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계로 추억

[비은]

저 어린 날 학교 교정에 울리던 아우성이 은은히 들려온다. 내 기억의 저장고로부터.

오후 반이던 어느 날 일찍 도착한 운동장엔 나무 그림자만 어른거릴 뿐,

어느 반 교실 창문으로부터 "거룩한 배달의 아들이 사는 이 땅에 무궁화 새로 피네~"라는

노래 가사가 날아와 내려앉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방과 후

지금은 저물어가는 나이 대로 들어섰을 아이들의 싱그러운 아우성이 교정을 메웠던 것이다.

서울의 일신초등학교 정문을 나오면 건너편에 아스토리아 호텔을 직면한다.

지금은 '더블 에이 호텔'로 개명된 아스토리아 호텔 전면에서 왼쪽으로 꺾어 직진하면 잠시 후 한국의 집 입구,

거기서 다시 백 미터 정도 나아가면 대한 극장이 나온다.

수경사(수도경비사령부)가 이전한 자리에 지금은 남산골한옥마을이 들어서서 풍치를 더해주고,

대한극장을 중심으로 한 일대엔 아테네극장 명보극장 스카라극장 등이 진을 치고 있었다. 여기가 충무로 일대다.

대한극장 골목길을 벗어나서 한국의 집 돌담길을 오른쪽으로 꺾어 돌아 남산 쪽으로 오르는 길이 집으로 가는 길이었다.

그 길을 수도 없이 오가는 동안 그 소로 중간 쯤에 위치한 빵집 진열장에 진열된 빵들이 얼마나 먹고 싶었던가.

결국 그 마을을 떠나기까지 한 개도 먹어보지 못했지만. 필동 2가 84번지.

비가 올 땐 우비를 뒤집어쓰고, 눈 내리는 겨울엔 털모자 위로 떨어지는 눈송이를 맞으면서

그 초췌한 집을 찾아 오르곤 했었다. 

우린 언제나 이 우울한 집 이 우울한 세월을 벗어버릴 수 있을까 하며 체념적 바람을 가져보기도 했고.

이렇게 수십 년의 세월이 흐른 후의 어느 해 가을 나는 아내와 두 딸을 데리고

충무로역에 내려서 대한 극장을 지나 옛 궤적을 밟아 올라갔다. 그때의 집들은 아니지만 지형은 그대로였다.

그 길 하나하나, 그 집들 하나하나를 대하는 내 안에서 무엇인가 꿈틀거린다.

만져본다, 그 집들의 벽들을. 그 하나하나엔 바로 내 어린 생명의 흔적이 배어있는 듯했고,

그 생명의 흔적을 감각하는 순간 내 안의 감성의 막이 터졌다. 그래서 눈에서 액체가 흘렀다.

어떻게 그 어린 날의 감수성이 수십 년이 지난 그때 고스란히 내 안에 재현되는 것인지.

우리는 과거를 기억의 창고에서 바라볼 수는 있지만 갈 수는 없다.

우리는 미래를 내다보지만 미래는 다가와 머물지 않고 과거로 가버린다.

우리는 현재를 소유하려고 손을 뻗어보지만 그것은 모래알처럼 우리 손을 빠져나가 버린다.

우리는 시간과 관련된 무엇을 하나라도 붙잡아 두려고 하지만 단 하나도 우리의 손에 머물지 않고 지나간다. 

그러면 과거든 현재든 미래든 우리의 것은 없다는 말인가.

과거든 현재든 미래든 어느 것도 우리의 것이 아니라면 도대체 우리의 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그렇다, 아무것도 없다. 아, 우리의 몸이 있지 않은가? 

그렇게 생각하는가? 당신에게나 내게나 몸은 과거 현재 미래의 시간을 타고 우리를 거쳐 흘러가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머리 끝에서 발끝까지 우리 몸을 주장할 수 있는 게 없다.

머무는 것은 없다. 정지되어 있는 것도 없다. 소유된 것도 없다.

인간처럼 가난한 존재가 있을까? 도무지 인간의 것은 없다는 이 비극적 사실...

다만 우리에겐 추억이 있을 뿐. 추억은 저녁 달처럼 우리 안에서  우리의 전체 인생에 영향력 있는 빛을 비춰준다.

그래서 우리가 지금을 잘 살아야 하는 것은 그것이 곧 과거가 되기 때문이다.

충무로와 퇴계로는 내 인생에서 중요한 추억으로 남아있는 곳이지만

다 가버리고 추억만 남는 인생이란 너무 애처롭지 않은가? 한 가지를 마무리하지 않았다.

하나님이 계시다. 주님이 계시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흘리신 자신의 피로 멸망에서 건져 자기 것으로 삼으신 신자를 자기 안에 두시고

또한 그들 안에 영원히 계신다. 그것이 영생이다.

결코 흘러가지 않으신다. 결코 환상이 아니다. 결코 변하지 않으신다.

이것이 없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다. 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이 인간을 몸서리치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이 어마어마한 은혜를 나는 충무로나 퇴계로로부터 받은 게 아니며 대한민국으로부터 받은 것도 아니다.

내 조그만 인생 한 귀퉁이를 지날 때 그 조그만 교회당에서 선물로 받았다.

무엇인가, 우리로 하여금 시간의 칼날을 이길 수 있게 하는 힘은?

오직 주 예수님 안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사랑으로 우리는 시간이 주는 무한한 슬픔을 이길 수 있는 것이다.

2024. 3. 4

이 호 혁

[에스더]

아멘! 주님으로 말미암아 시간이 은혜롭게 하소서.

[쁄라]

아멘!! 모든 것이 흘러가지만 영원한 생명과 사랑을 주신 주님으로 인해
과거 현재 미래가 다 의미가 있어지며 소중한 것 같습니다.

[카푸치노]

저 동네에 대한 추억은 없지만 가면 마음이 편해지더라구요. 😮

[아비가일]

시간의 칼날을 이길 수 있게 하는 힘은, 오직 주 예수 안에서 영원한 생명과 사랑으로
시간이 주는 무한한 슬픔을 이길 수 있는 것.. 너무 귀한 진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