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불암과 육영수여사 ✴
수사반장이 한창 인기리에 방영될 당시, 이날도 수사반장이 끝나고 잠시 후 최불암
집에 한 통의 전화가 글려옵니다.
최불암 부인이 전화를 받더니 최불암을 향해 "여보, 전화 받아요!"
"누군데?" “부속실이라고 하는 것 같은데 잘 모르겠어요!"
최불암이 전화를 받으니, "안녕하세요? 최불암씨, 저 육영수입니다."
"예, 누구라고요?" "저, 청와대 육영수입니다." 이 소리를 듣고 최불암이 갑자기 벌떡 일어나면서 "아, 예! 안녕하세요? 저, 저! 최불암입니다!"
"최불암씨, 수사반장 잘 보고 있습니다. 이 양반도 이 프로를 꼭 보시는데, 최불암씨가 담배를 피우는 장면만 나오면, 이 양반도 꼭 담배를 피우시는데 어디 이 양반뿐이겠습니까?"
"전국으로 생각할 때 엄청난 숫자가 아니겠습니까? 국민건강을 생각할 때 담배피우는 장면을 줄이거나 없앨 수는 없을까요?"
"예, 잘 알겠습니다. 제작진하고 상의토록 하겠습니다!"
육여사의 이러한 제안을 한 이후 지금까지 어느 드라마에도 담배피우는 장면이 사라졌다고 합니다. 나훈아가 말한 것처럼 국민을 위해 목숨을 거는 대통령은 없어도 국민건강까지 생각하는 영부인은 있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라 생각이 듭니다.
위의 내용은 오래전에 최불암이 어느 라디오 프로에 나와서 말한 내용을 옮겨 보았습니다.
♤ 겪어보면 안다.
◑ 굶어 보면 안다. 밥이 하늘인 걸
◑목마름에 지쳐 보면 안다. 물이 생명인 걸
◑코 막히면 안다. 숨 쉬는 것도 행복 인 걸
◑일없이 놀아 보면 안다. 일터가 낙원인 걸
◑아파 보면 안다. 건강이 엄청 큰 재산인 걸
◑잃은 뒤에 안다. 그것이 참 소중한 걸
◑이별 하면 안다. 그 이가 천사인 걸
◑지나 보면 안다. 고통이 추억인 걸
◑불행해 지면 안다. 아주 작은 것이 행복인 걸
◑죽음이 닥치면 안다. 내가 세상의 주인인 걸
◑추위에 떨어 보면 안다. 태양이 얼마나 따뜻한 걸
◑몰라서 쩔쩔 매 보면 안다. 배움이 얼마나 중요한 걸
◑어려움을 닥쳐 보면 안다. 경험이 소중하다는 걸
◑나이를 먹어 보면 안다. 젊음이 소중 하다는 걸
◑우리들 삶에 지표가 될. 인생 설명 내역서입니다.
겪어 보기 전에 깨달았으면 행복한 삶이였겠지만,
지금 부터라도 머리 속에 새겨서 남은 인생 멋지게 살아요.
-받은 메일 공유-
♥[ 말씨 ,말씀 ,말투 ]
등산모임이 있는 날에 한 친구가 나오지 못했습니다. 손자를 봐야 한답니다.
그 사정을 모를 리 없지만 유독 한 친구가 버럭 소리를 냅니다.
“그 친구 왜 그리 살아 그러니 허구한 날 붙잡혀 살지"
그러자 다른 친구가 “자넨 손자가 지방에 있지 옆에 있어봐 똑 같아”
손자 양육이 논쟁으로 커집니다.
“난 처음부터 선언했어, 내가 애를 보면 성을 간다고!”
‘못 생긴 남자와는 절대 결혼 않는다’는 처녀! ‘난 죽어도 요양원에는 안 간다’고 한 선배!
‘딱 100세만 살 거야 호언했던 대학 동기...
그런데 어쩌나, 다 헛맹세가 됐으니까요. 여자는 못 생긴 남자와 천생연분을 맺고,
선배는 치매가 들어 일찌감치 요양원으로 향했지요.
100세를 장담할 만큼 건강했던 친구는 아홉수에 걸려 69세에 심장마비로 떠났습니다.
나이 들며 갖춰야 할 덕목이‘절제’입니다.
삶에 고루 적용되는 말이지만 여기에는 ‘조심’하라는 뜻이 있지요. 무엇보다 ‘말조심’하라는 것입니다. 듣는 귀가 둘인데 비해 말하는 입은 하나뿐인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우리가 수 없이 내뱉는 말에는 사람을 살리는 말도 있지만 죽이는 말도 많습니다.
같은 말인데도 누구는 복이 되는 말을 하고 누구는 독이 되는 말을 합니다.
황창연 신부가 말하는 말의 세 부류도 같습니다.
말씨, 말씀, 말투가 그것이죠!! 씨를 뿌리는 사람(말씨)!
기분 좋게 전하는 사람(말씀)! 말을 던지는 사람(말투)이 있는 것처럼
말에도 등급이 있습니다. 말씀은 말과 다릅니다.
어떤 분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도 저렇게 살아야겠다고 다짐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같이 감동을 전하는 사람의 말을 말씀이라 하지요.
말로 좋은 씨를 뿌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초등생 어린이에게 “씩씩하고 멋지구나. 넌 장군감이다.”
“넌 말을 잘하니 변호사가 되겠구나."
이렇듯 말에 복을 담는 습관이 필요합니다.
좋은 언어 습관은 말씨를 잘 뿌리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지하철에서 중년 여인이 경로석에 앉은 할머니에게 말을 건넵니다.
“어쩜 그렇게 곱게 늙으셨어요?” 그런데 할머니는 시큰둥한 표정입니다.
다음 역에서 아주머니가 내리기 무섭게... “그냥 고우네요 하면 좋잖아. 늙은 거 누가 몰라.” 듣고 보니 그렇기도 하네요.
프랑스 작가 장자크 상페는 자신의 책 ‘뉴욕 스케치’에서 뉴요커들의 긍정적인 말버릇을 관찰했습니다.
그들은 빤한 얘기인데도 습관처럼 상대의 말꼬리에 감탄사(!)를 붙이고 물음표(?)를 달아줍니다. 이는 내 말에 관심을 갖는다는 표시로 받아들여지고 서로의 삶과 이야기를 격려해주는 말 효과를 높입니다.
이를테면, 누가 “이번에 터어키를 다녀왔어요. 너무 좋았어요.”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옆에서 “좋은 곳이죠. 나는 두 번 가봤어요.” 이렇게 말을 받으면 일단 주춤하게 됩니다.
이럴 때 뉴요커들은 자기 경험을 내세우지 않고 “정말요? 어머, 좋았겠다.!”
“일정은 어땠어요?” 말머리를 계속 상대에게 돌려줍니다.
얼쑤 같은 추임새로 상대를 신나게 해주는 뉴요커의 말 습관이 좋아 보이는 이유입니다.
우리는 느낌표와 물음표를 얼마나 사용하나요.
자기를 앞세운 대화를 하게 되면 상대의 말에 이러한 부호를 찍어주기가 어려워집니다.
오늘도 내가 한 말을 돌아보면서 느낌표와 물음표가 인색했음을 깨닫습니다.
내 말에 감탄하며 나의 감정과 안부를 물어주는 사람만큼 귀한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말이란? 닦을수록 빛나고 향기가 납니다.
말할 때도 역지사지(易地思之)가 필요합니다.
말을 나눌 때는 상대방의 입장을 늘 염두에 두라고 합니다.
적어도 失言(실언)이나 虛言(허언) 같은 말실수는 막아야 하니까요?
그러면 덤으로 얻는 것도 있습니다.
“어쩌면 그리 말을 예쁘게 하세요.” “복 들어올 말만 하시네요.”
♡ 행복한 하루 되십시오.💕
***-한 가정이 해체 되는 모습을 보며-
내가 사는 아파트 같은 라인의 32층에 서울대 농대 학장을 역임한 오ㅇㅇ이란 교수님 이 살고 있었다. 19년 전 처음 신규 입주할 때부터 함께 입주한 분이라 엘리베이터 등에서 만나면 서로 인사하며 간단한 대화도 나누곤 했다.
당시 나는 60대 초반을 갓 넘긴 초로였고 그분은 77세라고 하셨던 것 같다.
항상 웃음기가 가시지 않고 정정해 보였다. 마나님과 함께 단지 내 산책을 자주하고 두 분이 손잡고 외출하는 모습 자주 보였다. 나와 같은 교회에 다녔는데 매주 주일날이면 어느 대학 교수라는 사위가 와서 픽업을 해 모시고 다녔다.
그런데 한 7년 전 쯤에 마나님이 돌아 가셔서 비교적 넓은 집에서 홀로 사시는 것 같았다.
여전히 주일날이면 사위와 딸이 픽업하여 함께 예배를 드리고 갔다. 수원에 산다는 아들은 어쩌다 찾아와 함께 외출하는 모습을 한 번 본 것 같다. 그런데 언제쯤인가 사위가 보이지 않아 궁금했는데 그 사위가 세상을 떠났다는 것이다.
할아버지가 혼자서 아파트 단지를 천천히 거니는 쓸쓸한 모습을 보며 인생 마지막의 행로가 누구에게나 다 저런 모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참 안쓰러운 모습이었다. 우리 인생의 말년은 다 저렇겠지!
그런데 한 두어 달 전부터 오학장 할아버지가 눈에 띄지가 않아 가벼운 궁금증이 들기는 했지만 남의 일이라 그냥 잊고 있었다. 근데 어제는 우리 라인의 주차장에 책이 가득 찬 왠 커다란 '탑'차가 보여 직감적으로 오교수님의 책들이 아닌가 하는 생각과 함께 혹시?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오늘 오전에 집사람이 쓰레기를 버리려 내려갔더니- 아주 고급스런 책장들을 비롯한 꽤나 비싸 보이는 가구들이 한 살림 한가득 나와 있더라는 거다. 값께나 나갈 만한 서양화와 액자들 그리고 오교수의 박사학위 학위모를 쓰고 찍은 사진과 가족사진들이 널브러져 있더라는 거다.
가구들은 중고 가구점에 연락하면 헐값에라도 얼씨구 하고 가져 갈만한 고급품이고 오교수 사진들과 가족사진들은 다 태워버리지 않고- 왜 저리 내다버렸는지 자식들이 욕먹을 것 같더란다.
금년 95세로 서울 농대 학장까지 지내 분이라 세상을 아쉬움 없이 빛나게 살다가셨지만- 인생의 끝은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누구에게나 다 저렇게 쓸쓸히 허망히다 버리고 가는구나하는 생각이 새삼스럽다.
내가 여기서 주제로 하고 싶은 말은 어느 노교수의 죽음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인생 끝의 모습! 한 가정이 자연스레 解體되는 모습을 말하고 싶어서다.
젊은 시절 나도 그랬다! 우리도 그랬다! 한참 자식들이 태어나 자랄 때 식구들이 모여 웃고 울고 떠들고 먹으며 집안이 시끌적하게 들썩거리던 기쁨! 그 사랑!
좀 더 고급스러운 가구들로 꾸며 놓고 만족해하던 시절-
자식들 공부 잘해 가슴 뿌듯해 하고 공부 못해 가슴 조이던 시절-
세월 따라 그런 오붓한 시절은 점차 사라지고 자식들은 제각기 자기 일, 자기 가정을 찾아 뿔뿔 흩어지고 기둥 같던 엄마 아빠는 병들어 쇠잔해지고 앞서거니 뒷서거니 세상을 떠나면
그 가정은 허물어지듯 해체 돼 버린다는 사실!
그 사실 그 사정이 지금 내 앞에도 직면해 있다는 것이다. 비단 내 이웃에 살던 오 교수의 문제가 아니고 바로 나의 현실로 내 코앞에 놓여 있다는 사실은 회피할 수가 없다. 하나하나 정리해야 하는데 아직도 붙들고 있는 것이 많은 것 같다.
책이며 옷이며 가구들이며 모든 것이 한낱 쓰레기가 될 것인데- 젊은 시절 읽던 책들 더러는 읽지도 않고 허영으로 모은 것도 있고 내가 아껴 입던 옷들 드라이 크리닝 해 놓은 채 비닐 커버를 쓰고 있는 입지 않은 옷들- 필요 없이 찎은 사진들- 나름 욕심내서 산 가구들-
이 "브라운 톤 오크 가구들"은 아무리 비싼 것이라도 요즘 애들은 트랜드에 맞지 않으니 그냥 버리라고 한다.
넘 아깝지만- 아! 그런데 아까운 것이 어디 있냐. 내가 세상 떠나면 나의 물욕과 함께 다 버려질 텐데. 결국 쓰레기가 돼버리고 말 텐데.
한낱 거품 같은, 연기 같은, 물리적인 世物에 목을 걸고 살아온 인생이여!
인생들이여! 지금이라도 늦지 않다.
반듯하게 깔끔하게 정리 정돈하자!
ㅡ옮긴 글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