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녀에게 / 서규정
수없이 잡아당긴 사랑의 줄, 이슬비들이 몸을 부풀리는 강가에서 발을 씻는데 왜 눈물이 나는지 구름사이를 색종이처럼 빠져나오는 햇살 색계의 사랑을 나는 이렇게 받아 쓰려네 직녀여 일년에 한 번 우리 만날 때는 강둑이 터져 막힌 시뻘건 황토밭에서 땅콩처럼 따뜻한 발끝으로 만나세 흙바람 스치는 콩깍지 바깥은 빈칸을 찾아 헤매도는 하늘뿐이라네
줄기가 나를 세운다 / 서규정
꼭 한놈만 죽이고 싶은 가을이 가네
한없이 열어 본 해바라기 빈 가슴
철시 / 서규정
기장 시장에 내려 장안사로 갈까 연화리 바닷가로 갈까 망설이는 공터에서 웬 노인네가 펼쳐놓은 좌판을 내려다 보니 중고 신발들이다
짝짝들이 놀고 있다
쳇! 산다는 건 신을 갈아 신는 것뿐이었네, 흰 눈 소복소복 쌓인 마당에서 처음 신던 고까신부터 고무신 운동화 군화 안전화 신발이 바뀌면서 모습도 달라지던 그때 미끌미끌 땀이 범벅이되어 발 뿌리 다치면 길도 함께 고장 나, 슬리퍼로 직직 세상의 어두운 그늘만은 끌지 않기를
짝짝짝짝 박수 치듯 먼지 털듯 발바닥을 터는 중간의 철시, 노인네가 자릴 옮기려는지 짝을 맞춰 신발들을 쓸어 담는 박스 위에 떨어지는 마른 잎
극락이나 지옥으로 갈 땐 신발을 벗고 간다
나직한 소리들이 들리는 것만 같아, 사라지고 잊혀서야 비로소 완벽할 깔창 위의 모든 날들을 환하게 털어 주세요, 몇 번이나 곁눈질로 부탁했다
엘 콘드르 파샤 / 서규정
이 지상 제 아무리 큰 전투라도 결국엔 오합지졸들로 치루고 말걸 살다보면 전쟁처럼 재미난 극도 없어 난세에 난다는, 영웅조차 보이지 않는 판국에 대권에만 눈이 먼 누구의 명령 따윌 따른단 말인가
국운이 다 하면 같이 가는 것
시체더미 속, 최후의 일인이라는 생색보다 패전을, 패잔의 맛으로 더욱 깊이 우려내어 흔틀번틀 살아온 이력을 물타기 하는 것이라면 충분 하리
우리는 전설보다 역설을 믿는 미래의 부족
아직까지 못다 푼 숙제 하나가 위계도 아닌 위계와, 질서도 아닌 질서 그러니까 지배와 굴종이었다면 허공중에 매듭처럼 질끈 맺힌, 새 새는, 뒤도 안 돌아보고 훨훨 날아가게
진군보다, 퇴각의 나팔을 신나게 불어야만 한다
- 서규정 시집 『 그러니까 비는 객지에서 먼저 젖는다 』 2013
만추 단추 / 서규정
믿을 건 오로지 외로움뿐이라 강은 외줄기로 흐르는가
노래야 잘 가거라 / 서규정
가요방에 가서 혼자 노랠 불렀다 시작하자마자 팡파르가 울리며 백점을 맞았다 새우깡과 캔맥주를 들고 온 아가씨는 나를 위 아래로 한참이나 훑어보다가 공손하게 닫고 나간 문을, 살짝 열어놓고 얼마든지 내 노랫소릴 들려주마. 얼큰한 기분으로 다시 한 곡..... 80점 엇 점수가 줄어든다. 그래! 이번에야말로 신세대의 노래로..... 70점 앗 점수가 죽어간다 잘못된 만남이었다. 그렇다면 비장의 무기 나의 18번 한계령을 아랫배에 힘을 주고..... 60점을 받기 전에 내 노래는 이미 판소리로 변질되어 떠나가고 있었다. 기계에다 내 노래를 묻다니 노래야 잘 가거라. 이 어둠 속의 이 갈증 누가 막 노래를 마쳤을까 피빛으로 고여 떠있는 밖엔, 어둠에 갇혀 발악하고 포효하는 상갓집의 백열등
장군 / 서규정
해운대 백사장에
네 그리움이 남아 있느냐
풍차 / 서규정
달마는 동쪽으로 가더라도 나는 서쪽으로 간다
애드벌룬이란 질서를 지키는 농간이다
낙석 하나가 분화를 꿈꾸는 지층을 깨우듯
전선과 전선이 담쟁이 넝쿨처럼 우거진
가방에 담았던 면도기 치약 몇 권의 노트를 꺼내고
안개 / 서규정
오랫동안 잊혀지지 않으리라 내 타는 갈증 적셔준 신불산 산정에서 이빨이 부러지게 깨물었던 한 알의 오렌지와도 같이.... 성난 파도에게 와작와작 씹히는 안강망을 타고 어디만큼 왔을까 더듬더듬 화장실을 찾아 고물* 쪽으로 가다 문짝도 다 떨어진 기관실 흐린 알전구 밑에서 기름범벅으로 푸드득 뛰쳐나오는 한 마리 괭이갈매기에 놀라 그물을 잡고 주저앉고 싶었어 그 옛날 어느 거센 영혼이었을까 자물통 같은 시대를 향해 무엇인가를 떨그럭떨그럭 외치다 닫았다 또 외치다 닫았다 통닭가게도 아닌 천막촌에서 약간의 미소를 입가에 발라 스스로를 알맞게 구워놓고 간 그 써늘한 이념의 주변
한 걸음이 줄달음에게 소리친다 뛰지 마 뛰지 마 뛰어 달아나는 쪽은 청춘이야 돌아와 붉은 양탄자는 아니더라도 군가에 맞춰 두루마리 화장지처럼 젊음의 껍질만 벗겨 마른 나를 둘둘 말아와
최루가스를 맡으며 늙으면서 와, 차단이란 지독한 교류다 과거와 미래를 넘나드는 가랑이 사이로 쏟아지는 오줌줄기 처럼 깊은 것은 양다리를 걸친다 참답게 말을 해라 귀머거리에게도 들리는 말을 해라 삐라처럼 따라붙는 기억들을 수장시킬 이 순백의 해역에 갈매기 제 똥 위에 앉아 있어도 부장품은 없다 우린 같이 상처의 속도로 살아왔다 살아간다 사라진다
다시 타는 목마름이다 바다는 물보다 왜 하얀 불을 먹이는 것이냐 차라리 열락의 솜꽃이 피는 목화의 城으로 가자 바람은 키를 낮춰 미풍으로 따라 오라 별빛도 깨끗이 지워진 위도에서 뿌우 뿌우 짙은 주황의 눈깔을 굴리며 항로를 찾는 어선 한 척 토악질을 하는 현창으로 누가 날 밀어 넣었지 이 따듯한 안개 속에 분간 없이 묻어두면 되는가 묻어두기만 하면 끝나는 것인가
*고물, 배 뒷부분
육체의 길 / 서규정
단추를 열고 나를 내보내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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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 밤부터 2박3일, 온전히 서규정 시인의 시편에 빠졌다 시집을 구할 길 없어 인터넷 검색을 하여, 읽을 수 있는 시들을 찾아내었다
솔직히 시인공화국의 변방에 사는 나에겐 낯설었던 시인의 시편을 읽다가 주말 내내 혼자서 울다가 웃다가 지금은 가슴이 먹먹하다
좋은 시인을, 좋은 시를 만난 날은 多幸이다 (시집에서 발췌한 글이 아니고, 인터넷에 떠돌아 다니던 무책임(?)한 시를 올리고 나서 걱정이 되기도 한다)
좋은 시는 세상에 널리 퍼져나가기를 기원하는 밤!
/ 동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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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淸韻詩堂, 시인을 찾아서 원문보기 글쓴이: 동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