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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보니 참 신기하죠, 코란도 훼미리가 특이했던가요? 무쏘가 못생겼던가요. 그것도 아니면 뉴코란도가 괴상했나요?
그런데도 단지 1세대만에 쌍용의 이미지는 극단적으로 뒤집혀 버렸습니다. 디자이너 이름은 예나 지금이나 켄 그린리인데 말이죠.
덕분에 켄 그린리가 치매라느니 쌍용을 폐업시키고 라인과 센터를 전부 중국으로 가져가려는 음모라느니 별의 별 괴악한 소문까지 다 돌았습니다.
대체 무엇이 쌍용을 "기괴한" 메이커로 만든걸까요?
저는 일단 켄 그린리 원죄설을 부정하는 쪽이니, 켄 그린리와 쌍용 출시차량의 관계를 기준으로 이야기를 진행해보겠습니다.
0. 일단 켄 그린리는 Royal College of Art 의 자동차디자인과 학과장 출신입니다. 쌍용이 홍보물에서 참 지겹도록 울궈먹은 이야기지요. 학과장이 아니라 교수니 출신이니 하긴 했지만.
일각에서는 켄 그린리가 자동차 디자인 경력이 일천했고, 그의 히트작인 무쏘 역시 RCA 학생들의 작품일 뿐이다- 라는 설이 있기도 합니다만, 이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켄 그린리는 이미 RCA 차량디자인 학과장을 담당하기 전부터 현역이었습니다.
29세였던 1972년 당시부터 복스홀의 컨셉카인 SRV 의 디자인 작업에 참가했고, 이후 몇가지 차량의 작업에 참가하여 1985년에는 존 해퍼난과 함께 벤틀리의 컨셉트 카인 Project 90에 자신의 이름을 내걸고 공동 디자인 작업을 진행했했습니다.
이 디자인은 1991년 벤틀리 컨티넨털 R로 이어져 아직까지도 브루클린즈 같은 나이든 모델에 흔적이 남아있습니다.
88년에 다시 같은 맴버가 에스턴 마틴의 Virage 를 공동작업했다는 것을 감안하면, 겸직 디자이너로서는 상당히 활발한 활동을 펼친 셈입니다.
1. 이런 캔 그린리가 한국과 연결된 것은 팬더의 솔로 디자인을 담당하면서부터입니다.
1980년에 다 망해가던 팬더 사를 매입해 칼리스타를 판매하며 어느정도 현금을 확보하는데 성공한 김영철 씨는 팬더의 차세대 미드십 스포츠카 디자인을 담당할 사람을 물색했고, 이때 RCA 에서 켄 그린리와 만났습니다.
이후 켄 그린리는 솔로의 주 디자인을 전담했으며, 87년에 팬더를 인수한 쌍용이 솔로 3의 디자인도 켄 그린리에게 인계하면서부터 쌍용과 켄 그린리 간의 첫 연결고리가 생깁니다.
당시 쌍용은 주력차종인 코란도 훼미리가 미쓰비시 파제로를 라이센스한 현대 겔로퍼에게 참패하면서 시장점유율 차원의 압박을 받는 중이었고, 이를 타개하기 위해 차세대 주력차량인 FJ 개발을 추진하고 있었습니다.
원천기술에 한계가 있던 쌍용은 푸조나 이스즈 등등을 기웃기웃 거리다가 1992년에 사실상 막차를 타고 벤츠의 기술을 받아내는데 성공합니다.
다만 당시 벤츠와의 기술 도입 계약은 (정확한 규모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일괄이 아닌 차량 판매 수익의 몇% 를 분할해 벤츠에 제공하는 방식인데다 그 비율이 만만치 않은 편이었습니다. 같은 수량을 팔아도 벤츠와 이익을 분할하다 보니, 대등한 수익을 내기 위해서는 신차를 대량 판매 하거나 가격을 올려 수익을 확대해야 했습니다.
한국 시장이 그리 넓은 것도 아니고 벤츠제 파워트레인이 저렴한 것도 아니니 박리다매는 무리. 결국 FJ 는 개발 초기부터 필연적으로 "고급화"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고급화가 말처럼 쉬운 건 아닙니다, 강력한 경쟁차종인 갤로퍼보다 비싼 가격에 판매하기 위해서는 겔로퍼를 위시한 기존의 SUV 들과 명백하게 차별화 되는 - 고급스러움을 강조하지 않을 경우, 높은 가격에 대한 시장의 동의를 구하기 어려워 집니다.
결국 쌍용측에서는 당시 쌍용 디자인 팀과 협력해 솔로 3의 디자인을 진행한 켄 그린리라면 이미 벤틀리와 에스턴 마틴을 공동 작업한 만큼 고급차 디자인 능력이 있다고 판단하고, 그에게 "기존의 SUV 와 확연히 구분되는" 고급스런 SUV 의 디자인을 의뢰합니다. (후일 벤츠에서도 G 바겐 비스무리한 물건을 생각했다가 무쏘를 보고 꽤 놀랐다는 후문이 있습니다)
이런 오더에 대해 켄 그린리가 시도한 것은 형식파괴, FJ는 초기 컨셉부터 기존의 "찦차" 들처럼 효율만 추구한 딱딱한 디자인 대신 고급차에서 사용하던 비례를 적용해 무쏘 특유의 낮고 길고 유연한 실루엣을 만들어 냈습니다.
(이때 몇 가지 디테일은 RCA 학생들의 아이디어를 채용하기도 했다고 합니다만, 확실치는 않습니다)
물론 이런 과정에서 트러블이 없지만은 않았습니다. 일례로 기존의 수직하강식 테일라인에 익숙한 국내에서 해치백을 연상시키는 무쏘의 디자인은 당시로선 상당히 충격적인 것이었고, 쌍용 내에서도 "저렇게 만들면 실내공간이 줄어든다" 거나 "무게와 단가가 올라간다" 거나 하는 험담이 나돌았습니다. 어쨌건 익숙치 않은 디자인인 건 분명하니까요.
그러나 켄 그린리는 "이것이 FJ 디자인의 핵심이다" 라고 주장하며 끝까지 이 디자인을 지켜내는데 성공했습니다.
아시다시피 결과는 대성공, 무쏘는 겔로퍼와 확실한 "차별화" 를 이뤄내며 독자적인 시장을 확보했습니다.
물론 "벤츠" 라는 이름값이 홍보에 상당한 영향을 주긴 했지만, 무쏘 자체가 어느정도 럭셔리한 인상을 주지 못했다면 벤츠의 이름이 그리 쉽게는 먹히지 않았을 겁니다.
2. 하지만 무쏘가 고급화를 추구한 만큼, 그 아랫 시장을 공략할 필요도 있었습니다.
당장은 코란도 훼미리의 가격을 낮춰 무쏘의 아랫급에 포진시키긴 했지만 이런 정책은 임시방편, 특히 노후화된 코란도를 완전히 대체할 대안이 필요했습니다. 당시 전 세계를 강타한 SUV 바람도 무시할 수만은 없었고 말입니다.
무쏘로 돈 좀 만지게 된 쌍용은 무쏘를 바탕으로 좀더 작고 가벼운 차량을 개발하자는 KJ 프로젝트를 추진했고, 이 과정에서 차량의 명확한 컨셉을 정하지 못한 채, 도곡동 디자인 연구소와 켄 그린리에게 각각 "코란도의 아이덴티티를 유지하는 숏바디 SUV" 를 주문합니다.
디자인 연구소의 제안은 코란도를 약간 유선형으로 가다듬은 것이었고, 켄 그린리의 제안은 코란도의 디테일적 특징 (7분할 수직 그릴, 원형 헤드램프, 보닛과 독립된 팬더 등) 은 유지하되, 이를 파격적인 형태로 가다듬어 낸 것이었습니다.
쌍용 입장에서는 아무래도 디자인 연구소의 제안이 익숙했지만, 이미 무쏘라는 실증된 선례가 있는데다 향후 10년 판매를 목표로 하는 차량인 만큼 어느정도 미래적인 디자인이 필요하다고 보고 켄 그린리의 제안을 채택합니다.
켄 그린리가 디자인한 KJ는 뉴 코란도라는 이름으로 출시되어 겔로퍼나 스포티지 등과 경쟁하며 나름대로 판매고를 올렸습니다.
3. 하지만 켄 그린리의 발언권이 마냥 강력했던 건 아니었습니다.
사실 그만큼 쌍용 팀 내에서 비중이 있었다면 FJ 때도 내부경쟁 없이 바로 켄 그린리의 디자인이 채용되어야 했을 겁니다.
W100, 즉 체어맨 개발 당시에도 켄 그린리는 벤츠의 디자이너인 갈리헨도르프와 W100 시안을 두고 경쟁해야 했습니다.
당시 켄 그린리는 유선형의 날렵한 차체 ("재규어 같았다" 는 말이 있습니다) 를 디자인했고, 갈리헨도르프 팀은 그야말로 벤츠스러운 이미지의 보수적 디자인을 내놓았습니다.
쌍용차는 국내 시장의 보수성이나 벤츠 파워트레인과 연계된 마케팅을 고려할 때 갈리헨도르프의 디자인이 더 우수하다고 판단하여 해당 디자인을 채택합니다. 소위 "짝퉁벤츠" 라 불리는 초기 체어맨의 디자인이 바로 갈리헨도르프의 작품입니다.
켄 그린리의 제안에 대한 구체적 자료는 없지만, 간접적으로 확인할만한 방법은 있습니다.
동시대 동 플랫폼의 컨셉카였던 97년의 W-car 가 그의 작품이니 말입니다.
컨셉카, 스포츠카라는 것을 감안해도 프론트 엔드에서 시작된 유연한 선은 동시대 W100의 실루엣으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은 편입니다. 살짝 부푼 보닛이나 도어/윈도우 라인도 말이죠.
4. 이후로도 켄 그린리의 변두리 생활은 계속됩니다.
Y-200이라 불리는 "무쏘의 후속 모델" 작업에서 켄 그린리는 자문역을 담당했고, 실제 디자인은 쥬지어로와 쌍용 팀이 전담했습니다. 몇 가지 디테일과 비례에 켄 그린리의 입김이 들어갔다는 말도 있지만, 그가 90년대 쌍용차 양대 히트작 디자인과 얽혀 있는 디자이너임을 감안한다면 이미 몰락이라고 보아도 과언이 아닐 상황입니다.
그렇다고 쌍용 없으면 밥줄이 끊기는 상황은 아니었습니다. 쌍용은 친분관계가 두터운 외주직일 뿐. 켄 그린리는 여전히 RCA 에 적을 두고 있었으니 말입니다.
문제는 Y-200 자체였습니다.
렉스턴이라고 명명된 Y-200은 무쏘의 "고급 컨셉" 을 계승하는 것이 목적이었지만 실제 가격은 그리 올릴 생각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대우가 휘청거리고 쌍용이 무너지고 IMF 다 뭐다 말이 많은 시기다 보니 예상 판매량은 절망 그 자체, 결국 기획팀은 그냥 가격을 국산 최고급차 수준에 준하게 맞춰 대당 이익이라도 올려잡기로 했댑니다.
문제는 그러니 성공. 돈은 있는데 외제차 타긴 꺼려지는 시대에 돈을 쓰려다 보니 자연스레 국산 고급에 수요가 몰린 겁니다.
서민들 입장에서야 웃기지도 않는 이야기지만, 이런 저런 이유로 렉스턴은 당분간 쌍용의 캐시카우 역할을 담당하게 됩니다.
하지만 당초 무쏘의 후속으로 자리매김해야 할 렉스턴이 보다 상위로 뛰어올라가 버린 만큼 무쏘의 영역은 공백. 쌍용은 무쏘 생산을 진행하면서 별도의 무쏘 후속 차량 개발을 추진합니다.
5. 한편 쌍용은 무쏘 후속과 별개로 A100 이라는 럭셔리 미니밴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미니밴이 왜 럭셔리해야 하느냐...에 대한 이유는 무쏘의 선례를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따라서 A100 은 기존의 카니발이나 스타렉스가 포진한 메이저 시장과는 별개의 영역을 추구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적당히 여러 명을 태우고 다닐 거라면 카니발이, 대량의 짐을 싣고 다니는 거라면 스타렉스가 유리합니다. 따라서 A100은 여러 명이 타도 안락한, 일종의 "미니벤형 고급차" 개념으로 개발이 진행되었습니다. 연애인들이 타고 다니는 스타크래프트 벤의 축소형이라고 할까요.
쌍용 역시 CATIA 를 통한 3D 디자인부터 PDM(Product Data Management) 적용까지, 이래저래 혁신적인 시도를 집중시킬 만큼 의욕적인 편이었고, 자문위원인 켄 그린리도 오랫만에 일선에 나섰습니다.
하지만 켄 그린리가 참여한 것은 디자인 업무 프로세스 가운데 컨셉 단계일 뿐, 디테일까지는 관여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어쨌건 오랫만에 켄 그린리의 입김이 들어간 A100의 초기디자인은 퍽 굉장했다고 합니다. 종래의 미니벤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꺾인 해치라인" 이라던가 (무쏘의 예를 참조하세요) 팬더를 강조한 프론트 라인이던가 하는 식으로 말입니다.
하지만 비극이 닥쳤으니, 이름하여 2007년 승용차 분류기준변경.
종래에 승합차로 인정받던 7인승은 승용으로 구분되고, 승합차 기준은 11인승 이상이 되어버렸습니다.
세제혜택의 효과가 절대적인 미니벤 시장에서 무조건 11인승 이상이라는 것은 7인승 미니벤은 다 죽으란 소리.
(보시다시피 4열 시트라는 웃기지도 않는 존재만 재외할 경우 3열 시트의 헤드룸을 유지하면서도 E 필러까지 갈 필요 없이 D 필러에서 우아하게 테일을 깎아낼 수 있었습니다.)
결국 A100도 기존의 2-3-2, 혹은 2-3-3 배열의 시트를 2-3-3-3 이라는 무지막지한 배열로 바꿔 11인승을 충족시켜야 했습니다.
그렇다 보니 꺾인 루프라인 따위는 생각할 수도 없습니다. 실내공간 내야 되는데 보닛 라인 생각할 틈이 어디있습니까. 그냥 튀어나오건 말건 앞으로 밀어버립니다. 이러다 보니 자연스레 실루엣도 망가지고, 디테일의 완성도도 뒷전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냥저냥 무난하게 개발중이던 그랜드 카니발은 롱바디 개발로 끝을 내버렸지만, 이미 충분히 크고 긴 로디우스로서는 그런 임시처방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던 겁니다.
게다가 자동차 디자인은 한두사람이 전담하는 게 아닙니다. 컨셉의 설정은 한두명의 천재가 해낼 수도 있지만, 이것을 라인에 올리기 위해서는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쳐야 시간에 맞출 수가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특정 시점을 넘어가면 알면서도 손을 못 대는 상황이 생깁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로디우스...라고나 할까요.
랜더링 스케치에서 튀어나온듯한 페이스나, 애써 고급스러운척 하기 위해 덕지덕지 발라놓은 옵션 덕에 추레하기 이를 데 없는 엉성한 디자인 완성. 그야말로 세계에서 가장 못생긴 차의 반열에 올라 마땅한 졸작이 완성되는 순간이었습니다. (짝짝짝)
여튼 로디우스 자체가 "켄 그린리의 관여작 중 최대의 실패작" 인건 맞지만, 이미 그가 손댈 수 있는 영역이 아니었던 겁니다. 아아, 법령은 무엇이고 규제는 또 무엇이길래. (퍽)
6. 그리고 앞서 언급된, "렉스턴 대신 무쏘의 후계가 될" D-100의 차례가 돌아왔습니다.
D-100 역시 켄 그린리는 자문 및 컨셉 담당으로 개발에 간접 참가했습니다. 사실상 이때부터는 컨셉을 잡아주는 역할을 제외하면 "이름만 빌려주는" 선이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지만 무쏘를 디자인한 공력이 어디로 간 건 아니었습니다. 켄 그린리는 단순한 선이 트랜드인 기존 디자인에 역행해, 강력한 캐릭터라인을 다수 사용해 시각적 이미지를 강조하는 스포티한 컨셉의 SUV 디자인을 완성시킵니다.
실제로 카이런의 컨셉트카인 SV-R을 보면 켄 그린리가 원래 추구하려 했던 디자인이 어떤 것이었나를 명확히 알 수 있습니다.
문제는 이때쯤 되면 쌍용의 기술력이 한계에 도달하기 시작한 시점이라는 겁니다.
무쏘와 뉴코란도 시절만 해도 벤츠제 파워트레인은 성능과 신뢰성, 지명도 면에서 라이벌을 압도할 수 있었지만, 2000년대 들어서 그런 기술적 매리트는 대부분 상쇄된 상황이었습니다. 벤츠에 대한 기술비 지급으로 인해 정작 RnD 투자에 인색할 수 밖에 없던 쌍용의 한계라고나 할까요.
게다가 쌍용이 (어쩔 수 없이) 고수하고 있던 프레임 보디 형태의 구형 섀시는 지탱공간과 케빈을 분리시켜, 같은 실내공간을 뽑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차를 더 크게 만드는 특징이 있습니다.
자동차 디자이너들은 이런 기술적 특징과 한계를 미리 파악하고 디자인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기술적인 도태와 구형 설계, 하나같이 켄 그린리가 추구한 "역동성" 의 발목을 잡는 요소들이네요.
결국 카이런은 켄 그린리의 구상보다 "높고 느린 차" 가 되었고, 여기에 조잡한 디테일들이 들어가면서 차의 디자인적 완성도를 대폭 하락시켜버렸습니다.
하지만 카이런 자체의 실루엣은 꽤 준수한 편입니다. 뉴 카이런으로 페이스 리프트 될 당시 보디 자체는 건드리지 않고 마스크와 엉덩이만을 적당히 손봤음에도 디자인에 대한 비난이 급격히 줄어든 것이 이를 입증하는 사례입니다. 결국 문제가 있었던 것은 세부적인 마무리이지 큰 틀은 아니었다는 반증이랄까요.
(이 로직은 로디우스 -> 뉴 로디우스에도 적용됩니다)
7. 코란도의 후속인 C-100역시 이런 절망적 루프에서 자유롭지는 못했습니다.
역시 컨셉 개발 단계에만 한정적으로 참가한 켄 그린리는 극단으로 루프를 뉘이며 실용성보다는 디자인을 추구하는 컨셉을 내밀었고, 차를 두 번이나 망치며 어느정도 공력이 붙은 쌍용 디자인 팀이 그럭저럭 (앞선 두 놈에 비해선) 봐줄만한 녀석을 만들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어떤 설명을 붙이건 동어반복이라 더이상 할 말이 없습니다.
㈜ Luthien's 망상공방 님의 블로그에서 퍼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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