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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6-07] I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묵상 I 마태 5.1-12
그때에 1예수님께서는 군중을 보시고 산으로 오르셨다. 그분께서 자리에 앉으시자 제자들이 그분께 다가왔다. 2예수님께서 입을 여시어 그들을 이렇게 가르치셨다. 3“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4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5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 !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 6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 그들은 흡족해질 것이다. 7행복하여라, 자비로운 사람들 !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 8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 9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 10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11사람들이 나 때문에 너희를 모욕하고 박해하며, 너희를 거슬러 거짓으로 온갖 사악한 말을 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 12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사실 너희에 앞서 예언자들도 그렇게 박해를 받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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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독서 및 복음 묵상주제] : 하느님을 뵙게 될 그날을 그리며 <독서 : 1열왕 17,1-6 / 복음 : 마태 5,1-12>
요즘처럼 나뭇잎이 무성한 때면 나뭇잎 사이로는 하늘이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하늘이 없어서가 아니라 나뭇잎이 하늘을 볼 수 없게 가리기 때문이다.
이렇듯 우리가 하느님을 뵙지 못함 또한 하느님이 계시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분을 보는 데 방해가 되는 것들, 곧 교만과 욕심 때문일 것이다. 그러기에 이것들이 치워지면 우리도 하느님을 뵙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언제 그것들이 치워져 우리가 하느님을 뵐 수 있을까 ? 먼저 일상생활에서 우리 안의 교만과 욕심에서 비롯된 죄를 씻을 때다. 곧 매일의 기도와 말씀 봉독을 통해 자신의 욕심과 교만을 직시하고, 잦은 고해성사와 영성체로 그것들을 정화하며, 피정이나 교육을 통해 자기중심에서 하느님 중심으로 돌아가는 때다. 한편 영적 독서와 상담을 통해 교만과 욕심의 성향을 치밀하게 파악하여 더 적극적으로 그것들을 버리는 일 또한 하느님을 더욱 선명히 뵙게 하는 일일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도 우리 힘으로 교만과 욕심을 온전히 버리기는 불가능하다. 하느님의 은총이 아니면 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은총의 가을이 오면 왕성했던 나뭇잎이 떨어지듯 우리가 맞을 죽음으로 주어진다.
그래서 우리는 생의 마지막 순간을 슬퍼하면서도 하느님을 보는 데 장애가 되는 근원적 문제를 모두 치워주는 죽음을 기껍게 맞을 수 있다. 그리고 그때 비로소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 (8절) 는 오늘 복음 말씀이 실제로 우리 안에 완성됨을 감지하게 될 것이다...............◆
[말씀자료 : 김기곤 신부(전주교구 나바위 천주교회) / 편집 : 까따꿈바 묵상팀] |
[다해] 연중 제10주간 월요일 I 묵상기도방(사이버기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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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기도 :
믿음으로 주님,
당신을 부르나이다.
인간이 되신 당신 아드님을 통하여
당신을 선포하신 아드님의
일생을 통하여 제게 주신,
당신이 제게 불어넣어 주신 그 믿음으로
주님, 당신을 애타게 부르나이다.
- 당신을 찾나이다 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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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기도지향 : 세상을 떠난 이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주님, 이 세상을 떠난 모든 이가 주님 안에서 평안히 쉬게 하시고 살아있는 동안 지은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시며 주님의 부활로 영원한 생명을 얻어누리는 은총을 주소서.
오늘의 복음 : [다해] 연중 제10주간 월요일 마태 5,1-12
그때에 1예수님께서는 군중을 보시고 산으로 오르셨다. 그분께서 자리에 앉으시자 제자들이 그분께 다가왔다. 2예수님께서 입을 여시어 그들을 이렇게 가르치셨다. 3“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4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5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 !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 6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 그들은 흡족해질 것이다. 7행복하여라, 자비로운 사람들 !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 8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 9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 10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11사람들이 나 때문에 너희를 모욕하고 박해하며, 너희를 거슬러 거짓으로 온갖 사악한 말을 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 12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사실 너희에 앞서 예언자들도 그렇게 박해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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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독서 : 내 삶의 남은 시간
언젠가 젊은 나이에 근무력증이란 희귀병으로 고생하는 사람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가 하는 말이, 자신이 지금 죽어가고 있지만 만일 남은 생이 조금이라도 허락된다면 그 시간의 전부 남을 위해 봉사하겠노라고 하더군요. 전 숙연한 마음으로 그의 말이 진심이란 걸 이해했습니다. <양창순 | '지푸라기가 되어주는 마음'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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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해] 연중 제10주간 월요일(2010-06-07) I 복음묵상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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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과 함께하는 묵상> : † 산상설교의 첫 계단 : 진복선언
오늘부터 연중 10주간이 시작된다. 연중시기는 예수님의 공생활을 따라잡는 시기라는 말을 했다. 예수님의 공생활을 따라 잡는다는 말은 예수님의 가르침과 행적을 통해 공생활의 철학과 정신을 배워 익힌다는 것이다.
지난 연중 9주간까지 해서 마르코복음(1,14-12,44)을 들었고, 오늘 연중 제10주간 월요일부터 연중 제21주간 토요일까지는 마태오복음(5,1-15,30)을, 그 다음부터 연중34주간까지 토요일까지는 루가복음(4,16-21,36)을 듣게된다.
오늘 복음은 마태오복음이 전하고 있는 예수님의 가르침 중 백미(白眉)라고 말할 수 있는 산상설교(5-7장)의 첫 장으로서 "진복선언(眞福宣言)"이다. 예수님의 일상은 말씀과 행적, 가르침과 기적으로 이어진다. 산상설교에서 예수님은 새로운 모세로 등장하여 "더 나은 정의"를 선포하신다.
산상설교와 비슷한 평지설교가 루가복음에도 보도되는데 이는 산상설교에 비해 그 분량이 매우 적고 간단하다.(루가 6,20-49) 루가의 평지설교는 행복선언(20-23절), 불행선언(24,26), 원수사랑과 보복금지(27-36절), 형제에 대한 판단금지(37-42절), 본성을 따르는 행위(43-45절), 그리고 말과 행동의 일치(46-49절)의 순서로 엮어져 있다.
마태오복음이 산상설교의 첫머리에 "9개의 행복선언"을 보도하고 있는 반면, 루가는 4개의 행복선언과 4개의 불행선언을 들려준다. 원전(原典)이 되는 예수어록에는 4개의 행복선언이 전해지는데, 마태오는 5개를 추가하여 9개로 편집하였고, 루가는 4개를 충실히 옮겨 쓰면서 4개의 불행선언을 덧붙인 것으로 추정된다.
행복(불행)선언의 짜임새를 보면, 우선 대상(對象)이 언급되고, 다음에 행복(불행)선언이 따르고, 마지막으로 그 이유가 될만한 보상(補償)이 언급되는 구조를 이룬다. 예를 들어 "가난한 사람들아!"는 대상을, "너희는 행복하다"는 선언을, "하느님 나라가 너희의 것이다"는 그에 합당한 보상을 말한다.(대상->선언->보상)
이 구조를 따라 선언문을 살펴보자. 마태오복음의 9개 행복선언: ① 마음이 가난한 사람 -> 행복 -> 하늘나라, ② 슬퍼하는 사람 -> 행복 -> 위로, ③ 온유한 사람 -> 행복 -> 땅, ④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 -> 행복 -> 만족, ⑤ 자비를 베푸는 사람 -> 행복 -> 자비, ⑥ 마음이 깨끗한 사람 -> 행복 -> 하느님 대면, ⑦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 -> 행복 -> 하느님의 아들, ⑧ 옳은 일을 하다가 박해를 받는 사람 -> 행복 -> 하늘나라, ⑨ 예수님 때문에 모욕, 박해, 비난을 받는 사람 - 행복 - 하늘의 큰 상.
루가복음의 4개 행복선언: ① 가난한 사람 -> 행복 -> 하늘나라, ② 굶주린 사람 -> 행복 -> 배부름, ③ 우는 사람 -> 행복 -> 웃음, ④ 예수님 때문에 미움, 추방, 모욕, 누명 받는 사람 -> 행복 -> 하늘의 큰 상.
루가복음의 4개 불행선언: ① 부유한 사람 -> 불행 -> 위로 끝, ② 배부른 사람 -> 불행 -> 굶주림, ③ 웃는 사람 -> 불행 -> 슬픔과 울음, ④ 칭찬 받는 사람 -> 불행 -> 거짓 예언자와 동급.
예수께서 행복하다고 선언하는 대상은 바로 사람이다. 그런데 행복한 사람이 되기 위해 그 사람이 지녀야 할 덕목과 받아들여야 하는 처지(환경)가 있다. 그것은 바로 마음의 가난함, 슬퍼함, 온유함,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말라함, 자비를 베풂, 마음의 깨끗함, 평화를 위한 노력, 옳은 일 때문에 당하는 박해, 예수님 때문에 받는 모욕과 박해와 비난이다.
그러나 이 중에는 그 자체로 긍정적이지 않고 부정적인 것도 있다. 부정적인 대상이나 그런 상태가 행복일 수는 없다. 이런 대상이나 이런 상태에 처한 사람이 복된 자로 선포되는 이유는 이런 경우에 예수님의 복음이 더 잘 수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나아가 이곳에 하느님의 강함이 더 잘 드러나기 때문이다. 사람들 속에서 드러나는 약함은 곧 하느님의 강함이다.
"부른 배로는 기도할 수 없다"는 브라질 카마라(1909-1999) 대주교의 말이 참으로 옳다는 생각이 든다. "가난한 이들의 형제"라 불리는 카마라 대주교는 브라질 동북부의 거대 빈민지역인 레시페-올린다 대교구에서 평생을 찢어지게 가난한 이들과 함께 살면서 군부독재에 맞서 가난한 이들의 고통에 대한 관심을 끊임없이 촉구했다.
나나 우리 가족만이 굶지 않고, 웃으며 편히 사는 것이 진정한 행복의 삶인가? 아니다. 찢어지게 가난해도 웃음과 울음을 함께 나누며 더불어 사는 삶 속에 예수님도 함께 계심을 잊지 말아야 하겠다. 사회•경제적 구조 속에서 가난과 배고픔, 슬픔과 억압받음 자체가 참 행복은 아니다. 이는 단지 참 행복을 위한 조건으로 제시되고 있으며, 이러한 조건에서 자신을 하느님께 전적으로 의지할 때 참 행복은 시작된다. 하느님께 자신을 내어 맡긴다는 것은 무위(無爲)가 아니라 정의(正義)와 평화(平和)를 위해 일하고 노력하는 것이다.
따라서 진복선언은 단순히 그런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 행복해지기를 바라는 예수님의 바램이나 원의(願意)라기보다 도래한 하느님나라에 들기 위한 더 나은 정의로서 모든 사람을 향한 요구인 동시에 행복의 약속인 셈이다..............◆
[말씀자료 : 박상대 신부 / 편집 : 까따꿈바 묵상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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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곱과 함께하는 묵상> : † 산상설교와 참 행복
물질중심의 배금사상과 힘 중심의 패권사상은 오늘날 지구촌 사회 환경을 적그리스도들이 활개를 치는 오염된 환경으로 물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환경이 우리 그리스도인의 환경에서 예외라고 감히 주장하지 못하겠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세속적 방식에 더 탐니하며 윤리적으로 심각하게 타락해 가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를들어 그리스도교계 일부에서는 성전의 비데화 사치화가 도를 넘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어느 특정교단을 지칭할 의도는 없습니만 교회 세습 문제로 인해 세간의 조소거리가 되는 경우도 보고 있으며, 곳곳에서 부도덕한 행동을 한 명단에는 그리스도인들이 오르내리는 일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습니다.
또 교회의 중직자들이 경제적, 성적으로 타락한 일들에 포함되어 있고, 비윤리적인 방법으로 돈을 벌면서도 아무렇지도 않게 교회를 다니고 있습니다. 그러면 세상의 빛과 소금 역할을 해야 할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왜 점점 더 사회로부터 신뢰를 잃어 가고 있는지 오늘복음의 산상설교는 그 해답을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I. 시작글(묵상도입)
1. 한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이고, 한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인가?
여러분은 이러한 표제 제목을 보고 어떤 생각이 듭니까? 우리는 일단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천국에 가니까, 세상에서 아무렇게나 살아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이에 대해서 성경은 뭐라고 말하고 있을까요? 몇 가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옛날 이스라엘이 멸망하기 직전에 그들도 이와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은 선택받은 백성이기 때문에 어떠한 일을 해도 결코 멸망하지는 않는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는 그들은 하느님을 멀리하고 우상을 섬기는 등, 이스라엘은 총체적으로 타락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타락은 갈수록 더해만 갔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선택받은 백성이기에 결코 멸망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바로 이때에 하느님은 아모스라는 예언자를 이스라엘로 보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아모스를 통해서 이스라엘 사람들의 죄를 하나 하나 열거하면서 심판을 선고하셨습니다. 이때에 하느님께서 지적하신 이스라엘의 죄는 두 가지였습니다.
첫째는 이스라엘 백성이 도덕성을 잃어 버렸다는 것이었으며, 둘째는 이스라엘 사회가 정의를 실행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의 주 하느님은 당신 백성이 도덕성과 정의를 상실했을 때에 예언자를 보내서 심판이 있을 것을 경고해 주셨습니다. 이러한 예는 구약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신약의 여러 곳에도 이러한 경고들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주님은 위선과 형식주의로 물든 당시 종교 지도자들을 향해서 엄중한 심판과 저주를 선포하셨습니다. 그리고 요한묵시록 2, 3장을 보면 주님은 소아시아 일곱 교회를 다니는 분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주님은 이 곳에서 불꽃같은 눈으로 교회를 관리 감독하시며, 날이 선 칼로 불의와 싸우시는 분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주님은 불꽃같은 눈과 날카로운 칼을 들어 우상을 섬기고, 거짓 사상을 받아들이며, 성적, 도덕적으로 타락한 그리스도 신자와 교회를 향해 회개를 촉구하셨습니다. 심지어 주님은 교회가 "회개하지 않으면" "촛대를 옮겨버리겠다"고 까지 경고하셨습니다. 이러한 모든 기록들은 구원을 받은 신자들이라도, 아무리 열심히 교회를 다니는 사람이라고 해도 거룩한 삶을 살지 않으면 심판이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2. 신자들은 구원받은 후에 어떻게 살아야 되는가?
그러면 구원받은 후에 그리스도 신자들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하느님은 구약의 성도들에게 모세를 통해서 율법을 주셨습니다. 이 율법은 하느님의 백성으로 선택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해서 자세하게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하느님은 그들이 이 율법에 순종하면 생명과 축복을 받고, 거역하면 죽음과 저주를 받게 될 것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또한 주님은 구약 시대와 같이 신약시대의 교회들을 위해서도 "새로운 계명"을 주셨습니다.
이 계명은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같이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서로 사랑하며 살 수 있을까요? 우리는 휼륭한 사랑의 원리들을 산상설교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유명한 영국의 설교가인 로이드 죤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산상 설교는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으로서, '사랑의 새 계명'을 위대하고 웅장하고 완전하게 정교화 한 것이다."
3. 산상설교를 어떻게 볼 것인가?
그러면 우리는 산상설교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요? 그 동안 역사를 통해서 볼 때에 산상설교에 대해서 여러가지 주장이 제기되어 왔습니다. 그 중에 몇 가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사회복음이다.
사회 운동을 강조하는 사람들 중에는 산상설교를 일종의 사회복음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해 왔습니다. 그들은 성서에서 중요한 것은 산상 설교 뿐이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산상설교에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원리가 있으며, 우리가 해야 할 일의 산상설교를 우리 삶에 적용하는 것뿐이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우리가 산상설교를 삶 속에 적용함으로써 이 세상에 하느님 나라를 건설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인류가 이 수훈을 실천함으로 이 세상에 전쟁이 끝이 나고, 인류에게 놓인 모든 어려운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전형적인 사회복음주의자들이 가진 견해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 천국을 세울 수 있다고 주장하던 그들의 주장은 1-2차 세계 대전으로 인해 무너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마음이 가난하고 슬퍼하는 자들이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말을 간과했습니다. 그들은 산상수훈이 모든 인간이 지킬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나약함을 깨닫고 성령의 은혜로우신 도움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2) 모세 오경을 정교화 하거나 해석한 것이다.
일부 다른 사람들은 산상설교를 유대인들이 잘못 해석하고 율법을 바로 잡기 위한 것이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들은 주님께서 산상설교를 통해서 유다인의 그릇된 율법관을 바로 잡고, 그것을 올바르게 해석함으로써 율법에 보다 높은 영적 의미를 부여하셨다고 주장했습니다. 물론 산상설교에는 잘못된 유다인의 율법관을 바로 잡기 위해 제시된 말씀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산상설교 전체가 율법관을 바로 잡기 위해서 제시된 것이라고 말하는 주장은 많은 무리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팔복과 같은 것은 모세 율법을 완전히 초월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산상설교가 율법을 올바르게 해석하는 동시에 그 율법을 초월하고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됩니다.
3) 하늘나라 세대를 위한 윤리이다.(세대주의)
세대주의자들은 산상설교가 이 세대 사람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후에 있을 하늘왕국 시대의 사람들을 위한 윤리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주님께서 하늘나라에 대해 가르치셨지만 유대인들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이로 인해 주님은 당장에 하늘나라를 세울 수가 없었다고 말합니다. 이로 인해 주님은 하늘나라를 완성하지 못하고 십자가형을 당하게 되셨으며, 하늘나라가 완성될 때가지 임시로 교회 시대가 찾아오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교회 시대가 어느 정도까지 계속되다가 주님의 재림 후에 하늘나라가 완성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산상수훈은 바로 이러한 천국 세대, 즉 천년왕국 시대에 사는 백성들을 위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들의 주장에 의하면 산상수훈은 교회 시대를 사는 우리들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매우 잘못된 견해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이 교훈은 분명히 주님께서 세우신 제자들과 그 주변에 있던 사람들에게 주신 교훈이었습니다. 마태오는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자 제자들이 곁으로 다가왔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주님은 분명히 "너희가 세상의 소금과 빛이라"고 강조하셨습니다.
또한 이 교훈은 오늘날을 사는 우리들에게도 역시 해당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은 이 가르침을 자기들만 간직하지 않고, 그 후대에게도 기록하여 전해 주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바오로 서신 역시 산상설교의 내용을 대부분 반복해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일들은 사도들이 이 설교가 당시 제자들뿐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교인들을 위해 주신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었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4) 사랑의 새 계명을 구체적으로 풀어 설명하신 것이다.
로이드 존스 같은 사람은 산상설교를 주님께서 말씀하신 "사랑의 새 계명"을 자세하게 설명한 것이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서로 사랑하라"는 새로운 계명을 주셨습니다. 로이드 존스는 이러한 사람의 새 계명을 자세하고 정교하게 설명한 것이 바로 산상설교였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이 견해를 받아들이면 산상설교는 "어떻게 주님께서 주신 사랑의 새 계명을 실천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경우 산상설교는 모든 그리스도인을 위한 것이며, 사랑하는 삶을 실천하기 위한 완전한 밑그림입니다.
II. 묵상 전개(마태오복음과 루카복음에 나타난 산상 및 평지 설교)
[마태 5,1] : "예수님께서는 그 군중을 보시고 산으로 오르셨다. 그분께서 자리에 앉으시자 제자들이 그분께 다가왔다." [루가 6,17] : "예수님께서 그들과 함께 산에서 내려가 평지에 서시니, 그분의 제자들이 많은 군중을 이루고, 온 유다와 예루살렘, 그리고 티로와 시돈의 해안 지방에서 온 백성이 큰 무리를 이루고 있었다."
1. 마태오복음과 산상설교
산상설교(진복팔단)은 마태오복음과 루카복음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마태오복음과 루카복음에 기록된 내용과 방법은 여러 가지 점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먼저 마태오복음의 경우에는 산상설교를 주님의 세례와 광야의 시험 사건 뒤에 배치하고 있습니다. 마태오복음은 유다인을 위해 쓴 것입니다. 마태오는 마태오복음을 통해서 당시 유다인들이 가지고 있던 그릇된 메시아 관과 천국관을 교정하고 올바른 메시아 관과 천국관을 제시해주고 있습니다.
마태오는 주님의 세례와 시험 사건을 통해서 먼저 메시아의 활동의 목적과 방법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주님의 세례는 주님의 활동의 목적이 (당시 유다인들의 생각처럼) 무력으로 로마를 정복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 죄를 지고 대신 죽을 하느님의 어린양이 되는 것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요한 1,29). 또한 주님께서 받으신 악마의 시험 사건은 주님의 활동 방법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주님은 세 가지 시험을 통해서 인류의 구세주가 되는 메시아 활동이 1) 돌로 빵을 만드는 것과 같은 마술로 경제적인 필요를 채우거나, 2) 성전에서 뛰어 내리는 일처럼 기적을 통해 인기를 얻는 것이나, 또는 3) 사탄(죄악)과의 타협을 통해서 쉽게 얻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하게 보여주셨습니다. 주님은 세상 죄를 없애시는 어린양이 되기 위해 세상에 오셨으며, 이 일은 물질이나, 기적, 또는 죄와의 타협이 아니라 희생과 십자가를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음을 분명하게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마태오는 산상에서의 설교를 통해서 당시 유다인들의 그릇된 율법관을 교정하고, 새롭게 시작될 하느님 나라의 삶의 원리가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주님은 군중들이 모인 것을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셨으며, 이를 보고 제자들이 주님이 계신 곳으로 나아왔습니다.
이때에 주님은 앉아서 말씀하셨습니다. 유대 랍비들은 가르칠 때에 주로 앉아서 가르쳤으며, 그 가르침을 듣는 제자들은 서기도 했고, 때로는 앉아서 듣기도 했습니다. 유다인들은 모세를 통해 주신 율법에 대해 큰 열심히 있었지만, 형식과 외식으로 이를 준수했으며, 율법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도 많은 오해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주님은 메시아로서 그들이 가진 그릇된 율법관을 교정하고, 원래의 율법을 주신 의미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 뿐 아니라 주님은 이제 새롭게 시작되는 하느님 나라의 백성들에게 필요한 삶의 원리가 어떠한 것인지에 대해서도 자세하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 설교가 산상설교(산상수훈)라고 불리게 된 것은 이 설교를 한 곳이 산비탈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2. 루카복음과 평지설교
"예수님께서 그들과 함께 산에서 내려가 평지에 서시니, 그분의 제자들이 많은 군중을 이루고, 온 유다와 예루살렘, 그리고 티로와 시돈의 해안 지방에서 온 백성이 큰 무리를 이루고 있었다."(루가 6,17)
마태오는 마태 5-7장에서 주님이 설교하신 내용을 107절에 걸쳐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루카복음은 그 내용을 약간 다르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루카복음의 경우에는 (루가 6,20-49)에 29절의 설교 내용이 함께 기록되어 있고, 34절은 여기 저기 흩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마태오복음에 나타난 47절의 내용은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것을 보면 루카는 마태오와는 다른 방법으로 주님의 설교 자료를 편집한 것으로 보입니다.
루카는 주님께서 새로운 교회를 형성할 창립자인 열 두 제자를 세우신 후에 산상설교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즉, 주님께서 하느님 나라를 형성할 창립자들을 세우신 후에, 그들을 중심으로 "하느님 나라의 법"을 선포하신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이 말씀을 하시기 전날 밤에 수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만나기 위해서 모여들었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산으로 가서 열 두 제자를 선택하는 문제를 놓고 밤새 기도를 하셨습니다(루카 6,12). 그리고 다음 날 아침이 되자 주님은 제자들 중에서 12명을 선택하고 그들을 사도라고 부르셨습니다.
루카는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내려와서 평지에 서셨다고 말합니다(루가 6,17). 이 기록으로 인해 우리는 루카의 설교를 "평지설교"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이로 인해 학자들은 마태오복음에 기록된 산상설교와 루카복음에 기록된 평지설교가 같은 것이었는지에 대해서 많은 논란을 벌이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루카가 말하는 평지는 산비탈에 있는 평평한 곳이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이곳 역시 산이었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또 다른 사람들은 루카가 기록한 평지는 산 위가 아니라 말 그대로 평지였다고 주장합니다. 그들은 주님께서 산 위에서 설교하신 내용들은 평지와 다른 장소에서도 여러번, 부분적으로 가르쳐졌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태오와 루카는 이 내용을 각기 다른 방법으로 편집해 놓았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새로운 교회의 창립자들을 세우신 후에 그들에게 "너희가 내 제자가 되려면 이렇게 해야 한다"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산상설교가 행해질 당시의 군중들은 세 가지 종류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첫째는 주님께서 불러 세운 12사도들이었고, 둘째는 그들보다 좀더 많은 수의 제자들, 즉 당시 주님을 충실하게 따르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셋째로 나는 이 외에 또 다른 청중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루카는 "제자들이 많은 군중을 이루고, 온 유다와 예루살렘, 그리고 티로와 시돈의 해안 지방에서 온 백성이 큰 무리를 이루고 있었다."고 소개하고 있습니다(루카 6,17) . 이들은 모두 메시아를 간절히 찾고 구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설교는 교회의 창립자들인 12 사도들에게 주어진 말씀인 동시에 당시 주님을 찾아온 수많은 무리들에게도 주어진 말씀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오늘날 우리들을 포함한 모든 신자들에게도 역시 주어진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이 말씀을 온 세상에 가서 전하라고 제자들에게 부탁하셨기 때문입니다(마태 28,18-20). 주님의 제자들은 이러한 주님의 명령을 받들어 이 말씀을 기록했으며, 우리는 그 기록을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말씀들을 대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시요, 새로운 하느님 나라를 세우실 분으로서, 하느님과 동등한 자격과 권한으로 새롭게 시작될 하느님 나라의 법을 창립자들 앞에서 선포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운명이 모세가 선포한 율법의 순종 여부에 달려 있었던 것처럼, 이제 막 시작될 하느님 나라 백성의 운명도 주님이 선포하실 이 말씀에 달려 있었습니다.
III. 묵상심화(산상설교의 내용 요약)
우리는 앞에서 산상설교를 어떻게 보아야 하며, 마태오와 루카는 이 설교를 어떻게 소개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묵상해 보았습니다. 오늘은 "왜 우리가 산상설교를 왜 연구해야 하는가?"를 이야기 한 후에 산상설교의 전체 내용을 한번 개관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1. 산상설교를 연구해야 하는 이유
우리가 산상설교를 연구해야 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로 우리가 산상설교를 연구해야 하는 이유는 주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이유가 "우리를 거룩한 백성으로 만들기 위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당신의 몸을 바치셔서 우리를 모든 죄악에서 건져내시고 깨끗이 씻어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분의 백성으로서 선행에 열성을 기울이게 되었습니다."(티도 2,14) 그러므로 주님의 피로 구원받은 신자들이 거룩한 삶을 살기 위해 산상설교를 연구하고 그것을 실천하는 것은 마땅한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둘째로 우리가 산상설교를 연구해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하느님 나라의 백성이 되고, 하느님 백성답게 사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가르쳐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진복팔단에 나오는 1-2번째 복은 우리에게 회개와 새로 태어남의 역사가 필요하다는 것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마음이 가난한 자는 하느님 앞에서 자신이 철저히 무능하다는 것을 깨닫고, 하느님의 도우심을 간절히 구하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일은 성령의 도우심이 우리에게 얼마나 필요한 지를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셋째로 우리가 산상설교를 연구해야 하는 이유는 이 설교를 읽거나 듣고 실천함으로 큰 축복을 경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산상설교는 구체적으로 신자들이 성화의 축복에 참여할 수 있는 길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의 품성에 참여하는 축복을 체험하고 싶은 신자들은 산상설교 정신으로 돌아가서 그것을 실천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 수훈을 실천하면서 즉시 복음의 능력을 체험하게 되고, 그리스도교가 살아 움직이는 종교란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거룩하게 되기 위해서 신비한 체험에 의지하기 보다 산상설교를 깊이 묵상하고 그것을 실천하는 일에 관심을 쏟을 필요가 있습니다.
넷째로 우리가 산상설교를 연구해야 하는 일은 산상설교를 실천하는 일이 선교를 위한 최선의 방법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세상은 주님의 명령을 실천하지 못한 그리스도인들로 인해 실망하고 있습니다. 지금 세상은 주님의 뜻을 실천하는 참된 그리스도인들을 절실하게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살게 만드는 일은 선교조직을 구성하는 일보다 더 강한 영향력을 줄 수도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거룩한 삶을 회복할 때에 그들은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서의 본질을 회복할 수 있으며, 그들의 선한 행실은 결국 복음 선교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될 것입니다.
2. 산상설교의 내용 요약
산상설교는 일관된 논리적인 연결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아무렇게나 기록된 것이 아니고, 매우 잘 기획된 프레임(의도된 짜임새)을 가지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설교는 어떤 기초 원리가 설정되고, 그 기초 원리 위에서 다른 원리들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우선 이 설교는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말씀입니다. 이 교훈은 주님을 따르던 제자들에게 주어진 것이며, 참된 제자, 즉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이 무엇인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들에게 이 내용을 강조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산상설교를 구분하기 위하여 "일반적인 원리"와 "특수한 원리"로 구분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에서는 이 원리를 따라 산상설교의 내용을 구분해 보겠습니다.
첫째 : 일반적인 원리(마태 5,3-16) 1) 그리스도인의 일반적인 특성(5,3-10): 팔복 2) 그리스도인에 대한 세상의 태도(5,11-12): 박해와 그리스도인의 정체성 3) 그리스도인과 세상의 관계(5,13-16): 세상의 소금과 빛
산상설교는 먼저 그리스도교인의 본질적인 성격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말해주고 있습니다. 팔복은 그리스도 교인이 어떤 사람들인가? 를 설명하고, 세상 속에서의 그가 어떻게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서 13-16절에서는 그리스도인이 사회에 대해서 어떠한 존재인지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신자들을 가리켜 세상의 소금과 빛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둘째 : 특수한 원리들(5,17-48) 산상설교는 먼저 그리스도인에 대한 일반적인 원리를 제시한 후에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를 실천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1) 율법과 그리스도인(5,17-7장)
주님은 먼저 십계명과 관련된 내용을 먼저 다루고 있습니다. 주님은 살인(6계명)과, 간음(7계명), 이혼과 같은 내용들을 다루고 있으며, 그리스도인의 언어와, 보복과 자기 방위 문제, 그리고 이웃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태도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강조되고 있는 것은 율법을 "문자" 에 매달려 지키는 것이 아니라, 그 법의 "정신"을 진심으로 준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당시 바리사이들이 이러한 율법들을 문자에 매달림으로 위선을 낳게 되었다고 비난하셨습니다. 주님은 이러한 법은 그 정신을 영혼과 진심으로 준수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2) 참된 경건(6장)
다음으로 6장 전 장은 모두 참된 경건이 무엇인가? 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곳에서는 유다인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단식, 봉사, 기도, 그리고 사람들이 먼저 구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다루고 있습니다. 주님은 당시 바리사이들이 하느님 보다 사람에게 보이기 위해 금식과 자선과 기도를 하고 있다고 비난하셨습니다. 주님은 진정한 경건은 하느님 앞에 있음을 의식하고 행동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그리스도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행동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하느님 앞에서 행동하는 사람들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특히 주님은 기도를 가르쳐 주시면서 기도의 모범이 되는 "주님의 기도문"에 대해서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주님은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서 추구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셨습니다. 주님은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사람들처럼 의식주로 인해 염려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그리스도인들이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면 이 모든 것을 하느님께서 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3) 분별과 복음의 실천(7장)
마지막으로 7장은 구체적으로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순종을 통해서 진리의 길을 걸을 수 있는지에 대해서 말해주고 있습니다. 주님은 먼저 자기 기준으로 이웃을 단죄하고 판단하는 일을 금하셨습니다. 주님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많은 사람들이 찾는 넓고 평탄한 죽음의 길로 가지 말고, 좁지만 생명으로 인도하는 진리의 길을 가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리고 세상에서 거짓 예언자를 구별하여 그들을 떠날 것에 대해 말씀하신 후에, 이 모든 말씀을 듣기만 하고 실천하지 않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고 위험한 것인지에 대해서 경고해 주셨습니다.
당시 수많은 종교 지도자들이 율법을 가르치면서 그대로 행하는 일에는 소홀했습니다. 그러므로 그 율법이 그들에게 큰 유익을 주지 못했습니다. 주님은 새로운 하느님 나라의 백성들 역시 이 가르침을 순종할 때에만 그에게 유익을 줄 수 있다고 경고하셨습니다. 주님은 이 교훈을 듣고 실천하는 사람은 그 기초를 반석 위에 세운 지혜로운 사람과 같으나, 이를 듣고도 행하지 않는 사람은 모래 위에 집을 세운 어리석은 사람과 같다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러한 산상설교의 내용은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데에 필요한 모든 내용을 다 언급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이 교훈에 나타난 원리들은 우리가 세상에서 살아가는 데에 적용할 수 있는 길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가르침에 나타난 원리들을 우리 삶에 주의깊게 적용하고 실천하여 사랑의 계명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
3. 산상설교의 팔복 내용
우리는 이 시간 산상설교 중에서 가장 먼저 나오는 8개의 복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이 8개의 복, 즉 진복팔단은 모두 "행복하여라..."는 말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행복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행복을 얻기 위해 하는 노력은 다양한 차이를 보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행복을 얻기 위해 사용하는 방법은 오히려 행복을 막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 어려움을 일시 피함으로 한 순간만을 행복하게 만들려는 노력은 결국 더 큰 불행을 가져올 뿐입니다. 또한 사람들이 행복해지기 위해 추구하는 죄와 쾌락 역시 사람들에게 더 큰 불행을 안겨다 줄뿐입니다.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는 진정으로 사람들이 행복해 질 수 있는 길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사실상 여기에서 언급되고 있는 행복한 사람은 하느님 나라의 백성들을 말합니다. 주님은 하느님 나라의 백성들의 특징을 8가지 제시하면서, 그들이 진정을 행복한 사람들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우리는 이 부분을 "진복팔단, 또는 팔복"이라고 부릅니다.
주님은 하느님 나라의 백성들이 팔복에 나타난 특성들을 나타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8개의 특성들은 바로 성령으로 새로 태어난 하느님 나라의 백성들에게 나타나는 특성입니다. 이러한 성격과 특성들은 주님을 믿고 성령 안에서 거듭나서 주님 안에서 자라나는 사람들에게 서서히 나타나게 되는 특성입니다. 주님은 하느님 나라의 백성은 마음이 가난하고, 죄로 인해 슬퍼하며, 온유하고, 옳은 일에 굶주리고 목마르며, 평화를 추구하고, 자비를 베풀고, 그 마음의 영이 깨끗하고, 옳은 일을 하다가 박해를 받으면서 기뻐하는 사람들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특성은 모두 다 후천적인 것입니다. 이러한 특성은 태어날 때부터 가지는 것이 아니며, 성령 안에서 다시 태어난 하느님의 백성이 됨으로써 지닐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8가지 특성은 하느님 나라의 백성들이 어떤 사람이며, 그들이 다른 사람들과 어떻게 다른 지를 분명하게 구별해 주고 있습니다. 주님은 하느님 나라의 백성들은 세상에서 추구하는 것이나 그 행동에 있어서 다른 사람들과 분명하게 구별된다고 말합니다. 이 8개의 축복은 하늘나라로 올라가는 8개의 계단(팔단)과도 같습니다. 이 8개의 축복은 마치 음계가 도레미파솔라시도~하고 올라가듯이 하늘나라 백성이 나타내는 특징들을 기초부터 더 높은 수준으로 진행하고 있습니다. 자, 그러면 이제 첫 번째 축복부터 차례대로 묵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1)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마태 5,2ㄱ; 루카 6,20)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 5,3)
1).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주님은 첫 번째로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태오의 경우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 행복하다고 기록하고 있는 반면, 루카는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언급된 가난한 사람은 외적인 가난으로 인해 자신을 의지하지 못하고 철저하게 하느님만을 의지하게 된 겸손한 사람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이 사람들은 마태오가 기록한 것처럼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첫 계단을 밟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늘나라는 자기 의지를 포기하고 그리스도만을 의지하는 사람들이 들어갈 수 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축복이 가장 앞에 나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마음이 가난하지 않고는 그 누구도 하느님 나라의 백성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마음의 가난함은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을 분명하게 구별해 주는 특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가) "율법과 팔복"
나는 십계명과 율법을 가르치면서 좌절감을 많이 느꼈습니다. 왜냐하면 그 말씀이 옳다는 것을 알겠는데, 실제로 나가서 그렇게 살려고 하면 그대로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십계명이나 율법을 가르친 날이면 오히려 심적으로 더욱 부담을 느끼곤 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성서를 좀더 연구하면서 그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율법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는 가르쳐 주지만, 그것을 행할 힘은 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나는 팔복을 묵상하면서 율법을 가르칠 때와는 전혀 다른 자유로움을 느끼곤 했습니다. 왜냐하면 팔복은 우리에게 모든 것을 행하라고 요구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팔복은 오히려 우리가 무엇을 행하기 전에 먼저 마음이 가난해져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팔복은 우리가 무엇을 행하기 전에 우리 자신이 하느님 앞에서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지 깨닫고 가난하고 겸손한 마음이 되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두올강론집에서)
(나). 영혼이 가난하다는 것을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러면 "마음이 가난하다"는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마태오의 경우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고 기록하고 있는 반면, 루카는 "가난한 사람들"이라고 기록하고 있다고 앞에서 설명했습니다.
히브리어로 "가난하다"는 말(에비온)은 여러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말은 1) 재물이 없는 빈곤한 자나 권력이나 신분이 낮은 것을 의미했습니다. 억눌린 자나 노예 같은 사람들은 가난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가난하고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어서 오직 하느님만을 의지해야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사실 가난이란 생각하기에 따라 물질적으로 빈곤한 사람이나, 지식적으로 가난한 사람, 건강이 없는 사람, 그리고 영적으로 빈곤한 사람 등 여러 가지 측면에서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마태오가 언급하고 있는 것은 마음이 가난한 사람을 의미합니다.
가난한 자는 한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인가를 강렬하게 필요로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부자는 조금만 먹어도 배부르지만 거지는 아무리 먹어도 배가 고픕니다. 그러나 가난이 항상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오히려 적당히 가난한 환경에서 자란 사람이 지나치게 풍요로운 곳에서 자란 자녀들보다 더 올바르게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때로 모든 것이 풍요로울 때에 사람들은 나태해지거나 도덕적으로 타락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러한 가난은 신앙에 있어서도 있을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항상 자신이 부족하다고 느끼고 주님 앞에 더 가까이 가려고 애쓰는 사람이 있는 반면, 어떤 사람은 자신이 신앙적으로 충분히 성숙해 있다고 자만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후자와 같이 신앙적인 교만에 차 있는 사람은 매우 위험한 사람입니다. 세상의 물질은 우리 마음을 세속적이고 교만하게 만들기 쉽습니다. 물질을 갖게 되면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게 되고 고상하게 보이며, 신분이 상승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적극적으로 물질을 추구합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부모나 자식보다도 돈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물질적으로 부유하면 신앙이 좋은 것 같고, 물질적으로 빈곤하면 신앙이 나쁜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정말로 주요한 문제는 영적인 가난입니다. 영적으로 부한 사람은 자기 옳음(의)에 도취된 사람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자신이 스스로 세운 기준을 모두 만족하고 있는 의인이라고 생각합니다. 영적으로 부한 사람들로 대표적인 사람들은 바리사이파 사람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돈도, 명예도, 지식도, 그리고 신앙도 부족한 것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자기 의에 도취된 사람은 자신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신의 부족을 깨닫고 하느님의 은혜를 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항상 무엇인가 도움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끼니가 없는 사람은 먹을 것을 얻는 일에 모든 관심을 집중시킵니다. 집 없이 사는 사람들은 작은 집이라도 자기 집은 갖기를 갈망합니다. 가난은 이렇게 사람들의 마음을 갈급하게 만들어 줍니다. 주님은 마음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서 마음이 가난하다고 하는 것은 빈곤으로 인해 세상이나 자신을 의지하지 못하고 오직 하느님만을 의지하는 간절한 마음이 된 상태를 말합니다.
원래 "가난하다"고 번역된 헬라어(프토코스)는 말은 "거지가 된 것", 즉 "궁핍하고, 도울 힘이 없어서 타인의 도움을 절실히 필요로 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하느님 앞에서 자신의 영적인 궁핍을 느끼고 간절하게 하느님의 은총을 구하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영적으로 파산 당한 사람처럼 자기를 포기하고 두 손을 들고 하느님께 나아오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대부분의 경우 물질이나 명예가 없는 사람들은 물질이나 명예를 많이 가진 사람들보다 더 하느님을 잘 믿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의 나약함을 알기때문에 하느님의 의지하기가 쉽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물질적으로 가난한 사람이라고 해서 모두 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실제로 물질적으로 가난한 사람 중에서도 교만하여 하느님을 찾지 않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결코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비록 물질적으로는 가난하다해도 여전히 자기의 힘과 의를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반대로 물질적으로는 부유하다 해도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부유한 사람들 중에도 마음에 궁핍함을 느끼고 하느님을 간절하게 찾는 사람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니고데모와 같은 사람이 이러한 예에 포함될 수 있습니다. 그는 지식과, 권력과 재물을 모두 소유했음에도 불구하고 강한 영적 갈급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밤에 주님을 찾아오는 모험을 감행할 수 있었습니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일은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들어가는 것처럼 어렵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부자도 마음을 가난하게 만들어 구원받게 하실 수 있습니다. 이러한 마음의 영의 가난은 외모를 꾸미거나 형식적으로 꾸미는 일과는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이러한 가난함은 영혼의 깊은 부분에서부터 성령에 의해 느끼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배가 파선 당해 빠져 죽어 가는 사람이 살려 달라고 소리 지르는 것과 같으며, 파산 당한 사람이 긴급하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지금 산상설교의 가장 앞부분에 나오는 팔복 중의 하나를 묵상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앞에서 마음이 가난하다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 묵상해 보았습니다. 마음이 가난하다는 말은 자신의 의가 없음을 깨닫고 하느님의 은총을 전적으로 구하는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바로 이러한 사람들에게 주어질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계속해서 마음이 가난한 자에 대한 성서적인 사례들을 찾아 볼 것입니다. 그 예는 구약과 신약의 여러 곳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 주님께서 직접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가) 구약 성경의 예 - 이사야
그러면 성경에서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예를 찾아보겠습니다. 이러한 예들을 생각해보는 것은 마음이 가난한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이해할 수 있게 해 줄 것입니다. 첫 번째 예는 예언자 이사야의 경우입니다. 그는 왕족으로서 부족함이 없었고, 또 학력적으로나 인격적으로나 가문으로나 부족함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우찌야라고 하는 성군이 죽은 후에 국가의 운명이 어찌될까 염려하여 성전에 들어가서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그때에 이사야는 성전에서 높이 들린 옥좌를 보았습니다. 그 옥좌에는 하느님께서 앉아 계셨으며, 그 주위에는 여섯 날개를 가진 스랍들이 둘러 있었습니다. 이사야가 볼 때에 그 스랍들은 거룩하신 하느님 주변에서 얼굴과 발을 가린 채로 하느님의 거룩하심을 노래로 화답했습니다. 한쪽에 있던 스랍들이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만군의 주님(야훼)!"이라고 외치면, 다른 한쪽에 있던 스랍들이 그것을 받아서 "그의 영광이 온 땅에 가득하시다!"라고 화답하고 있었습니다. 이사야는 이러한 노래 소리로 인해 성전 문설주들이 흔들리고, 성전 안에 연기가 가득하게 된 것을 보았습니다. 그 순간 이사야는 자신이 얼마나 큰 죄인인지 알게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절망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큰일났구나. 이제 나는 죽었다. 나는 입술이 더러운 사람, 입술이 더러운 사람들 틈에 끼여 살면서 만군의 주님(야훼), 나의 왕을 눈으로 뵙다니........"
거룩한 하느님을 본 그 순간 그토록 정결하게 살아온 청년 이사야도, 자신이 하느님 앞에서 사망할 진흙덩이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죄 많은 자신이, 죄가 많은 백성들 중에 살면서 하느님을 보았으므로 이제 자기는 죽게 되었다고 절규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바로 이러한 이사야의 마음의 상태가 오늘 복음에서 말하는 "마음이 가난한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사야는 하느님을 본 순간 자신은 하느님의 도우심 없이는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란 것을 순간적으로 깨닫게 되었습니다.
바로 이러한 마음의 상태가 되었을 때에 우리는 우리를 포기하고 하느님의 구원을 붙들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바로 이러한 가난한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구원해 주십니다(이사야 6장). 하느님은 이사야가 절규하고 있을 때에 천사를 보내어 뜨거운 돌(성령의 숯불)로 그의 입술에 대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천사를 통해 이사야의 죄가 사라졌다고 선포해주셨습니다. 하느님은 이렇게 마음이 가난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며 또한 그의 죄를 용서해 주십니다. 그 다음 하느님은 이사야가 세상에 나가서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이사야는 그 부르심에 응답하여 하느님의 일에 자신을 헌신했습니다.
(나). 신약 성경의 예 - 세리와 탕자(작은아들)
한 성전에 한 바리사이파 사람과 세리가 기도하러 올라갔습니다. 바리사이파 사람은 하느님께 이렇게 기도하였습니다. "바리사이파 사람은 보라는 듯이 서서 '오, 하느님! 감사합니다. 저는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욕심이 많거나 부정직하거나 음탕하지 않을 뿐더러 세리와 같은 사람이 아닙니다. 저는 일 주일에 두 번이나 단식하고 모든 수입의 십분의 일을 바칩니다.' ...고 기도하였습니다."(루카 18,11-12)
그러나 세리는 성전에 들어왔지만 감히 가까이 나오지도 못하고, 멀리 서서 오직 가슴을 두드리며 이렇게 하느님께 부르짖었습니다. "한편 세리는 멀찍이 서서 감히 하늘을 우러러보지도 못하고 가슴을 치며 '오, 하느님! 죄 많은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하고 기도하였습니다.(루카 18,13)
그런데 우리 주님께서는 이 세리가 저 바리사이보다 더 올바른 사람이라고 인정을 받았다고 선언하셨습니다. 물론 외적인 생활은 바리사이이 훨씬 더 올바르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세리는 민족을 배반하고, 동족들의 피와 같은 돈을 사기 쳐서 착취하는 아주 못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마음이 부유하고 자기는 하느님의 도움이 필요없다고 생각하는 교만한 바리사이들보다는, 자신이 하느님 앞에 설 수 없는 죄인임을 깊이 깨닫고 회개하는 마음으로 부르짖는 상한 심령을 돌아보셨습니다.
또 한 가지 예가 주님께서 하신 비유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예는 주님께서 해주신 "탕자의 비유"에서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탕자는 아버지가 없이도 잘 살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아버지 생전에 유산을 이리 받아 가지고 먼 나라로 떠나가 버렸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곳에서 허랑 방탕하다가 재산을 다 날리고 돼지가 먹는 먹이도 못 먹는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결국 다 죽게 되었을 때에 종으로라도 써 달라고 아버지께로 돌아왔습니다. 바로 이와 같이 두 손을 들고 아버지께로 돌아오는 마음이 바로 가난한 마음(심령)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는 상한 마음으로 돌아온 작은아들(탕자)을 기쁘게 맞아주시고, 그가 잃었던 모든 것을 다시 회복 시켜 주셨습니다. 하늘나라는 바로 이러한 탕자와 같은 마음을 가지고 하느님께 돌아오는 사람들이 들어갈 수 있는 나라입니다.
2).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 5,3ㄴ, 루카 6,20)
(가). 하느님의 나라는 무엇인가?
주님은 하느님의 나라가 마음이 가난한 자들의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말하는 "하느님 나라"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하느님 나라는 한 마디로 말하면 "하느님의 주권이 완전하게 행사되는 곳"을 말합니다. 시간(과거, 현재, 미래)과 공간(하늘, 땅)을 초월해서 하느님의 주권이 완전하게 실현되는 곳은 모두 천국이요 하느님 나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영접하고 그 뜻을 따르면 우리 마음이 하느님 나라가 될 수도 있고, 우리 가족 전체가 주님을 믿고 따르면 우리 가정이 하느님 나라가 될 수도 있습니다. 만일 국가 전체가 하느님의 뜻을 따르고 있다면 그 나라가 하느님 나라가 될 수도 있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복음을 통해서 세상에 확장되어 왔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예수와 함께 시작하고, 복음 전파와 함께 확장되어 왔으며, 주님의 재림과 함께 완성이 될 것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주님께서 세상에 계실 때에 이미 이 땅에 도래했습니다. 주님은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다가왔다!"(마태 3,2)고 선포하셨습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다가왔다"는 말은 시간적으로 "얼마 안 남았다"는 말이 아닙니다. 이 말은 공간적으로 "가까운 곳에 있다", 즉 "손닿을 곳에 있다"(at your hand)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님은 하느님 나라가 손닿을 만큼 가까이 있으니, 복음을 믿고 하느님나라에 들어가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때로 주님은 주님 자신과 주님이 전하시는 복음자체를 하느님 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루카복음을 보면 바리사이들이 주님이 "하느님 나라가 언제 오겠느냐?" 고 물은 적이 있습니다. 이때에 주님은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하느님 나라가 오는 것을 눈으로 볼 수는 없다. 또 '보아라, 여기 있다.' 혹은 '저기 있다.'고 말할 수도 없다. 하느님 나라는 바로 너희 가운데 있다."(루카 17,20-21) 여기에서 "너희 가운데 있다"는 말은 "너희 마음 안에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당시에 많은 바리사이들에게 둘러싸여 있었습니다. 주님은 바리사이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자신을 바로 하늘나라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너희 가운데"라는 말은 "너희 중에"(among you)라는 말입니다. 주님은 사람들에게 에워쌓여서 복음을 전하시는 자신과 자신이 전하시는 복음이 하느님 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하느님 나라는 복음이 확장됨에 따라 계속해서 확장되어 왔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이 나라는 전 세계로 확장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 나라는 주님의 재림을 통해서 완성될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예수님 자신이며, 복음이 전파되어 믿고 순종함으로 주님의 뜻이 실현되는 곳이며, 하느님의 주권이 실현되는 곳입니다.
(나). 하늘 나라가 너희 것이다.
주님은 왜 하느님의 나라가 마음이 가난한 자들의 것이라고 말씀하셨을까요? 그 이유는 바로 마음이 가난한 자들이 복음을 믿고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가난한 것은 자신의 죄를 깨닫고 하느님의 은총 없이는 살 수 없다고 강하게 느끼는 영적 상태를 말합니다. 이러한 상태가 된 사람만이 하느님의 은총을 간절하게 구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은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간절하게 하느님의 도우심을 구하게 됩니다.
이것은 마치 시몬 베드로가 주님 앞에서 이렇게 외쳤던 것과 같습니다. "주님, 저는 죄인입니다.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자신의 올바름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위선적인 영적 부자는 결코 주님과 복음을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두올의 고백록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나는 내게 없는 한 가지와, 있는 것 한 가지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며, 이로 인해 나는 교만할 수가 없습니다." 그 분은 자신에게 "의"가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분은 자신이 일어나서부터 잠자리에 들 때까지 온통 죄만 지으며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를 알게된 그 분은 교만할 수가 없었습니다. 또한 그 분은 자신에게 "악한 마음"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는 자기 마음 안에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도적질과 거짓 증거와 훼방"이 가득 차서, 자신을 더럽히는 것을 보았습니다(마르 15,19). 그러므로 그 분은 교만해질 수가 없었습니다.
이러한 마음은 가난한 마음입니다. 가난한 마음은 성령의 햡조를 통해서 주어집니다. 그러므로 신자들은 가난한 마음이 되기 위해서 하느님의 도우심을 구할 필요가 있습니다. (2역대 7,14)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내 이름으로 불리는 내 백성은 머리를 숙이고 기도하며 나를 찾고 나쁜 길에서 돌아서야 한다. 그리하면 나는 하늘에서 듣고 그 죄를 용서해 주고 그 사는 땅에 다시 생명을 주리라." 이 시간 우리는 가난한 마음이 되어 자신을 있는 그대로 하느님 앞에 내려놓읍시다. 그리고 성령의 도우심과 주님의 은총을 간절히 구합시다! 하느님의 나라는 바로 이러한 사람들의 소유가 될 것입니다.
* 이하 구절의 묵상은 지면관계상 생략합니다.(더 보시려면 복음향기의 산상설교편을 참고하십시오)
III. 맺음말(묵상마무리)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산상설교에서 예수께서 택하신 제자들에게 주신 교훈의 핵심과 본질과 진수을 보았습니다. 여기에서 그 첫마디 귀절에서 보면,
1) 예수께서 "자리에 앉으시자"... 라고 했는데, 그 표현은 유다인들의 관습에서 볼 때 정식으로 교훈할 때 제자들 앞에 앉아서 했던 것임으로, 이 산상설교는 예수님의 가르침의 핵심적이고 본질적인 가르침이라는 것을 성경 저자가 표현하고자 해서 기록한 말입니다.
2) "입을 여시어 그들을 이렇게 가르치셨다" 라는 표현은 그들의 생활에서 보면, 엄숙하고 장엄하며, 권위있는 말을 할 때라든지, 어느 누가 자신의 마음의 문을 열고 정성을 다해 말하는 모습을 표현할 때 쓰는 말마디였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산상설교는 예수님의 단순한 교훈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당신의 마음을 열어 정성을 다해 엄숙하고 장엄하게 또 권위를 가지고 당신의 뜻을 선포하는 선언인 것입니다.
산상설교(진복팔단)의 각 귀절은 똑같은 문장형식으로 되어 있는데, 여기에 "행복하여라, ( ) 사람들!"이라는 표현은 감탄문에 속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 말마디는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행복하여라, (어떠 어떠한) 사람들!" ... 에서 그렇게 했을 때 장차 미래에 그러한 축복이 온다는 의미만이 아니라, 그 축복은 그렇게 하는 순간 이미 시작되어서 장차 하느님 앞에 갔을 때 그 축복이 완성된다는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복팔단의 가르침은 그 자체가 신앙인의 기쁨과 감격적인 즐거움은 현실에서부터 누리게 되는 것을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명심할 것은 세상이나 인간이 주는 기쁨은 있다가도 없어지고, 얻었다가도 잃어 버릴 수 있고, 건강이나 사소한 날씨에도 변화되고 잃어 버리지만, 신앙인이 갖는 기쁨은 깊고도 조용하며, 아무도 어느 경우에도 빼앗을 수 없는 기쁨이라고 요한복음 16,22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예수와 함께 생활하는 자만이 누릴 수 있는 기쁨인 것입니다. 우리는 신앙인으로서 그 축복을 바라기는 하지만, 그것을 누리기 위해 어떻게 생활 하는가? 하느님 나라의 축복의 핵심요지는 무엇인지? 생활 속에서 자주 묵상하며, 기쁨을 체험하도록 합시다. 아멘.................◆
[말씀자료 : 두올 / 편집 : 까따꿈바 묵상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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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나와 함께하는 묵상> : † 성경에서 말하는 두 가지 축복
성경에서 전하는 하느님의 축복에는 크게 나누어 두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보이는 축복이 있고, 보이지 않는 축복'이 있습니다. 보이는 축복을 물질적 축복이라고 하며, 보이지 않는 축복을 영적 축복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것을 신약과 구약의 경우에 결부시켜 구약적 축복은 물질적 축복이요, 신약적 축복은 영적 축복이라고 흔히들 말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성경에 나오는 축복관에 오해와 혼돈을 가져올 수 있습니다. 과연 신약과 구약의 축복을 구별해야 하는 것이냐? 축복의 성경적 개념이 신약에 와서 달라졌느냐는 문제는 우리의 실생활에 중대한 문제인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과연 구약과 신약에 있어서 축복에 대한 개념을 달리하셨느냐는 것입니다. 우리가 먼저 알아야 할 일은 구약에는 물질적 축복에 관한 말씀이 많은 반면에 신약에는 그런 말씀이 별로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며 그런 면에서 이같은 오해가 오게 된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I. 성경에 기록된 축복관
1. 신약적 축복관
신약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인의 구원이 이루어진 사실을 주목적으로 하여 기록된 책입니다. 속죄, 구원, 새로 태어남, 부활, 회개, 생명, 천국 등 이 모든 것들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받을 수 있는 놀라운 축복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 축복은 이 땅에서 우리가 누리는 그 어떤 물질적 축복에 비해 우선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약에 와서 그 가치 면에서 언제나 영적 축복이 앞서기 때문에 물질적 축복의 가치가 상대적으로 숨겨지게 된 것입니다.
2. 하느님의 축복의 원리
우리는 성경에서 우리가 누리는 모든 축복이 어디서 오느냐는 문제에 대해서 그것들이 하느님으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현세적인 물질의 축복도 그리고 우리의 생명을 약속하는 영적 축복도 구약이나 신약이나 변함없이 하느님께서 그의 백성들에게 주신다는 사실에 대해 바른 이해를 가져야 할 것입니다.
(1) 구약의 원리
우리가 구약의 경우를 보면 축복장이라고 말하는 신명기 28장 1-2절에서 밝혀 주시기를 "너희가 만일 너희 하느님 야훼께서 하신 말씀을 귀담아들어, 내가 너희에게 내리는 그의 모든 명령을 성심껏 실천하면, 너희 하느님 야훼께서는 땅 위에 사는 만백성 위에 너희를 높여주실 것이다.너희 주 하느님의 말씀을 순종하기만 하면 다음과 같은 온갖 복이 너희를 사로잡을 것이다."'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또한 신명기 28,8에서도 "야훼께서 명령을 내리시면 너희 창고와 너희가 손을 대는 모든 일에 복이 넘치리라. 이렇게 너희 하느님 야훼께서 너희에게 주신 땅에서 너희는 복을 받을 것이다."라고 분명히 선언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에서 하느님께서 어떤 사람들에게 현세적인 축복을 주시느냐에 대한 분명한 해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성심껏 듣고 실천하는 자, 즉 하느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자들에게 주신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 대신 불순종하는 자에게는 "너희가 너희 하느님 야훼께서 하신 말씀을 듣지 않고 내가 오늘 너희에게 지시하는 그의 모든 계명과 규정을 성심껏 실천하지 않는다면 다음과 같은 온갖 저주가 너희를 사로잡을 것이다."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2) 신약의 원리
신약에 와서 이같은 하느님의 축복의 원리가 변질된 것이냐? 아닙니다. 먼저 산상설교에서 하신 말씀을 보면 "너희는 어찌하여 그렇게도 믿음이 약하냐? 오늘 피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질 들꽃도 하느님께서 이처럼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야 얼마나 더 잘 입히시겠느냐? 그러므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또 무엇을 입을까 하고 걱정하지 마라."(마태 6,30-31)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베푸시는 물질적 축복에 대한 원리를 신약적인 입장에서 밝혀 주신 것입니다.
3. 산상설교에서 축복의 의미
주님께서 산상설교에서 밝히신 축복은 신약시대에만 통하는 특별한 복이 아닙니다. 팔복의 마지막 부분인 하늘의 상에 대하여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받을 큰 상이 하늘에 마련되어 있다. 옛 예언자들도 너희에 앞서 같은 박해를 받았다."(마태 5,12)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곳에서 세상에서 누리는 일반적인 복을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하늘나라에 함께 할 수 있고 하늘에서 큰상을 받을 수 있는 인간 최대의 축복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축복이 헬라어로는 '마카리오스'로 표현되어 있는데 현세에서 누리는 복인 '유다이몬'과는 염격한 의미에서 구별되는 것입니다.
이상의 설명에서 보다시피 하느님의 축복은 신약이나 구약이나 구별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즉 성서에서 말씀하시는 하느님의 축복은 인간이 하느님을 순종함으로써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해 드리는데 기인하고 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받을 수 있는 약속된 축복은 속죄와 영원한 생명과 하늘나라의 터전입니다.
다음에 이같은 말씀에 순종하는 생활의 결과로 우리가 하느님으로부터 약속된 물질적인 축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사실은 하느님으로부터 참으로 복을 받을 사람들은 그의 생활 태도나 마음의 방향이 물질에 두지 않고 있으며, 그 축복은 그의 올바른 생활의 결과에서 오는 열매라는 사실입니다.
II. 그리스도 신자들의 생활 자세와 사명
우리는 앞에서 복의 근원과 복의 종류에 대해서 묵상했습니다. 그러면 산상설교에서 전하는 진복팔단에 대해서 자세히 묵상해 볼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산상설교는 팔복에 대한 기록으로서, 주님께서는 이를 통해서 ①복 있는 자의 조건과 ②참 복의 내용에 대해서 말씀해 주셨다고 설명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진복팔단이 모두 지상의 일시적 물질과 명예와 쾌락에 관계된 것이 아니라, 내세의 하늘나라의 영원한 행복과 관련된 사실임도 이미 학습한바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산상설교에서 말씀하는 행복의 조건은 하느님을 향한 성실한 성도의 신앙 자세를, 그 결과로서 영원한 하늘나라의 기쁨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또한 내세의 하늘나라의 축복과 함께, 현세에도 깊은 연관이 되어 있습니다. 즉 지금 이 땅(현세)에서도 영적으로 그 하늘나라에 동참하고 있듯이, 이 진복판단은 이 땅에서도 영적으로 향유할 수 있는 축복임을 선언하고 계심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런 축복을 받기 위한 성도들의 자세는 무엇인가요?
디모데오2서 4,7-8에서 사도 바오로는 "나는 훌륭하게 싸웠고 달릴 길을 다 달렸으며 믿음을 지켰습니다. 이제는 정의의 월계관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뿐입니다. 그날에 정의의 재판장이신 주님께서 그 월계관을 나에게 주실 것이며, 나에게뿐만 아니라, 다시 오실 주님을 사모하는 모든 사람에게도 주실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산상설교가 주는 좁은 문,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을 달려서 순교의 믿음, 산상설교의 삶, 그리고 교회개혁을 위해서 자신의 사명을 다했습니다. 우리도 그런 모범을 묵상하며 오늘 우리들의 사명도 함께 학습해 보겠습니다.
1. 산상설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참 제자가 되는 길
예수 그리스도께서는33년의 생애를 통하여 모범으로 보여 주신 하느님의 뜻을 이루는 삶, 온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 같이 사랑하는 삶을 사는 길을 산상수훈에서 집약적으로 철저하게 가르치십니다. 그분께서는 많은 사람들이 아니라 소수의 제자들에게 이 산상수훈을 주셨습니다. 산상수훈은 예수 그리스도의 참 제자가 되는 길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의 집약이요, 정수인 산상설교를 우리가 어떻게 받아드리는가는 우리가 과연 예수의 참 제자인가를 판단하는 시금석이라 하겠습니다. 산상설교처럼 우리를 복음과 은총으로 인도하는 것은 없습니다. 우리의 존재가 전혀 새로운 존재가 되지 않고서는 산상설교의 삶을 살 수가 없는데 그 새로운 존재는 성령으로 거듭난 영적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성령으로 새로 태어나고, 하느님의 은총으로 예수를 구세주로 영접한 자만이 누릴 수 있는 복음의 능력으로서만 가능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이 능력 있는 삶이 되려면, 산상설교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산상설교는 하느님께서 주시는 진정한 복이 무엇인지를 말씀하시며 그러한 참복을 받는 비결을 가르쳐 줍니다. 하늘나라가 무엇이며 하늘나라 백성이 어떤 성품을 가지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쳐 줍니다.
2. 산상설교는 교회 개혁과 복음 부흥의 길
산상설교는 한국의 많은 교회와 신자들이 빠져있는 돈(재물) 사랑이 하느님을 미워하는 일임을 가르쳐 줍니다. 그리고 많은 한국 교회와 한국의 신자들이 하느님을 미워하고 돈을 사랑하는 영적 간음을 범하고 있음을 깨닫게 해줍니다. 교회개혁은 돈, 명예, 권력 사랑을 버리고 하느님을 사랑하는 일 입니다. 주님께서는“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라고 말씀하십니다. 산상설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신 새 계명을 지키는 길을 구체적으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개혁과 복음 부흥의 비결이 산상설교에 있습니다. 교회가 선교, 봉사, 친교 등을 위한 프로그램을 실시하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프로그램들이 교회와 신자들이 소금과 빛의 삶을 살도록, 복음을 온전하게 깨우치는 일에 우선할 수는 없습니다. 착한 행실이 없는 선교와 봉사는 불쌍한 영혼들을 주님 앞으로 인도할 수 없고, 육신을 쫓아 사는 교인들 간의 친교는 교회가 더욱 세상을 닮아가도록 만드는 촉매제가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산상설교적 삶을 사는 우리의 삶을 보고 세상이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게 된다면, 교회개혁은 끊임없이 이루어지고 복음은 계속적으로 부흥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3. 산상설교의 삶을 살 수 없다는 생각은 매우 위험한 생각
산상설교는 최고의 도덕률로서 예수 그리스도 밖에는 아무도 지킬 수 없으니 아예 지킬 염두도 내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산상설교의 삶을 살기를 애쓰자고 권고하는 신자를 행위로 구원을 얻으려고 하는 이단이라고 판단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삶으로 보여주신 주님의 새 계명을 지키는 길을 구체적으로 철저하게 가르쳐 주신 산상설교의 삶을 살자는 신자를 이단이라고 한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대로 살 수도 없으니 그러한 삶을 살려고 애쓰지도 말아야 한다는 생각은 어떠한 생각일까요?
저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신 산상수훈이므로, 우리도 산상설교의 삶을 살 수 있다고 믿습니다. 우리가 성령으로 새로 태어나고 성령님께서 내 안에 함께하시어 우리를 인도하고 계시는데, 같은 성령의 능력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신 삶을 왜 우리가 살 수 없단 말씀입니까? 새로 태어난 신자들이 산상수훈을 살아갈 수 없다는 생각은 성령 하느님의 능력을 제한하고 축소하는, 그리고 많은 영혼을 넓은 문, 즉 욕정의 세계로 인도할 수 있는 매우 위험한 생각입니다.
4.. 산상설교의 삶은 삶 속의 수도, 순교
그리스도교는 순교자의 피를 영양분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참 제자들의 산상설교의 삶을 수분으로 성장해 왔습니다. 순교는 죽음으로 목숨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는 일이요, 산상설교의 삶은 삶으로 목숨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는 일입니다.
나는 그리스도교 역사상 무수한 신자들이 산상설교의 삶을 살았다고 생각합니다. 스테파노를 비롯한 초대교회의 순교자들, 카타콤바의 지하 굴 속에서 공생공사 했던 초대 교회의 신자들, 베드로와 바오로를 비롯한 사도들과 성서의 기자들, 성화가 필요없다는 사탄의 거짓에 속지 말라고 경계하면서 경건한 삶의 모범을 보였던 알지 못하는 수없이 많은 분들이 산상설교적 삶을 살았다고 생각합니다.
대원군의 박해, 신사참배, 무신론의 공산주의에 분연히 맞서 순교한 우리나라의 순교자들은 얼마나 많습니까. 이 모든 순교성인들도 산상설교적 삶을 살다간 예수 그리스도의 참 제자라고 생각합니다. 마호메트(모슬렘) 국가나 힌두교 국가에서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만으로 갖은 박해를 받으며 산상설교적 삶을 살아가고 있으며, 조국의 북녘 땅에서도 수 많은 신자들이 지금 이 순간에도 지하에서 산상설교적 삶을 살아가고 있음을 기억해야겠습니다.
순교자들이 제 정신으로 순교할 수 있습니까? 오직 성령님의 인도에 순종하기 때문입니다. 성령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참 제자들에게 순교할 수 있는 믿음과 능력을 주십니다. 스테파노의 순교현장에서의 신앙고백은 주님의 무한한 사랑과 성령의 인도하심과 능력 주심을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제 정신으로 산상설교의 삶을 살 수 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성령의 보호와 인도하심에 순종할 때 우리는 산상설교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성령님께서 우리들에게 산상설교적 삶으로 살아갈 수 있는 믿음과 능력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성령이 충만할 때 우리는 산상설교의 삶을 살 수 있다고 믿습니다.
창조의 능력을 지닌 하느님의 말씀의 진수인 산상설교를 매일 기도하고 묵상하면, 그 말씀의 창조적 능력이 성령님의 협조하심과 더불어 우리가 산상설교적 삶으로 살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예수 그리스도의 참 제자로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참 제자로 매일 새로 태어나서 매일 같이 하느님을 죽도록 사랑하여, 산상설교의 삶을 살아 갑시다, 하느님께 영광 돌려드리는 삶을 사는 것보다 하느님을 더 기쁘게 해드리는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5. 산상설교의 삶으로 교회의 소금과 빛이 된다면
이 글을 함께 묵상하는 그리스도인 여러분, 순교의 믿음으로, 순교의 소망으로 그리고 순교를 마다하지 않는 하느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산상설교의 삶을 살아갑시다. 육신의 눈으로 보면 그 길은 먼고 험난한 길이나, 믿음의 눈으로 보면 그 길은 가깝고 평탄한 길입니다. 그 길은 우리의 영생을 확실하게 해주고, 영적 순결의 회복을 통하여 한국 교회의 개혁을 이룩하며, 복음을 부흥시켜 한국 사회를 개혁할 수 있는 확실한 길입니다.
마태 10,39 : "자기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잃을 것이며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얻을 것이다." 마태 16,25 : "제 목숨을 살리려고 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며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얻을 것이다."
목숨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면서 주님을 위하여 살고 주님을 위하여 죽는 순교의 믿음을 가진 우리들에게 하느님께서는 산상수훈의 삶을 살아갈 성령충만의 능력을 반드시 주실 것입니다. 지금 이 글을 읽고 계시는 형제 또는 자매님은 주님께서 당신의 참 제자로 선정하신 한국의 신실한 그리스도인 중의 한 분이심이 틀림 없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일반 신자들에게는 무거운 영적 부담감을 줄 수 있는 이 글을 여기까지 읽으실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 글을 읽고 계신 형제 또는 자매님께서 산상설교의 삶을 살기로 결단하신다면, 한국 가톨릭 교회의 개혁과 복음부흥, 성령쇄신은 가까운 장래에 반드시 이루어질 것입니다. 형제 또는 자매님의 기도가 하늘에 계신 임금님의 옥좌를 움직일 것이며, 형제 또는 자매님이 한국 가톨릭 교회의 소금과 빛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태오 7,13-14 : " 좁은 문으로 들어가거라. 멸망에 이르는 문은 크고 또 그 길이 넓어서 그리로 가는 사람이 많지만, 생명에 이르는 문은 좁고 또 그 길이 험해서 그리로 찾아드는 사람이 적다."..........◆
[말씀편집 : 까따꿈바 묵상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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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가와 함께하는 묵상> : † 행복은 마음의 영이 가난함에서 시작된다
오늘은 연중 제10주간 첫날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우리에 참복을 내려주시는 날이기도 합니다. 다른 어떤 내용보다도 그리스도교의 중심에 서 있는 오늘 산상수훈은 우리 신앙인에게 많은 묵상거리를 제공하기도 합니다.
마태오 사가가 전하는 산상설교는 성경 전체, 나아가 세계 문화 전체를 통틀어 하느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 사이에 있어야 할 가장 완벽한 수준의 윤리 체계를 보여 주는 수훈입니다. 마태오 사가는 예수께서 공생활 전기간에 걸쳐 행하신 여러 강론(discourse)를 5부분으로 나누었는데, 산상 설교는 그 첫 부분입니다.
한편 산상 설교가 갈릴래아 지방의 어느 한 산상에서 행해진 예수님의 설교 전문 그대로인지 아니면 마태오가 다른 여러 기회에 예수께서 나누어 하신 말씀까지 함께 편집 구성하였는지에 대해서는 각각 견해가 다르나, 예수님은 여기 기록된 내용 그대로의 산상 설교를 하셨고 유사한 내용으로 다른 기회에도 자주 설교하셨다고 보는 것이 가장 지지받는 학설입니다. 그러나 오늘복음의 산상설교가 예수님의 설교 내용을 토씨 하나까지 그대로 옮겼다는 뜻은 아닙니다. 마태오가 예수의 어록을 집성하면서 핵심 부분만을 정리 게재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그러면 묵상을 시작하면서 오늘복음에서 전하는 '산상설교'의 신앙적 의미를 먼저 묵상하겠습니다. 산상설교 중 팔복에 대한 기록을 분석해 보면, 예수께서는 이 설교를 통해서 ① 복 있는 자의 조건과 ② 참 복의 내용에 대해서 말씀해 주셨습니다.....여기서 우리는 8복이 모두 지상의 일시적 물질과 명예와 쾌락에 관계된 것이 아니라 종말론적 영원한 행복과 관련된 사실임을 깊이 묵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다시말하면 행복의 일부가 아니라 행복 자체를 다루고 있는 이 팔복은 그 조건으로 하느님을 향한 성실한 성도의 신앙 자세를, 그 결과로서 영원한 하늘나라의 기쁨을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편 우리는 하늘나라가 비록 종말론적이기는 하나, 영적으로 지금 이 땅에서도 그 하늘나라에 동참하고 있듯이 이 팔복도 이땅에서 오늘날 영적으로 향유할 수 있는, 또 해야 하는 것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예수님의 산상설교와 같은 영적생활에 매우 멀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영적 부유보다는 물적 풍요에 대해 너무 집착하고 있습니다. 다시말하면 물적기준에 의한 행복과 불행의 문제, 그리고 가난과 부유의 문제 등에 대해 매우 민감하게 생각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과연 어떻게 사는 것이 참 그리스도인의 길인지?
오늘복음에서는 적어도 물적기준에 관련해서 복을 말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 그렇다면 우리가 무엇을 믿고, 무엇을 바라며 어떻게 해야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지에 대해 고민해야 합니다. 바로 오늘복음을 깊이 고민하며 받아들여야 합니다. 또 오늘 복음의 가르침대로 살았던 사람들이 지금 어디서 어떠한 행복을 누리고 있는지를 잘 살펴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그리스도교인들의 가장 위대한 행복은 우리가 오늘 묵상하는 이 진복팔단 속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매우 혁명적이며 역설적이고 도전적인 조건이 우리 크리스챤의 행복의 원천이라고 주님께서는 엄숙하게 천명하고 계십니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대부분 세상 사람들이 싫어하거나 어렵게 생각하는 것들인데, 여기에 주님께서는 하늘나라와 온 땅을 걸고 행복을 약속하십니다. 참으로 받아들이기 어렵고 믿기 어려운 행복의 조건들입니다. 그러나 이 행복은 세계의 모든 종교와도 통하는 진정한 행복의 조건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 행복은 먼 훗날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그 조건을 채울 때 즉시 이루어진다는 것으로도 주님께서는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다시말하면 오늘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참된 행복의 비결은 장차 누릴 것일 뿐 아니라, 지금 여기서 누리게 된다는 어조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우리 모두가 진정 행복해지기를 바란다면 바로 실천에 옮겨야 할 것입니다.
그 첫 번째 행복의 조건이 "마음으로 가난한 사람"이 되라는 조건입니다. 이 마음의 가난이란 것은 다음에 나오는 모든 행복의 첫째 조건이고 기본적인 조건이며 전체적인 조건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마음으로 가난한 사람은 하늘나라의 주인이 된다는 선언을 하시고 계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마음의 가난이 무엇인지를 구체적으로 묵상하고 주님께서 말씀하신 가난의 의미를 잘 알아야 할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가난이란 말은 부유함의 반대가 아닙니다. 즉 돈이 없고 집이 없고 가진 것이 없는 것을 가난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마음의 가난이란 재물이나 권력이나 명예 등에 대한 욕심에서의 초탈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재물적으로는 풍족하더라도 마음은 항상 근검하는 마음을 말합니다. 모든 것은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것이며, 원래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돌아 가야 할 인간의 근본을 깨닫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시지 않으면 아무것도 자기가 마음대로 소유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을 줄 알고 하느님께 감사하며 하느님의 은혜로 생각할 줄 아는 마음이 진정한 가난입니다.
한 마디로 마음을 비우는 자세를 말합니다. 마음을 비우면 자연히 겸손해집니다. 마음을 비우면 욕심이 없어집니다. 마음을 비우면 분노도 질투도 그 어떤 잡념도 있을 수 없습니다. 하느님 앞에 겸허히 무릎을 꿇고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라는 진솔한 고백을 할 수 있는 자세가 진정한 마음의 가난입니다.
예수께서는 결코 깡통을 차고 빈민굴에서 하루하루 얻어먹는 생활을 축복해주신 것이 아닙니다. 빈곤은 축복이 아니라 때로는 나태와 게으름의 자업자득일 수 있다는 것도 배제해서는 안 됩니다. 빈곤 그 자체가 축복이 아니라, 마음의 영의 가난 즉 마음을 비우는 것이 축복이라는 말은 우리 그리스도교의 절대적인 최고의 행복 헌장이며 그리스도교의 핵심입니다. 또한 그리스도인의 생활윤리의 기준입니다.
둘째는 "애통해 하는 사람"에게 행복을 선언하셨습니다. 역시 그 자체로는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슬퍼하는 사람에게 행복을 선언하신 이유를 알아야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슬퍼하는 사람은 자기 죄와 이웃의 죄, 그리고 세상의 죄악에 대해서 슬퍼하고 통회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동시에 이웃의 고통을 보고 마음 아파할 줄 알고 동정을 할 줄 아는 마음을 말합니다. 진정 울어야 할 일은 자비로우신 하느님 아버지의 마음을 상하게 해 드린 것에 대한 참회의 눈물입니다. 세상의 부정과 부패, 비리와 부조리, 패륜 등을 보고 가슴 아파 하며, 하느님께서 마음 상해하실까 걱정하고 애통해 하는 것이 진정한 행복을 아는 이의 눈물입니다.
지면 관계로 진복 8단 모두를 다 해설할 수는 없지만 모든 진정한 행복은 세상 사람들이 마음속으로는 좋아하면서도 실제 행동으로는 그리 쉽게 실천하지 못하는 가히 혁명적이며 도전적인 삶에서 나오는 것들입니다. 이를테면 제3행복의 조건인 온유함이 그렇고, 제4행복의 조건인 정의가 그렇고, 제5행복의 조건인 자비, 제6행복의 조건인 마음의 청결, 제7행복의 조건인 평화 제일주의, 제8행복의 조건인 정의에 대한 박해의 각오 등이 다 그렇습니다.(자세한 묵상은 까따꿈바묵상회 까페의 복음란 참조)
이렇게 진복 8단을 분석을 해보면 우리가 왜 행복하지 못한지를 알 수 있고 또 이것은 어느 한 순간에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죽을 때까지 부단히 노력하며 닦아 나아가야 할 가장 아름답고 숭고한 덕목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진복8단 제1장에서 제시하고 있는바 최고 최대의 행복의 조건은 마음의 가난 즉 마음을 비우는데서 시작되는 것이다. 마음이 온갖 탐욕과 교만과 이기심으로 가득 차 있으면 그 어떤 경우에도 행복할 수 없습니다. 세상이 주는 행복은 모두가 너무나 짧고 허망한 것이지만 마음의 비움을 통해서 얻는 행복은 영원한 행복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말씀편집 : 까따꿈바 묵상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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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마음을 비우면 자연히 겸손해집니다.......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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