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남들처럼 살고 싶다.
먼지가 되어서라도 날아가 버리고 싶은 계절이다. 이 세상살이가 내 뜻대로 내 의지대로 다 이루
어진다면 그건 아마도 세상살이가 아닐 것이다.
조그만 행복 속에서 커다란 웃음을 지을 때 가끔은 옆 사람의 불행에도 고개 돌려 보이며 커다
란 내 불행에 연연하여 기약 없다 하지만 미래마저도 잃어버리고 살아가려고 하지 않았던 게 나
의 작은 바램 이였었다.
나 스스로도 놀랍게 언제나 늘 마음속에는 어쩌면 지극히 평범한 누구나가 꿈꾸어오는 남들처
럼 평범하게 살아보고 싶다는 희망 한 가지 그것이 아마도 날 지금까지 버텨오게 한 것이라고 확
신한다.
조금 더 욕심을 낸다면 지금보다 더 여유가 되어 있고, 현제의 내 자리에서 나의 기능을 살릴 수
있는 일에 전념하고 싶다.
아직은 이루지 못했지만 언젠가는 실천을 하게 되리라 희망을 품고 오늘 하루도 미소 짓고 살고
싶은 게 솔직한 심정이다.
어린 시절! 가슴 밑바닥부터 깔려 있는 말들이 호흡을 따라 흘러 나오려하는 데 어떤 것부터 내
뱉어야할지 마음이 산산해진다.
일남 삼녀 중에 차녀로 태어났고, 태어나서 돐 지난 직후 열병으로 허리의 뼈가 휘어지는 병을
앓게 되었다.
책임감 없는 아버지에 오로지 정력하나로 세상을 살아가는 아버지 그 아버지가 세상의 전부로
알고 하늘 같이 떠받들며 사는 어머니, 맏이인 소정이, 둘째인 나, 남동생 재민이 막내여동생 소
연이, 이렇게 형제가 넷이다.
뚜렷하게 내세울 순 없지만 그래도 소규모의 공장 하나를 하청 받아 운영을 하며 사는 아버지는
늘 여자들에게 인기가 있었고, 바람이란 단어가 끊이질 않았던 존재였다. 인물이 좋았다. 그래
서 젊은 여자들이 늘 곁에 맴돌았었고, 그런 여자들을 옭아매는 특수한 재주가 넘쳤던 분인 거
같았다.
그에 반해 평범했고, 배운 것 또한 많지 않았던 엄마는 그런 아버지가 세상의 전부로 여기며 자
식은 둘째 치고 늘 남편만을 바라보며 한 세월을 가슴앓이로 보냈던 불쌍한 여인네였다. 주기적
으로 드나들었던 아버지가 올 날이면 몸단장하고 집안 구석구석 매끄러이 정돈하시고 까치발로
종종 걸음을 걸었던 엄마의 모습이 어린 내 마음에 왜 그리도 추하고 싫었던지 지금도 역시 그
생각만큼은 지우고 싶은 상처이다.
아버지가 집에 오면 엄마의 얼굴엔 미소가 번졌고, 하룻밤이 지나고 나면 가야할 아버지의 심경
을 건드려서 온 집안이, 온 동네가 떠나가듯이 한차례의 부부 싸움이 시작됐고 눈과 얼굴과 온몸
을 일주일씩이나 누워서 병치레를 치를 정도로 얻어맞은 후 신세타령에 약 먹고 자살 소동을 하
며 지내온 세월이 지금까지 얼마였던가.
으레 아버지가 오고 나면 그 다음의 순서를 알고 있었던 우리 사 형제는 늘 불안에 떨며 그 날 밤
들을 보냈었다.
한바탕 온 집안을 엉망으로 만들고 조강지처를 물씬 두들겨 팬 후에 미련 없이 생활비 조로 돈
봉투 집어 던지고 대문을 나섰던 아버지의 뒷모습을 보며 증오보다도 두려움에 떨면서 어린 나
이에도 이런 삶을 사는 또 다른 사람들이 또 있을까 궁금해 하며 이런 가정에서 태어난 내 자신
의 연민에 빠져 하염없이 앞으로 살아갈 미래에 대한 두려움과 그나마 몸까지 불구인 불안한 마
음을 어찌 할 수가 없어서 튀어나온 가슴을 두드리며 신이란 신은 모조리 원망하면서 그 얼마나
울음을 삼키었는가를 생각하면 지금도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그 후로 어머니는 약에 취해 있거나 알코올에 취해 있었고, 집안의 생활 자체를 엄마에게서 기대
한다는 것은 우리 사형제로서는 무리라는 것을 서로가 알고 있었다.
그래서 집안일을 맏이인 소정이가 도맡아 했었고, 나머지 동생들과 나는 늘 어두운 얼굴을 하면
서 어린 시절을 보냈었던 것 같다.
그러니 형제들과 사이가 좋을 리 만무했다. 제대로 된 환경을 맞이하지 못했던 상황에 가족의 사
랑이 결여된 환경이라 더욱이 사형제 중에서 내가 낄 자리는 더욱더 없었다. 어린 형제들 정서
나 마음도 메말라졌었고, 더욱이 장애인이고 몸이 불구인 나로선 이 형제들에게도 천덕꾸러기였
고, 따돌림을 받고 살았다.
형제들에게도 창피한 존재였고 같이 어울릴 수 없는 사이였고, 늘 화풀이의 대상이어서 맏이인
소정이의 화풀이로 두들김을 당했었다.
그래도 나는 성질이 있었고, 지려고 하질 않았고, 끊임없이 대들었었지만 키는 백 센티미터 조
금 넘은 체구에 늘 뼈밖에 없었던 나로서는 코피가 터지고 그 피를 보고 난 후에야 두들김을 멈
췄던 소정이를 힘은 없지만 온 몸의 증오와 미움의 감정을 두 눈에 힘을 주어 핏발이 터질 듯한
눈으로 노려보며 증오를 싸움으로 대신 했었고, 힘이 빠져 내 자리라곤 구석 자리에 기대어 앉
아 하염없이 울음을 삼키며 얼른 커서 이 지옥 같은 집구석을 벗어나리라 혼자서 주먹을 쥐며 맹
세하고 맹세했었다.
하루라도 빨리 커서 이 부모를, 이 형제들을 벗어나고 싶었다. 어느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았던
장애인의 몸이었고, 태어난 환경 또한 열악했으며 갖은 것이라고는 오로지 오기뿐이었던 시절이
었다.
나는 사춘기에 접어들게 되었고, 집안 분위기에서 느꼈던 진절머리 나는 불안 속에서 이상하게
집념과 오기를 키우기 시작했다.
창피하고 지옥 같은 내 가정 속에 원수를 갚듯이 자기 성장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나는 독서실
에 박혀서 학교와 공부에만 전념을 몰입했었고 집안일에 대해선 도외시하려고 애를 썼고, 밥 먹
을 때와 학교 가기 위한 준비를 위해서만 집에를 들렀고, 되도록 집으로 가려는 횟수를 줄이려
고 했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도 내 가정의 환경은 나아짐이 없었고, 변화 또한 기대를 못했었
다. 아버지의 바람기는 끊임이 없었고, 내가 알기로도 한 두 여자로 만족하지 않았었던 것 같았
다.
마찬가지로 엄마 역시 아버지에 대한 집념은 날이 가면 갈수록 더했으며 어쩔 수 없는 분풀이의
대처로 알코올의 힘에 젖어 늘 무너져 있는 모습을 보여 주었었다.
그러하매 주기적이었던 아버지의 모습은 자식들 눈에 드물어졌었다.
지금에 생각해도 다행이었던 것이 자식들의 학비와 생활비는 그나마 생색을 낼 정도로 보내주
는 일은 잊지 않고 있었다.
아버지란 존재를 지우고 싶었지만 막연한 두려움의 상대였었고, 자식들의 책임을 도외시한 엄마
의 모습에 대해 사춘기에 들어와서 증오의 크기가 더욱 커졌었다.
다른 가정을 비교했을 때 남편이 외도를 했다면 지친 아내는 자식들에게 헌신을 할 것이고, 장
차 그 자식들이 아버지는 원망하되 어머니는 호강시켜 준다는 게 나의 상식에도 자리 잡혀 있었
지만 나의 부모인 어머니에 대해 나는 도대체 이해 할 수가 없었고 그 이해를 위해 어머니와 대
화를 한다는 것조차 불가능한 상태여서 기대 하질 않았었다.
사춘기의 시절 나는 내가 나를 만들지 않으면 죽음밖에 없는 불쌍한 인생이다라는 것을 피부에
와 닿을 정도로 느꼈고, 희망이 없는 가족과 내 자신을 분리시키고 싶었다.
저런 가정에서 저런 몸으로 태어난 아이가 어떻게 저런 삶을 살수 있을까 라는 그런 소리를 듣
고 싶었고, 모든 사람들이 무시하고 필요 없는 존재로 생각되던 불구의 몸을 가진 아이가 제대
로 살수 있었을까 하고 의문을 갖은 사람들에게 그런 생각들에 답을 주고 싶었다.
그래서 보잘 것 없고 힘없는 장애인이 매달리고 할 수 있었던 것은 공부였다.
이를 악물고 공부를 했었고 미친 듯이 열중을 했었다. 물론 우리 집의 특수한 환경이 나를 독한
뱀처럼 자기 방어를 하게 했고, 유리한 쪽으로 본인을 이끌어 가게 하였고, 매 순간을 아까워하
면서 자기실현의 주인공이 되고 싶었던 것이다.
학교생활에선 오로지 공부만 하는 몸이 불구인 일개의 장애인 정도로 친구나 학교 선생님들에
게 인식이 되었었지만 학교 성적으로 눈에 뜨일 정도였을 땐 누군가 알아보려고 손수 교실까지
찾아 왔었던 선생님들도 있었다. 전체 학생들 중에 키가 가장 작았으며 내 키의 반이나 되는 무
거운 책가방을 질질 끌고 힘겹게 오르막이 높은 학교를 열심히 다녔었고, 차츰 선생님들과 친구
들은 극복하고 극기의 장애인으로 나를 칭찬을 해 주었었다. 그런 나의 부모님은 참으로 장애
의 딸을 잘 키운 훌륭한 부모님이라고 칭찬까지 받게 하는 나에게선 받아들이기 싫은 말로써 나
에게 따라다니는 말들이었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칭찬을 부정하고 싶었지만 자존심으로 똘똘 뭉친 나로선 아무 말 없이 늘 다
음 시험 걱정에 머리가 꽉 차있었고, 그 날 가서 복습해야 할 과목들로 신경을 몰입하려고 온몸
의 촉각을 세웠던 기억이 난다.
이 시기에 형제들에 대해선 나로선 할말이 없다. 맏이인 소정이는 아버지를 닮아 미모가 있었
다. 공부와는 담을 쌓았고, 그 점엔 누구나 이해를 해주는 편이다. 요즘 말하는 노는 아이로 전
락을 했으며 간신히 고등학교 졸업을 하고 사회생활을 하면서 더욱더 나쁜 생활을 하게 되어 나
중에는 집을 나가버렸다.
그 와중에 나는 입시를 거쳤고 대학에 입학을 했다. 그 때쯤 아버지가 하셨던 일이 부도가 났었
고 아버지는 돈에 쪼들리게 되었고, 여자와 공장을 잃게 된 후 엄마에게 돌아왔다.
서울의 집을 빚으로 정리해서 지방의 소도시로 도망치듯 이사를 가게 되었었고 두 동생 재민이
와 소연이는 지방에서 서울의 학교를 다니며 졸업하게 되었고 나는 학교 앞의 단칸방을 전전하
게 되었다.
부모와 떨어지게 되었고, 형제들과 벗어나게 되어 내가 힘들었던 어린 시절의 슬픈 소망이 어려
운 현실과 맺어졌구나 하는 쓴웃음을 자아내게 했던 시절이었다.
그러면서 나는 더욱더 내 생활에 열심히 매달렸고, 다행히도 공부를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시고
여기저기 추천으로 아이들 과외를 하게 되었다. 학교 수업 마치고 아르바이트 돌고 자취방에 돌
아와서 새벽까지 학교 공부를 하였고 대학 생활의 긴장을 한 가닥도 풀지 않은 채 오히려 더 이
를 악물고 공부를 했으며 미친 듯이 열중했었다.
때론 학비도 부족했었고 생활비도 부족했었고 밥도 굶어가며 라면 하나로 저녁을 대신하면서 밤
을 지새웠던 흔적들, 그것이 하나하나 생각이 날 때면 자주 전율을 느끼며 온몸이 떨리곤 했다.
살기 위해서 목숨을 각오하고 힘겹게 숨차게 살아온 내 자신의 모습이 남들 앞에서 나와 같지 않
은 사람들 앞에서 왠지 보잘 것 없고 더욱더 추하다고 느껴진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여느 사람 같으면 이렇게 힘들 때 생각나는 사람이 가족일 것이다. 사회생활에서 악을 힘으로,
어렵게 살면서도 부모를 그리워 해 본적이 없었고 그저 나에게 부모는 반드시 쓰러뜨려야만 하
는 적 같이만 생각되었다.
부모의 정을 모르는 바보였고, 부모는 그저 내 암울한 가정을 저주하는 것과 더불어 부모를 저주
하는 것으로 기억되곤 했었고 그래서 나는 형제들조차 싫었었다.
부모 그들은 아직도 나의 상처이고 치부이다. 나를 아는 사람들이나, 내 부모 형제를 아는 사람
들은 일제히 피했었고, 나의 어머니에 대해 묻는 사람들을 죽이고 싶을 정도로 싫었고, 나는 그
문제에 관한 한 병적이었었다.
부모가 있는 쪽으론 얼굴도 돌리기 싫었고 생각만 해도 몸에 두드러기가 날것처럼 집 생각을 하
기조차 싫었던 것이었다.
가난하고 힘들었던 시절, 나는 하늘 한번 제대로 바라 본적이 없었던 것 같다.
부모에 대해선 그 누구가 죽었다는 소식 외에 가슴 아플 것이 없었다.
이 시절 내 부모의 삶도 힘들었었고 형제들 또한 말이 아니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래도 발이
넓었던지 예전만큼은 아니어도 본 궤도를 찾으셨다. 한동안 어머니는 아버지와의 삶이 꿈결만
같았다. 빠져있던 알코올의 힘에서 비켜나 어느 정도 제정신으로 삶을 살아갔다. 비록 예전의
남편의 잘못은 어찌 되었던 지간에 지금 하늘같은 서방을 품게 되어 더 이상의 바램이 없었던 것
이었던지 주변의 사람들이 보았을 때는 여느 평범한 부부로만 보였을 뿐이었다. 여느 부모 같았
으면 첫딸은 가출해서 소식이 없는 상태였고 둘째 딸은 몸이 불구이면서도 객지에서 고생을 하
고 있었지만 장성한 아들과 막내딸을 품고 살았다는 것과 지금 서방이 옆에 있는 것으로 세상을
품은 것만 같은 엄마에겐 여느 엄마 같은 고민은 내 어머니에게서 기대조차 바란다는 것은 나에
게선 사치였다.
이따금씩 엄마의 생각이 궁금했었지만 그 궁금함조차 부질없었음을 지극히 알았던 나는 생각을
접는 것이 현명하다고 판단했었다.
어느덧 대학을 졸업할 나이가 되었고 다른 친구들은 취업의 선에 뛰어들어 여념 없는 건강한 삶
을 계획했고 유지했었다. 그러나 나는 장애인의 몸으로 취업의 눈길을 돌리기에 참으로 힘들었
다. 그동안 취업을 해보려고 그 얼마나 무던히도 애를 쓰며 노력을 해 보았지만 현장에서 덤벼
들기엔 현실의 벽이 너무나도 큼을 절실히 느끼며 조바심으로 밤을 지새웠었다.
장애인의 몸으로 하잘 것 없고 보기 흉한 몸을 가진 나의 현실, 그 속을 배회하면서 꿈을 꾸기에
는 나는 너무나 작고 하찮은 존재였다. 지금까지 의미를 부여했고 열심히 준비했으며 나도 건강
한 사람처럼 일할 수 있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사회는 오기와 발악으로만 덤비기엔 너무나 단단
한 벽이었고 그런 견고한 벽을 깨기란 나에겐 참으로 벅찬 일이었다. 그래도 반은 인내하며 반
은 바둥거리며 그래도 희망을 걸면서 그 통념과의 싸움을 하면서 살아왔다.
이런 취업을 준비하면서도 그간의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서 대학 다니면서 시작했었던 아르바이
트를 그만 둘 수가 없었다. 돈벌이라고는 할 수 없었지만 그나마 나로선 유일한 생계 수단이어
서 전심전력으로 아이들의 성적관리에 몰입을 했었다.
다른 대학생들의 과외비엔 턱없이 비교할 수도 없었던 과외비였지만 나에겐 내생의 줄 이였고,
미약한 희망의 매달림으로 취업이 되기 전까지의 유지만을 기원하며 애씀을 보이려고 노력했었
다. 그러나 이것으로 생활 유지를 기대하는 것은 나에겐 부족했다. 내 놓으랄 만한 가정교사나
그런 과외로 생각하면 설명하기엔 조금 힘이 든다.
계속되는 취업의 좌절, 하던 공부를 연이어서 하고 싶었지만 내 능력으로선 무리였고, 나에겐 먹
고살아야 하는 취업만이 전부였다.
이런 모습을 본 주변의 친구가 학원을 오픈 하는데 나를 영어강사로 제의를 해주었다. 거절할
리가 만무했다. 친구도 자기 친구끼리 동업하는 것으로서 역시 그네들도 취업이 어려웠던지라
부모님의 도움으로 작은 학원을 운영하였고 나를 고용을 해주었던 것이다. 나에겐 하늘과 같은
기회였다.
기존에 내가 가르쳤던 아이들도 오게 하였고 처음 시작이었지만 여러 아이들 앞에 서서 가르치
게 되었다는 불안함이 없지 않아 있었지만 그동안 개인교습, 일대일 과외공부가 자그마한 밑천
이 되어 아이들에게 공부의 전달이 생각만큼 힘들지는 않았다.
여러 학생들 중에 나를 거부하는 학생도 있었지만 있는 그대로 순수성으로 나를 받아 주었었고
목적이 성적 향상으로 수강을 했었고 그 목적을 이룰 수 있도록 최대한의 전달함에 있어서 전심
전력을 보였었다.
그로 인해서 박경희란 이름이 주변 학원가에 퍼졌고 친구가 하는 학원도 점차 향상이 되었다.
이점은 나 또한 기쁨이다. 소수의 학생들 부모가 개인적으로 접근하셔서 일대일을 종용하셨고,
친구의 학원에 지장이 되지 않고 플러스가 되는 범위에서 거절하지 않고 교습을 했었고 또한 나
에게도 경제적으로 힘이 된바가 컸다.
그 당시 나는 작은 빌라의 방한 칸을 세를 들어서 살다가 부엌과 화장실을 갖춘 방한칸짜리 전세
를 얻을 수가 있었다. 꿈만 같은 현실이었다.
낮에는 나름으로 토플이나 토익 수강을 해서 개인적인 공부를 증진 시켜 보려고 애를 썼고, 저녁
에는 학원에 나가 아이들을 가르쳤고, 일주일 중에 한두 시간 일대일 학습을 하면서 시간을 요령
껏 쓰려고 분투했다.
집과 학원이 조금 멀었고 먼 곳의 아이들을 가리키려고 다니기엔 몸에 무리가 있었고 그래서 운
전면허를 소지해서 차를 운행하면서 학원을 다녔다.
그러나 일대일 교습은 장기적일 수 없었고, 변동이 심했다. 그리고 한국의 중산층이하의 국민
들 모두가 힘들었던 IMF 시절에 친구의 학원도 휘청거렸고 끝내 문을 닫게 되었다.
그나마 나 같은 장애인을 수용해서 취업의 기로에 서게 할 수 있었던 것은 나를 인정해 주었던
친구였지만 시절이 어려웠던 IMF인지라 또 취업과의 전쟁에 들어선다면 나는 완전한 패배임이
역력한 사실이었다. 정상인들도 구조조정으로 탄탄 회사에서 잘렸고, 재취업은 하늘의 별 따기
였다.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힘들었던 시절인 것 같다.
2년여 간의 IMF 시절에 나는 취업을 위한 온갖 수소문과 적극적인 대처를 해보려고 무던히도 노
력했었고 갖고 있던 재주라는 것은 대학 입학 후서부터 지금까지 아이들의 성적 관리로 영어를
가르쳤던 것만을 가지고 나로서 여기저기 취업의 문을 두드릴 수 있는 요소가 특별하게 없었음
을 여실히 인지했다. 물론 취업을 시작하는 팔팔한 갓 졸업한 대학생들에 비해 나는 나이도 들
었고, 건강하지도 않은 장애인이었고, 또한 내놓을 만한 특성도 부족했다.
학원 강사 쪽으로 알아본다 해도 일류대 출신을 원했고, 석사, 박사를 요구했으므로 나로선 명함
도 내밀지 못하는 실정이었다. 암담했고 내 자신에 대해서 나도 실망을 했었고 더 공부를 하고
준비를 하고 싶은 마음이었지만 우리나라의 공부라는 것은 분명 돈과 결부가 된다는 말에 부정
할 사람은 아마 한 명도 없을 것이라 본다. 나 역시 공부를 연이어서 준비하고 싶었지만 사실 지
금 생계와 견주었을 때 막연한 투자이므로 현실을 생각할 때 좀더 여유 있는 미래로 하고 싶은
공부를 보류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나마 지금의 지식과 공부의 연결에 끊김이 있으면 어찌하나 하는 조바심에 전공이었
던 ‘영문학’ 공부를 되짚고 복습하자는 생각에서 방송통신대학교에 원서를 내었고 차분하게 시간
을 낭비하지 않는 차원에서 후일에 재취업을 기대하며 친구가 다시 부를 수 있는 그런 날을 속절
없이 기대하며 그간의 공부를 복습 삼아 되짚듯이 공부를 해나갔었다.
중간 중간 예전에 가르쳤던 학생들이 많지는 않았지만 한 과목의 집중 관리에 나를 찾아 왔었고
그래도 한국의 어머니들은 그 어려운 생활에도 아이들의 공부를 우선시하심에 그 역량이 그나
마 나에게도 하나의 실마리로서 연이어질 수 있었다. 작은 희미한 촛불이라고 연상을 해보겠지
만 그래도 날 잊지 않고 찾아서 밀어주는 아이들과의 인연을 지극히, 아주 지극히 소중히 했었
다. 그 은혜의 갚음을 나는 두고두고 해야 할 것이다. 꼭 그럴 것이다. 영원히, 내가 살아 있는
동안에도…….
맏이인 소정이는 늦으나마 집에 연락을 했었고, 그 간의 생활은 물으나 마나이었음을 여실히 알
수가 있었다. 밖으로 나가 친구들과 어울리다 남자를 알게 되었겠고 쉽게 사는 삶의 기로에서
온갖 험난함을 맛보았으리라 생각이 들었다. 결국에는 지친 몸을 이끌고 집으로 들어왔고 조신
하게 선을 보아서 평범한 남자와 결혼을 하였고 아들 둘을 놓고 남들처럼 그저 평범한 삶을 살아
가고 있다.
간간이 남동생인 재민이가 나를 찾아 왔었다. 나는 늘 학원 강의에 내공부에 도서관에 나이가
들어도 예전의 삶과 지금의 삶이 하나도 변함이 없었다. 재민이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가끔씩
나를 찾아 와서는 본인의 공부나 앞으로의 진로 등을 상의하려고 했지만 난 그런 것을 들어줄 여
유가 없었고 그래도 동생들인 너희들은 불구의 몸을 가지고도 살려고 발악해대는 나보다도 나
은 상태이고 건강하니까 건강하다는 그것 하나만으로도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고, 건강하다는
것은 축복이다라고 한마디 하면서 힘들다는 불평이나 하소연의 표시가 보임직 할 때면 너희들
의 게으른 핑계의 박편임을 역력히 표현하며 일러 주었었다.
동생들에겐 싫은 소리인지라 듣기 싫었음이 분명했을 것이고 나는 그 외에 더 이상의 관심도 표
시하지 않았다. 그래서 동생들에겐 난 차가운, 독사 같은 인간이라는 욕도 먹었었다.
재민이는 공부도 열심히 했던 모범생으로 성장했고 대학도 좋은 곳으로 진학을 했고 취업도 나
처럼 힘듦 없이 이뤄졌고 나보다도 경제적으로 안정이 되어있는 상태이다.
집안의 장남으로서 문제성이 다분한 장녀인 소정이를 결혼시키는데 일익 공헌이 큰 몫을 해주었
다. 막내인 소연이도 좀더 빨리 같은 나이 또래보다 앞서 결혼을 해서 아이 엄마로서 평범한 삶
을 영위하고 있다.
다들 자신들의 삶에 몰입하고 노력하며 살고 있다.
지극히 나도 한 인간으로서 한 여자로서 가져 보고 싶던 생활들이었지만 내 인생에서 그런 삶의
몫은 평생 없을 것인지…….
소정이, 소연이 뒤이은 재민이의 결혼을 지켜보면서 한 가족의 일원으로서 나란 존재를 재인식
을 해보았다. 보잘 것 없는 불구의 몸을 가진 장애인이고, 그간 열심히 살아 왔다지만 더 열심히
산 사람에 비해 아무것도 아니었고, 알아 줄만한 사항 하나 없었고 건강하고 평범한 사람들의 삶
을 모방이라도 해보며 살고 싶은 열망으로 나쁜 짓이라곤 해 본적도 없고 오로지 주어진 삶에 충
실하며 애써왔던 내 자신의 몫은 아무것도 없는 듯 했다.
그에 반해 소정이나 소연이는 건강하다는 이유로 물론 그네들의 복도 있었겠지만 그래도 내가
해보고 싶은 삶들을 영위하고 살아가는 모습을 보았을 땐 내 자신에게 쓴 연민의 웃음이 자아내
지곤 했다.
세상의 현실은 건강하고 보기 좋은 요소에 눈길이 먼저 가는 것은 기정사실인 것이니까…….
나는 가끔 내 자신도 가늠할 수 없는 복잡한 심정으로 내 자신을 괴롭히곤 했었다.
장애인들은 장애가 진행성으로 이어질 수가 있는 장애가 있다. 나 역시 미약하나마 그러한 장애
이다.
나는 세월이 감에 따라 몸의 힘듦을 여실히 느끼게 되었고 아침에 눈을 떴을 때 뼈에 대한 고통
으로 오랜 시간을 신음과 식은땀으로 고통에 시달리곤 했다. 사는 것이 힘들었던지라 몸의 건강
에 신경을 쓰지 못했었고, 그럴 여유도 시간도 없었다. 그러나 쉬는 기간에 여기저기 몸의 아픔
의 신호가 오기 시작했다. 비록 몸이 부실한 불구의 몸을 가졌지만 웬만한 감기 등은 약국의 약
으로 통과 시켰었고 지극히 아프면 하루정도 몸져눕다가 다음의 학원 강의에 신경 쓰다 보면 아
픔이 앞으로 왔는지 뒤로 갔는지 모르게 지나칠 때가 많았었다. 그러나 몹시 고통을 느끼면서
병원을 찾게 되었고 여러 가지 물리치료를 권고 받았고 가능한 한 받으려고 애를 썼다.
그래서 재활병원을 추천 받아서 물리치료를 주기적으로 받는 시간을 갖게 되었다.
나는 재활병원에서 참으로 많은 장애인들을 보았다. 서른에 가까운 나이까지 정상인들과 경쟁
을 하며 살아왔었고, 어쩌다 우연히 주변에서 또 길에서 나와 같은 장애인을 보게 되면 눈을 다
른 곳으로 돌리곤 했었고, 그러면서도 본인도 장애인이면서도 다른 장애인들의 삶들이 참으로
궁금하기도 했었지만 그런 장애인들과 같은 맥락으로 나를 놓고 본다는 것이 내 자신도 싫었고
거부 반응이 왔다.
그렇지만 나 말고의 다른 장애인들은 어떠한 삶들을 살고 있는지에 대한 궁금함은 늘 갖고 있었
다.
어려서는 어땠을까? 나와 같았을까? 사춘기는? 지금 현실에서의 취업은 어찌 되고 있을까?
등등이 궁금했지만 그 마음의 문을 열고 그네들에게 접근해서 알아보고자 하는 용기는 절대적으
로 없었고 또한 모르면 말지 하는 그런 생각이었었다.
어느 날 물리치료가 끝나고 약 조제실로 가는데 물리치료사는 아닌 듯 하고 직원인 듯한 장애인
남자가 정상인 여자와 손을 잡고 한쪽 손에는 아이를 잡고서 미소 지으며 걸어가는 모습을 보았
다. 부부인가 보다라는 생각과, 가족인가 보군하는 생각이 들었고 절룩거리며 걸어가는 장애인
남자의 얼굴에 자랑스러워하는 얼굴의 빛이 온 얼굴에 번져있고 그 웃음의 의미가 알 듯 말 듯했
다. 장애인으로서 정상인 아내를 맞이한 모습을 남들에게 보이는 것이 저런 미소의 표현인가를
생각하며 장애인들 사이에선 장애인이 정상인 짝을 맞이하면 꽤나 성공한 거라는 의식이 든다
는 데 그렇다면 저 절룩거리며 걸어가는 장애인 남자는 성공한 의지의 장애인이란 의식에 저런
자랑스러움이 충만한 미소를 보이는 것이구나 라고 생각하면서 나 역시 이해가 될 것 같은 미소
를 지으며 약을 타고 집으로 돌아갔다.
집으로 돌아가고 있는 중간에 핸드폰으로 전화가 왔다. 남동생인 재민이다. 어머니가 돌아가셨
다고.
나는 차를 돌려서 재민이네 집으로 향했다.
어머니! 엄마!
나에겐 낯설기만 하고 내 인생에서 지워 버리고 잘라 버리고 싶었던 어머니란 존재.
같은 여자이지만 여자로서도 치욕스럽고 지혜롭지 못한 엄마를 늘 경멸하며 어떻게 저렇게 밖
에 살 수 없을까를 늘 되문하면서 나를 지치게 만들었다가 결국은 그 존재를 포기하게 하셨던 어
머니란 여인.
누가 감히 고맙고 감사한 부모 중 한 분인 어머니를 이리도 저하로 표현할 수가 있단 말인가?
그러나 나에겐 내 어머니에겐 나란 인간은 이렇게 밖에 표현을 할 수가 없다.
엄마는 아버지와 이혼했다. 그것도 요즘 유행이라고 하였던 조금 색다른 황혼이혼이었다. 아빠
는 다시 본 궤도를 찾으시자마자 옛 여인들을 찾아 나섰고 또 다른 삶을 영위하며 당신의 청춘
을 철저히 즐기셨다.
자식은 어찌 되던지 조강지처는 안중에도 없었다. 그러나 서슬 퍼런 장성한 자식들을 의식이나
했었는가는 몰라도 주기적으로 한번씩 들락날락은 여전했고 그러함과 동시에 엄마는 다시 알코
올에 손을 데었다.
나는 밖에 나와 살았으므로 그 지긋지긋한 엄마의 치닥거리는 남동생이 다 했다. 아버지에게 인
간적 양심을 기대하기란 참으로 불가능했고 이렇게 살다간 엄마가 정신병원이나 수용소에 들어
가야 할 상황이 될 수도 있겠고 이렇게 사느니 아버지를 완전히 타인으로 만드는 것이 엄마에게
도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고 일순간의 제정신이었을 때 재민이의 권고를 엄마도 포기하는
깊은 한숨을 쉬면서 동의를 표했고 아버지에게 통보했고 기다렸다는 듯이 도장이 찍힌 서류가
오고 가게 되었단다.
그 후에 우리 형제는 아버지란 존재를 지우고 싶어 했다. 만신창이가 되고 술에 쪄들어 언제 죽
을지도 모를 모습을 하고 있는 엄마, 시름시름 앓다가 결국에는 하늘나라에 가신 것이다.
한 여자로서 어찌 이리도 불쌍할 수가 있을까! 나보다도 더 불쌍한 인생이었고 같은 여자로서
일순간의 동정도 하기 싫었지만 이 험한 삶을 등지고 저 세상으로 가셨다고 하니 그 곳에선 이생
보다 나은 삶을 영위하시길 바라는 마음이 든다.
좋은 남자 만나서 사랑 받으며 자신의 삶을 피력하시며 살아가는 그런 삶을 기도해 드린다.
화장을 한 후 어머니의 뼛가루 한줌을 쥐고 강 위에 흩뿌리며 바람에 날려 가는 가루를 보면서
새삼 처음으로 통곡의 울음을 터트렸다.
처음으로 어머니에 대한 진실 된 마음에서부터 나온 울음이었을 것이다.
집으로 돌아와서 사흘 동안 앓아누웠다.
혼자였다. 혼자인 삶에 익숙해졌지만 혼자라는 느낌을 이 순간 더욱더 느껴졌다.
나에게 있어서 암이란 바로 혼자라는 느낌을 갖는 고독감이다. 나는 철저하게 그것을 예방하며
살려고 했었다.
살아가는 일이 혼자의 뜻으로 살아가는 것도 어렵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첫째로 경제적인 힘듦
일 것이고 두 번째는 역시 외로움일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견디기 어려운 것은 돈보다 더 외로
움이 앞설 수도 있다.
외로움이란 괴물이 언제부터인가 나의 가슴에 자리 잡기 시작했다. 외롭다는 감정이 온몸으로
꾸역꾸역 차올라 왔고 견딜 수 없는 외로움 때문에 어딘가에 가서 박살이 나도록 부서지고 싶기
도 했다.
기아의 고통만이 고통이고 고독의 고통은 고통이 아니라고 말 할 수 없음을 알았다. 만약에 인
간이 구조적으로 기아의 고통만 느끼게 되어 있다면 인간의 이야기는 얼마나 단순하고 밋밋할
것이겠는가?
이제 어머니의 장례식도 지났고, 형제들 또한 제자리로 돌아가서 자신들의 삶에 열심히 생활을
할 것이다.
나 역시도 다시 일어나서 취업 준비도 또한 알아봐야 했고 한군데 넣어 두었던 곳에서의 연락이
왔던 터라 면접에 대한 준비도 해야 했었다.
물론 면접이란 말에 찬이슬이 맺힐 것만 같았다. 늘 이 부분에서 자신이 없었으니까.
요즘 몸이 더 힘들어짐도 있고 해서 병원엘 자주 들락거렸다. 물리치료를 받으러 다니면서 많은
장애인들을 만났고 그네들 삶에 관심을 갖으며 친해 보려고 노력을 했다.
사회생활을 많이 하지 않은 탓에서인지 순수한 영혼을 가진 분들도 있었고 결혼해서 자식까지
있는 분들도 있었고, 취업에 대해서 나와 같이 고민들 하시는 분들도 있었고, 그나마 취업이 되
어서 의의를 가지고 열심히 사는 분들도 있었다.
나는 그네들의 생각이나 생활 등에 궁금함이 있어서 많이 대화를 하려고 했었고 점차 생활이나
생각을 알아감에 따라서 장애인이나 비 장애인이나 똑같은 사람임을 여실히 알 수가 있었다.
가장 커다란 열망들은 나와 같이 역시 취업의 문제였다.
나는 이분들과의 생활이나 대화를 함에 따라서 여러 종류의 취업에 종사하는 분들이 있음에 일
말의 장애인들을 위한 취업 알선을 위해서 한 쪽에서 힘써주는 기관도 있음을 처음으로 알게 되
었다.
병원에서 친구들을 조금 사귀게 되었다. 친구들 한 분은 남편은 목발을 의지해서 걷는 장애인이
고 아내는 휠체어에 의지해서 움직이는 장애인이며 서로 장애시설에서 생산직에 종사하다 사랑
의 감정이 싹터서 결혼을 하였고 건강한 아들과 딸까지 낳았다. 아들이 초등학교에 다녔고 참으
로 잘생겼다. 지금 남편은 집에서 취업을 알아보는 중이었고 아내는 전업주부이다. 영구 임대
아파트를 분양 받아서 나라에서 주는 정부 보조금으로 생활을 하고 있지만 턱없이 부족하여 가
까이 사시는 친정 부모님이 여러모로 도움을 주신다고 했다. 앞으로 자식을 위해서 좀더 설계
를 하기 위해 취업의 기로에 고민을 하고 있지만 남편이 학벌도 없고 배운 기술도 부족해서 고민
이라며 가끔씩 걱정을 주고받는다. 그런데 아내 분이 허리의 통증으로 허리의 뼈를 바로 펴는
수술을 하였고 회복기에 있었으며 내가 물리치료 받으러 왔다 갔다 하면서 얼굴을 익혔고 서로
커피한잔을 하며 사람 사는 이야기를 주고받는 좋은 친구가 된 것이다. 그 분을 통해서 다른 장
애인분들의 삶을 더욱더 접하게 되었고 또한 인사를 나누게 되면서 나는 좀더 장애인의 친구의
폭을 넓혀 나갔다. 역시 그 분의 친구 중 한 분의 이야기인데 내 마음에 심금을 울려주었던 이야
기이다.
뇌성마비로 손이나 다리 등이 본인의 의사와는 달리 헛움직임이 있는 여자 분으로서 목발을 의
지해서 겨우겨우 걷는 정도였고 거의 휠체어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얼굴은 여성적으
로 예뻤다. 정상인 남자와 사랑을 하게 되었고 그 남자는 집안의 장손이었다. 서로가 사랑을 해
서 결혼을 원했지만 정상인 남자 쪽 부모님이 절대적으로 반대를 하셨단다. 그러나 그 반대를
무릅쓰고 남자가 여자를 선택했고, 서로의 사랑의 결실을 맺게 되었다. 결혼식을 올리지 못하
고 두 분 이서 알콩달콩 사셨고, 그러는 와중에 자식이기는 부모 우리나라 세상엔 없을 것이고
나중에 동의 하셔서 모두가 보시는 곳에서 아름답고 축복 받는 결혼식을 하였으며 비록 장애를
갖은 아내이지만 지극히 다부지고 살림꾼이어서 결혼 후 일 년 만에 내 집을 마련하였고 주말이
면 하루도 빼지 않고 영화를 보며 삶을 살아있는 생명 적인 삶을 영위하고 있다는 아름다운 커플
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한편으로 가슴 뿌듯한 생각이 들기도 했다.
또 한 분은 서른이 넘은 남자 분인데 근육디스트로피라는 병명인데 점점 몸의 전체의 근육이 마
비되어 서서히 몸이 굳어지는 병이다. 인물도 좋고 성격도 온화하고 애교가 넘치는 매너가 만점
인 청년인데 한발자국을 움직일 수 없는 지나치게 힘든 장애를 갖고 있다. 그는 수도사업부에
근무하는 공무원인데 어느 누가 보아도 일할 수가 있을까 하고 궁금함을 일게 하는 그렇게 힘들
게 보이는 장애를 소지하고 있다. 주변에서 쉬는 것이 좀 어떠하겠는가 하고 넌지시 말을 건네
면 쉬라는 것은 본인더러 죽으라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하면서 일할 때에 그 때에 살아 있음
을 실감한다고 말을 한다. 일하지 않고 집에 누워있으면 숨쉬는 시체가 될 것 같은 모습이 본인
도 싫다라고. 그 소리에 주변의 사람들이 가슴 저림의 아픔을 느낄 수가 있다. 컴퓨터에 능해서
이분이 없으면 수도사업부가 안 돌아간다고 할 정도로 귀염을 받으므로 그는 더욱 일에 애착을
느끼며 삶을 인지하는 게 아닌가 싶다. 출퇴근에 회사의 직원이 동반해 주고 사무실까지 오르는
데 세 명의 정상인들의 부축을 받으며 일주일 중 하루도 빠짐없이 출근을 하는 성실한 분이시
다. 그러나 하루가 다르게 몸의 움직임은 더디어 지고 어느 날 친구의 전화에 미치겠다, 죽고 싶
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고 했다.
심히 지극히 그 심정을 백 번 이해하고도 남음이 있다.
이 외에도 다른 분들의 삶을 볼 수가 있다. 부부 중에도 장애인 부부도 많이 있었고 한 분은 장애
인이고 한 분은 정상인 분들도 있었다.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서로가 장애인분들 보다는 그래
도 한 분이 정상인 분이어야 서로 도움을 줄 수 있는 모습이 보기에도 마음 따뜻함이 더 큰 것은
사실이지만 지극히 편파적인 생각임을 알게 되었고 서로가 불편하다지만 덕 보자고 만남이 아
닌 이상 서로의 아픔을 보듬으며 살아가는 모습이 마음 따뜻하게 보였다.
이 외에도 많은 사연이 있는 친구가 있다. 좀 다른 이야기지만 한 장애인 남자가 한 장애인 여자
와 서로 좋아했고 사랑을 하며 임신까지 하게하고서 나중에 그 장애인 여자를 버리고 정상인 여
자와 결혼을 해서 그 장애인 여자를 좌절시켰다는 슬프고도 어이가 없는 이야기도 들었다.
나 역시도 장애의 몸을 가진 여자로서 내가 만약 결혼을 한다면 정상인 사람에게 욕심을 부릴 것
이다. 그러나 남녀간의 이기심이란 사람이라서 똑같은 것이라 생각이 든다. 그것이 장애인이라
서 더욱 큰 욕됨이 있는 것이 아니고 정상인이라서 그럴 수 있다함이 되는 것도 아닐 것이다. 그
버림받은 장애인 여자는 이 세상에 없지만 그 배신한 장애인 남자는 우아하게 정상인 여자와 결
혼한 의지의 장애인으로 성공했다는 의식을 가지고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과
연 양심이란 것이 있기는 한가를 생각하며 쓴웃음을 지어보게 된다. 그 의지의 장애인 남자가
내가 물리치료를 받으러 다니고 있는 병원의 직원으로서 다리 하나를 절룩이는 장애인이었다.
일전에 얼핏 지나치며 보았던……. 정상인 아내와 손을 잡으며 주변이 바라봐 주길 바라는 마음
에서인지 온 얼굴에 미소를 짓고 절룩이며 걸어가던 행복해 보이던 그 장애인 남자였다. 나 말
고 병원의 물리치료 받으러 다니는 장애인들은 다 아는 사실이었다.
나는 그리도 애타게 바라고 바랐던 취업에 통과를 했다. 내 전공을 살려서 영어와 관련된 사업
부에 취업을 하게 되었고 그 분야에서 상담에 관한 전반적인 마케팅 분야에 일을 하게 되었고 전
국적인 학원과 학부모의 상담업무와 학원 원장님들과 선생님들의 문법적 질문을 받아서 설명을
드리는 상담을 맡게 되었다. 제법 긴장을 하였지만 그 전에 학원에서의 학부모들과의 상담이 발
판이 되어 상담하는데 어느 정도 도움이 되었다. 일이 생각보다는 어렵지는 않았지만 그 전의
일했던 반향이 가까운 친구와 가족 같은 분위기로 일을 했다면 지금은 취업선의 조직망이 좀더
커졌고 체계적인 시스템에 익숙해져야 했다. 그 부분에 신선함을 느꼈고 지극히 바라고 바랬던
취업인지라 백퍼센트의 만족을 바랄 수는 없었어도 나는 최선을 다하려고 애쓰고 있다.
병원에서 만난 장애인들은 휠체어에 의지해야만 하는 장애인도 있었고 목발에 의지해서 걸어야
만 하는 장애인도 있고 뇌성마비, 근육디스트로피, 외소인 등등의 장애를 가진 분들이 있었는
데, 그분들 하나같이 열망했던 부분이 취업이었다.
난 선택의 여지가 없이 합격의 통지가 온 회사에 충성을 다할 것을 맹세했다.
그러는 와중에 예전에 학원을 해서 나를 강사로 고용했던 친구가 다시 학원을 오픈 하였고 다시
나에게 제의를 해 주었다. 나는 주중에 시간을 맞추어서 집중적인 한 과목 강의에 일임할 것을
약조했고 퇴근 이후의 시간과 주말의 시간을 열심히 일에 몰입했다.
그래서 그렇게도 바라던 작은 나만의 소유의 집을 마련하게 되었다. 부모 곁을 떠나 십여 년의
세월이 지나 이사를 십 여회나 넘게 다녔었고, 세간도 없었지만 장애의 몸으로 이사를 여러 번
다닌다는 것은 고역 중에 고역이었다. 취업에 애착을 갖는 것 또한 살기 위함이 컸고 그로 인해
내 생에 나만의 소유의 집을 갖을 수 있기를 열성적으로 소망했었고, 그랬지만 과연 내 집이 있
을 수 있을 거라고 과연 상상이나 했었던가.
그러나 대 저택을 소유한 사람들이 보기엔 보잘것없는 작은 아지트이지만 이사 다닐 염려가 없
는 나만의 보금자리를 갖게 되어 난 감사하고픈 마음이 든다. 난 기독교인으로서 “하늘은 스스
로 돕는 자를 돕는다!”란 말이 마음에 남는다. “하면 된다!”라는 말과 결부시키고 싶다. 나 같이
힘들게 보이는 사람도 하나하나 할 수 있음에 감명을 받은지라 난 내가 가르치는 소수의 아이들
에게 늘 직접적인 나의 삶을 들려주고 할 수 있음을 심어주려고 하고 있다. 예전의 학생들과 지
금도 끊임없이 왕래하고 내가 살아온 변천을 알고 있는 학생들과의 인연은 지금까지 십여 년간
지속이 되고 있다. 아직 시작에 불과 하지만 작은 꿈 하나하나 이뤄 소중하고 감사했던 분들에
게 표해 드리고 싶다. 나 보다 어렵고 심한 장애인들을 보면서 내가 걸을 수 있음에 감사함을 갖
게 되었고 움직일 수 있는 내 두 손에 키스를 퍼붓고 싶었고 볼 수 있음에 또한 감사의 눈물이 솟
구친다. 그래서 한순간의 시간도 소중히 하고 싶고 비록 나 역시 힘든 장애의 몸을 갖고 있지만
이 몸을 사랑하고 긍정적이고 희망적인 사고방식을 고집하고 싶다.
지금의 생활에 좀더 여유를 바라고, 더욱 소중히 생활에 임할 수 있기를 바라고, 당장은 아니겠
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원하던 공부의 연이음으로 진학해 보고픈 생각이고, 정말로 더 여유가 생
긴다면 나보다 더 어려운 사람들을 장애인이던 비 장애인이던 그런 분들을 작게나마 도울 수 있
었으면 하고 바라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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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수필 및 소설
수필
(수필) 나도 남들처럼 살고싶다.
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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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09.11 0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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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인간은 우연히 태어나는 게 아니라고 합니다. 인연 또한 우연히 찾아 오는 게 아니랍니다. 그 인연을 통해 사랑을 하고 나눔을 통해 정이 드는거라고 합니다. 언제나 가까운 곳에서 서로를 지켜 보고 있기에 마음속 깊이 그 사랑을 품으면 기쁨이 두배로 차 오르고
그리움으로 물들이는 향기조차 온통 즐거움으로 가득해질 것입니다. 긴 기다림을 통해 맺어진 한 사람과의 인연이 시도 때도 없이 아른거리는 건 서로가 간절함으로 한 곳을 바라보게 하는 사랑의 힘일 겁니다.-대자연의 영상편지중에서 - 좋은글 잘 읽었습니다.....^^
정상인이 가질수 없었던 부분을 님께서 갖고 계시다고 생각해 보면 삶에대해 보다 좀더 만족과 행복 그리고 의미를 느낄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힘겹게 살아 오셨지만 님의 확고부동했던 굳건한 삶의 자세가 타의 모범이되고 교훈이 될수있으니 오히려 감사할수있는 삶이라고 감히 말씀드려보며 앞으로 더욱
행복한 삶이 되시기를 진심으로 빌어봅니다.....† 가은님의 글 가슴깊이 잘 읽었구요.. 항상 건강하시고 은총으로 가득한 삶 되십시오.. 외로운 마음 사랑으로 가득가득 채워질수 있으시기를 진심으로 바래보면서........♧
주님의 영광이 함게 하시길 진심으로 바랍니다..샬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