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9년 5월 19일-공격9일차]
아침 6시 30분, 제트기가 나타나서 7회에 걸쳐서 폭탄과 네이팜 탄 로켓을 쏘았다.
어떤 이유로 월맹군은 자주색 연막탄을 터트렸다. 그러자 무전을 받은 전폭기가
연막이 올라온 부분에 정확히 폭격을 했다.
(아마도 월맹군은 폭격이 너무 고통스러운 나머지, 미군이 있는 것으로 오인되기를
바란 것인지도 모른다)
아침 동안, 506연대에서 온 중대는 낮은 쪽의 랜딩존으로 이동했다.
그는 506연대 중대장에게 지도를 보이면서 공격을 설명했다.
다른 병력들은 어제의 최후 공격장소로 이동했다. 남베트남군 1개 중대가 '후에'에서
헬기를 타고 랜딩해서 북서쪽으로 공격하여 900고지의 500미터 전방까지 진출했다.
또한 501연대 2대대 병력들이 헬기로 랜딩해서 압 비아 정상의 북동쪽에 800미터
지점에 위치했다.
그들은 937고지 4백미터까지 진출했다.
506연대의 1대대는 남쪽에서 공격하기로 했다.
허니컷의 공격계획은 506연대의 2대대 A중대를 북쪽이 방향에서 동시에 공격을
시키는 것이었다. C중대는 남쪽에서 공격을 준비했다.
그리고 허니컷은 월맹군으로부터 전문을 받았다. 내용은 이러했다.
"Black Jack, 우리는 내일 너희들 모두를 죽일 것이다.
내일 아침 너희들이 고지를 오르면 말이다. Black Jack, 우리는 너희를 기다릴 것이다.
너희들 모두는 결국 죽을 것이다. 듣고 있나? Black Jack? 모두 죽어!"
"네놈이 죽은 상태로 나에게 발견 될 것이다. 이 개자식아!" 허니컷이 소리쳤다.
그러나 이날 고지를 점령하지는 못했다.
부대가 증원되면서 부대들이(중대급) 협공을 하기 위해서 적절한 부대 공격로와 이동과
접촉에 관한 구성이 필요했던 것이다. 잘못하면 미군끼리 총질을 할수 있는 지형이었다.
[1969년 5월 20일-마지막 공격10일차]
동이 트기 두시간 전에, 제트기 소리가 나더니 스카이 레이더기가 보였다.
마지막 공격에는 2시간의 공중폭격과 90분간의 포병 포격이 있었다.
스카이 레이더기는 실을 수 있는 모든 종류의 폭탄을 싣고 와서는
압 비아 정상의 4개 고지를 맹폭했다. 공군도 열흘째 폭격을 하고 있었다.
제트기가 사라지자 다시 포병이 월맹군의 지점에 105밀리 155밀리 8인치를 날렸다.
10시가 되자, 4개의 보병대대가 발가벗은 고지를 향해서 공격을 시작했다.
187연대 3대대 병력들은 A중대가 오른쪽, C중대가 중앙이었다.
그리고 506연대 1개 중대가 왼쪽에 섰다. 병력들은 조심조심 전진했다.
월맹군은 조용했다. 결국 10분 뒤에 3개 중대가 첫 번째 벙커라인에 도달하자
(엄청나게 황폐해 버렸다) 미군의 파괴가 시작됐다. 병력들은 수류탄과 폭약통으로
벙커를 파괴했다. 20분이 지나자 병력들은 고지의 백미터까지 접근했다.
두 번째 벙커라인에 접근했다.
이후 10분간 더 조용했다. 미군들은 아주 천천히 조심스럽게 전진했다.
그리고 10시 40분, 정상 75미터 지점에 도달하자, 10에서 15명의 월맹군이
기관총과 RPG를 비 오듯이 퍼부어 댔다. 그들은 주로 중앙의 C중대를 공격했다.
서너 명이 부상을 당했다. 서로 수류탄을 던지면서 전투가 달아올랐다.
타이론 캠벨 상병과 부사수는 그들을 향해서 90밀리 무반동총을 날렸다.
그 두 번째 탄이 벙커에 적중했다. 그리고 다시 다른 벙커가 적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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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중대의 측면에서는 2소대 에드워드 머질 상병이 단독 특공조로 나섰다.
그는 두 개의 벙커를 유탄발사기로 날려버렸다. 소속분대가 엄호사격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세 번째 벙커로 향했다.
엄호 사격에 벙커 속에서 월맹군이 쓰러지는 것이 보였다.
머질 상병은 침착하게 벙커에 도달해서는 그 10미터 전방에서 벙커의 총구 틈을 향해서
유탄을 발사했다. 2명의 월맹군 병사가 안에서 엉망이 된 채 죽어 있었다.
당시 머질은 아주 빠르게 유탄을 장전했고 이후 분대원들이 그를 따라서 정상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들은 정상에 섰다. 그러나 그때 그들 본인들은 그것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그저 전진하는 것이 버릇처럼 반복되었기 때문이다.
정상에 올라오자 허탈해서 주저앉는 병사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동 압 비아 정상에 선 첫 번째 미국인이었다.
그리고 이 햄버거 힐을 최초로 밟은 미군 병사는 최초 공격부대인 187연대 3대대였다.
11시 45분, B중대는 10일하고도 5시간만에 산을 정복했다.
그러나, 미군들은 이상한 것을 느꼈다.
머질과 분대원 몇 명은 아직도 적이 있음을 알았다.
바로 정상에 숨겨진 여러개의 참호가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앞으로 전진해서 사격을 퍼부었고 6명 정도의 월맹군을 사살했다.
그 뒤로, 2소대의 도날드 설리반 중위가 소대를 이끌고 올라오고 있었다.
그의 왼쪽에는 라이오넬 마타 상병이 있었다. 다른 대원들도 따라 올라왔다.
마타는 자신의 기관총으로 벙커들에 사격을 퍼부었다.
그리고 15분 동안, 소대원들은 열 개의 벙커에 연막탄과 소이탄을 집어넣었다.
그리고 C중대의 서너 명도 고지의 정상에 섰다.
소수의 월맹군 나머지는 고지를 버리고 900고지와 910고지 사이를 통과해서
라오스 쪽으로 사라졌다. 상공에선 허니컷이 도주하는 그들에게 81박격포를 유도했다.
그리고 사라진 쪽으로 진출하던 506연대 1대대 B중대는
도망치는 월맹군이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그들이 도주하다가 미군의 탄막에 막히자 그들은 갑자기 공격적으로 돌변했다.
결국 두 명의 B중대원이 한 두명의 월맹군을 백병전으로 죽였다.
그러나 월맹군은 항공기가 나타나면 바로 사방으로 분산하는 버릇이 있었고,
근접항공지원은 흩어지는 월맹군에게 사격해야 했다.
그들 소수는 사력을 다해 라오스 쪽으로 뛰었다.
(부상자 등이 전날 많이 빠져나간 것으로 추측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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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지의 서쪽으로 187연대 C중대가 방어선을 구성했다.
허니컷은 존슨대위에게 명령해서 A중대가 B중대로 가서 보강하라고 명령했다.
A중대도 힘겹게 전투를 하면서 올라왔다.
당시 하킨스 대위는 같이 올라가던 소대장 조지 베니트 중위과 15명이 병력이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었다. 그는 보이는 병력을 규합해서 계속 올라갔다.
그리고 정상의 30미터 부근에서 목에 총을 맞았다.
바로 몇 피트 앞에 작은 굴이 있었던 것이다. 상공에서 허니컷이 다 보고 있었다.
하킨스 대위가 "I've been hit bad,"라고 말하자, 허니컷이 무전기로 말했다.
"나도 맞은 건 알어. 그러나 자네는 아직 더 올라갈 수 있어."
의무병이 하킨스 대위의 목에 붕대를 감아줬다.
월맹군은 마지막 벙커 라인을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A중대가 몇 명 더 쓰러졌다.
그 순간 월맹군 분대규모가 C중대의 오른쪽을 공격했다.
3소대 기관총사수 조니 재슨이 맞았다.
그는 다시 전진하려고 했으나 공격을 다시 좌절되었다.
그는 그 순간 아침에 동료에게 농담한 것이 기억났다.
"내가 한마디하지. 우리가 이번에 저기를 점령하면 말야.
난 어떤 놈이 등뒤에서 날 쏘더라도 다시는 내려가지 않을 꺼야.
저기서의 후퇴는 bullshit이야." 라고 농담을 했던 것이다.
그가 갑자기 일어나서 소리쳤다.
"Fuck this bullshit!"
그러자 동료인 잭슨이 그의 M60을 가슴에 쥐어 주었다.
그러자 그는 앞을 향해서 미친듯이 기관총을 갈겼다.
당시 잭슨은 올라오다가 작은 참호구멍에 걸려 넘어 졌었다.
거기엔 두 명의 적이 있었다. 그들도 놀라서 총을 겨냥하려는 찰라,
그는 M60을 그들에게 난사해버렸다. 그리고 다른 벙커를 향해 달렸었다.
정상에서 20미터 떨어진 곳이었다.
바로 뒤에 마이클 발론 상병이 있었다.
그는 잭슨이 싸우는 모습을 보고 어떤 영감이 떠올랐다. 그는 소리쳤다.
"나를 따르라!" ......
그는 분대를 이끌면서 M16을 발사했다. 결국 분대가 그를 따랐고,
소대가 그를 따르는 모양이 되었고, 결국은 중대가 따라오는 모양이 되었다.
A중대는 마지막 남은 벙커를 모두 날려 버렸다.
부상한 하킨스 대위는 방어선을 C중대와 함께 구축했다.
남서쪽의 506연대 1대대 B중대는 아주 처절한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중대 3소대는 900고지를 공격했다. 900고지 100미터 전방이었다.
그러나 그곳의 나무에는 월맹군이 설치한 크레모어가 있었고
폭발위치는 바로 한 분대가 위치한 곳 정면이었다. 선두가 죽고 7명이 부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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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맹군 2개 소대 정도가 맹렬히 사격을 해왔다. 선두 소대는 박살이 났다.
전투는 처절했다. 15분 후에 3소대는 죽어 있는 10명의 월맹군의 시체를 보았다.
506연대 1대대장 존 바우어 중령은 C중대의 윌리엄 스티미스트 대위에게 명령을 내려
3소대를 구출하라고 명령했다. 두시간의 전투가 이어졌다.
그리고 그들은 점령했다. 정상 부근에서 사살된 월맹군은 65명이었다.
그 날 남은 월맹군 29연대 병력은 대부분 전사했고 나머지는 라오스로 도주했다.
허니컷 중령은 헬기에서 이 900고지에서 사방으로 도주하는 월맹군을 목격했다.
허니컷은 전폭기를 부르고 포병을 유도해서 그들을 공격케 했다.
정상에 선 187연대 3대대원들은 멀리 풍경을 보고 있었다. 풍경은 멋있었지만
그들이 있는 곳은 지옥이었다. 거기에는 월맹군의 시체와 살점, 피트헬멧, AK-47,
방망이 수류탄, 피가 묻은 붕대, RPG 등이 937고지 주변에 널려 있었다.
그들은 937고지 중앙에서 포격으로 인해서 쇼크상태에 있는 월맹군 15명을 발견했다.
그들을 바로 사살해 버렸다. 아무도 제지하지 못했다.
그 중 네 명의 월맹군은 나무에 연결된 체인을 발에 감고 있었다.
그리고 거기에 문구가 쓰여져 있었다.
"Kill the America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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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쪽에서 본 햄버거힐.
여기서 보면 얼마나 공격자가 힘든 지형인가가 느껴진다.
18세의 포로가 하나 잡혔다. 팜 반 하이라는 청년이었다.
그는 자신들이 월맹 29연대 7대대와 8대대라고 말했다.
그리고 자신들은 아주 지쳤다고 말했다. 나중에 조니 잭슨 상병은 고지의 정상에서
지하에 방을 하나 발견했다. 거기에 월맹군 시체 40구 이상이 누워 있었다.
그리고 나머지 부대원들은 정상 근처에서 아주 깊은 터널을 발견했다.
거기에는 거대한 병원이 있었고, 연대 본부가 있었다.
그리고 152정의 개인화기와 25정의 중화기, 그리고 7만 5천발의 실탄을 발견했다.
그리고 박격포와 RPG 포탄 천여발이 있었고 10톤 정도의 쌀을 발견했다.
미군은 연대 본부를 공격한 것이다.
그것을 발견한 미군은 간담이 서늘했다.
937고지에 대한 공격은 총 9회였고 전투는 점령이후까지 총 10일이 걸렸다.
187연대 3대대는 39명이 전사하고 290명이 부상당했다.
동 압 비아 고지에서는 미군은 70명이 죽고 372명이 부상당했다.
월맹군의 전상은 확실히 알 수가 없었다.
101사단의 정보부는 월맹군 633명의 전사를 추정했다.
시체카운트에 근거한 것이었다. 그러나 달아난 병력과 땅에 파묻힌 터널안의
전사자를 포함하면 완벽한 추정이 불가능했다.
이 카운트도 여러 설이 있어 분분하다.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www.vietvet.co.kr%2Fvietwar%2Fhambg%2Fham18.jpg)
월맹 측은 햄버거 힐에서 미군 240명을 죽였다고 선언했다.
공격 미군은 보병 1천 8백명, 10개의 포병대, 공군 폭격 272회
(전폭기 한 대의 이륙은 폭격 하나로 여김), 1백만 파운드 폭탄량,
12만 파운드의 네이팜 탄이었고, 월맹군 29연대 7과 8대대의 손실도 만만치 않았다.
(여기서 전사자가 70이란 것에 사람들은 주목할수 있다.
그러나 군사적으로 일개 부대는 '전투에 임할수 없는 부상'까지 들어가야
정확한 피해나 전과를 볼수 있다. 전상으로 따지면 430명 정도가 이에 해당된다.
경상은 뺀 나머지다. 2개 중대에 해당된다.
그리고 군사에 관하여 조금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전사자도 추모해야 하지만,
이러한 단지 {부상}이라는 이름으로 적당히 치부된,
전쟁부상자들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이 중에는 상당수가 아주 힘든 불구(장애인)가 된 것이다.
우리가 월남전 우리나라 군대 참전용사들을 대할때,
살아 돌아왔다고 전쟁의 피해를 안 입은 것이 아니란 점이다.
전사자는 한 전투의 피해 한 부분일 뿐이다.)
187연대 3대대의 전투는 끝났다.
그 뒤 17일간 다른 3개 대대가 그 고지에서 작전했다.
그러나 5월 21일, 187연대는 그곳에서 빠져나와 이글비치의 캠프 이반스로 돌아왔다.
그들이 물러나면서 한 대원이 C레이션 박스의 종이에
"Hamburger Hill,"
이라고 적어서 나무에 못으로 박고 내려왔다.
얼마후, 다른 대원이 이렇게 부가적으로 갈겨썼다.
"Was it worth it?(가치가 있는 전투였는가?)"
(햄버거 힐이라고 쓴 병사는 Edward J. Henry으로, 506연대 2대대 A중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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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가 끝난 뒤, 크링턴 아브람스 장군이 웨스트모어랜드 장군 후임으로
COMUSMACV의 사령관이 되었다. 그리고 그는 말했다.
"우리는 그러한 지형에서 그렇게 싸우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적을 추격하는 방식을 취할 것이다."
그러자 101사단장 자이즈 장군이 말했다.
"그 고지는 단지 제 작전 구역의 고지였을 뿐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적이 있었을 뿐입니다. 그래서 저희는 공격했을 뿐입니다."
어떤 사람이 그에게 물었다.
차라리 B-52를 불러서 초토화시키는 것이 편하지 않았냐고.....
그러자 자이스 장군은 증오에 가득찬 눈빛으로 말했다.
"우리는 너무나 많은 전쟁에서 공중폭격으로
전쟁에서 다 이긴 것이 아니란 것을 알고 있지 않소?"
"얼마나 전투가 치열했는지는 중요한 게 아니다.
내 미군 병사들이 임무를 해 냈다는 것이 중요하다.
그곳을 떠나는 병사들은 아마도 지옥을 떠나는 기분이었을 것이다.
남들이 말하는 대로 피장파장이 아니었다. 우리는 햄버거 힐로 갔고 그곳을 점령했다."
[101공수사단 3여단장 대령 조셉 콘미 주니어]
이 전투로 인해서 미군의 교리가 많이 바뀌었다.
특히 장비와 보급의 신속성에 문제를 많이 발견했다.
아직도 많이 연구되는 과제이기도 하다.
허니컷 대대장은 부대를 무리하게 단독공격해서 피해가 많았다는 지탄을 받았다.
압 비아의 월맹군은 고도로 훈련된 병력들이었다.
그리고 월맹은 이 지역에서 미군의 전술적인 갭을 드러낼 수 있는 곳으로
이 고지를 지목한 것으로 알려진다. 이 갭은 위의 내용들에게 충분히 보이게 한다.
특히나 서로가 근접한 상태에서 공중폭격을 마음껏 못하게 만든 점은
월맹의 고도 전술이었다.
이 전투로 인하여, 워싱턴은 미군주월사령관인 크링턴 아브람스 장군에게
이러한 형태의 반격을 회피하라고 지시했다. 이로써 햄버거힐은
수색섬멸작전(search and destroy)의 마지막 메이저 작전이 되었다.
그 대신에 주로 소부대 작전으로 변경했다.
그러나 이후로도 햄버거힐 전투의 가치에 대한 논란은 여전히 계속되었다.
그러나 한가지 확실한 것은 1968년 1월 31날 미국인이 월맹의 테트공세를 보고 느꼈던,
반전과 무가치한 전쟁이라는 의미를 이 햄버거 힐은 다시한번 미국인들에게 새겨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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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라이프지
이 햄버거 힐에서 그 주일에 죽은 병사의
살아있는 얼굴을 실었고, 다분히 반전적인 이미지로 구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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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부대 병사의 증언]
"우리 헬기 A중대가 추라이에서 아메리칼 사단과 같이 작전을 할 때
햄버거 힐 전투가 일어났다. 우리는 백업부대였다. 난 준사관인 켄 트램프와
중대병력이 참가했다. 켄과 나는 4대의 헬기 중에서 3번기에 있었다.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www.vietvet.co.kr%2Fvietwar%2Fhambg%2Fham23.jpg)
우리는 햄버거힐에서 서쪽으로 향했다. 라오스쪽이었다. 우리는 정상을 공격하는
미군을 조력하는 임무로, 궁극적으로 다른 방향으로 측면을 향하게 되어 있었다.
목표는 다른 봉우리였다. 우리는 헬기 밖으로 풍경을 봤다.
우리는 정해둔 낮은 고지의 정상에 랜딩했다. 첫 번째 헬기가 돌아가고
두 번째 헬기가 돌아갈 무렵 갑자기 월맹군이 나타나서 사격을 시작했다.
2번 헬기에서는 연기가 났다,
헬기는 간신히 기수를 틀어 타 바트 비행장으로 향했다.
비행장의 이름은 명확치 않으나 어샤우 계곡에 있는 비행장으로 기억한다.
우리 3번기는 켄과 내가 논의를 한 뒤에 불시착할 것으로 보이는 2번 헬기를
따라가서 구출하기로 했다.
헬기는 불시착했고 우리가 바로 뒤에 내려서 다가가 보니 부상당한 사람은
다행히 하나도 없었다. 우리는 다시 침투지점으로 향했다.
랜딩존에는 8명이 있었다. 상부는 그대로 남은 병력들이 침투시키라고 명령했다.
결국 우리는 2번 헬기에서 구조한 2명의 A중대원도 합류하여 랜딩하기로 했다.
우리는 랜딩존 지역의 모든 방향으로 M60을 난사하며 그곳에 접근했다.
랜딩존을 제외한 모든 곳에 월맹군이 우글거린 다는 것을 알았다.
승무원 치프와 기총수는 월맹군이 랜딩존을 향해서 기어오르는 것을 목격했다고 말했다.
우리는 B40 로켓이 우리 헬기를 향해 날아와서 빗나가는 것을 보았다.
정상을 보자 먼저 랜딩한 병력은 모두 엎드려 있었고, 총을 머리위로 들어서
아래의 월맹군에게 사격하고 있었다.
우리는 간신히 그들을 랜딩시키고 북서쪽의 다른 중대를 근처에 랜딩시키러 갔다.
이 중간에 우리는 서너번 연료와 실탄을 보충했다. M60의 실탄을 주로 많이 실었지만,
사실 미니건이 하나 장착되어 있었다.
미니건은 기총수와 승무원 치프 켄이 같이 사격을 했는데,
그 사격은 정말 랜딩존 주변을 쑥밭으로 만들었다. 당시 치열한 전투로 인해서
101사단의 건쉽은 거의 다 떴다. 해병대 건쉽도 지원을 받았다.
당시 헬기를 타기 위해 고도를 낮추고 병력들이 헬기를 향해서 뛰어오는데
월맹군이 접근하는 것을 우리 헬기에서 목격했다.
우리는 바로 로켓과 미니건으로 랜딩존 주변을 사격했다.
우리는 성공적으로 그들 중대를 랜딩시켰다.
그 다음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는 알 수 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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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연대 3대대 병사의 증언]
다낭으로 향할 수송기가 비행장에 도착했다.
출발전, 우리 선임하사는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 이제 여러분은 불쌍한 상태가 될 겁니다. 그곳의 공기는 축축하고
찰리들은 어디에나 돌아다닙니다. 여러분은 모험을 택한 것입니다.
좀 자두십시오. 베트남 어디에도 마음놓고 잘 데가 없습니다."
난 옆자리의 미시시피 빌록시 출신의 프레디 잭슨과 인사를 나누었다.
그 역시 나와 같은 19세였다. 비행기는 야간비행을 했다.
잭슨은 신자였고 언제나 성서를 읽었다. 그는 자신을 신이 보호해줄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는 둘 다 베트남에 관하여 혼돈스러운 상태였다.
우리는 베트남에 관한 정보를 들을수록 더 알 수 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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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기는 무거웠고 땅은 젖어 있었다.
그리고 난 쥐들 때문에 잠을 편히 잘 수가 없었다. 내 총은 벼게였다.
가끔은 쥐를 총으로 쏘았다. 프레디와 아는 노래도 같이 부르고 포커도 했다.
프레디는 가끔 나에게 성가를 가르쳐주기도 했다.
우리는 같이 담배를 피웠고 술을 마셨고 매춘부를 같이 산 일도 있었다.
이 악몽의 장소에서 살아남는 길은 사실 도망밖에 없었다.
우리들은 찰리를 찾아 섬멸하는 것이 임무였다. 베트콩은 아주 거칠었다.
그리고 그 강한 베트콩은 1969년 봄, 어샤우 계곡을 공격하면서 절실히 체험했다.
이 열흘 간의 잔혹한 전투는 오랜 동안 내 마음을 떠나지 못했다.
프레디와 난 B중대였다. 작전은 5월 10일 시작됐다.
우리는 아침 일찍 완전군장으로 64대의 헬기를 이용해서 브래이즈 기지를 출발했다.
날은 어두침침하고 습기가 많았다. 비는 억수같이 내렸고 앞사람을 보기가 힘들 정도였다.
이 압 비아를 공격하는 중요한 수단은 공중폭격이었다.
우리는 팬텀기와 포병의 지원을 받았다.
그곳은 찰리들이 우글댔고 우린 그들을 진압하는 것이 임무였다.
프레디는 출동 전에 성서에서 다니엘 장을 읽어 주었다.
사자가 우글거리는 동굴을 묘사한 것이었다. 난 그때 다니엘과 같은 심정이라고 생각했다.
프레디는 기도를 했고 나도 옆에서 같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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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랜딩했다. 그리고 정글로 들어갔다.
그리고 정상으로 향하는 길은 아주 험란했다.
컴컴했고 땀으로 젖었으며 습기가 많았다.
두꺼운 덤불과 대나무들은 우리의 통과를 아주 힘들게 만들었다.
우리는 터널이나 참호 벙커를 찾기 위해 눈을 크게 떴다.
당시 우리는 랜딩존에서 기다렸다. 우리 중대는 당시 공격예비대였다.
그리고 사실 우리는 고지 점령이 오래 걸리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다.
우리는 얼마 후에 C중대의 지원요청을 받았다. 많은 수의 베트콩들이 나타난 것이다.
우리는 산으로 올라갔고 프레디와 나는 허밍으로 노래를 불렀다.
그때 프레디가 조용히 말했다.
"이 지옥에서 살아남는 것은 오직 네가 하느님을 받아들이는 것 뿐야!"
산을 오르면서 아마 난 기도를 했을 것이다.
결국 우리는 C중대를 만났다. 전사자가 있었고 중상자가 조금 있었다.
여러 명이 누워있었다. 이들 중에는 내 친구도 있었다.
난 그를 보고 삶에 허무를 느꼈다. 다음날도 똑같았다.
공중폭격이 있고 나서 우리는 공격을 했다.
그러나 월맹군은 우리의 공격을 계속 좌절시켰다. 점차 전투는 치열해졌다.
희생이 늘어갔다. 내 생각에 우리는 절대로 정상을 못 밟을 것 같았다.
19일, 우리는 다시 올라갔다. 우리는 그들에게 지쳤다.
그들의 벙커로 인해서 더욱 힘들었다. 지휘관은 적을 향해서 먼저 수류탄을 던지고
M-16을 사격하라고 했다. 그 날 난 죽음이 무엇인가를 알았다.
우린 이날 일부를 점령했고 월맹군의 시체들을 보았다.
19일 밤, 지휘관은 다음날의 계획을 우리에게 설명했다.
우리는 고지를 포위할 것이고 다음날 아침까지는 승리할 것이라고 말했다.
프레디와 나는 이 말에 마음에 위로를 받았다.
내일이면 승리하고 전투가 끝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날밤 프레디와 나는 신에게 지금까지 지켜주신 것에 대해 기도를 올렸다.
우리는 잠깐 수면을 취했고 프레디가 성경에서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시구를
읽어 주었다. 프레디는 잠자리에 들기 전에 기도를 했고,
우리의 우정이 영원히 잘 되도록 기도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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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년 5월 20일은 내가 경험한 최악의 피비린내 나는 날이었다.
그 날은 승리의 날이었고 죽음의 날이었다.
우리 중대는 그 날 고지를 포위했고 공격을 준비했다.
프레디와 나는 C중대로 배속되어 고지 정상을 공격하는 공격1파에 소속되었다.
고지를 공격하는 길에 우리는 월맹군의 벙커를 수류탄과 치열한 사격으로 파괴했다.
그들도 피해가 컸다.
결국 그 날 우리는 고지를 점령했고 29월맹군연대는 퇴각했고 라오스 쪽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라오스로 도망가는 동안 또한 많은 이들이 사살됐다.
그러나 정상에 도달했을 때 그것이 전투의 끝이 아니란 것을 알았다.
정상은 온통 벙커투성이였고 찰리들은 마지막까지 저항했다.
프레디와 나는 정상에 섰고, 낮은 자세를 유지하며 경계를 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다시 벙커와 매복을 당했다. 우리 소대였다.
우리는 즉시 응사해서 6명의 월맹군을 작은 길에서 사살했다.
난 연기가 자욱한 가운데 오른쪽으로 프레디를 불렀다.
그런데 대나무 숲에 누군가 쓰러져 있는 것이 보였다.
난 그것이 프레디가 아니기를 빌었다. 다가가서 보니 그는 가슴에서 피가 나오고 있었다.
난 무릎을 꿇고 그에게 다가갔다.
프레디였다.
프레디는 웃고 있었다.
그는 조용히 내 이름을 불렀다.
난 그를 팔로 안아서 이제 곧 좋아질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자 프레디가 말했다.
"난 집으로 간다. 하느님이 날 기다리고 있어. 난 집으로 갈 꺼야......"
난 울었다. 그러자 프레디가 울지 말라고 나에게 말했다.
그리고는 유언처럼 마지막 말을 했다.
"지미, 예수님은 널 사랑하셔.
그리고 너와 난 어느 날 좀 더 좋은 모습으로 천국에서 만날 꺼야..."
그리고 프레디는 하늘나라로 갔다. 난 그의 눈을 감겨 주었고 그를 어깨에 맸다.
난 휴이헬기가 있는 곳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두명의 승무원이 프레디를 기내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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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눈물이 흘렀고 고통을 느꼈다. 난 기도를 시작했다.
프레디가 한달 전에 가르쳐 준 기도였다. 난 신에게 그를 구해달라고 기도했다.
난 죄인이고 내 인생에 있어서 프레디가 필요하다고 기도했다.
난 나중에 고지를 떠나면서 정상에 타버린 나무에 꼽혀있는 종이에 쓰여진 문구를 봤다.
"Hamburger Hill, Was it Worth it?”
거기서 미군 70명이 죽고 372명이 부상했다.
월맹군은 완전한 확인이 불가능했고, 확인은 633명이었다.
총 700 여명이 10일간 거기서 죽었다.
피를 부르는 전투였고, 논쟁이 여지가 남겨진 전투였다.
[By Denis D. Gray(프레스 연합)]
찰스 루이트가렌은 당시 분대장이었다. 그리고 햄버거힐에서 부상을 당했다.
그는 당시 기관총사수였던 동료를 생각했다. 그는 월맹군의 로켓포로 전사했다.
그리고 중대장은 전투 중에 아군간의 오발사고로 전사했다.
그는 파편을 맞은 채 폭우로 인한 진흙탕에서 굴러 떨어졌고 모두는 그가
죽었을 것으로 생각했었다.
"가치가 있는 일이었습니까?"
라는 기자의 질문에 52세의 참전 생존자 부캐넌과 텐은 전화 인터뷰에서 입을 열었다.
"명확히 아니죠. 그러나 우리는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해서 고지를 점령하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산산이 부서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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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생존자인 61세의 호 크아는 당시 햄버거힐의 월맹군 병사였다.
그의 중대는 5월 10-20일에 100명중 20명이 전사했다. 그는 퇴역했지만
압 비아(햄버거힐)에 대한 암울한 그림자로 살고 있었다.
그는 라오스 국경 쪽에 살고 있었다.
"우리는 당시 고립됐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우리는 이리로도 저리로도 갈 수가 없었습니다.
특히 우리는 공중폭격이 두려웠습니다. 그러나 그 폭격은 우리말고도 미군도 죽였습니다.
아주 특별하고 강렬한 전투였습니다.
우리는 그 전투를 'thit bam'[고기를 썬 것].”라고 불렀습니다.
(월맹군도 햄버거힐과 비슷한 명칭이었다.)
당시 46명의 미군이 죽고 400명이 부상을 당했다.
월맹군은 미군 집계로 633명이 확인되었다.
월맹군도 끝없이 계속 공격하는 미군에게 강렬한 인상을 받았다고 한다.
당시 에드워드 캐네디는 이 전투를 "무감각, 무책임, 광기,
그리고 미군의 그릇된 이미지 실추"라고 말했다.
많은 미국인들이 공감한다.
당시 19살로 햄버거 힐 전투에 참가했던 마이큰 브레커는
"그것은 미국의 마지막 환호의 전투였다."
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것은 죽음의 종소리였다."
라고 말했다. 브레커는 샌프란시스코에서 가난한자와 홈리스를 위해서 일하고 있다.
그리고 그 전투로 인해서 많은 사람들이 베트남전의 회의를 품었다고 했다.
그러나 일부 장교들은 시각을 달리했다.
Operation Apache Snow는 28마일의 어샤우 계곡을 평정하는 일이었고,
어샤우 계곡은 호치민 루트의 끝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 전투에서 이기지 못했다면
얼마 안 가서 '후에'와 기타 해변도시들이 공격을 당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바로 테트 공세와 동일한 사태가 일어났을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루이트가렌은 아직도 그 전투의 악몽을 기억하고 있다.
작년에 187연대의 고향인 포트 캠벨에서 햄버거힐 참전자들이 전투 30주년 행사를 벌였다.
"많은 수의 참전자들이 힘들어하고 있었다."
라고 그는 말했고, 월맹 측의 호아 역시
"양쪽 모두의 비극이었다."
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는
"왜 미군이 그 고지를 공격했는지 나로서는 완벽히 이해하기 힘들다."
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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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HAMBURGER HILL PERSONAL BATTLE ACCOUNT]
난 101사단 327연대 2대대 D중대였다.
나의 소대와 패스파인더 소대(특전단 소속)는 햄버거 힐 근처
라오스 국경에서 위치하고 있었다. 우리 소대는 수색을 위해서 두 개로 갈라졌다.
우리는 공중폭격과 포격을 요청했다.
월맹군들이 라오스로 탈출하고 있었다. 바로 그 첫날 특전단 대원이 모두 전사했다.
우리 소대도 월맹군의 L자 매복으로 들어갔고 나와 2명이 더 부상당했다.
그러나 내 부상은 경미했고 2명은 이틀 후에 헬기로 후송됐다.
우리는 매복 중에 사격을 많이 해서 실탄이 얼마 없었다.
이후 우리는 5일간 교전을 회피하면서 주로 포병과 건쉽을 불렀다.
그리고 중간에 말라리아 증세로 다시 소수가 후송됐다.
우리는 폭격 크레이터에 고인 물을 마셨다.
작전 8일째, 우리는 2천명 정도의 월맹군이 국경을 넘어오는 것을 목격하고
코브라 헬기를 불렀다. 5대의 코브라 헬기가 왔는데,
그 중 3대는 나타나자마자 월맹군 사격에 격추됐다. 그러자 전폭기가 나타나서
네이팜탄을 투하했다. 우리는 후퇴했다. 거리가 너무 가까웠던 것이다.
우리는 재보급을 받고 조종사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 다시 나갔다.
[이기고도 진 전투 "케산" "후에" "햄버거 힐"-잇빨중사]
베트남전은 미국의 언론으로 인해서 50% 이상 자멸했다.
참전의 근거나 이슈는 본인이 말할만한 수준은 아닌 것 같다.
단순한 군사 매니어 입장에서 기술한다.
케산, 후에, 햄버거 힐, 모두 미군이 이긴 전투다.
물론 미군이 공중폭격과 항공지원이 있어서 이겼다고 말을 하지만,
미군은 언제나 포격과 공중폭격에서 우위를 차지할 것이므로
그것이 미군이라고 규정해야 한다.
"후에"-
("위에" 라고도 발음됨)
구정공세 당시 북부의 후에는 월맹군의 주요 목표였다.
물론 월맹은 이러한 전방위 다중 공격에 남베트남 국민들이 봉기를 하리라고
믿었으므로 이러한 공격을 감행했다. 그러나 그런 봉기는 없었다.
결국 이것은 미군과 월맹군간의 시가전이 되고 말았다.
여기서 한가지 알아야 할 것은, "후에"에 미 해병대 연대가 진입할 당시,
월맹군이 미 해병대 보다 더 많았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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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에"를 공격한 것은 월맹군 2개연대와 2개의 베트공대대였다.
지원부대가 없는 사단급의 공격이었다. 월맹군은 1만 2천명에 달했다.
북베트남은 이 구정공세를 참패로 인정했다.
그러나 참패로 인정한 것은 또 있었으니 미국의 언론과 거기에 동조하는
미국인들이었다. 구정공세를 통해서 4만명의 베트콩과 월맹군이 죽었다.
그리고 "후에"에서는 미 해병연대가 150명 정도의 전사를 내면서,
5천명의 월맹군을 죽였다. 즉, 다시 말해서 미 해병대원 한 명이 30-40명의
월맹군을 죽인 것이 된다. 기록으로 따지면 월맹군 5,113명이 사살되었고,
미군은 147명 전사였다. 이것은 실로 엄청난 전투의 승리였다.
그러나 언론의 부정적인 보도로 이미 테트 공세는 미군이 진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패배했다고 생각한 사람들은 또 있었으니, 바로 월맹의 지휘부였다.
"케산"-
이 것도 구정공세와 더불어 시작된 월맹의 목표였다.
본인의 홈피에 기술된 미 특전단 랑베이 캠프가 바로 이 케산 공격전에 박살이 났다.
이것이 딘 비엔 푸가 될 것이 아니냐로 미국 국내는 또다시 공방전이 벌어졌다.
오히려 지휘부가 언론과 정치의 입김에 따라서 갈팡질팡 했지만,
그곳에 있는 해병대원들은 엄격한 규율과 전투의지로 버텨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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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산이 월맹군에게 포위된 3개월 동안, 월맹군은 1만명이 죽었다.
포위시킨 2만명의 반이 죽은 것이다. 그러나 미군의 전사자는 200명 정도였다.
월맹군의 전사자는 미군의 50배였다. 그러나 또한 이 케산의 전투는
명백한 미군의 승리였음에도 불구하고 미국 언론과 언론에 동조하는 미국인들은
실패한 전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포위를 풀고 물러난 쪽은 월맹이었다.
오히려 미군은 이 기지의 철수를 결정했고, 3개월간 버틴 기지를
자기들 손으로 단 반나절만에 철저히 파괴했고, 최초 파괴명령을 받은
미 해병대원들은 폭동의 기미마저 있었다.
"햄버거 힐"-
미군은 70명이 죽었고, 월맹군은 630여명이 죽었다.
이 전투도 결과로 따지만 분명히 미군의 승리다.
그러나 어느 미국인도 이 전투를 이긴 전투로 생각하지는 않는다.
이것 역시 언론에 공개된 전투였고, 월맹이 600명이 죽었지만
미군 70명이 죽은 것에 초점을 맞추어서 패배한 비극적인 전투로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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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언가 이 세 전투가 이상하지 않은가?
분명한 군사적인 승리임에도 대부분 부정적으로 전투를 평가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1)미국이 불필요한 전쟁에 참전했다는 이슈의 낮음과
2)월맹의 심리전에 걸려든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해서 이 심리전이란, 월맹의 지휘관들이
"자신들의 부하들의 시체를 세는 것보다,
미군의 시체가 실려나가는 것의 숫자를 더 중요시 했다는 점."
이다. 구정공세만도 4만명의 월맹군이 죽었고, 특히나 지역 베트콩이
엄청나게 죽으므로써 지역베트콩이 2년 이상 침체상태를 맞게 된다.
테트(구정)공세이후 남베트남에 준동하는 미군의 적은 지역베트콩이 아니라,
거의다가 월맹정규군의 침투된 병력이었다.
그러나 미국인들이나 미국언론은 월맹군의 사상숫자에 별 관심이 없었다.
즉, 테트 공세를 통해서 월맹군이나 지역베트콩이 4만명이나 죽었지만,
그 주에 3-400 명씩 죽어나간 미군의 시체 숫자에 초점을 맞추었던 것이다.
[101사단-]
2차대전에서 베트남전까지>
101사단은 1945년 11월까지 독일에 주둔해 있었다.
그리고 프랑스에서 부대를 해산하여 귀국길에 올랐다.
1945년과 1956년 사이, 101사단은 세 번의 개편이 있었다.
훈련소는 포트 브랜친리치였다. 한국전의 11공수사단 병력을 그들이 훈련시켰다.
1956년 3월, 사단은 포트 캠벨로 옮긴다.
그리고 인원을 조금 줄여서 현역사단으로 계속 남는다.
그리고 1965년 7월 101사단은 베트남전 파병 명령을 받는다.
101사단의 1여단이 1965년 7월 29일 캄란항을 밟았다.
1여단은 327연대의 1.2대대와, 502연대의 2대대로 편성되었다.
잠시 적응기간을 가진뒤 1여단은 전투를 시작했다.
여단은 "안케" 북동쪽 20마일 지점의 "송 콘" 계곡을 평정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 작전 동안, 327연대의 1대대는 랜딩존에서 강력한 적의 저항을 받았다.
3명의 중대장이 전사했고 적과 너무 근접해서 포격과 공중지원을 못하고 있었다.
1대대는 후퇴한 후에 폭격을 요청했다.
야간 동안에 100회 1천1백발의 포격지원이 있었다. 다음날 1대대는 완전히 후퇴했다.
그들은 나중에 자신들이 랜딩한 곳이 바로 베트콩의 주둔지였음을 알았다.
이후 1965년 동안, 1여단은 계속 정찰과 적 보급로 차단의 임무를 수행했다.
1966년초에 적의 활동이 상당히 줄어 들었다. 그러나 5월이 되자,
월맹군과 베트콩은 플레이쿠와 콘텀지역에 강력한 공세를 취했다.
1여단은 안 케와 닥 토로 이동했다.
Civilian Irregular Defense Group(CIDG) 베이스 캠프 북쪽이었다.
당시 그곳은 월맹군 24연대가 포위를 하고 있었다. 1여단은 이 지역 증강을 명령받았다.
남베트남 인들의 철수가 끝나자, 502연대 2대대가 그 버려진 캠프로 들어갔고
C중대를 전방의 방어선으로 보냈다.
얼마후 6월 6일 밤, 월맹군 24연대는 전방의 C중대를 난폭하게 공격했다.
중대는 필사적으로 저항을 했으나 월맹군은 끝도 없이 공격했다.
결국 C중대장은 진중폭격을 요청했다. 어려운 결정이었지만,
지휘관은 결국 허락하고 만다. 포격이 시작되자 24연대는 곧 후퇴했고
327연대 1대대 A중대가 헬기로 증강되었다. 미군은 퇴각하는 24연대를 추척하면서
여러차례 공중폭격을 유도했다. 그들은 100여명이 전사했고 결국 라오스로 퇴각했다.
1966년의 10월과 11월에 보병4사단과 1기갑사단은 콘텀 지역에서 심각한 전투를 치뤘다.
적이 소탕이 되어가자 그들은 24연대처럼 다시 라오스로의 후퇴를 시도했고,
101사단 1여단은 그들을 차단하는 임무를 받는다. 1여단은 헬기로 투입됐다.
그러나 이미 월맹군은 라오스로 퇴각한 뒤였다. 1여단은 다시 푸 옌에서 예비대로 남는다.
1967년 초, 1여단은 요청이 있는 곳에 투입되는 신속대응군이 된다.
1여단은 공중강습의 숙련이 되어 가고 있었다. 1967년 4월, 제3 해병원군의 지휘 아래,
추라이에서 작전한다. 그리고 이들은 쾅트리 지역에서 평정작전을 펼친다.
여기서 1여단은 케산의 해병대로부터 증강요청을 받는다. 큰 혈전이었다.
이후 1여단은 쾅 트리 지역에서 장거리 무력정찰로 적을 밀어내려고 한다.
1967년 가을, 이 지역의 부대인 Task Force Oregon은 아메리칼 사단이라고 알려진
제23보병사단으로 태어난다. 1967년 11월에 결국 101사단의 2.3여단이 베트남에 도착한다.
[구정공세]
1968년 1월 31일, 월맹군은 구정공세를 시작했다.
이 날은 남베트남에서 전통적으로 가장 행복한 날이었다.
공격을 예상못했던 미군은 경악에 휩쌓였다. 101공수사단은,
1기갑사단과 5해병연대와 함께 고도 '후에'에서 진압작전을 폈다.
문명의 고도이기도 한, '후에'는 사실 공산주의자들에게도 유서깊은 도시였다.
공산주의 동조가 빨랐고, 불교도들이 집단적으로 반정부시위를 벌인 곳이기도 하다.
월맹군은 진격의 발판을 후에로 지목했다. 테트 공세가 시작되자,
'후에'에 있던 남베트남군은 재빨리 도시를 떠났다. 결국 101사단과 1기갑사단은
'후에'를 탈환하는 형식의 작전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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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회복작전은 2주나 결렸고 이것은 베트남전 유일의 대규모 시가전이었다.
이후 해병 5연대가 증강됐다. 전투는 치열했고 전진은 더디었다.
모든 빌딩과 가옥에 월맹군이 숨어 있었다.
어떤 경우 101공수사단은 백병전을 벌이기도 했다.
마침내 도시가 파괴된 가운데 월맹군은 물러났다.
이 기간에 총 33,000여명의 월맹군이 죽거나 부상당하고 포로가 됐다.
당시 2여단의 한 개 소대가 사이공으로 날아가서 미 대사관을 보호하는 작전을 했다.
경사진 지붕에서 침투하는 월맹군과 전투를 하기도 했다.
[Counter Attack and Vietnamization]
테트 공세 이후, 미군은 소규모 부대를 이용한 100여군데의 작전을 했다.
당시 침투했다가 남베트남에 잔존하는 적을 소탕하는 것이었다.
3월과 4월에 101사단은 어샤우 계곡의 월맹군 보급로를 차단하는
Operation SOMERSET PLAIN을 수행했다. 당시 수백톤의 보급품이 노획됐다.
이후 101사단은 해안가 저지대인 투아 티엔에서
Operation NEVADA EAGLE을 수행했다. 이 작전은 1968년 5월에 시작해서
288간 수행했다. 당시 101사단은 거의 매일 정찰과 수색을 하면서 적을 소탕했다.
이후 이 지역은 평정되었으며 적 10개 대대가 먹을 식량과 장비를 노획했다.
네바다 독수리 작전이 끝나고, 101사단은 어샤우 계곡으로 다시 들어온다.
여기서 187연대 3대대는 동 압 마운틴, 지도상에 937고지를 10일간 공격한다.
아주 잔혹한 전투였고 백병전도 여러곳에서 일어났다.
월맹군은 고지까지 1-2-3선의 방어선을 만들어 놓고 있었다.
다시 2개대대가 추가로 파견되었고 고지는 점령되었다.
그 유명한 햄버거 힐 고지 전투다.
이 전투는 전략상에 가치가 있는가에 대해서 논란이 많이 남았다.
101사단장은 고지에 관한 논란에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내 임무는, 적을 찾고 파괴하고, 우리의 거점을 만드는 것이다.
우리는 937고지에서 적을 찾았다. 그리고 우리는 싸운 것이다."
어샤우 계곡은 평정되었고 기갑부대가 들어가 주둔하고,
전에 버려졌던 비행장을 다시 열었다. 이 작전후에 101사단은 두 번에 걸친
부대명칭과 편제에 변화가 있었다. 처음에는 101공수기갑사단으로 명명되었다가
다시 101공수사단(Airmobile이 붙음)으로 개칭됐다.
부대명의 전환은 임무의 전환이기도 했다. 101사단은 투아 티엔으로 다시 돌아왔다.
여기서 101사단은 과거의 임무를 수행하면서 남베트남 정규군에 대한
전문훈련을 시켰고, 서너번 라오스와 연결된 월맹의 보급로를 차단하기도 했다.
이 시기의 작전은 거의가 남베트남군의 요청에 의한 것이었고
이것은 바로 미국이 공표한 "Vietnamization."의 일부였다.
[Homecoming]
1971년 말, 그리고 1972년 초에 101공수사단은 본토로 귀환하여 포트 캠벨로 주둔했다.
101사단은 베트남을 떠난 미군의 마지막 육군사단이었다.
101사단은 7년간 베트남에 참전했다. 이 기간 동안 101사단은 미군의 사단 중에서
공포의 대상중 하나로 성장했다. 101사단은 과거의 부대마크를 색깔만 조금 교정하여
전통적인 것을 그대로 썼다. 당시는 월맹군들이 101사단의 마크를 보고
"닭부대 Chicken Men"
라고 불렀었다. 베트남인들은 독수리를 본 경험이 거의 없었다.
많은 월맹군 지휘관들은 이 Chicken Men은 가급적 회피하라고 말했다.
당시 101사단은 베트남에서 7년간 17명이 최고훈장을 받았다.
[Rakkasans-]
이것은 187연대를 부르는 닉네임이다.
이 닉네임은 자세히 읽으면 '낙카산스'가 되어 마치 한국전에서
우리나라 사람들이 부른 것 같지만, 사실은 태평양 전쟁으로 들어간다.
공수사단 중에서 태평양전쟁에 참전한 것은 바로 미 11공수사단이다.
이들은 포로수용소 구출시 점프를 해서 당시 연합군 포로들이
너무 감격한 나머지 '엔젤(천사)'라는 닉네임이 붙기도 했지만,
187연대의 닉네임은 일본인들이 붙혀준 별명이다.
태평양 전쟁으로 인해서 1943년 11공수사단이 창설되었고,
187연대는 이보다 1년전에 글라이더 연대로 만들어졌다가 11공수사단으로 들어간다.
1944년 11월 6일 투하된 일본군 3낙하산연대의 기습으로 187연대는 이 일본군 소탕에
나선다. 187연대는 그들을 소탕하고 3개월 뒤에 루존에 있는 리파 비행장으로 간 뒤
레이테로 공수해 들어간다. 그리고 1945년 1월까지 지속적으로 레이테만에서 전투를 벌인다.
그들은 너무도 사상자가 많아서 Purple Heart Hill이라고도 불렸다.
Purple Heart란 전사한자에게 수여되는 훈장의 이름이다.
그리고 Nasugbu만에서는 낙하산과 수륙양용으로 공격했다. 당시 그들의 목표는
타게이타이 교량이었다. 11공수사단 전체는 마닐라를 공격목표로 하고 있었다.
그리고 1945년 8월 30일, 미군 병력으로는 최초로 일본 본토에 상륙한다.
그리고 주둔군으로 일본에 한동안 남게 된다. 그때 일본의 주민들이 이 187공수연대를
"Rakkasan(락카싼)"이라고 불렀다.
일본말로 의역을 하면 "떨어지는 우산."이란 뜻으로 미군들은 인식했다.
즉, 일본인들이 이 패러슈트룹을 자신들의 말로 '락카산 부대'라고 불렀던 것에 연유한다.
이 187연대는 일본에 주둔하면서 많은 추억을 남겼고, 187연대를 대변하는 로고중에는
사찰의 길다란 축구골대 형 문의 모양이 있다.
101의 연대와 여단의 의미-
햄버거 힐을 공격한 101사단의 제대는 1여단이다.
당시 101사단은 1.2.3여단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것은 연대전투단이란 형식의 패턴이 187공수연대가 한국전에 참전하면서
연대전투단으로 편성된 것이 가장 두드러진 최초의 것이나,
이 전에 연대전투단의 시험이 미국에서는 이미 있었다.
그렇다면, 왜 햄버거 힐을 공격한 1여단은 하나의 통 연대가 아니고
여기저기 부대가 섞였을까? 이 연대전투단이라고 할수 있는 101사단의 여단들은
단일규모는 아니고 많기도 하고 적기도 하고, 작전에 따라서 다른 부대를
배속시키기도 한다. 특히 사단에 있는 병력은 바로 필요한 경우 바로 배속시켜 버린다.
187연대는 101사단의 1여단이 아니다. 구성된 전투단일 뿐이다.
그냥 생각하기에 부대를 통폐합해서 그냥 연대를 없애 버리고
여단을 만들면 될 것이 아니냐 하고 생각할수도 있다.
그러나 미국과 서양에서 하나의 전투부대를 만드는 경우,
보통 연대로 부대가 만들어 진다. 이런 연대의 전통이 다른 병력과 구별하는 전통이자
특징인 것이다. 이를테면 187연대가 11공수사단이 없어지면서 101사단으로 갔지만,
연대의 이름 187은 그냥 두었다.
그것을 없애고 명칭을 바꾼 다는 것은 미국에서 볼 때 엄청난 사건이다.
즉, 연대의 전통은 그대로 있고, 사단안에 전투단인 여단이 만들어져도,
이것은 부대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전투나 전쟁에 따라서 연대급전투단의 편성을
적절하게 만드는 것 뿐이다. 187연대는 같은 여단 안에서도 Rakkasans이라고
별개의 명칭으로 자신을 규정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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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독-베트남전 이후]
우리는 모두 베트남전을 욕하고 있다.
그러므로 미군도 뭣 같은 놈들이고....하여간 다 좋다.
그러나 베트남전을 욕하는 사람들에게 있어 하나 간과해서는 안되는 것이 있다.
월맹이 이겼으니 평화가 왔나? 아니 결코 그렇지 않다.
전쟁보다 피를 부르는 더 추악한 정권욕과 잘못된 인권과 학살이 있었다.
아래를 필독하고 월남전을 평가하라.
1. 베트남전 기간중 미군의 오폭으로 민간인의 사망추정은 5만명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전쟁 기간중 베트콩과 월맹군에 의한 학살과 보복과 테러로 희생된
민간인수는 40만명을 추산한다.
2. 1975년 이후 베트남의 공산화 이후 해외로 (보트피플 포함) 탈출한
베트남 사람은 100 만명에 달한다. 1980년에는 베트남 내에 '인종청소'라는 명목으로
수만명의 중국인 피가 섞인 사람들을 베트남 정부가 불법으로 추방했다.
공산화 후에 호치민 시 언론책임자는 오프레코드에서 이렇게 말했다.
"문을 열면 모두들 하룻밤 사이에 여길 떠날 것이다."
3. 1975-77년 사이, 공산화 베트남정부의 대학살, 공공연하 처형, 강제수용소,
브르조아 쓰레기 청소 등으로 죽은 사람은, 지난 10년간의 베트남전 희생자의
꼭 두배였다. 공산화 이후 1년동안 죽은 사람이 전쟁 10년보다 두배가 많았다는 것이다.
4. 전쟁이 끝난후에 공산화 베트남은 무력을 버리지 않았고,
한때 300만의 대군으로 육군만 따져서 세계 3위의 재래식 전력을 가지기도 했다.
이 결과 베트남은 인접국가를 침략하는 일을 하게 된다.
5. 월맹은 전쟁 중에 부패한 남베트남 정부를 항상 욕했다.
그러나 공산화 직후 부패는 더욱 심해졌다. 하이퐁 항에 중국과 소련의 물자를
하적하는데도 뇌물을 줘야할 정도였다. 나라를 떠나거나 수용소행을 면하려면
관리들에게 뇌물을 주는 아주 간단한 방법이 있었다.
공산당 간부들은 재빨리 미국인과 남베트남인들의 집과 토지중에서 가장 좋은 것을
자신의 소유로 해버렸다. 상당히 심각했다.
6.월맹이 베트남을 적화통일하여 점령한 뒤, 베트남의 경제는 더 후퇴하여
상당히 많은 인민들이 굶어 죽었습니다. 소리없는 전쟁을 통해서 자국 동포를
수없이 격리하고 학살한 내력이 있습니다.
그래서 베트남 자신도 이런 학살 문제를 언급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다 파헤치기 시작하면, 현재의 베트남전 당시 베트콩 용사였던 수장과
고위관직자들 다 감옥에 가야합니다. 불똥 튈까봐서 그들도 언급을 싫어 합니다.
월남전을 이야기하고져 할 때 이정도는 알고 말해야 한다고 본인은 생각합니다.
생각과 판단은 개인의 자유이지만 말입니다.
전쟁은 반전데모로 억제 되는게 아닙니다. 전쟁을 억제할 수 있는 힘이 있어야 됩니다.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www.vietvet.co.kr%2Fvietwar%2Fhambg%2Ftet02.jpg)
첫댓글 정망 감명깊게 보았습니다".................감사합니다 선배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