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년에 한번씩 열리는 월드컵은 현대축구의 전술 변화를 파악하는 데 척도가 되는 대회다. 또 월드컵의 막간에 열리는 유럽선수권대회는 유럽에 국한된 대회이긴 하지만 세계축구에 미치는 전술적 영향이 크다는 점에서 월드컵과 더불어 세계축구의 변화를 엿볼수 있는 중요한 대회로 꼽힌다.
이번 유로 2004는 소위 유럽 축구의 변방이라는 그리스가 개막전 승리를 시작으로 결승전까지 무패행진을 이어 역대 유럽선수권 사상 최대 이변을 연출한 대회로 불릴 만큼 여러 말들이 오간 대회였다. 그리스 대표팀 감독인 오토 레하겔은 "이기는 전술이 강한 전술이다"라는 명언을 남기며 이른바 한물간 전술로 알려진 리베로 시스템을 가동해 포르투갈, 프랑스, 체코 등 강호들을 물리치며 우승을 차지하는 기염을 토했다. 자연스럽게 리베로를 포함한 이중수비를 바탕으로 미드필드부터 강한 프레싱을 가하는 조직적인 압박 축구가 화두로 떠올랐다. 단순히 수비 숫자를 늘리는 것이 아니라 공을 차단당하면 곧바로 일선부터 수비로 돌아서서 다른 동료 한 명이 막는 사이 다음 공격 루트를 차단하는 유기적인 바꿔맡기가 이번 유로에서 가장 화제가 된 전술이었다.
물론 이미 유로가 종료된 시점에서 여러 매체를 통해 이미 쏟아져 나올대로 나온 그리스의 성공 비결을 다시금 분석해보고자 함은 아니다. 여기서 살펴보고자 하는 점은 현재 세계축구의 강호들, 즉 가장 최근에 열린 메이저 대회였던 유로 2004에서 드러난 참가팀들의 성향은 어떤 것이었으며 이들이 추구하는 축구가 어떤 것이었는지를 분석해보면서 과연 현대축구의 성향은 어떤 것인지를 조금이나마 규명해보려 한다.
축구는 오락이나 만화 혹은 영화처럼 각본대로 흐르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경기종료 스코어가 동일하다 해도 그 내용은 천차만별일 수밖에 없다. 89분 내내 공격을 퍼부으면서도 골을 성공시키지 못하고 마지막 1분에 역습으로 골을 허용해 0-1로 패한 경우나, 반대로 경기 내내 그라운드를 지배하면서도 단 1골을 뽑는데 그쳐 1-0으로 승리하는 경우를 예로 들 때, 이 2경기는 모두 1-0의 스코어지만 내용은 완전히 다른 경기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내용이 아닌 결과, 즉 골의 수가 모든 것을 말하는 경기가 바로 축구인 만큼 경기에 임하는 모든 팀들은 골을 하나라도 더 성공시키기 위한 전술을 짜내고 또 구상하는 것이다. 즉 아무리 수비 위주의 전술이라 해도 골을 넣지 못하면 이길 수는 없으므로 결국에는 골을 얻기 위한 전술이 계속 발전할 수 밖에 없는 것이 바로 축구 경기에서의 시스템인 셈이다.
현대 축구의 대명사는 4백을 중심으로 한 4-4-2 혹은 이의 변형 전술이 주류다. 물론 3백이 현대적인 전술이 아니라는 뜻은 아니다. 대부분의 팀들이 4-4-2를 채택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며, 90년대 주류를 이루던 3백을 중심으로 한 3-5-2 혹은 그의 변형 전술들이 4백으로 변화되면서 한층 축구는 공격적인 성향으로 변화되어 왔다. 중앙 수비수 3명을 후방에 배치하는 3백에서 중앙 수비수를 2명으로 축소시키고 좌우 윙백들이 수비를 지원하면서 활발한 공격 가담을 해주므로 자연히 공격 가용 인원이 늘어났기 때문이다.
4백으로 대변되는 현대 축구에서 윙백이란 포지션은 경기 내내 공격 가담도 활발히 하면서 본연의 임무인 수비까지 맡아야 하는 무한 체력과 공격 가담시 크로스 능력, 수비시 상대 공격수와의 공중볼 혹은 일대일 돌파에서 밀리지 않을 뛰어난 수비력 등을 두루 갖춰져야만 하는 중요한 위치인 셈이다. 이들 윙백들은 과거 3백 시절에는 좌우 양쪽 끝에 위치하던 이른바 윙어들로서 위기시 5백을 구축하는 형태를 간혹 취하긴 했지만 본연의 임무가 공격인 만큼 공격적인 역량이 더 강조되어 왔다. 4백에서 최후의 방어선을 지키게 됨으로써 수비력이 턱없이 부족한 일부 과거 전문 윙어들은 4백이라는 전술에 적응하지 못하고 현재는 소속팀에서 제 자리를 찾지 못하는 경우들도 종종 볼 수 있다.
물론 4-4-2에서도 4명의 미드필더들 중 좌우 양쪽 끝에 위치하는 미드필더들이 전문 윙어로서의 역할을 담당하기도 하지만 이들은 사실상 터치라인을 돌파하는 것이 주전공인 전문적인 윙어라기 보다는 중앙이나 혹은 전체적으로 경기 전반의 조율을 책임지는 것이 보통이다.
프랑스의 지단은 도식적으는 왼쪽 미드필더로 표현되지만 사실상 윙 플레이어는 아니며 잉글랜드의 베컴 역시 오른쪽 미드필더로 도식상 분류되지만 과거의 윙어들이 보여주었던 플레이를 펼치지는 않는다. 더구나 4-4-2의 변형 전술인 4-2-3-1이나 4-2-2-2 등이 등장하면서 미드필더 요원들 중 과거의 윙어 역할을 해주는 인원들은 점점 줄어들고 있는 추세다. 결국 이러한 역할을 해줄 좌우 윙백들의 역할이 매우 중요함을 다시한번 역설할 수밖에 없는 셈.
그렇다면 터치라인을 파고들면서 쉴새없이 문전의 공격수들에게 양질의 크로스를 올려주는 이른바 윙 플레이는 왜 예나 지금이나 변함 없이 모든 감독들이 시도하는 것일까? 네덜란드와 포르투갈의 경우를 살펴보자. 네덜란드는 윙포워드 2명을 포함해 4-3-3의 전술을 전통적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포르투갈은 4-2-3-1을 쓰며 1명의 원톱을 3명의 미드필더들이 받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사실상 네덜란드의 경우 좌우 윙백을 제외하면 미드필더진에서 윙어의 역할을 해줄 인원은 없다. 지난 유로에서 윙 포워드를 맡았던 로벤과 반 데어 메이데는 사실상 공격수와 윙의 중간적인 개념이기에 윙어로만 볼 수는 없다. 포르투갈 역시 데코, 피구, 호나우두 등이 원톱을 바로 밑에서 받치며 중앙과 사이드를 넘나들면서 측면 지원을 해주고 있지만 사실상 붙박이 윙어들은 아니다.
즉 공격루트가 측면보다는 중앙쪽에 더 포인트를 두고 있는 셈이다. 물론 이들 팀들이 좌우에서의 크로스를 이용한 득점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다거나 나아가 거의 모든 유로 참가국들이 그러한 루트를 전혀 노리고 있지 않다는 의미는 아니다. 다만 팀의 중추적인 전술은 이른바 중앙에서의 플레이메이커 혹은 일당백의 강력한 미드필더를 내세워 경기를 지배하는 방식이 제 1의 공격 옵션이라는 데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이번 유로 2004에서의 득점 성향을 보면 화려한 미드필더들의 경기 조율속에 킬 패스, 절묘한 스루 패스 등을 통해 골이 터졌다기 보다는 여전히 윙플레이를 통한 골들이 많이 나왔다는 특이한 결과를 찾을 수 있다.
다음은 이번 유로에서 터진 총 77골을 상황별로 분석한 자료다. 총 득점은 정지된 상황(코너킥, 프리킥, 페널티킥, 드로우인)에서 유도된 골과 일반적으로 경기 중 발생된 골 등 크게 2가지의 상황으로 분류하였으며 경기 중 발생한 골들은 다시 여러 상황별로 세분했다.
A. 정지된 상황에서의 득점
1. 코너킥(코너킥에 이은 직접 득점 혹은 코너킥을 통한 득점 상황) - 총 10골
2. 프리킥(프리킥을 직접 골로 연결한 경우) - 총 3골
3. 프리킥에 의한 득점(프리킥을 세트 플레이를 통해 득점한 경우) - 총 6골
4. 페널티킥(페널티킥에 의해 득점한 경우) - 총 7골
5. 드로우인(드로우인을 통해 득점한 경우) - 0골
B. 경기 중 발생한 득점
1. 콤비 플레이(이대일 패스 혹은 2명 이상이 패스를 주고받으며 득점한 경우) - 5골
2. 크로스(측면에서의 크로스에 의해 득점한 경우) - 14골
3. 후방향 패스(골라인 근처에서 뒤쪽으로 흘려주어 골을 성공시킨 경우) - 3골
4. 좁은 공간 패스(페널티 에어리어 내에의 패스와 슛으로 득점한 경우) - 3골
5. 드리블(단독 드리블 등에 의한 짧은 거리에서의 득점) - 4골
6. 중거리 슛(페널티 에어리어 밖에서의 중거릴 슛 혹은 그로 인한 문전 쇄도로 득점한 경우) - 9골
7. 전진 패스(수비수를 통과하는 스루 패스 혹은 미드필더를 거치지 않고 후방에서 전방으로 바로 넘어온 공을 득점한 경우) - 9골
8. 수비 실책(백패스 미스 혹은 골키퍼 실수에 의한 득점) - 2골
9. 자책골 - 2골
위에서 보듯 유로2004에서 기록된 득점 중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하는 경우가 측면으로부터의 크로스에 의한 득점이었다. 경기 중 발생한 골들 중 좌우 측면으로부터의 크로스를 받아 직접 골로 연결한 경우나 그로 인한 득점 기회를 골로 연결한 경우가 무려 14번에 달해 윙플레이의 중요성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 여기에 정지된 상황에서의 골들 중 가장 높은 득점 비중을 차지하는 코너킥을 합치면 무려 24골이 측면에서 시작된 상황에서 골로 연결되었다는 점은 측면 공격의 중요성을 여지없이 보여주는 증거가 아닐 수 없다.
흔히 경기를 전반적으로 조율하는 플레이메이커라는 존재가 최근 들어 크게 부각되면서 이들에 의한 볼 터치로 인해 많은 골들이 나올 것으로 예상하는 것이 일반적인 경향. 그러나 경기조율과 득점 상황은 그다지 큰 연관성이 없다는 것이 이번 유로2004에서 드러난 득점 성향이었던 것이다.
물론 플레이메이커들의 활동 영역이 중앙으로만 국한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들의 역량을 폄하하거나 그 중요성이 상대적으로 덜하다는 것을 말하려는 의도는 아니다. 다만 플레이메이커들이건 윙백들이건, 혹은 다른 포지션의 그 어떤 선수들이건 그 포지션을 막론하고 측면에서 문전으로의 볼 투입이 가장 확실하고 안정된 득점 루트은 지난 6월 명백하게 드러났다.
지단, 데코, 피구, 발락, 네드베드, 하칸 야킨, 스틸리안 페트로프 등은 지난 유로2004에서 각 팀의 이른바 중원의 지휘자 역할을 맡았던 선수들이다. 이들의 플레이 성향은 돌파, 숏패스, 롱패스 등 각기 나름대로의 특징이 있지만 팀의 구심점 역할을 맡았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진다. 하지만 유로 2004의 우승팀인 그리스는 특별한 중간 기착지를 두지 않고 미드필더 전원이 유기적인 압박을 가하는 방식을 취했다. 여기에 8강부터 결승까지의 3번의 토너먼트에서는 모두 측면에서의 크로스에 의한 헤딩골로 마무리하며 1-0의 승리를 이끌어내 측면 공략의 중요성을 입증시켜 주었다.
서두에서 언급한 현대 축구의 흐름에 대한 해답은 유로 2004에서의 결과와 무관하지 않다. 결국 어느 대회에서건 득점을 통해 승리를 챙겨야 하고 그로 인해 목표로 하는 우승도 차지할 수 있는 셈인데 결국 그 관건인 득점을 어떻게 용이하게 올리느냐가 핵심이고, 그 득점을 얻어내기 위해 바로 시스템의 변화와 발전이 이루어지는 것이 바로 흐름인 것이다. 현재 현대 축구를 선도하고 있는 시스템은 일단 4백으로 볼 수 있다. 물론 가용 자원에 따라 3백을 쓰는 팀들도 많이 존재하고 전통적으로 3백을 고수하고 있는 팀들도 많다.
4백을 위주로 일찌감치 전술을 몸에 익혀온 선수들이 아니라면 3백에서 4백으로 갑작스럽게 전환하는 것은 분명 큰 무리가 따른다. 그러한 과정은 한국 대표팀에서도 이미 경험한 바 있다. 가용 가능한 대표팀 선수들이 3백에서 최상의 전력을 이끌어 낼 수 있다면 굳이 4백을 가동할 명분은 없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3백이냐 4백이냐가 아니라 그 팀의 전력을 극대화 할 수 있는 전술이 무엇이냐의 문제인 셈이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플레이메이커의 경기 조율에 의한 경기 운영이냐 활발한 측면 돌파를 통한 경기 운영이냐의 문제를 생각해보자. 분명 지단(현재는 국가 대표 은퇴)이나 데코와 같은 선수들은 윙플레이를 전문으로 하는 선수들은 아니다. 하지만 프랑스나 포르투갈 같은 팀은 세계 정상권을 이루는 세계 축구의 강대국 대열에 서 있는 팀들이다. 즉 이들의 존재는 득점에 가장 용이한 좌우 측면에서의 크로스나 세트플레이 등을 돕기 위해 가장 적합한 존재라는 점에서 나름대로의 공통점을 갖는다. 이들을 상대하는 팀들로서는 이른바 천재적인 플레이메이커들을 막기 위해 전담 수비수를 붙이는 것은 물론 이중 삼중의 안정 장치를 취하게 되고 그로 인해 다른 지역의 수비가 엷어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될 수밖에 없다. 이러한 틈을 노려 좌우 윙백들의 역량이 발휘되어 득점이 용이하게 되는 것은 물론 공격 루트의 다양화도 꾀할 수 있는 것이다.
아무리 천재적인 플레이메이커라 해도 단체 경기인 축구에서 혼자 상대팀 선수 11명을 당해낼 수는 없다. 적어도 만화가 아닌 실제 축구 경기에서는 절대 불가능한 일. 이른바 언론의 집중 조명을 받는 천재적인 선수들이 경기 중 많은 볼터치를 하며 카메라에 자주 비치면서 주목을 받지만 반 수비수, 반 공격수의 임무를 띤 강철 체력으로 무장한 윙백들은 실질적으로 팀의 득점 상황을 도맡고 있다해도 무리가 없다. 천재적인 플레이메이커를 보유하고 있느냐에 따라 팀의 네임 밸류가 결정되지만 정작 얼마나 좋은 윙백을 보유하고 있느냐에 따라 팀의 득점수는 달라지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