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沙果) 과수원(果樹園 apple orchard) 2
그런데……
새끼 줄을 늘여 표시되어있는 아카시아(acacia) 나무가 울창(鬱蒼)하게
우거진 자리를 파는데 인골(人骨)이 무더기로 나오기 시작했다.
검정 고무신짝, 삭았지만 무명으로 된 무늬가 선명한 옷가지, 그리고
가죽 허리띠 등과 함께 무려 일곱 구의 뒤 엉클어진 유골(遺骨) 전부를
수습(收拾)하고 나니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6.25 전쟁 때 그 골짜기에서 근처 동네의 부역자(附逆者)를 집단(集團)으로
총살(銃殺)했다는 풍문(風聞)은 들었지만 막상 유골(遺骨)이 나오기
시작하니 다른 곳보다 나무가 더 우거진 원인(原因)을 알게 되었고,
어떻게 처리(處理)해야 할 지가 속수무책(束手無策)이었다.
그러나 정신을 가다듬고 경건(敬虔)한 마음으로, 깨끗한 광목(廣木)을 구해
유골을 모두 수습해서 양지(陽地)바른 곳에 합장(合葬)을 하고 동네
구멍가게에서 술 한 병을 사다가 절을 하고 망자(亡者)에 대한
최소한(最小限)의 예(禮)를 올렸다.
농사(農事)의 ‘농(農)’ 자도 모르니 이른 봄 남들이 밭을 갈면 나도 소를
사서 쟁기질을 하고, 감자를 심으면 나도 따라 심고 콩을 심으면 따라
흉내 내는 식으로 농사꾼이 되어 갔다.
힘들게 미리 여유 있게 준비한 퇴비(堆肥)를 넉넉하게 구덩이에
시비(施肥)하는 것을 지켜 보신 선친(先親)은 당시 처음 국내 재배(栽培)가
시작된 후지(富士) 묘목(苗木)을 사다 주셨다.
원예를 전공하신 선친의 맨토(mentor)는 서울 농대에 계시던 ‘씨 없는 수박’
으로 유명한 우장춘(禹長春 1898~1959) 박사(博士)였다고 기억(記憶)된다.
그렇게 나의 과수원은 만들어지게 된 것이다.
그러나 아직 산의 명의(名義)가 이전(移轉)되어 있지 않아 선친께 말씀
드리고 그 친구분 집을 찾아 가 명의 이전을 간청(懇請)하기에 이르렀다.
세상 인심(人心)이 조변석개(朝變夕改) 라더니 차일(此日) 피일(彼日) 미루며
이전을 회피(回避)하는 그 친구분이 야속(野俗)하다 못해 얄밉기까지 했다.
그러나 매일같이 꼭두 새벽에 찾아가 대문을 두드리기를 두 달여!
마침내 내 끈기가 빛을 발하여 그 친구분의 인감도장(印鑑圖章)과 증명을
받아 쥐고 의기양양(意氣揚揚)해서 선친에게 명의 이전을 위하여 인감을
달라고 하니 큰 아들에게 면목이 없어서인지 한 마디로 ‘네 앞으로 해라’ 고
말씀하셨다.
그렇게 해서 나는 졸지에 어엿한 산주 반열(班列)에 오르게 되었던 것이다.
학교를 휴학하고 일년에 걸친 지금 하남시 천현동 선린촌의 양계장(養鷄場)
머슴살이 경험을 살려 농사에 가장 요긴(要緊)하게 쓰인다는 계분(鷄糞)을
우선적으로 확보(確保)하고, 이웃의 농사일을 어깨 너머로 배우면서 나의
서투른 농사일은 시작되었다.
감자, 콩, 밀 보리, 등이 사과가 심겨진 사이에 간작(間作)하는 작물이 되었고,
시나브로 농사꾼으로 변신해 갔다.
그러나 당시에는 묘목을 심고 최소 5년이 지나야 수확(收穫)을 할 수
있었는데 농사일과 과수원에 계속 돈이 들어가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 되니
그때까지 안 해 본 직장 생활을 울며 겨자 먹기로 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되어
버리는 차가운 현실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지금은 기본 3년이면 수확이 되는 개량종(改良種)이 보편화(普遍化) 되었지만
그 때까지는 다음과 같은 말이 회자(膾炙) 되었다.
‘과수원은 심는 사람 따로, 기르는 사람 따로, 수확(收穫)하는 사람 따로’ 라는…….
부모님에게 기대지 않고 살기 위해서는 호구지책(糊口之策)으로 직장을 갖지
않으면 안 되는 막다른 골목에 접어 들었던 것이다.
<이어집니다>
흐르는 곡: Senenade To Spr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