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과 아르헨티나, 그 악연의 드라마

축구문화가 발전하려면 축구가 축구장 밖에서도 소비될 수 있도록 여러 가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그 중의 하나가 드라마 기법을 도입하는 것이다. 방송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드라마의 위력이 얼마나 폭발적인지를 모두 알고 있다. 드라마의 핵심은 이미지와 이야기다. 이미지는 앞 대목에서 언급했으니 여기서는 ‘이야기를 만드는 법’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자. 2002 월드컵에서는 모두 48번의 조예선 경기가 열렸다. 그 중 전세계의 축구팬들과 언론으로부터 가장 뜨거운 관심을 모으는 경기는? 딱 잘라 말해서, 6월 7일 삿포로에서 벌어졌던 죽음의 조 죽음의 대결 잉글랜드와 아르헨티나의 처절한 일전이다. 월드컵 역사를 뒤척이다 보면, 특정한 두 국가가 악연이다 싶을 만큼 뒤얽히는 경우를 발견할 수 있다. 대표팀에 대한 기대와 자부심, 축구에 쏟아 붇는 시민 사회의 열정 등에서 다른 나라에 선두 자리를 양보할 생각이 조금도 없는 잉글랜드와 아르헨티나. 두 나라의 축구팬들은 자국의 대표팀이 세계 최강이라 호언하지만, 역대 전적에서 자신들보다 적어도 반보는 앞서있는 나라들이 더러 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예컨대 브라질이나 이탈리아, 그리고 독일 같은. 여기서 비롯되는 열등감은, 비슷한 처지의 호적수를 만나는 경우 매우 공격적으로 끓어오른다. 양국의 첫 번째 대결은 62년 칠레 월드컵 조 예선전이다. (잉글랜드가 3-1로 승리). 두 나라는 이후 세 번을 더 겨루었는데, 62년 이후 부딪힌 세 경기 모두가 엄청남 시비거리를 양산해 냈다. 늘 세계 최정상의 언저리로 올라가는 길목에서 부딪히곤 하는 잉글랜드와 아르헨티나 두 나라 사이에는 도대체 어떤 사연이 묻어 있는가. 2002년 벽두, 영국과 아르헨티나 사이에 소리 없는 총성이 대서양을 가로질러 불을 뿜었다. 먼저 방아쇠를 당긴 쪽은 영국의 언론. 2002년 월드컵 숙명의 재격돌을 두고, 영국의 일부 신문들이 복수(revenge)라는 표현까지 써가며 전의를 불태우자, 아르헨티나 언론이 '적반하장도 유분수'라며 발끈하고 나선 것이다. 영국인들의 초점은 86년 8강전에서의 '신의 손' 사건, 98년 16강전에서의 베컴의 퇴장에 뒤이은 승부차기에서의 패배를 인정할 수 없다는 것. 마라도나의 신의 손은 명백한 핸들링 반칙이며, 베컴이 파울을 당하고 엎드린 자세에서 시메오네에게 발길질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시메오네가 고통을 호소하며 넘어질 만한 타격은 아니었다는 것이 골자이다. 아르헨티나 사람들은, 베컴의 경우 강도가 문제가 아니라 '비신사적 행위'가 문제였던 만큼 시메오네가 과장된 연기를 하지 않았어도 어차피 퇴장감이었다는 논리로 반박한다. 이튿날 그 경기를 보도하면서 영국 신문들이 '베컴? 집에 가! (베컴? 백-홈!)'라고 기사제목을 뽑은 것은 잘못을 인정한 것이 아니냐는 것. 마라도나의 신의 손은 명백한 오심이지만, 아르헨티나 언론은 66년 8강전 당시의 이야기를 꺼내며 '피장파장'이라고 맞선다. 웸블리 스타디움에서 벌어진 그 경기의 분수령은 전반 36분 서독인 주심 로돌프 크레이틀레인이 아르헨티나의 주장 라틴에게 꺼내 든 레드카드. 심판에게 욕설을 했다는 것이 퇴장을 명령한 이유였는데, 조사 결과 라틴이 했던 말은 욕설이 아니라 '할 말이 있으니 스페인어 통역을 불러달라'는 요청이었다. 아르헨티나 언론은, 잉글랜드 감독 램지가 기자회견장에서 발언했던 말도 문제삼는다. '비교적 부진한 경기를 펼친 원인은 무엇이냐'는 유럽 기자들의 질문에 '우리는 짐승(animal)들과 경기를 할 때는 실력발휘를 할 수가 없다'고 답한 것은 아르헨티나 국민 전체에 대한 모독이 아니었느냐는 것. 램지의 이 발언을 '우발적인 실수'라고 보기는 어렵다. 경기 후 선수들끼리 셔츠를 교환하지 못하게 막는 등, 아르헨티나를 향한 램지의 적대감이 여러 부분에서 감지되었기 때문이다. 이 모독에 대한 남미인들의 복수는 4년 뒤 콜롬비아에서 보다 교묘한 방법으로 자행되었다. 멕시코 월드컵에 출전한 잉글랜드 팀이 준비 캠프를 차렸던 곳은 콜롬비아. 문제는 한 콜롬비아의 보석상이 잉글랜드 팀의 주장 보비 무어를 절도혐의로 고발한 것. (2002년 월드컵에서도 세네갈 선수 하나가 비슷한 사고를 저질렀다.) 평소의 인품이나 수입으로 보아 보비 무어가 절도를 기도했다는 것 자체가 언어도단이지만, 콜롬비아 경찰은 이 사건을 '철저하게' 수사, 이 과묵한 잉글랜드인을 법의 이름으로 일주일 이상 억류하는데 성공한다. 보비 무어는 결국 여러 가지 조사를 모두 받은 연후에야 선수단과 재합류할 수 있었다. 남미인들은 램지의 발언을 남미인 전체에 대한 모독으로 받아들였었던 것이다. 그러나 잉글랜드와 아르헨티나의 악연이 이것만은 아니다. 두 나라는, 최근세의 어느 순간에 실제로 전쟁을 벌인 적이 있다. 82년 월드컵 개막 전 최대의 화제는 포클랜드 전쟁이었다. 전쟁의 쌍방인 영국(잉글랜드)과 아르헨티나가 모두 본선에 진출했던 것. 과연 이들이 축구장에서도 맞대결을 펼칠 것인가를 놓고 세계의 언론들은 촉각을 곤두세웠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양 팀의 맞대결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아르헨티나는 개막전인 대 벨기에 전에서 0-1로 패하며 비틀거리더니, 2차 리그에서도 이탈리아, 브라질에게 1-2, 1-3으로 연패하며 무력하게 물러났다. 그러나, 이 무력한 패배는 전쟁의 상흔이기도 하다. 나중에 밝혀진 바에 따르면, 아르헨티나 선수들은 정부 발표에 따라 자기들이 포클랜드 전쟁의 승전국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단다. 각국 기자들의 거듭되는 질문에 진실이 무엇인지를 뒤늦게 알게 되었고, 억장이 무너져 도저히 경기에 집중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경기 전 날, 선수들은 숙소에 틀어박혀 문을 안으로 걸어 잠근 채 통곡을 하며 울었다고 한다. 이 눈물이 흘러간 지점이 86년 월드컵 신의 손 사건이다. 축구팬들 중에는, 마라도나가 일부러 손을 이용하여 골을 넣었고 이것이 그가 비난받아 마땅한 이유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문제의 핵심을 다소 비켜간 것이다. 영국 언론이 흥분했던 이유는 마라도나가 손으로 골을 넣었기 때문이 아니라 '고의적으로' 상황을 왜곡했기 때문이다. 마라도나는 측면에서 날아온 공을 손으로 밀어 넣은 것이 아니다. 문전 혼전 중 수비수의 발에 빗맞은 공이 어설픈 곡선을 그리며 골문 쪽으로 프르륵 날았고, 마라도나는 순간적으로 문전을 향해 돌진하였다. 그리고, 공을 보고 달려나오는 잉글랜드의 골키퍼 피터 쉴튼을 마주보며 다소 어색하게 점프를 했다. 예컨대, 마라도나는 공을 끝까지 시야에 넣지 못했다. 골키퍼의 서슬에 밀려 보호막 삼아 엉겁결에 팔을 쳐들었을 뿐이다. 당시의 사진을 자세히 살펴보면, 공중에 떠있는 마라도나가 눈을 질끈 감고 있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공이 그의 팔을 맞고 골문 안으로 엉금엉금 굴러 들어간 건 팔할이 우연이다. 문제는 상황이 벌어진 직후 마라도나가 보여준 태도이다. 그는 그것이 정당한 득점인양 골 세레모니를 펼쳤다. 당시 영국 언론이 마라도나의 죄질이 나쁘다고 단언하며 흥분했던 이유는 상황 직후 마라도나가 정당한 득점인양 행세하며 골 세레모니를 펼쳐 튀니지인 주심의 판단을 호도했기 때문이지 고의적으로 손을 사용했기 때문이 아니다. 두 나라는 이번에야말로 정정당당한 승부를 원 없이 펼쳐 보일 수 있을 것인지. 이 경기에다 대면, 과거의 지배자와 피식민지 국가가 벌이는 스페인 대 파라과이 전(6월 7일 전주)이나 쿠릴열도 북방의 섬들을 두고 영토 분쟁을 계속하고 있는 러시아와 일본(6월 9일 요코하마)간의 한 판 승부는 복수심 운운 할 것도 없었다. 홋카이도의 차가운 바다 속으로 뜨거운 눈물을 흩뿌린 팀은 아르헨티나. 전 세계가 숨을 죽이고 주목했던 그 경기는 마이클 오웬이 얻어낸 페널티 킥을 데이빗 베컴이 골로 연결한 잉글랜드의 승리로 끝났다. 그것은 그 경기의 유일한 골이었다. 아르헨티나 일레븐은 다음 대회에서의 복수를 다짐하며 쓸쓸히 짐을 챙겼다. 작성자 : FOOTBALL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