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찰에서 전해지는 산하강산의 고즈넉함은 우리나라 여행에서만 느낄 수 있는 정취다. 그래서 국내 여행에서는 늘 빠지지 않고 그 지역의 사찰을 찾아간다.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산사에 앉아있으면 고군분투하는 나의 일상은 촉촉해지고 온 몸으로 퍼져 나가는 에너지의 충만함을 느낀다. 불교 문화의 영향을 깊이 받은 우리나라는 사찰 곳곳에 문화 유산의 흔적이 남아있기에 중요한 답사지지만, 그와 함께 사찰이 주는 무한한 에너지와 감동은 답사여행 못지않게 일상의 큰 기쁨이다.
• 무량사 이야기
헤아릴 수 없고 셀 수도 없다는 의미의 '무량'. 부처님의 세계는 시간, 공간이 무의미한 곳이다. 인간의 능력을 벗어나는 한계가 없는 세계가 바로 불교에서 말하는 극락의 세계다.
극락이 아니라도 인간사에서도 '무량'의 의미를 볼 수 있다. 부모님의 사랑! 셀 수도 없고 한계를 지을 수도 없는 깊은 감정, 끝이 없는 무량의 세계에 우리는 살고 있다.
무량사는 신라시대 창건된 절로 알려져있다. 보물만 해도 6개가 있는 고찰이다.
성주사를 창건한 낭혜화상 무염(801~888)이 창건했을 개연성이 높다. 우리나라 절이 다 비슷하지만 무량사 또한 국란이 있을 때마다 이동과 중창을 반복했다. 고려 고종(1213~1259)때 원나라 침공으로 지금의 위치로 옮긴 듯하며, 임진왜란 때는 불에 타 인조재위시절 진묵대사가(1563~1633)가 중창했다. 극락전은 이때 중창된 것으로 보인다. 극락전 안에 있는 보물 제 1565호인 소조아미타삼존불 발원문에 1633년에 만들었다는 문구가 적혀있으며, 괘불(보물 제1265호)에는 1627년에 그렸다는 기원이 적혀있다.
무량사 극락전(보물 제356호)은 우리나라에서는 흔치 않은 2층 목조건물의 형태다. 그 앞에는 단아한 사찰의 분위기를 완성하는 오층석탑(보물 제185호)과 석등(보물 제233호)이 자리하고 있다. 한켠에 자리한 느티나무 그늘에 있으면 만수산 자락을 배경으로 한 사찰이 참 그윽하고 아름답다. 그래서일까, 부여시에서도 바로 이곳이 포토포인트라고 친절하게 안내해주고 있다.
무량사 일주문
![백제도시, 부여(3)-김시습과 무량사 이야기2](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storage.doopedia.co.kr%2Fupload%2F_upload%2Fimage5%2Ftravel%2Feditor%2F2020%2F10%2F03%2F20201003111822445_thumb.JPG)
![백제도시, 부여(3)-김시습과 무량사 이야기3](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storage.doopedia.co.kr%2Fupload%2F_upload%2Fimage5%2Ftravel%2Feditor%2F2020%2F10%2F03%2F20201003111853686_thumb.JPG)
![백제도시, 부여(3)-김시습과 무량사 이야기4](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storage.doopedia.co.kr%2Fupload%2F_upload%2Fimage5%2Ftravel%2Feditor%2F2020%2F10%2F03%2F20201003112153892_thumb.JPG)
참으로 안정적이고 고즈넉한 풍경이다
2층 목조건물의 극락전
무량사의 선방인 우화궁에는 진묵대사의 시 한수가 걸려있다. 우화(雨花)는 '꽃비'라는 뜻이나. 얼마나 아름다운 이름인지.
하늘은 이불, 땅은 요, 산은 베개
달은 촛불, 구름은 병풍, 바다는 술독
크게 취해 거연히 춤을 추고 싶어지는데
장삼자락이 곤륜산(히말라야)에 걸릴까 걱정이 되네
세상을 가슴속에 품은 호연지기가 느껴진다.
무량사는 매월당 김시습을 빼놓을 수 없다. 김시습은 생육신(사육신의 뜻을 이어받은 사람)의 한 사람으로 최초의 한문소설 <금오신화>를 썼다는 점 외에 잘 알려져있지 않은데, 그의 일생을 보면 참으로 파란만장하다.
세종 17년(1435년)에 태어난 김시습은 세 살 때부터 시를 지을 정도로 천재성을 드러냈다. 세종대왕이 "재주를 함부로 드러나게 하지 말고 정성껏 키우라"고 비단도포를 선물할 정도였다.
김시습은 21세때 단종이 세조에 왕권을 넘겼다는 사실을 듣고 대성통곡했다. 책을 불사르고 광기를 일으켜 뒷간에 빠지기도 했다. 사육신이 처형되자 24살때 중이 되어 방랑을 시작했다. <금오신화>는 이때 탄생했다. 47세때는 환속하여 장가도 들었지만 1년도 안돼 사별하고 '폐비 윤씨 사건'이 일어나자 다시 세상을 버리고 방랑생활을 했다. 58세에 무량사에 들어와 이듬해 세상을 떠났다. 불운한 천재, 호방한 기개를 가진 인물이라는 평가도 있는 반면 세상의 일에 분개만 할 뿐 사회를 개혁하기 위한 어떠한 노력도 하지 않았다는 혹평도 있다.
하지만 혼탁한 세상에서 절의를 지키고 밝은 뜻을 버리지 않은 그의 삶의 고결함만은 후세인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그래서 무량사에는 김시습의 영정(보물 제1497호)와 사리탑이 남아있다.
김시습의 초상이 모셔있다
![백제도시, 부여(3)-김시습과 무량사 이야기7](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storage.doopedia.co.kr%2Fupload%2F_upload%2Fimage5%2Ftravel%2Feditor%2F2020%2F10%2F03%2F20201003112252651_thumb.JPG)
![백제도시, 부여(3)-김시습과 무량사 이야기8](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storage.doopedia.co.kr%2Fupload%2F_upload%2Fimage5%2Ftravel%2Feditor%2F2020%2F10%2F03%2F20201003112351772_thumb.JPG)
무량사에서 차로 15분거리에 돌담마을, 반교마을도 함께 가보면 좋다.
• 대조사 이야기
SNS 인기 여행지인 '사랑의 나무'를 보고 대부분은 다음 목적지로 이동하지만, 사랑의 나무가 있는 성흥산 자락에는 그냥 지나치기에는 아쉬운 사찰이 있다. 대조사로, 경내에는 높이 10m의 석조관음보살상이 있다. 전설에 의하면 한 노승이 바위아래에서 도를 닦던 중, 큰 새 한 마리가 바위 위에 앉은 것을 보고 깜박 잠이 들었는데 일어나보니 바위가 석불로 변했다고 한다. 그래서 대조사라는 사찰을 짓게 됐다.
절 입구에 들어서기도 전에 우뚝 솟은 석불의 두상이 보인다. 논산 관촉사의 은진미륵과 비슷하게 네모난 관을 쓰고 있는 보살의 모습이다. 석불을 가까이에서 보고 싶다는 마음에 자꾸만 발걸음이 빨라진다. 하지만 경내에 들어서니 석불 주변으로 오전 내내 출입을 금지한다는 안내문이 써있다. 석불 앞 법당에서 스님이 기도하기 있기 때문이다. 열려진 법당 문 사이로 한 스님이 정좌하고 고요하게 기도를 드리고 있다. 스님의 참선에 방해될까 까치발로 주변을 거닐며 멀리서나마 두손을 모아 간절한 기도를 드려본다.
성흥산 사랑의 나무
![백제도시, 부여(3)-김시습과 무량사 이야기11](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storage.doopedia.co.kr%2Fupload%2F_upload%2Fimage5%2Ftravel%2Feditor%2F2020%2F10%2F03%2F20201003112653450_thumb.JPG)
![백제도시, 부여(3)-김시습과 무량사 이야기12](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storage.doopedia.co.kr%2Fupload%2F_upload%2Fimage5%2Ftravel%2Feditor%2F2020%2F10%2F03%2F20201003112712982_thumb.JPG)
![백제도시, 부여(3)-김시습과 무량사 이야기13](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storage.doopedia.co.kr%2Fupload%2F_upload%2Fimage5%2Ftravel%2Feditor%2F2020%2F10%2F03%2F20201003112732460_thumb.JPG)
큰 새가 앉은 바위가 석불로 변했다는 대조사
• 미암사 이야기
미암사는 세계 최대의 와불이 있는 작은 암자다.
'최대'와 '작은'이라는 상반된 단어에 대한 호기심으로 미암사에 가보기로 했다. 가파른 산길이 미암사까지 이어져있는데, 옆에는 두손을 모으고 있는 수백 개의 불상이 전시되어 있다. 숨이 조금 찰 때쯤 금색칠을 한 와불상이 보이기 시작했다. 와불을 한바퀴 돌며 기도를 드리는데 몇 명의 인부들이 와불 뒤편 문을 열고 공사를 하고 있다. 불상안에 불당이 있다니, 신기할 따름이다.
입구에 늘어선 불상행렬
![백제도시, 부여(3)-김시습과 무량사 이야기16](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storage.doopedia.co.kr%2Fupload%2F_upload%2Fimage5%2Ftravel%2Feditor%2F2020%2F10%2F03%2F20201003112936991_thumb.JPG)
세계최대의 와불상
와불상 앞에서 한가로이 오침을 즐기고 있는 견공. 견공의 마음속에도 부처님이 살아있다.
미암사는 특히 간절한 기도를 드리기 위해 오는 이들이 많다. 와불 옆에 있는 쌀바위 때문이다.
백제 때 한 할머니가 아이를 낳지 못해 걱정하는 며느리를 안타까워해서 쌀바위를 찾아가 매일 불공을 드렸다. 지극정성으로 기도한 덕분인지, 관세음보살이 꿈에 나타나 소원을 들어주겠다며 쌀 세톨을 꺼내 바위에 심으라고 했다. 거기서 쌀이 나오면 그 쌀로 밥을 지으라는 말도 덧붙였다. 꿈에서 깨보니 바위에서 정말 쌀이 나왔고, 손자도 얻게 됐다. 하지만 소원이 이뤄지자 할머니에게는 욕심이 생겼다. 사랑에는 끝이 없어도 욕심에는 끝이 있어야 한다고 했던가. 할머니는 쌀을 더 얻으려고 부지깽이로 쌀이 난 구멍을 팠더니 핏물이 흘러나와 주변을 핏빛으로 물들였다고 한다. 이 바위를 쌀바위라 부르고 백제 무왕이 쌀바위 옆에 암자를 지어 미암사라 이름붙였다.
많은 이들이 쌀바위 앞에서 합장한채 기도를 드리고 있었다. 누구나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는 소망과 간절한 바램, 오늘은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이들의 바램이 이뤄지기를 기도했다.
![백제도시, 부여(3)-김시습과 무량사 이야기19](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storage.doopedia.co.kr%2Fupload%2F_upload%2Fimage5%2Ftravel%2Feditor%2F2020%2F10%2F03%2F20201003113143442_thumb.JPG)
소원을 들어준다는 쌀바위 전설이 있는 미암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