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위(朴葳, ?~1398년)의 대마도 정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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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위와 같은 인재(人材)는 쉽사리 얻을 수가 없다. -이성계 《태조 실록》 태조 3년 1394 갑술 1월 21일(신유)
고려 말, 조선 초의 장수이다. 밀성박씨(밀양 박씨) 정국군파 중시조다. 신라 53대 경명왕의 장남 밀성대군 박언침의 아들 박욱이 고려 조정에 출사 해 삼한벽상공도대장군을 지내면서 부터 고려 왕조 내내 개경과 밀성을 기반으로 한 문벌귀족 집안이었다.
박위 이전까지는 문관 출신이 다수였고 박위부터 조선왕조에서 무관이 다수 나왔다. 박위의 후손 중 병마절도사가 여럿 있다.
할아버지는 전법판서 박천명, 아버지는 보문각 대제학 박광후, 어머니는 찬성사 김영휘의 딸이다. 외아들 박기는 조선조에서 이조참판, 오위도총관을 지내고 밀양으로 낙향 해 변계량과 함께 후학을 양성했다. 동생으로는 박천,박번이 있고 박천은 구산박씨의 시조가 되고 박번은 벼슬이 사헌부 지평에 이르렀다.
공민왕때 왕의 호위장교인 우달치로 등용되었다. 대마도를 정벌하고 이성계 뜻에 따라 위화도 회군 이후 최영을 탄핵했다. 이성계와 함께 창왕을 폐하고 공양왕을 옹립했다. 작위는 충의백(忠義伯), 정국군(靖國君)두 개다. 회군공신, 중흥공신에 책록 되었다.
조선 건국 후 참찬문하부사, 양광도 절도사로 있으면서 왜구를 소탕했으나 이홍무의 옥사에 연루 돼 파직 됐다. 서북면도순문사로 복직 했으나 계속 되는 상소로 파직 됐다가복직 돼 무인정사 당시 도제조 겸 친군위도진무로 숙직하다가 암살 됐다.
1822년(순조 22)에 후손인 박성기의 주청으로 밀양 사림들의 공론을 모아 경상도 밀양도호부에 신남서원을 창건 해 박위, 박기 부자를 모셨다.
1868년(고종 5)에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書院撤廢令)에 따라 사당은 철거되었으나 강당은 경보당(景報堂)으로 이름을 바꾸어 재실(齋室)로 삼고 박위, 박기 부자의 제사를 계속 모셨다. 1981년에 후손들의 발의와 고을 유림들의 호응으로 서원을 1868년 철폐 전의 상태로 복원 해 상모사(尙慕祠)를 그 전대로 중건 해 박위, 박기 부자의 제사를 매년 모시고 있다.
2. 지방 수령
지방과 중앙직에 두루벼슬하면서 공민왕과 이성계에게 재능으로써 인정받았다. 상주, 김해, 영흥 부사, 진주 목사, 계림 부윤을 역임하고 합포 수령을 세 번 역임하는 등 지방수령으로 긴 세월 있는 동안 수많은 중소규모전투에서 싸워 모두 이겼다.
정몽주의 수필(포은집)에 따르면 박위가 지방수령으로 있을때 행정력이 탁월하여, 왜구에 의한 폐허와 토지 복구를 빠르고 효율적으로 처리하는 등 지방백성들의 신망이 대단하였다고 한다.
백 번 싸워 백 번 이겨 적으로 하여금 방자하게 굴지 못하게 하였다, 지금도 사람들은 그를 지장(智將)이라 칭찬하고 있다. - 《해동잡록 본조》1 박위(朴葳)
조선 중기에 쓰여진 해동잡록이다. 이때까지도 박위의 이름이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었다는 이야기다. 본래 야사에는 과장이 있기 마련이지만, 정사에도 패배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누차 진급하여 지문하부사에 이르렀다.네 번이나 수령을 지내고 세 번이나 남쪽 변방을 지켰는데 왜구는 그쳐지고 백성은 편안해져 성망과 치적이 대단하였다. - 《해동잡록 지지(地志)》 박위(朴葳)
부산 동래성,울산 신학성,김해 분산성 등을 축성하였다.
상주부사로 있을 때, 홍건적의 침입으로 인하여 개경이 함락되어 공민왕을 안동까지 무사히 피난 시키는 임무를 수행하였다.
상주 중모현 전투와 고령현 전투에서 왜적을 대파했고 김해부사로 있을 때는 황산강(낙동강)을 통해 밀양을 공격하러 오는 왜선50척과 그 후속부대들을 고려 군선 30척을 이끌고 수륙합동 작전으로 거의 전멸시켰다.
요동정벌때 경상도 상원수(慶尙道 上元帥)로서 출전하여 이성계의 뜻에 따라 위화도에서 회군한 이후 최영을 탄핵했다. 이로인해 회군공신이 된다.
이후 흥국사 회담에서 창왕이 신돈의 자식이라는 명분으로 폐위시켜 흥국사 9공신(이성계, 심덕부, 지용기, 정몽주, 설장수, 성석린, 조준, 박위, 정도전)중 한명이 된다, 이후 박위는 중앙정계로 진출하게된다.
1390년(공양왕 2) 김종연의 옥사(이성계 암살모의사건) 명단에 박위의 이름이 나와 역모로 몰려 감옥에 갇히게 되어 관직과 공신직을 박탈당하였다. 그러나 무혐의와 이성계의 적극적인 호의로 인해 사면, 관직과 회군공신을 돌려받았다.
기록에 의하면 조선초기 경복궁은 지금과 달리 2층건물이 많았고, 궁성이 단순한 담장울타리가 아니라 성곽이였던 것으로 보이는데, 박위는 참찬문하부사 겸 도제조로서 광화문을 공사하고, 경복궁 궁성공사 총책임을 맡았다고 한다. "임금이 궁성(宮城)을 순시(巡視)하고 능하지 못한 감독관(監督官) 수십 인을 태형(笞刑)에 처하고, 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 박위(朴葳)로 도제조(都提調)를 삼아서 능하고 능하지 못한 것을 고찰하게 하였다."
이후 실록에 의하면 박위는 점쟁이에게 이성계의 사주팔자가 어떠한가 물어보고 다른 왕씨들 중에 운명이 좋은 사람들이 있는가 물어보았는데, 이로 인한 역모혐의로 신하들의 엄청난 탄핵을 받았으나 태조는 신하들을 만류하며 박위를 보호했다. 그러나 매일같이 박위를 탄핵하는 상소가 올라와 결국 파직당했고, 결국 이 일이 불쏘시개가 되어 왕씨 학살의 피바람이 불게 된다. 조선이 창업된 이후, 신진사대부 등 고려를 적극적으로 부정했던 세력들 사이에서는 왕씨들을 화근으로 인식하고 벼르고 있었던 차에 박위의 일이 자연스레 불쏘시개가 되었다.
박위는 실록에 확인되는 바에 따르면 총 9번 탄핵 되었으나 그때마다 이성계는 탄핵하는 신하들을 꾸짖고 박위를 인재로 기용해 쓰겠다는 뜻을 확고히 하였다.
태조실록 5권, 태조 3년 3월 1일 /대간과 형조에서 함께 나아와서, "박위(朴葳)는 용서할 수 없습니다." 라고 말하자, 옥에 갇힌 박위를 풀어주면서, "정무(政務)를 보기를 그전과 같이 하고 의혹(疑惑)하지 말라. 비록 천만인(千萬人)이 말하더라도 나는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태조실록 5권, 태조 3년 3월 22일 /간관이 참찬문하부사박위(朴葳)를 탄핵하므로, 임금이 장무(掌務)를 불러 꾸짖고, 박위에게 명하여 정사를 보게 하였다.
5. 제 1차 왕자의 난,사망
이후 관직에 복권되어 박위는 무인정사 때 정1품 도제조 겸 친군위도진무(궁궐치안대장) 겸 오위도총부 총관(수도경비사령관)을 맡고 있었는데, 전투의 유무와 전투의 양상에 대해서는 각종매체끼리도 상충되며 실록 자체내에서도 일관되지 못함이 많이 드러난다. 실록에서의 최후 묘사는 이렇다. 투항이후 박위가 숙직실에 들어가있었는데, 이방원이 회유하기 위해 나오라고 하자, 세 번이나 불러도 한참이나 나오지 않고 매우 늦게 나왔는데, 회안대군 이방간이 박위를 죽일 것을 건의 해 그때 죽였다고 하기도 한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이방원을 무시하는 태도로 볼 수 있으며, 회유에 적극적으로 응하는 태도가 전혀 아니라고 볼 수 있다.
이방원은 인재활용폭이 이성계 보다 좁았다. 자신이 관리하기 힘든 거물급 인재들은 회유할때 제대로 숙이지 않으면 전부 숙청했는데 그 명단속에는 자신의 아버지인 이성계는 물론 정몽주,정도전,남은 모두 있었고 박위 또한 피해갈 수 없었다.
세세한 것들은 알 수 없으나 객관적 기록으로 보자면, 박위는 살해당했고 공동으로 지휘를 맡았던 조온은 살았다는 점, 궁궐내 다른 곳의 수비를 맡았던 이무 등은 지휘부가 꺾였다는 소식을 듣자, 기다렸다는 듯 적극 투항해 살아남은 것, 오위중 하나인 호분위의 군사전원이 이성계가문 가별초(사병)들인 것. 남은, 심효생, 정도전, 이제, 유만수 등과 당시 일부 생존해 활동하던 개성 왕씨들도 전부 살해당했다는 점이 모두 사실이다. 전투는 거의 없었다고 하며 호분위를 포함하여 궁궐내 대부분의 병력이 이방원에 회유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당연히 전투 없이 이방원에 숙청당했다는 것이 정론.
6. 평가
집안이 대단한 명문가였다. 아버지 외할아버지 모두 2품이상의 관직에 있었으며, 그의 친인척들 중 꽤나 많은 이들이 문인文人으로서 활약했다. 이성계의 회유를 거절해 두문동과 시골에 은거한 이름있는 선비들도 많은 반면에 관직에 출사한 친인척들도 적지않다. 신흥무인중에서도 꽤 많이 보인다. 이들은 많은 사람들이 알정도로 유명하진 않지만 모두 사병을 적지 않게 가지고 있어, 박위가 대마도 정벌 할때도 합세 하였다.
박위는 적극적으로 세력을 모아 파벌에 가담하거나 파벌을 형성하거나 하지는 않았던것으로 보이며, 자신의 출신은 권문세족이라 온건세력들과 친분이 있었고, 그러면서도 실패 가능성 높은 요동정벌을 독단한 같은 권문세족 최영을 탄핵하고 시대를 위해 힘없는 창왕을 폐위시키는 등 자신 나름대로의 주관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다른 인물들이 보았을 때 정치색깔이 확실치 않은 행보안철수, 이미 대세는 조선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확실히 회유되지 않는 모습 등을 말미암아 실록과 세간에서 기회주의자란 비판을 많이 받았다. 그럼에도 무관으로서 공이 커 중용 받았으나 결국 무인정사 때 살해당한다.
대한민국 해군 장보고급 잠수함의 4번함인 박위함은 박위의 이름을 붙인 함선이다.
북한에 있는 평양성 읍호루 현판은 그의 글씨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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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지역사공원 비림의 박위장군 신도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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