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3년 3월 10일 전남 목포. 천재가 태어났다.
나이 지긋한 어른들 틈에서 물끄러미 바둑판을 처다보던 한 아이. 4살쯤 되었을까? 바둑판은
어지럽게 진행되고 한참을 고심하던 한수를 놓으려던 순간 아이는 외쳤다.
"아부지 거기 놓으면 안되라우"
한번도 바둑을 둬본적 없고 오직 어른들의 바둑을 옆에서 지켜만 보던 한 소년의 외침에
어른들은 그저 신기할 따름 이었다. 바둑이 끝나고 복기를 해보니 아이가 지적한 수가 패착.
"저 아이가 수를 제대로 읽은 거 아닐까요?"
"이제 겨우 네살짜리가 뭘 알겠어"
어른들의 말에 아이는 자존심이 상한듯 말했다.
"나 바둑 둘 줄 알아라우"
한번도 바둑을 가르친 적이 없었고 어른들의 틈에서 구경만 하던 아이가 얼마나 둘줄 알까 싶어
확인을 해 봤다. 진행 될 수록 어른들의 눈이 커져만 가는데.. 놀랍게도 아이가 그럴듯하게 집을
갖추어 나가는 것이다. 제대로 된 행마는 아니었으나 그 나이에 바둑의 이치를 알고 있다는 사실
만으로 어른들은 충분히 놀랐다.
이듬해 겨울. 막내 조훈현의 천재성을 확신하던 조규상(조훈현의 아버지)은 무작정 조훈현과
함께 서울로 상경한다. 살림은 어려웠지만 조훈현의 천재성을 꽃 피우기 위해선 스승이 필요했다.
상경한 날부터 조훈현과 함께 매일 송항기원으로 출근을 했다. 그곳엔 당시의 일인자 조남철
국수가 있었다.
목포에서 온 꼬마아이. 겨우 다섯살 코흘리게 아이가 귀여웠는지 조남철은 흔쾌히 지도대국을
뒀다. 9점 바둑.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지켜보던 사람들의 눈이 커져간다. 아이가 제법 행마의
틀을 갖췄기 때문이다. 세시간 남짓 지났을까? 아이는 고개를 숙이고 훌쩍거린다. 어린 조훈현의
패배.
"한번 더 둬보자꾸나"
조남철의 말에 구경하던 사람들이 놀랐다. 지금껏 지도기를 두판이나 둔적이 없던 조남철 이었기
때문이다.
시간은 흘러 아이가 9살 되던해. 서울로 상경한지 4년. 세계 최연소 입단 기록을 갱신하며 조훈현은
프로기사가 되었다. 당시의 한국 바둑은 일본, 중국에 비해선 명함도 못 내밀 수준. 최연소 입단 사실
이 일본에 전해지자 양국은 사상 최초로 전화대국을 기획했다. 상대는 명가 키타니 문하에서 천재성을
인정받은 이시다(石田). 결과는 조훈현의 패배. 당시 세계 최고의 수준인 일본과의 격차를 확인할
뿐 이었다. 그날을 계기로 조훈현은 일본 유학을 결심하게 된다.
62년 입단. 그리고 1년도 채 안돼 2단으로 승단한 조훈현은 63년 10월 한창 투정 부릴 나이에
가족의 품을 떠나 비행기에 몸을 싣었다. 당시 일본 유학파 기사들은 관례처럼 기타니 문하생으로
들어갔다. 일본 바둑계의 원로 기타니 9단도 당연히 조훈현도 자신의 문하로 들어올 줄 알고 있었다.
조훈현의 후원자들과 현지 보호자 조차도 그렇게 알고 있었으니...
그러나 인연이란 하늘이 만든다고 했던가. 조훈현은 인사차 세고에9단의 자택을 방문한다.
오청원과 하시모토, 두 사람밖에 가르치지 않았지만 그 두 제자의 질량이 너무 커서
일본바둑계의 스승으로 일컬어지던 세고에 선생은 연배로 보나 관록으로 보나 기타니 9단보다
격(格)이 높은 존재였다. 그러나 워낙 연로해서 도장을 운영하진 않았다. 즉, 더이상 제자를
키우지 않을거란 이야기. 그런데 조훈현을 보자마자 대뜸 바둑판을 꺼내며 대국을 청했다.
첫판은 세점. 딱 딱 놓아지던 바둑판이 진행되어 가고...
"허어. 판이 짜여지질 않는구나"
세고에 9단은 패배를 인정하고 돌들을 쓸어 담았다.
"그럼..두점으로 해볼까?"
그말에 주위가 놀란다. 세고에 9단은 일년에 지도기를 한, 두판 둘까 말까한 인색한 선생이었기 때문.
어쨌든 두번째 판도 조훈현이 이겼다. 다들 두번의 지도기만으로 만족하고 돌아갈까 하던차. 세고에 9단
은 갑자기 말했다.
“음, 내가 늙고 몸이 불편해 언제 죽을지 모르나 이 아이는 오늘부터 내가 죽는 날까지 데리고 있겠네.”
1편 끝.
참고- www.chohunhyun.com (조훈현 홈페이지)
천재의 명가
이미 오청원이라는 바둑사의 길이남을 제자를 키워낸 세고에 9단 이었다. 단 두명의 제자를 키우고
더이상 제자는 없을거라고 했던 세고에9단. 그러나 조훈현과의 첫 만남에서 냉큼 내제자로 삼아 버렸다.
"세계 최연소 프로 기사가 오청원의 사제가 되다"
그의 존재는 너무나 빠르게 일본 바둑계의 화제가 되어 버렸다.
한국에선 이미 프로2단의 자격을 갖고 있었지만 역시 세계 최강이던 일본의 바둑계에선 조훈현은
배울게 많이 남았다. 일본 기원에서 치룬 그의 급수평가는 4급. 조훈현의 자존심에 불이 붙었다.
"처음부터 다시하자"
집안의 허드렛 일을 하고, 말도 잘 안통하는 학교를 다니면서도 조훈현의 열정은 달아 올랐다. 그런
그에게 세고에 9단의 수업방식은 실전 위주의 교육이 아닌 프로 기사의 자세, 마음가짐 등을
중점적으로 가르쳤다. 특히 대국후의 복기와 기보에 대해서 강조를 했는데 지금도 조훈현은
기보를 잊지않고 꼭 챙기고 있다.
지도기에 인색한 세고에 9단. 조훈현은 9년동안의 문하 생활동안 스승에게 직접 지도받은 대국은 10판이
채 넘지 않았다. 그런 그에게 실전 대국을 할 수 있는 장소는 후지사와 연구실 이었다.
포석 감각이 당대 최고라고 평가 받던 후지사와는 번뜩이는 재치며 탁월한 감각이 조훈현과 무척이나
비슷했다. 천재는 천재를 알아본다고 할까? 후지사와는 먼 이국에서 외로이 공부하는 조훈현에게 아낌없이
가르침을 주었다. 또한 후지사와의 연구회엔 오오다케, 임해봉, 구토 등 당시 일본의 쟁쟁한 기사들이
있어서 어린 조훈현에겐 더할 나위 없는 배움의 장소가 되었다.
"덤벼라! 쿤켄 (훈현의 일본식 발음)"
속기를 중요시 하던 후지사와는 조훈현을 볼 때면 어김없이 붙잡고 속기 바둑을 두었다. 감각과 정밀함이
필요로 한 속기바둑에선 후지사와는 당연 일본 최고로 불리었는데 그런 후지사와보다 시간을 적게쓰던
조훈현이었다. 그 후 누구보다 조훈현의 기재를 높이사던 후지사와는 공공연히 이런 말을 하고 다녔다.
"훈현의 기재는 세계최고이다. 오래지 않아 그는 초일류기사로 우뚝 서고 말 것이다.”
“ 이 아이가 바로 장래의 명인입니다.”
후지사와의 직계 제자 아베 요시테루 6단. 그도 사람들을 만날때마다 조훈현을 이렇게 소개하곤 했다.
조훈현 보다는 한참 선배지만 재능이 부족한 사람이였다. 조훈현의 천재성에 절망감을 느끼면서도
성격이 좋은 사람 인지라 조훈현을 아끼고 자랑하며 다녔다. 타지에서 만난 고마운 사람들.
"쿤켄, 우리 내기바둑 한번 둬볼까? 그냥 두는건 재미가 없자나"
조훈현이 15살 때 일이었다. 얼마전 명인전 2차예선에서 조훈현에게 쓰라린 패배를 당한 아베 요시테루는
조훈현에게 도발적인 선전 포고를 했다.
"스승님이 내기바둑은 두지 말라 하셨습니다."
한사코 거절하던 조훈현에게 후지사와 9단이 슬며시 말했다.
"쿤켄 걱정말고 붙어봐라. 한판에 100엔 정도는 괜찮다. 아베 말대로 승부욕을 위해선 적당한 양념도
필요한 거야"
어쩔 수 없이 바둑판 앞에 앉은 조훈현. 이왕 하는 대국에 질 생각은 없었다. 한판, 두판 점점
이겨나가던 조훈현은 내리 6연승을 거두고 600엔을 땃다.
"쿤켄. 이리오너라"
스승의 부름에 조훈현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세고에 9단 앞에 앉았다.
"아베 요시테루와 내기바둑을 두었다면서?"
어느새 내기바둑의 소식이 세고에 9단의 귀에도 들어갔다.
"...네"
스승의 얼굴에서 분노를 느낄 수 있었다.
"나가라. 너는 더이상 내 제자가 아니다."
뭐라 변명을 할 수가 없었다. 조훈현은 짐을 싸고 스승의 집을 나선다. 어디로 가야하나..앞길은
막막한데 갈 곳이 없다. 조훈현은 하루종일 헤매다 한국 식당의 간판을 발견하곤 무작정 들어갔다.
"한국에서 온 유학생 입니다. 사정이 어려워서 찾아왔는데...무슨 일이라도 시키는 데로 할테니
숙식을 해결해 주실 수 있으신지요?"
물끄러미 바라보던 주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2주일. 세고에의 분노가 가라 앉는데 걸린 시간이다. 후지사와를 비롯해 많은 동료들이 세고에를
직접 찾아가 설명하고 용서를 청했다. 자신의 신념을 꺽지 않기로 유명한 세고에는 처음으로 원칙을
깨트리고 조훈현을 다시 받아 들였다.
1970년. 17세의 조훈현은 33승 5패 1빅(무승부)라는 기록으로 신인상을 받는다.
두면 이기는 시절은 이때부터 시작된다. 80프로 이상의 승률을 기록하며 이제 봉우리를 맺으려 하던
조훈현은 거리낄게 없는 듯 하였다. 그런 그에게 날라 온 한장의 편지.
-입영 통지서-
"모든 국민이 의무를 수행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평등 이전에 인적 자원의 효율을 왜 생각하지
못하는가! 한 세기에 한명 나올까 말까한 천재를 3년동안 병역에 묶어 두다니!"
조훈현의 병역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무던히 노력했던 세고에 9단은 탄식했다. 그러나 방도는 없었다.
조훈현은 바둑돌을 놓았고, 세고에는 그런 조훈현을 묵묵히 바라만 보았다.
1972년 3월. 조훈현은 가방하나 든 채 귀국한다. 10년이 지난 세월. 타의에 의한 귀국이었다.
떠나는 뒷모습을 세고에 9단은 망연 자실한 모습으로 바라만 보아야 했다.
조훈현이 떠난지 4개월 동안 세고에 9단은 자택에 칩거하다 자결을 한다. 세상과의 연을 끊으며
그는 유언장을 남겼을 뿐이다.
그가 남긴 2장의 유언장
1. 가족들에게
- "노구(老軀)로서 더 이상 너희들에게 신세지기 싫어 먼저 떠나고저 한다."
2. 친구, 후배들에게
-"한국으로 떠난 조훈현을 꼭 일본으로 다시 데려와 대성시켜주기 바란다."
2편 끝.
참고- www.chohunhyun.com (조훈현 홈페이지)
천재의 귀환
그러나 금의환향은 아니었다. 명가 세고에 문하에서 일본 바둑에 입단을 성공하고, 가공할 성적으로 신인왕
까지 거머쥐었지만..이룬것은 없었다.
10년의 세월은 그에게 모든 것이 낯설도록 만들어 버렸다.
한국 바둑을 쥐어잡던 조남철 국수는 어느새 전설이 되어 무대의 뒷편으로 사라져 갔고, 유학파 선두자
김인 9단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신진 유학파 세력들은 하나 둘 빛을 발하는 시점에 천재라 불리우던
조훈현에 대한 사람들의 기대는 점점 커져만 갔다.
막상 귀국했지만 당장 입대하는 것도 아니었다. 입영 통지서를 받은 순간 바둑돌을 손에서 놓다시피한
조훈현이었다. 몇개월을 방황하던 조훈현은 사람들의 기대 만큼의 성적을 내지 못한 채 방황의 시간을
보낼 뿐이었다. 일본에서의 기사 생활을 인정받아 5단의 기력은 유지 되었지만 모든것이 일본과는 다른
세상이었다. 어릴적 일본으로 떠난 조훈현에겐 당장의 의사소통도 힘들 지경..
천재의 눈에 세상은 모든것이 두렵게 보이던 시간이었다.
"엄마. 차비좀 줘요"
기원에 가기위해 집을 나서는 조훈현. 잠깐 기다리라는 어머니는 황급히 옆집으로 가서 돈을
꾸어왔다. 그 잠깐의 시간이 조훈현에겐 얼마나 길었는지...
'아..우리집이 무지 가난한 모양이다.'
충격이었다. 세상물정엔 어리숙 하던 그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내가 벌어야 되는구나'
계기였다. 그는 그날을 시작으로 직업인으로써 바둑을 두기 시작했다. 몇달이 채 지나지 않아 그는 첫
타이틀을 획득한다. 제 14기 최고위 타이틀
처음 획득한 상금 30만원. 첫 상금에 한턱을 내야할 곳은 많았지만 그는 눈 딱 감고 어머니에게
갖다드렸다.
1973년. 공군 자원 입대. 육군으로 가기에는 대기해야할 시간이 길었다. 성남의 비행장으로 자대배치를
받은 조훈현은 모든게 또다른 세상이었다. 더구나 말도 제대로 통하지 않아 고문관으로 통하게 된다.
나쁜 일들만 있는것은 아니었다. 군대에서 조훈현은 향후 오랜 친구가 될 차민수를 만난다.
조훈현의 천재성을 알아본 차민수는 군대 생활을 격려하면서 우애를 쌓았다. 하지만 바둑에 전념하지 못한
시간들 탓일까.
1973년 조훈현의 전적은 25승 8패.
1974년. 21승 14패.
"또 둘이 붙는구나. 또"
1976년 왕위전 결승전. 대국자 조훈현. 그리고 서봉수
그때까지 두 라이벌은 명인전, 국기전에서 한번씩 승리를 주고 받았다. 당시의 조훈현은 절정의 기량으로
달려가던 때. 75년 전적이 35승 7패. 천재의 비상은 시작 되었고 그의 앞을 막는 자는 하나 둘씩 떨어져
나갔다. 어느새 그의 앞엔 서봉수 혼자 있었다. 엘리트 유학파 천재 조훈현. 그리고 순수 된장바둑의 자존심
서봉수. 그 둘의 이름은 지겹도록 듣게 되고 엎치락 뒤치락 하던 승패의 향방은 점점 조훈현으로 기울었다.
싸늘한 공기. 대국이 끝난 후엔 일언 반구 복기도 없이 둘은 자리를 뜰 정도로 치열한 라이벌 이었다.
천재에서 바둑 황제로.
1980년 7월 12일. 한국기원 특별 대국실. 모두가 숨을 죽인채 두사람의 대국을 지켜보고 있었다.
서봉수의 마지막 자존심. 조훈현의 전답미문의 영역. 명인전 5번기의 마지막 대국은 지켜보는 이를
침묵시켰다. 얽히고설키던 치열한 공방은 패를 부른다. 숨막히는 패의 공방. 한수 한수 패를 쓰던
두 대국자 사이에서 조그마한 신음 소리가 들린다.
"크흠.."
서봉수의 팻감이 먼저 떨어졌다. 어쩔 수 없이 끝내기성인 팻감을 쓰자 조훈현은 만패불청. 대마를
때려낸다. 대국은 조금더 이어 갔지만 이미 승부는 갈린 상황.
전관재패. 사람들은 환성을 질렀다. 카메라 플래쉬가 쉬지않고 터지는 가운데 황제로 거듭난 조훈현은
수줍은 미소로 소감을 전했다.
"이제 시작일 뿐입니다."
3편 끝.
참고 - www.chohunhyun.com (조훈현 홈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