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의 신하의 아들을 고치심 요4:43-54, 주일6. 23 431
신하(대감)의 아들을 고치신 내용은 54절에서 두 번째 표적이라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첫 번째 표적인 물로 포도주 되기 하신 표적과 연관성이 있음을 암시합니다. 그래서 차이점과 공통점이 있습니다.
① 공통점은? 첫 표적은 절망에서 희망 또는 회복이며 예수님이 누구시며 오신목적을 진술하신 메시지인데 곧 십자가로 인해 구원을 완성하시기 위해 오심이며 대감의 아들이 죽어가는 데도 세상권력으로도 어찌할 수 없는 상황이지만 예수님을 살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보여 주는 사인은 첫 표적과의 공통점으로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의미합니다.
② 차이점은 첫 표적은 예수님이 찾아가신 곳이며 두 번째 표적은 왕의 신하가 상당이 먼 곳(가버나움)에서 가나까지 찾아 온 것입니다.
43절, 이틀(2일)이 지남은 40절에서 보면 사마리아에서 사마리아인들과 이틀을 유하신 것은 오늘로 말하면 사경회를 한 후에 예수님의 말씀으로 믿는 자들이 더욱 많았습니다. 이제는 사마리아에서 원래 목적지인 갈릴리(4:3)로 가시는 것입니다.
44절, 친히 증언하시기를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높임을 받지 못한다 하시고
이 말씀이 뜬끔 없이 나온다. 뉘앙스는 부정적이다.
그런데 45절에서는 갈릴리사람들이 예수님을 영접했다는 것은 긍정적이다 그러면 앞뒤가 맞지 않는 구조 같지만 갈릴리 사람들이 영접함은 예수님을 사랑하고 구주로 믿어서 영접함이 아니라 예수께 명절에 예루살렘에서 하신 모든 일을 보았다는 것은 단순히 기적을 보고 어떤 이득과 혜택을 바라고 영접한 것입니다. 자기들의 어떤 욕망을 품고, 보상심리 때문에 영접한 것입니다. 이같이 갈릴리사람들은 아무런 표적이 없이도 예수님의 말씀을 사모했던 사마리아 사람들과 대조적입니다. 여기서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보이는 기적을 바라며 믿는 것이 아니라 표적이 없이도 말씀대로 믿는 믿음을 원하십니다. 표적만을 보고 믿고자하는 자들을 기쁘게 여기실까?.
요20:29.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 되도다 하시니라
우리의 믿음은 어떤 필요에 따라 믿음을 갖게 된다면 뿌리가 약하기 때문에 어떤 필요가 채워지지 않으면 요구하며 채워지지 않으면 원망을 합니다. 기적중심의 믿음은 아편과 같다. 떨어지면 더 센 것을 찾는다.
개인에게 거짓 위안과 만족을 주려는 교회가 되지 말고 우리는 복음을 바르게 전하는 교회가 되게 해야 합니다. 그래야 생명을 살리게 됩니다.
즉 갈릴리 사람들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영접함이 아니다(요1:12)
그냥 필요해 욕구를 채우기 위해 따르는 것입니다.
46-47절, 이때 예수님은 갈릴리 가나에 이르게 되었는데 왕의 신하(권력의 실세임을 암시)의 아들이 가버나움에 병들어 거의 죽게 되는 상황에서
가버나움에서 가나까지 거리는 약34키로 입니다. 지금처럼 교통수단이 좋으면 자동차로 20-30분이면 도착할 수 있는 거리이지만 그 당시에는 먼 길입니다. 특히 권력의 실세이니 밑에 사람들을 보낼 수 있지만 왕의 신하(대감)가 직접 찾아와 47절 예수님이 갈릴리에 오셨다는 것을 듣고 가서 청하되 내려오셔서 내 아들의 병을 고쳐 주소서 합니다. 이렇게 왕의 신하는 아랫사람을 보낼 수도 있지만 먼 길에 찾아와 청하는 것은 왕의 신하의 입장이 아니라 아버지의 간절한 마음입니다.
47절, 청하여 이 말은 ‘헬’ 미완료 시제이므로 한번만 청한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거듭 거듭 청했다는 말입니다. 이쯤 되면 예수님은 그래도 사회적으로 지위가 있는 사람의 부탁이라 가버나움까지 가서 치유기도를 해야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 48절 예수님의 반응은 부정적이시다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 이 같은 표현은 왕의 신하는 믿음은 긴가 민가 반신반의의 믿음이다. 즉 일말의 기대이다.
이때 신하의 대답은 ‘주여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오소서’
보통 치유기도를 부탁하면 친밀하게 교감을 해주고 간절히 기도해 주어야 하는 것으로 이해를 합니다. 사실 치유는 하나님이시지, 목사나 어떤 사역자가 아닙니다.
50절 “가라<미션> 네 아들이 살아있다” 하거늘 그 사람이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믿고 가더니 확고한 말씀신앙 같지만 역시반신반의 믿음이다.
이유는 51-52절에 내려가는 길에 종들을 만나서 아이가 살아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낫기 시작한 때를 물어 보는 것입니다 이것은 확인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왕의 신하의 아들의 병이 치료됨은 신하의 온전한 믿음이 인가요? 아니다 오직 주님의 말씀이 고쳤습니다. 왕의 신하가 확인함은 이제 믿음이 눈 끔이 생긴 것입니다. 믿음의 성숙은 확인과정에서 자라게 됩니다. 기도의 일기를 쓰시고 확인해보면 거의 응답이 된 경우를 발견합니다. 이때에 도마처럼 의심한 믿음이 성숙해집니다. 우리가 처음부터 대단한 믿음으로 시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왕의 신하가 확인 과정에서 그 온 집안 다 믿음니라 이같이 온전한 믿음을 가짐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주님은 지금도 말씀으로 원격치료하십니다.
그런데 50절을 보니 “가라<미션> 네 아들이 살아있다” 하시니 그 사람이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믿고 가는 것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치유기도를 부탁하면 친밀하게 교감을 해주고 간절히 기도해 주어야 하는 것으로 이해를 합니다. 치유는 하나님이 하십니다.
왕하5장에 아람나라의 일등 공신인 나아만장군이 문둥병으로 고생하던 차에 엘리사선지자의 소문을 듣고 많은 예물을 가지고 먼 길을 하루가 마다하고 엘리사를 만나러오는데 엘리사는 나오지도 않고 하인을 통해 요단강에서 7번 몸을 씻으라고 하니 나아만은 굉장히 불쾌한 것이다.
왕하5:10. 엘리사가 사자를 그에게 보내 이르되 너는 가서 요단강에 몸을 일곱 번 씻으라 네 살이 회복되어 깨끗하리라 하는지라 11. 나아만이 노하여 물러가며 이르되 내 생각에는 그가 내게로 나와 서서 그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그의 손을 그 부위 위에 흔들어 나병을 고칠까 하였도다 12. 다메섹 강 아바나와 바르발은 이스라엘 모든 강물보다 낫지 아니하냐 내가 거기서 몸을 씻으면 깨끗하게 되지 아니하랴 하고 몸을 돌려 분노하여 떠나니.... 하인이 밑져 봐 자 본전입니다. 한번 요단강에서 몸을 씻어보세요 ....
오늘 본문에 왕의 신하는 예수께서 하신말씀을 믿고 가더니 .....
오늘날에 목사가 가라 네 믿음대로 되리라 한다면 상처 받죠,
여기서 우리는 그 당시로는 먼 길을 온 왕의 신하의 열정과 겸손 그리고 그의 시작의 믿음을 보게 됩니다. 그는 말씀대로 믿는 믿음이 뿌리가 깊이 지니 그 결과 온 집안이 다 믿게 되었습니다. (53절)
마8장 백부장의 믿음에서 (5-13절)
8. 백부장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사옵나이다
서론에서 언급한 것처럼
54절 이렇게 두 번째 표적이라 표현하신이유는?
혼인잔치에서 물-포도주로, 오늘 왕의 신하의 아들 치유하심의 팩트는 비슷하다 ① 요청 ② 거절 ③ 명령과 순종 ④ 말씀에 순종하는 자가 알게 되는 예수님의 능력과 영광이다. 그래서 두 표적을 통해서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보여줍니다. 바로 기쁨을 회복하시며 살맛나게 하시는 분이심을 보여 주는 표적입니다.
요10:10, 20:31.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