투에 참여하여 신무기로 농민군을 공격했다. 또 부산에 상륙하여 경상도의 서부지대와 호남 남해일대의 농민군을 토벌했다. 관군들은 일본군의 지휘와 지원을 받으면서 골골을 누비면서 농민군 토벌에 나섰다. 민보군(民堡軍·민간인 자원병)들은 관군과는 별도로 조직을 결성해 농민군 섬멸에 나서 일대 복수전을 펼쳤다. 산골짜기와 들판은 농민군의 피로 적셨으며 섬진강의 바닥에는 무수한 농민군의 시체가 깔렸다.
농민군들은 모진 눈보라 속에서 죽창을 꼬나들고 얼음밥을 먹으며 전투를 벌이는 의기를 과시했으나 끝내 곳곳에서 처참한 죽음을 맞았다. 정식 재판을 받은 지도자는 전봉준·손화중·김덕명·최경선·성두환 등 5명뿐이었으며 다른 농민군들은 불법적 방법으로 효수(梟首)되거나 시체가 토막 나거나 한꺼번에 구덩이에 묻혔다. 홍천의 서석 자작고개와 보은의 북실에서 수백명의 집단 무덤이 발견되었다.
일본군에 희생된 숫자보다 더 많은 동족상잔의 비극이 연출되었다. 광기가 어린 잔인한 12월이었다. 일본군과 관군은 서울 이남의 농민군을 몰아 바닷속으로 처넣는 전술을 구사했다. 이 작전을 그들 처지로 보면 성공을 거두었다.
2차 봉기의 반침략 전쟁은 거대한 민족적 의미를 던지고 있다. 전봉준은 공주전투에서 패배하고 후퇴하면서 다음과 같은 말로 전국민의 경각심을 환기시키고 항일전선의 의미를 천명했다.
“개화 간당이 왜국과 손을 잡아 밤을 틈타 서울로 들어와서 군부(君父)를 핍박하고 국권을 멋대로 천단했으며 하물며 방백수령이 모조리 개화 무리 소속으로 인민을 어루만지지 않고 살육을 좋아하며 생령이 도탄에 빠지매 이제 우리 동도가 의병을 들어 왜적을 소멸하고 개화를 제어하여 조정을 청평하고 사직을 안보할세….”
곧 일본과 개화파 정권을 타도하려 일어섰음을 천명한 것이다. 그런데도 관군과 구실아치와 상인들이 일본군과 손을 잡고 자신들을 공격한다고 전제하고 “기실은 조선끼리 서로 싸우려 하는 바 아니어늘 이와 같이 골육상전하니 어찌 불쌍치 않으리오”라고 언급하면서 골육상전을 막고 “다함께 척왜(斥倭) 척화(斥和)하여 조선이 왜국이 되지 아니케 하자”고 호소했다.
이 대목에서 전봉준과 농민군의 지향하는 바가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러나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관군과 관료들은 일본군에 협조하여 반침략 세력인 농민군을 탄압하고 있었다.
더욱이
평생 경전의 글을 읽으면서 충효를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삼는 유림들은
도리어 농민군 섬멸에 앞장서는
자기 모순을 범하고 있었다.
유림들은
반봉건의 기치를 내건 농민군을 일본군보다 더 무섭고 간악한
적으로 돌린 탓으로 일본군에 맞서 의병항쟁을 벌이지 않았던 것이다.
또 유림들은
침략세력과 손을 잡고 있는
개화정부에 대해서도 이때까지
표면적 저항운동을 벌이지 않았다.
다만 다음해 민비가
시해되고 단발령이 내려지자
그때에야 “형체를 보존하고
복수를 해야 한다(保形復●)”고
외치고 의병항쟁을 벌였을 뿐이다.
-“왜적소멸·개화제어하려”-
어쨌든 농민군은 반봉건·반침략 항쟁이 좌절한 뒤에도 끈질기게 민족운동의 대열에 앞장섰다. 그런 탓으로 살아남은 농민군들은 기존의 양반지배세력과 일본제국주의자들로부터 양면의 압제를 받았다. 그리하여 숨도 크게 쉬지 못하고 두더지처럼 살았다.
해방된 조국에서도 농민군들은 명예회복은 물론 후손들마저 입도 뻥긋하지 못하고 살았다.
1895년 ‘보형복수’의 기치를 내걸고 일제와 개화정권에 항쟁했던 의병들에게는 ‘독립유공자’로 지정하여 국가적 예우를 베풀었으나 농민군은 여전히 동비(東匪)나 비도(匪徒)로 지목되어 보상이나 명예회복을 해주지 않았다.
그동안 역대 독재정권 아래에서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기 위해 많은 민주인사들이 투쟁을 벌였다. 독재에 항거하는 시위현장에는 어김없이 전봉준의 초상이 내걸렸다. 민주인사들에게 전봉준은 저항의 표상으로 받들어졌던 것이다.
또 1994년 농민전쟁 발발 100주년을 즈음해서는 봉기지역을 중심으로 기념사업회가 발족되었으며, 기념사업을 활발하게 벌여 그 역사적 의미를 부각시켰다. 또한 국제학술회의에서는 “집강소 활동이 아시아 민주주의의 기원”이며, “‘2차봉기’는 일제 침략에 최초로 저항한 사건”이라는 평가를 각각 받았다.
꼭 110년이 지난 봄, 국회에서는 우여곡절 끝에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통과되었다. 참으로 오랜 세월을 거친 뒤에야 국가에서 법으로 공인한 명예회복이었다. 그리하여 역적의 누명을 벗기고 역사의 왜곡을 바로잡게 되었다.
농민군의 후손들은 100여년 동안 온갖 핍박을 받은 끝에 출세도 못하고 가난하게 살아왔다. 후손들은 보상을 받지는 못했으나 조상들이 나라와 민족을 위해 회생되었다는 명예 회복 하나만으로 오랜 한을 풀고 새로운 시대에 동참하게 되었다.
이는 역사의 승리였다.
〈이이화/역사학자〉
동학농민전쟁 하 - 농민군, 그후
전라좌도의 집강소 통치를
지휘했던 김개남(金開南)은
지리산 너머 경상도 일대에
집강소를 설치하려 노력했다.
그리하여 부하인 김인배(金仁培)를
영호대접주라는 직함을 주어
순천지역으로 내려보냈다.
곧 김인배를
영남과 호남 아래 지역의
최고 두령으로 임명한 것이다.
김인배는 금구 출신으로
24세의 열혈 청년이었다.
그는 영호대접주로서
순천에 접소를 차리고
집강소 활동을 전개했다.
그에 대해
농민군 토벌대장이었던 이두황은
“지난해 6월 이후
금구의 도둑 우두머리
김인배가 이끄는 무리는 여러 지역에서 모인 10만명이었다”면서
“순천 성중에 들어와
영호도회소를 설치하고
관가의 무기를 거둬들이고
남의 돈과 재물을 빼앗으면서
감히 군수(軍需)라고
일컬었다”고 보고했다.
김인배는 직계 농민군을
거느리고 현지 농민군의 협력을 얻어 섬진강을 넘어 하동 진주를 석권했다.
진주는 남해지대의
요충지로 병영을 두었는데 김인배가 이끄는 농민군의 손에 함락되었다.
일본군과 관군이 부산에서
파견되어 섬진강으로 밀려오자
하동 여수 광양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김인배는 마침내 광양에서
잡혀 머리가 잘려 죽었다.
김인배의 아내는 남편의 죽은
날을 몰라 제사를 지낼 수가 없었다.
그녀는 떡시루에 흰 쌀가루를
깔고 매일 아침 들여다보았는데
12월9일 쌀가루에
새 발자국이 뚜렷이
나타나서 제삿날로 정했다 한다
(증손자 김영중의 증언).이 말대로
김인배는 12월9일 죽음을 당했다.
김인배는 죽음을 앞두고 동행했던 처남 조씨에게 “장부가 나서 죽을 자리에서 죽음을 얻는 것은 떳떳한 일이요. 다만 뜻을 이루지 못함이 한이로다. 나는 함께 살고 함께 죽기를 맹세한 동지들과 최후를 같이할 것이니 그대는 집으로 돌아가 부모를 봉양하라”고 타일렀다 한다.
아마
조씨가 고향으로 돌아와 김인배가 죽은 날짜를 전해주었을 것이다.
많은 농민군의 경우
죽은 날짜조차 알지 못했다.
김인배의 경우처럼 많은 후손들은 농민군들의 시체를 찾지 못해 고인이 쓰던 용품이나 나무 인형을 만들어 묻는 가묘(假墓)를 만들고 받들었다.
올 봄에도 문경에서 농민군의
가묘를 발굴하여 나무 인형의
흔적을 찾아낸 적이 있었다.
또 뇌물을 쓰거나
줄을 대서 잘린 머리를 찾아
항아리에 담아 묘지에 묻기도 했다.
외국은 프랑스혁명으로 한국은 전봉준의 녹두 혁명으로 미완되지만 양반 계급이 소멸시킵니다.
하늘님의 인내천 사상으로...
랜턴에 비친 황금들녁~~~
황금들녁의 중간중간 콩밭으로 변해버린 콩밭들을 보며 웬지 씁쓸한 마음을 감추질 못했네요.
아침이 되자 황금들녁이 펼쳐지고~~~
날믜리에 같이 선 상환이 형과 사자자리~~~
사진 용량때문에 많은 사진을 올리진 못했네요.
날머리까지 모두 다치지 않고 안전하게 도착해서 감사하고 호남의 개통산행이 계속 이어지길 바라며~~~
첫댓글 개통산행 수고하셨습니다
선배님 그많은 사진몇장좀 올려주시지 ^^
댓글이 사진이 업로드가 안되는 문제를 해결하느라 시간이 좀 걸렸네요~~~
황금들녘 개통 축하드립니다. 백두대간 함께하는 순상환 선배님도 감축드립니다. 🥳💐👏
고맙습니다.대간 무사히 완주하시길~~~
@산천2 멋진사진 공유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좋은 날씨라도 긴 거리를 걷는것은 쉽지 않은데
궂은 날씨에 200km가 넘은 거리를
걸어내셨네요 힘들고 배고프고 춥고 졸립고
이 모든것을 이겨내시고 황금들녁 완주하심을
축하드립니다 고생하셨습니다
사자자리님 하고는 오래전에 정맥길을 같이
걸었는데 사자자리님 오랜만에 소식 듣네요
댓글이 늦었네요. 저도 사자자리를 통해서 J3에 가입했네요. 항상 안산하세요~~
장거리 개통산행 수고많았습니다
지친몸 얼른 회복하시길 응원합니다
고맙습니다. 월요일부터 바로 산행하는데는 문제가 없었네요. 항상 건강하시고 안산하세요.^**^~
고생하셨습니다
멋진산행 응원합니다
고맙습니다.지맥님도 안전산행 기원합니다~~~
개통산행 고생 하셨습니다.
시간 되실때 공지 하셔요.
멋진 황금들녘 마음속까지
황금으로 물들어 갈 것 같습니다.
고맙습니다. 밤도깨비님도 항상 안*즐산 하세요.^**^~
호남에도 좋은 장거리코스가 하나 생겼네요
황금들녁개통하느라 수고많았습니다
고맙습니다. 예 호남에 이렇다 할 장거리코스가 없었는데 많은 분들이 찾아와 주셨으면 합니다~~~
황 금 들 녁
이름만 들어도 풍성함을 느낍니다.
이 가을에 딱 어울리는 산행코스인것 같습니다.
멋진 코스 걷느라 수고 많이 하셨고
앞으로도 멋진 산행기 기대할게요.
고맙습니다. 종종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항상 안산하세요.^*^~
개통산행 수고많이하셨습니다^^
고맙습니다. 사진 문제가 해결이 안되어서 댓글이 늦었네요. 항상 안*즐산 하세요.^**^~
산행중 만나서 너무 반가웠습니다.
안그래도 영산기맥 분기점 지나며 황금들녘 종주길 이야기 했었는데
그길을 걷고 계시는 두분 만나니 무척 반가웠네요.
수고하셨습니다.^^
고맙습니다. 저도 말로만 듣던 두건님 뵈어서 반가웠습니다. 저도 키에 비해서 살이 많이 빠져서 살 좀 찌라는 말을 주위에서 많이 듣는데 두건님도 살찌란 소리를 들으실 것 같네요. 군살이 전혀 없으시더군요. 산행기는 눈팅만 하고 있네요. 앞으로 댓글도 잘 써야겠네요. 항상 안*즐산 하세요.^**^~
황금 들녁 200 개통 산행...
드뎌 추석 명절 해내셨네요.
남들이 가지 않았던 길을 간다는 것.
고통도 함께했고 위기의 순간도 있었지만
끝까지 함께해준 동료가 있기에
해내셨음을 압니다.
귀한 걸음 고생 많으셨습니다.
고맙습니다. 클럽활동 왕성하게 하고 계시는데 항상 안*즐산 하세요.^**^~
나의 곁에 든든한 산우(상환형,승재형) 두분이 계시다는것에 감사드리고 행복합니다.
산에 대해서 이야기하자면 바로 달려와 주시고 많은 요구사항,주문도 잘 해주셔서 더욱 힘이납니다.
일기예보에는 오전 조금비 3일은 괘청하다고 해서 좋아했지요.하지만 ""황금들녘'''
종주가 그렇게 밋밋하면 재미없겠지 생각도 해보았는데 역시 고생한것을 보니까 짠 하면서도 대단하다 이런게 마음입니다.
3번은 종주해야 졸업인데.....
이제 시작인데 해보는데까지 가 보입시다.
-황금들녘 개통-을 축하드립니다-
고마워~~~나도 자네가 있어서 항상 든든해~~~ 지금처럼 서로의 버팀목이 되어주면서 좋아하는 산~~~100세까지 건강하게 함산하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