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회] 배재학당 입학, 생애의 갈림길
독재자 이승만 평전/[1장] 출생과 어린시절의 학업 2012/02/17 08:00 김삼웅구 배재학당 부지 전경. 사진은 문화재청에서.
이승만은 1894년 갑오경장으로 과거제도가 폐지되면서 더 이상 과거를 볼 수 없게 되자 신학문에 눈을 돌렸다. 그리고 영어를 배우게 되었다. 이 무렵 김구는 동학에 참여함으로써 두 사람의 길이 갈라지는 계기가 되었다.
이승만은 관계로 나가는 등용의 길이 차단되면서 1985년(20세) 4월에 미국 감리교선교사 아펜셀러가 세운 배재학당에 입학했다. 배재학당은 1895년 조선정부 외아문과 전 8조의 ‘배재학당합동’이라는 계약을 체결하여 매년 조선정부가 추천하는 학생 200명을 받아들여 가르치게 되었다. 이건하의 낙동 서당에서 함께 배운 신긍우의 권고를 받은 이승만은 1895년 2월 1일 배재학당 영문부에 입학하여 영어 공부에 열중하는 한편 역사ㆍ지리ㆍ산수ㆍ성경 등 교양 과목을 이수했다.
그리고 학당에서 의무화 한 아침예배에도 빠지지 않고 설교를 들었다.
이승만이 배재학당에 입학한 것은 세상이 바뀌어 영어를 해야 관직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과 생계수단의 일환이었다. 배재학당에서는 고학생들이 생활비를 벌면서 공부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주었다. (주석 11)
우수한 성적이었던 이승만은 6개월 만에 이 학당의 영어 조교사로 발탁되고 제중원(濟衆院)에 근무하는 미국 장로교 여성 의료선교사 파이팅 양과 제콥슨 양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면서 월봉 20달러를 받게 되었다. 생활에 큰 보탬이 되고, 학업에 자신감을 불러주었다. 이승만은 1895년 말 단발령이 내려지자 상투를 자르고 전통과 결별하는 과단성을 보이기도 하였다.
배재학당에서 이승만은 미국 선교사들로부터 영어 이외에 보다 더 중요한 것을 많이 배우게 되었다.
특히 그는 미국 독립전쟁사 내지 건국사, 남북전쟁사, 그리고 법치주의 원칙하에 우리는 미국 국민의 정치적 자유 등에 관하여 알게 되었다. 이렇게 ‘혁명적인’ 사상에 눈뜬 그는 아래와 같이 절대군주제에서 신음하는 한국 동포들을 위해 기독교 국가의 민주주의 제도를 도입하는 일에 일생을 바치기로 마음먹게 되었다. (주석 12)
이승만의 배재학당 입학은 평생 신앙해온 기독교에 접하게 되고 미국(인)과의 깊은 인연을 맺게 되었다. 생애를 두고 중요한 두 가지가 이 때에 인연이 된 것이다. 그의 배재학당 시절은 1895년 4월 입학부터 1897년 7월까지 2년 남짓이다. 2년여 기간이 이승만의 생애를 바꾸게 하였다.
이승만은 어릴 적부터 어머니로부터 불교에 대한 가르침을 받았다. 그래서 어느 정도 불교에 심취하게 되었다. 과거 시험을 공부하면서는 유교의 경전을 섭렵한 유학도이기도 했다. 그래서 배재학당에 들어가 기독교를 신앙하기까지 극심한 심적 갈등을 겪었을 것이다. 20세 전후에 불교, 유교, 기독교를 두루 겪는 흔치 않은 경험이었다. 먼저 불교와의 관계다.
나의 모친은 유교의 도리를 내게 가르쳐 주시면서도 매년 내 생일이 되면 나를 절간으로 보내 공양을 드리게 하였다. 북한산 한적한 곳에 있는 아름다운 절에서 내가 느꼈던 첫 인상은 지울 수가 없다. 영적인 분위기와 금욕적인 환경에서 모든 것이 너무나 달라 보였기에 내 자신이 바로 기묘하게 벽에 그려진 온갖 극락과 지옥의 그림들에 둘러싸인 연꽃의 천국, 500 나한(癩漢)들의 세계에 있는 것 같았다. (주석 13)
이승만과 그의 어머니가 불교도에서 기독교, 정확히는 서양 의약에 호감을 갖게 된 사연이 있었다. 이승만이 여섯 살 때에 갑자기 두 눈에 심한 통증을 느꼈다. 하마트면 실명할 뻔한 위기였다. 어머니가 불공을 드리고 온갖 치료를 다했으나 효과가 없었다. 그러던 중에 어떤 친척이 서양 의사에 대해 말해주어서 어렵게 찾아간 서양 의사가 준 ‘물약 한 병’으로 통증이 낫게 되고 다시 광명을 찾을 수 있었다. 이승만은 기독교에 관심을 갖게 된 배경을 설명한다.
나의 관심을 끄는 한 가지 이상한 사실은 1900년 전에 죽은 한 인간이 내 영혼을 구원해 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 사람들은 온갖 놀라운 일들을 한 사람들이라고 알려져 있는데 그런 우스꽝스러운 말을 믿을 수가 있단 말인가. 아마 그들은 자신들을 믿지 않으면서 무지한 사람들만 그런 것을 믿게 하기 위해 여기에 와 있을 거야. 그러니 가난하고 무지한 사람들만 교회에 가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지. 위대한 부처님의 진리와 공자님의 지혜로 무장된 학식 있는 선비라면 저런 말을 절대 믿게 되지 않을 거야”라고 혼자 중얼거렸다. (주석 14)
배재학당 시절이 이승만에게 모두 좋은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춘생문(春生門)사건 (고종을 경복궁에서 구출하여 미국 공사관으로 피신시키고, 김홍집 내각을 전복시키려했던 사건)에 연루되어 평산 누님 댁에 3개월간 피신했다. 하지만 모의나 거사 과정에 참여하지 않아서 다시 학업에 정진할 수 있었다.
주석
11> 정병준, 앞의 책, 67~68쪽.
12> 유영익, <젊은날의 이승만>, 6~7쪽, 연세대학교출판부, 2002.
13> <이승만 비망록>. 이정식, 앞의 책, 38쪽.
14> 이정식, 앞의 책, 4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