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8년 가을, 나는 일본사상사에 관한 국제심포지움에 참석하도록 동경대학 동문교수들에 의하여 초청을 받았다. 열띤 심포지움 토론이 한창이던 어느날 저녁, 히라이시 나오아키(平石直昭)라는 친구가 나를 신주쿠(新宿)의 어느 조그만 영화관으로 데리고 갔다. 자리가 100여 석밖에 되지 않는 매우 작은 상영관이었다. 난 몇명의 관객만 쓸쓸하게 앉아있는 그런 작은 영화관을 난생 처음 체험하였기에 묘한 분위기에 휩싸여 있었다. 그리고 또 당시 나는 양심선언으로 교단을 떠나 실직한 상태였기 때문에 가슴 한구석엔 텅 빈 외로움이 촉촉이 젖어있었다.
“당신 같은 중국통의 한국지성인이라면 꼭 한번 봐둘 필요가 있는 작품이야. 중국문명의 저력을 과시한 문제작이야라 말할 수 있지. 올해 베를린영화제 그랑프리를 받았다구.”
난 그때만 해도 중국영화예술계를 우습게 알았었다. 역사적으로 뤼미에르 형제가 인류사상 첫 기록영화를 만든 이후, 얼마 안되어 소련의 에이젠슈타인(S. M. Eisenstein, 1898∼1948)이 몽따쥬기법의 아방가르드 작품인 ‘전함 포템킨’(1925)을 내놓았다면, 이미 우리나라의 영화사는 이러한 세계사적 기류에 조금도 뒤지지 않는 작품을 동시대에 제출하였던 것이다.
1926년 나운규(羅雲奎, 1904∼1937)의 ‘아리랑’이 바로 그것이다. 그와 동시대에 활약한 이규환(李圭煥), 그리고 이태리의 네오리얼리즘의 작품들을 무색케 만드는 ‘오발탄’(1961)의 유현목, ‘마부’(1960)의 강대진, ‘현해탄은 알고 있다’(1961)의 김기영, ‘만추’(1966)의 이만희, 그리고 영상시대의 하길종, 이장호에 이르기까지 한국영화사는 세계영화사의 대열에서 양과 질에 있어서 조금도 뒤지지 않는 선두적 역할을 충실히 연출하여 왔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에 비한다면 중국의 영화사는 차라리 빈곤한 작품들로 장식되어 있었고, 우선 자본이나 테크닉적인 면에 있어서도 한국의 수준에 훨씬 못미친다고 생각되었던 것이다.
쓸쓸한 영화관의 불이 꺼지고 광활한 대지에 붉은 수수밭이 펼쳐졌다. 그 수수밭을 가르고 지나가는 친영(親迎)의 신부가마, 가마를 메고가는 사나이 지앙원(姜文)의 울퉁불퉁한 근육덩어리와 몸짓, 그것이 표출하는 싱싱한 에너지, 말없이 반복되는 리듬, 붉은 색조…. 나는 순간 표현키 어려운 어떤 웅장한 선율의 블랙홀로 빨려들어가는 느낌을 받았다. 광활한 시베리아 대지를 연상케 하는 ‘닥터 지바고’의 웅혼한 동선들이 슬라보필리즘(Slavophilism)의 강렬한 표출이라 한다면, 끝없이 펼쳐지는 붉은 수수밭의 광활한 지평선은 이미 언설을 필요치 않는 사이노필리즘(Sinophilism)의 강력한 클레임이었다.
“이제 중국이 문화혁명의 슬럼프에서 벗어나기 시작했군. 그런데 이제 갓 깨어난 어린아이의 포효가 축적된 한국영화사의 성취를 뛰어넘고 있다는 것은 참 부끄러운 일이야”
영화관을 나오면서 내가 친구 히라이시교수에게 던진 말이다. 그때만 해도 한국에서 장이머우(張藝謨)라는 이름을 아는 사람은 없었다. 뻬이징영화학교(北京電影學院) 출신의 5세대 감독의 대표적 주자, 이 한 천재의 출현이 중국의 영화산업 전체의 운명을 뒤바꾸어 놓았다. ‘붉은 수수밭’에서 ‘영웅’에 이르기까지, 불과 14년 동안 13편의 작품으로 그는 세계최정상급의 감독의 반열에 올랐을 뿐 아니라 중국문명의 수준을 한껏 격상시켰다. 그가 활약한 14년 동안, 우리나라에서는 그를 필적할 만한 인물을 찾아볼 수가 없다. 뿐만 아니라 그로 인하여 촉발된 차세대 중국영화감독들의 눈부신 활약상, 그 르네상스는 세계영화산업에 지속적인 충격파를 던지고 있는 것이다.
어제 14일 오후 나는 장이머우를 서울 삼성동의 인터컨티넨탈호텔 프레지덴셜 수트룸에서 만났다. 나는 먼저 간단히 나의 이력을 소개했다. 중국은 잘 몰라도 일본과 같이 전문성의 칸막이가 심한 사회에서는 나같이 다양한 이력을 소유한 사람은 드물 것이라고 말하자, 그는 중국에서도 역시 찾아보기 힘들다고 말했다. 우리의 만남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그대의 작품은 중국의 토속적인 정취를 잘 그려내고 있다. 그리고 그대의 작품에는 그러한 토속적 정취에 갇혀사는 인간들의 내면세계를 매우 보편적인 시각에서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듯하면서도, 그러한 비판적 시각속에서 역으로 중국문화에 대한 향수와 신뢰와 신념, 그리고 자신감을 불러일으키는 매우 오묘한 아이러니가 깃들어 있다. 중국전통문화에 대한 그대의 생각을 듣고 싶다.
“나의 초기의 작품을 중심으로 생각하면 나는 우리 중국전통문화를 인간성의 상반되는 양방면에서 접근했다고 생각한다. 그 한 방면은 인성의 개방이요, 반항이요, 활력이다. 그리고 그 반대 방면은 인성의 폐쇄요, 체념이요, 굴욕이다. 전자를 대변하는 작품이 ‘붉은 수수밭’(紅高粱)이고 후자를 대변하는 작품이 ‘국두’(菊豆, 1990)다. 나는 이 두 작품을 자매편으로 생각한다. 우리 인간에게는 이 두 측면이 공재(共在)하고 있다.”
―그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하겠다. ‘붉은 수수밭’에서는 주인공들이 일본군에 대항하여 싸우기 때문에 반항이요 개방이라 한 것이고, ‘국두’에서는 사람들이 주변의 봉건윤리와 싸우지 못하고 쓰러져 가기 때문에 폐쇄요 체념이라 한 것인가?
“일본에 대한 항전이라는 테마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두 영화를 잘 비교해보면 나의 이러한 테마는 전편의 분위기에 스며있다. ‘붉은 수수밭’에 나오는 인간들은 모두 담이 크다(膽子大). 불륜의 사랑일지라도 개방적으로 수용하며 닥치는 운명을 적극적으로 개척해나간다. 그러나 ‘국두’에 나오는 인간들은 모두 담이 작다(膽子小). 사랑도 폐쇄적으로 비밀리 하며 닥치는 운명을 순응할 뿐이다. 그리고 주어진 체제속에서 체념하면서 스러진다.”
―그렇다면 그대의 ‘홍등’(紅燈, 1991)이라는 작품은 ‘국두’의 테마에 가까운 작품인가?
“그렇다. ‘홍등’에 나오는 미로와 같은 4각의 사대부 대가집은 봉건사회 전통문화의 축소화된 하나의 세계다. 높은 담, 그 담속에 갇혀사는 인간들, 이것은 불변하는 봉건도덕의 감옥으로서 설정된 것이다.”
―나는 그대의 모든 작품 중에서 ‘홍등’을 가장 높게 평가한다. 그것은 매우 구체적인 사례를 묘사하고 있지만, 농축된 삶의 무대에서 펼쳐지는 고도의 추상이기 때문이다. 그대가 그 영화의 남주인공, 진대감의 얼굴을 밝히지 않은 기법도 매우 놀라운 것이다. 그는 이 대가집의 세계를 지배하는 하나의 추상적 제도며 힘일 뿐이었다. 나의 철학이 인간의 추상적 사유의 세계를 다루면서 전통의 득실을 논구하는 것과 진배없는 한 예술가의 작업이었다.
“‘홍등’의 주제는 인간성의 이화(異化)이다.”
―이화라니? 그것은 타락을 의미하는가?
“타락이란 표현은 적합치 않다. 예를 들면, 신교육체제에서 대학물까지 먹은 꽁리가 계모의 강권으로 진대감의 4번째 첩으로 들어갔을 때, 처음에는 발안마 받는 것을 싫어한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홍등이 높이 걸리고 발안마 받는 것을 좋아하게 되고 편하게 느끼게 된다. 이런 것이 곧 이화(異化)라는 것이다.”
―인성의 변질, 왜곡이라는 뜻이겠군.
“그렇다. 모든 전통은 하나의 모식(模式)을 형성하게 되고, 그 모식은 하나의 아편이 되어 인간성을 이화시킨다. 그것을 나는 비판적으로 고발한 것이다.”
―좋다돬 내가 ‘홍등’이 위대하다고 생각한 것은 그러한 그대의 비판정신이 살아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왜 그러한 비판정신이 ‘영웅’에서는 사라졌을까? ‘영웅’은 겉으로는 매우 멋드러진 무협영화 같지만 그 속사정인즉 진시황의 천하주의를 위하여 3명의 위대한 영웅들이 모두 자진 희생하는 구조를 지니고 있다. 이것은 중화주의가 표방하는 새로운 제국주의에 대한 아첨이다. 그대의 최근 작품, ‘책상서랍속의 동화’(一個都不能少, 1999)도 그 사실성은 매우 좋았지만 결국 시골초등학교의 간난을 정부가 해결해주는 해피엔딩으로 끝남으로써 현 공산당체제를 찬양하는 선전물처럼 보일 수가 있다. 그대들의 중화주의에 핍박당하고 있는 티벳인민들의 통고(痛苦)를 생각한다면 그러한 영웅주의는 쉽게 용납되기가 어렵다.
“우선 ‘책상서랍속의 동화’를 가지고 말하자면 그것은 리얼리즘의 표현, 배우들의 삶과 연기까지도 리얼하게 표현해보려는 새로운 시도, 이 이상의 아무것도 아니다. 그리고 그 해피엔딩은 특정한 목적을 위하여 조작된 결과가 아니라 오늘 중국사회의 리얼리티를 있는 그대로 정직하게 묘사한 것이다. 그리고 우리나라는 아직도 사회주의국가이다. 전통물을 다룰 때는 약간의 여유가 있지만, 현실사회를 다룰 때는 극히 조심할 수밖에 없다. 표현의 자유의 한계가 있다. 그리고 ‘영웅’에 대한 선생의 평가는 지나치게 무겁다. ‘영웅’은 그냥 가볍게 봐야한다. 사회적·정치적 맥락과 무관한 단순한 무협영화로 볼 때에만 의미를 갖는 것이다.”
―그렇다면 ‘영웅’속에서 그대가 추구한 테마는 무엇인가?
“‘영웅’은 내 인생에서 처음으로 만들어본 무협영화이다. 그런데 나는 전통적인 무협영화의 테마에서 근원적으로 탈피하고 싶었다. 전통적인 무협영화는 반드시 세가지 주제가 있다. 그것은 강호(江湖)요, 복수(報仇)요, 사랑(愛情)이다. 그런데 나의 작품에는 강호라는 장(場)이 빠져있다. 그리고 복수와 사랑도 궁극적으로 거부되고 있다. 이러한 테마를 살리기 위해 나는 진시황제 정(政)이라는 인물을 택했을 뿐인데 선생은 나의 의도를 오해했다. 내가 추구한 테마는 오직 협(俠)이라는 전통관념의 긍정적 맥락일 뿐이었다.”
―협(俠)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대의를 위하여 개인의 사리사욕을 버릴 줄 아는 사신취의(捨身取義)의 정신이다. 무협소설의 대가 김용(金庸)선생도 협지대자(俠之大者)는 위국위민(爲國爲民)이라고 말했다. 협이란 삶의 큰 목표가 있는 사람이다. 그 목표란 선천하지우이우(先天下之憂而憂, 천하의 근심을 먼저 근심하고)하고, 후천하지락이락(後天下之樂而樂, 천하의 기쁨은 나중에 기뻐한다)하는 동방인의 보편관념이다. 이러한 보편관념이 ‘영웅’에서는 천하(天下)라는 두 글자로 표현된 것이다.”
―그러나 인민의 끝없는 통고를 종식시키기 위해 진시황의 천하통일을 받아들인다고 하는 파검(破劍, 리앙자오웨이 분)의 논리는 도가적인 무위(無爲)로 해석하기에는 너무 설득력이 빈약하다.
“나는 이 영화의 진정한 영웅은 파검이라 생각했다. 파검의 불살(不殺)의 붓의 정신을 나는 선생이 간파한대로 도가적 무위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것을 진시황의 천하통일, 즉 제국주의의 정당화로 생각해본 적은 없다. 그리고 진시황에 대한 평가는 역사적으로 각 시대의 통치계급에 의하여 끊임없이 다르게 이루어져왔다. 확실한 것은 모두 자기의 얘기를 하고 있다는 것이며, 모두 정치적 목적이 있다는 것이다. 무엇이 객관적으로 진실이냐? 그것은 아무도 모른다. 역사는 해석만 있을 뿐 진실이 없다. 영원한 절대적 표준이라는 것은 없다.”
―매우 철학적이다. 문화대혁명은 비극이었나?
“비극이었다.”
―역사의 과오라 말할 수 있는가?
“역사의 과오라 말할 수 있다. 그것은 정치적·사회적 비극이다. 그러나 그것을 대놓고 작품속에서 표현할 수는 없다. 이렇게 선생하고 얘기만 할 수 있을 뿐이다.”
―‘영웅’은 한 사태를 놓고 세가지 다른 해석이 공존하고 있다. 쿠로사와 아키라의 ‘라쇼오몬’(羅生門)에서 영향받았나?
“힌트얻었다. 그러나 ‘라쇼오몬’은 다른 해석들이요 ‘영웅’은 다른 상상들이다. 그렇지만 상상도 해석이라고 한다면 비슷한 맥락에서 이해되어도 상관없다.”
―‘영웅’에는 색채의 형식감이 뛰어나다. 분명한 의도가 있는가?
“있다. 홍색(紅色)은 격렬한 감정을 나타낸다. 남색(藍色)은 희생을 나타낸다. 백색(白色)은 진실이다. 주관의 색깔이 없으면 곧 진실이다. 흑색(黑色)은 음양오행이론에 의한 진나라의 국색(國色)이다. 녹색(綠色)은 회상을 나타낸다. 그런데 이 중 가장 근본적인 색깔은 흑색이다. 이것은 중국의 수묵산수화의 화론(畵論)에서 빌려온 아이디어다. 흑분오색(黑分五色)이라, 검은 묵색은 다섯 가지 색깔을 함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검은색 장면에 나는 무척 신경을 썼다. 검은 병마의 대규모 씬은 유례가 없었다. 만족할 만한 결과를 얻었다.”
―호수면 위에서 파검과 무명이 싸우는 장면은 천하일품이다. 어디서 힌트를 얻었나?
“그것은 무협지에 나오는 경공(輕功)이다. 잠자리가 물을 치는 청정점수(춵쭰點水), 제비가 수면을 타다닥 치고 나는 연자삼초수(燕子三抄水)의 고수무공을 형상화한 것이다.”
―이안의 ‘와호장룡’에는 사실적인 초식이 많은데 반하여 그대의 ‘영웅’속의 무술장면은 너무 환상적이라는 비판이 많다.
“그것도 오해다. 나는 고수들의 무술을 치고 싸우는 살상의 게임으로 생각한 것이 아니라 선생과 같은 높은 경지의 철학자들끼리 만나서 의경(意境)을 떠보는 것과 같은 상징적 교환으로 생각했다. 그걸 보통 점도위지(點到爲止)라고 한다. 서양의 무술처럼 무지막지하게 사람을 두드려 패는 살의가 있어서는 안된다. 그래서 자연히 환상적인 표현이 많았다. 그리고 이 영화의 마지막 씬에 진왕 정(政)이 인검합일(人劍合一)의 단계에서, 수중무검(手中無劍)의 단계를 거쳐, 심중무검(心中無劍)의 단계에까지 도달했기 때문에 무명은 목숨을 버릴 수 있었던 것이다.”
내가 만난 장이머우는 매우 해맑은 모습의 인간이었다. 대가인척 하는 태도가 없었고, 무엇이든지 솔직하게 스트레이트로 대답했다. 나는 그와 두어 시간 유쾌한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그 날 둘이 나란히 앉아 메가박스 제1상영관에서 ‘영웅’을 같이 관람했다. 영화가 다 끝나갈 무렵, 나는 그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영화를 보면서 후회되는 곳이 없소?
“없소”
마지막 악수를 나누면서 나는 그에게 힘주어 말했다.
―그대는 위대한 예술가! 결코 비판정신을 잃지 마시오. 그것 하나를 잃으면 당신의 예술은 인류로부터 외면당할 것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