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에 관한 시모음 64)
가을이 가는 길에 /김형범
이른 아침
배롱나무 조화가 놓여있다
가을 길섶 들국화
어린 미망인의 울음을 달랜다
목 빼고 먼 동구 밖 길만 바라보던
해바라기 고개 떨구고
아카시나무 가지 끝에 홀로 앉아 있는 비둘기
멍하니 빈집만 바라본다
오동나무는 밤새 쓴 연서 둘둘 말아 우체통에 넣고
주저리주저리 움켜만 쥐고 있던 굴참나무도
산 다람쥐에게 보시를 한다
떠난다는 건 모든 걸 버리는 것인가
검은 그림자만 가져가고
빈 가슴에
가을빛을 당겨 안아본다
시퍼런 가을 하늘이 섬뜩하다
가을 /권오열
그토록 푸르디 푸른 잎새
벌써 노랗고 붉은 슬픔들이 물들었습니다
푸른 창공에서 불어오는 바람
산등성을 타고 넘어
가을 이파리를 가만두지 않았습니다
흔들고 심술에서인지 남은 한
어쩌지 못하고
땅 위로 뒹굴게 합니다
가을풍광 아래서
임의 품안에 있는 것처럼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
이렇게 나의 가슴 파고 들어
멍들게 합니까
첫눈을 애타하는 마음
아직도인데
어지 못할 철없는 순정이여
내사랑만을 멍들게 하지말고
제발 그러지 마오
서리맞은 국화
다시 일어서지 못하고
구겨진 종이처럼
너절하게 서 있습니다
아 임이여 지나간 때의 모든 그리움같이
저 산비탈을 돌아
기쁨이 올 때까지
기다려 봅니다
가을 햇살 /김선필
저 풍요로운 들녘 한가운데
허수아비는 가을 햇살받고
미동없이 서 있다
지나가는 참새떼와
메뚜기 이리저리 날아오르고
국화도 여기 보란 듯
꽃대 열었다
주저리 주저리 열린 감
제 힘에 겨워
가지는 축 늘어졌다
나무 이파리 하나 둘
퇴색되어 가고
억새풀은 왕관을 쓰기 시작했다
비움이 있는 곳마다
자양의 대지는 춤추고
밀려오는 황금 물결 속으로
가을 햇살
강렬한 빛을 내고
가을 프리즘 /이경희(1935∼)
댓돌에 내려서는 상긋한 가을
아침볕을 따라 돌아서는 해맑은 풀꽃의 얼굴
뽀얗게 건조한
마당의 씨멘트 색깔에서
풀 먹인 치마폭이
파릇이 살아나는 탄력에서
어머님의 손매디가
성큼하게 돋아나는 아픔에서
다홍고추를 다듬는
재채기 소리에서
깡마른 호박넝쿨 위에
길게 늘어진 추녀 그림자에서
머리 빗으니
무심히 날리는 한 가닥의 새치에서
가슴 속
살비듬이 돋아나는 서걱임에서
장지문에 비껴드는
아침 빛줄기를 타고 오는 가을
이 아침
님의 손은 한결 가슬거린다
가을 /권오열
그토록 푸르디 푸른 잎새
벌써 노랗고 붉은 슬픔들이 물들었습니다
푸른 창공에서 불어오는 바람
산등성을 타고 넘어
가을 이파리를 가만두지 않았습니다
흔들고 심술에서인지 남은 한
어쩌지 못하고
땅 위로 뒹굴게 합니다
가을 풍광 아래서
임의 품안에 있는 것처럼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
이렇게 나의 가슴 파고 들어
멍들게 합니까
첫눈을 애타하는 마음
아직도인데
어찌 못할 철없는 순정이여
내 사랑만을 멍들게 하지 말고
제발 그러지 마오
서리맞은 국화
다시 일어서지 못하고
구겨진 종이처럼
너절하게 서 있습니다
아 임이여 지나간 때의 모든 그리움같이
저 산비탈을 돌아
기쁨이 올 때까지
기다려 봅니다
가을이 품은 설음 /김문 金文
흥에 취할 때, 취하면
모른다, 늘 잊고 있다
소리없이
조용히 스며드는 설음을
오곡과일 무르익는 향기에
단풍의 이쁨을 만끽할 때
그대여, 잊지마오
겨울이 살금살금 등 뒤에 다가오고 있음을
석양이 불탈때 어둠을 예감하고
폭염이 미칠때 가을을 의식하며
매지구름 맴돌때 비를 감안하고
명월이 다차면 비움을 감지해야 하리라
이제 찬서리가 일격을 가하면
산과 들은 낙엽으로 흽싸일테지만
유독 남산의 소나무만 여전하리라
일편단심 푸른 마음 변함없이
저~기 8월에 눈이 내린 백두산엔
벌써 초목이 데쳐낸 우거지가 되였으니
우리도 솜옷을 준비해야겠지
무심하면 고뿔의 엄습을 당할터
겨울이 오기전, 손발이 시리기전에
밀껍데기 안에서 문풍지 바르고
포근한 땅이불 두툼히 덮고서
한숨 자다가 동장군이 지나면
파릇파릇 남먼저 봄을 알리리라
세월의 혹형에 행운스레 몸 숨긴
자랑을 안고 감사를 품고
뒷동산의 진달래를 불러 오리라
가을,아름다운 계절에
설음이 담겼을줄 누가 알았으랴
축복의 잔치날이라 하기에는 미진하다
아릿함이 숨어 있는 가을은
가을이 흐르는 밤에 /김나현
또록 또록
가을 밤을 타고 흐르는
아름다운 별빛 세레나데
또르르 피아노 건반을 구르는
낙엽들 사이로 밀려 오는
추억과 낭만과
끝없는 사랑의 기쁨
오늘밤은 정말
그대와 단둘이 카페에서
붉은 와인잔에 쏘옥 빠져
사랑에 흠뻑 취하고 싶습니다
온몸을 감싸며 깊어가는
진한 그리움 속으로
보고 싶은 딱 한 사람
오늘 밤은
감미로운 목소리로
그대 귓가에 속삭이고 싶어요
사랑해요 당신!
가을 小考 2 /돌샘 이길옥
햇볕에 타다 붉어 버린
얼굴
어디에도 더위는 묻어있다.
100도 남짓 끓는 정을
홀연히 떠나와서
뭉개진 하늘 한 자락을 잡고
열 오르던 네 습성의 비탈에서
풍경은
귀뚜라미의 목젖을 움켜쥐고 있다.
혈관을 출렁이던 소망이
바람벽에 걸려
마악
알몸으로 벗어나는
가을의 서랍을 열어놓고
나는
네 심장에 어울리며
焦土의 노랠 빚고 있다.
가을 연가 /전대홍
파란 잎을 울긋불긋
곱게 물들이는 서늘한 바람
한 해 동안 어디에서
그 많은 물감을 준비했을까
소슬하게 한 번씩 스칠 때마다
드넓은 산과 들 캔버스에는
차례로 한 겹씩 수채화가 그려진다
눈부시게 선명한 채색화
볼수록 황홀한 모습
해마다 반복되는 신비한 그림
일생을 보았는데도 질림이 없을까
푹신하게 깔린 낙엽 밟으며
누군가와 애틋한 추억 더듬으며
범접불가 자연의 위엄 앞에
진한 감동과 놀라운 찬탄으로
아름다운 가을 연가 불러본다
가을빛 /청산 홍대복
소슬바람
불어오니
억새잎 춤을 추고
가을빛은
더욱 짙어
선홍색에 물이 든다
가냘픈
코스모스
한들한들 흔들리니
가을 정취 머무른
깊어가는 들녘엔
국화 향기 가득하다
따사로운
가을날에
드높은 푸른 하늘
고운 햇살
가을빛에 물들고 싶어라''
가을 타는 여자 /푸름 김선옥
외로워서
고독해서
보고 싶어서
미치도록 그립다 하려 했는데
차마
입을 열지 못했습니다
호수처럼 맑은
하늘을 몽땅
파랑물 들여 놓고
기다린 것 같은
그대가
더 외로울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가을이 만든 무대 /김민소
땡볕을 이겨낸
농익은 그리움이
곱게 치장을 할 때
허기진 영혼의 텃밭에
그들의 합주가 시작된다
고추잠자리 떼지어 와
오선지를 그려놓고
높은음자리표가 된 뭉게구름
억새풀은 비올라
허수아비는 첼로
갈바람이 바이올린을 치면
코스모스, 국화가 노래를 한다
아! 참
도돌이표가 된 감나무
툭
툭
떨어질 때 마다
다시 들리는
사랑이 영그는 소리
가을 앓이 /이채
깊은 밤
외로운 잠이 들었어요
잠이 든 창가에
나를 아는 한잎 낙엽이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줄도 모르고
아프도록 시린 새벽 이슬
스러지는 달빛이 고이 고이 앉을 적에
꿈을 꾸었어요.
가을 둥지에 꽈리를 트는
갈색 깃털 새 한마리
내게 날아들고 있었어요
푸드득 잠이 든 사랑이
빨갛게 눈을 뜨지 뭐예요
가만 가만 새하얀 뺨에
길 잃은 별잎 떨어져
가을을 앓아 대고 있었는데
어쩌면
아침은 그리도 늦게 오는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