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 사건' 이후로 연지못으로 산책하러 가는 일이 뜸했다. 괜찮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날 사건에서 쉽게 빠져나오지 못했다. 덩치가 산만 한 개가 멀리서 나를 향해서 달려오는 사건이었다. 당시에는 물리지 않아 다행이라는 생각으로 마음을 추스르고 집으로 왔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섬뜩했다. 그 일로 개 주인도 목줄하고 산책하기를 바랄 뿐이다.
며칠 만에 나왔는데 포도밭이 사라졌다. 비닐하우스가 없어지고 포클레인이 땅을 고르고 있다. 자고 일어나면 논이 밭이 되고 꽃나무가 사라지고 길이 생긴다. 시골도 이렇게 바쁘게 돌아가니 참으로 정신 바싹 차리고 살 일이다.
길가 텃밭에는 감자를 심었다. 상추도 파릇하게 자라고 있고 완두콩이 제법 자랐다. 시골집에 드나들면서 작은 텃밭을 가꾸는데 오이와 고추랑 가지 모종을 사다가 5월 초에 심는다고 했다. 산책하면서 밭에 무엇을 심었는지 예사로 보이지 않는다. ‘우리 밭에 대파는 몇 대만 살아서 자라고 있는데 여기는 대파꽃이 피었네’ 하면서 피식 웃는다. 트랙터로 로터리를 칠 때 지금 하는 작업이 무엇이냐고 물으니까 왜 그러냐고 해서 “일기 쓰려고요” 하니 ‘어른 일기에 나도 써 주이소’ 하면서 자세히 알려주었다. 밭일에 관심이 있는 게 아니고 지금 상황을 글로 써야 하니 일일이 묻고 기록한다. 꽃 이름을 어떻게 그리 많이 알고 있냐고 하기에 “글을 쓸 때 이름을 정확하게 써주면 글이 예쁘잖아요!” 하면서 웃었던 기억이 난다.
연못가에 금계국이 파릇하게 자라고 있다. 사람 마음을 상쾌하게 만들어주는 기분 좋은 꽃이다. 올해는 더 많이 자리를 잡은 듯해서 하늘거리는 아름다운 풍경이 먼저 그려진다. 토끼풀도 오고 별꽃도 보이고 제비꽃이 여러 곳에서 자리를 잡았다. 올해는 제비꽃이 풍년이다. 지리산 처녀가 내어주었던 제비꽃 차가 생각난다. 그리운 사람이다.
기온이 올라가서 덥다는 생각이 들었다. 복사꽃이 한창이다, 복사꽃을 보면 정말 환장할 지경이다. 어쩌면 저리 곱단 말인가? 복사꽃 유혹에 넘어가지 않을 사내 누가 있을까? 코를 가까이 대고 킁킁거린다. 여자도 이리 심쿵한데 말이다. 꽃잎을 한 장 따고 싶은 마음 굴뚝 같지만, 선뜻 손이 가지 않는다. 나이 탓인가! 어느 해 봄날 복사꽃밭에서 동동주 마시면서 머리에 꽃 달고 입술에 묻은 꽃잎 안주 삼아 봄놀이도 했었는데.
강태공이 지어놓은 귀틀집이 열 채가 넘는다. 겨울에 떠났던 강태공이 다시 돌아왔다. 한가로운 봄날의 소품이다. 어디론가 떠났다가 때가 되면 다시 돌아온다. 땅속에는 얼마나 많은 씨앗들이 살고 있을까? 때가 되면 싹이 나오고 꽃을 피우고 또 차례를 기다리다 때가 되면 땅을 뚫고 나온다. 먼저 나가겠다고 다투지 않고 순리대로 살아가는 자연 앞에서는 한없이 겸손해진다. 연지못이 온통 쑥밭이다. 쑥국을 끓여먹어야지 하면서도 오늘도 게으름을 피우고 있다. 이러다 쑥국은 맛도 보지 못할 것 같다.
중년의 남자가 가위로 쑥을 자르고 있다. 쑥을 가위로 뜯는 것은 처음 보았다. 쪼그리고 앉아서 쑥을 뜯으면 오금이 저리고 발에 쥐가 난다. 남자가 대단하다 싶었다. 큰 봉지에 수북하게 쑥이 담겨 있다. 오늘의 연지못 주인공은 ‘쑥 캐는 아저씨’다. - 2024년4월12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