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www.facebook.com/100001667031825/posts/4526096437455879/?sfnsn=mo
성경이 말하는 방언(30, 마지막 회)
사도 바울과 누가는 두 가지 종류의 방언을 말하고 있는가?
<제11장 에필로그: 결론적인 요약>
김승진 목사
한국침례신학대학교
역사신학·교회사 명예교수/철학박사
13. 오늘날에도 LT방언이 존재하는가?
필자는 오늘날에는 UT방언은 존재하지만 LT방언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사도 바울이 예언과 지식과 함께 LT방언도 그치게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고전 13:8,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아니하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여기서 사용된 방언이라는 단어는 복수형으로서 LT방언을 가리킵니다. 언젠가는 “기록된 하나님의 특별계시”(the written special revelation of God, 신약성경)가 완성될 때가 있을 텐데, 그 때에 LT방언은 “스스로 그칠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중얼중얼하는 UT방언이 그친다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교회역사 상 UT방언은 시시때때로 등장을 했고 그쳤던 적이 없었습니다. UT방언을 했던 무리들은 대체로 영적인 열광주의자들(spiritual fanatics)이거나 신비주의자들(mystics)이었는데, 이들은 교회역사 상 여러 차례 등장하기는 했지만, 대체로 정통교회로부터 이단시(異端視) 되어 정죄를 받았거나 백안시(白眼視) 되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것은 성경이 말하는 성령의 은사가 아닙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12장 8-10절에서 성령의 아홉 가지 은사들(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 믿음, 병 고치는 은사, 능력 행함, 예언함, 영들 분별함, 각종 방언 말함, 방언들 통역함)을 열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각종 방언 말함”(‘etero gene glosson, diversities of tongues-KJV, those speaking in different kinds of tongues-NIV)과 “방언들 통역함”(‘ermeneia glosson, the interpretation of tongues-KJV, NIV )에서 둘 다 LT방언을 의미하는 복수형단어를 사용했습니다. 특히 “각종 방언”에서 ‘eteros라는 형용사를 사용했습니다. 이 단어는 “본질에 있어서는 같지만 외형 상 드러난 것은 다른”이라는 뜻을 가진 allos는와는 달리, “본질에 있어서 전혀 다른”이라는 뜻입니다. 본질적으로 서로 다른 언어, 외국어, 말(language)를 가리킵니다. 누가가 사도행전 2장 4절에서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에서도 ’eteros라는 형용사를 사용했습니다(’erxanto lalein ’eterais glossais, began to speak with other tongues-KJV, began to speak in other tongues-NIV). 그러니까 사도 바울이 열거한 아홉 가지 성령의 은사들 가운데 UT방언은 없습니다.
사도행전에서 제자들이 LT방언을 말하게 된 데에는 그 당시의 독특한 시대적인 배경이 있었습니다. 오순절날에 처음 성령이 강림하고 지상에 최초의 교회가 세워졌을 때에는, 표적 구하기를 좋아했던 유대인들(고전 1:22, “유대인들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에게는 “표적”(semeion, sign)이 필요했습니다. 율법시대를 닫고 성령시대를 여는 표적을 그들이 체험할 수 있어야 했습니다. 불신자들이 “하나님의 큰 일”(행 2:11), 즉 복음의 메시지를 듣고서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도록 하기 위해서, 그래서 땅 끝까지 급속하게 복음이 증거되어 많은 교회들이 세워지도록 하기 위해서, 표적으로서의 LT방언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신약성서의 계시가 완성된(90-95년 AD) 이후, LT방언은 스스로 그치게 되었습니다.
14. 체험을 계시(하나님의 말씀인 성경)보다 앞세울 수 있는가?
오순절주의나 은사주의 계통의 성령론 신학체계는 주로 복음서들과 사도행전 등 역사서들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성령뱁티즘을 구원받은 후의 후속적 체험(subsequent experience)이나 “두번째 축복”(second blessing)으로 설명한다든지, UT방언 체험을 성령뱁티즘을 받은 증거라고 주장한다든지 하는 것은, 개인적인 체험을 계시(하나님의 말씀인 성경)보다 앞세움으로써 형성되었습니다. 성경의 문맥을 제대로 고려함이 없이 개인적인 체험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성경말씀을 왜곡해서 해석한 것입니다. 신약성경의 역사서들은 1세기 당시에 일어났던 특별한(particularized) 사건들이나 에피소드들을 기록해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서신서들은 성서기자들이 신앙적인 체험을 하고 그러한 체험을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묵상하여 교리적으로 일반화한(generalized) 신학적 진술입니다. 역사서들에 등장하는 체험들은 서신서들의 신학적 진술에 부합하는지를 면밀하게 검토해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떠나 꿈이나 환상이나 환청 등 감각적이고 신비스러운 체험을 추구하는 신앙을 가지게 되면, 마치 마약중독자가 그러하듯이 보다 더 황홀한 자극적인 체험을 갈구하게 됩니다. 오순절주의나 은사주의 체험에 심취(心趣)하다 보면 그 신앙이 주관주의(subjectivism)과 신비주의(mysticism)로 빠져들 위험이 있습니다. 이러한 신앙을 가지게 되면 객관적인 잣대인 성경보다는 사적이고 주관적인 체험에 더 큰 비중을 두게 됩니다. 체험을 좇는 신앙생활은 더 크고 더 강한 자극을 갈구하기 때문에 만족할 줄을 모릅니다.
지금은 계시가 종결된(closed revelation) 시대입니다. 이미 기록된 계시를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성령의 도우심을 힘입어 적절하게 해석하고 적용하는 일만 남아 있습니다.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은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사도들의 체험”을 가르치려고 하지 말고, 서신서들에 등장하는 “사도들의 가르침”을 체험하려고 해야 합니다.
15. 성령의 은사들의 사용에 관한 기본원리는 무엇인가?
고린도전서 13장은 사랑 장(章)이라고 불립니다. 그런데 그것이 성령의 은사들을 다루고 있는 12장과 14장 사이에 놓여 있다는 점에서, 문맥 상 13장은 은사들의 사용에 관한 기본원리를 가르쳐 주는 내용으로 읽고 해석할 필요가 있습니다. 즉 은사들은 아가페 사랑의 원리에 따라 교회공동체에 덕을 세우는 목적을 위하여 사용되어야 합니다. 아가페 사랑의 본질은 자신의 유익이 아니라 남들의 유익을 먼저 생각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것은 이기적이거나 자기중심적이지 않습니다. 그것은 자기희생적(自己犧牲的, self-sacrificial)이어야 합니다.
사실 UT방언 문제는 신약성서에 등장하는 많은 교회들 가운데 유독 고린도교회에서만 제기된 문제였습니다. 아마도 고린도 시 근처에 있던 이교신전들(아크로고린도 언덕 위에 있는 아프로디테 신전, 파르나수스 산 중턱에 있는 델파이 신전 등)에서 뜻 모를 소리로 중얼거리며 기도하던 이방인들이 있었고, 그들의 영향을 받은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교회 내에서 UT방언으로 기도하곤 했었나 봅니다. 사도 바울이 보낸 고린도전서 편지를 받고 고린도교회 내의 “UT방언” 문제와 “통역되지 않고 행한 LT방언” 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되자, 그는 이후에 썼던 다른 모든 서신들에서 성령의 은사들(gifts of the Holy Spirit)과 관련하여 더 이상 “방언”과 “방언통역”에 관해서 일절 언급을 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언급할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다른 서신서들을 썼던 다른 사도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성령은 진리의 영이요 성경기자들에게 영감을 불어넣어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하게 한 성경의 저자입니다. 거짓이나 가짜에 속지 맙시다. “영을 다 믿지 말고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는지” 분별합시다. 미혹(迷惑)의 영에 휘둘리지 말고 진리(眞理)의 영만을 따릅시다.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 즉 진리를 말해야 합니다. 신비스러운 주관적인 체험만을 추구하려고 하지 말고 객관적인 하나님의 말씀에 천착(穿鑿)합시다. 그리고 우리 모두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읍시다. (끝)
지난 1년 8개월 동안 “성경이 말하는 방언: 사도 바울과 누가는 두 가지 종류의 방언을 말하고 있는가?”를 약 30회에 걸쳐서 연재해 주신 기독교 인터넷 신문 <베리타스>(www.veritas.kr)에 감사를 드립니다. 또한 부족한 종의 글들을 읽어주신 독자분들께도 큰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감사합니다. 김승진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