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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滉 이황 1501~1570
이황 (조선 문신․학자) [李滉]
1501(연산군 7) 경북 안동~1570(선조 3).
조선 중기의 문신․성리학자.
이동설(理動說)․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 등 주리론적 사상을 형성하여 주자성리학을 심화․발전시켰으며 조선 후기 영남학파의 이론적 토대를 마련했다. 본관은 진보(眞寶). 자는 경호(景浩), 호는 퇴계(退溪) ․퇴도(退陶)․도수(陶搜).
좌찬성 식(埴)의 7남 1녀 중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태어난 지 7개월 만에 아버지를 여의고 편모 슬하에서 자랐다. 12세 때 작은아버지 우(堣)로부터 〈논어〉를 배웠고 20세 경에는 건강을 해칠 정도로
堣 땅이름우
〈주역〉 등의 독서와 성리학에 몰두했다. 1527년(중종 22) 진사시에 합격하고, 성균관에 들어가 이듬해 사마시에 급제했다. 1533년 재차 성균관에 들어가 김인후(金麟厚)와 교유했으며, 이때 〈심경부주 心經附註〉를 입수하여 크게 심취했다. 1534년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부정자로 등용된 이후 박사․전적․지평 등을 거쳐 세자시강원문학․충청도어사 등을 역임하고 1543년 성균관사성이 되었다. 1546년(명종 1) 낙향하여 낙동강 상류 토계(兎溪)에 양진암 (養眞庵)을 지었다. 이때 토계를 퇴계라 개칭하고 자신의 호로 삼았다. 1548년 단양군수가 되었다가 곧 풍기군수로 옮겼다. 풍기군수 재임중 전임군수 주세붕(周世鵬)이 창설한 백운동서원에 편액(扁額)․서적 (書籍)․ 학전(學田)을 내려줄 것을 청하여 실현했는데, 이것이 조선시대 사액서원의 시초가 된 소수서원(紹修書院)이다. 1549년 병을 얻어 고향으로 돌아와 퇴계의 서쪽에 한서암(寒棲庵)을 짓고 이곳에서 독서와 사색에 잠겼다. 1552년 성균관대사성으로 임명되었으며 이후로도 여러 차례 벼슬을 제수 받았으나 대부분 사퇴했다. 1560년 도산서당(陶山書堂)을 짓고 아호를 도옹(陶翁)이라 정하고, 이로부터 7년 간 독서․수양․저술에 전념하는 한편, 많은 제자를 길렀다. 1568년(선조 1) 대제학․지경연(知經筵)의 중임을 맡고, 선조에게 〈중용〉과 〈대학〉에 기초한 〈무진육조소 戊辰六條疏〉를 올렸다. 그 뒤 선조에게 정자(程子)의 〈사잠 四箴〉, 〈논어집주〉․〈주역〉, 장재(張載)의 〈서명 西銘〉 등을 진강(進講)했으며 그의 학문의 결정인 〈성학십도 聖學十圖〉를 저술, 선조에게 바쳤다. 이듬해 낙향했다가 1570년 병이 깊어져 70세의 나이로 죽었다.
溪上秋興 계상추흥 시냇가 가을 흥취
雨捲雲歸暮天碧 우권운귀모천벽
구름 흘러가고 비 걷혀, 저녘 하늘 푸르고
西風入林鳴策策 서풍입림명책책
서녘바람 숲에 들어 소슬히 울고 있네
溪禽忘機立多時 계금망기립다시
물새가 때 잊고서, 오래도록 서 있다가
忽然決起飛無迹 홀연결기비무적
홀연히 솟아올라 자취도 없이 날아가네
溪堂에서 우연히
국泉注硯池 국천주연지 샘물을 두손으로 움켜다 벼루에 붓고
閒坐寫新詩 한좌사신시 한가로이 앉아 새로 지은 시 쓰네
自適幽居趣 자적유거촉 그윽하게 사는 맛 스스로 즐기나니
何論知不知 하론지부지 남이 알든 말든 상관할 바 아니어라
善竹橋頭血 선죽교두혈
善竹橋頭血 선죽교두혈 선죽교 머리 위의 피
人悲我不悲 인비아불비 사람들은 슬퍼하지만 나는 슬퍼하지 않네
忠臣當國危 충신당국위 충신이 나라의 위기를 맞아
不死更何爲 불사경하위 죽지 않고 어찌하리
蕭蕭草蓋屋 소소초개옥 보잘것없는 초가 오막살이
上雨以旁風 상우이방풍 위로는 비가 새고 옆으로는 바람이 치네
就燥屢種狀 취조루종상 마른 곳을 찾아 가구를 옮기고
叛書故萊中 반서고래중 서적은 헌 상자 속에 거두네
陶山月夜詠梅 1 도산월야영매 도산 달밤에 핀 매화
獨倚山窓夜色寒 독의산창야색한
홀로 산창에 기대서니 밤기운이 차가운데
梅梢月上正團團 매초월상정단단
매화나무 가지 끝엔 둥근 달이 오르네
不須更喚微風至 불수갱환미풍지
구태여 부르지 않아도 산들바람 불어오니
自有淸香滿院間 자유청향만원간
맑은 향기 저절로 뜨락에 가득 차네
陶山月夜詠梅 2 도산월야영매 도산의 달밤에 매화를 읊다
步섭中庭月진人 보섭중정월진인
뜰을 거니노라니 달이 사람을 좇아오네
梅邊行繞幾回巡 매변행요기회순
매화꽃 언저리를 몇 번이나 돌았던고
夜深坐久渾忘起 야심좌구혼망기
밤 깊도록 오래 앉아 일어나기를 잊었더니
香滿衣巾影滿身 향만의건영만신
옷 가득 향기 스미고 달 그림자 몸에 닿네
陶山月夜詠梅 3 도산월야영매
도산 달밤에 핀 매화
晩發梅兄更識眞 만발매형갱식진
늦게 피는 매화꽃, 참 뜻을 새삼 알겠네
故應知我怯寒辰 고응지아겁한진
일부러 내가 추위에 약한 것을 알아서 겠지
可憐此夜宜蘇病 가련차야의소병
가련하다, 이 밤 내 병이 나을 수만 았다면
能作終宵對月人 능작종소대월인
밤새도록 달만 보고 있겠네
陶山言志 도산언지
自喜山堂半已成 자희산당반이성
기쁘게도 山堂이 벌써 반이나 지어졌으니
山居猶得免躬耕 산거유득면궁경
산에 살면서도 오히려 밭갈이 면할 수 있네
移書稍稍舊龕盡 이서초초구룡진
책 옮기니 차츰차츰 해묵은 책장 비어가고
植竹看看新筍生 식죽견견신순생
대나무 심었더니 볼 때마다 새 죽순 돋아난다
未覺泉聲妨夜靜 미각천성묘야정
샘물소리 밤의 고요, 방해해도 깨닫지 못하고
更憐山色好朝晴 경린산색호조청
사랑스런 山色은 맑은 아침에 더 아름답구나
方知自古中林士 방지자고중림사
이제야 알겠구나! 예로부터 숲속에 사는 선비는
萬事渾忘欲晦名 만사혼망욕회명
萬事를 다 잊고 이름마저 숨기려 했던 것을
晩步 만보 저녁무렵 거닐며
苦忘亂抽書 고망란추서
건망증이 염려되어 책들을 어지러이 뽑아 놓고서
散漫還復整 산만환부정
이리저리 흩어진 책을 다시 정리한다
曜靈忽西頹 요령홀서퇴
해는 문득 서쪽으로 기울고
江光搖林影 강광요림영
강에는 빛이 번쩍이고 숲 그림자는 들린다
扶공下中庭 부공하중정
대나무 지팡이 짚고 뜰로 내려가
矯首望雲嶺 교수망운령
고개 들고 구름재를 멀리 바라본다
漠漠炊烟生 막막취연생
밥짓는 연기 아득히 피어오르고
蕭蕭原野冷 소소원야랭
언덕과 들이 차가워 쓸쓸하구나
田家近秋穫 전가근추확
농가의 가을걷이 가까워지니
喜色動臼井 희색동구정
고을 방앗간에 기쁜 빛 도는구나
鴉還天機熟 아환천기숙
갈가마귀 돌아오니 절기 익어가고
鷺立風標형 로립풍표형
나뭇가지에 바람 불고 해오라기 우두커니 서있다
我生獨何爲 아생독하위
내 인생 홀로 무엇을 하고 있는지
宿願久相梗 숙원구상경
숙원은 오래도록 풀리지 않는다
無人語此懷 무인어차회
내 마음 속의 이야기 나눌 사람 아무도 없어
瑤琴彈夜靜 요금탄야정
고요한 이 밤에 거문고만 타본다
浮碧樓 부벽루
永明寺中僧不見 영명사중승부견
영명사에 스님은 보이지 않고
永明寺前江自流 영명사전강자류
절 앞에는 강물만 흘러가네
山空孤塔立庭際 산공고탑립정제
산은 고요하고 뜰에는 탑만 우뚝 서 있고
人斷小舟橫渡頭 인단소주횡도두
나루에 사람은 보이지 않고, 조각배만 매어있네
長天去鳥欲何向 장천거조욕하향
높은 하늘을 날아가는 저 새는 어디로 가나
大野東風吹不休 대야동풍취부휴
넓은 들에 봄바람은 끝없이 불어오네
往事微茫問無處 왕사미망문무처
지난일 아득하여 물을 곳 없고
淡煙斜日使人愁 담연사일사인수
뿌연 연기 속의 석양은 사람을 수심케 하네
부용봉
남쪽에 숨은 메가 구름 속에 반만 뵈니
부용봉 그 이름이 아름답기 짝이 없네.
그 주인 조진사도 연하에 벽이 있어
띳집 경영 오래건만 아직 이룩하지 못 했네.
벗을 그리워하다 懷人
외로운 이 자취가 이 세상에 사노라니
늘상 한스러움 친구가 적음이라.
마치 저 선학이 메 속에서 울었으나
화답하는 이 어이 그리 멀었던고.
텅 빈 이 골짜기 해가 장차 저물 때니
서로 허물하지 마라, 옛 시를 홀로 읊네.
백운동 白雲洞
(옛날에는 배호지라 불렀으니, 곧 그릇된 사투리다.)
청산녹수 절로절로 세속에 솟아 있으니
하물며 그 사이에 희디흰 구름이랴.
사투리를 버리고서 본 빛으로 돌리고저
내가사 임을 알리니 지령 응당 허하련다.
대를 심으며 種竹
이 군자는 주위에 없을 수 없으나
재배하여 실리기가 가장 힘드네.
어떻게 하면 쑥이나 약쑥과 같이
잘라내어도 다시 싹이 돋을까.
다시 두 수를 차운하다
再次二首
필마로 돌아와 옛 벗을 찾았는데
흰옷엔 아직도 낙양의 먼지 묻어 있네.
술 따르며 아직은 꽃 앞에서 취하고
산중의 첫 번째 봄을 저버리지 마세나.
꽃은 난간에 비치고 버들가진 연못을 쓰니
계곡과 산은 옛날과 다름이 없네.
다시 온 나그네인 나를 보고서
병들어 야윈 얼굴에 흰 머리털을 응당 비웃겠지.
놀이에 게으르다 倦 遊
아름다운 벗이 있어 나를 일찍 추천하여
나더러 권하기를 단구(금강산)에 놀라 하니,
그 뜻을 생각할 제 진실로 고마우나
어찌 이런 일이 걱정스럽지 않으리요.
내 이제 어이하여 고을살이 얻어 가서
신선세계 장한 놀이 꾀하려고 하리요.
국화를 심으며 種菊
십 년 동안은 서울에 심었고
이 년 동안은 군의 정원에 심었네.
어떻게 하면 고향 동산에도
산야의 운취가 생겨나게 할 수 있을까.
광영당 光影塘
작은 못 맑아 바닥까지 보이는데
하늘빛과 함께 구름 그림자 비치네.
다시 달이 못 가운데 비쳐지기를 기다리니
진실로 티 없이 맑은 경지 이루었네.
고산 孤山
어느 해에 귀신 도끼 굳은 바위 깨쳤던고.
천 길이나 우뚝 서서 흰 물굽이 걸터앉았구나.
한가한 사람있어 주인 되지 않았던들
고산이라 이 절경을 뉘라서 더듬을꼬.
경암 景巖
천 년 동안 물결 쳐서 아직도 그렇건만
중류에 높이 솟아 기세도 장할시고.
인생의 헛된 자취 허수아비 뜬 듯이,
뉘라서 이 가운데에 굳게 서서 견디리요.
선유동팔영
(仙遊洞八詠)(유성룡의 「영모록」에 청주 동편에 파관사와 선유동이 있어 천석이 절승하고 산중에는 거사 이령이 살고 있어 자호를 칠송이라 하였다. 선생과 대곡 성운이 모두 증시하였다.)
○ 송정에서 달을 기다리다
소나무를 심은 이는 일곱이라 하였지만
달을 벗해 선 세 사람 그림자 서로 기다리네.
천암만학 굽이굽이 옥계임을 깨달으니
한 항아리 술로써 밤새 함께 배회하리.
○ 엄암에서 수계하다
황희지의 산음에서 천고승사 전해 오니
그대 함께 종일토록 풍연을 구경토다.
예를 보나 이제 보나 모두들 묻지 말라,
바람 쏘이고 시 읊음이 자연을 즐겨함이니라.
○ 파관에서 중을 찾다
숲 속 옛길 끼인 매태 한가히 밟았으니
승방의 꽃과 나무 누구 위해 심었던고.
그 사이 스스로가 그윽한 취미 있으니
중 찾아 법 물으려고 여기 왔음 아니로다.
○ 황양에서 봄놀이하다
무릉도원 봄이 드니 햇빛은 다사롭네.
바위 꽃과 시내 풀은 자연 향기 뿜는 도다.
선유동 이제 와선 끼친 자취 아득하니,
나 불러 신선이라 해도 오히려 무방하리.
○ 사평에서 소를 먹이다
돌 꾸짖어 양이 되었나니 괴이고도 싱그러운 일,
소 타고 세속 도망함도 또한 사람 놀랐었네.
어이하여 내낀 들에 소치는 아이들은
비낀 양지 피리 한 가락 늦은 봄을 희롱함고.
○ 선동에서 학을 찾다
선유동 신선 새가 드물게 보이더니
그 이마는 붉디붉고 그 옷은 눈일러라.
그 어느 때 달 밝고 바람 맑은 밤이 되어
구름 사이 왕자진을 싣고서 돌아올꼬.
○ 화산에서 약을 캐다
선산에 신령한 비 내려 구슬 싹이 자라나니
이를 캐서 먹는다면 신선 된다 하는도다.
선옹에게 물어서 보력을 얻고자 하니
이 몸이 늙지 않고 효험이 길 것이로다.
○ 기탄에서 고기를 낚다
발길이 호서로 향하여 꽃 밟기를 게을리 하고
맑은 시내 흰 구름에 낚시를 드리웠네.
곁에 있는 사람들은 곰점(熊卜) 아니라 이를 건가
모래 위 흰 해오라기 멀리할까 두렵노라.
○ 김지숙 기(圻)의 운을 따라 차운하다
追次金止叔韻二首
(이때 김공이 도산원장이 되어 퇴계 선생의 문집을 간행함)
삼십여 년 만에 비로소 오늘 있으니
제공(諸公)들의 용공(用功) 깊음을 보리로다.
그대는 도(道)를 찾을 곳 없다고 빙자하지 말라.
천성(千聖)의 서로 전함도 다만 이 마음인걸.
밝고 밝은 지리(至理)는 예나 지금이 같은데
어찌 현우(賢愚)를 쫓음이 얕고 깊음 있으리요.
만일 여기서 부지런히 힘쓴다면
아마 선정(先正)들에 이어서 마음이 열림을 알리라.
『겸암선생문집』
○ 회포를 적어 퇴계 선생께 드림
書懷上退溪先生
총명도 점차 지난해와 다르오니
원공(元公)처럼 희성(希聖) 못함 부끄럼 깊소
까닭 없이 스스로 포기야 차마 하리까?
이제라도 죽기까지 잠심해서 힘쓰리다.
- 유운룡, 『겸암선생문집』
뇌정(雷霆)이 파산(破山)하여도
뇌정(雷霆)이 파산(破山)하여도 농자(聾者)는 못 듣나니
백일(白日)이 중천(中天)하여도 고자( 子)는 못 보나니
우리는 이목총명남자(耳目聰明男子)로 농고(聾 )같이 말으리.
□ 퇴계 이황 선생님의 先生自銘
生而大癡 생이대치
태어나서는 크게 어리석었고
壯而多疾 장이다질
장성하여서는 병이 많았네
中何嗜學 중하기학
중년에는 어찌 학문을 좋아했으며
晩何도爵 만하도작
말년에는 어찌 벼슬에 올랐던고
學求猶邈 학구유막
학문은 구할수록 멀기만 하고
爵辭愈嬰 작사유영 嬰갓난아이영
벼슬은 사양할수록 몸에 얽히네
進行之跲 진행지겁 跲 넘어질겁,넘어지다
세상에 진출하면 실패가 많았고
退藏之貞 퇴장지정
물러나 은둔하면 올발랐네
深慙國恩 심참국은
국가의 은혜에 깊이 부끄럽고
亶畏聖言 단외성언
성인의 말씀이 참으로 두려워라
有山嶷嶷 유산억억 嶷숙성할 억
산은 높이 솟아 있고
有水源 유수원원
물은 끊임없이 흐르는데
婆娑初服 파사초복
선비의 옷을 입고 한가로이 지내니
脫略象訕 탈략상산 訕 헐뜯을 산
뭇 비방을 무시하였네
我懷伊阻 아회이조
내 그리워하는 분 저멀리 있어 볼 수 없으니
我佩誰玩 아패수완
나의 패옥 누가 구경해 주리
我思古人 아사고인
내 고인을 생각하니
實獲我心 실획아심
실로 내 마음과 맞는구나
寧知來世 녕지래세
어찌 내세에서
不獲今兮 불획금혜
나의 지금을 좋아하지 않는다 하랴
憂中有樂 우중유악
근심스러운 가운데에 낙이 있고
樂中有憂 악중유우
즐거운 가운데에 근심이 있네
乘化歸盡 승화귀진
대화를 타고 죽어가니
復何求兮 부하구혜
다시 무엇을 구하리오
출처 :春破書軒
□ 도산십이곡(陶山十二曲)
이런들 엇더하며 뎌런들 엇다하료
초야우생(草野愚生)이 이러타 엇더하료
하물며 천석고황(泉石膏?)을 고텨 므슴하료
<언지(言志) 1 : 자연 속에 살고 싶은 마음>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랴?
시골에 묻혀 사는 어리석은 사람이 이렇게(공명이나 시비를 떠나) 산다고 해서 어떠하랴?
더구나 자연을 사랑하는 것이 고질병처럼 된 버릇을 고쳐서 무엇하랴?
연하(煙霞)로 지블 삼고 풍월(風月)로 버들 사마
태평성대(太平聖代)에 병(病)으로 늘거가뇌
이 듕에 바라는 이른 허므리나 업고쟈
<언지(言志) 2 : 허물없는 삶>
안개와 놀의 멋진 자연 풍치로 집을 삼고 밝은 달과 맑은 바람으로 친구를 삼아,
태평스런 세상에 자연과 더불어 늙어 가네.
이렇게 살아가는 중에 오직 바라는 일은 잘못이나 저지르는 일이나 없었으면 한다.
순풍(淳風)이 죽다하니 진실로 거즈마리
인성(人性)이 어지다 하니 진실로 올흔 말이
천하(天下)애 허다 영재(許多英才)를 소겨 말슴할가
<언지(言志) 3 : 인성의 어질고 순박함>
순풍(예부터 내려오는 순박한 풍속)이 이미 사라졌다 하니 이것은 참으로 거짓말이다.
인성(사람의 성품)이 본디부터 어질다고 하니 이는 참으로 옳은 말이다.
천하의 수많은 슬기로운 사람(영재)을에게 이렇게 확실한 것을 어찌 속여 말할 수 있을까?
유란(幽蘭)이 재곡(在谷)하니 자연(自然)이 듯디 됴해
백운(白雲)이 재산(在山)하니 자연이 보디 됴해
이 듕에 피미일인(彼美一人)을 더옥 닛디 몯하얘
<언지(言志) 4 : 자연 속에 살면서 임금을 잊지 못함>
그윽한 난초가 골짜기에 피어 있으니 듣기 좋아
흰구름이 산마루에 걸려 있으니 자연의 경치가 보기 좋구나.
이 중에 우리 임금님을 더욱 잊을 수가 없구나.
산전(山前)에 유대(有臺)하고 대하(臺下)애 유수(有水)ᅵ로다
떼 만한 갈며기는 오명가명 하거든
엇더다 교교백구(皎皎白鷗)는 머리 마음 하난고
<언지(言志) 5 : 자연을 멀리하는 현실 개탄>
산 앞에 높은 대가 있고, 대 아래에 물이 흐르는구나.
떼를 지어 나는 갈매기는 오락가락 하는데,
어찌하여 희고 깨끗한 갈매기(어진 사람)는 나로부터 멀리 마음을 두는고(이 좋은 곳을 떠날 생각만 하는가!)
춘풍(春風)에 화만산(花滿山)하고 추야(秋夜)에 월만대(月滿臺)라
사시가흥(四時佳興)ᅵ 사람과 한가지라
하믈며 어약연비(魚躍鳶飛) 운영천광(雲影天光)이야 어내 그지 이시리
<언지(言志) 6 : 대자연의 웅대함에 완전히 도취된 작자의 모습>
봄바람이 부니 꽃은 산에 가득 피어 있고, 가을밤에는 달빛이 누대에 가득하구나.
사계절의 아름다운 흥취가 사람과 마찬가지로다.
더구나 고기는 물에서 뛰놀고, 솔개는 하늘을 나니 흘러가는 구름은 그늘을 짓고, 밝은 태양이 빛나는 이러한 자연의 아름다움이 어찌 다함이 있겠는가.
천운대(天雲臺) 도라드러 완락재(玩樂齋) 소쇄(瀟灑)한듸
만권생애(萬卷生涯)로 낙사(樂事)ᅵ 무궁(無窮)하얘라
이 듕에 왕래 풍류(往來風流)를 닐러 므슴할고
<언학(言學) 1 : 독서하는 무궁한 즐거움>
천운대를 돌아서 들어가니, 완락재가 맑고 깨끗하게 서 있는데,
거기에서 많은 책에 묻혀 사는 즐거움이 무궁무진하구나.
이렇게 지내면서 때때로 바깥을 거니는 재미를 새삼 말해서 무엇하리?
뇌정(雷霆)이 파산(破山)하여도 농자(聾者)는 못 듯나니
백일(白日)이 중천(中天)하야도 고자(고者)는 못 보나니 고
우리는 이목(耳目) 총명(聰明) 남자로 농고(聾고)갇디 마로리
<언학(言學) 2 : 진리 터득의 중요성>
우레 소리가 산을 깨뜨릴 듯이 삼하더라도 귀머거리는 듣지를 못하며,
밝은 해가 떠서 대낮같이 되어 있어도 소경은 보지를 못하는 것이니,
우리는 귀와 눈이 밝은 남자가 되어서 귀머거리나 소경 같지는 되지 말아야 한다.(학문을 닦아 도를 깨우치며 살자).
고인(古人)도 날 몯 보고 나도 고인 몯 뵈
고인(古人)을 몯 뵈도 녀던 길 알페 잇네
녀던 길 알페 잇거든 아니 녀고 엇뎔고
<언학(言學) 3 : 옛 성현들의 삶을 따르려는 의지>
옛 성현도 나를 보지 못하고 나도 또한 옛 성현을 뵙지 못했네.
옛 성현을 뵙지 못해도 그 분들이 가던 길이 앞에 놓여 있네.
가던 길(진리의 길)이 앞에 있는데 나 또한 아니 가고 어떻게 하겠는가?
당시(當時)에 녀던 길흘 몃해를 바려 두고
어듸 가 다니다가 이제야 도라온고
이제나 도라오나니 년듸 마음 마로리
<언학(言學) 4 : 학문 수양에 대한 다짐>
그 당시에 학문에 뜻을 두고 실천하던 길을 몇 해나 버려두고
어디(벼슬길)에 가서 다니다가 이제야 돌아왔는가?
이제라도 돌아왔으니 다른 곳에 마음을 두지 않으리라.
청산(靑山)은 엇뎨하야 만고(萬古)애 프르르며,
유수(流水)는 엇뎨하야 주야(晝夜)애 긋디 아니난고
우리도 그치디 마라 만고상청(萬古常靑)호리라
<언학(言學) 5 : 학문 수양에 대한 변함없는 의지>
푸른 산은 어찌하여 항상 푸르며,
흐르는 물은 어찌하여 밤낮으로 그치지 아니하는가?
우리도 (부지런히 학문을 닦아서) 저 물 같이 그치는 일 없이 저 산 같이 언제나 푸르게 살리라.
우부(愚夫)도 알며 하거니 긔 아니 쉬운가
성인(聖人)도 몯다 하시니 긔 아니 어려온가
쉽거나 어렵거나 듕(中)에 늙는 주를 몰래라
<언학(言學) 6 : 심원한 학문 수양의 즐거움>
어리석은 사람도 알며 실천하는데, 그것이 쉬운 일이 아니겠는가?
성인도 다 행하지 못하니, 그것이 또한 어려운 일이 아니겠는가?
쉽거나 어렵거나 학문 수양의 생활 속에서 늙는 줄을 모르도다.
▶ 핵심 정리
▷ 작자 : 이황(李滉 ; 1501■1570)
▷ 출전 : <진본 청구영언>
▷ 종류 : 연시조(전12수)
□ 이퇴계에게 준 詩
早歲盛名君上國 조세성명군상국
暮年多病我荒村 모년다병아황촌
젊어 이름 날리는 그대는 서울에 살고,
늙어 병 많은 나는 깊은 산골에 사는 데,
那知此日來相訪 나지차일래상방
宿昔幽懷可款言 숙석유회가관언
이날에 그대가 날 찾음을 어찌 알았으리,
가슴에 오래도록 쌓인 회포 마음껏 풀어 보세.
才子欣逢二月春 재자흔봉이월춘
挽留三日若通神 만류삼일약통신
천재 소년을 이월 달 봄에 반갑게 만나,
갈길 만류하여 사흘을 함께 지내니 심신이 상쾌해,
雨垂銀竹捎溪足 우수은죽소계족
雪作瓊花裏樹身 설작경화이수신
은빛 대나무처럼 내리는 비는 내를 이루기 족하고,
옥같은 흰눈송이 내려 나무들을 감싸 주누나.
沒馬泥融行尙阻 몰마니융행상저
喚晴禽語景纔新 환청금어경재신
말발굽 진흙길에 빠져 길가는 데 방해되지만,
맑은 날을 노래하는 새소리로 경치 더욱 산뜻해.
一杯再屬吾何淺 일배재촉오하천
從此忘年義更親 종차망년의갱친
그대에게 한잔 술 거듭 권함을 어찌 적게 하리,
이제부터 나이를 잊고 道義(도의)로써 친해 보세.
<어휘>
早歲 : 젊은 나이 盛名 : 이름이 유명함
上國 : 일반적으로 중국에 대한 호칭이나, 여기서는 시골에서 서울을
부르는 호칭.
暮年 : 노년기, 인생의 末年 荒村 : 거친 산골 동네
那知 : 어찌 알리요. 那는 何의 시적 표현으로 많이 씀.
宿昔 : 이전, 평소에 幽懷 : 가슴 깊이 품은 생각
款言 : 터놓고 이야기 함 泥融 : 진흙
再屬 : 거듭 권함 (권한다는 의미일 때는 屬을 속대신에 촉으로 읽음)
何淺 : 어찌 적게 하리. 從此 : 이제부터, 여기서부
□ 妓女 杜香의 墓
妓女 杜香과 退溪 李滉의 悲戀(기녀 두향과 퇴계 이황의 비련)
이황(李滉-1501~1570 호,退溪,퇴계)선생이1548년 그의 나이 47세 일때 충청도 단양(丹陽) 군수를 제수 받아 10개월을 재직하였다. 이때 단양(丹陽)에는 두향(杜香)이란 관기(官妓)가 있었다.
두향은 본시 기녀가 아니었으나 5살 때 부모와 사별하고 퇴기(퇴기)인 수양모 아래서 자라 10살 때 기적에 올랐다고 전한다.
그는 얼굴도 뛰어나게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시문과 서화에도 특히 매화와 난초를 사랑했다고 한다. 그녀는 군수로 부임한 퇴계(退溪)선생의 고매한 인격과 심오한 학문에 감탄하여 수청기생을 자청하였다. 두향은 퇴계(退溪)선생에게 사랑의 증표로 여러 가지 선물을 드렸으나 청렴 결백한 그는 번번이 이를 물리쳤다. 그러나 두향(杜香)은 포기하지 않고 퇴계선생이 무엇을 가장 좋아하는지를 아전들에게 물어 매화를 무척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두향은 곧 많은 돈을 드려 수소문 끝에 매화 한 그루를 구했는데 그 꽃 빛이 희다 못해 푸른빛이 나는 진귀한 매화였다.
그 매화를 퇴계(退溪)선생에게 드리니 "나무야 못 받을 것 없지." 하고 그 나무를 동헌 앞에 심고 즐겼다. 그 후 퇴계(退溪)선생은 풍기(豊基) 군수로 옮겨가게 되었는데 이 때 매화나무도 함께 가져가서 도산 (陶山)에 심었다고 한다.
꽃잎이 아래로 드리운 수양매(垂楊梅 거꾸로 피는 매화)를 보고 지은 시는
도수매 倒垂梅
一花纔背尙堪猜 胡奈垂垂盡倒開
일화재배상감시 호내수수진도개
한 송이 꽃 약간 뒤돌아 피어도 오히려 의심스럽거늘
어찌하여 모두 거꾸로 드리워져 피었는고
賴是我從花下看 昴頭一一見心來
뢰시아종화하간 묘두일일견심래
그 까닭을 알고자 꽃 아래에서 살펴보니
머리 쳐든 한송이 한송이 꽃심이 보이네
다음은 퇴계 이황(退溪 李滉) 선생이 44세 때 매화를 보고 시로 읊은 작품
막고산(姑山) 신선이 눈내린 마을에 와
형체를 단련하여 매화 넋이 되었구료
바람에 맞고 눈에 씻겨 참 모습 나타나니
옥빛이 천연스럽게 속세를 뛰어 났네
이소(離騷)의 뭇 화초에 끼어 들기 싫어하고
천년이란 고산(孤山) 한번 웃음 웃네
제비봉과 금수산, 멀리는 월악산이 감싸고 있어 충주호 수운관광의 최절경지로 손꼽히고 있으며 퇴계 이황(退溪 李滉) 선생은 구담봉의 장관을 보고
碧水丹山界 淸風明月樓
벽수단산계 청풍명월루
푸른 물 단양과 경계를 이루는 이곳
청풍에는 명월루가 있다지
仙人不可待 怊悵獨歸舟 슬플 초(心+召) 슬프할 창(心+長)
선인불가대 초창독귀주
신선이 기다려 주지 않아
실망하고 홀로 배타고 돌아오네.
퇴계(退溪 李滉)선생은 죽기 전에 그 유언이 매화꽃에 물을 주는 것이었다 는 군요
선조3년(1570년) 12월8일 아침 시봉하는 사람에게 매화 화분에 물을 주라고 명한 뒤 저녁 5시에 편안하게 세상을 뜨셨다고 한다.
將軍峰(장군봉)에는 「삼도정(三嶋亭)」이라는 육각정자가 있는데 나룻배를 타고 이곳에 올라 시 한 수 읊으면 누구라도 신선이 된 듯하다. 일찌기 퇴계 이황(退溪 李滉)선생은
山明楓葉水明沙 三島斜陽帶晩霞
산명풍엽수명사 삼도사양대만하
산은 단풍잎 붉고 물은 옥같이 맑은데
석양의 도담삼봉엔 저녁놀 드리웠네.
爲泊仙楂橫翠壁 待看星月湧金波 (떼 사 木+査)
위박선사횡취벽 대간성월용금파
신선의 땟목을 취벽에 기대고 잘 적에
별빛 달빛아래 금빛파도 너울지더라
김시습(金時習 1435-1493자는 영경(悅卿)호는 매월당(梅月堂)만의 매화에 대한 아름다운 예찬이 깃들어 있는 매화시(梅花詩)는 다음과 같다.
花時高格透群芳 結子調和鼎味香
화시고격투군방 결자조화정미향
꽃 필 때의 높은 품격 꽃 중에 빼어나고
열매 맺어 조화하면 국 맛이 향기롭다.
直到終時存大節 衆芳那堪窺其傍.
직도종시존대절 중방나감규기방.
끝 날 때가 되어서도 큰 절개를 두고 있으니
여러 꽃들이 어찌 그 곁을 엿볼 수 있으리.
그는 누구보다도 매화의 품격과 조화를 사랑했던 사람이다.
풍기군수로 전근 간 퇴계(退溪)선생이 몸이 쇠약해져 사직하고 고향인 안동으로 돌아갔다는 소식을 들은 두향은 칠성당을 짓고 이황의 건강을 소원했으나, 이황이 죽자, 저승에서 다시 모시겠다는 일편단심으로 자신의 유해를 남한강 강선대(降仙臺 단성면 장회리 소재)에 묻어 달라는 유서를 남기고 26세 꽃 같은 나이에 생을 마감했다고 한다
그는 도연명의 시를 좋아했고, 그의 사람됨을 사모하였으며,
훗날 전원으로 돌아가기(歸田園)를 그토록 갈망했던 것은 소년시절 도연명(陶淵明 365~427)중국 동진(東晉)․송(宋)나라의 시인)에게서 받은 강렬한 인상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한다.
퇴계(退溪)선생이 열다섯 살에 처음으로 지은 가제(石蟹)라는 제목의 이 시는 동심이 그대로 묻어 있는 시라고 할 수 있다.
負石穿沙自有家 前行각走足偏多.
부석천사자유가 전행각주족편다.
돌을 지고 모래를 파니 저절로 집이 되네
앞으로 가고 뒤로 달리니 다리도 많구나.
生涯一국山泉裏 不問江湖水幾河.
생애一국산천이 불문강호수기하.
평생을 살아도 한 움큼의 산샘(山泉) 속이니
강호(江湖)의 파도치는 물이 그 얼마인지를 알지 못하네.
두향은 한편 퇴계(退溪)선생이 10개월 만에 단양골 원직를 떠나자
두향은 부화(富華)한 시중잡배(市中雜輩)와 어울리는 것이 그 어른의 인격에 대한 모독(冒瀆)이라 생각하고 아예 기적(妓籍)에서 물러 날 것을 결심하고 신임 사또에게 이황을 사모하는 몸으로 기생을 계속 할 수없다며 기적에서 이름을 없애 달라고 간청하여 기생을 면했다고 한다.
오로지 퇴계 선생만을 생각하고 그리워하면서 함께 노닐던 강변을 혼자서 거닐기도 하고,
수많은 사연들을 추억하면서 외롭게 살다가 나중에 퇴계(退溪)선생이 안동에서 타계하자 두향은 강선대(降仙臺)에 올라 거문고로 초혼가를 탄 후 일생을 마치면서 내가 죽거든 내 무덤은 강가에 있는 거북바위(龜岩) 옆에 묻어다오,
거북바위는 내가 퇴계 선생을 자주 모시고 가서 시를 말하고 인생을 논하던 곳이다. 라는 유언에 따라 400여년 동안 그 곳에 묻혀 있다가 충주 땜이 건설되어 수몰될 지경에 놓이자
퇴계의 15대손인 이 동준(李東俊)의 주선으로 1985년 지금의 신단양 제미봉 기슭으로 이장되었다. 그 때 비석을 세웠고. 비석에는 ‘杜香之墓’라 했는데, 이동은(李東恩) 퇴계 종손이 썼다 고한다. 두향의 존재가 인정되기까지는 너무도 많은 세월이 지났다.
그 묘가 충주댐 건설로 수몰될 뻔한 적이 있었다. 퇴계 선생의 후손이자 국학자인 고 이가원(李家源 1917~2000 한문학자. 경상북도 안동(安東) 출생) 선생이 생전에 두향 묘에 각별한 관심을 쏟았다. 그분이 전해준 말은
수몰(水沒)을 앞두고 고심하던 어느 날, 그분 꿈속에 두향이 나타났다. 두향은 "나를 그대로 두시오. 물에 잠겨서라도 이곳에 있겠소"라고 했다는 것이다. 곡절 끝에 지금 자리로 이장되긴 했으나 두향(杜香)의 일편단심(一片丹心)은 꿈속에서도 단호했다. 퇴계 선생이 임종(臨終)을 앞두고 남긴 말은 알다시피 "저 매화에 물 줘라"이다. 그 말에서 선생의 심중에 남은 두향(杜香)의 모습은 아리따운 모습일까 아니면 사랑하는 사람 생각에 지친 야윈 모습이었을까.
그 후 도산으로 옮겨진 두향(杜香)의 매화는 선조3년(1570년) 12월 8일 한서암(寒棲庵)에서 좌절(坐折)한 후에 매화도 함께 고사했다고 한다.
그 후로부터 단양 기생들은 강선대(降仙臺)에 오르면 반드시 무덤에 술잔을 올리고 놀았다고 한다. 그 이후 200년이 지난 어느 날 이광려 李匡呂, 1720~1783 본관 전주(全州). 자 성재(聖載). 호 월암(月巖) ․칠탄(七灘)조선 후기의 학자는 다음과 같은 시를 읊었다
외로운 무덤가에 누워있는데
물가 모래밭에는 붉은 꽃 그림자
어리어 있어라
두향의 이름 잊혀 질 때야
강선대 바위도 없어지겠지
지금도 잡초 우거진 두향(杜香)의 무덤이 단양에 남아 있게 되었다고 한다.
1976년 소설가 정비석(鄭飛石;1911~1991)은 그곳을 직접 찾아가 단양군수에게 충주댐이 완성되면 두향의 묘가 수몰 되니 이장 하여 줄 것을 청하여 현재의 안전 곳으로 옮겨졌다고 한다. 소설가 정비석이 쓴 명기 열전에는 두향이 죽령을 넘어 풍기로 찾아가 먼 발치에서 퇴계 선생을 바라보고 애정에 목마른 가슴을 안고 돌아오는 장면이 그려져 있기도 하다.
퇴계(退溪) 이황(李滉) 선생은
푸른 물은 단양의 경계를 이루고,
청풍에는 명월루가 있다.
선인은 어찌 기다리지 않고
섭섭하게 홀로 배만 돌아오는가.
라는 시로 거북 한 마리가 뭍으로 올라가는 형상의 구담봉(龜潭峰) 장관을 노래했다.
구담봉
名妓 杜香 죽음의 이야기
두향의 죽음은 두 가지의 소문으로 전해진다.
하나는 유서를 남기고 부자를 달인 독약을 마시고 죽었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소복을 입고 강선대 바위 위에서 뛰어내려 남한강에 투신하였다는 것이다. 워낙 물살이 급한 천탄(淺灘)이라 두향(杜香)의 몸은 사흘만에 강물 위로 떠올랐다고 한다, 꽃다운 나이에 스스로 생을 마감하였던 것이다.
마을 사람들은 두향(杜香)이 남긴 유언에 따라 생전에 그녀의 초당이 있던 자리에 무덤을 마련해 주었다. 처음에는 해마다 매화가 무덤 주위에서 피어나 봄소식을 알리곤 하였다고 전한다.
탁 트인 호수 저편으로 한눈에 이퇴계(李退溪)선생이 가장 좋아하였던 구담봉(龜潭峰)의 모습이 들어오고 있었다. 비록 강선대(降仙臺)는 수몰되어 물에 잠겼다고는 하지만 바로 이곳, 이 자리가 퇴계선생과 두향과 더불어 노닐고 감흥에 젖어 시를 읊고 재미있는 시간을 보낸 곳일 것이다.
구담을 노래한 사람은 이퇴계(李退溪)선생 뿐이 아니다. 조선의 대학자로 이퇴계(李退溪)선생과 쌍벽을 이루던 이율곡(李栗谷)도 구담봉(龜潭峰)을 지나며 다음과 같은 시를 남기지 않았던가.
땅을 울리는 듯 잇단 피리소리에 나그네 놀라 깨니
어지러이 떨어지는 가을 잎이 창을 두드리는 소리라네
알지 못하겠구나. 밤이 새도록 찬강에 내리는 비가
수척이나 높은 구봉을 가벼이 넘나드니
정비석(鄭鼻石)의 명기열전(名妓列傳)에는 노산 이은상(鷺山 李殷相,1903~1982)의 두향(杜香)에 대한 시는
두향아 어린 여인아 박명하다 원망치마라
네 고향 네 놀던 터에 조용히 묻혔구나.
지난 날 애국투사들 못 돌아온 이가 얼만대
강선대 노는 이들 네 무덤 찾아내어
술잔도 기울이고 꽃송이도 바친다기에
오늘은 가을 나그네
시 한장 주고 간다.
단양군수 수촌 임방(水村 任傍;1640-1724)은 두향시집(杜香墓詩)(任傍의 文集 수촌집에 수록)에서
一點孤墳是杜秋. 降仙臺下楚江頭
일점고분시두추. 강선대하초강두
외로운 무덤 하나 두추(두향)이라네
강 언덕 강선대 그 아래 있네
芳魂償得風流價, 絶勝眞郞葬虎丘
방혼상득풍류가, 절승진랑장호구
어여쁜 이 멋있게 놀던 값으로
경치도 좋은 곳에 묻어주었네
퇴계 선생은 말년에 아름답던 그 옛날과 두향을 그리워하며 지었을 것이라고 전해지는 시는
황券中間對聲賢. 虛明一室坐超然
황권중간대성현. 허명일실좌초연
옛날 책 속에서 성현을 만나보며
비어 있는 방안에 초연히 앉았노라
梅窓又見春消息. 莫向瑤琴嘆絶絃
매창우견춘소식. 막향요금탄절현
매화 핀 창가에서 봄소식 다시 보니
거문고 대해 앉아 줄 끊어졌다 탄식마라
기녀 두향(杜香) -김석
두향은 단양 기녀입니다
지금은 장회나루 건너 기슭에 옮겨 누워서
푸른 전설 남한강 흐르는 물 바라보고 있습니다.
杜香은 선생이 홀로 물가 거니실 때면
먼발치로 따르며 흠모했습니다.
선생이 하늘 길 가셨다는 풍문(風聞)의 날
매화분 옆 그녀 가슴에도
단양 하늘에도 눈이 내렸습니다.
가능하면 나를 강선대(降仙臺)
강선대 기슭에 묻어달라고
거문고 자락 밑에 글을 남기고
그녀는 몇 밤을 하현달이 이울도록
거문고 밤을 뜯었습니다.
님을 먼발치라도 따르며 바라보았던
짧은 세월 강물 위로 눈은 내리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눈보다 더욱 흰 그리움으로
흰옷을 갈아입었습니다.
존경하는 마음 사랑하는 마음으로
상례(喪禮)를 치렀습니다.
자국눈 사이 돌밭 골라 디디며
강선대 지나고
강기슭 잔설 위를 걸었습니다.
두 번 더 옥순봉 앞에서 넋을 놓다가
님 명복 빌고 빌었습니다.
이튿날 눈 위에 쓰러진 그녀 곁에는
一心이란 문양석 하나도 누워 있었습니다.
천 구백 팔십삼 년 햇살이 푸른 오월이었습니다.
단양부터 물길은 흘러서 목벌리 돌밭, 나는
검은 돌 속에 하얀 여인이
무릎 꿇어앉은 앉은 형상에
두 손을 곱게 모은 문양석 한 점 만났습니다.
흐르는 남한강 물에 곱게 씻어서
오월 햇살 섞어 품고 왔습니다.
송도 삼절 황진이가 세월이 흐른 뒤 자신의 첫사랑을 생각하며 지었다는 시
小栢舟 소백주 잣나무 배 황진이
汎彼中流小柏舟 幾年閑繫碧波頭
범피중류소백주 기년한계벽파두
저 강 한가운데 떠 있는 조그만 잣나무 배
몇 해나 이 물가에 한가로이 매였던고
後人若問誰先渡 文武兼全萬戶侯
후인약문수선도 문무겸전만호후
뒷사람이 누가 먼저 건넜느냐 묻는다면
문무를 모두 갖춘 만호후라 하리
이황이 이현보에게 보낸 차운시(次韻詩) 세 편을 판각한 시판이다.
이현보가 임강사에 우거하면서 노닐던 세 곳이 있었는데, 이황에게 편지를 부쳐 시를 써달라고 요청하였다. 그러나 이황은 몸이 편치 않아 그 부탁을 들어주지 못했다. 그러다 나중에 이황이 그 세 곳을 방문하여 노닐며 시를 지어 이현보에게 선물했다. 그러자 이현보가 그 시를 판각하여 이 시판을 만들었다. 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욕기교(浴沂橋)
아득히 먼 옛날 비파를 놓으며 말했던 사람 그립기만 하고
기수에서 목욕한다는 말에 뜻 맞아 소리친 성인의 감탄이 새롭네
이제는 다만 물러나신 재상께서 남은 흥취 좇아서
조용히 바람 쐬고 노래하며 늦은 봄을 즐기시리.
임선정(臨羨亭)
펄떡펄떡 헤엄치는 물고기 즐겁게 노닐어
작은 정자에 임하여 감상하느라 스스로 떠나지 못하신다네
고기가 아닌데도 이미 그 즐거움 알겠다던 장자의 말 믿어지고
그물 엮어 고기 잡고 싶었던 동중서의 말은 오히려 의심스럽네.
여사탄(如斯灘)
크나큰 변화의 도리는 깊고 넓어 잠시라도 멈추지 않지만
차고 비는 변화의 이치는 밝히기 어렵네
한가로이 와서 시험삼아 여울가를 향하여 보니
이 오묘한 여울이 진실로 성인의 마음 표현할 수 있었구나.
□ 퇴계 이황 명언 모음
○ 배우는 사람은 모름지기 심신(心身)을 수련해야 한다.
○ 일상생활에서의 언동(言動)에 보편타당성이 있으면
잘못이 없다.
○ 부귀는 뜬 연기와 같고 명예는 나는 파리와 같다.
○ 사람이 이성만을 중시하고 살아간다면 인간생활은 인정도
애정도 없는 삭막한 세상이 될 것이며 또 감성만으로
살아간다면 도덕과 질서가 무너지는 세상이 될 것이니
이성과 감성의 조화를 통해 삶을 지혜롭게 운영해야 한다.
○ 스스로의 힘으로 실천하지 않는 것은 자포자기와 같다.
○ 심신(心身)을 함부로 굴리지 말고, 제 잘난 체하지 말고
말을 함부로 하지 말라.
○ 알면서 실천하지 않는 것은 참된 앎이 아니다.
○ 마음이란 붙잡기 힘들어 한 걸음 움직일 때마다 움직인다.
○ 만 가지 이치, 하나의 근원은 단 번에 깨쳐지는 것이 아니므로
참마음 진실 된 본체는 애써 연구하는데 있다.
□ 장수 10계, 양생지법
○ 중화탕은 수십 종의 정신적 약재를
잘 달여서 꾸준히 복용해야 하지만,
화기환(和氣丸)은 필요할 때 한 알씩 복용해
즉효를 보는 것으로 곧 ‘참을 인(忍)’자를 말한다.
‘마음 위에 칼이 놓였으니 군자는 이로써 덕을 이룬다’는
것이다.
소인은 분함을 참지 못해 자신을 망친다는 게 그 중심 이론.
‘어른이나 아이 할 것 없이
기가 모자라거나 넘치는 데서
목이 메고,
가슴이 답답하며,
부대껴 헛배가 부르고,
온몸이 뒤틀려 마비가 오고,
괴로워서 입술을 깨물고,
이를 갈며 눈을 부릅뜨고 주먹을 쥐고,
얼굴이 붉어져 귀까지 빨개지고,
온 몸이 불같이 달아오른다.
이는 의원들도 고치지 못하는데
그럴 때마다 화기환을 한 알씩 먹이되
말이 필요 없고 입을 꼭 다물고
침으로 녹여 천천히 씹어 삼키게 한다.’
○ 건강하게 오래 사는 법’인 양생지법이 소개돼 있다.
중화탕이나 화기환과 달리 일상생활에서도
충분히 실천할 수 있는 내용인
양생지법은 10여 가지로 요약된다.
1소화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비장(脾臟)은
음악을 좋아하기 때문에 좋은 음악을 들으면서
식사하는 것이 소화에 좋다.
밤이 짧은 여름에는
밤늦게 먹거나 잘 씹어 먹지 않으면
비장에 무리가 생기며 소화가 잘 안 된다.
2 술을 마시면 기분이 좋아지고
혈맥이 잘 통하는 좋은 점이 있으나
지나치면 몸에 풍(風)을 일으키고
신장을 상하게 하고
장의 기능을 나쁘게 한다.
특히 배불리 먹은 뒤의 음주는 아주 나쁘다.
또 술을 급하게 많이 먹으면 폐를 상하게 된다.
술에 취해 깨지 않은 상태에서 목이 마르다고
물이나 차를 많이 마시면
술을 신장으로 끌어들이는 결과가 되어
허리가 아프고
다리가 무거워지며
방광을 상하게 해 다리가 붓고
팔다리가 굽는 병이 생긴다.
3 차(茶)는 언제든지 많이 마시면
하초(下焦․아랫배)를 허하고 냉하게 한다.
빈속의 차는 아주 좋지 않으며
배부를 때 한두 잔 마시는 것이 좋다.
4 앉은자리나 누운 자리에 바람이 통할 때
그냥 견디고 있으면 안 된다.
특히 노인들은 몸이 약하고
속히 허해서 풍이 들기 쉽고,
처음에는 못 느끼나
결국 몸을 해치게 되니
덥다 하여 몸을 식히거나
취했을 때 부채질을 하는 것은 좋지 않다.
5 음식을 만들 때 맵고, 짜고, 시고, 달고, 쓴맛을 적게 쓰면
심신이 상쾌하고 많이 쓰면 해가 된다.
신맛이 지나치면 비장을 상하고,
매운맛은 간을 상하고,
짠맛은 심장을 상하고
쓴맛은 폐를 상하고
단맛은 신장을 상한다.
6 어느 한 가지를 오래 쳐다보고 있으면
심(心)을 상하고, 혈(血)을 손(損)하며,
오래 앉아 있으면 비(脾)를 상하고 기를 손(損)한다.
오래 걸으면 간을 상하고
오래 서 있으면 신장을 상하고 골(骨)을 손(損)한다.
그러므로 어느 한 가지에 정신을 오래 쏟거나
몸을 고정시키지 말고 변화를 줘야 한다.
7 사람이 나태하고 몸이 나른한 것도
오래면 병이 되나니
기력을 쓰지 않아 운동부족이 되고
배불리 먹고 앉거나 누워 있으면 혈액이 침체된다.
항상 힘을 적당히 써서
생기와 피가 잘 통하게 해야 하는 것이니
이는 흐르는 물은 썩지 않고
문지방에는 좀이 슬지 않는 이치와 같다.
8 잠을 잘 때는 말하지 않는 것이 좋고
불을 켜놓지 않아야 한다.
누워 잘 때의 좋은 자세는
몸을 옆으로 하고 무릎을 굽히는 것인데
그래야만 심기가 평안하기 때문이다.
잠이 깼을 때는 정신이 흩어지지 않도록 몸을 펼쳐야 한다.
몸을 쭉 펴고 자면 악귀를 불러들인다.
9 머리를 자주 빗으면
풍을 예방하고 눈이 밝아진다.
그러므로 도가(道家)에서는
새벽에 일어나 항상 120번씩 빗질을 하는 것이다.
목욕은 자주 하면 심장과 배를 손상해서
권태로움을 느끼게 한다.
여름에는 사람들의 정신이 산만해
심장의 기능은 왕성하나 신장이 쇠하니
노소 불문하고 더운 음식을 먹어야
가을에 토사곽란의 염려가 없다.
뱃속은 늘 따뜻해야 좋은데
그러면 배에 병이 생기지 않고 혈기가 장성해진다.
10 한여름 더운 때라 하여 찬물로 세수하면
오장이 메마르고 진액이 적어진다.
찬 것을 많이 먹으면 시력을 상하며
냉한 채소는 기를 다스리기는 하나
눈이나 귀의 기능을 떨어뜨린다.
봄과 여름에는 일찍 일어나는 게 좋고,
가을과 겨울에는 늦도록 자되 해뜨기 전에는 일어나야 한다.
그러나, 닭 울기 전에는 일어나지 않는 것이 좋다.
길을 가다가 갑자기
도는 바람이나 번개, 천둥을 만나거나
날이 어두워지면 집안으로 피해 들어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심신을 상하는데
당시는 몰라도 오래되면 병을 얻게 된다.
11 혀 밑에는 두 개의 구멍이 있어 신(腎)과 통하였으니
혀를 천장에 대고 잠깐 있으면
진액이 절로 나와 입안에 가득할 것이니
이를 천천히 삼키면 오장으로 들어가고
기(氣)로 변해 단전(丹田)으로 들어간다.
12 두 손바닥을 마찰해 뜨겁게 한 뒤
눈을 닦으면 눈에 끼는 것이 없어지고
밝아지며 풍을 예방하고 신(腎)을 기른다.
이마를 손으로 문지르고
이마와 머리카락이 닿는 부분을 문지르면
얼굴에 광채가 난다.
가운뎃손가락으로 콧대의 양쪽을 문지르면 폐가 좋아지고
손바닥으로 귓바퀴를 문지르면 귀가 머는 것을 예방한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머리는 자주 빗어야 하고,
손으로는 얼굴을 문지르고, 이는 자주 마주쳐야 하며,
침은 항상 삼켜야 하고, 기는 마땅히 정련해야 한다”라고 했다
□ 퇴계문집중에서
旋思旋應 只是心之主宰 卓然在此 爲衆事之綱 則當下所應之事
선사선응 지시심지주재 탁연재차 위중사지강 칙당하소응지사
幾微畢見 四體黙喩 曲折無漏矣 所以能然者 蓋人心虛靈不測
기미필견 사체묵유 곡절무누의 소이능연자 개인심허영불측
萬理本具 未感之前 知覺不昧 苛養之有素 固不待件件著思
만리본구 미감지전 지각불매 가양지유소 고불대건건저사
而有旁照泛應之妙
이유방조범응지묘
<退溪文集>
일이 생겨 생각과 대응 할 때, 마음의 주재가 여기에 명확히 확립되어
있어서 뭇 일의 중심이 된다면, 대응하는 일에 처함에 미세한 낌새도 모두 드러나서 사지가 묵묵히 따를 것이고,
일의 세밀한 모든 곡절에 빠뜨림이 없게 될 것입니다.
능히 그렇게 할 수 있는 까닭은 바로 사람의 마음이 텅 비되
신령하며 이루 헤아릴 수가 없고, 온갖 이치를 본래 그 속에 갖추고 있으며, 사물과 감응하기 전에도 지각이 어둡지 않고 환하게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진실로 평소부터 그러한 고요하된 광명한 깨어있는 정신을
잘 배양해 왔다면, 한 건 한 건의 일마다 각각 생각하지 않더라도
두루 비추고 널리 감응하는 마음의 묘한 작용이 드러나게 될 것 입니다.
<퇴계문집>
□ 진정한 용기는
진정한 용기는 기세를 부려 억지 소리를 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허물 고치기에 인색하지 않고 의리를 들으면 즉시 따르는 데 있는 것이다
眞勇 不在於逞氣强說 而在於改過不吝 聞義卽服也
진용 부재어령기강설 이재어개과불린 문의즉복야
- 이황(李滉), 〈서답기명언논사단칠정(書答奇明彦論四端七情)〉, 《퇴계집(退溪集)》
해설
위 글은 사단(四端)․칠정(七情)과 이(理)․기(氣)의 문제에 대해 변론한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 1527~1572)의 편지에 퇴계(退溪) 이황 (1501~1570)이 답한 글에 있는 구절입니다. 고봉이 자신의 논의를 굽히지 않자 퇴계는 주자(朱子)의 용기를 예로 들었습니다.
“주자는 조금이라도 자기 의견에 잘못이 있거나 자기 말에 의심스러운 곳이 있음을 깨달으면 즐거운 마음으로 남의 말을 받아들여 즉시 고쳤으니, 비록 말년에 도(道)가 높아지고 덕(德)이 성대해진 뒤에도 변함 없었습니다.”
하물며 성현의 도를 배우는 길에 갓 들어섰을 때에는 어떠했겠느냐고 고봉에게 반문하며, 퇴계는 20여 년 아래의 젊은 후배에게 위와 같이 타일렀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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