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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마경 강설 3 /불국품 1 /육성취(六成就)
一, 불국품(佛國品)
강설 ; 유마경에는 모두 14품이 있다. 제1 불국품이란 글자의 뜻대로라면 부처님의 나라가 어떤 것인가를 밝힌 내용이다. 달리 표현하면 이상세계요, 유토피아요, 낙원이요, 무하유지향이요, 극락이요, 천당이다. 행복과 평화가 흘러넘치는 곳이다. 그런데 유마경에서 밝힌 부처님의 나라라는 것은 뜻밖에도 보통 사람들의 생각이나 소승적 상식과는 다른 이상세계, 즉 부처님의 나라를 설명하고 있다. 또한 부처님의 나라를 이야기 하시다가 보살의 정토까지 부연해서 설명하고 있는데 크게 보면 모두가 이상세계인 부처님의 나라가 된다. 중생이 곧 부처님의 나라며, 곧은 마음[直心]이 보살의 정토라고 하였다. 진정한 이상세계는 이런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1, 육성취(六成就)
如是我聞하사오니 一時에 佛이 在毘耶離庵羅樹園하사 與大比丘衆八千人으로 俱하시니라
이와 같은 사실들을 저는 들었습니다. 어느 날 부처님께서 비야리성의 암라나무 동산에 계셨는데 큰 비구스님들 8천 명과 함께하셨습니다.
강설 ; 예전의 조사들은 경전을 이해하는 데는 반드시 여섯 가지 조건이 갖추어져서 경전이 성립되었음을 알아야 한다고 하였다. 그 여섯 가지란 곧 육성취(六成就)다. 즉 신(信), 문(聞), 시(時), 주(主), 처(處), 중(衆)이다.
“이와 같은 사실들[如是]”이란 후대의 사람들이 부처님께서 설하신 내용과 “같다.”라는 말을 통해서 경전의 내용을 그대로 믿기[信]를 바라는 의미라고 하였다.
“저는 들었습니다[我聞].”라는 것은 “저”란 아난존자다. 경전을 결집 편찬할 때 총 책임자였던 아난존자가 5백 명의 아라한들 앞에서 자신이 부처님께 들은 바를 그대로 기억하여 다시 말씀드리는 것이지 자신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의미다. 불교의 모든 경전은 아무리 후대에 결집 편찬 되었더라도 세존으로부터 들은 것을 아난존자와 5백 명의 아라한들이 함께 편찬하였다는 원칙을 지켜서 표현한다. 설사 서기 2011년에 편찬한 경이라 하더라도 그 원칙은 마찬가지다.
“어느 날[一時]”이란 과거 현재 미래를 모두 아우르는 시간이므로 언제나 유효한 진리의 가르침이라는 의미다. 만약 2011년 1월 1일이라고 기록하면 그날만 유효할 가능성이 많다. 시간을 말할 때 과거, 현재, 미래를 이야기 하며 9세와 10세를 말하지만 과거 속에 현재와 미래가 있고 현재 속에 과거와 미래가 있고 미래 속에 과거와 현재가 있기 때문이다.
“부처님”이란 여기서 설법하신 법주[主]가 된다는 뜻이다.
다음은 설법하신 장소[處]다. “비야리성(城)의 암라나무 동산”이란 비야리성에 있는 ‘암라나무라는 아가씨’가 시주한 동산에서 설법하였다는 뜻이다. 암라나무 아가씨는 뒤에 마갈타국의 빈비사라왕의 왕비가 되었다. 동산이 그대로 법석이며 사찰이며 법당이다. 그야말로 야단법석이었다. 그리고 이곳 비야리성이란 지금도 불교의 성지로서 이름이 높다. 인도불교성지를 순례하는 불자들은 반드시 들리는 곳이다. 부처님의 유적지를 널리 알리기 위해서 세운 아쇼카왕[阿育王]의 석주(石柱)는 아직도 여러 개가 남아 있지만 비야리성의 석주가 가장 완전하다고 한다.
다음은 함께한 청중들[衆]이다. “큰 비구스님들 8천 명”이라고 하였다. 비구들의 숫자도 많지만 다음에는 3만 2천명의 보살들까지 등장한다. 대승경전으로서의 위용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거의 모든 경전은 이와 같은 여섯 가지 조건들을 다 갖추고 있다.
한 가지 유의할 것은 “큰 비구스님 8천명”이라고만 하였지 그 비구스님들의 구체적인 이름이 거론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경전의 성격과 그 격을 엿볼 수 있는데, 즉 대승보살사상을 드날리려는 의도가 너무나 강하게 드러나 있다고 보겠다. 아래의 보살들에 대한 배려를 생각하면 아무리 소승성문들이라 하더라도 전통적인 승가의 입장에서 보면 좀 지나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그래서 틱 낙한[釋一行] 스님은 이 유마경을 싫어한다는 말도 있다. 경전을 결집하고 편찬한 사람의 뜻이라고 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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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마경 강설 4 /불국품 2 /2, 보살대중의 덕행 1 /정법을 받아 지닌다
2, 보살대중의 덕행
菩薩은 三萬二千이며 衆所知識이라
보살들은 3만 2천명이며 그들은 많은 사람들이 다 잘 아는 이들이다.
강설 ; 비구스님들은 법문을 듣는 대중으로서 부처님을 항상 따라다니는 이들이다. 그러나 보살들은 대승경전에만 등장하는데 그 수효도 적지 않다. 알고 보면 세상은 온통 대승보살의 세상이라는 뜻이 담겨 있다. 따라서 그들의 덕행도 세상에서 아주 빼어난 분들이어서 세상 사람들이 그 이름을 들으면 다 잘 아는 분들이다. 장황하리만큼 그들의 덕행에 대해서 찬탄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덕행은 법문을 듣는 보살들만의 것이 아니라 실은 모든 불자들이 마음에 새기고 생활에 실천해야할 덕목들이다.
大智本行을 皆悉成就하니 諸佛威神之所建立이라
큰 지혜의 근본 수행을 모두 다 성취하였으니 이것은 모든 부처님들의 위신력으로 건립된 것이다.
강설 ; 보살이란 불교적 관점에서 보면 사람으로서 사람답게 의미를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사람답게 산다는 것은 나이에 상관없이 항상 자신의 발전과 향상을 위해서 부단히 노력하며, 한편으로는 자신의 능력만큼이라도 남을 위해서 온갖 방면으로 베풀고 나누어 주는 삶을 사는 사람을 말한다. 이 유마경에서는 먼저 큰 지혜, 즉 깨달음의 지혜를 갖추는 것을 가장 근본이라고 하였다. 지혜는 불교의 근본이며 보살도의 근본이다. 그 또한 모든 깨달은 사람들이 당겨주고 밀어주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라고 하였다. 다시 말하지만 불교의 큰 근본은 지혜다. 자비도 지혜가 갖추어진 뒤에야 가능하다. 그러므로 “큰 지혜의 근본 수행”이라고 표현하였다.
爲護法城하야 受持正法하며
법의 성곽을 잘 보호하여 정법을 받아 지닌다.
강설 ; 법회에 모인 보살들은 또한 법의 성곽을 잘 보호해서 정법을 받아 지킨다고 하였는데 이 일이야말로 불자에게서 가장 중요한 일이 아닐까한다. 수 십 년 불교 안에서 몸담아 오면서 어떤 이가 불법을 헤치는데도 그것을 보호하려는 생각이 없다면 그는 불자가 아니다. 외도며 마군이다. 그리고 불교를 말할 때는 반드시 정법으로서 가르쳐야 한다. 온갖 삿된 법과 기만하는 말과 혹세무민하는 말을 하면서 그것을 불교라고 한다면 함께 지옥에나 떨어질 일이다. 정법만이 불교라는 사실을 가슴 깊이 새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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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마경 강설 5 /불국품 3 /2, 보살대중의 덕행 2/ 이름은 시방에 알려지고
能師子吼하야 名聞十方하며
능히 사자후를 부르짖어 그 이름이 시방에 두루 알려졌다.
강설 ; 석가세존은 왜 지금까지 세상에 두루 알려졌는가. 문수 보현 관음 지장은 또 어떻게 해서 그 이름이 널리 알려졌는가. 오직 사람들의 미혹한 마음을 일깨우는 진리의 가르침 때문이다. 그들은 누구에게도 단돈 만원이나 밥 한 그릇 베푼 적이 없다. 다만 모든 존재의 바르고 참된 이치를 사람들에게 깨우쳐 줬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이 세상에 가장 위대한 시주[大施主]가 된 것이다.
부처님이나 보살들의 설법을 왜 사자후라고 하는가. 참되고 바른 진리의 가르침을 통해서 삿된 소견과 잘못된 견해들을 모두 두렵게 만들고 깨뜨려 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마치 사자가 크게 소리를 지르면 온갖 짐승들이 모두 두려움에 떨거나 도망을 가는 것과 같다.
衆人不請이로대 友而安之하며
여러 사람들이 청하지 않더라도 벗이 되어 그들을 편안하게 해 준다.
강설 ; 유마경에는 주옥같은 명구가 많다. 여기에 나오는 불청지우(不請之友)도 그중에 하나다. 사람들은 대개 가까운 사람, 또는 친한 사람, 인연이 깊은 사람들만 찾아서 함께하려고 한다. 그러나 사람답게 살고자하는 보살들은 설사 누가 청하지 않더라도, 또한 전혀 모르는 사람이라도 우정 그에게 다가가서 벗이 되어준다. 벗이 되어주면서 그들을 가르치고 깨우치고 배려하고 보살피며 그들을 다방면으로 도우며 편안하고 행복하게 해 준다. 예컨대 세계에서 제일가는 구호단체인 <자제공덕회>를 이끌어 가는 대만의 증엄(證嚴,1937년 5월 4일생)스님은 기독교인들에게까지 교회를 지어주어 편안하게 예배를 볼 수 있게 해 준 사람과 같은 경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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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마경 강설 6 /불국품 4 /2, 보살대중의 덕행 /3 삼보를 이어서
紹隆三寶하야 能使不絶하며
삼보(三寶)의 전통을 이어서 능히 끊어지지 않도록 한다.
강설 ; 보살은 책임이 크다. 부처님이 세상에 영원히 계시도록 해야 하고, 부처님의 가르침이 또한 영원히 이 땅에 머물게 해야 하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들이 끊어지지 않고 계속 되도록 해야 한다. 이것이 보살의 의무며 책임이다. 세상이 보다 더 좋은 세상이 되게 하려면 반드시 성현들의 가르침과 그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들이 더욱 많아야 한다.
降伏魔怨하고 制諸外道하며
마귀와 미워하고 질투하는 이들을 항복받으며 모든 외도들을 제압한다.
강설 ; 마귀와 미워하고 질투하는 이와 외도들을 항복하고 제압한다는 것은 자신을 다스리고 바르게 수행하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일이다. 도적을 잡으려면 먼저 도적이 있는 곳을 알아야 하듯이 마귀와 미워하고 질투하는 이와 외도들은 자신 이외의 장소에 있다고 여기는 잘못된 생각부터 바로 잡아야 한다. 백수의 왕인 사자는 어떤 짐승도 싸워서 이길 수 없는데 다만 사자의 몸에서 생긴 벌레가 사자를 병들게 하고 죽게 만든다. 그와 같이 자신을 망하게 하는 것은 자신이지 남이 아니다. 따라서 불교를 무너뜨리는 것은 다른 종교인이 아니다. 다름 아닌 불교인이다. 마귀와 미워하고 질투하는 이들과 외도들은 모두 자신 안에 존재한다. 그러므로 자신을 항복받고 제압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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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마경 강설 7 /불국품 5 /2, 보살대중의 덕행 4/ 덮고 속박하는 번뇌
悉已淸淨하야 永離蓋纏하며
모든 면이 청정해서 심성을 뒤덮어 어둡게 하는 번뇌[蓋]와 사람을 속박하여 부자유 하게하는 번뇌[纏]를 영원히 떠났다.
강설 ; 번뇌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탐심, 진심, 치심에서부터 심지어 8만 4천 번뇌까지 말한다. 여기에서 “심성을 뒤덮어 어둡게 하는 번뇌[蓋]”란 다섯 가지가 있다. 1, 탐욕. 2, 진애. 3, 수면. 4, 마음이 들떠서 악을 짓는 것[掉擧惡作]. 5, 의심이 그것이다.
“사람을 속박하여 부자유 하게하는 번뇌[纏]”란 열 가지가 있다. 1, 남이 잘한 일이나 훌륭한 사람을 공경할 줄 모르고 오히려 꺼리고도 부끄러움이 없음[無?]. 2, 자신의 잘못을 남이 알아도 부끄러움이 없음[無愧]. 3, 질투. 4, 인색함. 5, 후회함. 6, 수면. 7, 들뜬 마음. 8, 혼침. 9, 분노. 10, 자신의 허물을 덮어버림 등이다. 보살은 이와 같은 몹쓸 번뇌를 영원히 떠나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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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마경 강설 8 /불국품 6 /2, 보살대중의 덕행 /5, 해탈의 경지에 편안히 머물면서
心常安住無碍解脫하야
念 ? 定 ? 總持와 辯才不斷하니라
마음은 항상 걸림이 없는 해탈의 경지에 편안히 머물면서
바른 기억과 바른 선정과 선한 일을 모두 가지는 것과 변재가 끊어지지 않게 한다.
강설 ; 보살의 마음자세다. 보살은 스스로 걸림이 없는 해탈에 머물러야 다른 사람을 위해서 자유롭게 자비를 구사할 수 있다. 자신이 속박되어 있다면 남을 해탈 시킬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해탈이 우선이며 다음은 바른 기억과 바른 선정과 선한 일을 모두 가지는 총지와 변재가 끊어 지지 않아야 한다. 보살의 조건은 이렇게 끝없이 이어진다.
布施 . 持戒 . 忍辱 . 精進 . 禪定 . 智慧와
及方便力이 無不具足하야 逮無所得하니라
보시와 지계와 인욕과 정진과 선정과 지혜와
방편과 힘이 모두 다 갖추어 져서 얻을 것이 없는 데까지 이르렀다.
강설 ; 보살의 실천 덕목이며 모든 불자의 실천 덕목이 소개되었다. 보살의 덕행을 찬탄하는데 반드시 있어야할 여덟 가지 조건들이다. 6바라밀에서 방편과 힘이라는 두 가지가 더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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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마경 강설 9 /불국품 7 /2, 보살대중의 덕행 /6, 깨달음을 얻은 편안한 마음[法忍]
不起法忍하고 已能隨順하야 轉不退輪하며
참다운 깨달음을 얻은 편안한 마음[法忍]에서 일어나지 않고, 능히 중생들을 수순해서 물러서지 않게 하는 법륜을 굴린다.
강설 ; 보살들이 중생을 교화할 때 자신이 깨달은 경지를 떠나서 중생들의 현실에만 맞추어 가르친다면 그것은 중생과 뒤섞여 본래의 목적을 잊어버리게 된다. 그렇게 되면 보살이 도리어 중생이 되고 만다. 중생들을 교화하기 위하여 지옥에 가고, 축생에 가고, 아귀에 가더라도 보살은 항상 깨달음의 경지에 머문 상태로 교화하여야 한다. 화엄경에서는 “부처님은 깨달음의 자리인 보리수 아래에서 일어나지 않고 일곱 곳에 법석을 펼쳤다.”고 하였다.
善解法相하야 知衆生根하며
여러 가지 가르침의 특질들[法相]을 잘 알고 중생의 근기를 잘 안다.
강설 ; 보살이 중생을 교화하는 데 먼저 반드시 갖추어야할 조건이 있다. 그것은 가르침의 특질들을 잘 알아야 하는 것이다. 즉 소승법과 대승법과 연기법과 공의 이치와 일심의 내용과 비밀불교와 선불교와 부처님의 생애와 불교의 역사까지 이 모든 것들을 잘 알아야 하는 것이다. 그 다음은 사람들의 성향과 속성과 근기와 수준을 잘 알아야 하는 것이다. 포교를 하거나 법을 설하려면 먼저 불교를 잘 알아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며 불자의 덕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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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마경 강설 10 /불국품 8 /2, 보살대중의 덕행 /7, 잘 생긴 모습으로 몸을 장엄하여
盖諸大衆하야 得無所畏하며
모든 대중들의 으뜸이 되어 두려워할 것이 전혀 없다.
강설 ; 보살은 흔히 표현하기를 위로는 깨달음을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교화하는 사람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어떤 대중들의 모임이나 단체에 나가더라도 그들 중에 으뜸이 되고 우두머리가 되어야 한다. 만약 교화하려는 사람들 보다 덕이 부족하고 법이 모자란다면 주눅이 들어 법을 설할 수가 없게 된다. 그리고 두려운 마음에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만약 이와 같이 된다면 어찌 부처님의 법을 당당하게 설할 수 있겠는가. 보살로서 당연히 갖추어야할 사항이다.
功德智慧로 以修其心하며 相好嚴身하야 色像第一이라 捨諸世間所有飾好하며
공덕과 지혜로써 그 마음을 닦고, 잘 생긴 모습으로 몸을 장엄하여 그 얼굴 그 모습은 제일이어서 세간의 화장과 꾸미는 것들은 모두 버렸다.
강설 ; 보살의 몸과 마음은 어떠해야 하는가를 밝혔다. 평소에 온갖 공덕을 두루 닦았으며 지혜도 또한 빼어났다. 부처님을 두 가지가 만족한 분이라고 부르는데 그 두 가지란 복덕과 지혜다. 여기서 공덕이란 복덕과 다르지 않다. 불교수행의 목적도 실은 이 두 가지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불자는 복을 많이 짓고 공덕을 많이 닦아서 유루복이든 무루복이든 무한히 많아야 한다. 빈궁하고 천박한 모습을 보이면서 중생을 제도하겠다고 법을 설하면 먹혀들겠는가. “너나 잘하세요.”가 되고 만다.
보살은 외모도 잘 생겨야 한다. 누구와 비교를 해도 빠지지 않아야 한다. 굳이 세상 사람들이 사용하는 성형수술이나 화장이나 의상이나 패물로써 꾸미려고 해서는 안 된다. 그와 같은 것은 하나도 없어도 환희심이 나는 얼굴이어야 한다. 부처님이나 보살들은 못난 사람이 하나도 없다. 견물생심이니 상견중생(相見衆生)이라고 하지 않던가. 사람들의 속성은 먼저 외모를 보고 판단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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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마경 강설 11 /불국품 9 /2, 보살대중의 덕행 /8, 깊은 믿음은 견고해서 마치 금강과 같다.
名稱高遠하야 踰於須彌하며
고명한 이름은 높고 높아 멀리까지 들리어 저 수미산을 넘어간다.
강설 ; 사람이 유명해 지는 데는 그만한 실력이 있어야 하고 법력이 있어야 하고 덕화가 있어야 한다. 세상을 선도하는 보살은 모든 면에서 뛰어나기 때문에 그 이름이 수미산보다도 더 높아 널리 알려져 있다. 명성이 있는 사람의 말은 보통 이름이 없는 사람의 말보다 훨씬 설득력이 있어서 효과가 더 있다. 이것이 세상의 이치다.
深信堅固하야 猶若金剛하며
깊은 믿음은 견고해서 마치 금강과 같다.
강설 ; 세상에서 가장 견고한 것은 금강, 즉 다이아몬드다. 다이아몬드를 조각할 때는 다른 물질로는 깎을 수 없다고 한다. 오직 다이아몬드로만 조각할 수 있다고 한다. 사람이 부처님이라는 사실을 정확하게 알고 깊이 믿는 마음이 견고하기가 다이아몬드처럼 견고하다는 뜻이다. 사람의 가치와 그 존엄성을 부처님으로 굳게 믿기를 금강과 같이 견고하게 믿는다면 그의 인격은 불문가지다. 진정한 보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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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마경 강설 12 /불국품 10 /2, 보살대중의 덕행 /9, 가르침의 보물로 널리 비취고
法寶普照하야 而雨甘露하며
於衆言音에 微妙第一이며
가르침의 보물로 널리 비취고 감로의 법문으로 비를 내리어 많고 많은 말 중에 제일 미묘하니라.
강설 ; 세상에는 보물이 많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세 가지 보물[三寶]을 말한다. 부처님과 부처님의 가르침과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들이다. 이 모두가 세상에는 둘도 없는 보물이라고 한다. 아무리 금은보화가 산처럼 쌓여 있고 모든 건물과 아파트들을 황금으로 지었다 하더라도 부처님과 같은 훌륭한 스승이 없고, 훌륭한 스승의 가르침이 없고, 그 가르침을 좋아하고 따르는 사람이 없어서 세상이 온통 갈등과 분노와 시기질투와 미움으로 가득하다면 그 황금으로 지은 집이 무슨 의미가 있겠으며 무슨 행복이 있겠는가. 사람이 이룩한 모든 것은 일체가 행복하기 위한 방편이요 도구다. 그러므로 행복의 가르침, 해탈의 가르침은 보물 중에 보물이다. 그래서 법보(法寶)라 한다. 달디 단 이슬이라 한다. 세상의 온갖 말 중에서 제일 미묘하고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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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마경 강설 13 /불국품 11 /2, 보살대중의 덕행 /10, 연기의 이치에 깊이 들어가서
深入緣起하야 斷諸邪見일새 有無二邊에 無復餘習하며
연기의 이치에 깊이 들어가서 모든 삿된 견해를 다 끊고, 있음과 없음의 두 가지 치우친 곳에 더 이상의 다른 물듦이 없다.
강설 ; 법회를 장엄하며 한편 법문을 듣기 위하여 모인 보살대중들의 덕행을 자세히 밝히는 내용이다. 불교에서 가장 이상적인 인격자를 보살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부처님이 깨달으신 이치 중에 가장 중요한 연기(緣起)의 이치에는 누구보다도 밝아야 하리라.
연기란 무엇인가. 세계 안에 있는 삼라만상의 모든 존재의 상태와 운동에 대하여 원인[因]과 조건[緣]과 결과[果]의 관계성을 뜻한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이 연기의 진리를 깨달아 부처가 되었다고 한다. 즉 성도(成道)나 성불(成佛)의 내용은 곧 연기의 법칙을 깨달았다는 것이다. 연기의 법칙을 가장 간단하게 표현하면,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하므로 저것이 생한다. 이것이 없으므로 저것이 없으며, 이것이 멸하므로 저것이 멸한다.”라고 하는 형식으로 표현된다.
이와 같은 연기의 원리는 하나의 원인으로 모든 것을 설명하는 일원론적인 세계관이나 세상의 모든 것이 결정되어 있다고 하는 운명론적인 해석을 부정한다. 모든 사물과 사태에는 일정한 원인과 조건이 반드시 있다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모든 존재는 인연에 따라 변화하며[無常], 자신의 고유한 존재성을 지닐 수 없다[空]. 이 법칙은 객관적인 사실이며, 어떠한 예외도 없고 변하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기본 틀이 구체적으로 인간에게 적용되어 나타난 초기불교의 연기론이 무명(無名) · 행(行) · 식(識) · 명색(名色) · 육입(六入) · 촉(觸) · 수(受) · 애(愛) · 취(取) · 유(有) · 생(生) · 노사(老死) 등 12개의 범주로 이루어지는 12지연기(十二支緣起)이다. 연기론은 시대와 학파에 따라 매우 다양하게 해석되었다. 부파불교(部派佛敎)에서 연기론은 특히 업(業)의 사상과 결합하여 업감연기설(業感緣起說)로 나타났다. 이것은 중생의 생사유전(生死流轉)이 모두 자신의 업으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 외에도 뢰야(賴耶)연기, 진여(眞如)연기, 법계(法界)연기 등이 있다. 또한 12지연기를 과거 · 현재 · 미래에 적용하여 무명과 행을 과거에 배당하고, 식에서 유까지를 현재에 배당하며, 생과 노사를 미래에 배당하여 시간적 · 태생학적(胎生學的)으로 해석한 삼세양중인과론(三世兩重因果論)이 성립하기도 했다.
대승불교에서 중관학파(中觀學派)의 개조인 용수(龍樹)는 연기의 관계성에 주목하여 이로부터 공의 사상을 이끌어냈다. 즉 모든 존재는 연기적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것은 어떠한 존재도 타자와의 관계를 떠나서는 존재하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모든 존재는 자성(自性)을 결여한 공한 존재이다.
사람을 위시하여 세상의 모든 사물이나 사건을 이 연기의 원리로 보는 견해는 바른 견해이다. 이와 같지 않고 달리 보는 것은 삿된 소견이다. 그러므로 “연기의 이치에 깊이 들어가서 모든 삿된 견해를 다 끊는다.”라고 하였다. 연기의 이치를 제대로 알면 모든 것에 “있음과 없음의 두 가지 치우친 곳에 더 이상의 다른 물듦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연기의 이치를 아는 일은 보살의 기본일 뿐만 아니라 불교를 믿는 보든 사람들의 기본상식이기도 하다. 그리고 연기의 이치를 알면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를 갖게 된다. 연기라는 열쇠에는 열리지 않는 문제가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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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마경 강설 14 /불국품 12 /2, 보살대중의 덕행 /11, 사자후
演法無畏가 猶獅子吼하며 其所講說이 乃如雷震하야 無有量이며 已過量이라
법을 연설하는데 두려움이 없는 것은 마치 사자후와 같고,
법을 강설하는 바는 마치 우레와 같아서 한량이 없으며 이미 그 양을 초과하였다.
강설 ; 보살이 중생을 교화하는 데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겠으나 무엇보다 가장 중요하고 효과적인 길은 참되고 바른 이치[法]를 강설하는 일이다. 설법, 연설, 강설, 강의 등이 모두 같은 의미인데 사자가 포효하듯이 당당하게 우레가 치고 번개가 번뜩이듯이 사람들을 감동하게 하여야 한다. 남을 감동시키려면 먼저 자신이 그 뜻을 소화하여 깊이 감동한 뒤라야 남을 감동시틸 수 있다. 이 경전에 등장하는 보살들은 설법을 하는 분야에서는 무한역량을 지닌 분들이다. 그래서 그 능력이 얼마인지 가늠할 수 없는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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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마경 강설 15 /불국품 13 /2, 보살대중의 덕행 /12, /법의 보물을 모으는 것은
集衆法寶하야 如海導師하며
여러 가지 법의 보물을 모으는 것은 마치 바다를 항해하는 훌륭한 선장과 같다.
강설 ; 보살은 법을 설하여 중생들을 제도하는 것은 본래의 의무다. 그 의무를 다하려면 우선 법을 잘 알아야 한다. 무수한 수준과 근기들을 다 제도하려면 무수한 법의 이치를 꿰뚫고 있어야 한다. 8만 4천 근기에 8만 4천 법문이라 하지 않던가. 참선이면 참선, 염불이면 염불, 경전이면 경전, 심지어 사주와 관상까지도 필요에 따라서는 필요할 때가 있다. 그래야 바다를 항해하는데 훌륭한 선장과 같이 세상의 배를 훌륭히 저어 일체 중생을 저 언덕에 이르게 할 수 있을 것이다.
了達諸法의 深妙之義하야 善知衆生往來所趣와 及心所行하야
모든 법의 깊고 오묘한 뜻을 잘 통달하여, 중생들이 가고 오고 나아가는 곳과 마음의 흘러가는 바를 잘 안다.
강설 ; 보살이 중생들을 제도하려면 모든 법의 깊고 오묘한 뜻을 잘 통달하고 중생들의 죽고 사는 일과 죽은 뒤에 어디로 갈 것인가? 그리고 중생들의 마음의 움직임과 그 성향과 욕망과 취향까지 세세하게 잘 알고 있어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남을 제도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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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마경 강설 16 /불국품 14 /2, 보살대중의 덕행 /13, / 열 가지 힘 등
近無等等의 佛自在慧와 十力無畏와 十八不共이며
누구와도 대등함이 없는 부처님 자재한 지혜와 열 가지 힘과 두려움 없음과 열여덟 가지 특별한 법[不共]에 가까이 하였다.
강설 ; 부처님을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분[無比], 누구와도 대등함이 없는 분[無等等], 저절로 그러히 깨달으신 분[自然覺者], 세간을 초월한 바른 지식을 가진 분[超世正知], 지혜의 바다[智海]등으로도 표현한다. 부처님은 여러 가지 능력 중에 뛰어난 지혜를 가졌다는 의미가 가장 크다.
열 가지 힘[十力]이라는 것도 역시 지혜의 힘이다. 1, 처비처지력(處非處智力), 도리와 이치가 옳고 그른 것을 다 아는 지혜의 힘, 2, 업이숙지력(業異熟智力), 일체중생의 삼세 업보를 다 아는 지혜의 힘. 3, 정려해탈등지등지지력(靜慮解脫等持等至智力), 여러 가지 선정과 해탈과 삼매를 다 아는 지혜의 힘. 4, 근상하지력(根上下智力), 중생들의 근기가 높고 낮음을 다 아는 지혜의 힘. 5, 종종승해지력(種種勝解智力), 중생의 여러 가지 지해(知解)를 아는 지혜의 힘. 6, 종종계지력(種種界智力), 중생들의 여러 가지 경계를 아는 지혜의 힘. 7, 변취행지력(遍趣行智力), 여러 가지 행업(行業)으로 어디에 가서 나게 되는 것을 아는 지혜의 힘. 8, 숙주수념지력(宿住隨念智力), 숙명통으로 중생의 가지가지 숙명을 아는 지혜의 힘. 9, 사생지력(死生智力), 천안통으로 중생이 죽어서 태어날 때와 선한 곳과 악한 곳을 걸림 없이 아는 지혜의 힘. 10, 누진지력(漏盡智力), 온갖 번뇌와 습기를 영원히 끊어 없애는 지혜의 힘.
부처님이 두려움이 없다는 것은 어떤 악한 사람을 만나거나 설법을 하더라도 전혀 의심하거나 두려울 것 없이 당당하다는 뜻이다. 자세히 말하면 사무소외(四無所畏)가 있다. 1, 정등각무외(正等覺無畏) 깨달아 정각에 오르는데 두려움이 없다, 2, 누영진무외(漏永盡無畏) 온갖 번뇌를 끊어 두려움 없다. 3, 설장법무외(說障法無畏) 설법하는데 비난을 받는 장애가 있어도 두려움이 없다. 4, 설출도무외(說出道無畏) 고통을 끊어 해탈에 이르는 사제와 팔정도를 설하는데 장애가 있어도 두려움이 없다.
열여덟 가지 특별한 법[十八不共法]이란 부처님께만 있는 열여덟 가지 공덕법이다. 이승이나 보살에게는 공통되지 아니하므로 불공법이라 한다. 1, 몸이 실수가 없고, 2, 입이 실수가 없고, 3, 생각이 실수가 없고, 4, 두 가지 생각이 없고, 5, 선정을 여읜 마음이 없고, 6, 알고서 버리지 않는 것이 없고, 7, 하고자 하는 욕망이 감함이 없고, 8, 정진이 감함이 없고, 9, 억념함이 감함이 없고, 10, 지혜가 감함이 없고, 11, 해탈이 감함이 없고, 12, 해탈지견이 감함이 없고, 13, 온갖 몸으로 하는 일이 지혜를 따르고, 14, 온갖 말로 하는 일이 지혜를 따르고, 15, 온갖 뜻으로 하는 일이 지혜를 따르고, 16, 지혜로 지나간 세상 일을 아는 것이 걸림이 없고, 17, 지혜로 이 다음 세상 일을 아는 것이 걸림이 없고, 18, 지혜로 지금 세상 일을 아는 것이 걸림이 없는 것들이다. 보살이 이와 같은 여래의 경지에 거의 가까워 졌다는 것은 큰 덕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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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마경 강설 17 /불국품 15 /2, 보살대중의 덕행 /14, / 악한 갈레의 문들을 다 막아버렸으나
關閉一切諸惡趣門하되 而生五道하야 以現其身하며
일체의 모든 악한 갈레의 문들을 다 막아버렸으나 다섯 갈레의 길에 태어나서 그 몸을 나타낸다.
강설 ; 보살에게 악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악도의 중생들을 제도하려면 우정 악도에 몸을 나타내야 한다. 지장보살이 자신에게 악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언제나 지옥에 가서 지옥의 중생들을 교화하고 있다. 지장보살은 스스로 서원하기를, “내가 지옥에 가지 않으면 누가 지옥에 가겠는가.”라고 하였다. 다섯 갈레[五道]란 지옥, 아귀, 축생, 인도, 천도다. 사람들은 하루에도 지옥의 삶을 살기도 하고, 아귀가 되기도 하고, 축생이 되기도 한다. 이와 같이 하루에도 온갖 곳을 윤회하는 것이 보통 사람들의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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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마경 강설 18 /불국품 16 /2, 보살대중의 덕행 /15, 큰 의사가 되어
爲大醫王하야 善療衆病하되 應病與藥하야 令得服行하며
큰 의사가 되어 온갖 병을 잘 치료하는데 병에 맞추어 약을 주어 잘 복용하도록 한다.
강설 ; 부처님과 관음보살을 훌륭한 의사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세상의 사표인 보살은 당연히 세상 사람들의 몸의 병과 마음의 병을 모두 치료하는 의사가 되어야 한다. 불교가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가 바로 중생들의 갖가지 병을 치료하기 위함이다. 그래서 불교가 하는 일을 한마디로 응병여약(應病與藥)하는 종교라고 한다. 유마경의 명언 중에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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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마경 강설 19 /불국품 17 /2, 보살대중의 덕행 /16, 한량없는 공덕을 다 성취하고
無量功德을 皆成就하고 無量佛土를 皆嚴淨하야
한량없는 공덕을 다 성취하고
한량없는 국토를 다 청정하게 장엄한다.
강설 ; 불교적 삶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보살로 사는 삶이다. 보살로 사는 삶이란 우선 한량없는 공덕을 다 성취하여야 한다. 한량없는 공덕을 다 성취하려면 자나 깨나 일체공덕을 모두 모두 다 닦고 지어야 한다. 보살이 지은 공덕으로 세상을 청정하게 장엄하게 된다.
신라 선덕왕 때 석장사에 살았던 양지(良志) 스님은 재주가 뛰어나서 영묘사 장육삼존상(丈六三尊像)과 천왕상을 조성하였고 법당과 목탑의 기와 무늬도 새겼다. 또 천왕사의 목탑 밑에 팔부신장과 법림사의 삼존불과 좌우 금강역사도 조성하였다. 이러한 많은 불사를 하면서 함께 동참하여 흙을 나르고 기왓장을 운반하는 수많은 승속들에게 양지스님이 향가를 지어 부르게 하기도 하였는데, 그때 부른 향가는 불교의 인생관과 사람이 살아가는 목적을 잘 표현하였다. 일종의 노동요와 같아서 매우 짧지만 뜻은 충분히 담겨있는 향가다.
“오다. 오다. 오다./ 오다. 서럽더라./ 서럽더라. 우리네여./ 공덕 닦으러 오다.”
이렇게 단 다섯 개의 낱말에 네 줄 뿐이지만 인생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통해 영원히 온다는 불교적 삼세관(三世觀)과 이 세상에 와서 보면 인생은 서러운 것[苦海, 火宅]이라는 사실과 그 서러운 현실은 우리 모두가 다 같다는 것. 그리고 그와 같은 서러운 현실이지만 미래를 위해 그리고 또 다른 사람들과 세상을 위해 부지런히 공덕을 닦으며 살아야 한다는 불교적 인생관을 너무나도 잘 표현하고 있다.
불교는 한마디로 공덕을 닦으며 살아가라는 가르침이다. 내가 닦는 공덕은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고 세상을 평화롭게 하고 나아가서 국토를 청정하게 장엄하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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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마경 강설 20 /불국품 18 /2, 보살대중의 덕행 /17, 보고 듣는 사람이 다 이익을 얻고
其見聞者가 無不蒙益하고 諸有所作을 亦不唐捐하야 如是一切功德을 皆悉具足이니라
보고 듣는 사람들은 다 이익을 얻고 모든 하는 일들은 또한 헛되지 않아 이와 같은 일체공덕을 모두 모두 구족하였다.
강설 ; 이러한 보살은 그를 보는 사람도 그의 이름을 듣는 사람도 모두 이익을 얻게 된다. 그를 예배하고 공양하고 공경하면 역시 큰 공덕이 되어 결코 헛되지 않으리라.
유마경을 설하는 법석에 모여 법문을 듣는 보살들의 그 덕행은 위에서 길게 설명한 바와 같다. 법문을 들으려고 모인 대중들의 수준을 보면 어떤 수준의 설법이 있으리라는 것도 짐작할 수가 있다. 설법은 언제나 청중들의 근기와 수준을 잘 살펴서 이익이 되도록 해야 보람이 있고 가치가 있는 설법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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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마경 강설 21 /불국품 19 /3, 보살대중의 명호
3, 보살대중의 명호
其名曰 等觀菩薩 . 不等觀菩薩 . 等不等觀菩薩. 定自在王菩薩 . 法自在王菩薩 . 法相菩薩 . 光相菩薩 . 光嚴菩薩 . 大嚴菩薩. 寶積菩薩. 辨積菩薩 . 寶手菩薩 . 寶印手菩薩 . 常擧手菩薩 . 常下手菩薩 . 常慘菩薩 . 喜根菩薩 . 喜王菩薩 . 辯音菩薩 . 虛空藏菩薩 . 執寶炬菩薩 . 寶勇菩薩 . 寶見菩薩 . 帝網菩薩 . 明網菩薩 . 無緣觀菩薩 . 慧積菩薩 . 寶勝菩薩 . 天王菩薩 . 壞魔菩薩 . 電德菩薩 . 自在王菩薩 . 功德相嚴菩薩 . 獅子吼菩薩 . 雷音菩薩 . 山相擊音菩薩 . 香象菩薩 . 白香象菩薩 . 常精進菩薩 . 不休息菩薩 . 妙生菩薩 . 華嚴菩薩 . 觀世音菩薩 . 得大勢菩薩 . 梵網菩薩 . 寶杖菩薩 . 無勝菩薩 . 嚴土菩薩 . 金?菩薩 . 珠?菩薩 . 彌勒菩薩 . 文殊師利法王子菩薩이니 如是等이 三萬二千人이니라
그 보살들의 이름은 다음과 같다.
등관보살 . 부등관보살 . 등부등관보살 . 정자재왕보살 . 법자재왕보살 . 법상보살 . 광상보살 . 광엄보살 . 대엄보살 . 보적보살 . 변적보살 . 보수보살 . 보인수보살 . 상거수보살 . 상하수보살 . 상참보살 . 희근보살 . 희왕보살 . 변음보살 . 허공장보살 . 집보거보살 . 보용보살 . 보견보살 . 제망보살 . 명망보살 . 무연관보살 . 혜적보살 . 보승보살 . 천왕보살 . 괴마보살 . 전덕보살 . 자재왕보살 . 공덕상엄보살 . 사자후보살? . 뇌음보살 . 산상격음보살 . 향상보살 . 백향상보살 . 상정진보살 . 불휴식보살 . 묘생보살 . 화엄보살 . 관세음보살 . 득대세보살 . 범망보살 . 보장보살 . 무승보살 . 엄토보살 . 금계보살 . 주계보살 . 미륵보살 . 문수사리법왕자보살 등 이와 같은 3만 2천 사람이었다.
강설 ; 3만 2천명의 보살들 중에서 52명의 이름이 소개되었다. 법회청중 중에 비구스님들의 이름은 단 한 명도 거론되지 않은 것과 비교해 보면 보살들에 대한 비중을 너무 크게 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유마경은 소승성문들의 편협한 아집을 깨트리고 대승보살도를 크게 드날리려는 것이 경전 편찬의 가장 큰 목적임이 나타난다. 그래서 필자는 유마경을 법화경과 아울러 “대승불교운동의 선언서”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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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마경 강설 22 /불국품 20 /4, 그 외의 청중
4, 그 외의 청중
復有萬梵天王尸棄等이 從餘四天下하야 來詣佛所而聽法하며 復有萬二千天帝하야 亦從餘四天下하야 來在會坐하고 ?餘大威力諸天과 龍 . 神 . 夜叉 . 乾?婆 . 阿修羅 . 迦樓羅 . 緊那羅 . 摩?羅伽等이 悉來會坐하며 諸比丘 ? 比丘尼 ? 優婆塞 ? 優婆夷가 俱來會坐니라
또 다시 시기범천왕과 같은 만 여 명의 범천왕들이 4천하로부터 부처님의 처소로 와서 법을 들었다. 또 다시 일만 이 천 명이나 되는 하늘의 제왕들이 역시 4천하로부터 법회에 와서 앉아있었다. 그리고 또 대위력천왕과 용과 신과 야차와 건달바와 아수라와 가루라와 긴나라와 마후라가 등이 법회에 와 앉았다. 그리고 여러 비구 비구니 우바새 우바이가 함께 법회에 와 앉았다.
강설 ; 유마경의 법회청중은 계속 이어진다. 어떤 조건에도 제한이 없고 걸림이 없는 툭 터진 대승보살도는 다양한 민족과 다양한 풍속과 다양한 수준과 근기들을 다 흡수하고 수용하며 융합한다는 대승적 정신을 잘 표현하고 있다고 하겠다. 범천왕들과 하늘의 제왕들과 온갖 천신들과 8부 신중들과 4부 대중들이 골고루 다 모여왔다. 참으로 뭇 생명들을 하나도 남김없이 다 건지겠다는 부처님의 본의가 법회청중에서 밝혀졌다.
彼時에 佛이 與無量百千之衆으로 恭敬圍繞하야 而爲說法하시니 譬如須彌山王이 顯于大海하며 安處衆寶獅子之座하야 蔽於一切諸來大衆하시니라
그때에 부처님이 한량없는 백 천 대중들로 더불어 공경을 받으며 둘러싸여서 그들을 위하여 법을 설하시니 마치 수미산이 큰 바다에 우뚝하게 드러난 것과 같았다. 온갖 여러 가지 보배로 꾸며진 사자좌에 편안히 앉아 계시니 일체 모든 대중들을 다 가려버렸다.
강설 ; 부처님이 한량없는 대중들에게 둘러싸여 계시는 광경을 표현하였다. 큰 바다 한가운데에 수미산이 우뚝 솟아있는 것과 같다. 라고 하였다. 수미산을 보는 사람의 눈에 바다는 보이지 않고 산만 보이듯이 한량없는 대중들이 모였는데 대중들은 보이지 않고 오직 부처님만 우뚝하여 대중들을 모두 가려버렸다고 하였다. 이 이상 달리 어떻게 표현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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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마경 강설 23 /불국품 21 /5, 장자의 아들 보적
5, 장자의 아들 보적
爾時에 毘耶離城에 有長者子하니 名曰 寶積이라 與五百長者子로 俱持七寶蓋하고 來詣佛所하야 頭面禮足하고 各以其蓋로 共供養佛하니라
그때에 비야리성에 장자의 아들이 있었으니 이름이 보적이었다. 5백 명의 장자의 아들들과 함께 칠보로 된 일산을 가지고 부처님의 처소에 나아가서 머리로써 부처님의 발에 예배하였다. 그리고 각각 가지고 온 일산으로 다 같이 부처님께 공양하였다.
강설 ; 이상세계를 이야기하려는 불국품을 설하면서 큰 비구스님들과 보살 등 수많은 법회청중들을 소개하고 나서 특별히 장자의 아들 보적(寶積)이라는 젊은 청년을 등장시켰다. ‘보물이 가득 쌓여있다.’는 의미의 이름이다. 재산이 많고 지혜가 우수한 장자의 아들들 5백 명과 함께 칠보로 된 일산을 하나씩 들고 와서 부처님께 공양 올렸다. 공양거리가 무수히 많은데 왜 하필이면 일산을 공양 올렸을까? 일산의 정확한 뜻은 햇볕을 가리기 위하여 세우는 큰 양산인데 황제나 황태자나 왕세자들이 행차할 때 받치던 의장용 양산이다. 또는 감사, 유수, 수령 들이 부임할 때 쓰기도 하였다. 유마경에서 이것으로써 공양 올려다는 것은 경전의 품격을 은근히 나타낸 것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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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마경 강설 24 /불국품 22 /6, 5백 개의 일산이 하나로
佛之威神이 令諸寶蓋로 合成一蓋하여 遍覆三千大千世界하니 而此世界廣長之相이 悉於中現하니라
부처님의 위신력으로 여러 개의 보배일산이 합하여 하나가 되어 삼천대천세계를 두루 덮으니 이 세계의 드넓은 형상이 모두 그 가운데 다 나타났다.
강설 ; 불국품은 유마경의 서론이다. 그 서론에서 5백 개의 일산이 하나로 합해지면서 그것으로 삼천대천세계를 두루 다 덮고, 그 하나가 된 일산에는 삼천대천세계의 모습이 다 나타났다는 것은 의미하는 바가 작지 않다. 흔히 유마경의 주된 종지가 불이법문(不二法門)이라고 한다. 둘이 아니라는 말인데 우선 그 둘이란 우주만유의 온갖 차별현상을 뜻하며, 둘이 아니란 그 많고 많은 차별현상들이 궁극적 차원에서 보면 통일된 하나[不二]라는 뜻이다. 세상 만상과 우리들의 모든 존재는 궁극적으로 절대평등의 통일된 하나라는 뜻은 유마경의 절정을 이루는 제9 입불이법문품(入不二法門品)에서 철저하게 드러낼 것이지만 서론인 불국품에서 그 큰 뜻을 일산으로써 상징적으로 참으로 근사하게 보여주고 있다. 경정 편찬의 절묘함을 짐작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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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마경 강설 25 /불국품 23 /7, 세계일개(世界一蓋)
又此三千大千世界의 諸須彌山과 雪山 ? 目眞隣陀山 ? 摩訶目眞隣陀山 ? 香山 ? 寶山 ? 金山 ? 黑山 ? 鐵圍山 ? 大鐵圍山 ? 大海 ? 江河와 川流泉源과 及日月星辰과 天宮 ? 龍宮 ? 諸尊神宮이 悉現於寶蓋中하며 又十方諸佛과 諸佛說法도 亦現於寶蓋中하니라
또한 이곳 삼천대천세계의 여러 수미산과 설산과 목진인타산과 마하목진인타산과 향산과 보산과 금산과 흑산과 철위산과 대철위산과 대해와 강하와 내와 샘과 그리고 해와 달과 별과 천궁과 용궁과 온갖 신들의 궁전이 모두 보배 일산 가운데 나타났으며, 또한 시방의 모든 부처님과 모든 부처님이 설법하는 것까지 또한 보배 일산 가운데 나타났다.
강설 ; 이렇게 모든 것이 다 나타난 일산이란 곧 우주 전체를 지칭하는 삼천대천세계며, 삼천대천세계가 곧 하나의 일산이다. 세계일화(世界一花)라는 말이 있다. 유마경에서는 세계일개(世界一蓋)다. 유마경의 일개에는 부처님과 부처님의 설법까지도 다 나타났다는 것이다. 즉 유마거사의 차별이 아닌 통일된 하나를 나타내는 위대한 침묵 속에는 온 우주만유가 다 포함되었다는 뜻이다. 만약 언어로 표현하면 표현하는 그 한 가지뿐이지만 진정한 침묵은 모든 것을 다 함유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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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마경 강설 26 /불국품 24 /8, 보적의 게송 1
爾時에 一切大衆이 覩佛神力하고 歎未曾有하며 合掌禮佛하고 瞻仰尊顔하되 目不暫捨러라 長者子寶積이 卽於佛前에 以偈頌曰
目淨修廣如靑蓮하고 心淨已度諸禪定이라
久積淨業稱無量하사 導衆以寂故稽首니다
그때에 일체 대중이 부처님의 신력을 보고 처음 보는 미증유한 일이라고 찬탄하며 합장하고 부처님께 예배하며 존안을 우러러 보며 눈을 잠간도 떼지 않았다.
장자의 아들 보적이 곧 부처님 앞에서 게송을 설하였다.
눈은 길고 넓어 마치 푸른 연꽃 같고
마음은 텅 비어 모든 선정을 다 성취하였네.
오랫동안 청정한 업을 쌓아 한량이 없으사
고요히 대중들을 인도하실세 머리 숙여 예배합니다.
강설 ; 유마경 법회에 맨 먼저 등장하는 장자의 아들 보적이다. 그렇다면 부처님을 찬탄하는 노래가 없을 수 없다. 더구나 부처님의 신통한 능력으로 보여준 것은 지금까지 보지 못하던 참으로 희유하고 미증유한 광경이었다.
먼저 부처님의 눈을 찬탄하였다. “길고 넓은 모습이 마치 푸른 연꽃과 같다.”라고 하였다. 관상학에도 안장유학(眼長有學)이라 하였다. 눈이 길면 학문이 있고 지혜가 있다는 뜻이다. 푸른 연꽃은 인도에도 흔치 않는 귀한 꽃이다.
다음으로는 텅 빈 마음을 찬탄하였다. 지극한 선정이 아니면 마음이 텅 빌 수 가 없다. 마음이 텅 비어야 모든 중생들의 마음을 다 담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 “오랫동안 청정한 업을 쌓아서 부처님이 되었다.”라고 하였다. 불교는 한마디로 좋은 업을 짓는 것을 배우는 종교다. 좋은 업이란 자신에게 좋고 다른 사람에게도 좋은 일이다. 그것을 다른 말로 복을 짓는다. 또는 공덕을 닦는다. 라고 한다. 부처님은 사람들에게 자신을 위해서, 또는 남을 위해서 부디 공덕을 닦으라고 가르친다. 공덕을 닦는 일도 사람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다. 그와 같은 복덕과 지혜를 몸소 보여줌으로서 대중들을 선업으로 인도한다. 부처님의 이와 같은 사실들을 잘 알게 되면 저절로 머리가 숙여지고 존경심이 우러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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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마경 강설 27 /불국품 25 /8, 보적의 게송 2
旣見大聖以神變으로 普現十方無量土하며
其中諸佛演說法커늘 於是一切悉見聞이니다
큰 성인이 신통과 변화로
시방의 한량없는 국토를 널리 나타냄을 이미 다 보며
그 가운데 모든 부처님이 법을 연설하는데
여기에서 모든 것을 다 보고 듣습니다.
강설 ; 하나로 통일된 일산 속에 시방의 한량없는 국토가 다 나타난 것을 보며 부처님이 설법하시는 것까지 다 보고 듣는다는 것은 지극히 정상적인 사람이 사물을 보고 소리를 듣고 어떤 문제를 생각하고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본연의 능력을 찬탄하는 말이다. 지금 우리가 여기에서 이렇게 글을 보고 읽고 찬탄하고 비판도 하고 환희심도 낼 줄 아는 이 본래의 능력이야말로 가장 훌륭한 신통력이다. 이 사실과 이 능력을 제외하고 달리 무슨 신통변화가 있을 수 있겠는가? 만약 있다면 그것은 마귀의 술법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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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마경 강설 28 /불국품 26 /8, 보적의 게송 3
法王法力超群生하사 常以法財施一切하며
能善分別諸法相하나 於第一義而不動이로다
已於諸法得自在일세 是故稽首此法王이로다
법왕의 법력은 온갖 중생들을 다 뛰어넘으시어
항상 법의 재물로써 일체 중생에게 보시하며
모든 법의 행상들을 능히 잘 분별하나
제일의에는 움직이지 않도다.
이미 모든 법에 자유 자재함을 얻었나니
그러므로 이러한 법왕에게 머리 숙여 예배합니다.
강설 ; 부처님이 다른 사람과 다르고 특별한 점은 세상사와 인생사에 대한 바르고 참된 이치를 깨달아 그것을 또 많은 사람들에게 가르치고 베풀고 보시하는 점이다. 인생에 대한 참되고 바른 이치, 즉 진리를 가르치고 진리를 보시하기 때문에 스스로를 대시주자(大施主者)라고 불렀다.
온갖 법을 무수한 중생들의 수준과 근기에 맞추어 방편을 써가며 설명하더라도 제일의(第一義)에는 흔들리자 않는다고 하였다. 제일의란 제일의제, 진제, 승의제라고도 한다. 제일의의 진리와 열반, 진여, 실상, 중도 등의 진리를 이른다. 즉 부처님이 깨달으신 궁극적 경지를 잃지 않고 방편을 설한다는 뜻이다. 누구나 설법을 함에 있어서 불교의 궁극적 종지를 굳게 지키며 설법을 한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가 있다. 만약 근기를 맞춘다고 하여 불교의 큰 종지를 잃어버리고 사람들의 수준에만 따라간다면 삿된 법을 설하게 되고 외도의 법을 설하게 되기 때문이다. 조심하고 삼가며 또 조심하고 삼가야 할 일이다. 부처님은 이와 같은 분이기 때문에 법의 왕이다. 머리 숙여 예배드리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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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마경 강설 29 /불국품 27 /8, 보적의 게송 4 /인연인 까닭에 모든 법이 생기며
說法不有亦不無나 以因緣故諸法生하며
無我無造無受者나 善惡之業亦不亡이라
설법은 있지도 않고 또한 없지도 않으나
인연인 까닭에 모든 법이 생기며
나도 없고 지음도 없고 받는 자도 없으나
선과 악의 업은 또한 없지 않도다.
강설 ; ≪금강경≫에 무득무설분(無得無說分)이 있다. 나는 쉽게 설명하기를, “부처님의 재산은 두 가지인데 진리를 깨달은 것과 그 진리를 설한 것이다.” 그러나 ≪금강경≫에는 그 “깨달음을 얻음도 없고 그 깨달음을 설한 것도 없다.”고 하였다. 한 차원 달리 생각해 보면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이다. 보적의 게송에도 부처님의 설법은 있는 것도 아니며 없는 것도 아니라고 하였다. 왜냐하면 인연으로 인하여 종종의 법이 생기고 인연으로 인하여 종종의 법이 소멸하기 때문이다. “나도 없고 지음도 없고 받는 자도 없으나 선과 악의 업은 또한 없지 않도다.”라고 하였는데 불교를 잘 못 이해하여 모든 것이 공무(空無)한 것으로만 오해할까 염려하여 “선과 악의 업은 또한 없지 않도다.”라고 강조하였다. 유형한 것이나 무형한 것이나 모두가 있음과 없음의 양면성을 함께 가지고 있다는 중도성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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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마경 강설 30 /불국품 28 /8, 보적의 게송 5 /마군들을 항복받고
始在佛樹力降魔하고 得甘露滅覺道成하며
已無心意無受行하야 而悉?伏諸外道로다
처음 보리수 아래서 마군들을 항복받고
감로의 열반을 얻고 깨달음을 이루고 나니
심의식과 수상행이 벌써 사라지고
모든 외도들까지 다 항복받았도다.
강설 ; 부처님께서 6년의 고행을 마치고 7일간 보리수나무 아래서 선정에 들어 마군을 항복 받고 큰 깨달음을 이루게 된 내용을 간단하게 밝힌 부분이다. ≪반야심경≫에는 깨달음의 내용을 공(空)으로 설명하고 인생문제의 해결도 공으로 설명하였다. 그래서 그 공에는 눈과 귀와 코와 혀 등등도 없고, 물질 소리 향기 맛 등등도 없고, 심의식과 수상행식도 없다고 하였다. 이곳 게송과 꼭 같다. 그것으로 마음에서 일어나는 모든 마군과 갈등과 시시비비 등의 문제들을 다 잠재울 수 있었다고 하였다. 한마디로 표현하면 “나는 없다.”라는 문제해결의 열쇄다. 자기문제 해결에는 가장 훌륭한 방법이다. 부처님은 이렇게 하여 자신의 문제를 먼저 해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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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마경 강설 31 /불국품 29 /8, 보적의 게송 6
三轉法輪於大千하시니 其輪本來常淸淨이라
天人得道此爲證하니 三寶於是現世間이로다
대천세계에 법륜을 세 번 굴리시니
그 법륜은 본래 항상 청정함이라.
천신과 사람들이 도를 얻어 깨닫게 되니
삼보가 이로부터 세간에 나타남이라.
강설 ; 부처님은 위에서 설명한 대로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고 나서 세상에다 문제[苦, 煩惱]를 해결하는 법을 설하셨으며, 처음의 대상은 5비구였다. 설법하시는 부처님과 설하는 법의 내용과 설법을 듣는 제자들, 이렇게 해서 삼보가 비로소 세상에 등장하게 되었다는 내용이다. 처음에는 고집멸도(苦集滅道) 사성제를 설하였는데 설법하는 방법은 세 가지 방향에서 설하였다. 그것을 한 가지 주제를 가지고 세 번 굴린다하여 삼전법륜(三轉法輪)이라 한다. 시전(示轉), 권전(勸轉), 증전(證轉)이다. 시전이란, 범부들은 늘 고통 속에 산다는 것을 설명해 보이고[示], 성인들은 늘 행복과 즐거움을 누린다는 것을 설명해 보이는 것이다. 권전이란, 사람들에게 빨리 수행을 해서 고통을 없애고 즐거움을 얻으라고 권장[勸]하는 설법이다. 증전이란, 부처님께서 스스로 깨달음을 성취하여 모든 고통을 떠났으며 일체 낙을 누리고 있음을 증명[證]해 보이는 설법이다. 이것이 법을 설하는데 반드시 갖추어야 할 세 가지 요건이다. 장자의 아들 보적은 부처님 설법의 이러한 과정들을 자세히 상기하면서 찬탄하고 예경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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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마경 강설 32 /불국품 30 /8, 보적의 게송 7
以斯妙法濟群生하시니 一受不退常寂然이라
度老病死大醫王이여 當禮法海德無邊이로다
이 미묘한 법으로써 온갖 생명들을 제도하시니
한번 받아가지면 물러서지 않고 항상 적연함이라.
늙고 병들고 죽는 것을 해결하시는 큰 의왕이시니
법의 바다 가없는 공덕에 마땅히 예경합니다.
강설 ; 부처님께 예경할 때 “지극한 마음으로 이 목숨 바쳐 귀의하고 받드옵니다.”라고 한다. 왜냐하면 부처님이 깨달으신 법은 무상심심미묘법이며, 불가사의한 법이며, 최상의 깨달음의 법이기 때문이다. 그것으로 무수한 생명들을 교화하고 제도하기 때문이다. 그 미묘한 법을 한번 받아드리면 결코 물러서지 않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인간에게서 가장 어려운 문제인 늙음의 문제와 병고의 문제와 죽음의 문제까지 해결하기 때문이다. 그 가르침은 바다처럼 넓다. 그로인한 님의 공덕은 끝없이 넓기 때문이다. 이 어찌 이 목숨 다해 귀의하지 않으랴. 보적이 부처님의 덕을 찬탄하는 게송은 이 한 게송만으로도 만고에 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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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마경 강설 33 /불국품 31 /8, 보적의 게송 8
毁譽不動如須彌하야 於善不善等以慈로다
心行平等如虛空이라 孰聞人寶不敬承이리요
비방과 칭찬에 움직이지 않는 것이 수미산과 같고
선한 사람 악한 사람 평등하게 자비로써 대하시니
마음과 행동이 평등하여 허공과 같아라.
사람 중의 보배를 듣고 그 누가 공경하여 받들지 않으리오.
강설 ; 부처님은 만행만덕을 두루 갖추신 천하에서 제일가는 세존이시지만 놀랍게도 비방도 많이 들었고, 음해도 많이 당하셨다. 다 이유야 있었겠지만 어떤 이는 언덕에서 바위를 굴려 살해를 하려하기도 했었고, 사나운 코끼리에게 술을 먹여 부처님 앞에 풀어 놓기도 하였다. 어떤 여자는 거짓으로 아기를 밴 모습을 하고 와서는 부처님의 짓이라고 음해도 하였다. 외도들이 부처님께 귀의하자 그들의 스승들이 몰려와서 숱한 욕설과 비방을 하기도 하였다. 반대로 저 삼십삼천보다도 더 높이 칭찬을 하는 이도 있었다. 그러나 그 모든 일에 대해서 마치 산중에 왕인 수미산처럼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선한이든 악한이든 모두에게 한결같은 자비심으로 평등하게 대하였다. 이처럼 그 마음 씀씀이가 허공과 같았다. 이러한 사실을 보고 들어 안다면 그 누가 존경하여 받들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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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마경 강설 34 /불국품 32 /8, 보적의 게송 9
今奉世尊此微蓋하니 於中現我三千界와
諸天龍神所居宮과 乾?婆等及夜叉하며
지금 이 작은 일산으로 세존께 받들어 올리나니
그 가운데 우리가 사는 삼천대천세계도 나타나며
온갖 하늘과 용과 신들이 사는 궁전도 나타나며
건달바와 야차도 나타납니다.
강설 ; 옛 말에 선비는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서 죽는다고 하였다. 또 중국 춘추 시대 초나라 종자기(鍾子期)라는 사람은 당시 거문고의 명인이었던 백아(伯牙)의 친구로서, 그의 거문고 소리를 잘 알아들었다고 한다. 종자기가 죽자 백아는 자기의 음악을 이해하여 주는 이가 없음을 한탄하여 거문고 줄을 끊고 다시는 거문고를 타지 않았다고 한다.
요즘 우리나라의 불자들은 부처님을 공경하여 예배를 드리는데 백배 천배 만 배 심지어 백만 배까지 절을 하는 사람도 있고, 혹은 돈을 올리고 쌀을 올리고 과일, 떡, 꽃, 갖가지 음식 등등을 올리면서 부처님께 공양을 드린다고 생각한다. 각자의 경험과 지식을 동원하여 알고 있는 대로 공경을 표현한다. 그런데 보적은 동료들이 하나씩 들고 온 5백 개의 일산이 하나로 만들어진 큰 일산 하나를 부처님께 공양 올렸다. ≪유마경≫을 설하는 부처님의 뜻은 우주만유가 궁극적으로 둘이 아닌 절대평등의 세계임을 이해시키려는 데 있다. 거기에서 또한 동체대비(同體大悲)가 나오기 때문이다. 그 뜻을 잘 알고 있는 보적은 그 의미를 하나의 일산으로 상징하여 부처님께 공양 올림으로서 이심전심(以心傳心)이 되었다. 이보다 더 부처님의 마음에 드는 공양은 있을 수 없다. 뜻에 맞는 공양, 그가 참으로 좋아할 공양, 그분의 속 깊은 마음을 꿰뚫어 본 공양이야말로 진정한 공양이며 참다운 불공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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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마경 강설 35 /불국품 33 /8, 보적의 게송 10
悉見世間諸所有는 十力哀現是化變이라
衆覩希有皆歎佛일세 今我稽首三界尊하나이다
세간에 있는 모든 것을 다 볼 수 있는 것은
열 가지 힘 가지신 부처님이 연민으로 이러한 변화를 나타낸 것입니다.
대중들은 희유함을 보고 모두 부처님을 찬탄하니
지금 저는 삼계의 어른님께 머리 숙여 예배합니다.
강설 ; 부처님의 지혜와 덕을 표현하는 데는 여러 가지가 있다. 여기서는 열 가지 힘[十力]을 가지신 분이라고 하였다.
그 열 가지 힘이란,
① 처비처지력(處非處智力), 도리와 이치가 옳고 그른 것을 다 아는 지혜의 힘,
② 업이숙지력(業異熟智力), 일체중생의 삼세 업보를 다 아는 지혜의 힘.
③ 정려해탈등지등지지력(靜慮解脫等持等至智力), 여러 가지 선정과 해탈과 삼매를 다 아는 지혜의 힘.
④ 근상하지력(根上下智力), 중생들의 근기가 높고 낮음을 다 아는 지혜의 힘.
⑤ 종종승해지력(種種勝解智力), 중생의 여러 가지 지해(知解)를 아는 지혜의 힘.
⑥ 종종계지력(種種界智力), 중생들의 여러 가지 경계를 다 아는 지혜의 힘.
⑦ 변취행지력(遍趣行智力), 여러 가지 행업(行業)으로 어디에 가서 나게 되는 것을 다 아는 지혜의 힘.
⑧ 숙주수념지력(宿住隨念智力), 숙명통으로 중생의 가지가지 숙명을 다 아는 지혜의 힘.
⑨ 사생지력(死生智力), 천안통으로 중생이 죽어서 태어날 때와 선한 곳과 악한 곳을 걸림 없이 다 아는 지혜의 힘.
⑩ 누진지력(漏盡智力), 온갖 번뇌와 습기를 영원히 끊어 없애는 지혜의 힘이다.
이러한 지혜의 힘을 가지신 부처님이 중생들을 연민히 여기는 마음으로 그와 같은 변화의 모습을 나타내 보였다. 불교는 자비다. 온 세계가 나와 한 몸[世界一蓋]이라는 유마경의 큰 뜻이라야 깊은 자비심이 나오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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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마경 강설 36 /불국품 34 /8, 보적의 게송 11
大聖法王衆所歸라 淨心觀佛靡不欣하며
各見世尊在其前하나니 斯則神力不共法이로다
큰 성인 법의 왕은 중생들의 귀의할 바라
청정한 마음으로 부처님을 뵙고 모두 기뻐하도다.
각자가 세존을 뵙되 눈앞에 있는듯하니
이것은 신령한 힘이며 특별한 법이로다.
강설 ; 부처님은 분명히 성인 중에 성인이시다. 그리고 세상의 모든 것 중에 마음을 지닌 사람은 만물 중에 가장 위대하다. 부처님이라고 부르든 사람이라고 부르든 신이라고 부르든 그가 또 어떤 모습을 하고 있든, 텅 빈 청정한 마음으로 그 진실을 관찰해보면 참으로 신기하기 이를 데 없다. 참으로 놀랍고 불가사의하기 이를 데 없다. 그래서 늘 인불(人佛)이라 하고 인신(人神)이라 하고 인천(人天)이라 한다. 부처님이라 하든 신이라 하든 천이라 하든 그것이 어디 멀리 있는 것이겠는가. 바로 지금 내 눈 앞에 있는 것이며, 내 눈으로 보고 있는 이 능력 이 사실인 것을. 그래서 게송은 “이것은 신령한 힘이며 특별한 법이로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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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마경 강설 37 /불국품 35 /8, 보적의 게송 12
佛以一音演說法하시니衆生隨類各得解하야
皆謂世尊同其語하나니 斯則神力不共法이로다
부처님은 한 가지 음성으로 법을 연설하시나
중생들은 종류 따라 각각 알아듣고는
모두들 세존의 말씀이 같다고 하나니
이것은 신령한 힘이며 특별한 법이로다.
강설 ; 부처님은 한 가지 음성으로 설법하시지만 중생들은 사용하는 언어가 여러 가지다. 여러 가지의 언어를 사용하는 온갖 중생들이지만 부처님의 말씀을 다 자기들이 사용하는 언어로 이해한다. 그리고는 부처님이 자신들과 같은 언어를 사용하신다고 말한다. 참으로 “신령한 힘이며 특별한 법이다.”
佛以一音演說法커늘衆生各各隨所解하야
普得受行獲其利하나니 斯則神力不共法이로다
부처님은 한 가지 음성으로 법을 연설하시나
중생들은 제각각 종류 따라 알아듣고는
두루두루 받아 행하여 이익을 얻나니
이것은 신령한 힘이며 특별한 법이로다.
강설 ; 부처님은 한 가지 법을 설하시지만 중생들은 각각 이해하는 바가 다르다. 사무를 보는 사람은 사무를 보는 일과 연관시켜서 이해하고, 농사를 짓는 사람들은 농사를 짓는 일로 연관시켜서 이해하고, 공업을 하는 사람들은 공업을 하는 것과 연관시켜서 이해한다. 상업을 하는 사람들은 상업을 하는 일과 관계를 지어서 이해한다. 사용자는 사용자대로 노동자는 노동자대로, 다 그들 나름대로 받아드리지만 모두가 이익을 얻는 것이 불법이다. 필자도 법문을 하고 나면 그 법문은 꼭 자신을 위해서 한 말씀 같다고 토로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참으로 “신령한 힘이며 특별한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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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마경 강설 38 /불국품 36 /8, 보적의 게송 13
佛以一音演說法하시니或有恐畏或歡喜하며
或生厭離或斷疑하나니 斯則神力不共法이로다
부처님은 한 가지 음성으로 법을 연설하시나
어떤 이는 두려워하고 어떤 이는 기뻐하며
혹은 생사를 싫어하여 떠날 생각내고 혹은 의혹을 끊나니
이것은 신령한 힘이며 특별한 법이로다.
강설 ; 부처님은 한 가지 법문을 하시지만 그것을 듣는 중생들은 여러 가지다. 혹자는 설법을 듣고 그 내용을 지키지 못하여 두려워하는 사람도 있고, 혹자는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였다고 생각하여 환희심에 넘치는 사람도 있다. 또한 진정으로 속된 세상사를 싫어해서 떠날 것을 결심하기도 한다. 석가세존의 법문을 듣고 그 자리에서 출가수행을 결정한 사례들은 참으로 많았다. 5비구 다음에 여섯 번째로 출가한 야사라는 청년이 그와 같은 예다. 또 출가한 아들을 찾으려 왔던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부처님의 법문을 듣고는 평생 부처님께 귀의하겠다고 서원을 세운 사람들이다. 야사의 부모가 귀의하여 부처님 앞에 맹서한 게송을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위대하셔라 세존이시여!
위대하셔라 부처님이시여!
넘어진 자를 일으켜 세워주시고
길 잃은 사람에게 길을 가리켜 주시며,
어둠속에서는 등불이 되어주시고
눈이 있는 사람에게는 와서 보라하시며,
갖가지 진리의 말씀을 들려주시는 부처님!
이제 저의 부부는 부처님과 부처님의 가르침과 스님들께 귀의하겠습니다.
부처님이시여! 저희 부부를 재가 불자로서 받아주소서!
오늘부터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불, 법, 승, 삼보님께 귀의하겠습니다.
출가한 아들을 찾으려 왔다가 이와 같은 신심을 일으켜 첫 재가신자가 된 참으로 아름다운 일이었다. 진실로 진실로 “신령한 힘이며 특별한 법이라.”고 찬탄을 금할 수 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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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마경 강설 39 /불국품 37 /8, 보적의 게송 14
稽首十力大精進하며
큰 정진으로 열 가지 힘을 얻으신 부처님께 머리 숙여 예배합니다.
강설 ; 부처님의 위대하심을 설명하는 데는 여러 가지가 있다. 특히 이 유마경에는 열 가지 지혜의 힘[十力]을 많이 강조하였다. 앞에서 보살들의 덕행을 설명하는 부분에서도 이미 나왔지만 좀 더 익숙하게 공부하기 위해서 다시 설명한다.
1, 처비처지력(處非處智力), 도리와 이치가 옳고 그른 것을 다 아는 지혜의 힘,
2, 업이숙지력(業異熟智力), 일체중생의 삼세 업보를 다 아는 지혜의 힘.
3, 정려해탈등지등지지력(靜慮解脫等持等至智力), 여러 가지 선정과 해탈과 삼매를 다 아는 지혜의 힘.
4, 근상하지력(根上下智力), 중생들의 근기가 높고 낮음을 다 아는 지혜의 힘.
5, 종종승해지력(種種勝解智力), 중생의 여러 가지 지식과 이해를 다 아는 지혜의 힘.
6, 종종계지력(種種界智力), 중생들의 여러 가지 경계를 다 아는 지혜의 힘.
7, 변취행지력(遍趣行智力), 중생들의 여러 가지 행업(行業)으로 어디에 가서 나게 되는 것을 다 아는 지혜의 힘.
8, 숙주수념지력(宿住隨念智力), 숙명통으로 중생의 가지가지 숙명을 다 아는 지혜의 힘.
9, 사생지력(死生智力), 천안통으로 중생이 죽어서 태어날 때와 선한 곳과 악한 곳을 걸림 없이 다 아는 지혜의 힘.
10, 누진지력(漏盡智力), 온갖 번뇌와 습기를 영원히 끊어 없애는 지혜의 힘.
부처님을 찬탄하는 보적의 게송이 여기까지 이르러서는 머리를 숙여 절을 하고 싶은 마음이 용솟음쳐서 넘쳐나는 심정을 잘 알수 있을 것 같다. 한 가지씩 찬탄할 때마다 곧바로 “머리를 숙여 예배합니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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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마경 강설 40 /불국품 38 /8, 보적의 게송 15
稽首已得無所畏하며
이미 두려울 것 없음을 얻은 부처님께 머리 숙여 예배합니다.
강설 ; 부처님을 찬탄하는 데는 네 가지 두려움 없음을 빼 놓을 수 없다. 앞에서 보살들의 덕행을 이야기 하는 데서 이미 나왔다. 수행은 반복이다. 이미 잘 알고 있는 것도 반복함으로 우리들의 의식 속에 깊이 스며들기 때문이다. 옛사람의 말에 신야자 불과습자지문(神也者 不過習者之門)이라 하였다. 무엇이든 신의 경지에 이르는 것은 오로지 반복해서 익숙하게 하기 때문이라는 뜻이다. 세상의 많은 달인들은 타고난 재능이 아니다. 무수히 반복하고 또 반복하여 이뤄진 능력이다. 반복하고 또 반복하면 이루지 못할 일이란 없다.
부처님이 두려움이 없다는 것은 어떤 악한 사람을 만나거나 설법을 하더라도 전혀 의심하거나 두려울 것 없이 당당하다는 뜻이다. 즉 사무소외(四無所畏)다.
1, 정등각무외(正等覺無畏), 깨달아 정각에 오르는데 두려움이 없다.
2, 누영진무외(漏永盡無畏), 온갖 번뇌를 끊어 두려움 없다.
3, 설장법무외(說障法無畏), 설법하는데 비난을 받는 장애가 있어도 두려움이 없다.
4, 설출도무외(說出道無畏), 고통을 끊어 해탈에 이르는 사제와 팔정도를 설하는데 장애가 있어도 두려움이 없다.
천하의 세존이 무엇엔들 두려움이 있겠는가. 부처님은 당연히 온갖 것에 두려움이 없어야 한다. 부처님을 찬탄하면서 반드시 등장하는 내용이다. 부처님께 머리 숙여 예배를 하는 이유가 충분하고도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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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마경 강설 41 /불국품 39 /8, 보적의 게송 16
稽首住於不共法하며
특별한 법[不共法]에 머무신 부처님께 머리 숙여 예배합니다.
강설 ; 부처님의 위대하심을 특별한 법, 즉 열여덟 가지 특별한 법[十八不共法]으로도 표현한다. 이 역시 보살들의 덕행을 나타내는 내용에서 나온 것이다. 부처님의 열여덟 가지 공덕법이라고도 한다.
1, 신무실(身無失), 몸이 실수가 없고.
2, 구무실(口無失), 입이 실수가 없고.
3, 의무실(意無失), 생각이 실수가 없고.
4, 무이상(無異想), 두 가지 생각이 없고.
5, 무부정심(無不定心), 선정을 여읜 마음이 없고.
6, 무부지이사(無不知已捨), 알고서 버리지 않는 것이 없고.
7, 욕무감(欲無減), 하고자 하는 욕망이 감함이 없고.
8, 정진무감(精進無減), 정진이 감함이 없고.
9, 염무감(念無減), 억념함이 감함이 없고.
10, 혜무감(慧無減), 지혜가 감함이 없고.
11, 해탈무감(解脫無減), 해탈이 감함이 없고.
12, 해탈지견무감(解脫知見無減), 해탈지견이 감함이 없고.
13, 일체신업수지혜행(一切身業隨智慧行), 온갖 몸으로 하는 일이 지혜를 따르고.
14, 일체구업수지혜행(一切口業隨智慧行), 온갖 말로 하는 일이 지혜를 따르고.
15, 일체의업수지혜행(一切意業隨智慧行), 온갖 뜻으로 하는 일이 지혜를 따르고.
16, 지혜지견과거세무애무장(智慧知見過去世無碍無障), 지혜로 지나간 세상일을 아는 것이 걸림이 없고.
17, 지혜지견미래세무애무장(智慧知見未來世無碍無障), 지혜로 이 다음 세상일을 아는 것이 걸림이 없고.
18, 지혜지견현재세무애무장(智慧知見現在世無碍無障),지혜로 지금 세상일을 아는 것이 걸림이 없는 것들이다.
부처님은 이러한 점이 뛰어나시기 때문에 머리 숙여 예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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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마경 강설 42 /불국품 40 /8, 보적의 게송 17
稽首一切大尊師하며
일체대중들에게 큰 스승이신 부처님께 머리 숙여 예배합니다.
강설 ; 부처님을 찬탄하는 게송 중에서 가장 많이 알려져 있는 게송은 “천상천하무여불 시방세계역무비 세간소유아진견 일체무유여불자(天上天下無如佛 十方世界亦無比 世間所有我盡見 一切無有如佛者)라는 글인데, 즉 천상과 천하에 부처님 같은 분 없고 시방세계에도 또한 비교할 분 없네. 세간에 있는 모든 분들을 내가 다 보았지만 그 누구도 부처님과 같은 분 없어라.”라는 뜻이다. 대웅전의 주련으로 가장 많이 사용되어 부처님의 존귀함을 표현한다. 또 “삼계의 대도사요 사생의 자비하신 어버이다.”라고도 하였다. 그래서 우리는 “머리를 숙여 예배합니다.”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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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마경 강설 43 /불국품 41 /8, 보적의 게송 18
稽首能斷諸結縛하며
능히 모든 결박을 끊은 부처님께 머리 숙여 예배합니다.
강설 ; 불교의 이상은 해탈이다. 모든 속박, 모든 구속, 모든 결박으로부터의 벗어남이다. 부처님의 가장 부처님 다운 점은 모든 것으로부터의 해탈에 있다. 부처님은 왕후장상이라는 벼슬 따위로부터 일찍이 벗어난 분이다. 부귀영화로부터 멀리 떠난 분이다. 남의 비방과 칭찬으로부터 해탈한 분이다. 온갖 번뇌와 생사와 열반에까지 전혀 흔들림이 없는 분이다. 이와 같은 불교의 진정한 이상을 다 이루신 분이기 때문에 진실로 머리 숙여 예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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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마경 강설 44 /불국품 42 /8, 보적의 게송 19
稽首已到於彼岸하며
이미 저 언덕에 이르신 부처님께 머리 숙여 예배합니다.
강설 ; 피안이란 저 언덕은 무엇을 가리키는 것인가. 불교에서 말하는 이상세계인데 미혹의 이 언덕에 대하여 깨달음의 저쪽 언덕을 뜻한다. 이 언덕이 병고가 많고, 문제가 많고, 장애가 많은 세계라면 저 언덕은 병고를 이미 병고로 보지 않고 훌륭한 가르침으로, 또는 새로운 눈뜸의 방편으로 완전히 활용하여 전화위복으로 만드는 일이다. 온갖 문제가 끊임없이 일어난다면 그 문제들을 정면으로 돌파하는 것이 아니고 전혀 다른 길을 선택하여 보다 다른 차원의 길을 가는 일이다. 생사라는 장애 속에서 생사가 없음을 보는 안목이다. 번뇌라는 장애 속에서 자유를 누리는 일이다. 손해를 보되 보다 다른 차원의 이익을 얻는 일이다. 정리하면 인생의 밝은 낮과 같은 시간보다 어두운 밤과 같은 시간을 훨씬 더 잘 활용하는 안목이다. 세존은 이미 이러한 경지를 터득한 분이시다. 그러므로 머리 숙여 예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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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마경 강설 45 /불국품 43 /8, 보적의 게송 20
稽首能度諸世間하며
능히 모든 세간을 제도하신 부처님께 머리 숙여 예배합니다.
강설 ; 부처님이 이 세상에 오신 뜻은 세상의 중생들을 제도하기 위해서다. 제도란 무엇인가? 인생과 세상에 대해서 삿되게 보고 그릇되게 생각하는 것들을 모두 바르게 보고 바르게 생각하도록 가르치는 것이다. 법화경에서는 부처님이 터득하신 지혜를 열어주고, 보여주고, 깨닫게 해주고, 그 속에 들어가게 해 주기 위함이라고 하였다. 부처님의 지혜란 무엇인가? 무지몽매하고 탐진치와 온갖 번뇌로 뒤범벅이 되어있는 듯이 보이는 사람을 위대한 부처님으로 보는 견해이다. 곧 사람이 그대로 부처님임을 아는 지혜다. 이 사실을 모르면 제도하였다고 할 수 없다. 그러므로 부처님이 세상을 제도하였다는 것은 곧 사람이 부처님이라는 사실을 알고 부처로 살아가는 경지이다. 이 얼마나 고맙고 감사한 일인가? 별별 모습의 인간들을 그대로 부처님으로 승격시켰으니 이보다 더 다행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므로 부처님께 머리 숙여 예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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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마경 강설 46 /불국품 44 /8, 보적의 게송 21
稽首永離生死道하사오니
영원히 생사의 길을 떠난 부처님께 머리 숙여 예배합니다.
강설 ; 불교수행에는 여러 가지 목표가 있을 수 있지만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생사를 벗어나는 일이다. 부처님이 출가를 하신 동기도 늙고 병들고 죽는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은 것이라고도 한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생사해탈(生死解脫)이라는 말을 자주 쓴다. 불교를 통해서 인간사 일체 문제를 다 해결하였다 하더라도 생사를 벗어나지 못하면 불교궁극의 목적을 달성하였다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영원히 생사의 길을 떠난 부처님께 머리 숙여 예배합니다.”라고 한 것이다.
우리나라의 불자들이 잘 하고 있는 절 기도에 열중하는 사람들이나, 저 어느 나라 사람들처럼 수 백리를 가면서 오체투지를 하는 사람들이나, 천배 만 배 온 몸으로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은 부처님의 위와 같은 사실들에 대해서 우러나는 존경심을 감당할 수 없어서 절을 해야 할 것이다. 부처님을 만나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마나서 스스로 “내가 이제 쉴 곳을 얻었구나. 내가 이제 진정으로 이 목숨 바쳐 귀의 할 데가 생겼구나. 내가 이제 죽을 곳을 얻었구나.”라는 심정으로 부처님과 부처님의 가르침에 머리 숙여 예배하여야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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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마경 강설 47 /불국품 45 /8, 보적의 게송 22
悉知衆生來去相하고 善於諸法得解脫하며
중생들의 가고 오는 모습을 다 알고
모든 법에서 해탈을 잘 얻었으며
강설 ; 부처님의 능력과 그 공덕과 지혜의 힘은 앞에서도 몇 번 밝혔다. 여기에서는 특히 중생들의 가고 오고하는 모습을 다 아는 것과 모든 경계와 모든 일에 대해서 시원하게 벗어난 해탈의 능력을 말하였다. 중생들을 교화하려면 중생들이 무슨 업을 지어서 그 업에 따라 어디를 흘러 다니는지, 지금의 생각은 무엇에 이끌리고 있는지 이러한 사실들을 잘 알아야 그것에 맞추어 교화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불교의 교화란 궁극적으로 모든 사람들의 해탈에 있다. 다른 사람을 해탈하도록 가르치려면 자신이 먼저 해탈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길이다. 이 또한 머리 숙여 예배해야할 부처님의 위대한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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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마경 강설 48 /불국품 46 /8, 보적의 게송 23
不着世間如蓮華하고 常善入於空寂行하며
세간에 집착하지 않음이 마치 연꽃과 같고
항상 공적한 행에 잘 들어갔으며
강설 ; 부처님을 표현하고 불교를 표현하고 불교적 삶을 표현하는 가장 간단하고 명료한 비유가 있다. 그것은 연꽃이다. 연꽃을 불교의 꽃, 불교를 상징하는 꽃이라고 한다. 연꽃을 왜 불교의 꽃이라고 하는가? 연꽃에는 몇 가지 특징이 있다. 일반적인 뜻은 순결, 군자, 신성, 청정이지만 불교에는 사연도 많고 의미도 깊다.
부처님께서 룸비니동산에서 처음 태어나시던 날 사방으로 일곱 걸음을 걸으신 후, 오른 손으로 하늘을 가리키고 왼손으로는 땅을 가리키며 “천상천하유아독존 삼계개고오당안지(天上天下唯我獨尊 三界皆苦吾當安之)”라고 외치하실 때 걸음마다 연꽃이 피어올랐다고 한다. 또 부처님이 어느 날 영산회상에서 수많은 청중들이 부처님의 설법을 듣기 위해 숨을 죽이고 기다리고 있을 때 부처님은 말없이 연꽃 한 송이를 들어 대중들에게 보이셨다. 이때 다른 사람은 모두 그 뜻을 몰라 어리둥절하였지만, 오직 가섭존자만이 부처님의 뜻을 알아차리고 미소로써 답하였는데, 이것이 그 유명한 염화미소 이심전심 교외별전 열반묘심(拈花微笑 以心傳心 敎外別傳 涅槃妙心)의 도리다.
그리고 사찰이든 부처님이 앉아계시는 좌대와 탁자, 불탑과 석등, 주춧돌과 추녀의 석가래, 범종과 단청이며 부처님오신 날을 봉축하는 연등 행시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연꽃이다.
인도에서 연꽃의 개념은 만물을 탄생시키는 창조력과 생명력을 지니며, 연꽃이 맑고 깨끗하며 여느 꽃과 달리 진흙 속에서 자라기 때문이다. 꽃잎이 크고 많으며 아름답기 때문에 가장 보배로운 꽃으로 간주되고, 꽃이 피는 동시에 열매를 맺기 때문에 부처님이 설하신 인과(因果)의 이치와 부처님의 고결한 삶은 반드시 시시비비가 뒤끓는 오탁악세에서 꽃피운다는 의미와 잘 맞아 불상의 받침대는 반드시 연꽃으로 표현한다.
연꽃의 특징과 불교적 의미를 살펴보면 첫째, 연꽃은 처염상정(處染常淨)이라는 말로 표현한다. 연꽃은 깨끗한 물에서는 피지 않는다. 더럽고 오염된 물에서만 피어나지만, 그 더러운 환경에 조금도 물들지 않고 슬기롭고 소담하게 환경을 극복하고 아름답게 피는 꽃이다. 이는 곧 부처님이 궁극적 진리를 설하신 내용, 즉 탐진치 삼독과 팔만사천의 번뇌 망상을 가지고 있으면서 그대로가 고귀한 부처님이라는 사실과 같다. 흙투성이의 못생긴 연근이 천하에 둘도 없는 아름답고 향기로운 꽃을 피운다는 사실로서 그것을 증명해 보이고 있다.
둘째, 연꽃은 화과동시(花果同時)이다. 연꽃은 꽃이 핌과 동시에 열매가 그 속에 자리를 잡는다. 이것을 “연밥蓮實”이라 하는데, 꽃은 열매를 맺는 수단이며 열매의 원인인 것이다. 이 꽃과 열매의 관계를 원인[因]과 결과[果]의 관계라 할 수 있다. 인과(因果)의 진리는 곧 불교교리의 근본이자, 부처님 가르침의 요체이다. 또한 불교 궁극적 가르침에 연관시켜 보면 중생은 원인이고 부처는 결과라고 할 때, 실은 부처인 결과는 원인인 중생 속에 이미 자리하고 있어서 그것을 나눌 수 없는 관계다. 즉 부처가 중생이고 중생이 곧 부처인 것이다. 화엄경의 말씀과 같이 “마음과 부처와 중생이 차별이 없는 같은 것이다.”라는 이치를 연꽃이 그대로 대변하고 있다.
셋째, 연꽃의 몽우리는 합장한 모습과 똑 같다. 우리들 얼굴이 피워내는 웃음의 꽃이나, 두 손을 고이 모아 가슴에서 피어나는 연꽃의 모습은 정말 아름다운 연꽃이다. 합장이 피워내는 가슴의 연꽃은 부처님과 중생이 하나가 되고, 너와 내가 하나가 되며, 이상과 현실이 하나가 될 때 피어나는 가장 향기롭고 아름다운 꽃이다. 얼굴에서 꽃을 피워내고, 가슴에서 희망의 꽃을 피워낼 때 우리도 관세음보살이 된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가 연꽃 같은 마음으로 부처님 앞에 합장하고 설 때 우리도 곧 부처임을 증명해 보인다. 이와 같이 우리도 본래로 부처임을 알아서 연꽃처럼 우아하고 청정한 삶으로 거듭나게 되니 이것이 부처님을 상징하고 불교를 상징하고 불교적 삶을 상징하는 꽃이 된 이유이다. 연꽃 한 송이로 불교의 궁극적 진리를 다 표현할 수 있으니 참으로 놀랍고 신기하다.
이 경전의 본문에서는 부처님이 “세간에 있으나 세간에 집착하지 않음이 마치 연꽃과 같다.”라고 표현하였다. 그리고 세간에 집착하지 않으려면 항상 마음을 텅 비운 공적한 행에 잘 들어가 있어야 그것이 가능하다. 불착세간여연화(不着世間如蓮華)도 유마경의 명구이다.
참고로 2010년 7월7일 신문과 각 TV 뉴스에 의하면, “700년 만에 핀 연꽃”이라는 제하에 이날 오전 경남 함안군 함안박물관 수족관에 심어진 아라가야시대의 홍연이 7개의 꽃대와 함께 활짝 꽃을 피워 눈길을 끌고 있다는 것이다. 금년 7월 7일 현재 7개의 꽃대가 올라왔는데 그중 두 송이가 분홍색 꽃잎을 활짝 열었다는 소식이다. 당초에 백연이기를 기대하고 옛 지명의 이름을 따 “아라백연”이라 명명 했지만 700년이란 긴 시공을 뛰어넘어 피어난 이 홍연은 요새 홍련과는 좀 다른 꽃잎수가 적고, 길이가 다소 긴 아름답고 선명한 분홍색의 꽃을 피웠기에 “아라홍연”이라 고쳐 명명하는 한편 증식을 통해 “아라홍연”을 주제로 한 테마공원을 조성하는 등 함안군의 명물로 가꿔 나갈 계획이라는 내용이었다. 연꽃의 신비함을 또 한 번 느끼게 하는 기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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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마경 강설 49 /불국품 47 /8, 보적의 게송 24
達諸法相無?碍이시니
稽首如空無所依니다
모든 법의 행상을 통달하여 걸림이 없으며
허공과 같이 의지함이 없으신 부처님께 머리 숙여 예배합니다.
강설 ; 부처님이 부처님 된 점은 첫째 모든 법을 통달한 것에 있다. 그리고 통달한 모든 법을 중생들에게 가르치기 위해서는 법의 이치와 행상들을 잘 정리하고 체계를 세우는 일이다. 설사 법을 잘 통달하였더라도 체계를 세우지 못하면 그것을 전달하는데 어려움이 생기기 때문이다. 불교에서 법이란 모든 존재와 그 존재들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이다. 또한 모든 존재들의 현상뿐만 아니라 내면의 실상까지 포함한다. 그리고 그러한 것을 투철하게 깨달아서 중생들에게 전달하는 행상, 즉 교법까지 모두 법이라 한다. 그러면서 한편 부처님은 자신이 저 허공과도 같다고 한다. 우리들 의식 속에는 부처님이 큰 산처럼 자리하고 있지만 스스로는 텅 빈 허공과 같아서 의지함이 없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머리 숙여 예배합니다.”라고 하였다.
여기까지가 장자의 아들 보적이 부처님을 찬탄한 노래의 끝이다. 게송이 처음에는 부처님의 공덕만 열거하였다. 그 공덕의 내용을 들으면서 신심이 우러나는 즈음에는 머리를 숙여 예배를 한다. 신심이 더욱 고조되면 예배를 하는 횟수가 늘어나고 나중에는 게송 하나하나 마다 다 예배를 한다. 그리고 게송이 끝날 즈음에는 다시 호흡을 가다듬어 몇 가지 공덕을 더 노래하고 나서 절을 한번 하면서 마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시를 읽거나 소설을 읽을 때도 내용에 따라 읽는 호흡과 속도가 있다. 그 속도의 흐름을 잘 이해하여 그것에 맞추어서 읽으면 그 맛과 향기와 의미와 분위기를 더 잘 느낄 수 있는 것과 같이 불교의 경전도 그와 같다. 특히 이 유마경은 더욱 그렇다. 유마거사의 설법은 유창하다. 화려하고 현란하다. 눈이 부시고 귀가 부신다. 끊임없이 쏟아지는 저 나이아가라의 폭포수와 같다. 이러한 점을 음미하면서 경전을 읽으면 그 환희가 몇 배나 더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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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마경 강설 50 /1, 불국품 48 /9, 불국토 1
9, 불국토(佛國土)
爾時에 長者子寶積이 說此偈已하고 白佛言하되 世尊이시여 是五百長者子가 皆已發阿?多羅三?三菩提心하며 願聞得佛國土淸淨하나이다 唯願世尊은 說諸菩薩淨土之行하소서
그때에 장자의 아들 보적이 이 게송을 설하여 마치고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여기에 있는 5백 명의 장자의 아들들이 모두 이미 최상의 깨달음에 대한 마음을 내었으며 불국토의 청정함을 듣기를 원합니다. 오직 원하오니 세존께서는 모든 보살들의 정토의 행을 말씀하여 주십시오.”
강설 ; 이 품은 부처님의 국토를 나타내는 불국품이다. 보적이 게송으로 부처님을 찬탄하고 나서 자신과 함께한 5백 명의 장자의 아들들이 모두 최상의 깨달음에 대한 마음, 즉 보리심을 발하였으므로 부처님의 세계, 부처님의 국토가 얼마나 훌륭한가[淸淨]를 듣고 싶다고 하였다. 깨달음에 대한 마음을 내었으니 그 마음의 결과라고 할 수 있는 이상세계인 불국토가 어떤 것인지를 먼저 알고 싶은 마음에서이다.
그러면서 한편 보살들의 정토의 행에 대해서 설명해 주기를 청하였다. 정토행(淨土行)이란 불국토를 취해서 불국토를 누리려면 무엇인가의 실천행이 뒤따라야 가능하기 때문에 보살이 실천해야할 정토행, 즉 “정토에 태어날 수 있는 수행”이라는 표현을 한 것이다. 그래서 아래에 보살의 정토행에는 6바라밀과 4무량심과 4섭법과 37조도품 등 불교의 여러 가지 수행법을 모두 열거하였다. 불교의 이상을 실현할 수 있는 수행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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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마경 강설 51 /1, 불국품 49 /9, 불국토 2
佛言하사대 善哉라 寶積아 乃能爲諸菩薩하야 問於如來淨土之行하니 諦聽諦聽하야 善思念之하라 當爲汝說하리라 於是에 寶積이 與五百長者子로 受敎而聽하니라
부처님께서 말씀하였다.
“훌륭하구나. 보적이여, 능히 모든 보살들을 위하여 여래의 정토의 행을 묻는구나. 자세히 듣고 자세히 들어라. 그리고 잘 생각하여라. 마땅히 그대들을 위하여 설명하리라.”
이에 보적이 5백명의 장자의 아들들과 함께 가르침을 받고 들었다.
강설 ; 앞에서는 보살의 정토행이라고 하였는데 여기서는 또 “여래의 정토행”이라고 하였다. 보살의 정토행과 여래의 정토행이 무엇이 다를까? 그것은 여래가 지금 누리는 불국, 이상세계, 깨달음의 경지는 과거 보살로 있을 때 정토에 태어날 수 있는 수행을 닦은 결과다. 즉 여래가 과거에 닦았던 정토에 태어날 수 있는 수행이란 뜻이다. 그러므로 보살의 정토행이나 여래의 정토행은 같은 뜻이다. 달리 표현하면 깨달음의 지혜를 성취하기 위한 수행이다. 이상세계와 깨달음의 삶과 해탈감을 성취하기 위한 수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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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마경 강설 52 /1, 불국품 50 /9, 불국토 3
佛言하사대 寶積아 衆生之類가 是菩薩佛土니라 所以者何오 菩薩이 隨所化衆生하야 而取佛土하며 隨所調伏衆生하야 而取佛土하니라
부처님께서 말씀하였다. “보적이여, 온갖 중생들이 보살의 불국토니라. 왜냐하면 보살이 교화할 바의 중생들을 따라서 불국토를 취하느니라. 조복할 바의 중생들을 따라서 불국토를 취하느니라.
강설 ; “온갖 중생들이 보살의 불국토[衆生之類 菩薩佛土]다.”라는 말은 유마경의 명구다. 이 얼마나 고마운 말씀인가. 보살의 삶은 오로지 중생이다. 보살은 중생의 아픔을 어루만져서 낫게 하기 위해서 산다. 중생이 고통에서 신음하는 소리를 듣고 그들에게 다가가서 그들을 보살피기 위해서 산다. 중생들이 무엇을 필요로 하는가를 잘 살펴서 그들을 풍요롭게 해 주기 위해서 산다. 그러므로 보살들의 낙원, 보살들의 불국토, 보살들의 심장이며 골수가 중생이다. 또한 보살들의 일터가 중생이다. 보살들이 목숨 다해 죽을 곳이 중생이다. 보살들은 중생을 만나 그 죽을 곳을 얻었다.
보살들은 왜 불국토를 의지하고 불국토를 취하는가? 몽매하고 어리석은 중생들을 교화하기 위해서다. 고집불통이어서 말을 듣지 않는 중생들을 잘 달래어 조복하기 위해서 불국토를 가진다. 보살들에게 중생이 아니라면 그들에게 무슨 불국토가 필요로 하겠는가. 극락정토나 화장장엄세계나 불국토가 모두 중생들을 위한 것이다. 아니 보살의 불국토는 곧 중생 그 자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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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마경 강설 53 /1, 불국품 51 /9, 불국토 4
隨諸衆生이 應以何國으로 入佛智慧하야 而取佛土하며 隨諸衆生이 應以何國으로 起菩薩根하여 而取佛土하니라 所以者何오 菩薩이 取於淨國은 皆爲饒益諸衆生故니라
모든 중생들이 반드시 어떤 국토로써 부처의 지혜에 들어가는가를 따라서 불국토를 취하며, 모든 중생들이 반드시 어떤 국토로써 보살의 근본을 일으키는가를 따라서 불국토를 취하느니라. 왜냐하면 보살이 청정한 국토를 취하는 것은 모두가 중생들을 이익하게하기 위한 까닭이니라.
강설 ; 불국품에서 불국토를 설정하는 것은 중생들을 교화하기 위한 방편이다. 중생들이 어떤 국토라야 부처님의 지혜에 들어갈 수 있을까가 화두다. 법화경에서 “중생들에게 부처님의 지혜를 열어주고, 부처님의 지혜를 보여주고, 부처님의 지혜를 깨닫게 해주고, 부처님의 지혜에 들어가게 해 주기 위해서 부처님은 이 세상에 출현하였다.”고 하였다. 부처님의 화두는 오로지 중생제도에 있다. 국토라는 이름으로 교화방편을 삼은 것은 매우 빼어난 발상이다.
또 중생들에게 보살의 근본을 일으키는데도 무슨 국토라야 하는가가 부처님의 관심사다. 보살의 근본이란 무엇인가? 자비심이다. 투철한 지혜를 바탕으로 한 큰 사랑과 연민히 여기는 마음이다. 중생을 큰 사랑으로 감싸고 연민히 여기는 보살의 근본을 일으키는 이유는 무엇일까? “오로지 중생들을 이익하게하기 위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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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마경 강설 54 /1, 불국품 52 /9, 불국토 5
譬如有人이 欲於空地에 造立宮室이면 隨意無碍어니와 若於虛空이면 終不能成하나니 菩薩도 如是하야 爲成就衆生故로 願取佛國하나니 願取佛國者는 非於空也니라
비유하자면 마치 어떤 사람이 텅 빈 땅에 집을 세우고자하면 마음대로 할 수 있어서 아무런 장애가 없지만, 만약 허공에다 세우려고 하면 마침내 이룰 수 없는 것과 같다. 보살도 이와 같아서 중생들을 성취하고자 하기 때문에 불국토를 취하기를 원하느니라. 불국토를 취하기를 원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에서 하는 것이 아니니라.”
강설 ; 중생제도라는 목표가 없으면 부처님도 없으며 보살님도 없다. 부처님의 세계와 보살들의 교화활동은 오로지 제도해야할 중생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중생들의 입장에서는 부처님과 보살들이 고맙지만, 부처님이나 보살들의 입장에서는 중생들이 고마운 것이다. 왜냐하면 중생이 없으면 부처도 없고 보살도 없기 때문이다. 중생이라는 땅이 없으면 부처님이나 보살이라는 궁전을 지을 수 없기 때문이다. 불교와 부처님과 보살들과 조사들과 일체 선지식들과 모든 사원들이 이 땅에 존재하는 까닭을 이처럼 명백하게 밝힌 경문은 보기 드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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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마경 강설 55 /1, 불국품 53 /10, 보살의 정토행(淨土行) <1> 세 가지 마음 /1, 직심
寶積아 當知하라 直心이 是菩薩淨土니 菩薩이 成佛時에 不諂衆生이 來生其國하니라
“보적이여, 마땅히 알아라. 곧은 마음이 보살의 청정국토니 보살이 성불할 때에 아첨하지 않는 중생이 그 나라에 와서 태어나느니라.”
강설 ; 정토에 태어날 수 있는 수행을 하는데 가장 중요한 세 가지 마음[三心]을 먼저 들었다. 첫째가 직심(直心)이다. “곧은 마음이 보살의 정토[直心是菩薩淨土]다.”라는 말도 유마경의 명구다. 곧은 마음이란 순일하고, 바르고, 정직하고, 깨끗하고, 순수한 마음이다. 그런 마음이 그대로 보살의 정토다. 보살이 그와 같은 마음을 써야 보살의 정토가 이뤄진다. 그리고 그와 같은 마음을 늘 쓰는 사람의 주변에는 사특하거나 아첨하거나 부정한 마음을 쓰는 사람들이 가까이 하지 않는다. 설사 저의를 가지고 가까이 하더라도 견뎌내지 못한다. 저절로 걸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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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마경 강설 55 /1, 불국품 53 /10, 보살의 정토행(淨土行) <1> 세 가지 마음 /2, 심심
深心이 是菩薩淨土니 菩薩이 成佛時에 具足功德衆生이 來生其國하니라
깊은 마음이 보살의 청정국토니 보살이 성불할 때에 공덕을 갖춘 중생들이 그 나라에 와서 태어나느니라.
강설 ; 정토에 태어날 수 있는 수행을 하는데 중요한 세 가지 마음 중에서 두 번째는 심심(深心)이다. 깊은 마음이란 좁거나 얕거나 성급하지 않은 마음이다. 보살이란 불교에서 말하는 가장 바람직한 인격자다. 군자요, 지성인이다. 그렇다면 당연히 침착하고, 속이 깊고, 아량이 넓고, 남을 잘 배려하고, 넉넉하게 마음을 쓰는 사람이리라. 그와 같은 사람에게는 역시 주변에서 함께하는 사람들까지도 선량하고 정직하고 의로운 사람들이므로 훌륭한 공덕을 저절로 갖추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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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마경 강설 56 /1, 불국품 54 /10, 보살의 정토행(淨土行) <1> 세 가지 마음 /3, 보리심
菩提心이 是菩薩淨土니 菩薩이 成佛時에 大乘衆生이 來生其國하니라
보리심이 보살의 청정국토니 보살이 성불할 때에 대승중생이 그 나라에 와서 태어나느니라.”
강설 ; 정토에 태어날 수 있는 수행을 하는데 중요한 세 가지 마음 중에서 세 번째는 보리심(菩提心)이다. 보리심이란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줄여서 부르는 말이다. 즉 무상정각, 다시 말하면 최상의 깨달음에 대한 마음이다. 최상의 깨달음이란 곧 석가세존이 깨달으신 그 깨달음을 이르는 말이다. 출가나 재가를 막론하고 불교를 믿고 불교를 공부하는 모든 불자는 누구나 부처님이 깨달으신 그 깨달음을 성취해서 일체 중생들에게도 역시 같은 깨달음을 얻도록 교화하는 것을 지상의 목표로 하고 수행한다. 보리심을 달리 표현하면 지혜와 자비라고 하는데, 곧 자신이 깨달음의 지혜를 갖추어서 다른 사람들도 깨닫게 하고자 하는 자비의 실천을 합하여 “보리심”이라 한다. 이러한 마음이 대승심이다. 이러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면 설사 중생이라 하더라도 아주 훌륭한 중생이다. 그래서 “대승중생”이라 한 것이다. 보리심은 불교의 용어 중에서 가장 깊이 있고 중요한 말이다. 그래서 불자들은 길을 가다가 동물을 만나도 “발보리심하라.”라고 중얼거리고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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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마경 강설 57 /1, 불국품 55 /10, 보살의 정토행(淨土行) <2> 6바라밀 /1 보시
布施가 是菩薩淨土니 菩薩이 成佛時에 一切能捨衆生이 來生其國하니라
“보시가 보살의 청정국토니 보살이 성불할 때에 일체를 능히 주고 제공하는 중생이 그 나라에 와서 태어나느니라.”
강설 ; 정토에 태어날 수 있는 수행에는 6바라밀이 빠질 수 없다. “보시가 보살의 정토다.”라고 하였는데 사람에게 있어서 보시를 할 때의 마음처럼 좋은 마음이 없다. 의로운 사람에게는 보시가 최고의 행복이다. 보시를 좀 더 부연하여 사(捨)라 하는데 무엇이나 주고 필요한 것을 다 제공한다는 뜻이다. 불교의 보시는 10분의 1만 주는 정도가 아니고 자신의 모든 것을 다 주는 것이다. 경전에 의하면 처자와 권속과 노비와 궁전과 집과 동산과 논과 밭과 자신의 눈과 혀와 입과 머리와 심장과 손과 발과 온갖 장기와 끝내는 목숨까지 주는 것으로 되어 있다. 화엄경 십회향품에는 이와 같은 종류가 60여 종이나 소개되어 있다. 평소에 보시를 많이 하는 사람에게는 주위에 그를 돕고 무엇이나 제공하는 사람들이 많이 모인다. 그래서 늘 풍요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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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마경 강설 58 /1, 불국품 56 /10, 보살의 정토행(淨土行) <2> 6바라밀 /2, 지계
持戒가 是菩薩淨土니 菩薩이 成佛時에 行十善道滿願衆生이 來生其國하니라
지계가 보살의 청정국토니 보살이 성불할 때에 열 가지 선한 도를 행하는 소원이 만족한 중생이 그 나라에 와서 태어나느니라.
강설 ; 계율이란 종교생활의 중요한 덕목이다. 계율을 잘 지키는 것은 보살로서 정토에 태어나는 수행으로서는 당연한 길이다. 편안하고 행복감이 충만하며 해탈감이 가득한 삶이 곧 구체적인 정토의 실현이다. 그와 같은 삶이 되게 하려면 당연히 열 가지 선한 일을 열심히 해야 한다. 불교에는 십악(十惡)이 있고 십선(十善)이 있다.
첫째, 살생의 문제인데, 산목숨을 정당한 이유 없이 헤치는 것은 악이다. 반대로 위해를 당하거나 죽게 될 생명을 살려주고 보살펴 주는 것은 선이다. 둘째, 투도(偸盜)인데, 남의 물건이나 재산이나 공개되지 아니한 지식까지도 허락 없이 가지거나 몰래 소유하는 것은 악이다. 반대로 물건이나 재산이나 지식이나 육체적 힘이나 신체의 장기나 시간 등등을 남에게 베풀고 나누어 주는 것은 선이다. 불교 최고의 덕목인 자비보시다. 셋째, 사음(邪淫)이다. 사랑하는 사이도 아니면서 욕망을 충족하기 위한 남녀의 관계는 악이다. 반대로 부부로서 사랑의 한 표현으로 그치고 욕망을 잘 다스려 몸가짐을 청정하게 하는 것은 선이다. 이것은 몸으로 짓는 세 가지 신업(身業)이라고 한다. 넷째, 망어(妄語)라고 하는데, 즉 자신의 이익이나 체면이나 변명을 위해 거짓말을 하는 것은 악이다. 반대로 손해를 보더라도 정직하게 말하고 자신이 한 일에 대해서 조금도 숨김없이 말하여 세상에 의혹이 없게 하는 것은 선이다. 다섯째, 기어(綺語)인데, 자신을 유리하게 하기 위해서 입에 발린 말이나 꾸미는 말이나 유창하고 비단결 같은 말은 악이다. 반대로 어떤 사안에 대해서 정확하고 가감 없이 사실대로만 표현하는 것은 선이다. 여섯째, 양설(兩舌)이다. 한 가지 사실을 두고 여기서는 이렇게 말하고 저기서는 저렇게 말하여 상반되는 표현을 하거나 이간질을 시키는 것은 악이다. 그러나 설사 상반되는 견해라 하더라도 서로 다른 주장을 잘 융화시키고 화합을 시키는 말은 선이다. 일곱째, 악구(惡口)다. 욕을 하거나 악담을 하거나 험담을 하거나 비난을 하는 것은 악이다. 반대로 “부드러운 말 한 마디 참다운 공양구다.”라고 하였듯이 칭찬을 하고, 부드러운 말을 하고, 아름다운 말을 하고, 사랑스러운 말을 하는 것은 선이다. 이것이 입으로 짓는 네 가지 구업(口業)이다. 여덟째, 탐심(貪心)이다. 물질이나 재산이나 사람이나 명예나 좋은 집이나 절이나 온갖 것에 탐욕을 부리는 것은 악이다. 반대로 내가 가진 것을 베풀고 나누고 함께하는 것은 선이다. 아홉째, 진심(嗔心)이다. 분노, 화, 성질, 신경질인데 이와 같은 것을 참지 못하고 남에게 드러내는 것은 악이다. 반대로 사랑과 친화와 화목과 융화와 부드러움으로 가득한 표현은 선이다. 열 째, 치심(癡心)이다. 이치를 모르며 자신의 역량과 분을 모르고 어리석음으로 가득한 캄캄한 행동은 악이다. 반대로 지혜가 충만하여 모든 일에 그 이치를 알고 자신의 분과 역량을 잘 알아서 현명하게 행동하는 것은 선이다. 이것이 생각으로 짓는 세 가지 의업(意業)이다.
이와 같은 열 가지의 선한 행동은 보살이 정토의 세계를 실현하고 평화롭고 안락하고 해탈감에 넘치는 삶을 영위하는 데는 필수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이와 같은 십선계를 가지는 것을 보살의 정토라고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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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마경 강설 59 /1, 불국품 57 /10, 보살의 정토행(淨土行) <2> 6바라밀 /3, 인욕
忍辱이 是菩薩淨土니 菩薩이 成佛時에 三十二相莊嚴衆生이 來生其國하니라
인욕이 보살의 청정국토니 보살이 성불할 때에 32상으로 장엄한 중생이 그 나라에 와서 태어나느니라.
강설 ; 아름다운 상호는 그 사람이 마음을 쓰는 대로 따라간다. 아무리 외모는 미인으로 태어났다 하더라도 분노하고 시기 질투하고 화를 잘 낸다면 그런 얼굴을 좋아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부처님의 32상이란 아무리 마음에 들지 않은 일이 생기더라도 상대편의 입장에서 잘 이해하고 배려하고 너그럽게 용서하고 자비로서 거둬주는 데서 풍기는 모습을 뜻한다. 그런 사람은 누구나 좋아한다. 결국은 그런 사람의 모습이 잘 생긴 사람이다. 부처님의 32상도 세세생생 마음을 그렇게 썼기 때문에 생긴 결과다. 참으로 아름답게 잘 생기려고 한다면 인욕을 잘하고 마음을 잘 쓰면 된다. 인욕이 없는 보살이 어디에 있겠는가. 보살의 당연한 덕목이며 정토를 실현하는데 필수요건이다.
참고로 대지도론(大智度論) 4권에 있는 32상을 기록한다.
1, 족하안평립상(足下安平立相), 발바닥이 평평한 모습.
2, 족하이륜상(足下二輪相), 발바닥에 두 개의 바퀴 모양의 무늬가 있다.
3, 장지상(長指相), 손가락이 길다.
4, 족근광평상(足?廣平相), 발꿈치가 넓고 평평하다.
5, 수족지만망상(手足指?網相), 손가락과 발가락 사이에 비단 같은 막이 있다.
6, 수족유연상(手足柔軟相), 손발이 부드럽다.
7, 족부고만상(足趺高滿相), 발등이 높고 원만하다.
8, 천여록왕상(?如鹿王相), 장딴지가 사슴 왕과 같다.
9, 정립수마슬상(正立手摩膝相), 팔을 펴면 손이 무릎까지 내려간다.
10, 음장상(陰藏相), 음경이 몸 안에 감추어져 있다.
11, 신광장등상(身廣長等相), 신체의 가로 세로가 같다.
12, 모상향상(毛上向相), 털이 위로 향해 있다.
13, 일일공일모생상(一一孔一毛生相), 털구멍마다 하나의 털이 있다.
14, 금색상(金色相), 몸이 금빛이다.
15, 장광상(丈光相), 몸에서 나오는 빛이 두루 비춘다.
16, 세박피상(細薄皮相), 피부가 부드럽고 얇다.
17, 칠처융만상(七處隆滿相), 두 발바닥과 두 손바닥, 두 어깨와 정수리가 두텁고 풍만하다.
18, 양액하륭만상(兩腋下隆滿相), 두 겨드랑이가 두텁고 풍만하다.
19, 상신여사자상(上身如師子相), 상반신이 사자와 같다.
20, 대직신상(大直身相), 신체가 크고 곧다.
21, 견원만상(肩圓滿相), 어깨가 원만하다.
22, 사십치상(四十齒相), 치아가 마흔 개다.
23, 치제상(齒齊相), 치아가 가지런하다.
24, 아백상(牙白相), 어금니가 희다.
25, 사자협상(師子頰相), 뺨이 사자와 같다.
26, 미중득상미상(味中得上味相), 맛 중에서 가장 좋은 맛을 느낀다.
27, 대설상(大舌相), 혀가 크다.
28, 범성상(梵聲相), 음성이 맑다.
29, 진청안상(眞靑眼相), 눈동자가 검푸르다.
30, 우안첩상(牛眼睫相), 속눈썹이 소와 같다.
31, 정계상(頂?相), 정수리가 상투 모양으로 돋아나 있다.
32, 백모상(白毛相), 두 눈썹 사이에 흰 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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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마경 강설 60 /1, 불국품 58 /10, 보살의 정토행(淨土行) <2> 6바라밀 /4, 정진
精進이 是菩薩淨土니 菩薩이 成佛時에 勤修一切功德衆生이 來生其國하니라
정진이 보살의 청정국토니 보살이 성불할 때에 일체의 공덕을 부지런히 닦는 중생이 그 나라에 와서 태어나느니라.
강설 ;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발전과 능력을 키우는데 관심은 가지고 있어서 어떤 일들을 시작은 하지만 그것을 지속적으로 쉬지 않고 노력을 하여 성공을 거두는 것을 보기는 대단히 어렵다. 특히 자신의 복력을 증장시키고, 지혜를 쌓으며, 공덕을 꾸준히 닦는 일에는 참으로 쉽지 않다. 그래서 6바라밀에서 부지런히 쉬지 않고 공덕을 닦는 정진을 높이 사는 것이다. 무엇에나 꾸준히 정진하지 않고 한두 번에 이루어지는 일은 없다. 청정국토를 이 세상에 실현하는 일에야 정진이 당연한 덕목이다. 보살들의 주변에는 착한 일, 남을 배려하는 일, 복을 닦는 일, 공덕을 닦는 일에 열심인 사람들만 모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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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마경 강설 61 /1, 불국품 59 /10, 보살의 정토행(淨土行) <2> 6바라밀 /5, 선정
禪定이 是菩薩淨土니 菩薩이 成佛時에 攝心不亂衆生이 來生其國하니라
선정이 보살의 청정국토니 보살이 성불할 때에 마음을 거두어 산란하지 않는 중생이 그 나라에 와서 태어나느니라.
강설 ; 선정이란 흩어지고 산란한 마음을 한 곳에 잘 집중한 상태다. 보살이 정토를 실현하려면 어지럽거나 잘 흩어지는 정신 상태로는 불가능하다. 그래서 “마음을 거두어 산란하지 않는 사람들이 태어나 함께 한다.”고 한 것이다. 화두를 들거나, 기도를 하거나, 염불을 하거나, 주력을 하거나, 경전을 읽거나, 여러 가지 불교의 수행을 함에 있어서 마음이 집중이 잘 되어야 효과가 있다. 예를 들어 화두를 드는데 한 시간 동안에 10분정도 들리고 나머지 50분은 다른 잡념으로 가득하다면 그것은 산란한 마음이다. 선정이라고 할 수 없다. 다른 수행도 마찬가지다. 마음을 거두어 산란하지 않는 사람이라야 보살의 청정국토를 수용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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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마경 강설 62 /1, 불국품 60 /10, 보살의 정토행(淨土行) <2> 6바라밀 /6, 지혜
智慧가 是菩薩淨土니 菩薩이 成佛時에 正定衆生이 來生其國하니라
지혜가 보살의 청정국토니 보살이 성불할 때에 바른 선정의 중생이 그 나라에 와서 태어나느니라.”
강설 ; 지혜는 바른 선정을 통해서 성취된다. 그래서 바른 선정의 중생들이 그 나라에 와서 태어난다고 하였다. 지혜가 보살의 정토라는 말은 의미가 깊다. 법화경에는 앞의 5바라밀과 마지막의 지혜바라밀의 차이점을 크게 부각하고 있다. 앞의 5바라밀은 아무리 잘 닦았더라도 큰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지만 지혜바라밀만은 대단히 뛰어난 수행이며 곧 부처님이 깨달으신 지혜와 같은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보살의 청정국토를 이야기하면서 6바라밀을 모두 열거하였다. 하나하나의 덕목은 그대로가 보살의 청정국토다. 6바라밀이 곧 이상적인 세계다. 평화와 자유와 행복이 충만한 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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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마경 강설 63 /1, 불국품 61 /10, 보살의 정토행(淨土行) <3> 사무량심(四無量心)
四無量心이 是菩薩淨土니 菩薩이 成佛時에 成就慈悲喜捨衆生이 來生其國하니라
“네 가지 한량없는 마음[四無量心]이 보살의 청정국토니 보살이 성불할 때에 자비희사를 성취한 중생이 그 국토에 와서 태어나느니라.”
강설 ; 사무량심은 앞에서 설명한 3심(心), 6바라밀과 더불어 보살의 수행덕목 중에 매우 중요한 것이다. 사등(四等) · 사범주(四梵住)라고도 하는데, 즉 자(慈) · 비(悲) · 희(喜) · 사(捨)다.
첫째, 자무량심(慈無量心)은 모든 중생들에게 사랑의 즐거움을 주는 마음이다. 사람뿐만 아니라 생명을 가진 모든 것을 골고루 사랑하는 마음이다. 약한 동물이건 작은 미생물이건 움직이지 못하는 식물이건 간에 차별하는 마음을 가지지 않고 한량없이 사랑하는 마음이다.
둘째, 비무량심(悲無量心)은 중생들이 잘못을 저지르고 죄업을 지을 때 그들을 꾸짖거나 나무라지 않고 불상하게 여기고 연민히 여기고 애석하게 여겨서 그들을 바른 길로 이끌려는 마음이다. 또한 바르고 참된 이치를 모르는 것에 대하여 보살은 무한히 애석해하고 연민히 여겨서 그들을 무슨 방편을 쓰더라도 깨닫게 해 주려는 마음이 한량이 없다.
셋째, 희무량심(喜無量心)은 보살은 모든 사람, 모든 생명들에게 기쁨을 주려는 마음이 한량이 없다. 잘한 일이든 잘못한 일이든 분별하지 않고 진심으로 기뻐하고 축하해주는 마음이 한량이 없다. 특히 다른 사람에게 좋은 일이 있을 때 결코 시샘하지 않고 진정으로 기뻐해 주는 마음이다.
넷째, 사무량심(捨無量心)은 자신에게 원한이 있거나 손해를 끼쳤거나 피해를 입혔거나 비난과 음모를 하였더라도 그와 같은 감정을 다 버리고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이롭게 하는 마음이 한량이 없다. 친한 사람이나 먼 사람이나 구별하지 않고 모든 이웃, 모든 생명들에게 평등한 마음으로 무엇이든 아낌없이 베푸는 마음이다. 이러한 마음이 진정한 보살의 마음이다.
이와 같은 네 가지 한량없는 마음이 곧 보살의 청정국토다. 보살은 당연한 마음자세며 평범한 불자라 하더라도 참으로 중요하고 가치 있는 덕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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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마경 강설 64 /1, 불국품 62 /10, 보살의 정토행(淨土行) <3> <4> 사섭법(四攝法)
四攝法이 是菩薩淨土니 菩薩이 成佛時에 解脫所攝衆生이 來生其國하니라
네 가지 섭수하는 법이 보살의 청정국토니 보살이 성불할 때에 해탈로 섭수할 중생이 그 국토에 와서 태어나느니라.
강설 ; 네 가지로 섭수하는 법은 보살이 중생을 제도(濟度)할 때에 취하는 네 가지 기본적인 태도이다. 사섭사(四攝事)라고도 한다. 첫째, 보시(布施)는 진리를 가르쳐 주고[法施], 재물을 기꺼이 베풀어 주는 일[財施], 편안함을 주어 두려움이 없게 하는 것[無畏施]이다. 보시로서 사람을 교화하고 섭수한다. 둘째, 애어(愛語)는 사람들에게 항상 따뜻한 얼굴로 대하고 부드러운 말을 하는 일이다. 이와 같은 언어로서 사람을 교화하고 섭수한다. 셋째, 이행(利行)은 신체의 행위[身業]와 언어행위[口業]와, 정신행동[意業]의 3업에 의한 선행으로 사람들에게 이익을 주는 일이다. 사람을 교화하는 데는 먼저 그를 이익이 되게 하여야 가르침을 따른다. 넷째, 동사(同事)는 자타(自他)가 일심동체가 되어 협력하는 일이며, 특히 다른 사람을 교화하기 위해서 그가 하는 일을 같이 하여 섭수한다고 하여 동사섭(同事攝)이라 한다. 궁극적으로는 사섭법으로 해탈에 이르게 하는 것이 목적이다. “해탈로 섭수할 중생이 그 국토에 와서 태어난다.”라고 한 것은 현재에 해탈을 완성하지는 못하였더라도 해탈한 사람들의 축에 들 수 있는 정도의 견해와 수행이 되어 있는 사람들이란 뜻이다. 그러한 사람들이 내 주변에 모여 산다는 것은 너무나 큰 행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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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마경 강설 65 /1, 불국품 63 /10, 보살의 정토행(淨土行) <5> 방편(方便)
方便이 是菩薩淨土니 菩薩이 成佛時에 於一切法에 方便無?衆生이 來生其國하니라
방편이 보살의 청정국토니 보살이 성불할 때에 일체의 법에 방편의 문이 한정이 없는 중생이 그 국토에 와서 태어나느니라.
강설 ; 보살이 중생을 제도함에 있어서는 방편은 필수다. 그리고 그 방편은 제한이 있거나 한계가 있을 수 없다. 방편은 쓰임에 따라 여러 가지 뜻으로 해석된다. 방은 방법, 편은 편리를 뜻하여 일체 중생마다 다른 본래적 성질과 능력, 즉 기류근성(機類根性,根機)에 부합하는 방법을 편리하게 쓰는 일을 뜻한다. 또 방은 방정한 이치, 편은 교묘한 말로 해석되어 중생에 맞추어 방정한 이치를 교묘한 말로 전하는 일을 말한다. 또 이를 위해 교화의 편법을 강구하는 일이나 또는 그 교화의 편법을 뜻한다. 특히 중생 제도에 목적을 둔 대승불교에서는 방편을 중요시하여 설법하는 장소와 상대에 따라 갖가지 방편이 설명되고, 경전에 따로 방편품(方便品)을 두는 예가 많다. 특히 묘법연화경의 방편품은 유명하다. 또 화엄경에서는 이 방편을 중시하여 보살의 실천수행의 덕목인 육바라밀에 더하여 방편바라밀이 설정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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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마경 강설 66 /1, 불국품 64 /10, 보살의 정토행(淨土行) <6> 삼십칠도품(三十七道品)
三十七道品이 是菩薩淨士니 菩薩이 成佛時에 念處 ? 正勤 ? 神足 ? 根 ? 力 ? 覺 ? 道衆生이 來生其國하니라
37도품이 보살의 청정국토니 보살이 성불할 때에 4념처와 4정근과 4신족과 5근과 5력과 7각지와 8정도의 중생이 그 나라에 와서 태어나느니라.”
강설 ; 도품(道品)이란 불도수행의 실천방법의 종류를 뜻하고, 삼십칠은 사념처(四念處), 사정근(四正勤), 사신족(四神足) 또는 사여의족(四如意足), 오근(五根), 오력(五力), 칠각지(七覺支), 팔정도(八正道) 등 일곱 가지 수행방법을 합친 것이다.
첫째, 사념처(四念處)는 네 가지 마음을 두는 곳으로 신념처(身念處) · 수념처(受念處) · 심념처(心念處) · 법념처(法念處)를 이른다. 이것은 범부가 지닌 상(常)과 낙(樂)과 아(我)와 정(淨)의 치우친 견해를 깨뜨리는 것을 말한다. 즉 관신부정(觀身不淨)이다. 몸은 부정한 것이라고 관찰한다. 관수시고(觀受是苦)다. 받아들이는 모든 인식은 고통이라고 관찰한다. 관심무상(觀心無常)이다. 마음은 무상한 것이라고 관찰한다. 관법무아(觀法無我)다. 모든 법은 실재하는 주체가 없다고 관찰한다.
둘째, 사정근(四正勤)이란 사정단(四正斷)이라고도 한다. 단단(斷斷)이다. 이미 생긴 악을 없애려고 힘쓰는 것이다. 율의단(律儀斷)이다. 악이 생기지 않도록 힘쓰는 것이다. 수호단(隨護斷)이다. 선이 생기도록 힘쓰는 것이다. 수단(修斷)이다. 이미 생긴 선을 늘리도록 힘쓰는 것이다.
셋째, 사신족(四神足) 또는 사여의족(四如意足)이라고도 한다. 수행을 통해 얻는 자재한 경지를 의미한다. 여의(如意)는 뜻대로 자유자재한 신통을 말하며, 족(足)은 신통이 일어나는 각족(脚足)으로서 근본원인이라는 의미다. 정(定)을 얻는 수단에 욕(欲), 정진(精進), 심(心), 사유(思惟)의 넷이 있으므로 일어나는 원인에 의하여 정(定)을 나눈다.
1은 욕여의족(欲如意足)이다. 의욕정(意欲定)이라고도 한다. 수행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열반이라는 수행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의욕이 있어야 한다. 이러한 의욕에 마음을 집중하는 것을 욕정(欲定)이라 한다. 이렇게 오직 열반을 성취하리라는 의욕에 찬 생각에 마음 집중으로써 유위(有爲)를 조작하는 삶, 즉 행이 그치는 것을 단행(斷行)이라 한다. 즉 올바른 수행의 목적을 세우고 그것을 성취하려는 의욕에 마음을 집중하면 헛된 욕망이 사라져 유위(有爲)를 조작하는 행(行)이 멸(滅)한다는 것이다. 즉 고(苦)를 종식시키려는 간절한 마음이다.
2는 정진여의족(精進如意足), 또는 정진정(精進定)이라고도 한다. 사람은 무엇엔가 의욕이 있으면 노력하게 된다. 열심히 수행하는데 마음을 집중하는 것이 정진정(精進定)이다. 고를 종식시키려는 노력이다.
3은 심여의족(心如意足), 또는 심정(心定)이라고도 한다. 심정(心定)은 마음이 삼매(三昧)에 드는 것을 의미한다. 색계사선(色界四禪)을 열심히 수행하여 제사선(第四禪)에 이른다. 고를 종식시키기 위한 선정삼매(禪定三昧)를 이루려는 마음이다.
4는 사유여의족(思惟如意足), 또는 사유정(思惟定)이라고도 한다. 마음을 집중하여 깊은 성찰을 행하는 것을 말한다. 즉, 제사선(第四禪)을 성취하여 마음이 명경지수(明鏡止水)와 같이 고요해진 상태에서 무색계(無色界)의 공처(空處), 식처(識處), 무소유처(無所有處),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 등을 사유하는 것을 말한다.
넷째, 오근(五根)이다. 번뇌를 누르고 깨달음의 길로 이끄는 다섯 가지 근원, 근본, 기능이다. 신근(信根)이다. 깨달음에 대한 믿음과 수행을 통해서 깨달음을 성취한다는 믿음이다. 정진근(精進根)이다. 깨달음을 성취하려면 정진을 게을리 하지 않아야 한다. 염근(念根)이다. 깨달음을 성취하려면 일체의 대상을 잘 관찰하고 살펴야 한다. 흔히 ‘마음 챙김’이라고도 표현한다. 실은 마음이 경계를 살피고 챙기는 수행이다. 정근(定根)이다. 선정이며 삼매다. 깨달음을 이루려면 삼매가 성취되어야 한다. 혜근(慧根)이다. 삼매가 성취되어 지혜가 드러나는 것을 말한다.
다섯째, 오력(五力)이다. 위의 오근(五根)이 깨달음에 나아가는 다섯 가지 근본이며 기능이라면, 오력(五力)은 그 다섯 가지 기능에 의해서 성취되어 깨달음에 나아가는 다섯 가지 능력이며 힘이다. 신력(信力)은 깨달음에 대한 믿음이 힘이 되어 그 신념에 흔들림이 없다. 정진력(精進力)은 믿음의 힘에 의하여 쉬지 않고 정진하게 되는 힘이다. 염력(念力)은 일체의 대상을 관찰하고 살피는 마음 챙김의 힘이다. 정력(定力)은 삼매가 형성되어 생긴 힘이다. 혜력(慧力)은 끝으로 지혜까지 힘으로 이루어 져서 그 지혜를 활용하는 힘이다.
여섯째, 칠각지(七覺支)다. 칠각분(七覺分), 또는 칠각의(七覺意)라고도 한다. 깨달음을 잘 도와가는 일곱 가지 부분이란 뜻이다. 1. 택법각지(澤法覺支), 지혜의 힘으로 모든 법의 선악과 정사(正邪)를 잘 가려내어 선과 정은 취하고 악과 사는 버리는 것을 말한다. 2. 정진각지(精進覺支), 쓸데없는 것을 버리고 수행의 바른 길을 따라 일심으로 정진하여 나아가는 것을 말한다. 3. 희각지(喜覺支), 일심으로 끊임없이 정진하므로 그 결과로 참된 도의 기쁨을 얻는 것을 말한다. 4. 제각지(除覺支), 참된 도의 기쁨을 얻는데 그치지 않고 모든 그릇된 소견이나 번뇌를 끊어버리고[除] 능히 참되고 거짓됨을 알아서 바른 선법을 계속 길러 나가는 것을 말한다. 5. 사각지(捨覺支), 마음이 모든 경계에 평등하여 즐겁고 기쁜 모든 감수 작용이 없고 지내는 일을 추억하는 일이 없는 것을 말한다. 6. 정각지(定覺支), 고요히 정에 들어 있어서 번뇌 망상을 일으키지 않는 것을 말한다. 7. 념각지(念覺支), 정과 혜가 평등하여 일심이 늘 명료한 경지를 말한다. 이상의 것 중에서 만일 마음이 혼침하면 택법각지, 정진각지, 희각지로써 마음을 일깨우고, 만일 마음이 들뜨면 제각지, 사각지, 정각지로 그 들뜬 마음을 가라앉힌다고 한다.
일곱째, 팔정도(八正道)다. 팔정도는 팔정도지(八正道支), 또는 팔정도분(八正道分)이라고도 한다. 불교를 실천 수행하는 중요한 덕목을 여덟 가지로 나눈 것인데 팔정도는 이 수행 방법이 중정(中正) 중도(中道)의 정도로서 완전한 수행 방법이므로 성인의 도로 나타내어 성도(聖道)라고 한다. 여기서 바르다[正]고 한 것은 이 8정도를 통해서 생로병사의 존재론적인 고(苦)로 부터 벗어나 이상적인 행복의 상태[涅槃]를 체득하는 방편이다. 고집멸도(苦集滅道) 사성제(四聖諦)의 도제(道諦)에 속한다.
1. 정견(正見), 정견은 [바로 봄]을 뜻하며 곧 올바른 견해, 즉 자기와 세계의 실상을 보는 것을 말한다. 이 세상은 인과 연의 관계에 의해 진행된다는 연기법(緣起法)의 이치를 분명히 아는 것이며, 이 사바세계는 고통스러운 곳[苦諦]이며, 이 고통의 원인[集諦]을 알아 생로병사의 고통으로 부터 벗어나는 수행[道諦]을 통해 절대 행복의 경지[滅諦]를 증득할 수 있다는 사성제(四聖諦)의 부처님의 가르침을 잘 배워서 실천하려는 확고한 인식체계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따라서 정견을 여실지견(如實知見)이라고도 하며 바로 보는 것이 바른 삶의 시작이다.
2.정사유(正思惟), 정사유는 올바른 생각을 뜻하며 자신의 입장을 바르게 생각하는 것을 말하고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고 이치에 맞게 생각하는 것이다. 올바른 생각은 3업 가운데 의업(意業)으로써 탐내고 성내고 어리석은 마음과 나만 편하고 잘살면 그만이라는 이기적인 생각을 버리고 어렵고 불행에 처한 사람들과 더불어 함께 동고동락하며 살아가려는 보살의 사유체계이다.
3. 정어(正語), 정어는 올바른 말을 뜻하며, 3업 가운데 구업(口業)으로써 허망한 말[妄語] 대신 진실한 말을, 입에 발린 말[綺語] 대신 정직한 말을, 이간질하는 말[兩舌] 대신 화합시키는 말을, 험악한 말[惡口] 대신 부드러운 말을 하는 것을 말한다. 올바른 생각에 의해 하는 말이며 항상 바른 생각과 바른 말을 하여 구업을 짓지 말고 상대방을 존중하는 부드러운 말을 해야 한다. 이는 진실되고 올바른 언어생활을 말한다. 즉 거짓말, 꾸며대는 말, 서로 이간시키는 말, 남을 성나게 하는 말 등을 하지 않는 것으로 바른 견해의 적극적 실천이다.
4.정업(正業), 올바른 행동[正業]은 3업 가운데 신업(身業)을 말한다. 살생(殺生)하지 않고 방생(放生)하며, 도적질하지 않고 보시(布施)하며, 삿된 음행하지 않고 청정하게 생활하는 것을 말한다. 이것도 역시 바른 견해의 적극적 실천인 것이다.
5.정명(正命), 올바른 생활 수단을 말하는 것으로 바른 견해에 입각한 전체적인 생활에 있어 바른 몸가짐과 마음가짐을 실천하는 것이다. 이는 곧 정당한 방법으로 의식주를 구하는 것으로 남과 나를 다 같이 이롭게 하는 바른 직업을 갖는 것도 그 뜻의 하나다.
6. 정정진(正精進), 올바른 노력, 한 마음으로 노력해 나가는 것을 뜻한다. 이는 곧 노력으로 인하여 아직 발생하지 아니한 악을 나지 못하게 하며, 나지 아니한 선을 발생하게 하는 일이며, 옳은 일에는 물러섬이 없고 밀고 나가는 정열과 용기를 뜻하기도 한다. 이는 바로 불자의 구도 자세라 할 수 있다.
7. 정념(正念), 올바른 정신과 생각과 기억이다. 삿된 생각을 버리고 항상 자신의 향상을 위하여 정신을 집중시키는 것을 말한다. 또한 바르게 기억하는 것으로 생각할 바에 따라 잊지 않는 것이다. 참된 진리를 항상 명심하고 기억하여 다른 잡념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이것은 정사유와 함께 내면적인 마음의 기초를 확고하게 다지는 것이다. 그렇게 하여 그 마음속에 정견(正見)이 가득차고 항상하도록 하는 것이다.
8. 정정(正定), 바르게 집중(集中)한다는 말로서, 마음을 한 곳에 모으는 것인데 삼매(三昧)라는 음역어를 통해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수행법이기도 하다. 이는 정념이 더욱 깊어진 상태로서, 정념의 성취로 몸과 마음의 조화가 이루어지고 지극히 잘 조화되고 통일된 마음에 온갖 번뇌와 어지러운 대상이 모두 쉬게 되면서 마치 가을 하늘에 지혜의 달이 뚜렷이 빛나는 경지와 같은 것이다.
이와 같은 37조도품이 곧 보살의 청정국토다. 37조도품을 잘 닦아서 생활화가 되고 인격화가 된다면 어디에 있은들 청정국토가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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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마경 강설 67 /1, 불국품 65 /10, 보살의 정토행(淨土行) <7> 회향심(廻向心)
廻向心이 是菩薩淨土니 菩薩이 成佛時에 得一切具足功德國土하니라
“회향심이 보살의 청정국토니 보살이 성불할 때에 일체의 공덕이 갖추어진 국토를 얻느니라.”
강설 ; 회향(廻向)이란 회소향대(?小向大)며, 회악향선(?惡向善)이며, 회범향성(?凡向聖)이며, 회생향불(?生向佛)이 등등이다. 지금까지는 작은 일이었으나 지금부터는 큰 일로 향해 나아가는 마음이다. 지금까지는 악한 짓을 했으나 지금부터는 선한 일을 하는 마음이다. 범부에서 성인으로, 중생에서 부처로, 개인에서 민중으로, 좁은 마음에서 넓은 마음으로, 소승적 수행에서 대승적 수행으로, 자기만을 위해 살다가 남을 위해 사는 삶으로 크고 넓게 발전하고 크게 향상해 가는 일이 회향이다. 그렇다면 지금은 아무리 보잘 것 없는 공덕이라 하더라도 앞으로는 모든 공덕을 다 갖추어 일체중생을 다 가르치고, 다 먹이고 다 입히고 다 거두는 큰 삶으로 회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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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마경 강설 68 /1, 불국품 66 /10, 보살의 정토행(淨土行) <8> 삼악팔난(三惡八難)
說除八難이 是菩薩淨土니 菩薩이 成佛時에 國土에 無有三惡八難하며
“여덟 가지 어려움을 제거함을 설하는 것이 보살의 청정국토니 보살이 성불할 때에 그 국토에는 3악과 8난이 없느니라.”
강설 ; 팔난(八難)이란 불교의 정법을 배우는데 장애가 되는 여덟 가지 조건을 말한다. 곧 지옥(地獄), 축생(畜生), 아귀(餓鬼), 장수천(長壽天), 맹롱음아(盲聾??), 울단월(鬱單月), 세지변총(世智辨聰), 생재불전불후(生在佛前佛後)다. 즉 지옥과 같은 삶을 살거나, 축생과 같은 삶을 살거나, 아귀와 같은 삶을 살거나, 너무 오래 사는 곳에 태어나거나, 시각장애인이나, 청각장애인이나, 벙어리로 태어나거나, 대단한 재산가의 집에 태어나거나, 세속적인 잔 머리를 잘 굴리는 사람으로 태어나거나, 불교가 없는 곳이나, 없을 때에 태어나는 것 등은 불법을 가까이 하여 공부하는데 큰 장애가 되므로 이러한 것은 없는 삶이 보살의 청정국토라고 한 것이다.
삼악(三惡)이란 지옥, 아귀, 축생이다. 8난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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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마경 강설 69 /1, 불국품 67 /10, 보살의 정토행(淨土行) /<9> 금계(禁戒)
自守戒行하고 不譏彼闕이 是菩薩淨土니 菩薩이 成佛時에 國土에 無有犯禁之名하며
스스로 계행을 지키고 다른 사람의 파계함을 나무라지 않는 것이 보살의 청정국토니, 보살이 성불할 때에 그 국토에는 금계를 범했다는 이름이 없느니라.
강설 ; 계행(戒行)이란 계율(戒律)을 실천에 옮겨 수행한다는 뜻이다. 일반적으로는 인간완성을 위한 수행생활의 규칙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도덕적인 덕을 실현하기 위한 수행상의 규범을 말한다. 계율이라고 할 때는 계(戒)와 율(律)과의 합병어(合倂語)이다. 계라는 것은 규율을 지키려고 하는 자발적인 마음의 움직임을 뜻하고, 율이라는 것은 타율적인 규범을 의미한다. 계는 방비지악(防非止惡)의 의미가 있다면 율은 승단(僧團)의 규율이라고도 해석된다. 불교교단이 확립됨에 따라 교단의 질서 유지에는 규범이 필요하게 되었고, 이 때문에 만들어진 다양한 규율조항이나, 위반했을 때의 벌칙을 규정한 것이 율이다.
계에는 재가중(在家衆)이 가지는 삼귀계(三歸戒), 오계(五戒), 팔관재계(八關齊戒)가 있고, 출가중(出家衆)이 갖는 사미 사미니계(沙彌沙彌尼戒), 식차마니계(式叉摩尼戒), 비구 비구니계(比丘比丘尼戒)가 있으며 재가와 출가가 공동으로 지니는 보살계(菩薩戒)가 있다. 이와 같은 수많은 조항 들을 지켜야 하는 불교도들에게는 잘 지키는 사람들도 있고 못 지키는 사람들도 있다. 간혹 잘 지키는 사람들 중에서 못 지키는 사람들을 비판하고 흉을 보는 예가 있는데 유마경에서 지적한 내용이 “스스로 계행을 지키고 다른 사람의 파계함을 나무라지 않는 것이 보살의 청정국토다.”라고 한 것은 참으로 중요한 가르침이다. 자신이 계행을 잘 지켜서 다른 사람의 잘못을 비난한다면 그것은 계행을 잘 지켜서 얻어지는 공덕보다 손해를 보는 것이 더 크기 때문이다. 남의 잘못을 비난할 바에는 차라리 자신이 지키지 않고 비난도 안 하는 것이 더 낫다. 이와 같은 이치를 모르기 때문에 한편 복을 짓고 공덕을 닦아도 스스로 감소시켜 버리는 예가 대단히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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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마경 강설 70 /1, 불국품 68 /10, 보살의 정토행(淨土行) /<10> 십선(十善)
十善이 是菩薩淨土니 菩薩이 成佛時에 命不中夭하고 大富梵行하며 所言이 誠諦하고 常以軟語하며 眷屬이 不離하고 善和諍訟하며 言必饒益하고 不嫉不?하는 正見衆生이 來生其國하나니라
“10선이 보살의 청정국토니 보살이 성불할 때에 목숨이 중간에 요절하지 않고, 크게 부유하며, 청정한 행을 갖추고, 말이 진실하며, 항상 부드럽게 말하고, 권속들은 이별하지 않고, 다툴 일은 잘 화합하며, 말을 하게 되면 반드시 이익하게 하며, 시기하거나 성내지 않는 바른 견해를 가진 중생이 그 국토에 와서 태어나느니라.”
강설 ; 열 가지 선행을 잘 실천하면 그것에 따르는 결과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사람이 일생을 사는데 늘 건강하고 중간에 요절하지 않으려면 살아 있는 생명들을 잘 보호하고 죽게 된 생명을 만나면 방생을 해서 살려야 한다. 병들지 않고 건강하려면 건강하지 못한 사람들의 병고를 보살피고 약을 마련해 드리며 간호를 잘 해야 한다. 부자가 되려면 남의 재산을 탐내지 말고 보시를 많이 해야 한다. 청정한 삶을 유지하려면 이성간에 예의와 도덕을 잘 지키는 것이다. 거짓말을 하지 말고 진실하고 정직한 말만 해야 한다. 악담을 하지 말고 부드럽고 사랑스런 말을 해야 한다. 서로 상반된 말을 하여 서로를 이간질 시키지 않으면 친지와 권속들이 헤어지는 일이 없다. 옳고 그른 문제로 다투고 소송하지 아니하면 언제나 친선과 화합하는 관계를 유지하게 되어 상대를 유익하게 한다. 지혜롭고 바른 견해를 가지는 사람은 어리석음 때문에 시기하고 질투하는 일이 없다. 참으로 사람다운 사람이 사는 세상은 늘 이와 같아야 할 것이다. 그것이 보살의 정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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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마경 강설 71 /1, 불국품 69 /10, 보살의 정토행(淨土行) /<11> 방편으로 중생을 성취함
如是하야 寶積아 菩薩이 隨其直心하야 則能發行하고 隨其發行하야 則得深心하고 隨其深心하야 則意調伏하고 隨其調伏하야 則如說行하며 隨如說行하야 則能廻向하고 隨其廻向하야 則有方便하며 隨其方便하야 則成就衆生하고
“이와 같으니라. 보적이여, 보살이 곧은 마음을 따라서 곧 능히 행동에 옮기고, 행동에 옮김을 따라 곧 깊은 마음을 얻고, 그 깊은 마음을 따라 곧 생각이 조복되고, 그 조복됨을 따라 곧 말한 대로 행동하며, 말한 대로 행동함을 따라 곧 능히 회향하고, 그 회향을 따라서 곧 방편이 있게 되고, 그 방편을 따라 곧 중생을 성취하나니라.”
강설 ; 앞에서 보살의 정토를 설명하는 첫 설법에서 “곧은 마음[直心]이 보살의 정토”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곧은 마음이란 보살정토의 기본이다. 그렇다면 곧은 마음이란 무엇일까? 온 정성을 다하여 불법을 믿는 마음이다. 명예나 이익을 위해서 믿는 것이 아니고 오직 불법 그 자체만을 위하는 순일무잡(純一無雜)한 신심이다. 이러한 신심이 있으면 선행은 저절로 따라온다. 선행이 따르면 악은 저절로 물러가고 만 가지 선을 갖추어 불법에 회향하게 되는 것이 곧은 마음이다.
이러한 곧은 마음을 따라서 불법을 행동에 옮기게 되고 행동에 옮기게 되면 그 마음이 깊어진다. 불교뿐만 아니라 어떤 일이든지 직접 실행해 보지 않으면 그 마음이 깊어지지 않는다. 만약 깊어지는 마음이 있으면 해야 할 일과 하지 않아야 할 일을 능히 가려서 실행하게 된다. 이것이 조복이다. 또한 말한 대로 행동하는 것이다. 불교에서 말과 같이 행동한다는 것은 곧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다른 사람에게 회향한다는 뜻이다. 회향하는 방편이 없으면 결코 중생을 교화하여 부처로 만들 수 없다. 불교의 궁극적 목적은 중생을 교화하여 부처로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보살의 정토, 곧 이 현실에서 이상적인 세상을 구현하려면 모든 중생을 교화하여 부처로 만드는데 있어서 그 근본은 곧은 마음에서부터 시작한다는 것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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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마경 강설 72 /1, 불국품 70 /10, 보살의 정토행(淨土行) /<12> 마음 청정 공덕 청정
隨成就衆生하야 則佛土淨하고 隨佛土淨하야 則說法淨하고 隨說法淨하야 則智慧淨하며 隨智慧淨하야 則其心淨하고 隨其心淨하야 則一切功德淨하나니라
“중생을 성취함을 따라서 곧 불국토가 청정하며, 불국토가 청정함을 따라서 곧 설법이 청정하고, 설법이 청정함을 따라서 곧 지혜가 청정하고, 지혜가 청정함을 따라서 곧 그 마음이 청정하고, 그 마음이 청정함을 따라서 곧 일체공덕이 청정하느니라.”
강설 ; 중생을 성취한다는 것은 중생을 완성시킨다는 뜻이니, 곧 중생을 부처로 만든다는 의미다. 중생이 부처가 되면 불국토가 청정해 진다. 이 말에서 진정한 불국토로 가는 길을 밝혔다. 중생이 깨달음을 이루어 부처가 되면 곧 부처의 안목을 갖게 되므로 부처의 안목에서 보면 어떤 장소 어떤 지역도 모두가 불국토가 아닌 곳이 없다. 화엄경에는 “부처님이 비로소 정각을 이루시니 그 땅이 견고하여 다이아몬드로 이루어 졌더라.”라고 하였다. 그리고 보리수도 사자좌도 모두가 이루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의 보석들로 아름답게 꾸며져 있다는 내용이 설명되어 있다. 지금도 부처님이 성도하신 부다가야를 찾는 불자들의 발길이 끊어지지 않는다. 그렇지만 그들이 중생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다이아몬드는 고사하고 구리 조각 하나 볼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깨달음의 눈으로 보면 이 세상 어디고 다이아몬드로 장엄되어 있지 않은 데가 없다는 사실이다.
“불국토가 청정하면 설법이 청정하고 설법이 청정하면 지혜가 청정하고 지혜가 청정하면 그 마음이 청정하고 그 마음이 청정하면 일체의 공덕이 모두 청정하나니라.” 불교는 처음부터 이 한 마음의 이치를 깨달아서 이 한 마음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하고 이 한 마음으로 행복과 해탈을 누리는 것이다. 마음은 처음이며 중간이며 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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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마경 강설 73 /1, 불국품 71 /10, 보살의 정토행(淨土行) /<13> 마음 청정 불토 청정
是故로 寶積아 若菩薩이 欲得淨土인댄 當淨其心이니 隨其心淨하야 則佛土淨이니라
그러므로 보적이여, 만약 보살이 청정한 국토를 얻고자 한다면 마땅히 그 마음을 청정하게 하여야 하나니, 그 마음이 청정함을 따라서 곧 불국토가 청정하여 지느니라.”
강설 ; “마음이 청정하면 불토가 청정하다[ 心淨則 佛土淨].”라는 말씀은 역시 유마경에서 빼놓을 수 없는 명구다. 그래서 “만약 청정한 국토를 얻고자 한다면 그 마음을 청정하게 해야 한다.”라고 한 것이다. 마음이 캄캄하고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으로 꽉 차 있다면 황금으로 된 궁전에 산들 무엇이 즐겁겠는가. 그대로가 지옥이다. 반대로 비록 척박한 땅에서 나물을 캐서 끼니를 때우더라도 마음이 청정하여 한없이 평화롭고 해탈감에 젖어 산다면 그대로가 극락이며, 불국토며, 화장장엄찰해이리라. 슬기롭게 살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이와 같은 이치를 철저히 깨닫고 살아야 할 것이다. 왜 환경을 탓하고 남을 탓하는가. 사람의 불행은 결코 환경 때문도 아니요 다른 사람 때문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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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마경 강설 74 /1, 불국품 72 /11, 사리불의 의문
爾時에 舍利弗이 承佛威神하사 作是念하되 若菩薩이 心淨則佛土淨者인댄 我世尊은 本爲菩薩時에 意豈不淨이리요마는 而是佛土不淨이 若此인가하니라
그때에 사리불이 부처님의 위신력을 받들어 이러한 생각을 하였다. ‘만약 보살이 마음이 청정하여 곧 불국토가 청정하여진다면 우리 세존은 본래 보살로 있을 때에 생각이 어찌 부정하였겠는가마는 이 불국토가 부정한 것이 이와 같은가?’
강설 ; 사리불 존자는 부처님의 10대제자 중에서 지혜가 가장 우수한 제자라고 알려져 있다. 대개의 대승불교경전들은 사리불 존자가 처음에 등장한다. 그것은 불교의 가장 중요한 점은 지혜라는 사실을 상징적으로 나타낸 것이며 따라서 지혜의 안목을 가지고 지금 이 문제를 보는가 하는 점이 내면에 깔려있기도 하다.
사리불 존자의 의문은 존재의 원리와 그 이치를 모르는 모든 사람들이 다 가지고 있는 의문이다. 깨달음의 지혜가 없는 자신의 안목으로 보기에는 이 세상은 처음부터 부정한 것이었으며 지금도 여전히 부정한 것으로 넘쳐나는 세상이다. 그런데 부처님이 과거에 수행하실 때에 분명히 청정한 마음으로 수행하였을 것인데 이찌하여 이처럼 부정한 것으로 넘쳐나는가?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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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마경 강설 75 /1, 불국품 73 /12, 부처님의 답변
佛知其念하사 卽告之言하사대 於意云何오 日月이 豈不淨耶하야 而盲者不見가 對曰不也니다 世尊하 是盲者過언정 非日月咎니다 舍利弗아 衆生罪過로 不見如來國土嚴淨이언정 非如來咎니 舍利弗아 我此土淨이어늘 而汝不見이니라
부처님이 그 생각을 아시고 곧 말씀하였다. “어떻게 생각하는가? 해와 달이 어찌 캄캄해서 맹인이 보지 못하는가?” 사리불이 대답하였다.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맹인의 허물이지 해와 달의 허물은 아닙니다.” “사리불이여, 중생들의 허물로 여래의 국토가 청정하게 장엄한 것을 보지 못할지언정 여래의 허물은 아니니라. 사리불이여, 나의 이 국토는 청정하지만 그대가 보지 못 할 뿐이니라.
강설 ; 경전의 비유 중에서 매우 유명한 비유가 나왔다. 태양이 저렇게 밝게 빛나지만 맹인은 그것을 보지 못하듯이 이 세상은 이렇게 하나하나가 아름답고 경이롭고 환희로운 화장장엄세계이건만 다만 무지한 중생들이 그것을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므로 온갖 것을 다 부정적으로 보며 불평불만을 늘어놓는 것이다. 그러므로 낙천적인 사고와 긍정적인 생각을 하는 사람이 현명하고 지혜로운 사람이다. 부처님의 안목으로 볼 때 이 국토는 지금 이대로 이처럼 아름답게 장엄되어 있다는 것을 밝히신 답변이다.
이 땅 이 국토를 버리고 달리 어디에 살기 좋은 곳이 있겠는가. 여기서 지금 이 순간의 삶을 떠나서 언제 또 무슨 삶이 있어서 행복하고 평화로운 시절이 있겠는가. 우리들의 마음은 언제나 그와 같은 꿈을 다른 곳에 두며 저 멀리 미래에 두며 살았다. 마치 무지개를 쫒아가는 어린 아이들처럼. 아름다운 무지개를 잡으려고 쫒아가지만 한 번도 손에 잡힌 적은 없었다. 불국토라는 것도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무지개도 지금 보고 있는 그 자리에서 보는 것이 가장 아름답다. 인생의 가장 중요한 순간도, 인생의 절정도, 성공적인 인생의 순간도 바로 지금이다. 지금이 어떤 처지이든. 꿈처럼 지나가 버린 어떤 순간이나 아직 오지 않은 미지의 시간은 지금은 없기 때문이다. 꿈속에서의 왕후장상과 거부 장자보다는 현실에서의 다리 밑의 거지가 백번 낫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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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마경 강설 76 /1, 불국품 74 /13, 나계범왕의 충고
爾時에 螺?梵王이 語舍利弗하사대 勿作是念하야 謂此佛土을 以爲不淨이라하라 所以者何오 我見釋迦牟尼佛土淸淨을 譬如自在天宮이니라 舍利弗이 言하되 我見此土하니 丘陵坑坎과 荊棘沙礫과 土石諸山과 穢惡充滿이로다 螺?梵王이 言仁者의 心有高下하야 不依佛慧故로 見此土爲不淨耳니라 舍利弗아 菩薩이 於一切衆生에 悉皆平等하며 深心淸淨하고 依佛智慧하야 則能見此佛土淸淨하니라
그때에 나계범왕이 사리불에게 말하였다.
“이러한 생각을 하여 이 불국토가 부정하다고 여기지 말라. 왜냐하면 내가 석가모니의 불국토가 청정함을 보기를 비유하자면 자재천궁과 같이 보느니라.”
사리불이 말하였다.
“내가 이 국토를 보니 언덕과 구릉과 가시덤불과 모래와 자갈과 흙과 돌과 여러 산과 더러운 것이 가득합니다.”
나계범왕이 말하였다.
“그대는 마음에 높고 낮음이 있어서 부처님의 지혜를 의지하지 아니하기 때문에 이 국토를 부정하게 볼 뿐입니다. 사리불이여, 보살은 일체중생에게 모두 다 평등하며 깊은 마음이 청정하고 부처님의 지혜를 의지하여 능히 이 불국토를 청정하게 보느니라.”
강설 ; 나계범왕은 범천의 왕인데 머리카락을 소라 모양으로 틀어 올렸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사리불에게 충고한 내용은 “마음에 높고 낮음이 있다. 즉 평등한 이치를 모르는 까닭이다. 그리고 부처님의 지혜를 의지하지 못했기 때문에 차별한 만물과 각각의 사람을 평등하게 보지 못한 것이다.”라고 한 것이다. 실로 모든 존재는 다 평등하다. 쌀과 겨도 평등하고, 일등과 꼴지도 평등하다. 건강과 병고도 평등하다. 이 모두는 크게 상반되는 모습들이지만 또한 분명히 평등한 면이 있음을 깨달아야 하는 것이다. 부처님의 지혜에 의지하여 이 사바국토가 그대로 청정한 불국정토임을 보아야 하리라. 유마경의 종지가 모든 존재는 차별적 둘이 아니라는[不二] 이치를 깨우치고자 하는 가르침이기에 여기서 나계범왕이 불국정토를 말하면서 불이법(不二法)을 보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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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마경 강설 77 /1, 불국품 75 /14, 부처님의 신통
於是에 佛이 以足指로 按地하시니 卽時三千大千世界에 若干百千珍寶嚴飾이 譬如寶莊嚴佛의 無量功德寶莊嚴土라 一切大衆이 歎未曾有하며 而皆自見坐寶蓮華러라
이에 부처님이 발가락으로 땅을 누르시니 곧바로 삼천대천세계에 백 천 가지 보물로 장엄이 되었다. 비유하면 보장엄 부처님의 한량없는 공덕으로 보석이 장엄된 국토와 같았다. 일체 대중들이 일찍이 없었던 일이라고 찬탄하며 모두들 저절로 보석 연꽃에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강설 ; 사리불 존자와 내지 다른 많은 중생들은 지금 이 순간 바로 이 땅에서 청정한 불국정토임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하는 수 없이 부처님은 신통을 발휘하여 이 세상이 모두 백 천 가지 금은보화와 진기한 보석으로 장엄하게 꾸미었다. 그 아름답고 휘황찬란함은 그 어떤 세계보다도 더 화려하였다. 대중들은 처음 보는 일이라고 찬탄하였다. 우리는 자신의 지혜가 없으면 부처님의 지혜를 빌려서 문제를 해결하는 습관을 가져야 한다. 보통의 사람들에겐 그 생각과 지혜가 한계가 있다. 그러므로 어떤 일을 당하여 어려움이 있을 때는 반드시 성인들의 지혜를 찾아 활용하여야 할 것이다. 일이 일어나기 전에 평소에 성인의 가르침을 열심히 배우고 사유하여 생활화하는 사람은 참으로 현명한 사람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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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마경 강설 78 /1, 불국품 76 /15, 부정한 국토는 교화의 방편
佛告舍利弗하사대 汝且觀是佛土嚴淨하라 舍利弗이 言하사대 唯然世尊이시여 本所不見이며 本所不聞이러니 今佛國土에 嚴淨悉現이니다 佛告舍利弗하사대 我佛國土에 常淨이 若此언마는 爲欲度斯下劣人故로 示是衆惡不淨土耳니 譬如諸天이 共寶器食하되 隨其福德하여 飯色이 有異니라 如是하야 舍利弗아 若人心淨하면 便見此土功德莊嚴하리라
부처님이 사리불에게 말씀하였다. “그대는 불국토가 아름답게 장엄된 것을 보는가?” 사리불이 말하였다. “예, 세존이시여, 본래는 보지 못하던 것이며 본래는 듣지 못하던 것인데 지금의 불국토는 아름다운 모습이 다 나타났습니다.” 부처님이 사리불에게 말씀하였다. “나의 불국토는 항상 청정한 것이 이와 같지만 이곳의 하열한 사람들을 제도하기 위해서 온갖 나쁘고 더러운 국토를 보였을 뿐이다. 비유하자면 여러 천신들은 다 같이 보배로 된 그릇으로 식사를 하지만 그들의 복덕을 따라서 밥의 색깔이 다른 것과 같으니라. 이와 같이 사리불이여, 만약 사람의 마음이 청정하면 곧 이 국토도 공덕으로 장엄된 것을 보게 되리라.”
강설 ; 부처님은 부득이해서 신통으로 청정한 국토를 보여주었으나 실은 이 사바세계가 공부하고 수행하기 가장 좋은 환경이다. 경전에 “나의 불국토는 항상 청정한 것이 이와 같지만 이곳의 하열한 사람들을 제도하기 위해서 온갖 나쁘고 더러운 국토를 보였을 뿐이다.”라고 하였다. 사람이 사는 주변에 온갖 시시비비가 들끓고 비리와 부정과 음모가 난무하고 전쟁과 지진이 넘쳐나는 것은 모두가 중생을 성숙시키고 지혜를 얻게 하기 위한 것으로 받아드려야 한다. 심지어 생로병사가 우리의 삶과 함께하고 있는 것도 실은 공부며, 신지식이며, 깨달음이며, 가르침으로 받아드려야 한다. 인간의 온갖 부정적 요소들과 세상에서 일어나는 그 험악한 일들이 아니라면 부처님과 부처님의 가르침이 필요할 까닭이 없지 않은가. 훌륭한 성인들과 뛰어난 선지식과 무수한 가르침이 존재하는 것은 모두가 이 세상이 험악하고 나쁜 사람들이 많은 덕택이다. 그러므로 어쩌면 그 많은 부정적인 요소들에 감사해야 하리라.
그러나 이 세상과 사람들은 꼭 나쁘기만 한 것은 아니다. 경전에서 비유하였듯이 같은 그릇에 밥을 담아도 밥을 받는 사람의 복덕에 따라서 밥의 색깔이 다르듯이 각자의 세상을 보는 인식과 안목에 따라 세상은 전혀 다르게 보이는 것이기도 하다. 나 자신은 보배그릇이고 이 세상은 나의 밥이다. 나 자신의 지혜와 복덕에 따라 세상은 전혀 다른 것이다. 깨끗하고 더러운 것은 사람에게 있는 것이지 국토나 환경에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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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마경 강설 79 /1, 불국품 77 /16, 국토에 대한 공덕 /<1> 국토장엄의 공덕
當佛現此國土嚴淨之時하야 寶積所將五百長者子가 皆得無生法忍하고 八萬四千人은 皆發阿?多羅三?三菩提心하니라
부처님이 이 국토를 청정하게 장엄함을 나타냈을 때 보적이 거느리고 온 5백 명의 장자의 아들들이 모두 다 생사가 없는 진리를 얻었고, 8만 4천 사람들은 모두 다 최상의 깨달음에 대한 마음을 내었다.
강설 ; 부처님께서 신통으로 국토를 청정하게 장엄을 했을 때는 5백 명의 장자의 아들들은 생사가 없는 진리[無生法忍]를 얻었으며, 8만 4천명의 사람들은 보리심을 발하였다. 보적과 5백 명의 장자의 아들들은 유마경의 서두를 장식한 중요한 사람들이다. 칠보로 된 일산을 부처님께 공양하고 부처님은 그 일산을 하나로 만들어서 모든 존재가 둘이 아니며 절대적으로 평등하다는 불이(不二)의 종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 일이 있었다. 그때 이미 보리심을 발하였기 때문에 여기서는 국토가 아름답게 장엄함을 보고는 곧 무생법인을 증득하였다. 8만 4천 사람들은 뒤이어 보리심을 발한 것으로 되어 있다. 국토의 아름다움에 환희심을 내었고 그 환희심은 곧 깨달음과 보리심으로 이어진 것이다. 다음에 장엄은 사라지고 사바세계가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왔을 때 그것을 보고 이익을 얻은 것과 비교해 볼만한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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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마경 강설 80 /1, 불국품 78 /16, 국토에 대한 공덕 /<2> 장엄이 사라진 공덕
佛攝神足하시니 於是世界는 還復如故하니라 求聲聞乘하는 三萬二千과 諸天及人은 知有爲法이 皆悉無常하고 遠塵離垢하야 得法眼淨하며 八千比丘는 不受諸法하고 漏盡意解하니라
부처님께서 신통을 보여줬던 발을 거두어 드리니 이 세계는 다시 예전처럼 회복되었다. 성문승을 구하는 3만 2천 명과 여러 천신들과 사람들은 조작이 있는 법은 모두 다 무상하다는 것을 알고 번뇌와 때를 멀리 여의고 법안이 청정함을 얻었으며, 8천명의 비구들은 모든 법을 받아드리지 않고 스며드는 번뇌가 다하여 생각이 풀려버렸다.
강설 ; 부처님이 신통으로 보여줬던 발을 거둬들이니 이 사바세계는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본래의 모습이란 사리불이 지적한 대로 온갖 존재의 불평등한 경계들이다. 이때 소승 성문들 3만 2천명과 천신과 사람들이 조작이 있는 법[有爲法]은 모두가 무상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조작이 있는 법이란 심지어 부처님이 보여주신 신통까지도 허망하다는 사실에 무상감을 깊이 느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번뇌를 만드는 명예와 재산과 건강과 부귀공명에 대한 갈등을 멀리 떠나게 된 것이다. 그래서 모든 존재를 보는 눈이 청정[法眼淨]하여 진 것이다. 8천명의 비구들도 일체의 존재를 받아들이지 않게 되어 번뇌가 사라지고 의욕이 사라지게 된 이익을 얻었다.
국토가 아름답게 장엄한 것을 보고 얻은 이익과 아름다운 국토가 사라져 저린 것을 보고 얻은 이익은 이렇게 다르다. 달리 표현하면 소승적 견해와 대승적 견해의 차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으로서 불국품에 대한 강설은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