벚꽃에 관한 시모음 28)
벚꽃 /이재기
백설기 떡잎 같은 눈
봄날 4월 나뭇가지에
온 세상의 나무를 네가 덮었구나
선녀 날개옷 자태인 양
우아한 은빛 날개 펼치며
송이송이 아름드리 얹혀 있구나
희지 못해 눈부심이
휑한 마음 눈을 뜨게 하고
꽃잎에 아롱진 너의 심성
아침 이슬처럼 청롱하구나
사랑하련다
백옥 같이 밝고
선녀 같이 고운 듯
희망 가득 찬 4월의 꽃이기에...
왕벚꽃이랑 /이영지
봄으로
이 길만이 남느라
웃음
달다
아이들 얼굴만한 왕벚꽃 끼르르응
뽀오얀 웃음 꽃잎이 겨드랑이 까르르
아이들
벚꽃보다 더 크는
웃음
달다
길가던 사람들은 꽃보다 아이닮아
바람의 왕벚꽃보다 더 크도록 까르르
산 벚꽃 /조남명
푸르스름한 봄 산
알록달록 수놓은 무더기
가까이 가보면
활짝 어우러진 산 벚꽃 수관(樹冠)이어라
도로변 가로수 왕벚꽃
줄지어 버티고 서있어도
벚꽃 원조는 여기 있나니
보는 이 별로 없는 산중에
외롭게 피고 져도
부러움이 없다
고요한 산언덕을 베개 삼아
가지가지 나무뿌리
얽히고 설키면서
소박하게 피고 진단다.
벚꽃 속으로 /유봉희
첫사랑의 확인 눈감아도 환한 잠깐 사이에
잠깐 사이로 꽃잎 떨어져 떨어져도 환한 꽃잎
살짝 찍는 마침표 하얀 마침표
벚꽃 비 /정회선
모델 된 벚꽃
여기저기 셔터 소리
하루 종일 모델 포즈
당신이 부럽기만 하다.
나를 향한 임은 언제이더냐
꿈속에서였나 상상이었더냐
그리움만 남긴 나의 연인아
내 맘에 간직된 나의 모델
벚꽃 보다 더 순수했던 당신
흩날리는 벚꽃 잎에
임의 추억 들추어 본다.
한 잎 한 잎 떨어지는 그대 흔적
내 맘에 아련한 추억비로 내려온다.
나 벚꽃 비를 맞으며
나 당신을 향해 오늘도 이 길을 걷는다.
나 그대를 품고 둘이서 ...
벚꽃터널 /이문재
멀리서는 그저 보일 따름이다. 하룻밤 새 나타난 하얀 대열이 산등성이에 난 새길처럼 보일 뿐이다. 멀리서는 벚꽃터널 하얀 꽃그늘이 보이지 않는다.
벚꽃터널 안으로 한번 들어가보라. 거기 꽃그늘 뒤덮는 또 하나의 터널이 있거니와, 눈보다 두 귀가 훨씬 더 커진다. 온몸이 귀가 된다. 귀가 된 온몸은 얇은 스웨터와 면바지 속에서 저절로 더워진다.
꿀벌이 벌꿀을 만드는 소리, 수만 마리의 꿀벌이 수억 개 꽃송이에 달라붙는 소리다. 사방에서 윙윙거리는 날갯짓 소리. 자욱하다. 빈틈이 없다. 꽃보다 소리의 터널이 더 높고 길고 깊다. 색깔과 소리가 빛 속에서 어우러지는 숨가쁜 환한 터널이다.
남녘땅 사월 중순 백주대낮에 벚꽃터널 안으로 걸어가보라. 있는 힘을 다해 날갯짓하는 소리, 단물이란 단물은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죄다 빨아대는 소리. 그뿐이랴, 저마다 있는 힘을 다해 몸을 활짝 열어놓는 수억 개 희고 붉은 꽃 송이들.
어디 그뿐이랴, 저 아래, 줄기와 가지보다 더 깊고 멀리 뻗어 있는 뿌리들 또한 있는 힘껏 흙을 움켜쥐고 있다. 그러니 꿀벌은 벚나무의 저 사방으로 뻗은 깊고 먼 뿌리를 빨아대는 것이다. 꿀벌은 지구의 오래된 속살을 빨아대는 것이다.
얼핏 보고, 벚꽃과 꿀벌은 그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혼례를, 그것도 집단 혼례를 치른다며 공연히 민망해하거나 부러워하지 말자. 예찬하지도 말자. 저 꿀의 일부가 우리 몸으로 들어오지 않는가. 우리가 더운물에 벌꿀 한 숟가락 타 마실 때, 우리는 꽃의 단물을 마시는 것이다. 나무의 뿌리를, 지구 속을 우리 몸속으로 모시는 것이다.
이런 시스템은 굳이 벚꽃터널 속으로 들어가지 않더라도 알아야 한다. 지구->식물의 뿌리->식물의 꽃->꿀벌->벌꿀->인간->? 이런 사슬이 이제는 멀리서도 다 보여야 한다(사실 ‘?’만 빼면 일찍이 교과서에서 다 배운 내용이다).
벚꽃잎 /안영준
심술궂은 비바람은
절정을 기다렸다는 듯이 훼방을 시작하니
못 견디고 떨어져
눈발처럼 허공을 배회하는구나
흰 분칠한 뽀얀 꽃잎들이
천사처럼 하늘에서 마구마구 쏟아져
그만 맥없이 추락하는구나
추풍낙엽처럼 힘없이 떨어지는
아씨 볼처럼 순수한 저 꽃들은
생명이 짧아서인지 화사함이 더하는구나
벚꽃이 필 때면 /古松 정종명
만개한 꽃망울 방글방글 웃음
무르익어 가는 봄날이면
네게서 탈출할 출구를 찾지 못하고
스쳐 지나온 날들 앞에 몸부림치는
설렘 안고 벚나무 아래 떨고 섯다
싱싱한 젊은 세월이 제 잘 거리는
강물에 흩어지는 화음이 흐르면
묵은 언어들이 목에 가시처럼 걸려
눈앞에 뿌연 안개 꽃 숭어리로 피고
뒷산을 통째 담그고 시치미를 띠는
수원지는 수심 깊이 속마음 감추고
내숭떨며 주름치마 깁고 있다
벚꽃 귀하던 시절 천리 먼 길
하동 쌍계로 벚꽃놀이 같이 갔던
그 아이는 어디서 옛 생각에 젖어 있을까
지금은 온천지가 벚나무로 집 앞만 나와도
벚꽃 터널 이루고
바닥에 꽃잎 색 바랜 그리움처럼 쌓일 때면
함께 걷던 그 아이가 눈에 밟히는데.
벚꽃이 피니 /문장우
봄이 오고
내 마음속에 활짝 핀
벚꽃나무가 서 있다
마음속 너를 짚어낸
한 생각 갈피마다
차가운 봄바람이 빈터에
가득 찬 꽃송이 물러 나르더니
밤이 새도록
달님이 웃움 짓고
온종일 햇님도 예쁜 빛깔 모아
너를 활짝 웃게 하는구나
달님의 웃음이
햇님의 따스로움이
모두 모여 눈꽃 같은
행복으로 피었구나
바람 따라 물결 따라
지향 없이 흘러온
내 삶의 자락마다
꽃피워 내고자 한 나의
삶의 자락에
주름패인 삶의 둘레
황혼의 노인 헛기침 따라
봄 햇살이 너를 줍고 있다
이런 날에는
새순 돋고 꽃은 피고
봄의 향기 가슴에 마냥 깊어
그리운 그대 얼굴도 잊으리라
벚꽃이 전하는 말 /정찬열
봄날에
서정으로 피어난 꽃
벚꽃은 4월을 활짝 피워낸다
일본의 황실에 상징이 된 꽃
곱게도 피었다
짧게 지는 탓으로
일본인의 습성을 닮은 듯 피어나지만
봄이 되면
뜬구름 하얀 너울 꽃은
일제 시 권장되어 벚꽃이 심겼고
왜인들의 향락하는 갈래꽃부리
일본의 국화는 ‘벚꽃이’ 아니라 하네
해마다
벚꽃이 피어날 때면
꽃잎을 뜨겁게 가슴을 달구고
아지랑이 몰고 오는 완연한 봄 꽃잎
사랑의 눈물처럼
흐드러지고 꽃비 되는 날
담백과 순결의 기억으로 되새기란다.
*일본에 국화(國花)는 없다고 함
벚꽃나무가 내게 /조용미
모리스 장드롱은 첼리스트다
그의 연주를 듣고 있으면
벚꽃나무가 생각난다
첼로의 숲에 그의 나무를
심어놓지 않아 섭섭했다고
시인 장석남이 편지를 보내왔다
(그의 연주는 너무 프랑스적이라
사실 나를 사로잡진 못했지만)
벚나무 아래 누워본 적 있는가
낙화가 곧 개화인 벚꽃나무
지난봄, 산길을 걷다 그 아래
자리도 깔지 않고 그냥 누워버렸다
벚꽃잎들의 낙화,
그 아스라한 순간들 ……
바람이 눈길만 주어도 꽃잎들은
솨 사방으로 흩어졌다
얼마나 더 가벼워질 수 있는가
꽃잎 지는 소리가
세상을 고요하게 만들었다
너무 가벼워, 지상에 내려앉을 때까지
하염없이 허공을 맴도는
꽃임들의 群舞……
꽃잎들은 춤을 추며
벚나무 아래 누워 있는 나의 몸을
툭 툭 치고 지나갔다
꽃잎이 치고 간 자리가 한동안
욱신거렸다 비 온 뒤,
희끗희끗한 꽃잎의 잔해들이
흙 속에 박혀 있었다 나무들은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고 시치미를 떼고
쑥쑥 자란 잎사귀들을 펼쳐
하늘을 가렸다
꽃 다 진 벚나무 아래
고개 숙이고 마음자리를 더듬으며
어슬렁거릴 때
툭, 무언가 어깨를 건드렸다
까맣게 익은 사분음표,
꽃의 종기인 버찌
나는 그날 꽃나무의 말 하나를 배우고
산을 내려왔다
태평양 벚꽃 /김금용
사월 벚꽃을 못 본 사람들은
한여름 해질 녘 바다로 나오세요
태평양 한가운데로 나오세요
수만 마리의 물새가
일제히 바닷물을 할퀼 적마다
플랑크톤을 주둥이에 물고 오를 적마다
화들짝 피어나는 벚꽃
이내 바다로 떨어지는 꽃잎들,
검은 바다가 수만 개 주둥이를 내밀어요
날개를 치고 나가는 물새떼가
바다의 수만 개 긴 팔을 뿌리치려고 허우적대요
나신의 빛살을 사방으로 튕기다가
이내 속절없이 검은 어둠으로 지는
눈부신 봄,
부활의 봄이 거기 있어요
불로초를 먹었는지 바다가 꽃을 피워요
늦바람난 홀아비 바다가
벚꽃나무 심어놓고 물새들을 다시 불러요
시리게 져버린 벚꽃이
한여름 다시금 피는
해질 녘 태평양 바다로 나와보세요
벚꽃열차 /이순주
꽃은 멀리 피어 그리움을 만든다
어느 그리운 역으로 달려가는 것일까 산과 들 나무들이 빠르게 스쳐 지나간다 당신 지나온 거리만큼 기차가 달려가고 있다
봉합된 편지처럼 침묵하며 밖을 내다본다 꽃들의 위로를 받으며 나는 부쳐지고 있다 그대가 내게로 달려오던 속도가 이러했을까 연착도 없이 달려오는 봄
어떤 그리움이 나를 향해 두 팔 벌리고 달려오는지 이처럼 급하게 봄을 달려가는지 가지마다 벚꽃들 만개하였다 눈부신 꽃들의 속삭임,
풍경을 놓아보낼수록 당신이 늘 있는 추억에 가까워지는 것이다?
나를 배달하느라 기차는 덜커덩덜커덩, 문자메시지 같은 정거장의 안내표지판 → →를 따라 몇 개의 역을 지나왔다 꽃들이 나를 불러낸 게 분명하다
이렇게 환한, 꽃들의 종착역엔 당신이 서 있을까
나는 지금 벚꽃터널을 관통하고 있다
마이산 벚꽃 /조준열
오시게
진안 고원 벚꽃 보러 오시게
일찍 피어 늦게 번창한
마이산 벚꽃
마이산은 두 귀 쫑긋
하늘의 소리 들으면
벚꽃은 인간들 환흐ㅟ 하늘에 올리는 것
별빛 유난히 밝을 때 피는
마이산 벚꽃은 꽃 중에 꽃
부모님 원앙부부상 타실 때
우리 팔남매 가슴에
진안 벚꽃 환하게 피었으니
오시게
한 달음으로 진안 벚꽃 구경 오시게
모두 오셔서 올망졸망 꽃이 되시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