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주일 설교 내용 요약
제 목 : 성경적 실천의 현장과 클레로스(240) – 사도들의 실천과 클레로스(219) – 갈라디아서 강론(30)
갈라디아서 강론(30) – 4장 17절 ~ 6장 18절(끝까지)
우리에게 충격적으로 다가온 말씀들
그대들에게 할례를 받게 하려는 자들은 싸르크스에 의해 움직이는 자들이다.(4:17, 6:13)
손할례당이 열성을 다하는 것은 갈라디아 형제들을 자신들의 추종자들로 만들려고 하는 것이다. 추종자들로 만들어서 자기들을 높게 세우려는 것이다.
자신들의 삶을 멋지게 만들려는 것이다. 이것이 세상 원리이다.
자기를 보호하고 자기를 세우기 위해서는 사람들을 때로는 이용하기도 하고 증오하기도 하고 무시하는 행동을 하기도 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싸르크스에 의해 움직이는 자들이라는 것이다.
지금의 유대인들은 이스마엘의 후손이고, 유대인 출신 그리스도인과 이방인 출신 그리스도인들은 이삭의 후손이다.(4:22-28)
종인 하갈에게서 난 이스마엘은 인간의 본성으로 계획하고 판단하고 결정하고 실천해서 태어난 아들이며, 지금의 유대인 집단은 하갈과 이스라엘의 계보를 잇는 집단이며, 율법의 종살이를 하고 있는 자들이라는 것이다.
반면에 자유인인 사라에게서 난 이삭은 약속에 의해 태어났으며, 유대인 출신 그리스도인들과 이방인 출신 그리스도인들은 약속에 의해 태어난 이삭의 계보를 잇는 자들이라는 충격적인 설명이다.
사도 바울의 율법관과 예수님의 율법관은 동일하다.(5:2-6)
예수님은 아브라함 언약과 모세 언약과 새 언약인 예레미야 언약을 성취하러 오신 분이다.(마5:17 구약과 다른 신약을 가지고 오신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계명을 다 지켜 행해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말씀하신다. 그래서 산상수훈의 결론도 실천해야 한다는 것이다.(마7:21-27) 그리고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의와 제자들의 의는 다르다는 것이다.(마5:18-19)
예수님은 모세의 언약과 예레미야 언약을 성취하러 오신 것인데, 할례를 받는다는 것은 모세 언약에 속한 자들이 되는 것이다. 모세의 언약은 사람들을 죄 아래 가두기 위해 주신 것이다. 따라서 모세의 율법에 갇힌 자들이 되는 것이다. 그런 자들은 자기 힘으로 율법 전체를 지켜야 하는 의무를 가진 것인데, 율법을 지킬 수 있는 인간은 세상에 없어서 죄 아래 갇힌 자들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예레미야 언약은 하나님의 법을 마음에 심어 버리시겠다는 것이다. 갈라디아 형제들은 이미 새 언약이 성취되어 가고 있었는데 싸르크스가 발동해서 왜 다시 스스로 율법을 다 지켜야 하는 모세 언약 체계로 들어가려고 하느냐고 말하는 것이다. 할례를 받는 것은 자기 힘으로 율법을 지켜서, 율법으로 의롭다고 인정받으려는 것인데 그런 자들은 새로운 창조의 은혜에서 떨어져 나간 자들이 되는 것이다. 인간은 율법을 못 지키고 심지어 율법의 내용조차 오해하는 것이다.(6:13) 그러므로 사도 바울과 예수님은 모세의 언약이 아닌 예레미야 언약을 제시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선택하신 자들의 마음에 하나님의 법이 심기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법대로 살아 가는 것을 소원하는 자들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자기 힘으로 율법을 지키는 것은 하나님의 법이 마음에 심기게 되는 십자가의 길을 열기 위해서 오신 예수님의 사역과, 성령의 역사로 그 길을 통과하고 있던 그대들에게 임했던 십자가에서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성령의 역사를 소용없게 만드는 것이다.
하나님의 법이 심겨져서 사랑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신실함이다. 하나님의 새로운 백성이 되었던 그들이 어떻게 그런 유혹에 넘어가느냐고 사도 바울은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모세 율법의 진정한 의미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게 된다는 것이다.(5:14-26)
예를 들면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는 십계명은 사망의 형벌과 결핍의 형벌을 받아 경쟁 속에서 사는 것이 정상적인 인간에게는 실천이 불가능한 계명이다.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게 된다는 것은 모세 율법에도 있다.(레19:18)
이웃과 나는 남이 아니고 하나라는 것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이웃(플레시온)은 동료다. 즉 현재의 미래의 형제 자매들이다. 그리스도의 신실하심이 우리에게 오면서 가능해지는 사랑은 서로를 한 몸의 지체들로 바라보는 사고이며, 인지 체계이다. 이것이 율법의 완성이며, 율법이 실제로 이루어진 삶이다. 그리스도의 신실하심이 우리에게 오면서 그 말씀의 의미를 알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모세 율법은 이미 진정한 하나님의 법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아브라함 언약과 모세 언약과 예레미야 언약으로 일관되게 진행되어 온 이와 같은 하나님의 뜻이 성취되는 것이 율법의 완성인 것이다.
아브라함 언약인 쩨다카와 미쉬파트를 행하는 집단은 하나된 집단을 의미하며, 사도 공동체가 처음이다. 완전하지는 않았지만 그 길에 들어선 사람들인 것이다.
모세 율법은 과도기의 언약으로서 사람들을 죄 아래 가두는 역할을 하는 것이며, 실천 불가능한 율법을 주신 것이다. 그리고서 메시아가 오시면서 새로운 창조가 시작되는 것이다. 그 특징은 어떤 사람도 싸르크스의 시선을 따라 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시선이 바뀌었다는 것이다.(고후5:16-17) 모두가 남으로 보는 시선에서, 이제는 하나님의 시선으로 본다는 것이다. 현재와 미래의 형제 자매들을 하나로 인식하는 것이다. 이것은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며, 율법의 완성이다. 아브라함 언약, 모세 언약, 예레미야 언약들이 다 성취되는 것이다.
싸르크스의 욕심대로 사는 삶과 성령의 인도를 따라 살아가는 삶은 서로 대립하고 있으면 하나님이 주신 소원대로 살 수도 없고, 싸르크스의 욕망대로 사는 것도 불가능하다. 아무것도 못하게 되는 것이다. 싸르크스의 욕심대로 사는 삶의 현실적인 모습은 자기를 보호하고 자기를 세우는 데 초점이 맞춰진 삶이다. 그러나 성령의 인도를 따라 살아가는 삶은 하나 된 클레로스의 성장과 확산을 마음 속의 소원으로 품고 살아가는 삶이다. 나를 위해 사느냐, 우리라는 집단의 정체성을 가지고 사느냐의 차이이다. 하나된 클레로스의 성장과 확산이 존재의 이유이며, 삶이 목적인 삶이 성령의 인도를 따라 살아가는 삶이다.
그러나 성령께서 우리를 인도하시면 율법이 완성되었기 때문에 율법 아래 있지 않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율법이 쓸모 없어졌다는 것이 아니라 율법이 내 마음속에 심겨져 있기 때문에 기록된 율법은 필요 없다는 것이다. 율법의 통제 아래 있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성령의 열매의 9가지 내용은 모세 율법에 다 들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율법이 완성된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율법이냐 복음이냐의 구도는 성립이 될 수가 없다.
서로를 타자로 인식하지 않기 때문에 형제 자매들 사이에는 서로 분노하거나 질투하거나 자기를 높이고자 하는 마음이 일어나지 않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각자 자신의 행위를 검증해야 한다.(6:4-10)
하나가 되어 살아가는 삶은 검증이 된다.(자기을 위해 살아가는 광신자나 도덕군자의 삶은 불가능하다) 우리는 각자 자신의 행위를 검증해야 한다. 예레미야 언약의 체계 속에 들어온 사람들은 행위가 검증이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모든 사람들이 잠재적인 전도 대상자라는 것을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한다.
항상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어야 한다.
율법의 완성은 현실 이야기이다.
신앙 고백은 아무 소용없고 하나님의 뜻대로 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은사 운동이나 선지자들이 한 일이 불법인 이유는 다 너희 자신을 위해서 한 일이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은 거기에 있지 않다는 것이다.(마7:21-27) 하나님의 뜻은 새 계명에 있다. 자기 동료를 자기 자신과 같이 사랑하게 된다고 하신 것이 새 계명이며, 그것이 하나됨이며 하나가 되어 살아가는 삶이다. 이것이 율법의 완성이다. 그리고 모세 율법의 내용이 원래 그런 거였다는 것이다. 따라서 갈라디아서는 실제로 일어난 구원 사건에 대한 증언인 것이다.
2.공지사항
다음 주 기도는 허남회 전도사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