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공산은 대구의 진산(鎭山)이다. 하지만, 지역의 한계를 넘어 민족의 영산(靈山)으로 불러도 손색이 없다고 본다. 많은 문화유산과 호국의 흔적은 차치하고라도 식물상도 다양해 많은 학자의 연구대상이기 때문이다. 즉 “팔공산 일대의 식물연구(이국진, 1958년),” “팔공산 식물조사 보고서 (오수영, 1972)” “팔공산 현재 산림 군락과 식물상 (이영근, 1989) 등이며 이 외에도 임학은 물론 생물학을 전공하는 석, 박사과정 학생들의 단골 연구대상이다.
그러나 조사자들이 골짜기와 산등성이를 수없이 오르내렸을 것이나 내가 1992년 수태골에서 발견하기 전까지 고란초(皐蘭草)는 몸을 숨기고 있었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이 풀을 고란초로 동정(同定)하는 데에는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다. 생전 처음 보는 (고교 재학 시 수학 여행지인 부여 부소산에서 안 본 것은 아니지만 그때에는 건성으로 보아 자세히 기억나지 않는다) 이 희한한 풀에 호기심이 발동되어 집에 와서 도감과 대조해 보니 느낌상으로는 반드시 고란초(Crypsinus hastatus (THUNB.) COPEL)였다.
실로 감개가 무량했다. 학자들의 조사에도 숨어있던 여리고 귀한 이 풀을 발견한 기쁨으로 흥분이 가라앉질 않았다. 식물분류학자인 양인석 박사께 간청하여 현장에 가서 자생지를 보여드렸다. 그러나 대답은 고란초는 팔공산에 자랄 수 있는 풀이 아니고 어쩌면 같은 과의 산일엽초(山日葉草, Lepisorus ussuriensis (Regel & Maack) Ching)의 변이종 같다고 했다.
그동안 들떠 있던 마음이 일시에 무너져 내리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속으로 “이게 아닌데 틀림없이 고란초인데····” 되뇌었으나, 권위 있는 학자의 검증에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혹시나 하고 다시 경북대학교 임학과 모 교수께 부탁하여 현장을 찾았으나 그 역시 “가능성은 있으나 꼭 맞다 할 수는 없다”고 해 크게 낙담했다. “그러면 그렇지 그 귀한 풀(그때는 환경부가 지정한 멸종위기종이었다)이 어떻게 못난 나에게 발견되는 행운이 있으랴” 심지어는 지금까지 살아온 잘못된 삶의 결과가 아닌가 하는 낭패감마저 들었다.
요즘은 환경부나 산림청 등 국가기관 산하의 연구기관이나 야생화를 좋아하는 동호인들이 많아졌고 그들이 전국을 누비며 자생지를 발견하여 온라인을 통해 발표하고 있고, 나도 그 후 동화사 폭포골 입구와 군위 동산계곡에서 군락지를 발견하였지만, 30여 년 전 그때는 고란초는 부여 부소산 고란사 부근에만 자라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으니 학자들도 당연히 그렇게 알고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긴 한다.
그 후 고란초 얘기를 꺼내지 않고 덮어 두었다. 하지만, 그것은 휴화산과 같이 가슴 속에 묻어 둔 것이지 정말 관심 밖으로 밀어낸 것은 아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계명문화대학교 김용원 교수를 만났더니 충청남도 농촌진흥원 (현, 충청남도 농업기술원)에서 고란초 증식작업을 하고 있다고 했다.
“됐다” 하고 쾌재를 불렀다. 실물을 들고 기차를 타고 대전 유성으로 향했다. 연구진에게 보였더니 “똑같다”는 답이 나왔다. 날아갈 것 같았다. 담당자의 안내를 받아 배양실에 들어서니 혹은 돌에, 혹은 썩은 나무에 많은 개체를 붙여 놓았고 가져간 실물과 다른 점이 없었다.
실내에는 “백제 천 년의 얼 고란초 증식실”이라고 커다랗게 쓰여 있었다. 부여 부소산의 자생지가 관광객들에 의해 훼손되어 이곳에서 증식해 자생지에 다시 복원하고 나머지는 지역특산품으로 개발할 것이며 서울 대학교 교수를 지낸 이창복 박사의 지도로 이 사업이 진행되고 있다고 했다. 돌아오는 차창으로 전개되는 풍경이 새롭고 마음은 날아갈 듯이 기뻤다.
보고서를 만들어 간부 회의에 제출했더니 이영일 녹지담당관(동구청장으로 퇴임)이 돌아와 화제가 되었다고 했다. 당시 노태우 정부로부터 김영삼 정부로 정권이 교체되는 시점이어서 회의가 열려도 분위기가 무거웠었는데, 그날은 고란초 이야기로 모처럼 밝았다고 했다. 따지고 보면 하나의 풀일 뿐인 이 식물이 많은 이야기를 제공한 셈이다.
늘 푸르며 다년 생으로 공중습도가 높은 그늘진 바위틈에 자라고, 포자(胞子)로 번식하며 그때에는 자생지가 그리 많이 알려지지 않고 개체 수도 적어 환경부가 보호 대상 식물로 지정(지금은 해제되었다)하여 특별히 관리했었다.
“고란초는 고승 원효대사가 발견했다고 한다. 스님이 백강(白江) 물을 마셔 보고 상류에 진란(眞蘭)과 고란(皐蘭)이 있음을 알고 강을 거슬러 올라가다가 부소산에서 발견했는데 그 후 진란은 사라지고 고란 만 오늘날까지 전해 오며 백제 왕실에서 고란사 뒤에 있는 약수를 길어다 마셨는데 향기를 더하기 위하여 고란초 잎을 띄워 오게 했다고 한다. (출처, 『명산고찰 따라, 1982년, 이고운, 박설산』)”
그러나 고란(皐蘭) 이라 난과(蘭科)의 식물로 알고 있는 사람도 있으나 난과는 다른 고란초과이며 따라서 특별한 향기도 없다.
이 일로 신문에도 나고 TV에도 출연해 일약 스타(?)가 되는 분에 넘치는 행운을 누렸다. 그러나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는 조사를 위해 팔공산을 이 잡듯이 뒤졌을 수많은 연구원을 제쳐두고 왜 그들보다 전문성이 부족한 내게 그 귀한 풀이 발견되었을까 하는 의문이다.
첫댓글 고란초 이야기 잘 읽었습니다.
잘 보지 못한 고란초도 알게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대구를 사랑하고 가꾸시는 회장님의 지극한 정성에 감복합니다.
이런 소재의 향토사례를 자주 등재하셔 견문을 넓힐 수 있도록
하여 주심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