安東 : 동쪽에 있는 편안한 도시라는 뜻인가 합니다 경상도 내륙 깊은 곳에 있는 이 곳은 지금도 유교사상이 시퍼렇게 살아있는 꼬장꼬장한 동네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 정신과 문화가 고스란히 보존되고 있는 점이 오늘에 이르러 관광자원이 되고 뭇 사람들의 귀감이 되었습니다 멀리 보이는 가로막이 벽이 안동 댐입니다 댐에서 흘러나온 물을 이용하여 풍경을 만들고 사람을 모았습니다. 강 옆으로 보행을 할 수 있는 길을 만들었는데 요즈음 지방에 가면 어느 곳이고 볼 수 있는 풍경입니다. 안동지방 유명한 헛제사밥을 먹으려면 안동역에서 택시를 타고 이 곳으로 가야 먹을 수 있습니다. 버스도 있지요. 택시 값이 4.000원입니다. 엄청나게 큰 대형식당이 불과 몇 개 있습니다. 사람도 많고 밥도 많습니다. 밥 공장 같았습니다. 오래 전에 헛제사밥을 먹고 올라와서 안동시장 앞으로 감상문을 보냈는데 정성스러운 답장이 왔습니다 지역 향토문화 관계자와 교수들 의견을 적극 수렴하여 고증 정리가 되면 헛제사밥상을 다시 잘 차려 보겠다는 답신이었습니다. 오늘은 헛제사밥 이야기 안 하겠습니다 이런 조형물도 있고 점심식사를 한 후에 다시 택시를 타고 안동역으로 향했습니다. 그리고 역앞에서 하회마을 가는 버스 46번을 탔습니다 또 차를 탄다고 생각하지 말고 안 본 곳 풍경을 볼 수 있다는 기대로 갑니다. 밥 때도 되었지만 겸사 지루함을 덜기위해 점심식사를 한 것입니다. 쉬었다가 가는 셈이지요 왜냐하면 1박을 할 참이거든요.하회마을 안에 민박이 있다는 정보를 인터넷으로 알고 떠났거든요 하회마을까지 한 시간이 조금 안 걸렸어요 모든 관광객은 하회마을 입구 못미처에서 내려야 합니다.주차장이 있고 매표소가 있는 곳입니다 역시 늙은이는 그냥 통과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동안 조국근대화 작업에 너무 수고가 많았거든요. 우리는 그 때 노동삼권이다 휴가다 휴직이다 휴년이다 휴식이다 하는 休字에 대한 개념 같은 것도 모르고 그냥이었습니다. 쉴휴자(休) 모양대로 나무 그늘 아래 서 있을 시간이 없었거든요. 그냥 오직 사는 것이 노동이었고 노동 속에서 살았으니까요. 젊은이들이여 무료입장을 하는 나에게 뭐라고 눈총을 주지 말라. 아, 참 저 사진요? 언젠가 영국여왕님 엘리자베스씨께서 이 곳을 찾아왔던 일이 있었지요. 그 때 여왕님께 올렸던 진상인가 합니다. 놋쇠 그릇에 올린 한정식 궁중차림. 그 기념관이 매표소 옆에 있어요. 하회탈 전시장도 이 곳에 있고요 모든 식당 기념판매장 술 집도 이 곳에 모여 있습니다. 참고로 이야기 하면 하회마을 안에는 식당이 없습니다. 잘 한 일이지요 하회마을도 노곤한 하루가 가고 있습니다. 오늘은 일요일 이라서 더 많은 사람들이 왔더군요. 민박을 정하고 눈맞춤한 상현달입니다. 1박2일 동안 안동지방 여행 중에서 가장 좋았던 풍경으로 백미엿습니다. 만월은 아니지만 아, 감탄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린시절에 보았겠지만 느낌은 몰랐을 것이고 난생 처음 보는 달빛이었어요. 무엇에 비유할까요. 용접을 할 때 튀어오르는 파란 그 불빛? 아니면 120촉 짜리 환한 형광등 불빛? 깜깜한 하회 하늘에 수 많은 별을 거느리고 떠 있는 조선의 달. 독야청청이었습니다. 그 좋은 달빛을 사진 기술이 없어 저리 망가뜨렸습니다. 하룻밤 정을 묻은 내가 자고 난 방입니다. 장지에 환한 불빛만 남은 이 방 안에 늙어도 마리아 같은 우리 마누라님이 계십니다. 고무신은 아니지만 등산화 두 켤레가 나란합니다. 2백 50년 된 한옥에서 잠을 잔다는 일이 감동입니다. 풀 빳빳한 한지창을 열고 올려다 볼 수 있는 달빛도 그러싸 하려니와 어디선가 부엉새가 음산하게 울음 울 것 같은 고요가 너무 평화스럽습니다. 대문은 닫으면 안 된다는 규칙이 오히려 객을 더욱 편하게 했습니다 풀 빳빳한 한지로 도배를 한 방안에는 단출한 이불 한 채와 등이 하나 매달려 있을 뿐 아무것도 없습니다. 실로 어머니의 곁을 떠나온 뒤로 처음 맞는 잠자리입니다. 뒷간은 옛집 답게 멀리 안방을 통해 지하 쪽으로 내려가야 나옵니다. 집 생각을 하면 매우 불편하지요. 문득 생각납니다. 백남준 추모 기념회 때 있었던 일입니다. 초대 받아 입장하는 사람 마다 입구에서 무조건 넥타이를 가위로 삭둑 잘랐다고 합니다. 아무리 비싼 넥타이라도 만약에 즐거워 하지 않고 아까워 했다면 그는 잘 못 초대된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그곳은 첨단예술을 멀저 살고 간 백남준의 예술을 추모하고 기념하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날 밤 하회마을 민박은 매우 유쾌하고 조용한 밤이었습니다 서애(유성룡)선생 집 내당 후문입니다. 이 곳은 내당이므로 출입할 수 없다는 팻말이 있었지만 아침에 일찍 일어나 보니 마침 공사 중이라서 후문이 열려 있었습니다 용감하게 들어가 봤어요 사람도 잘 안 보였어요 월요일 아침이었거든요. 서애선생 댁 뒤란에 있는 장독입니다. 강숙제입니다 최근에 지은 한옥으로 매우 말쑥한 건물입니다 강숙제는 새로지은 집이었습니다. 뒷문이 열려있는 바람에 서애선생 14대 손 며느리 되는 할머니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본인을 소개하면서 영감님은 두 달 전에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낯선 사람 소리가 들리니까 문을 열어 보면서 말을 걸어왔습니다 혼자서 참 외롭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어요 출입이 금지되어 있는 곳이고 보니 사람을 쉽게 만날 수 없는 곳인듯합니다. 젊은 나이에 대왕대비가 되어 구중궁궐 뒤란에서 평생을 외롭게 살았던 분이 생각납니다. 본디 서애선생은 이 곳에 살지 않았고 저 먼 곳 어느 곳인지는 모르지만 외딴 곳에서 외롭게 살고 가셨는데 이 집은 후학들과 제자들이 힘을 합쳐서 지은 집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순신 장군도 서애 선생이 추천했다고 합니다. 그 말은 역사적으로도 맞는 소리입니다. 근데 왜 이 집을 지은 내력을 그렇게 소개하는 것일까요. 서애선생댁 정문입니다. 이 동네는 집집 마다 堂號와 보물 호수가 붙어 있었지만 사진을 찍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냥 서애선생 집입니다. 서애선생 댁 후원입니다. 그 곁으로도 몇 채의 별채와 전시관이 있었습니다 어마어마 하네요 본체에 있는 고쿠락(아궁이)입니다. 방공호 만큼 크지요? 달봉이네 카페 앞에서 쥔장은 지금 떠돌이 詩客 김선달이 온줄도 모르고 늦잠을 자는 것일까 불러도 대답이 없습니다. 이 집 차림표는 어쩜 커피나 주스 따위 보다는 막걸리 아니면 단술같은 것이 전부일 것입니다요 대감집 대문입니다. 집 안으로 들어서는 입구에서부터 대단한 위엄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것이 조선 기와집 특징이기도 하네요 반상의 계급사회에서 그런 구조물은 처음부터 양반으로서의 위엄이 서야 했습니다. 저 집안 깊숙한 곳에 상투를 틀고 대꼬바리를 쓰다듬는 위엄이 있었으니 여간해서는 양반의 신분으로 바깥사람을 직접 만난다는 일이 없었지요. 어쩜 나처럼 칼날같이 고음을 갖고 있는 목소리도 안채에 도달하기는 그리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때문에 웬만한 대소사는 하인들이 처리하고 중간에서 말 전달이 오고갔을 것입니다요 기강이 제대로 서 있던 시절입니다 기본적으로 돌 축대를 조성한 후에 건축물을 올렸습니다. 이 동네에서 가장 오래 된 건축양식으로 매우 위엄이 보이는 큰 집입니다. 사진만으로 보면 마치 시멘트 같지만 아닙니다. 모래가 깔려있는 바깥마당입니다. 아침 일찍 내방객 을 위하여 대빗자루로 쓴 모습입니다. 빗자루 자국 하나만으로도 함부로 할 수 없는 어떤 위엄 같은 것을 느끼게 합니다 여기서부터 앞섶을 여미고 고개를 숙이면서 헛기침 한 번쯤은 하고 조신하게 대문을 열어야겠지요? 이른 새벽 깊은 산중에 있는 절간을 찾아가는 길도 저랬습니다. 머리를 막 깎고 들어온 초승들이 마음 수양으로 빗자루 질을 한다고 합니다. 찾아가는 사람이 발로 밟기가 민망스러울 정도로 정갈한 길을 보면서 누가 이 길을 이렇게 쓸어 놓았을까 하고 생각하게 합니다. 마당이 저쯤 은 되고 보아야 담뱃대 뒷짐 지고 여덟팔 자 걸음 휘적휘적 걸어볼 수 있을 것이지요. 하회마을 중앙통로를 기준으로 해서 오른 편 뒤쪽에 주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다시 말 하면 낙동강과 부용대가 있는 편으로 가면 민박이 좀 있습니다. 초입이나 가운데는 없습니다. 관광지다 보니 그럴 수밖에요 민박집이 제법 있습니다. 생계수단이겠지요. 이곳에 간다면 평소 생활의 문명 같은 것 접어두고 하룻밤 정도 아무것도 없는 단칸방에서 잠을 자 보는 것도 좋습니다. 흙 담이 눈길을 끌었습니다. 흙벽돌은 잘만 쌓으면 시멘트 보다 더 견고하거든요 중간 중간에 자연석 돌을 박았으니 운치도 있지만 담이 더욱 견고하지요 빛과 그림자는 마치 신구의 조화처럼 매우 묘한 느낌으로 다가왔지요 높은 건물이 없는데다가 집과 집 사이가 넉넉하고 보니 빛과 그림자가 잘 조화를 이루는 것 같아요 담 둘레는 흙 담이지만 덮개는 기왓장입니다 금싸라기 같은 볕에서 곶감을 말리는 가을입니다. 곶감도 조선문양을 닮았네요 흙 담장 하나만으로도 위용을 느낍니다 하나의 담 안에서 잇대어 지은 지붕의 조화가 예술입니다. 하회마을 초입입니다. 버스가 들어갑니다. 들어올 때 마을 주민들은 예까지 타고 들어올 수 있지만 내방객은 아까 이야기 했던 저 앞에서 마련된 매표소 앞 주차장에서 내려야 합니다. 대신 나갈 때는 이 동네 출발점에서 타도 상관없습니다. 나가는 데는 돈 안 받거든요. 어? 나갈 때도 돈을 내야 나갈 수 있는 관광지 하나 만들어 볼까? 전형적인 농가입니다. 一字 집에 까치집이 한가롭습니다. 이 동네는 까치집도 대궐이네요 초가와 강 건너 산맥이 잘 어울리고 있네요 금세 장 닭이라도 한 마리 지붕위로 올라가서 그 특유의 신라 화랑도 같은 붉은 벼슬을 뽐내면서 목청을 뽑을 것 같은 한낮입니다 참말로 멋스러운 조선 마을입니다. 이곳에서 한 일년 만 지낸다 해도 툭하면 치고 솟구치는 뿔뚱가지가 많이 누그러지겠네요. 볕에서 구워지고 있는 찰흙담장입니다 긁어서 입에 넣고 맛을 본다 해도 단 맛이 날 것 같아요 저런 곳에서 등 기대고 코 흘리면서 제기차기를 하고 딱지치기를 했지요. 고무줄넘기를 하면서 조랑말처럼 겅중거리던 그 단발머리 지지배들 지금쯤 어디서 아이구! 아이구! 골다공증 무릎 치면서 잘 늙어가고 있겠지요? 월요일 이라서 그런가 그나마 있는 선물가게도 문을 닫았고요 온동네 어르신들이 관광버스 타고 남한산성 답사 갔다고 하네요 동네가 텅 비었어요 내가 민박을 한 집 쥔장도 새벽에 나가서 빈집이었어요 잘 잤다는 인사도 못 했네요 오른편으로 낙동강이 흐르고 강을 건너가면 병산서원이 있어요 강 둑을 이렇게 잘 만들어 놓았네요. 벚꽃이 피는 시절은 볼만하겠어요 왼 편이 하회마을이지요 며칠 더 묵고 싶은 그런 분위기였답니다 저 호수에 배 한척을 띄우고 창부타령이나 한 수 부르고 싶어요 매우 오래된 초등학교가 폐교되고 그 앞에 노송 한 그루가 지난 역사를 말 해주고 있다. 조기 보이는 조것이 강물을 건너다 주는 나룻배지요. 왕복 3.천원이라고 하는디 저 배를 타야 병산서원도 가고 부용대를 올라가서 하회마을 전경을 한 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디 사공은 어디로 가고 배만 홀로 적막합니다 민박을 하고 일찍 나온 몇 사람이 투덜거리면서 지나지고 있었어요. 한 사람당 요금을 생각 해 보면 잘 되는 사업으로 빌딩도 올릴 수 있을텐데 어쩜 저 배 주인은 그런 욕심 마저 강물에 다 떠내려 보낸 것인가. 아쉬움을 안고 돌아선 것인가. 핸드폰 전화번호를 써 놓았지만 전화를 해서 불러낸다는 일이 어울리지 않는 일 같아서 그냥 돌아섰네요 이곳에서 사공이 써 놓은 핸드폰 전화번호를 보는 일도 낮선 듯 했지요 배를 못 타는 바람에 강 건너 부용대를 바라보기만 했습니다. 저 곳에 오르면 풍광이 볼만하겠는디 산으로 들어가면 산이 안 보인다고 했지요. 어긋나는 일정도 조화려니 생각하고 돌아섰지요 누가 아느냐 내가 건너갈 때 뱃바닥에 구멍이라도 날지. 얄궂은 생각을 하면서 다시 찾아 올 구실을 하나 만들었지요 시나 한 수 읽으면서 어줍잖은 여행 마칩니다 달10 /김 문억 작두날 밟지 말고 신발 신고 가세요 빙딩 숲 넘어갈 때 유리 파편 조심하세요 퇴근 길 늦은 밤에 울분으로 마신 술병 많이 깨졌어요 싸이렌 소리 싸늘한 밤 기침 소리 휴지조각 각혈하는 중환자실 창가에 매달려 있는 창백한 얼굴 눈 한 번 꼭 맞추세요. 잉태한 그리움 만삭 되어도 해산 못하고 누워 있는 서산마루 달님 ! 삭발에 머리 나도록 오래 앉아 계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