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데블스 애드버킷(Devil’s advocate)>
제가 주님의 가르침에 확신을 가지고 있고 그 가르침에 어긋나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며 많은 성경말씀을 쏟아내고 있을 때 이런 충고를 들었습니다.
“넌 너무 맞는 말만 해.”
맞는 말을 하는데 왜 충고를 받았을까요?
그건 내가 확실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하나 둘 깨져가면서 점점 깨닫게 되었습니다.
무언가 확신하고 있을 때가 가장 불안한 상태인 것을.
그래서 무언가 확신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 혹은 아직도 제가 그런 확신 속에서 사람들을 대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 조금은 무서운 생각까지 듭니다.
책 한 권만 읽은 사람이 제일 무섭다고 하지 않습니까?
지금 잘 하고 있는 것이 과연 전부일까요?
자신이 옳다고 느낄 때가 가장 위험할 때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겉으로는 지금의 모습이 참으로 옳은 모습일지라도
주님은 어떤 의도로 그 옳은 모습을 완전히 깨버리시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담이 죄를 짓기 이전에 참으로 옳은 모습으로 살았지만 항상 죄를 지을 불안한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돌아온 탕자처럼 회개하고 다시 돌아왔다면 전과 같은 모습이 되기는 하였지만 더 이상 죄를 지을 수 없는 상태가 됩니다.
주님은 그래서 우리를 죄에 떨어지게도 하시고 견디기 힘든 고통도 주시는 것입니다.
금도 단련을 받듯이 성인도 단련을 받습니다.
욥기가 바로 그런 내용입니다.
욥은 나무랄 것이 없는 사람입니다.
주님은 그런데도 사탄의 말을 듣고는 욥을 사탄의 손에 넘겨버리십니다.
사탄에게 욥의 의로움을 증명한다고 사탄이 돌아오겠습니까?
아닙니다.
욥에게 고통을 주시는 이유는 고통이 아니면 단련될 수 없는 그 무엇이 있음을 보여주시기 위함입니다.
따라서 이 시련을 위해 마련되어야 할 세력이 사탄입니다.
사탄은 죄에 떨어뜨리고 고통을 주기 위해 안달이 난 세력입니다.
주님은 의인을 그 사탄의 손에 넘기셔서 그를 단련시키십니다.
브래드 피트 주연의 좀비 재난 영화 <월드워 Z(World War Z)>에는 위기 관리에 대한 여러 가지 국가 모델이 등장합니다.
그중 이스라엘은 ‘고문 10명 중 9명이 같은 주장을 펼쳐도 나머지 1명은 어떠한 이유를 찾아서라도 그 의견이 틀렸다고 말해야 한다’는 시스템을 도입한 국가로 묘사됐습니다.
전 세계가 좀비의 공격을 당할 때 고문 9명은 좀비의 존재를 부정하였으나
‘10번째 남자’ 1명만은 좀비에 대한 방어를 주장하였고,
그 결과, 이스라엘은 좀비로부터 안전한 독보적인 나라가 될 수 있었습니다.
참으로 건강한 나라는
모두가 나라 편을 드는 사람들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나라를 단련시켜 줄 반대 세력도 반드시 있어야만 한다는 것을 잘 시사해 주고 있습니다.
이렇듯 반드시 반대하고 어려움을 주는 사탄의 역할을 두어야 한다는 생각이 바로 가톨릭교회에서 나온 것입니다.
가톨릭 시성 조사 과정은 매우 엄격하고 세밀한 조사를 거칩니다.
그 과정 안에 데블스 애드버킷(Devil’s Advocate), 즉 악마의 변호사라는 역할을 두는데,
그는 사사건건 시성되려고 하는 사람에 대한 반대의견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데블스 애드버킷은 의무적으로 '악마'의 관점에서 사사건건 의혹을 제기하고 집요하게 공격합니다.
그래서 자칫 조사위원들이 성인 후보자에 대한 무조건적인 호의로 기울 수 있는 위험을 예방하는 것입니다.
이 과정을 거쳐야만 성인으로 공식적으로 추대되는 것처럼 욥도 마찬가지입니다.
사탄의 세력에 맡겨져 자녀, 재산, 건강, 명예 등 세상 모든 것들을 다 잃고 나서도,
“알몸으로 어머니 배에서 나온 이 몸, 알몸으로 그리 돌아가리라.
주님께서 주셨다가 주님께서 가져가시니, 주님의 이름은 찬미 받으소서.”
라는 기도를 올릴 수 있어야 참 의인으로 인정받는 것입니다.
우리 또한 지금 잘 살고 있다고 하고 하늘나라 갈 수 있는 자신감이 있어도
아직 욥과 같은 시련을 겪어보지는 않았으니 너무 자신하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은 연옥과 같은 시련을 마련해 놓으시고 우리를 단련시키시기를 원하십니다.
왜냐하면 하늘나라 시민 중 가장 작은이라도 세례자 요한보다 더 완전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 수원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어제는 정말로 바쁜 하루였습니다.
오전에는 교구에서 주최하는 순교자성월 기념 특강을 했고,
오후에는 전부터 알고 있었던 청년의 혼배미사 주례를 섰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다시 성지로 돌아오는데 피곤함이 밀려옵니다.
하긴 특강 준비가 부족한 것 같아서 새벽 2시에 일어났었거든요.
따라서 피곤하지 않으면 더 이상한 거죠.
졸음을 꾹 참고서 겨우 성지에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직원들이 창고 정리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특강을 나가면서 창고 정리를 했으면 좋겠다고 이야기를 했고, 계속해서 정리를 했던 것입니다.
저 역시 옷을 갈아입고서 함께 했습니다.
쓰지 않는 물건을 모두 창고에 보관하다 보니 몇 년 동안 사용하지 않고 그냥 창고 안에 묵혀 있는 것들이 너무나 많았습니다.
그래서 사용하지 않는 물건들은 과감하게 버리자고 이야기를 했지요.
그런데 생각보다 좋은 물건들이 많은 것입니다.
충분히 사용할 수 있는 것인데도 단지 그 자리에 적합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창고로 이동된 것 같습니다.
이 물건을 처음 구입할 때에는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분명히 잘 사용할 것이라는 생각으로 구입을 했었고 기분 좋게 사용했겠지요.
그러나 어느 순간에 사용빈도가 줄게 되었고, 결국은 창고 안의 한 자리를 차지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면서 낡고 보잘 것 없는 모습이 된 것이지요.
즉, 낡고 보잘 것 없어서 버려진 것이 아니라, 버려져서 낡고 보잘 것 없는 모습이 된 것이라는 것이지요.
관심을 갖지 않아 버려지는 것이 꼭 물건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닐까요?
어쩌면 우리 인간관계 안에도 해당되는 것 같습니다.
여러분의 휴대전화 주소록을 한 번 보십시오.
주소록에 남겨졌다는 것은 분명히 어떤 친분관계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 많은 이름 중에서 몇 년 동안 연락하지 않게 되는 사람이 늘어만 갑니다.
관심을 갖지 않다보니 점점 잊히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이 어린이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야말로 가장 큰 사람이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사실 당시에 어린이는 그리 존중을 받지 못했습니다.
마치 설익은 과일처럼 아직 사람이 되지 못했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래서 함부로 대하고 방치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따라서 그렇게 가장 낮은 존재라고 할 수 있는 어린이를 주님의 이름으로 받아들이라는 것은
그 누구도 외면하지 말고 사랑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버려지는 사람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버려져서 결국 낡고 보잘 것 없는 모습이 되는 물건처럼,
사람도 내 관심에서 사라질 때 보잘 것 없어 버려질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따라서 사람에 대한 사랑의 관심을 늘 갖추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 모습이 바로 주님을 받아들이는 것이며,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 될 수 있는 조건을 갖추는 것입니다.
- 인천교구 갑곶성지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겸손한 마음>
보다 크게 되고 싶은 마음, 다른 사람보다 높아지고 지배하며 마음대로 소유하고자 하는 마음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드러내기보다 숨기고 있습니다.
아닌 척 하면서 포장을 하고 위선을 떨지만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환히 들여다보시고 계십니다.
그래서 한 말씀하십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야말로 가장 큰 사람이다”
(루가 9,48)
스스로를 낮추고 다른 사람을 섬긴다는 것은
말같이 쉽지 않으나 그 길이 주 하느님을 만나는 길이라면 용기 있게 그 길을 가야 합니다.
알게 모르게 과장하고 포장한 가면을 벗고, 있는 그대로 몸에서 배어 나오는 겸손을 갖추게 될 때
예수님의 참 모습을 비추게 될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노는 겸손이란 '자신을 갖는 것'이라고 하였고,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자신의 주제를 넘지 않는 자이며, 하느님의 은총 앞에 자신의 마음을 온전히 열어 놓을 뿐만 아니라, 이웃에게 관용함'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 자랑하지 말고 주님을 자랑해야 합니다.” (성 아우구스띠노).
겸손이야말로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비결입니다.
예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마태 23,12)
만약
“성인들이 다른 사람들 앞에서 빛나 보이고 싶어 하면
그리스도님께서는 당신의 섭리로써 그들을 깊숙한 곳에 감추어 두십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성 안토니오)
겸손은 천국의 문을 열고
교만은 지옥의 문을 엽니다.
아우구스띠노 성인은 말합니다.
“교만은 천사를 악마로 만들었으나 겸손은 인간을 천사로 만들었습니다.” (성 아우구스띠노)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겸손함을 갖추길 원하며 낮은 사람이 되라고 했지만
제자들의 응답은 아직도 엉뚱한 모습입니다.
아직도 특권의식이 배어 있었습니다.
“스승님,
어떤 사람이 스승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것을 저희가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저희와 함께 스승님을 따르는 사람이 아니므로, 저희는 그가 그런 일을 못 하게 막아 보려고 하였습니다.”
하고 말하는 것을 보면 아직도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선한 일을 하면 다 환영할 일이건만
제자들은 자신들이 더 우월한 지위에 있다는 것을 은연중에 내세웠습니다.
누가하든 주님의 일을 하면 환영하고
그를 통해서 주님의 영광이 드러나고 사람들이 구원의 혜택을 입으면 기뻐할 일입니다.
“아무려면 어떻습니까?
가식으로 하든 진실로 하든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이니, 나는 그 일로 기뻐합니다.
사실 앞으로도 기뻐할 것입니다.”
(필리 1,18)
그러나 ‘내가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과 ‘내가 너보다 낫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내가 더 고참이다.’,‘내가 더 연장이다.’라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주님의 제자로서 아직도 자격 미달입니다.
낮아짐을 두려워 마십시오.
주님께서 거기 계십니다.
우리에게 자랑할 것은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자랑과 희망을 주님께 두는 오늘이기를 기도합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여담 1
신부님이 강론을 시작할 때가 되면 어김없이 자리를 뜨는 신자 한 분이 계셨습니다.
한 번도 아니고 매번 그러니 마음이 쓰였습니다.
그래서 하루는‘신자 한 분이 매번 자리를 뜨니 그 이유를 좀 알아봐 주세요.’하고 회장님께 부탁을 하였습니다.
이날도 아니나 다를까 강론을 시작하자마자 밖으로 나가는 겁니다.
기다리던 회장님이 정중하게 물었습니다.
"무슨 급한 볼일이 있으십니까? 아니면 어떤 사정이라도?"
그랬더니 신자분이 말씀하셨습니다.
“아! 예. 저는 화장실에 갑니다.
무슨 특별한 병이 있어서가 아니라 저는 잠자기 전에 꼭 화장실을 다녀오는 습관이 있거든요.
뭐 잘못됐습니까?”
* 여담 2
<인간(human)과 겸손(humble)의 어원은 흙(humus)>
인간(human)과 겸손(humble)의 어원은 흙(humus)이다.
단지 한줌의 흙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첫 인류인 아담이라는 이름도 ‘흙’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아다마’에서 나왔다고 한다.
흙은 나무의 뿌리를 보듬어안으며 열매와 잎을 맺도록 양분과 수분을 제공한다.
흙은 언제나 사람의 발 아래에서 사람을 우러러 볼 때 흙은 진정한 흙일 수 있다.
흙은 머리 위에 얹으려해도 안되고 멋진 의자에 앉으려 해도 안되다.
‘흙’의 성질은 더 이상 낮춰질 수 없는 ‘최저의 낮음’, 한 줌의 힘으로도 바스러지는‘연약함’이다.
겸손은 ‘흙’과 같은 태도를 말한다.
사람은 흙에서 나왔고, 흙의 성질은 겸손함이니,
사람이 사람답게 되려면 흙과 같아져야 하며
‘흙’과 같이 되려면 겸손해야한다.
아무리 어렵더라도 이만함을 감사하고 겸손해야 한다.
- 청주교구 / 청주성모병원 행정부원장 겸 청주상당노인복지관장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가장 큰 사람>
'제자들 가운데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 하는 문제로 그들 사이에 논쟁이 일어났다.
예수님께서는 그들 마음속의 생각을 아시고
어린이 하나를 데려다가 곁에 세우신 다음, 그들에게 이르셨다.
"누구든지 이 어린이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야말로 가장 큰 사람이다."
(루카 9,46-48)
여기서 ‘큰 사람’이라는 말은 ‘높은 사람’을 뜻하는 말입니다.
아마도 제자들은 자기들 사이의 ‘서열’에 관해서 다투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을 뽑으실 때, 또는 뽑으신 다음에도
제자들 사이의 서열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씀을 하지 않으셨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사도단을 ‘동등한 형제들의 공동체’로 만드신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들 사이에서 그런 다툼이 생겼던 것 같습니다.
“베드로 사도를 수제자로 삼지 않으셨나?” 라고 물을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 사도를 교회의 반석으로 삼으시고,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신 일(마태 16,18-19),
또 부활하신 뒤에 “내 양들을 돌보아라.” 라고 베드로 사도에게 말씀하신 일은(요한 21,16-17),
분명히 그를 교회의 우두머리로 삼으신 일입니다.
그러나 그 일들은 그를 교회에서 ‘가장 높은 사람’으로 삼으신 일이 아닙니다.
가장 낮은 자리에서 형제들을 섬기는 사람으로 삼으신 일입니다.
따라서 제자들이 서열 문제로 다툰 것은 순전히 세속적인 다툼일 뿐이고, 또 예수님의 뜻을 거스르는 일입니다.
여기서 ‘어린이’는 사회적으로 가장 낮고 보잘것없는 사람을 상징합니다.
“누구든지 이 어린이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이라는 말씀은,
“내 제자라면 누구든지 사회적으로 가장 낮은 사람을 섬겨야 한다.” 라는 뜻입니다.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라는 말씀은,
“그것이 바로 나를 섬기는 것이다.” 라는 뜻입니다.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라는 말씀은,
“그렇게 하는 것은 아버지 하느님을 섬기는 일이기도 하다.” 라는 뜻입니다.
가장 낮은 사람을 섬기는 일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일이기도 하고,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서로 섬기는 낮은 사람이 되기를 바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최후의 만찬 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나는 섬기는 사람으로 너희 가운데에 있다.”
(루카 22,27)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또는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것은,
지배하고 군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람들을 섬기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야말로 가장 큰 사람이다.” 라는 말씀은,
“세속적인 사고방식에 사로잡혀서 가장 높은 사람이 되려고 경쟁하지 마라.
가장 낮은 자리에서 섬기는 사람이 되려고 경쟁하여라.” 라는 뜻입니다.
모든 신앙인이 가장 낮은 자리로 내려가려고 경쟁한다면,
결국 신앙인의 공동체 안에는 높은 사람은 없고 낮은 사람만 있게 될 것입니다.
(모두가 똑같이 낮은 사람, 섬기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그런 공동체가 완성되는 곳이 바로 하느님 나라입니다.
하느님 나라에는 높은 사람도 없고 낮은 사람도 없습니다.
‘섬기는 사람’만 있습니다.
‘어린이’ 라는 말에서 예레미야 예언자가 연상됩니다.
“주님의 말씀이 나에게 내렸다.
‘모태에서 너를 빚기 전에 나는 너를 알았다.
태중에서 나오기 전에 내가 너를 성별하였다.
민족들의 예언자로 내가 너를 세웠다.’
내가 아뢰었다.
‘아, 주 하느님, 저는 아이라서 말할 줄 모릅니다.’”
(예레 1,4-6)
“저는 아이라서 말할 줄 모릅니다.” 라는 예레미야 예언자의 말은,
자기가 실제로 어린이라는 뜻도 아니고, 예언자의 소명을 회피하려고 하는 말도 아니고,
자기는 하느님께서 도와주시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보잘것없는 존재일 뿐이라는 ‘인식’과 ‘두려움’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그것이 바로 ‘겸손’입니다.
속마음과는 다르게 겉으로만 자기를 낮추는 것은 겸손이 아니라 위선입니다.
진짜로 겸손한 사람은 자기가 겸손하다는 것을 모르고, 또 자기를 낮춘다는 의식도 하지 않습니다.
자기는 본래 보잘것없는 존재라고 생각할 뿐입니다.
보잘것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가장 낮은 자리로 가려고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예레미야 예언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저는 아이입니다.’ 하지 마라.
너는 내가 보내면 누구에게나 가야 하고, 내가 명령하는 것이면 무엇이나 말해야 한다.
그들 앞에서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너를 구해 주리라.
주님의 말씀이다.”
(예레 1,7-8)
하느님의 말씀을 간단하게 줄이면,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도와주겠다.”입니다.
우리가 자기 자신을 잘 알고, 하느님께 도움을 청하면,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항상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그러나 만일에 우리가 위선과 교만에 빠져서 잘난 체 한다면,
하느님의 도움을 받기는커녕 하느님 앞에 서지도 못하게 될 것입니다(루카 1,51).
하느님 앞에서, 우리는 누구나 예외 없이 보잘것없는 존재입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아이일 뿐입니다.)
그러니 사람들 앞에서 잘난 체 할 것이 없습니다.
누가 가장 높은 사람이냐 하는 문제로 다투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 될 뿐입니다.
(‘도토리 키재기’ 같은 일...)
- 전주교구 / 함열본당 상지원 공소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허세를 버리고 가난하신 예수님을 품는 행복>
예수님께서는 또다시 수난을 예고하시고(9,44-45) 예루살렘을 향한 본격적인 여정을 시작하기에 앞서
제자들이 지녀야 할 자세에 대하여 강조하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길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제자들은
자기들 가운데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에 대해 논쟁합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따라나선 제자들이지만
아직은 영(靈)의 눈을 지니지 못한 소경이요, 세상과 육의 정신으로부터 정화되지 않은 상태에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마음속 생각을 아시고,
당신의 이름으로 어린이를 받아들이는 것은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것이고,
그것은 곧 하느님을 받아들이는 것이라 하십니다(9,48ㄱ)
그렇게 가장 보잘것없는 이를 받아들여 하느님과 일치함으로써 서로 사이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 될 때
하느님 앞에서 가장 큰 사람이 된다고 가르치십니다(9,48ㄷ).
이런 가르침은 우리네 삶을 되돌아보도록 재촉합니다.
요즈음은 자신을 드러내고 싶고 있어 보이고 싶은 경향이 강해져, 심지어 ‘있어빌리티’란 신조어가 나올 정도입니다.
'있어빌리티'란 '있어'와 능력이라는 영어의 ‘어빌리티’(ability)를 합성한 말입니다.
‘부자형’ 있어빌리티는 고가의 물품을 SNS 속 사진에 살짝 드러냄으로써 우회적으로 재력을 과시합니다.
'인맥형' 있어빌리티는 SNS상의 프로필 작성과 구성원의 면모를 통해 타인과의 관계를 과시합니다.
'센스형'은 자신만의 장소나 음식을 올림으로써 독특한 취향을 알리려 합니다.
그러나 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SNS의 그런 모습을 진짜로 보는 의견은 6.4%에 지나지 않았다고 합니다.
다 허세라는 말이지요.
제자들의 경우도 하느님도 예수님도 아닌 자신들이 지닌 것들을 내세워 서로 ‘도토리 키재기’를 하는 허세를 부린 것입니다.
우리도 속물근성이 발동하면 그런 처신을 하곤 하지요.
그렇다면 참으로 실속 있고 ‘큰 사람’으로 살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삶의 기준을 자신에게 두려는 태도를 버려야겠지요.
내 삶의 기준이 하느님과 예수님으로 삼는다면 삶의 방향이 뚜렷해집니다.
시작도 선택도, 관계맺음이나 일의 실행도, 궁극적인 내 인생의 목표도 주님이 원하시는 것을 찾을 수밖에 없겠지요.
이런 점에서 제자들은 착각한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제시하신 삶의 기준인 이타적 사랑을 지니지 않은 채 서로 비교하지 말아야 합니다.
나의 모든 것은 하느님께서 주신 것인데,
그것을 마치 자기 것인양 착각하여 서로 비교한다는 것은 얼마나 유치하고 어리석은 일인지 모릅니다.
비교하려거든 하느님과 비교해야 함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가장 큰 사람이 되려면
우리를 위해 죽기까지 낮추시고 작아지시고 비우신 예수님을 품어야 합니다.
주님의 주도권을 인정할 줄 아는 하느님 앞에서의 정직함과 가난한 마음을 지녀야겠지요.
'있어빌리티'의 허세를 철저히 버리고,
다른 이에게 드러나는 선을 시기하지 않으며,
저 낮은 곳으로 내려가 다른 이들 아래 자신을 둘 줄 아는 겸손을 지니는 사람이
하늘 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 될 것입니다.
이 아름다운 가을, 높아만 가는 푸르른 하늘을 쳐다보면서 주님을 향한 그리움을 키워가고,
허세를 버리고 겸손하게 일상의 고통과 수고로움을 견뎌내며, 가난하신 예수님을 품음으로써
진정 '있어 보이는' 우리가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 작은형제회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하느님(God)과 사탄(Satan)의 게임 -유혹, 고통, 시련>
오늘부터 시작되는 지혜문학에 속한 욥기가 반갑습니다.
잠언과 코헬렛에 이은 셋째 순서로 욥기의 등장입니다.
오늘 제1독서 욥기는 ‘천상회의’에 이은 욥의 ‘첫째 시련’으로 이루어집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주요 대상은
하느님과 사탄, 그리고 하느님의 종 욥입니다.
욥은 하느님의 자부심같은 존재입니다.
하느님은 사탄에게 욥을 자랑합니다.
여기서 사탄은 아직 구체적으로 하느님의 적수인 마귀를 가리키지 않고,
‘고발자, 고소자. 적대자, 반대자, 원수, 적수’등의 뜻을 지닌 보통명사로 쓰입니다만
역시 사람들에게 아주 부정적인 존재인 것만은 확실합니다.
오늘 제1독서 욥기의 장면은 흡사 하느님의 종 욥을 사이에 두고 벌어지는 하느님과 사탄의 게임같습니다.
욥의 믿음을 확인하고 싶은 하느님의 호기심이 발동하신 것 같습니다.
하여 강론 제목도 ‘하느님과 사탄의 게임-유혹, 고통, 시련-’이라 정했습니다.
먼저 하느님은 사탄 앞에서 욥을 자랑합니다.
“너는 나의 종 욥을 눈여겨 보았느냐?
그와 같이 흠없고 올곧으며 하느님을 경외하고, 악을 멀리하는 사람은 땅 위에 없다.”
하늘에 계시면서도 땅위의 사실을 속속들이 파악하고 계신 하느님이란 사실이 두려움과 동시에 큰 위로가 됩니다.
하느님이 인정하시는 욥이니, 하느님의 인정을 받는 것이 최고의 영예임을 깨닫습니다.
흡사 오늘 복음 중 예수님의 예표와 같은 욥입니다.
하느님께 반기를 들고 나서는 사탄입니다.
남 잘되는 것을, 남 칭찬하는 것을 못견뎌하는 사탄의 본색이 드러납니다.
“욥이 까닭없이 하느님을 경외하겠습니까?
당신께서 손을 펴시어 그의 모든 소유를 쳐 보십시오.
그는 틀림없이 당신을 눈앞에서 저주할 것입니다.”
하느님과 사탄의 주고받는 대화가 점입가경 흥미롭기 짝이 없습니다.
하느님은 사탄에게 이르십니다.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하느님의 종 욥을 사이에 두고 하느님과 사탄의 게임이 시작되었습니다.
“좋다, 그의 모든 소유를 네 손에 넘긴다.
다만 그에게는 손을 대지 마라.”
이제부터 바야흐로 하느님과 사탄의 게임중에 시작되는 욥의 시련입니다.
주목할 점은 사탄은 하느님으로부터 독립된 존재가 아니라 하느님의 권능에 예속된 존재라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허락하시는 범위안에서만 활동이 가능하다는 사실 역시 우리에게는 든든한 위안이 됩니다.
2차 대전 중 나치스에 희생된 현대의 순교자 독일의 개신교 신학자, 본 훼퍼의 말도 생각이 납니다.
“일어나는 모든 일이 하느님의 뜻은 아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허락없이 일어나는 일은 하나도 없다.”
그대로 욥의 경우에도 해당됩니다.
하느님께서 욥의 시련을 허용하셨지만 분명 하느님의 뜻은 아닙니다.
이어 연속되는 욥의 시련에 불행입니다.
하느님과 사탄의 게임중에 겪게되는 우리의 고통과 시련이란 생각이 드니 정신이 번쩍 듭니다.
“저 혼자만 살아남아 이렇게 소식을 전해 드립니다.”
무려 4회에 걸쳐 욥이 닥친 불행을 전하는 소식들입니다.
하느님과 사탄만 알고 아무도 모르는 일입니다.
도대체 청천벽력(靑天霹靂) 같은 황당한 소식입니다.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의문을 품기로 하면 끝이 없습니다.
욥의 기민한 대처가 참 반갑고 믿는 이들의 모범이 됩니다.
“알몸으로 어머니 배에서 나온 이 몸, 알몸으로 그리 돌아가리라.
주님께서 주셨다가 주님께서 가져 가시니, 주님의 이름은 찬미받으소서.”
첫째 시련을 통쾌하게 통과한 욥입니다.
이 모든 일을 당하고도 욥은 죄를 짓지 않고, 하느님께 부당한 행동을 하지 않았습니다.
하느님과 사탄의 첫째 게임은 하느님의 일방적 승리입니다.
하느님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은 욥의 처신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을 찬미하는 철석같은 믿음이 시련과 불행을 통과하는 유일한 길임을 깨닫습니다.
욥에 대한, 무죄한 이들의 시련에 대한 답은 예수님이십니다.
십자가의 주님은 사탄에 대한 예수님의 영원한 승리의 표지입니다.
무수한 사탄의 유혹과 시련을 아버지께 대한 철석같은 신뢰로 통과하신 십자가와 부활의 주님만이 우리의 영원한 희망이요 위로가 됩니다.
온갖 유혹과 고통, 시련을 겪을 때마다 바라보며 힘을 얻으라 있는 주님의 십자가입니다.
하느님 안에서 겪는 유혹과 고통이요 시련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일어나는 모든 것이 하느님의 뜻은 아니나,
하느님의 허락없이 일어나는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끝까지 온갖 시련을 믿음으로 겪어내는 일이 얼마나 중요하고 힘든 일인지 깨닫습니다.
오늘 복음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과 사탄의 게임이 벌어진 상황입니다.
제자들 가운데 누가 가장 높은 사람이냐 하는 문제로 논쟁이 벌어졌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대처가 참 기민하고 지혜롭습니다.
주님은 오늘 복음을 통해 우리에게 유혹과 고통, 시련을 잘 통과해 갈 수 있는 지혜를 제공해 주십니다.
“너희 가운데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야 말로 가장 큰 사람이다.”
겸손한 믿음으로 살아가는 가장 작은 사람에겐 유혹도 힘을 쓰지 못하고 고통과 시련도 큰 영향을 주지 못합니다.
이의 전형적 본보기가 십자가의 주님을 충실히 항구히 추종했던 성인인 아씨시의 프란치스코, 소화 데레사, 마더 데레사입니다.
역설적으로 가장 작아짐으로 가장 큰 사람이 된 윗 성인들입니다.
둘째는 예수님의 관대한 마음입니다.
하느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할 때 선사되는 이 관대한 마음이 유혹과 고통, 시련을 잘 통과하게 합니다.
“막지 마라.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너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막지마라’, 건드리지 말고 ‘그냥 놔두라(leave him alone)’는 것입니다.
아무도 하느님의 은총을, 진리를 독점할 수 없습니다.
주님은 기고만장한 엘리트 의식에 사로잡혀있는 제자들의 분위기를 바로 잡으며 시야를 넓혀 관대할 것을 가르치십니다.
바로 겸손하고 관대한 믿음만이
유혹과 고통, 시련의 영적전투에서 하느님의 승리로 이끄는 최상의 영적 무기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 모두에게 온갖 유혹과 고통, 시련을 통과할 수 있는 믿음과 지혜를 선물하십니다.
아멘.
- 성 베네딕토 수도회 성 요셉 수도원
♣ 류한영 베드로 신부님의 묵상글
사람이 가지고 있는 욕망 중에 버릴 수 없는 것, 모든 사람이 내면에서 끊임없이 추구하는 것이 권력입니다.
그러니 제자들이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 하고 다투었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권력 욕심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 주고 계십니다.
어린이의 단순함이 그것입니다.
하늘 나라의 가치는 지상의 가치와 매우 다르다는 것입니다.
하늘 나라의 권력은 인간의 계산을 넘어서는 곳에 있습니다.
가난과 겸손 속에 자리 잡고 있는 하느님의 사랑이 하늘 나라의 권력이라는 것입니다.
큰 사람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하늘 나라에서 작은 사람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야말로 가장 큰 사람이다.”
이 말씀의 전형은 소화 데레사 성녀입니다.
욥 성인의 위대함은 자신의 재산과 자녀들, 곧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잃고도 하느님을 찬미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는 모든 것을 내려놓았습니다.
알몸으로 왔다가 알몸으로 돌아가는 인생의 단순함을 간파하였습니다.
그는 누구보다 가장 작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어린이처럼 하느님께 모든 것을 맡기는 자세가 욥 성인을 이렇게 만들었습니다.
우리도 하느님의 사랑을 실천하되,
하느님만이 자신을 알아주고 그분이 준비하여 놓은 천상의 상급을 얻으려 살아가는 순박함과 겸손함을 간직합시다.
어린이와 같은 마음은 우리를 큰 사람으로 만들어 천상 지혜가 넘치게 합니다.
-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