放浪詩人: 詩仙 蘭皐 金炳淵
방랑시인 김삿갓 - 명국환
1957
김문응 작사, 전오승 작곡
https://www.youtube.com/watch?v=zcIQIypWCU8&list=RDzcIQIypWCU8&start_radio=1
~ 57년 동명 영화 주제가 ~
죽장에 삿갓쓰고 방랑 삼천리
흰구름 뜬 고개넘어 가는 객이 누구냐
열두대문 문간방에 걸식을 하며
술한잔에 시한수로 떠나가는 김삿갓
세상이 싫던가요 벼슬도 버리고
기다리는 사람없는 이거리 저마을로
손을 젓는 집집마다 소문을 놓고
푸대접에 껄껄대며 떠나가는 김삿갓
바랑에 지치였나 사랑에 지치였나
개나리 봇짐지고 가는곳이 어데냐
팔도강산 타향살이 몇몇해든가
석양지는 산마루에 잠을 자는 김삿갓
이문열 작가가 가장 애착이 간다고 꼽은 장편소설 '시인'. 19세기 실재 인물인 김병연(김삿갓)의 특이한 생애를 독특한 상상력으로 소설화했다. 이문열에게 ‘위장된 자서전' 또는 '고백록’이기도 하다.
[이 작품은] 조선 후기 실존했던 김병연(김삿갓)에 대한 설화나 문헌 등을 때로는 수용하고 때로는 부정하면서 그의 삶을 재구성하고, 그의 삶의 여정을 통해 완성되어 가는 그의 시 세계를 보여 주고 있는 평전과 같은 소설이다.
*배경
① 시간 - 조선 후기(19세기)
② 공간 - 금강산
*시점 : 전지적 작가 시점
*주제 : 김병연의 삶과 예술관
어휘 풀이
*관자 : 망건에 달아 당줄을 꿰는 작은 단추 모양의 고리. 신분에 따라 금(金), 옥(玉), 호박(琥珀), 마노, 대모(玳瑁), 뿔, 뼈 따위의 재료를 사용함.
*치자(治者) : 한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 권력을 가진 사람.
*차꼬 : 죄수를 가두어 둘 때 쓰던 형구(刑具). 두 개의 기다란 나무토막을 맞대어 그 사이에 구멍을 파서 죄인의 두 발목을 넣고 자물쇠를 채움.
*천문 : 당나라 문예 이론가 유협(劉#21232;)은 우주 만물과 자연을 하늘이 물(物)을 빌려 쓴 천문이라고 하였음.
*인문 : 경전이나 역사, 문학 따위의 문자로 표현된 모든 인위적 문장.
*공령 : 고려·조선 시대에, 문과(文科) 과거에서 시험을 보던 여러 가지 문체.
*갈음 : 다른 것으로 바꾸어 대신함.
*이목구비 : 귀 · 눈 · 입 · 코를 아울러 이르는 말.
*만상 : 온갖 사물의 형상.
*공연히 : 아무 까닭이나 실속이 없게.
*선기(禪氣) : 깨달음과 속세를 떠난 초연한 경지.
*들척지근한 : 약간 들큼한 맛이 있는.
*종당 : 일의 마지막.
이해와 감상
이 작품은 김삿갓으로 불리는 조선 후기 시인 김병연을 모델로 하여 쓴 소설이다. 김병연의 조부 김익순은 홍경래의 난에서 봉기군들에게 잡혀 항복한 것이 문제가 되어 역적으로 몰린다. 이로 인해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벼슬길이 막힌 김병연은 떠돌이의 삶을 살며 시인으로 살아간다. 작가는 김병연의 이야기에 덧붙여 새로운 인물 ‘시인’을 창조했다. 이 작품은 사회에서 소외될 수밖에 없었던 김병연의 고뇌에 찬 삶과 그에 따른 예술관 정립 과정을 잘 그리고 있다. 제시된 부분은 금강산에서 늙은이와 그(김병연)가 예술에 대한 대화를 주고받는 부분으로 예술에 대한 작가의 인식을 보여 준다.
전체 줄거리
김병연은 어릴 때 할아버지의 반역으로 외거 노비의 집에 숨어 지내다가, 3년 뒤 사면되어 다시 부모를 만나게 된다. 하지만 대역 죄인의 자손에게 가하는 체제의 보복으로 아버지는 죽음을 맞이하게 되고 남은 가족들은 비참한 삶을 연명하게 된다. 그러나 어머니만은 병연을 통해 재기할 것을 꿈꾼다. 그가 20세가 되었을 때 참가한 백일장에서 할아버지를 단죄하고 장원을 하지만, 노진이라는 사람에게 패륜이라는 말을 듣고 충격을 받아 산골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아간다.
그는 어머니의 강요에 못 이겨 과거를 보러 가나 결국 포기하고 세도가인 안응수의 문객으로 있다가 출신 성분이 드러나 그곳에서도 나오게 된다. 이후 그는 모든 것에서 벗어나고자 금강산으로 들어가게 되고 거기서 취옹을 만나 시에 대해 문답하며 시인으로서 새롭게 출발하는 계기를 맞는다. 이후 방랑을 하며 여러 의미 있는 만남을 통해 그의 시는 변신을 거듭해 가고 결국 언어를 넘어선 경지에 이르게 된다. 그를 찾아온 아들 익균은 이미 세상에 얽매이지 않는 진정한 시인의 경지에 이른 아버지를 발견하고 그와 이별한다.
인물 소개
*그(김병연) : 할아버지의 반역죄 때문에 집안이 몰락하고 관직에 오르는 기회마저 박탈당하자 집을 나와 떠돌며 시를 쓰는 인물. 취옹과의 만남을 기점으로 시인으로서 본격적인 삶이 시작되며 인생 속에서 겪은 많은 일들을 통해 결국 취옹의 시론에 동화된다.
*늙은이(취옹) : 목숨을 건져 준 여인과 함께 금강산에 주막을 차리고 살아가는 시인. 김병연의 시론이 자신의 그것과 같을 것이라 기대했지만 이내 실망한다. 하지만 결국은 자신의 시 세계에 들어올 것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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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연구실
‘시인’의 구성
이 작품은 김삿갓으로 알려진 김병연의 삶을 설화와 문헌 등을 참고하여 평설 형식으로 구성한 소설로, 일대기 형식의 구성을 취함으로써 한 인간의 삶과 그 삶을 통해 시의 세계가 어떻게 완성되어 가는지를 보여 주고 있다. 특히 우연히 만나게 되는 인물들을 통해 그의 시 세계가 어떤 영향을 받는지 살펴보는 재미를 준다.
‘늙은이’의 등장이 갖는 의미
늙은이는 시를 신분 상승과 체제 유지를 위한 도구 정도로만 인식하고 있던 그(김병연)가 온전한 시인의 길로 들어설 수 있도록 하는 계기가 되는 인물이다. 그는 늙은이와의 대화를 통해 당장 무엇을 깨닫지는 못하지만, 이후에 깨달음을 얻고 늙은이의 시론에 동화된 삶과 작품 세계를 이루게 된다.
‘늙은이’가 생각하는 시의 궁극적인 도달점
시는 어떤 가치에 종속된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의미 있는 것임을 역설하고 있다. 늙은이는 모든 공리적인 효용과 실용적인 목적에서 벗어나 그 자체로 의미를 갖게 함으로써 모든 것을 대신할 수 있게 하는 경지를 시가 도달해야 하는 경지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늙은이가 생각하는 ‘자유’의 의미
우리 마음을 얽매고 있는 모든 것에서 벗어나 만상이 품은 원래의 뜻을 바라보는 것이다. 이는 만상의 원뜻을 보기는 하지만 무엇인가를 다른 하나로 바꾸려는 도(道)와는 차원을 달리하는 것이다.
늙은이가 그에 대한 실망을 표현한 방법
늙은이는 자신이 기대했던 것과 달리, 김병연이 참된 시인이 아님을 인식하게 되면서 표정과 외양이 변하고 있다. ‘이목구비의 선조차 분명치 않은 얼굴로 온전히 돌아가 있었다.’, ‘더욱 힘없이 처져 내렸다.’, ‘더 말할 기운조차 없다는 듯 숨까지 헐떡거리며 대답했다.’ 등의 표현에서 이를 알 수 있다.
‘그’(김병연)와 늙은이의 예술 논쟁
‘시’에 대한 김병연과 늙은이의 관점은 차이를 보인다. 그리고 문답이 모두 끝날 때까지 이 차이는 좁혀지지 않는다. 문답을 하던 그 당시에는 김병연이 늙은이의 예술관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후 방랑을 통해 여러 의미 있는 경험을 한 김병연은 비로소 늙은이의 시 세계를 이해하고 그와 같은 경지에 도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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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에서 분류한 김병연 작품의 단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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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에서 보여 주고 있는 시의 완성된 경지
그(김병연)는 늙은이(취옹)와의 문답이 끝나고 다음 날 주막을 떠나며 취옹을 보게 되는데, 그 모습이 바로 ‘시인’에서 보여 주고 있는 시의 완성된 경지이다. 취옹에게로 다가가며 무심코 그 주위를 둘러보던 그는 갑작스런 전율 같은 걸 느꼈다. 조는 듯 앉아 있는 취옹과 주위의 경물이 이뤄 내고 있는 너무나도 빈틈없는 조화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서 아들 익균의 눈을 통해 본 김병연의 모습이 취옹과 닮아 있다. 마침내 김병연은 취옹이 도달한 시의 완성된 경지에 이르게 된 것이다.
김병연 관련 설화
김병연이 방랑하며 보여 준 기이한 행적에 대한 이야기가 작품과 책으로 전해지는데, 후대에 편찬된 “김립 시집(金笠詩集)”, 황오(黃五)의 ‘김사립전(金莎笠傳)’, 신석우(申錫愚)의 ‘기김대립사(記金獗笠事)’ 등이 그것이다. 특히“김립 시집”은 김병연의 시와 관련된 일화들이 다수 들어 있다. 하지만 여기에 실린 작품들이 실제 김병연의 작품인지 아니면 후대에 설화와 함께 창작된 것인지는 논란이 있다.
작가 소개 - 이문열(李文烈, 1948 ~ )
소설가. 1979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새하곡’이 당선되어 등단하였다. 그의 작품은 신화와 역사의 한 부분을 우화적 형식을 사용하여 우회적으로 비판하는 경향, 민족 분단과 이데올로기 갈등을 다루는 경향, 예술이나 인생 등의 관념적인 문제를 탐구하는 경향으로 구분된다. 주요 작품으로 ‘젊은 날의 초상’, ‘사람의 아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등이 있다.
함께 읽어보기‘금시조’, 이문열
‘고죽’이라는 한 서예가의 예술적 고뇌와 성숙의 과정을 통해 진정한 예술이 무엇인지에 대한 고민을 보여 준 작품으로, 예술 이념을 다룬 한 편의 예술가론과 같다. 한 예술가의 예술적 완성의 과정을 보여 주고 있다는 점에서 ‘시인’과 유사점이 있다.
묘앞의 왼쪽은 태백산 끝자락, 묘앞은 소백산 시발점
김삿갓 주거 유적지-김삿갓이 방랑을 떠나기 전까지 살던 곳.
허기진 배고픔을 함께 나눈 200년된 고염나무와 돌배나무, 밤나무가 주거지를 지키고 있다
詩仙 蘭皐 金炳淵之墓 김병연 金炳淵(호: 난고 蘭皐, 별호: 김삿갓-金笠):1807~1863
순조 11년(1811) 섣달, 평안도 지방의 차별과 세도정치를 비판한 홍경래 난의 봉기로 관서지방의 선천방어사 조부 김익순은 반란군에게 투항하여 벼슬까지 받았는데, 관군이 난을 진압 후에 역적에게 항복한 대역죄인이 되어 능지처참 형을 받았다.
그리고 조모 전주 이 씨는 광주의 관비로 축출되었으며, 3족을 멸하는 명이 내려질 무렵, 김익순의 아들인 김안근은 곧 닥치게 될 멸문지화를 피하려고 세 아들의 맏이인 7살 된 병하와 더불어 둘째인 5살 배기인 병연은 노복 김성수의 등에 업혀 황해도 곡산으로 피신시켜서 노비로 위장한 고난의 삶이 이어졌다. 그리고 부친 김안근은 남해로 귀향 갔고 모친은 셋째 병호를 데리고 여주 이천으로 피신하였다.
그러나 후일에 순조 때 세도정치의 중심에 있는 안동 김 씨의 방계 친척인 영안 부원군 김조순의 둘째 아들인 김좌근이 삼족을 멸하는 명을 거두게 하여 폐족으로 감형시켰으나, 부친은 지병인 노점(癆漸-폐병)이 악화하여 죽었고, 모친 함평 이 씨는 식구 모두를 데리고 역적 집안이라는 세인의 괄시와 천대를 피해서 강원도 영월로 이주하여 살았다.
모친은 한이 되어 쓰러진 가문을 다시 일으키려고 영특한 둘째 병연으로 하여금 학문에 열중하게 했으나, 지방 관아에서는 대역죄를 진 죄인에 대한 감시와 천대가 끝없이 이어졌고, 고을에서도 소문이 퍼져서 생계를 유지할만한 일을 찾을 수 없어서 장남 병하는 장돌뱅이가 되어 생계를 꾸려나가다가 결국 산속으로 들어가서 밭을 일구면서 농사짓는 일을 하면서 비참한 생활을 이어갔다.
훗날 20세의 성인이 된 병연은 장수 황 씨와 혼인을 치르고 영월 동현에서 실시한 백일장 시제인 ‘논 정사산 충절사, 탄 김익순 죄통우천(論 鄭嘉山 忠節死, 嘆 金益淳 罪通于天)’에서 정가산의 충절을 기리고, 조부를 호되게 비판하여 장원이 되었으나, 모친으로부터 할아버지가 대역죄인으로 능지처참당했다는 소식을 접한 후로 크게 낙심하여 영월군 하동면 와석리로 옮겨서 은둔 생활을 하다가 22세 때 아들 학균을 낳은 뒤에 상경하여 이름을 김란으로 바꿔서 권문인 안응수의 문객이 되어서 중앙에 출세를 도모했지만, 김좌근이 소문이 자자한 비상한 문객이 병연이라는 걸 눈치채고 그를 불러서 호통치며 멸족을 면하게 해 줬으면 이제 근신하면서 죽은 듯이 없는 듯이 살아가라고 하였다.
병연은 또 큰 상처를 받고 낙향하여 형도 25세에 역시 부친처럼 노점으로 죽자 아들 학균을 대가 끊긴 형한테 계자 입양시키고 후에 둘째 익균을 얻었다. 그러나 병연은 낙향한 후로 학문을 멀리하게 되자, 모친은 그를 다시 보지 않겠다는 편지를 병연의 처에 남기고 친정으로 돌아갔다.
그는 25세에 하늘을 볼 수 없는 죄인이라 자책하며 삿갓을 쓰고 죽장 짚고 방랑길에 올랐다. 그리고 김삿갓(김립)이라는 별호를 얻고서 전국을 방랑하며 여러 기인들과 교우하면서 술 마시고 기생들과 어울리면서 숱한 기행과 더불어 자연경관이며 세도가를 비판하고 고통과 절망 속에 사는 민초들의 애환을 담은 많은 시를 읊었다.
그 역시 노점이 악화하여 철종 14년(1863년)에 56세로 전남 화순군 동복에서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하였는데, 몇 년이 지나서 아들 익균은 유해를 영월군 하동면 와석리 노루목으로 이장하였다.
그런데 그 후로 안동 김 씨 세도가들은 김익순의 복권이나 사면을 건의하지 않았는데, 45년이 흐른 후 순종 때 총리대신 이완용의 건의로 1908년 4월 12일에 기하여 조부 김익순은 명예회복이 되어 작위와 시호가 복권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