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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청도군 금천면 동곡리 동곡교회 사진
1950년대 동곡교회 안중섭 목사
내가 청도로 이사 와서 지금까지 매 주일 부산에 있는 다대중앙교회에서 주일예배를 드렸으나 수요예배는 집 부근 온막교회(溫幕敎會)에서 8년 동안 드려왔다. 그러나 등록한 교회도 아닌 예배당에 너무 오랫동안 다닌 것 같기도 하고 마침 담임목사가 공석 중이라 인근 시골교회의 사정도 살필 겸 지난달부터 인근 몇몇 교회를 순회하며 예배를 드리고 있다.
청도는 시골이라 도시와 비교해 복음화율이 낮기는 하지만, 적지 않은 역사를 지닌 작은 교회들이 마을마다 자리 잡고 있다. 지난주에는 금천면 동곡리에 있는 동곡교회(東谷敎會, 박영호 목사)에서 수요예배를 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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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안중섭 목사
1950년대 동곡교회에 시무한 안중섭(安仲燮, 1918~2004) 목사에 대한 이야기다. 안 목사는 원래 황해도 황주(黃州) 출신으로 해방 후 평양 장로회신학교에 다니다 한국전쟁 때 청도로 피난 와서 동곡교회를 섬겼다.
안 목사는 해방 공간에 고향 교회 집사로 섬기면서 경찰(순경)로 근무한 특이한 경력이 있다. 안중섭 집사가 고향 중화지서(中和支署)에서 근무할 때 소재지 마을에서 광복을 기념하는 해방 굿을 벌인다는 소식을 들었다. 각 기관과 유지들로부터 기부금을 거두어 강변 모래밭에 멍석을 깔고 천막을 치고 유명한 무당 다섯을 데려다가 큰 굿판을 벌여서 동네 사람들이 다 나와 놀아보자는 것이었다.
일제강점기 36년간이나 일본 천황을 억지로 섬긴 것도 억울한 데 이제 막 해방된 땅에서 무지몽매한 백성들이 무당을 데려다가 굿판을 벌이며 다시 미신에 빠진다는 것을 생각하면 참을 수가 없는 데다 오히려 관공서에서 이를 권장하며 우민정책을 쓴다는 것은 더 말도 안 된다는 생각에서 이를 만류하기 위해 총을 메고 혼자 행사장으로 나갔다.
굿판에는 온갖 음식들이 차려지고 제사상에는 돼지머리가 올라와 웃고 있었다. 무당들은 돼지머리에 돈을 꽂은 사람들을 위해 한바탕 춤을 추며 돌아가고 있었다. 안 집사는 당장 굿판을 중단하라고 소리쳤으나 아무도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화가 난 그는 공포를 발사하며 위협하여 강제로 해산해 버렸다.
이일이 있었던 얼마 후 북한에 공산정권이 수립되고 경찰서가 내무서(內務暑)로 바뀌면서 공산주의 바람이 불어오자 안 집사는 경찰직을 그만두고 평양 장로회신학교에 입학하였다. 신학교 재학 중 6·25동란 직전까지 강원도 횡성군(橫城郡) 공근교회(公根敎會) 전도사로 사역했다.
공근교회 전도사로 사역할 때 일이다.
공근교회 주일학교에 김안위라는 학생이 있었는데 그가 다니는 국민학교 조회 때 국기에 대한 배례(拜禮)를 하지 않고 그냥 서 있다가 교장에게 적발되어 교장 선생이 왜 국기에 대한 배례를 하지 않았느냐고 추달했을 때, 그 학생이 우리 교회 전도사님이 국기에 대해 절하는 것은 우상 숭배 죄를 범하는 것이 된다고 해서 그렇게 배웠기 때문에 안 했다고 대답했다. 국기에 대한 배례는 오늘날처럼 국가 행사 때 국기에 대한 경례를 오른손을 왼쪽 가슴에 대는 식이 아니고 선 자세에서 90도로 허리를 굽혀 절하던 시기였다.
이 일로 안 전도사는 1950년 1월 20일 강원도 횡성경찰서에 연행 구금되었다가 춘천 구치소로 이감되었다. 그러나 교계 원로들이 연명으로 당시 경무대 이승만 대통령에게 진정하여 풀려났고, 이 대통령의 지시로 ‘국기에 대한 배례’가 오늘의 ‘국기에 대한 경례’로 바뀌는 역사적인 주인공이 되었다.
얼마 후 6·26전쟁이 터지자 안 전도사는 공근교회 교인 70여 명을 이끌고 산을 넘고 물을 건너 우리 청도까지 와서 자리 잡고 1950년 11월부터 1959년 2월까지 햇수로 9년 동안 동곡교회에서 사역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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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대 동곡교회 사진
안 목사의 청도 사역에 대한 상세한 기록은 없으나 동곡리 주민의 전언에 의하면 1950년 안 목사가 처음 청도에 올 때는 신지리에 있었던 신지교회였고, 1952년경 구라선교회와 함께 지금의 동곡리로 옮겨오면서 교회 이름을 동곡교회로 변경하여 초기에는 전후 피난민에 대한 구제 활동에 열심을 기울였다고 전한다.
당시 전도사였던 안 목사는 동곡교회에 재임 중 당시 대구에 있었던 영남신학교까지 자전거를 타고 통학하며 학업을 계속했고, 1856년 경북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다. 그는 영성이 매우 깊고 항상 논리가 정연하여 교인들에게 개혁주의 신앙 전통이 뿌리내리도록 큰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그리고 이섬녀 사모는 무엇이든지 교우들과 나누는 것을 좋아했다. 변변한 사례금도 없을 정도로 어려운 시기에 혹 교우들이 먹을 것을 싸서 사택으로 가져오면 꼭 남겨두었다가 가난한 이웃에 나누었다. 안 목사 부부의 이런 섬김과 나눔의 모습을 지금까지 기억하는 동곡리 주민이 있다.
1959년 동곡교회를 사임하고 경산 압량제일교회(현 은혜로교회)로 간 안 목사는 교회 부흥의 기틀을 마련하고, 경북노회에서 경청노회를 분립하여 초대 노회장이 되었다. 그리고 1966년 수원제일교회에 부임한 안 목사는 교회를 수원지역 최대 교회로 성장시키며 수원노회 1대, 5대 노회장을 역임했고, 1973년 수원신학교를 설립하여 교장으로 20년간 봉사했다. 특히 1986년 제71회 대한예수교 장로회 총회(합동)에서는 총회장에 취임했다.
안 목사 부부의 섬김과 나눔의 목회는 동곡교회에 이어 압량제일교회, 수원제일교회까지 한결같이 이어져 교인들의 존경을 받았고, 그의 올곧은 성품은 목회 생활 49년을 불굴의 정신으로 이어 오다가 1993년 은퇴하여 원로목사로 추대될 때 이른바 목회 세습 분위기를 단호히 거부하여 요즘의 통합 교단의 명성교회 사태와는 대조되는 좋은 사례를 남겼다.
안 목사는 2004년 뇌졸중으로 투병 중 소천했다. 유족으로 이섬녀 사모와 3남 3녀가 있다. 이섬녀 사모는 장남 안재신 장로(수원제일교회 원로)가 모시고 있는데 지난 4월에 100세 축하예배를 드렸고, 매일 신문을 읽을 정도로 건강하다. 2남 안재도 목사는 미국 필라델피아 벧엘장로교회 담임목사 및 필라델피아 신학대학(BTS) 총장으로, 3남 안재은 목사는 독일선교사와 총신대 교수를 거쳐 일산 아름다운교회 담임목사로 각각 섬기고 있다.
[참고자료]
‘독보 안중섭 회고록’(안재도) 쿰란출판사 2016년
‘50인 영성 인물사’(안재도) 쿰란출판사 2017년
‘제71회 총회장 안중섭(安仲燮)목사’(박정규 교수) 교회연합신문 2015.5.14.
‘안중섭 목사 80회 생일 및 성역 50주년 감사예배’ 기독신문 1997.6.1.
‘증경총회장 안중섭 목사 소천’ 기독신문 2004.1.13.
‘교회 세습? 故안중섭 목사를 추억하며’(김종구) 경기일보 2019.8.21.
금천면 동곡리 ○○○ 님의 전언
첫댓글 어제 부터 3일간 광명교회에서는 한수 이북의 여러도시
목사님,사모님들을 초청해서 영성세미나를 하고있지요.
교단의 거목이시지요 3남 안재은목사는 황해노회에서 함께 사역하기도 했지요.좋은글 감사합니다.
청도인님께서 올려주신 귀한글 감사한 마음으로 잘보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