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에서 가슴으로
작은 아들이 중국 아가씨와 결혼을 해서 우리는 다문화 가족이 되었다. 직장 생활을 중국에서 하던 아들이 본토 아가씨와 연애를 한다는 소식을 들은 나는 놀란 가슴으로 반대를 했지만 중국에서 이 년 여의 연애로 정이 들 대로 든 아들은 결혼은 확고하니 중국으로 와서 아가씨 부모를 만나 달라고 아예 통보 식으로 나온다. 자식이기는 부모 없다고 우리 내외는 중국으로 날아갔다. 순하고 예쁘게 생긴 아가씨와 같이 나온 그녀의 부모도 걱정과 한숨으로 우리와 같은 입장이다. 벌금을 내면서 까지 낳은 오녀 중 막내딸, 애지 중지 키웠더니 외국인과 결혼한다고 한숨 쉬며, 며칠을 울며 조르니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고 사윗감을 통역 삼아 심정을 호소한다. 결혼하여 살 집은 있느냐, 마음 고생 시키지 않을 자신 있냐고 신중하게 묻더니만 사윗감이 착하게 생겼고 사돈 내외도 진실하게 보여 마음이 놓인다며 허허 웃더니 하오 ~ 하고 중국말로 호탕하게 허락을 하였다. 중국 풍습대로 지참금을 보내고, 날을 잡아 처갓집에서 먼저 혼례식을 하였다. 아들 휴가 때 한국에 와서 결혼식을 할 때는 이미 배속에는 아기가 들어 있었는데 친척들은 혼수를 해왔다고 기뻐해 주었다. 몇 달 후에 아들은 아기를 한국에서 출산해야 한국 국적을 얻는다고 배부른 며느리를 한국에 데려다 놓고 혼자 중국으로 들어갔다. 며느리는 말도 안 통하는 곳에서 외롭게 있으면서 나름대로 우리와 친해지려고 애를 많이 쓴다. 중국에서 한국말을 배우다가 왔다고 하는데 많이 서툴렀다. 우리는 언어 소통을 위해 사전을 찾아서 보여 주고 뜻이 잘 안 통하면 계면쩍게 웃으면서 넘어가며 그럭저럭 의사소통은 이어졌다. 미소가 만 국어라는 것도 처음 알았다. 배가 부르지만 다문화 센타에 나가서 한국말도 배우기 시작했다. 넉 달 동안 있다가 아기를 낳고 몸조리 두 달, 총 여섯 달 만에 중국 아들에게로 갈 때는 섭섭한 마음을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눈물이 주르르 흘러서 얼굴을 똑바로 쳐다 볼 수가 없었다. 그렇게 이별을 하였는데 지금은 아들 내외가 한국으로 돌아와서 한 집에 살고 있다. 중국에서 사업을 한다고 한국에 있던 집을 팔아서 시작했는데 사업이 여의치 않아 다 접고는 한국으로 돌아온 것이다. 아들은 다행히 중국어를 잘하는 덕분에 무역 회사에 바로 취직이 되어 지금 다니고 있다. 며늘애는 아무 말 없이 남편 따라와서 한국생활에 적응하려고 애쓰고 있는걸 보니 착한 아이임에 틀림이 없다. 다문화 센타에 한국말 중급반으로 들어가서 공부도 곧잘 하더니 며칠 전 중급반을 수료했다고 수료증을 보여준다. 공부했다고 다 수료증을 받는 게 아니고 성적도 우수해야 하고 출석률도 좋아야 한다고 은근히 자랑한다. 문득 신혼여행 때 제주도에서 문자 보낸 것을 생각하며 웃는다. "어머니 방금 아침식사 먹었어요 지금 호텔있어요. 오후 바다에 관광가세요. 내가 잘 지내셨어요" 맞춤법도, 문법도, 띄어쓰기도 못하던 카톡의 문자가 얼마나 자랑스럽고 기뻤던지 아직도 그 내용을 외우고 있다. 그러던 며늘애가 지금은 아가 어린이집 원서도 제 손으로 다 쓴다. 친구들은 나에게 중국 아가씨들은 일을 안 한다고 하는데 네 며느리는 어떠냐고 묻는다. 그러면 나는 너희들 며느리는 시댁에 다니러 와 일 하냐고 되묻는다. 이구동성으로 안 한다고 대답하며 설거지나 겨우 한다고 한다. 한 친구는 며느리가 오기만 해도 좋은데 아예 시집에 안 오려고 한다고 푸념을 늘어놓는다. 아기가 보고 싶어 가려고 하면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꺼려한단다. 요즘 세상은 며느리가 상전이지 어디 감히 일을 시키느냐고, 김장도 해다 바친다고 말하는 친구들에게 우리 며늘애는 요리도 잘하고 설거지도 알아서 한다고 으쓱대면 모두 놀라고 부러워한다. 반찬도 제법 한다. 잡채도 할 줄 알고 김치부침개도 잘한다. 다행히 한국 음식을 좋아해서 내가 만들어 줘도 잘 먹고 며늘애가 만들어 내도 맛있다. 아마 중국에서 살 때 아들을 위해 한식 음식을 많이 만들었던 것 같다. 요즘은 인터넷을 보면 모든 요리의 레스피가 있으니 젊은 애들은 금방 뭐든지 배우는 것 같다. 요즘 아이 같지 않게 시부모님 어려운 것도 알고 예의범절도 곧잘 지킨다. 우리가 나갔다 오면 쫓아 나와서 다녀오셨냐고 인사하고 과일도 깎으면 먼저 가져다주고 하는데, 당연한 것인데도 기분이 좋고 뿌듯하다. 아기 밥 먹이고 챙겨서 어린이집에 보내는 것을 철저히 자기 손으로 하고 남편 옷들도 말끔하게 다림질 하여 옷장에 건다. 중국에 있는 부모님이 보고 싶다고 남편을 통해 휴가를 신청해 와서 허락했더니 지난달에 아기를 데리고 중국에 한 달 다녀왔다. 막상 부모님이 보고파 중국에 갔지만 가서는 남편이 보고픈지 매일 영상통화를 하고 아기 사진을 보내오더니 한 달이 다 차기 전에 한국으로 돌아왔다. 너희 집은 여기라고 말해 준 게 효과가 있었나 싶어 혼자 씩-웃어 본다. 사랑은 국경이 없다는 말이 실감이 난다. 인연이 신기하기만 하다. 목욕도 가끔 같이 가는데 우리를 보고 사람들은 하나 같이 말한다. “따님하고 같이 오신 거지요” 나는 자랑스럽게 말한다 “아니요 며느리인데요.”
아가 재롱 보기도 행복 중 하나이다. 말도 곧잘 해서 요즘은 ‘울면 안돼 뚝! 울면 안돼 뚝! 싼타 할아버지는 우는 아기에겐 선물을 안 주신대’ 하며 노래를 하는데 쏙 내민 입술이 어찌나 예쁜지 뽀뽀를 하고 싶어진다. 중국 말도 제법 한다. 난 1년이나 중국어 학원을 다녔는데도 잘 못하는데 아기는 집에서 엄마가 가르쳐 주는데도 금방 따라 한다. 내가 배운 것으로 좀 써 먹으려고 아가에게 중국말을 하면 발음 나쁜 사람이 말하면 아가 발음이 나빠진다고 며느리가 웃으며 말한다. 만 세 돐이 지나 한국 나이로는 내년에 다섯 살이 되어 어린이 집에서 한 단계 높은 곳으로 옮겨야 한단다. 며늘애가 이곳 저곳 견학을 다니면서 어느 곳으로 옮겨야 할지를 살피는 것도 신통하다. 벌써 이곳에서도 친구들을 사귀어서 서로 자기 집에 초대 하여 음식을 만들어 대접하기도 한다. 내년엔 고급반에 입학하여 일 년 공부를 더 하고는 교사 자격증을 딴 다음 중국어를 가르치는 선생이 되겠다고 한다. 요즘도 중국에 있는 친구들에게 한국 화장품이 인기가 있다고 사서 보내곤 하는데 조금씩 이익을 부치나 보다. 이번 성탄절에 남편 코트를 선물로 사 주었다고 자랑스럽게 말한다. 사랑의 힘은 위대하다. 먼 이국 땅에 와서 뿌리를 내리고 살 생각을 하니 말이다. 말이 잘 안 통해도 가슴에서 가슴으로 흐르는 정이 있으니 아무런 문제가 없고, 아들만 둘 있고 딸이 없던 나는 딸이 하나 더 생긴 것 같이 기쁘다. 아가를 안고 잠든 모습을 보면 측은하고 예뻐서 내 가슴에 안아 주고 싶은 충동이 일 때도 있다. 이렇게 매일매일 정을 쌓다 보면 아주 깊고 단단한 반석 같은 사랑이 이루어지겠지. 함께 살게 된 것도 축복이라 생각하며 감사 하고 있다. 몇 년 후에는 독립하여 나가겠지만 같이 살아간 세월에 비례한 깊은 가족애는 이사를 한 후에도 이어지리라. 중국여인네들은 손톱 손질하는 걸 좋아한다. 며늘애도 손톱을 기르고 예쁜 색으로 바르기를 좋아해서 설거지만 끝나면 손을 씻고 손톱을 가꾸는데 정성을 많이 쏟는다. 아들이 있을 때는 아들보고 설거지를 도와주라고 하지만 아들이 늦게 오는 날은 내가 설거지를 도와 줄 때가 많다. 행여 예쁘게 가꾼 손톱이 망가지면 어쩌나 하는 우려에서다. 그러면서도 기쁘기만 하니 나는 며늘 바보인가 보다. |
첫댓글 정말 멋진 며늘아이를 들였군요.
엄마, 아빠를 닮은 똑똑한 아들이
중국에 가서 사업한다는 이야기는 전에 들었지만
이렇게 아름다운 가족들의 삶은
이제 듣습니다.
감사하고 고마운 일입니다.
손자도 멋지게 자라 줄 것이고
며늘아인 훌륭한 중국어 선생님이 될 것입니다.
더불어 아들 사업도 잘 되고
온 가정에 하나님의 은총이 가득하시기 바랍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